단 한 장의 편지에 전쟁이라는비극적인 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참상 속에 내던져진 이유도 모른 채 총을 쥐고 상대를 겨누던 한 학도병이 남긴 편지에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맞선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 속에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생에 대한 갈망이 가늘지만 깊게 스며들어 있다. <포화속으로>는 그 편지 한 장으로부터 확장된 팩션 전쟁영화다. 어린 학도병이 겪었던 끔찍한 참상이 스크린에 재현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포화속으로>가 재현하고자 하는 건 참상 그 자체다. 그건 결코 추억이라는 단어로서 허용될 만한 가치를 품은 것이라거나 어떤 장식적인 환경으로서 수단화될 수 없는 것이다. 71명의 학도병이 다수의 북한군에 맞서 남진을 지연시켰고 이것이 전쟁의 전세를 역전하는데 대단한 공헌을 했다. 이것이 <포화속으로>라는 영화가 재현할 수 있는 사실의 영역이라면 <포화속으로>에서 가능한 연출은 그 사실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거나 혹은 인물이 바라보는 전쟁의 참상에 대한 충실한 감정적 이입이어야 한다.
긴 이야기를 할 것도 없이 단적으로 말하자면 <포화속으로>는 온전히 전쟁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전쟁 화보영화다. 극초반부터 현장감 넘치는 시가전을 연출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포화속으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전쟁이라는 현상 자체에 대한 본질보다 전장에 대한 연출에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리얼리티는 중요하다. 하지만 <포화속으로>에 담긴 전장의 풍경은 리얼리티라기 보단 과장과 포장에 불과하다. 색의 대비를 높이고, 현란한 핸드헬드를 동원한다 한들, 그 풍경에는 어떤 비장함이나 숭고함이 없다. 그저 군복을 챙겨 입은 배우들의 살아있는 화보집의 나열에 불과할 따름이다. 종종 들어서는 얄개드라마 같은 에피소드는 웃기지도 않다.
이건 성의 문제다. <포화속으로>는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를 스크린에 옮겨놓았을 때 어떤 수지타산이 가능할까를 계산한 영화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전쟁은 그 자체로서 비극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비극을 재현한다면 최소한 그 비극의 본질을 관통해야 한다. <포화속으로>에는 전쟁 이미지가 있을 뿐, 전쟁이 없다. 영화는 끝까지 전쟁놀이에 여념이 없다. 피난민들을 위해 다리를 폭파시켜서는 안 된다고 절실히 주장하던 장교가 지휘관의 명령에 체념한 뒤 폭파되는 다리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비장하게 걸어오는 풍경은 그 자체로 코미디다.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반공영화라도 찍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 텐데, 북한군 전차에 파란색 매직으로 ‘1번’이라도 적어주고 싶은 건 단지 시대가 하수상해서 그런 것일까.
6.25전쟁 중, 71명의 학도병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했다는 포항에서의 실제 전투를 극화한 <포화속으로>는 초반부터 현장감 넘치는 시가전 신을 연출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만 같다. 하지만 사실감 넘치는 전투신을 목격하기 보단 ‘전쟁 화보’를 구경하는 듯한 기분이다. <포화속으로>는 재현보다도 포장에 능한 작품이다. 물량공세를 퍼붓는 전장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좀처럼 긴박감이나 비장함을 발견할 수 없는 건 그 덕분이다. 캐릭터의 비장함도, 전쟁의 참혹함도, 하나 같이 흉내내기에 여념이 없는 것처럼 <포화속으로>는 전쟁의 껍데기를 두른 마초 화보 영화처럼 보인다.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반공영화라도 만들 심산이었을까. 그렇다면 북한군 전차에 파란색 매직으로 ‘1번’이라도 적어놓았다면 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을.
형제는 어려서부터 너무나도 달랐다. 예의 바르고, 성실하며, 똑똑하면서도, 운동까지 잘하는 형 샘(토비 맥과이어)은 어려서부터 집 안팎으로 자자한 칭찬을 받아왔다. 하지만 동생 타미(제이크 질렌홀)은 어려서부터 소문난 사고뭉치였다. 아버지는 이런 동생이 못미더웠고, 타미 역시 그런 아버지의 시선이 못마땅했기에 더욱 엇나가곤 했다. 성인이 되서도 형제의 삶은 엇갈렸다. 한 가정의 든든한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다하고, 아버지처럼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영웅 대접을 받는 샘의 현재와 달리 타미는 변변한 직업 없이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되는 신세다.
하지만 형제의 우애는 어긋나지 않았다. 샘은 언제나 넓은 마음으로 동생을 보살피고 타미 역시 그런 형에게 기대며 형제애를 지켜왔다. 타미가 가석방되는 날, 샘은 마중을 나가고 오랜만에 형제는 상봉한다. 하지만 형제는 다시 이별을 맞이해야 한다. 샘은 곧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을 떠날 예정이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였다. 샘의 송별과 타미의 환영을 위해 단란하게 식탁에 모였다. 하지만 식탁 위로 불화의 공기가 새어나온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못마땅한 핀잔을 던지고 동생은 이에 울분을 표한다.
<브라더스>는 제목 그대로 어떤 형제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는 보다 폭넓은 시야를 품고 있다. <브라더스>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자 전쟁에 관한 이야기다. 든든한 가장이자 아들이며 모범적인 시민이었던 샘은 아프가니스탄 파병 중에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끔찍한 경험을 겪어 나간다. 그 사이 샘이 비운 집안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날아들고 샘의 아내 그레이스(나탈리 포트만)는 깊은 상실 속에서 형의 공백을 채우듯 자신의 집안에 헌신을 다하는 타미와 은연 중에 모종의 감정을 공유한다. 하지만 서로의 현실적 관계를 직시한 두 사람은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는 내면의 갈등 속에서도 본능적인 이끌림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리고 두 사람과 가족은 또 한번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짐 세리단은 일찍이 <나의 왼발>과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통해 갈등과 위기에 놓인 가족들의 치유와 구성원의 성장을 그려냈다. <나의 왼발>이 정통적인 가족애에 관한 드라마라면 실화를 바탕으로 완성한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개인과 가족이라는 구성원이 사회적 부조리에 맞서는 가족주의적 연대를 그린다. <브라더스>는 가족이라는 형태에 대한 물음과 함께 체제적 폭력에 노출된 가족의 갈등이 결과적으로 가족의 품 안에서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를 드러내는 처방과 같다. 상반된 성격을 지닌 형제의 대비적인 삶은 아버지를 비롯한 주변의 평가로 이어지지만 동생을 아끼는 형과 형을 믿는 동생은 타인의 이해에 흔들리지 않고 서로를 배려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우애를 흔드는 건 바로 전쟁이다.
<브라더스>는 가족주의로 미장된 반전주의 드라마에 가깝다. 형제의 깊은 우애를 흔드는 건 그들을 둘러싼 현실이 아닌, 그 현실 밖에 놓인 전쟁이다. 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파국적인 현실 한가운데 내던져지는 동안, 가족들은 자신들에게 통보된 비극적 슬픔을 돈독한 연대로서 극복해낸다. 전장과 가정을 오가는 카메라는 두 환경의 대비를 통해 예고된 갈등에 예열을 가하는 동시에 고발적인 시선을 관객에게 주입해 나간다. 건강한 남자가 지독한 폭력의 중심에서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살피고, 결국 그 파괴된 본성이 가정에 이입되며 벌어지는 일련의 파국을 통해 가정의 근간을 흔드는 체제의 부조리를 묘사한다. 전쟁의 폐해가 평온한 가정을 뒤흔드는 과정을 살핀다. 이는 현재 전세계의 전장 위로 두 발을 딛게 된 미군 청년들의 현실을 되새기게 만드는 현실적 대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체제의 야심이 가정이라는 작은 집단에까지 깊은 상흔을 남김을 보여줌으로서 개인과 사회라는 관계의 함수 안에 매몰된 개인들의 의식적 각성을 유도한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경험한 사내의 파괴는 곧 가족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사회적 피해로 발전한다. 하지만 <브라더스>는 결국 그것을 치유하는 것 역시 가족이라고 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정의 외벽에 놓인 부조리가 가족을 위협할 때, 그것을 이겨내는 건 결국 가족의 몫이다. 이는 가족의 의무를 지적하는 것이 아닌, 그 부조리의 악순환을 고발하는 역설과도 같다. 짐 셰리단은 누가 가족의 요람을 흔드는가, 라는 질문 앞에 <브라더스>를 통해 진중하게 답변하고 있다. <브라더스>는 갈등의 양상을 첨예하게 연출하며 깊은 서스펜스를 이끌어내고 이를 연민의 페이소스로 승화시킨 뒤 묵직한 성찰을 이끌어낸다. 미묘하게 흔들리다 이내 진동하던 관계는 결국 가족의, 형제의 이름으로 표하는 연민과 애정을 통해 잠잠해진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는 높은 기여도를 자랑하는 대목이다. 특히 토비 맥과이어는 <브라더스>를 통해 전례 없는 깊이와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다.
자신의 심장을 겨누는 탄환의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자신의 몸을 찢이길 폭탄 위에 서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라크 한복판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미군 가운데서도 EOD(폭발물 전담 제거반)는 모든 생의 조건을 내걸고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직책이다. 정체가 불확실한 폭발물이 발견된 현장에서 그들은 생존에 대한 갈망마저도 잠시 내려놓듯 숨을 죽이고 눈 앞에 놓인 공포와 매일 같이 대면해야 한다. 긴박한 임무의 연속 안에서 감각은 무뎌지고, 되레 공포는 잦아드든 것 같지만 종종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터져나오는 실전 상황을 대면하다 보면 잠자듯 죽은 공포가 자신의 온 몸을 지배한지 오래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최근 개봉된 <그린 존>의 핸드헬드가 현장감의 간접적 체험을 가능케 하는 쾌감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허트 로커>의 핸드헬드는 불안에서 야기되는 심리적 통증의 끊임없는 주입에 목적을 두고 있다. <허트 로커>의 핸드헬드는 <클로버필드>의 그것과 동일하다. 보이지 않는 실체를 찾아 두서 없이 고개를 흔들어 대는 카메라는 끊임없이 불안한 심리를 수집해 낸다. 그 불안한 심리는 참혹한 현상의 목격을 대면할 것이라는 불안의 징후를 파편처럼 쏟아낸다. 폭발물을 처리하는 EOD대원들의 동선을 따라 좇는 그 영상을 끊임없이 목격해야 할 관객들은 그 영상을 통해 통증과도 같은 긴장을 대면해야 한다. 현장감의 재현은 (어쩔 수 없이) 체험적인 쾌감을 동반한다. <허트 로커>의 현장감 또한 그 쾌감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최대한 쾌감에서 거리를 둔, 끝없는 통증의 환기라는 점에서 다른 차원의 의미가 확보된다.
거친 질감의 입자가 떠도는 스크린의 핸드헬드 영상은 이라크 바그다드의 풍경을 흔들며 영화로 들어선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응시하며 잡담을 나누는 미군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시내 한가운데 매설된 폭발물을 해체하러 온 폭발물 전담 제거반이다. 이런 현장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농담을 나누지만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새어나온다.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 부풀어 오른 긴장감이 도처에서 웅크리고 있다. 그 시야에 포착되는 모든 상들은 의심스런 징후로 포착된다. 긴장을 감춘 표정으로 농담을 나누지만 주변의 작은 움직임 앞에서도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역력한 긴장감이 새어 나온다. 예감은 현실이 된다. 비극에 대한 의심은 곧 목격으로 돌변한다. 터져나간 폭탄은 선혈이 가득한 주검을 남기고, 여유를 위장하던 대화는 절규로 변질된다. <허트 로커>는 바로 그 공포의 현장 한가운데 놓인 덕분에 자신이 유지할 수 있는 생의 너비를 확신하지 못하고 탈출을 꿈꾸거나 그 의식에 매몰된 인간들의 심리를 첨예하게 파고 든다.
‘포스트 9.11’ 시대를 맞이한 미국영화들은 그 날의 테러리즘으로부터 잉태된 공포의 성장과 전이를 끊임없이 주시해 왔다. 뉴욕에서 폭발한 테러리즘의 불씨는 전쟁으로 번져 나간 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도 이라크의 도처에 살아남아 타오르고 있다. 이라크는 화약고 같은 땅이다.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에게도 그곳은 위협이 매설된 공포의 지뢰밭이다. <허트 로커>는 이라크를 점령했다 말하는 미 정부의 발표와 달리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는 미군 병사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에게 이라크는 주둔지라기 보단 감옥이다. 그들은 항상 자신이 당장 보고 있는 풍경이 생의 마지막 목격이 될지도 모른다는 잠재적 위협에 시달린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 그 통증은 곧 잊을 수 없는 쾌감으로 변질된다. 마치 체내에 흡수된 뒤, 축적될 뿐 배출되지 않는 중독성 물질처럼 전장에서의 긴장감이 생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삶을 꿰찬다. 이는 결과적으로 무시무시한 불행이다. 영원히 그 현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포 속을 떠도는 유령의 삶으로서 개인은 철저히 속박된다.
공포는 마음으로 감지되는 통증이다. 뇌를 통한 사고적 판단 이전에 감각을 통해 전이되며 감각적으로 반응된다. 뇌의 판단이나 신경의 전달보다도 빠른 육체의 떨림과 경직으로 예감되는 긴장을 통해 본능적으로 환기된다. 지각과 사고로서 전달되는 전기 신호이기 이전에 자율신경의 반응이다. 전쟁은 공포다. 인간은 명분을 걸고 전쟁을 수행하지만 그 현장에 놓인 인간은 끝없는 공포와 싸우며 생존에 대한 욕구를 되새김질한다. 실리나 정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전쟁을 결정하는 자와 전쟁을 수행하는 자 사이에는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통증의 간극이 자리한다. 그 자리에 서는 순간, 생의 시계는 움직임을 보류한다. 그리고 그 공포에 노출된 이들은 서서히 잠식당하듯, 그 공포에 무뎌짐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 그 긴장의 역치 상태에 중독된다.
거대한 폭력의 목격과 체험을 통해 개인의 모든 삶이 파괴되고 증발되며 남은 것은 결국 공포 속에서 거듭 분비된 아드레날린의 과잉적 효과에 예속돼버린 어느 개인들의 삶이다. 전쟁이 멈추지 않는 이상, 그 중독도 결코 멈출 수 없다. 그렇게 개인들은 체제가 만들어낸 거대한 음모적 현실 안에서 자각조차 잊은 채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나간다. <허트 로커>는 여전히 달궈지고 있는 화약고와 같은 위태로운 현실을 겨냥하며 그 현실 위에서 파편 같은 긴장 속을 통증처럼 받아들이는 누군가의 삶을 주시한다. 죽을 수 없지만 사는 것도 아닌, 살아있는 시체들의 땅 위에서 진짜 진실을 목격하기 위해 카메라는 쉼없이 흔들리고 달려 나간다.
2003년 3월 19일, ‘충격과 공포’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미군은 전폭기를 동원해 바그다드 상공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했다. 미군의 총공세로 바그다드는 초토화됐고 미군의 진격으로 도시는 점령됐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명목으로 이라크에 무력을 행사했고, 정부를 무력화시켰다. 부시는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지만 상황은 끝나지 않았으며 애초에 그것은 전쟁처럼 시작되지도 않았다. 미국이 주장했던 대량살상무기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그 허구적 주장이 대량살상의 참상을 만들어냈을 뿐이다.<그린 존>은 명확하게 그날을 재현하는 데서 출발한다.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을 연출하며 확고한 팬덤을 형성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다시 한번 맷 데이먼을 앞세워 ‘진짜’ 미국의 치부를 들춘다.
로이 밀러(맷 데이먼)는 제이슨 본의 이란성 쌍둥이 같은, 다르지만 유사한판본이다. 그는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수색하는 ‘MET-D’ 팀에서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미육군 소위다. 정부의 주장대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음을 의심치 않는 그는 매번 ‘정보와 현장 상황이 다른’ 임무수행 과정을 겪어나가며 점차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종의 확신을 통해 상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에게 돌아오는 건 ‘이행할 뿐, 분석의 의무가 없다는’ 상관의 냉소적인 답변 뿐이다. 하지만 밀러가 품은 의혹은 더욱 짙어지고 이를 눈여겨보던 CIA요원 마틴 브라운(브렌단 글리슨)은 그에게 모종의 제안을 던지고 진실의 은폐를 도모하는 국방부 요원 파운드스톤(그랙 키니어)이 그들의 행보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어디에서도 증명되지 않았다.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 아래 명분은 온전히 퇴색됐다. 9.11 테러가 만들어낸 트라우마로부터 달아나듯 이라크를 공격하고 스스로를 위무하듯 그승리를 자축하던 미국은 그 뒤로 깊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수렁에 빠졌다.그리고포스트 9.11이후, 그로부터 잉태된 파괴적징후는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동어반복적으로 지적되고 보다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왔다. 그런 면에서 사실그모든 징후들의 시발점이 된 그날을 되새김질하며 그 뒤에 자리한 음모론을 폭로하는 건 분명 새삼스러운 일이다. 이미 지난 9.11테러와이라크전으로부터 생산된징후들은 수 차례에 걸쳐 관찰되고 진단되어 왔으며 그 재현 방식 또한 다양한 형식을 빌려 보다 너른 텍스트로 확장돼 왔기 때문이다.
미군의 이라크 점령 이후로 7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계평화와 독재의 타도를 위한 이라크 점령을 주장한 미국의 해명을 여전히 무색하게 만드는 사안이다. 이라크 전쟁은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미국의 ‘세계평화’적 결의가 아닌 ‘석유전쟁’의 일환이라는 것도 공공연하게 제기된 진실이나 다름없다. ‘대량살상무기’의 제거가 아닌 ‘석유’의 수급을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했다는 설은 공공연한 사실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를 끊임없이 부인하는 당사자들이 존재하는 한, 사실은 사실로서 확증되지 못한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그린 존>이 그려내는 풍경은 분명 새삼스럽지만 그 풍경 너머의 현상은 여전히 유효한 사건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그린 존>을 통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되묻고 있다. 2003년에 벌어진 참상은 2010년의 현실에서도 미결의 과제인 것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현장감을 연출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자랑하는 감독이다. 두 편의 <본> 시리즈를 비롯해서 <플라이트 93>과 <블러디 선데이>를 통해 선사한 현장의 이미지는 가히 체험적인 감상을 제공한다. 역동적인 핸드헬드와 긴박감을 제공하는 빠른 컷의 전환, 그리고 적절하게 치고 빠지며 찰나의 몰입을 도모하는 줌 인의 타이밍. 폴 그린그래스는 특유의 장기를 활용해 <그린 존>에서 전장의 사실감을 극대화시킨다. 미군의 바그다드 폭격신이 등장하는 도입부부터 대량살상무기 수색에 나서는 미군의 시가전을 다루는 초반부부터 현장감을 극대화시킨 연출을 통해 극에 대한 몰입도를 극대화시킨다.
<그린 존>을 통해 사실적인 전장을 묘사하는 폴 그린그래스가 목표한 것이 단순히 그 현장성의 재현이었다 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린 존>은 그 재현 자체만으로도 다이렉트한 쾌감과 명확한 감상을 발생시키는 작품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린 존>의 야심은 그 현장감의 재현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린 존>이 재현하는 긴박한 현장감은 결과적으로 그 현장의 기저에 웅크리고 있는 음모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키워드나 다름없다. 관객은 <그린 존>이 부여하는 리얼리즘의 시선을 통해 진짜 진실의 너비를 함께 목격한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볼모로 둔 그 참혹한 현장의 진실을 향해 날렵하게 움직이되 첨예한 시선을 유지해낸다. 위기일발의 전장을 누비는 미군들과 그 안에서 매일같이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라크인들의 참상과 대비되는 ‘그린 존’의 과소비적인 정경은 이 세계의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뼈 있는’ 풍경이다. 정의와 평화의 이름을 내건 강대국의 대의적 논리가 세계의 질서를 유린하고 인간 개개인의 삶을 농락하는 소수 권력자의 야욕임이 고발한다.
<본> 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그린 존>은 그 모든 부조리가 잉태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부조리의 청산을 주장하고설득한다. 음모론의 대가토니 길로이의 각본에 비해 <그린 존>이 설계한 음모론의 그물망은 보다 평면적이지만 폴 그린그래스의 사실적인 연출력과 맷 데이먼의 우직한 표정은 진실의 무게감을 훼손하지 않은 채 진실로 전진하는 날카로운 눈과 단단한 두 다리를마련했다. 이라크의 현실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 시작점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본>시리즈를 통해 말했던 것처럼 모든 딜레마의 출발점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그린 존>을 통해 첨언하고 있다.첫 단추를 잘못 채운 누군가가 이를 바로잡지 못할 때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정확하게 다시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린 존>은바로 그 의미의 원점을명확하고 통쾌하게 관통한다.
구약성서 사무엘상 17장 48-51절은 이스라엘 민족과 블라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진 엘라 계곡에서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블라셋의 거인전사 골리앗을 물매(새총)로 물리쳤다는 이스라엘의 청년영웅 다윗을 그린다. 성서를 통해 전승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그 이후로 현세까지 수많은 이야기꾼들에게 영감을 주며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2003년, 800여 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이라크를 초토화로 만든 미군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이후, 미국은 국제질서를 지키겠다는 명목 하에 자국의 청년들에게 총을 쥐어준 채 먼 이국 땅으로 밀어 넣었다. 성경구절에 등장한다는 그 전장을 적시한 <엘라의 계곡 In the valley of Elah>은 외박을 나갔다 사라진 아들을 추적하는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의 시선을 통해 먼 타국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조우를 소환한다.
군수사관 퇴역장교인 행크 디어필드(토미 리 존스)는 ‘다리가 부러져도 점호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소신에 입각해 두 아들을 모두 군대에 보냈으며 군에서 큰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라크에 파병됐다 귀환환 둘째 아들 마이크(조나단 터커)가 외출 후 미복귀 탈영 중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직접 아들의 행보를 수사하고 추적해나가던 행크는 결국 암담한 현실과 대면하며 그 현실의 뒤편을 추적하다 자신의 뿌리깊은 소신마저 뒤흔들만한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포스트 9.11 이후, 미국과 중동의 갈등관계를 묘사한 작품들은 차고 넘치게 등장했으며 그만큼 그 관계의 폭력성과 이로 인한 증후군에 대한 성찰도 낡고 고루한 것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엘라의 계곡> 또한 마찬가지다. 이라크로 파병됐다 돌아와 실종된 아들 마이크를 뒤쫓는 행크가 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수집해나가는 건 먼 이라크 땅에서 아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적인 경험들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라크 땅에서 죽음과 직면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은 결국 그 공포에 맞서기 위해 괴물로 자라난다. 결국 행크가 찾게 되는 건 아들이 아닌, 아들의 괴물 같은 시절이다.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상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 견뎌야 했던 끔찍한 비극을 목도하고 자신들이 서있는 현실의 안위가 무엇을 밟고 서있는가를 극명히 깨닫는다. <엘라의 계곡>은 결국 거대한 세계적 음모 속에서 압사당한 어느 개인적 비극을 환기시킴으로써 그 세계에 깊게 뿌리내린 부조리의 실체를 벗겨내고 그 세계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엘라의 계곡>의 목적지가 그 성찰에 놓여있다면 그 목적지로 관객을 유도하는 표지판의 역할은 미스터리적인 추리극의 플롯에 있다. 사라진 아들의 행방을 뒤쫓는 아버지의 행보는 사건에 접근해나가는 흥미를 자아내는 가운데, 사건의 실체를 이루는 뒤편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점증시켜나가는 구실로서 진전된다. 또한 그 서사적 추이는 허구적인 연출력과 사실적인 정보력 사이의 균형을 잘 메워나가며 적정수준의 몰입도를 유지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엘라의 계곡>은 시종일관 서로를 팽팽하게 끌어당기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신경전을 벌이듯 캐릭터로서 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실질적으로 메시지 전달에 대한 목적성이 뚜렷한 <엘라의 계곡>에서 배우들의 연기란 그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권태로움을 덜어내는데 공헌한다. 특히 지혜로운 관록과 고집스런 원칙을 담아낸 냉소적 표정으로 보수적인 성찰을 도모하는 토미 리 존스는 <엘라의 계곡>에서 뛰어난 방패와 같다. 의욕이 넘치는 여형사 에밀리 샌더스를 연기하는 샤를리즈 테론의 혈기를 눙치면서도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아내인 조안 디어필드를 연기하는 수잔 서랜든으로부터 밀려오는 페이소스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줄여낸다.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지만 이라크는 꽤 위험합니다.” 어쩌면 <엘라의 계곡>은 먼 이국의 현실에 불과할지 모르기에 국내 관객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체에 담긴 지난한 희생을 가리키는 낡은 성조기의 조난 신호는 지정학적인 거리감을 더욱 선명히 구체화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실화를 모티브로 둔 작품-Inspired by actual events-이라는 점을 밝힐 때 그 허구에 담긴 진의는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국익을 위해 젊은 피를 요구하는 영화 속 미국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네 현실 역시 다를 바 없는 선택을 감행하고 있다.
그 땅엔 괴물이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국가적 영웅주의로 위장한 이 세계의 편협한 음모를 방조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 세계의 구성원 모두가 키워낸 비극적 산물인 셈이다. 엘라의 계곡에서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영광스러운 승전보 이전에 그 땅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그리고 그 피가 실로 누구를 위한 영광이었는지, 우린 지금 따져 물어야 한다.
만약이란 말은 부질없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뒤집어 가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불필요한 첨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아닌 허구 안에서 가정이란 유효한 착상이다. 논픽션이 아닌 픽션의 세상을 그리는 이야기꾼들에게 가정이란 발칙한 야바위이자 무궁무진한 떡밥이니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픽션으로 디자인된 논픽션의 세상, 다시 말하자면 영화로 이입된 현실의 역사를 전복시키고 깔깔거리는 유희다. 어쩌면 메가폰을 쥔 당사자가 쿠엔틴 타란티노란 사실만으로도 알만한 사람들에게 <바스터즈>는 싹이 노란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바스터즈>는 과감하게 돌진하는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를 뒤흔들어 능수능란한 유머로 발화시키는 타란티노적 시네마천국이다.
총 다섯 챕터로 구성된 <바스터즈>는 중심인물을 달리하는 챕터의 나열을 통해 사건을 범위를 빠르게 넓히고 영화적 세계관을 급속도로 확장해낸다. 1941년, 유태인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치는 독일군 나치의 한스 란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의 악랄한 만행과 유태인 소녀 쇼샤나 드레이퍼스의 탈출을 그리는 첫 번째 챕터는 나치를 살해하는 임무를 띠고 독일로 파견되는 미군, 일명 개떼들(Basterds)이라 불리는 알도 레인 중위(브래드 피트)의 특공대의 활약상을 그리는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간다. 그리고 성인으로 자라 파리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쇼샤나(멜라니 로랑)가 등장하는 1944년 6월의 세 번째 챕터에 다다라 앞선 두 챕터에서 별개의 동선으로 활동하던 캐릭터들의 교점을 형성하고 뒤따를 두 챕터를 통해 캐릭터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접합하던 영화는 궁극적인 본색을 드러내는 피날레를 향해 가속을 올려나간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와 영어까지, 총 4개국어가 동원되는 <바스터즈>는 그만큼 수다스럽고 떠들썩한 영화다. 브래드 피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독일과 프랑스에 주둔한 현지 유명 배우들로 이뤄진 캐스팅은 <바스터즈>의 현실성과 허구성을 이루는 양면적 자질이나 다름없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캐릭터들의 발성과 화음이 격차를 이루고 교차되거나 변환을 이룰 때, 유머와 서스펜스의 도화선에 불이 붙고 방류되듯 불거지는 사연은 급류처럼 진전된다. 또한 과감하게 전시되는 악의적 성격의 이미지는 예나 지금이나 타란티노의 영화다운 블랙코미디적 취향을 돈독히 다져나간다. 히치콕의 맥거핀 이론을 충실히 이행하는 몇몇 시퀀스는 비범한 서스펜스로 신을 지배하다가도 순발력 있는 제스처와 언어를 발휘해서 영화적 공기를 찰나에 변주해나간다.
“우리의 임무는 나치를 잡아들이는 게 아니라 싸그리 죽이는 거야.”알도 레인의 대사처럼 <바스터즈>는 정말 나치를 싸그리 죽여버리는 영화다. 허무맹랑한 허풍에 가까운 영화적 장면들은 근엄한 표정을 버리면서도 유희적 의식을 치르듯 진지하게 허구적 상황을 대면하고 펼쳐 보인다. <바스터즈>의 나치들은 역사적 죄인으로서 복합적인 죄의식의 형태를 드러내는 악인으로서 존재하기 보단 명확한 선악의 패가 나뉜 유아적 만화 속 악당처럼 단순하며 때때로 우둔하고 어리석거나 교활하다. <바스터즈>는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게 되는 알도 레인과 쇼샤나의 목표가 어느 수순까지 다다르는가를 지켜보는 것보다 그 목표에 접근하는 행위적 수단과 방식이 어떤 수순을 밟아나가는가에 관심을 둘 때 보다 유희적인 쾌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선악의 경계가 명확하면서도 장난끼가 다분한 인물들이 이루는 난장의 연속은 서사적 예측 범위에서 한 발자국씩 벗어난 결과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거짓된 역사를 과감하게 묘사해나간다.
<바스터즈>는 영화광이라 불리는 타란티노의 영화적 유희가 무엇을 동경하고 겨냥하는가를 저돌적으로 드러내는 하이퍼 픽션이다. 스크린이 녹아 내린 극장에서 연기에 영사된 쇼샤나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마치 호러적 광기를 연출하고, 극장을 채운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아비규환에 빠진 관객들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난장을 부추기다 거대한 허구적 단죄로 승화된다. 물론 <바스터즈>를 나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이루는 비범한 작품이라 치장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다만 <바스터즈>가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은 유희'라는 말을 영화로 증명하는 타란티노의 비범한 역작이란 것 정도는 인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적 세계관으로 이입된 현실적 부조리를 마음껏 쥐고 흔들며 조롱하는 <바스터즈>는 결국 타란티노가 지닌 영화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결과물이다.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로 상황을 비틀고 뒤흔드는 능수능란한 타란티노식 유머는 <바스터즈>에서도 강력한 쾌감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연극적 단죄마저 유쾌하게 거둔다. “아무래도 나의 최고 걸작이 되겠는걸.”알도 레인 중위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 자뻑마저도 유쾌할 정도로, <바스터즈>는 분명 재치 있는 야바위꾼 감독의 유쾌한 저항을 그리는 결과물인 셈이다.
과학기술의 진화 속도는 나날이 빨라진다. 그와 함께 과거엔 공상과학의 소재가 되던 이미지들이 현재에선 일상적 산물이 된다.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레 인터페이스도 변한다. 이미지의 변화는 중요하다. 화상전화나 터치스크린 따위가 더 이상 생소한 허구가 아니라는 건 구시대에서 SF적 이미지로 활용되던 산물들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단지 인간을 위협하는 로봇의 등장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킬 시대는 지났다. LA도심에 뒤엉켜 나뒹구는 변신 로봇의 시대에서 터미네이터의 존재는 희미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남았다는 사실이다. 우려먹든, 개조하든, 프랜차이즈의 수명이 유효하다고 판단될 때 한번이라도 시도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젠 주지사로 활동 중인 아놀드 슈왈츠네거의 왕림이란 점에서 기대를 모았으나 실질적으로 시리즈의 커다란 구멍이란 오명을 남긴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이하, <터미네이터3>)이후로 시리즈 자체가 무색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리즈는 다시 한번 전진을 선언한다.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Terminator salvation>(이하, <터미네이터4>)은 본래 원제에 포함된 ‘salvation’이라는 단어처럼 시리즈의 구원을 명령 받은 새로운 적자다. 미래의 예언적 영웅을 보존하기 위한 현재의 사투를 그려 온 지난 세 편의 시리즈는 비로소 시간을 지나 그 미래에 도달했다. 사실상 어떤 설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껍데기 구실을 하던 본질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결코 버릴 수 없는 아이템이다.
<터미네이터3>가 역대 작품 중 가장 형편없는 만듦새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 역할을 간과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위치에 있다. 말로만 듣던 ‘심판의 날(judgement day)’을 실시간의 상태에서 묘사하고 있다는 건 시리즈의 미래를 여는 교두보 역할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터미네이터4>는 그 이미지를 밟고 선다. 2018년, 심판의 날을 지휘하던 슈퍼컴퓨터 스카이넷이 만들어낸 인간들의 지옥 속에서 기계와 인간의 전쟁이 실시간으로 묘사된다. 더 이상 과거의 존 코너를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 전쟁을 이끄는 진짜 영웅 존 코너를 볼 수 있다. 물론 <터미네이터>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었던 아놀드 주지사 님의 순간이동 누드신을 추억으로 떠밀려 보내야겠지만.
서사의 완성 방향은 반대지만 <터미네이터4>는 흡사 <스타워즈>와 비슷한 노선을 걷는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나의 트릴로지를 완성한 이후로 서사적 공백을 채우는 트릴로지를 계획한다. 다만 트릴로지의 시간적 격차가 크다는 점에서 트릴로지 사이의 영상적 괴리감이 발생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이득을 보는 쪽은 <스타워즈>보다 <터미네이터>쪽이다. <스타워즈>가 프리퀄 형식의 서사를 뒤늦게 기획한 탓에 오히려 과거보다 영상기술적 성과가 낮은 미래의 이미지를 보유하게 된 것과 달리 <터미네이터>는 순차적인 서사의 흐름에 놓여있는 덕분에 이미지의 진화 방향에 따른 거부감에서 보다 자유롭다. 게다가 추격의 형태로서 액션장면을 연출하던 전자들과 달리 새로운 시리즈는 거대한 전투씬과 전쟁의 이미지를 그려 넣는다는 점에서 블록버스터로서의 너비가 과거에 비해 광활하다. 과거엔 묘사할 수 없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게 가능해졌다. 시리즈의 탄생 배경은 이런 기술 제반 조건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미지는 압도적이다. <트랜스포머>가 변신로봇 풀세트를 완비하며 로봇영화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아동 취향의 꿈을 대리 만족시키는 완구로봇의 실사적 성취감에 가까운 성과다. <터미네이터>의 로봇들은 이미지만으로도 인간에게 위협적인 디자인을 갖춘 살상병기란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보존한다. <터미네이터>는 단순한 액션블록버스터에 불과하지 않은, <에이리언>만큼이나 불길한 서스펜스를 발생시키는 스릴러적 취향의 SF영화다. 과거 아놀드 주지사님이 열연하던 시절, 반토막난 T-800 로봇에 추격당하던 사라 코너의 포복 장면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야기한 건 제임스 카메론의 연출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금속로봇의 날카로운 손이 주는 위협적 디자인도 중요한 원인이라 할만하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유사한 기시감이 발생한다. 존 코너(크리스찬 베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는 ‘T-800’의 등장신은 앞선 전례만큼이나 위협적이다.
<터미네이터4>에서 두드러지는 건 새로운 로봇들의 등장이다. 비행기 로봇인 ‘헌터킬러’, 바이크 형태의 로봇 ‘모터 터미네이터’, 물뱀형태의 수중로봇인 ‘하이드로봇’을 비롯해 거대한 ‘하베스터’까지, T시리즈의 인간모델로봇이 아닌 기계적 로봇들이 대거 등장하며 제각각의 쓰임새에 걸맞은 액션을 연출하고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대시킨다. 게다가 분리와 합체의 기능마저 전시하는 모습은 마치 <트랜스포머>의 성과가 남긴 유물처럼 인식될 정도다. 무엇보다도 과거 첫 번째 시리즈에서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미래에서 날아온 카일 리스의 꿈을 통해 짧게 보여지던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이미지가 온전히 펼쳐진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올드팬과 새로운 팬층 모두에게 흥미를 부를만한 지점이다. 육중한 전투씬과 거대한 폭파 장면, 그리고 스피디한 카체이싱과 공중전까지, <터미네이터4>는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괴적인 이미지를 과감하게 전시한다. 물론 단순히 스크린이 스펙타클을 담보로 한 전시관 역할로 기능성이 제한되는 건 아니다. 뛰어난 건 단지 영상을 만들어내는 기술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영상을 구현하는 연출력에 놓여 있다. 특히 일반적인 핸드헬드를 선택하지 않고 고정된 샷 안에서 존 코너의 상하가 역전되는 구도를 묘사하는 헬기추락신의 앵글은 이 영화의 탁월한 장면 연출력을 대변하는 이미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액션 장면들은 훌륭한 연출과 구성을 통해 하나같이 빛을 발한다.
물론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건 액션만큼이나 스토리다. <터미네이터4>는 ‘T-600’이 T-800’으로 진화하는 2018년을 배경으로 둔다. 기존의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T-1000’ 그리고 ‘T-X’와 같은 첨단로봇의 진화는 좀 더 뒤의 일이다. 이는 곧 <터미네이터4>가 어떤 시작점에 있는 이야기이며 시리즈의 가능성을 새롭게 재단해도 좋은 위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시리즈는 자신의 지난 발자취를 배려해야 한다. 저항군을 이끄는 존 코너와 마찬가지로 존 코너의 존재를 완성하는 카일 리스(안톤 옐친)의 존재는 시리즈의 숙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마커스 라이트(샘 워싱턴)의 등장은 <터미네이터4>의 선택이다. 존 코너만큼이나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커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엄성이 어디서 발생하는가라는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말과 같다. 동시에 마커스는 과거 <터미네이터>가 지속시켰던 규칙적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중요한 캐릭터다. 표적이 되는 인간과 표적을 쫓는 로봇, 그리고 표적을 지키는 로봇이라는 삼각 구도의 유지는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서도 가능해진다. 또한 마커스는 인간보단 로봇에 가까웠던 기존의 인간형 로봇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인간적인 고뇌가 뒤섞인 표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다. 다만 <터미네이터4>의 야심이 관건이다.
<터미네이터4>는 분명 서사의 활용도에 있어서 운명론을 배제할 수 없는 영화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단계에 착륙한 <터미네이터4>에게 선택의 여지란 많지 않다. 다만 어느 정도로 과감해질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마커스는 그 돌파구를 위한 일종의 열쇠다. 개봉 전 세간에 유출됐던 파격적 결말도 그런 가능성에서 출발한 하나의 결과적 형태였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안정을 추구한다.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기존의 인과율을 흔들만한 시도를 감행하느니 적절한 선에서 파격을 선사한 뒤 암묵적 룰을 따른다. 이는 기존 시리즈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방식이다. 구원자의 위치에 선 로봇의 퇴장은 시리즈마다 반복된 형태이므로 <터미네이터4>가 선택한 방식 또한 규칙을 준수한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터미네이터4>를 어떤 가능성 안에 가두는 태도처럼 보인다.
결국 <터미네이터4>는 마커스의 활용을 일회적인 수위에서 멈춤으로써 자신의 운명론을 공고히 다지지만 반대로 그 운명론에 철저하게 갇혀버렸다고 말해도 상관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이대로라면 결국 카일은 언젠가 과거로 보내질 운명이고, 존 코너는 미래에서 끝없이 진화하는 기계와 맞서야 한다. 정해진 운명론에 속박된 서사의 흐름이 경직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기존에 완성된 이야기 구도를 존중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마치 예언을 증명하기 보단 현실을 예언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다. 덕분에 시리즈 자체의 가능성이 얕아진 인상이다. 게다가 개별적인 작품 자체로서의 스토리도 조금씩 빈틈을 드러낸다. 인과관계를 배려하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심지어 중요한 설정을 설득할만한 배경 자체가 누락된 경우도 적잖게 눈에 띈다. 스토리텔링 자체가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지난 시리즈를 숙지하지 못한 새로운 젊은 관객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맥락이 존재한다는 건 오랜 세월의 공백을 둔 시리즈의 인과율에서 비롯된 급소다 .
분명한 건 기존의 시리즈가 발생시키던 묵시록의 기운이 이번 시리즈를 지탱하는 기반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이 시리즈가 가상의 서사로 전제하던 막연한 디스토피아의 운명론을 실시간의 현실적 이미지로 묘사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덕분이다. 비로소 존 코너는 미래를 위해 생존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미래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터미네이터4>의 의미는 그 지점에 있다. 언젠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리즈의 명성을 좌우하던 장기 역시 그와 함께 변한다. 묵시록의 예언은 하이브리드 영상으로 대체된다. 상상이 아닌 이미지가 시리즈를 지탱한다. 더 이상 형태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건 불필요하다. 물론 운명적으로 두 세계는 결착되어 도무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리즈는 자신이 설계했던 운명의 영토로 들어섰다. 존 코너는 미래의 불안과 싸우는 것이 아닌 그 미래에서 싸운다. 그 운명적인 단계를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운명을 주체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스스로 운명에 끌려간다. 개별적인 작품 자체의 결말을 지켜보는데 무리는 없겠지만 시리즈의 미래가 위태롭게 느껴진다. 돌파구를 찾아내기 보단 스스로 땅을 파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일시적인 업데이트엔 성공했지만 새롭게 설치된 메인보드의 장기적인 한계가 감지된다. 차후 업그레이드가 관건이다.
서구의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20세기, 호주는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어느 식민지가 그러했듯 영국의 소유가 된 호주의 원주민들은 백인 정복자들의 하수로 전락했다. 그 과정에서 ‘빼앗긴 세대(stolen generation)’가 탄생했다. 원주민 여성과 이주백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백인사회로 편입시키기 위해 원주민과 격리된 수용소에서 길러졌다. 그리곤 백인들을 위한 종으로 팔려가곤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서두에 등장하는 긴 자막이 가르키는 ‘빼앗긴 세대’에 대한 사연은 이와 같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그들을 언급하고 말하려 한다. 일단은 그렇다.
166분이라는 방대한 러닝타임만으로도 서사적인 너비가 느껴진다. 서사는 전후반의 구조로 나뉜다. 두 맥락의 서사를 관통하는 건 일관된 정서다. 박애와 사랑. 휴머니즘과 로맨스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거대한 천장과도 같은 서사를 떠받드는 정서적 기둥 역할로 구축된다. 거대한 스케일의 이미지들은 빛 좋은 포장지와 같다. 화려한 이미지가 벽화처럼 영화를 두른다. 롱숏에 담긴 거대한 풍광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드넓은 평원을 스크린 가득 담아내는 절경이 호화스럽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병풍을 두른 영화다. 유채색에 가깝게 대비된 색감의 톤이 더욱 적극적인 제스처를 발생시킨다. 카메라가 비추는 모든 것은 그림이 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 안에 인물을 담고 사건을 발생시킨다. 텍스트 이전에 삽화가 눈에 먼저 들어오는 책과 같다.
호주에서 목장을 경영하던 남편을 쫓아 영국에서 날아온 새라(니콜 키드먼)는 남편의 유지를 받아들여 1500마리의 소를 항구까지 몰고 가야 한다. 지체 높고 고상하기만 하던 새라가 문명의 이기를 깨닫고 로맨스에 이끌리는 과정은 전형적인 클리셰로 읽힌다. ‘몰이꾼’ 드로버(휴 잭맨)와 함께 1500마리의 소를 끌고 항구로 나아가는 여정은 서부 개척지로 나아간 영국 젊은 남녀의 모험과 로맨스를 그린 <파 앤드 어웨이>를 닮았다. 일본 전투기들의 대규모 공습이 펼쳐지는 후반부는 <진주만>을 연상시킨다. 이별남녀의 애틋한 로맨스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가로막히는 과정은 지극히 전형적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에 가깝다.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면서도 정서적으로 평이하다. 풍광의 스케일은 거대한 스펙터클을 이루지만 이야기에 더해진 감정적 울림은 정해진 너비를 움직이는 메트로놈처럼 일정하다. 비극도 희극도 그 간격을 철저히 유지한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공적으로 조율된 풍경이다. 넓은 평원과 호수 위를 미끄러져 날아가는 카메라의 숏엔 전시적 욕망이 철저히 반영됐다. 측면에 밀어 넣은 인물 너머로 그림 같은 풍경을 펼쳐놓은 컷엔 좋은 밑그림에 대한 욕심이 팽배하다. 이미지에 대한 욕망 위로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이야기는 정직하게 진행된다. 그만큼 볼거리는 충분하며 이야기는 순탄하다. 휴 잭맨과 니콜 키드만의 앙상블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감흥이 얕다. 감정의 진폭이 좁다. 이미지에 눈이 돌아가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영화라기보단 화보에 가깝다. 아름다운 회화적인 색감에 담긴 이야기는 깊은 공명을 부르지 못하고 찰나를 채울 따름이다.
‘빼앗긴 세대’에 대한 이야기임을 노골적인 자막에 실어 직시했지만 성찰의 여력은 앙상하다. 빼앗긴 세대에 대한 시선이 영화의 전반을 관장하는 주제라면 모험과 로맨스는 각기 전반과 후반을 지배하는 주요소재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사선을 넘고, 사활을 걸며, 희생을 불사하지만 그 과정의 긴장감을 도출하는 기능적 효과 이상을 넘지 못한다. 반라의 원주민 캐릭터를 내세워 영험한 신비를 전시하려 하지만 기이한 현상 이상의 설득력이 없다. 되려 맥락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연의 수단으로 남용하는 동시에 백치미스럽게 타자화된다. 지나치게 안이한 태도로 캐릭터를 장치해버린 인상이다.
사랑과 전쟁, 자연과 인간, 자유와 박애,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대륙의 너비만큼이나 방대한 대서사를 펼쳐 보이지만 그만큼 산만하며 개별적인 요소들의 집중력도 미약하다. 풍경은 아름답고 배우들은 훌륭하며 스케일은 거대하지만 정작 감흥이 없다. 방대한 서사엔 지극히 평범한 인상으로 가득하다. 물론 구도 자체만으로도 그림이 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다양한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호주 관광청에서 만든 홍보영상이 아니란 점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지만 어떤 비범함을 발견할 때 감흥도 커지는 법이다. 화려하고 거대한 무대와 좋은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진다고 해서 항상 훌륭한 연극을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든 것이 호화롭지만 어울리는 주인을 얻지 못해서 텅 빈 집처럼 허망하다. 물론 그 호화로운 집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주인 없는 집에서 손님 노릇을 하는 것처럼 어색한 것도 없다. 값비싼 장신구도 과도하게 착용하면 제 빛을 낼 수 없는 사치에 불과하다. 영화의 모든 요소들은 저마다 반짝이지만 제 능력을 지나치게 뽐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어울릴 줄 모른다. 비범한 것들이 저마다 지나친 빛을 내다 보니 되려 빛을 보지 못하고 평범하게 한데 모였다.
26마리의 개가 사납게 내달린다. 사나운 개떼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린다는 친구의 고백을 듣는다. 청자는 감독 자신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과거 이스라엘 군인으로서 레바논 전쟁에 참전했던 아리 폴만 감독의 자전적 성찰이다. 동시에 그 잔인한 기억에서 상실로 도피한 자의 뒤늦은 참회이자 치유다. 영화는 전쟁에 참전했던 퇴역 군인들의 현재 고백을 통해 과거를 되새김질하고 기억을 복원해나간다. 실화를 다루고 있지만 애니메이션의 형식을 취하는 건 <바시르와 왈츠를>이 재현하고자 하는 리얼리티가 어떤 이들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착시와 연동된 까닭이다. 비극을 목도한 이들의 심리적 공황과 정신적 상흔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환상과 실존의 이미지로 구현된다. 총격전이 펼쳐지는 도심의 도로 한가운데서 스텝을 밟으며 기관총을 사격하는 병사의 모습 위로 왈츠가 흐른다. 우아한 이미지 사이로 비통한 정서가 유유히 새어 나온다.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의 결과가 담긴 실제적 풍경이 등장하는 말미에 도달하면 그 모든 이미지의 정보가 얼마나 끔찍한 현실이었는지 적나라하게 환기된다. 승자도 패자도 소용없다. 살아남은 자는 지울 수 없는 업보의 여생을 떠안게 될 뿐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그 거대한 비극에 압사당한 인간 그 자체를 복원하고자 하는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