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리는 이렇다.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함.' 그런 의미에서 재벌가의 딸이 기백만원, 기천만원짜리 옷을 입고 다니는 건 물질적인 개념에서 사치가 아닐 수 있다. 돈이 이마에서 튀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뭔들 못하겠어. 세상을 멸망시키는데 돈지랄하는 게 아니라면야 있는 이들의 소비수준을 사치라고 말하는 입은 결국 무색해지기 마련이다. 쓸 수 있어서 쓰는 건 죄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재벌 2세가 누리는 화려한 생활이 마땅한 소비이고 정당한 권리인가라는 물음에 닿았을 때 문제의식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상그룹이라는 재벌가의 딸인 임세령이 몸에 걸친 의류의 가격대를 듣고 혀를 찰 것이다. 관련 기사를 써대는 찌라시들이 즐비한 것도 그런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임세령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이길래, 저런 자격을 갖추고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은 '그의 아버지가 그룹 회장이기 때문에'라는 '은수저 물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임세령의 소비는 정당하다. 하지만 그 소비를 손가락질하는 손의 심정도 이해한다. 돈이 있는 사람의 정당한 소비를 옹호하면서 그에 대한 질시의 여론을 무작정 비판하는 건 그저 손쉬운 일이다. 빈부 격차가 극대화되고, 부의 재분배가 가로막힌 사회에서 '재벌가의 손녀가 몇천만원 짜리 코트를 입는 게 잘못이야?'라고 일갈하는 건 그저 속편한 비판이다. 문제의 본질은 정당한 소비가 아니라 정당한 소비 이면에 자리한 부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에 있기 때문이다.
조현아의 땅콩 회항 사태가 생각 이상의 파장을 몰고 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평범한 사회 구성원이 돈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생각 이상으로 공격적이다. 재벌가라는 호화로운 장벽이 위태롭게 흔들리자 필사적으로 성문을 두들기고 고함을 지른다. 한국의 부자들은 대부분 부의 축재에 있어서 윤리적 의심을 피해갈 수 없다.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와 원자재의 독점 매입을 통한 이윤 창출을 통해서 지금의 부를 축적했고, 독재 정권의 슬하에서 노동의 착취를 보장 받으며 더욱 비대해졌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는 건 일찌감치 짓눌렸고,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게다가 나날이 상승하는 사회적 비용을 방관하는 정치적 세력들은 빈부 격차에 계급성을 부여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임세령을 향한 손가락의 저변엔 비윤리적 축재의 역사가 존재한다. 부자가 의심 받는 사회라니, 얼마나 불행한가.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열광하는 사회의 저변엔 가난한 다수의 불만이 도화선처럼 깔려 있다. 게다가 임세령과 같은 재벌가의 후예들을 손가락질하는 대상들은 가진 것 없이 증오까지 끌어안고 있다. 결국 그 손가락들은 정작 자신들이 손가락질하는 대상보다 가까운 주변의 손가락들과 부딪혀 싸우거나 기형적인 집단 논리로 번져나갈 것이다.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시키는 건 결국 부의 대물림을 손쉽게 허하고, 빈부 격차의 확대를 방관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억울해지는 사회란 얼마나 불행한가. 그 불행이 개개인의 무지 탓이라고 몰아가서야 되겠는가.
건축가는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건축가는 집을 짓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건축가에게 물었다. 건축가가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구본준 한겨레 문화부 책지성 팀장. <두 남자의 집짓기> 저자.
구승회 디자인크래프트 대표이사. <건축학개론> 제주도 ‘서연의 집’ 설계.
김찬중 더_시스템 랩 대표.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 설계.
전숙희 와이즈 건축 소장. 다세대 주택 ‘Y하우스’ 설계.
‘건축’이라는 단어가 발견되는 두 편의 영화 <건축학개론>과 <말하는 건축가>에 대한 남다른 감상이 있을 것 같다.
구승회(이하 ‘승’):약간의 의무감으로 <말하는 건축가>를 봤다. 마지막 장면이 짠하더라. 목욕탕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아줌마한테 “이거 지으신 분 아세요?” 물어보니, “그걸 어떻게 알아~.” 대답하는데 그 옆에 정기용 선생님이 앉아 있다. 건축가가 열심히 만들어놓은 공간을 일반인들이 잘 쓰면서도 정작 같은 공간에 있는 건축가의 존재는 모른다니 찡했다. 한때 윗세대 건축가들이 국제적이지도 않고 디자인도 못한다고 폄하했다. 지금 와서 보면 그 분들만큼의 퀄리티를 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아버지에 대해서 잘 몰랐다는 걸 깨닫는 순간처럼 울컥하더라.
김찬중(이하 ‘찬’): 정기용 선생님께 개인적인 신세를 져서 어떻게 갚아야 할까 생각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영화를 보면서 좀 울었다. <건축학개론>은 건축이 지역과 얼마나 밀접한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감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공간에 대한 사소한 경험이 기억의 인자로 어떻게 자리잡는지 잘 보여준다. 두 영화는 건축가들이 ‘어떤 기억을 선물할 수 있는가’라는 직업적 소명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았다.
전숙희(이하 ‘숙’): <말하는 건축가>는 실제 건축가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서 반가웠지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봤다. 사실 영화에서 나오는 정기용 선생님 회고전을 출산 때문에 보지 못했다. 그 이전부터 선생님께서 편찮으시단 말을 들었는데 회고전 준비에 관해 듣고 마음이 덜컹했었다. 건축계가 이분을 보내드릴 준비를 한다는 생각에 속이 상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회고전이 많은 건축가들을 묶어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살아생전에 메이저 갤러리에서 회고전을 했다는 것도 건축계만의 파티가 아니라 건축계 밖의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했다. <건축학개론>은 아직 못 봤지만 구승회 소장님의 작품이 나온다니 궁금하다.
구본준(이하 ‘본’):사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다른 때보다 높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느낀 건 건축영화제였다. 건축영화제 1회가 1주일이나 더 연장상영을 했다. 지난 2회 때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왔다. 그래서 두 영화가 절묘해 보인다. <말하는 건축가>는 공공건축을 다루지만, <건축학개론>은 사적으로 건축을 다루니까 두 작품을 같이 보면 좋을 거 같다.
한국에서 건축가란 어떤 존재인가?
찬:만약 집이라는 결과물만 중요했다면 <건축학개론>이 존재할 수 없었을 거다. 일을 맡겼더니 어느 날 집이 완성됐더라, 이런 건 소위 집장사라면 모를까, 건축가에게 어려운 일이다. 건축주가 집 짓는 과정 자체를 충분히 즐기고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건축가의 역할이다. 의사나 변호사도 그렇지 않나.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의뢰인이나 환자로부터 좀 더 많은 부분을 끌어내는 거니까. 그 과정에 참여시키고 그에 대한 기억까지 함께 넘겨야 된다.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그런 과정의 기억 또한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
본:예쁜 집을 짓기 전에 하자 없이 지으려면 시공업자가 건축가의 설계를 잘 지키면서 짓는지 감시해야 한다. 그게 감리라는 영역인데, 시공업자가 설계해서 짓고 검사해서 괜찮다고 넘어가는 건, 자기가 문제 내놓고 100점 맞았다는 거다. 건축가가 건축주를 대신해서 튼튼한 집이 나오도록 시공업체를 견제하고 압박을 가해서 완성도를 높여야 된다. 무엇보다도 집을 짓고 나면 건축사가 영세해서 없어진다는 점이 문제다. A/S를 받을 수 없다. 그러니 처음부터 잘 지어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건축가한테 맡겨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 지을 때 복덕방부터 간다.
숙: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건축가가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작년 여름에 우리가 만든 금호동 다세대 주택이 보도되면서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의뢰가 있었는데 정작 성사되는 건 없었다. 대부분 건축가가 직접 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건축가는 공간을 디자인하고 건축주의 요구사항에 맞는 시공자를 만나도록 돕는다. 시공자는 최대 이익을 원한다. 그럼 건축주가 원하는 그림 내에서 최대한 값싼 재료를 쓰고 쉬운 방식대로 짓는다. 건축가들은 그 돈이 제대로 쓰일 수 있게 전체를 봐주는 거다, 그게 돈을 잘 쓰는 방법이다.
찬: 사실 수많은 아이템이 들어가는 큰 덩치의 건축물이 30년 동안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완성한다는 건 어렵다. 재료의 속성도 변할 수 밖에 없으니 분명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누구나 건축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아카데믹하게 접근하지 않아도 생활 속의 공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 대부분 불만을 말한다. 그 불만들을 긍정으로 바꾸긴 힘들다. 사실 문 손잡이가 흔들거려도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따진다. 종합적인 책임자로서 건축가의 위치를 인지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들어와서 일 없을 때 아버지 집을 설계했었는데 덕분에 평생의 욕을 먹고 있다. 하물며 전구 나가는 것도 내 탓이니.(웃음)
승: 이사가면서 돈 좀 아껴보겠다고 우리 집 인테리어를 직접 했는데 지금까지도 매일 혼난다. 와이프가 건축주라서.(웃음) 자문 받으러 오시는 분들은 건축가에게 어떤 믿음을 싣는 경향이 있다. 아플 때 찾아가는 의사가 명의이길 바라는 것처럼. 그래서 움찔하다가 ‘저는 공사는 안 합니다’ 하면서 책임소재에서 빠져 나온다. 많이 얽힐수록 힘든 게 사실이니까. 소비자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이가 알아서 잘 해주고, 되도록 싸게 하면서도 좋은 퀄리티를 바라는 건 당연하긴 하다. 요즘은 그런 분들이 바라는 바를 건축가로서 잘 듣고 있는지 고민한다. 단순히 액수를 깎아주는 게 아니라 대안적인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외국도 많이 다녀서 본 것도 많고 좋은 재료나 디테일은 많이 아는데 막상 그것들을 조합했을 때 어떤 그림이 나올지 잘 모른다.
본:우리나라 건축가들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디자인 감각이 워낙 다르니까.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인테리어에 길들여져서 공간을 꾸며본 적 없는 사람이 90%니까. 솔직히 자기가 어떤 공간을 원하는지도 잘 모른다. 취향도 없고. 아파트는 편리한 대신 디자인 감각을 거세시킨다.
숙:어떤 공간을 좀 강조한다면 그 건너편은 조용한 것이 들어가야 되는데 대부분 강조되는 것만 고른다. 종합적인 공간을 보지 못하는 거지.
취향은 삶의 질과 깊은 연관이 있다. 취향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건 삶의 질이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숙: 최근에 집 짓는 것에 대한 문의가 많다. 시공사들이 공급하는 아파트가 아니라 자신들이 짓는 집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최근에는 한 시공사에서 찾아왔는데 아파트가 아닌 다른 걸 개척해보려 한다는 거다. 적당한 규모의 땅이 있기 때문이라지만 결국 그 수요계층에 대한 판단이 있다는 거다. 주거 문화에 있어서 긍정적인 터닝 포인트라 생각한 게 아파트를 쫓지 않는 세대들이 나왔다는 거다. 사실 집값이 비싸다는 것이 젊은 세대에게 절망을 준다. 특히 아파트는 재산 정도를 파악하기에 용이하다. 어느 건설사가 지었는지, 어느 지역인지, 라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수준을 단정해버릴 가능성이 있다. 주거 형식은 다양성의 가치와 깊게 연관돼 있다.
본: 제일 중요한 건 일상에서의 건축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 된다. 외국에서 본 골목길은 예쁘던데 우리 동네는 왜 이런지, 쓰레기통 같은 건 좀 더 괜찮은 디자인일 수 없는지, 길에 분전함은 왜 저렇게 많은지, 이런 것들. 가로수길이 좋은 이유는 길에 구조물이 별로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길 위에서 액티비티가 발생하고 길에 붙어있는 건물과의 상호작용도 좋아진다. 지금까지 한국은 도시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저 내 집이 중요했는데 주택 하나가 예뻐지면 그 동네에 또 예쁜 집이 들어서고, 이런 건 의외로 쉽게 번질 수 있다.
찬: 역사적으로 건축이 선발 산업으로 등장했던 적은 없었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건축은 후발 산업에 가깝게 포지셔닝된다. 산업, 문화, 예술을 포괄한 종합적 성격이 강해지는 탓이다. 건축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문화적으로 성장했다는 증거다. 그런 시점에서 아까 말했던 두 영화가 때를 잘 맞춘 셈이다. 어쩌면 지금 시점이기 때문에 그런 시장성을 인정받았을지도 모르고.
본: 의사나 변호사는 인생 최악의 순간에 만나지만 건축가는 인생에서 제일 행복할 때 만난다. 일생 동안 집을 두 번 짓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게다가 아직도 대부분 건축가가 아니라 시공업체를 찾아가서 집을 짓는다. 정기용 선생님도 목욕탕이나 마을 공설운동장 같은 걸 만들었는데 건축가가 하니까 확실히 좋다는 걸 알려준다. 2003년에 정기용 선생님께서 순천에 기적의 도서관을 만들기 이전에는 부모들이 어린애들을 데리고 갈 수 있는 도서관이 없었다. 건축가가 하니까 그런 배려들이 생긴 거다. 심지어 순천시청 안에 처음으로 도서관을 전담하는 행정과가 생겼다. 다른 지자체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정기용 선생님께서 거기까지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도서관 하나가 굉장히 많은 걸 바꿨고, 공공건축이 이렇게 좋아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거다. 실제로 건축은 많은 걸 바꿀 수 있다.
서울이라는 공간의 특성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승: 서울의 특성은 아파트다. 어떻게든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독특한 물리적 환경이 아닌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나올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건 안 좋으니 쓸어버리자는 건 결국 지저분한 집들 다 쓸어버리고 반듯하게 짓자고 하는 무대포 마인드와 다를 게 없다. 요즘 가로수길 말 많지 않나. 이제 옛날 가로수길 아니라고, 너무 상업화됐다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게 정상이다. 예술가들이 모여서 좋은 분위기를 형성했고, 사람들이 모이고, 가치가 올라가니, 대기업들이 몰려와서 꼭지를 잡고, 그 사람들이 이동한다. 내 생각이 이상적인 건지 좋아지는 곳이 있으면 쇠락하는 곳도 있기 마련이다. 서울시 모든 곳이 다 좋을 수는 없지 않나. 흥망성쇠가 이어지는 생태계가 있다는 건 도시가 살아있다는 증거 아닐까.
찬:다양성이 인정되는 도시라는 면은 좋다. 다만 흑백논리로 구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사는 동네가 있으면 못 사는 동네도 있고, 지저분한 동네도 있으면 깨끗한 동네도 있다. 이런 다양한 문제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도시가 서울이다. 우리가 성격이 급해서인지 그 각각의 영역들은 정체돼있지 않고 늘 변한다. 적응력도 굉장히 빠르다. 좋은 걸 인정하거나 나쁜 걸 바꾸려는 의지도 강한데, 그런 양면을 잘 순화시켜서 조화로운 관계성으로 정립하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브랜드 파워를 가질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숙: 뉴욕은 볼거리가 집중된 맨해튼이 있지만 그 밖은 험악하기 이를 때 없다. 지하철 타면 누군가 뒤통수 후려칠 것 같기도 하고, 다리 밑은 악취도 심하다. 거기에 비하면 서울에는 산재된 풍경들이 있고, 살만한 공간으로 확산된 도시다. 다만 최근에 양산된 건물들이 많아서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서울의 다이나믹함을 따라올 수 있는 도시가 없다. 뉴욕에서 일할 때는 대부분 인테리어였다. 건축물을 지어볼 기회는 없기 때문에 기회가 생기면 다들 혈안이 돼서 달려든다. 그만큼 서울은 건축가들에게 좋은 영역이다. 다만 오랫동안 계획하고 짓기보단 너무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건축을 대하는 태도들이 변하는 만큼 개선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본: 서울에는 아파트가 맞다. 서울에서 어떻게 단독주택을 짓겠나. 땅값도 비싸고. 다만 기왕 짓는 아파트라면 조금 더 합리적이어야 한다. 사실 대부분의 다세대주택은 단독주택을 헐고 지은 거라서 많은 가구수를 고려하지 못한 도로와 붙어있다. 그래서 차도 많이 밀린다. 좀 걸어 다닐만한 길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는 도시 좀 예뻐해 보자는 생각이 필요하다. 서울의 가장 큰 매력은 제멋대로의 도시라는 점이다. 뭘 해도 이상하지 않다. 얼마나 재미있나? 모든 실험이 가능한데. 나는 서울이 좋다.
특별히 관심이나 애정을 지닌 지역이나 공간을 꼽는다면?
본: 종로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지역이지만 아직까지 대표할만한 건물도 없고, 분위기도 성숙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래된 거리의 매력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이런 특징이 거리 특유의 분위기로 발전되면 좋겠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건축이 중첩되며 공존하는, 상업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거리로 발전하길 기대하고 있다.
숙:소년기를 강남에서 보냈고 유학을 마치고 2년 전 강북에 정착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도시조직이나 경관에 끌리는 편인데, 지리, 지형적으로 자연스레 만들어진 강북의 도시조직이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몽촌토성에서 도시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승: 한강 둔치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답답할 때마다 찾아갔다. 성수동 일대나 홍대, 가로수길, 이태원에 관심이 있다. 문화적 환경이 도시 공간의 변화를 끌어낼 지역이 아닐까 본다.
찬:고등학교 때부터 가로수길의 변화를 경험했다. 물리적인 변화는 크지 않지만 상권과 땅값, 사람들의 인식은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도시의 진화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해외 건축가들의 국내 영입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 모인 분들의 생각은 어떤가?
본: 외국건축가를 들여오는 인식이 문제다. 명품백 사듯이 유명 작가를 부르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 성격에 맞는 외국 건축가를 잘 고르면서 국내 건축가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주고 최선의 경쟁을 시켜야 한다. 용산 국제업무지구 프로젝트 등을 보면 외국 건축가의 이름값에만 매달린 느낌이 강하다. 최고의 작품을 철저하게 뽑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찬: 해외건축가들의 국내영입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만큼 역동적으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다. 해외건축가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경험해볼 수 있다는 점도 좋다. 다만 우리 문화에 대한 단편적 사고로 완성한 결과물을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건 이상하다. 건축은 단편적인 일상의 기억을 유지시켜주는 틀로서의 속성이 있다. 브랜드 파워라는 이유로 우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그들에게 우리의 공간을 맡긴다는 건 잘못된 거다. 국내 건축가들의 수준이 그들보다 뒤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조직적인 대응과 관리는 떨어진다. 고질적인 문화적 사대주의와 국내 건축가들의 소극적인 태도가 연동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승: 건축주의 눈이 확실히 높아졌다. 그러니 해외 건축가에게 의존하던 시기는 지나갈 거라 생각한다.
<말하는 건축가>는 대중들에게 건축가 정기용을 알렸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축가나 건축물이 있을까?
본:이일훈 씨와 주대관 씨의 사회적 건축. 제한된 조건을 어떤 아이디어로 풀어냈는지, 어떤 생각을 펼치고자 하는지가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건축가들의 참여가 어려운 저예산 건물과 일상의 건축에서 이뤄낸 작지만 소중한 성과들이 축적되는 것이다.
승: 김성홍 교수가 <길모퉁이 건축>에서 언급한 ‘중간건축’을 만들어내는 건축가들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건축물을 성실하게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숙: 건축가들이 사랑하는 조성룡 선생님의 재생건축도 대중들에게 알려졌으면 한다.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 선생님의 동료건축가로 등장하시는데 그 정도로는 아쉽다.
찬: 능력 있는 건축가 대부분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인식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나라의 설계비는 창피한 수준이다. 공사비를 아끼면 건물이 나빠지니 설계비를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건물은 도면 10장으로도, 100장으로도 지을 수 있다. 다만 고민과 검증의 무게가 다른 만큼 고스란히 공사비의 차이로 연결된다. 고민과 검증이 치열할수록 공사비 운영도 정확해지고 절감 효과와 품질 향상이 따라올 거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원래 지속적이었지만 요즘에 이르러 보다 활발한 것 같다.
숙: 소비자들에게 자기 브랜드에 대한 총체적 경험을 제공하는 장소를 조직하기 위해서 궁리하는 것 같다. 다른 비즈니스 영역으로 넘어가고자 할 때 이미 구축된 브랜드 가치가 보여지는 공간을 이용한 비즈니스가 효과적이다. 패션과 건축을 소비하고 수용하는 방식은 ‘경험의 소비’란 점에서 공통적이다. 기능적 필요를 넘어서 이미지 소비의 영역에서 패션과 건축은 분명 비슷한 양상이 있다.
본:장 누벨이나 안도 다다오, 프랭크 게리, 요즘은 팝스타가 된 건축가가 많다. 그들의 명성이 브랜드에 부여됐을 때 얻어지는 상업적 작용이 있다면 건축가 입장에서는 기능에 구애 받지 않고 럭셔리하게 작업하면서도 조형성이나 파격성, 추상성을 강하게 실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내구성이야 기본적인 공간의 원칙만 지키면 되지만 데코레이션은 얼마든지 화려해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 오모테산도와 아오야마에 있는 건물들이 스타 건축가와 럭셔리 브랜드의 욕망이 딱 맞아떨어진 사례다. 일반인들도 오모테산도 프라다 매장 앞에 가서 사진도 찍고 좋아하는 거 보면 그런 화려하고 장식적인 건물이 도시에 필요한 측면도 있다. 그걸 해낼 수 있는 건 바로 그 극소수의 스타 건축가들이다. 건물의 부가가치도 높이면서 대중의 주목까지 끌어내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럭셔리 브랜드들은 건축에 관심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찬: 1900년대 중반에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라는 건축가가 남긴 사진 한 장이 있다. 자기가 설계한 집의 공간을 찍었는데 자기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은 와이프의 뒷모습도 나온다. 내가 받아들인 건 공간과 의상, 집기들까지 포괄한 토털 아이덴티티, 종합적인 공감각이었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스페셜리티의 공감대와 종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다루는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의 전반을 대변한다.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시너지 효과를 내려는 거다. 사실 인더스트리의 속성에서 건축이 훨씬 오래됐지만 패션은 보다 대중적이다. 그리고 건축에도 트렌디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자하 하디드의 팬시한 폼이 그렇다. 심지어 그녀는 패션 분야에서도 리터치를 하고. 건축물이라는 게 엔지니어링이기도 하지만 표피적으로 트렌디해서 패션과 잘 어울린다. 사실 요즘 건축계에서 ‘서피스(surface)’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질감이라는 고유 영역은 패션에서 영감을 얻을 때가 많다.
본: 사실 오래 전에는 건축이 모든 것이었다. 건축의 외벽을 조각하는 사람은 조각가가 아니라 조각공이었다. 화가라는 개념도 16세기까지 없었다. 외벽을 조각하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건축의 개념에 다 포함돼 있었다. 근대적인 개념 안에서 회화, 아트, 디자인으로 쪼개진 거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어쩌면 본래의 총합적인 형태로 돌아간 건축일 수 있는 거다.
건축이란 분야가 복합적인 만큼 건축가라면 다양한 분야에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둬야 할 것 같다.
중: 학생들에게 늘 건축 외의 것도 많이 봐두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일상부터 사회현상까지 살펴야 한다. 건축가를 마스터의 개념으로 규정한 교과과정이 있는데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사람이 사는 공간과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아니라 형태적인 관심만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러니 실제로 일을 하면 너무 힘든 거다. 실버 하우스를 짓거나 유치원을 짓겠다는 사람이 노인이나 아이들 심리는 모르고 자기 편한 대로 설계해선 안 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자기 영감에 의존해서 혼자 죽여주는 걸 만들면 대중과의 괴리가 생긴다. 그런 엘리트주의로 건축주를 가르치려 드는 악순환들이 있었다. 그래도 요즘 젊은 건축가들은 그런 자아도취에서 탈피하고 있다.
본: 건축은 20년 뒤를 내다봐야 한다. 설계부터 미래를 내다보는 거다. 미래 사회의 모습이나 건축주의 이래도 예측해야 한다. 예지력이 필요하다. 이 시대에 필요한 집이 뭔가를 고민해야 된다. 그게 인문학이다. 건축가는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이 아니라 개발된 기술을 조합하는 코디네이터다. 어떤 식으로 기술을 채택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러니 인문학이 중요하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철학책 읽으라 한다고 짜증내지만 건축은 항상 사람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 건축은 예술적인 기술이다. 자주 쓰는 예인데 추상주의 화가 몬드리안과 유사한 건물을 만드는 건축가가 있었다. 한번은 몬드리안 추상화와 똑 같은 의자를 만들었는데 그 의자 가격이 몬드리안 그림의 20분의 1에 불과했다. 예술은 쓸모가 없어서 비싼 거다. 쓸모를 초월하는 거다. 건축은 쓸모가 있다. 결국 예술이 될 수 없는 거다.
찬: 건축에서 쓰는 소재 대부분은 건축 자체를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다른 산업에서 넘어온 거다. 알루미늄이나 컨테이너 조립식 주택 같은 경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부유물들을 재활용하는 고민에서 비롯된 결과다. 건축이 자체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이끌긴 어렵다. 요즘 등장한 미디어 파사드(Media Façade)도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에서 끌어온 방식인데 다른 장르에서 10년 정도 활용된 방식이 건축적으로 전용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단열 개념도 그랬고. 어쩌면 배와 자동차와 비행기까지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그런 인더스트리의 사이클을 잘 알았다고 본다. 이런 사이클을 이해해야 장기적인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다. 트렌드는 영속적이지 않지만 트렌드의 흐름은 긴 방향을 알려준다.
본:실내 건축 같은 경우 차용이 더욱 쉽다. 티타늄 강판을 건축소재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행기나 안경에 먼저 쓰이고 건축으로 왔다. 건축은 보수적이라 안전하게 검증된 것들만 채택한다.
건축가에 대한 로망을 말하는 여자들을 종종 봤다.
승: 난 잘 모르겠는데. 혹시 내게 호감을 보인 여자들이 단지 직업 때문에?(웃음)
찬: 우리 집사람이 내가 <엘르>에서 토크한다니까, 자기를 하라더라. 피부에 와닿는 말 다해준다고.(웃음) 공대생들 가방에서는 공학용 계산기나 공학 관련 책이 나오는데 건축공학과는 스케치북도 나오고 철학책도 나온다. 로우테크와 하이테크가 결합된 느낌이라 인간적이다. 치명적인 단점은 고집이 세다. 아마 건축가의 DNA가 그런 것 같다. 그 정도 고집도 없으면 프로젝트를 끝까지 끌고 가기 힘들다. 직업인으로 봤을 때는 집중도도 높고 낭만이 있어서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생활인으로 봤을 때는 나이 들면서 가져다 줄 수 있는 게 고생 밖에 없다.(웃음) 고집이 센 반면 어느 순간 탁 놔버리는 경우도 있다. 책임감 있는 남편으로 데리고 살기에는 살얼음 같이 불안한 느낌이 있을 거다. 게을러서 옷도 맨날 까만 색만 입고.
본:그런데 또 말은 그럴싸하게 한다. 원래 무채색은 모든 색에 코디가 가능하다고, 모든 색을 함유한 색이라고(웃음).
전도연이 처음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건 1997년, <접속>을 통해서였다. 그녀가 <밀양>으로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건 2007년이었다. 정확히 10년 만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라는 빤한 수사의 진짜 주인이 된 게 말이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한발한발 작품을 내디디며 오늘에 다다랐다. 그녀가 또 한번 발을 내딛는다. <카운트다운>으로, 전도연이 돌아왔다.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이전에도 전도연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다. 그녀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누비며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혀나갔다. 백지처럼, 캐릭터의 색을 입었고, 리트머스처럼, 작품에 스며들었다. 그녀가 시작부터 자각이 뚜렷한 배우는 아니었다. “그냥 어리다 보니까 호기심이 많았을 뿐이죠. 처음부터 의식을 갖고 연기한 건 아니었어요.” 그녀를 각성시킨 건 <해피엔드>(1999)였다. <해피엔드>는 파격적인 노출신과 베드신을 요구하는 작품이었다. <접속>(1997)과 <약속>(1998)의 연이은 성공과 <내 마음의 풍경>(1999)으로 좋은 연기적 평가를 얻었던 여배우가 선뜻 집어들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런 결정을 하려면 제 자신을 납득시켜야 하잖아요. 남들 시선보단 내가 원하는 것에 더욱 귀를 기울기게 된 시기였죠.” 그녀는 표현의 한계를 부수고, 연기적인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임을 알았다. 결국 선택했고, 해냈다.
“언제부턴가 우등생처럼 빤하게 1등 해서 상 받는 게 당연한 배우로 여겨진 것 같아요.” 전도연에게 <밀양>(2007)은 ‘그런 빤함을 뒤엎어주는 작품’이었다. “너 연기 잘하는데, 그냥 연기를 잘 해.” 이창동 감독의 말은 전도연에게 ‘정곡을 찔리는 기분’을 안겼다. 당시 <너는 내 운명>(2005)으로 비평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전도연은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여배우였다. 이창동은 그런 그녀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흠잡을 곳 없는 ‘정석적인 배우’ 전도연에게 그 이상의 연기를 요구했다. 그녀는 촬영 내내 온갖 의심에 시달렸다. 결과적으로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와 온갖 상찬이 뒤따랐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떨떠름한 일이었다. “뭔가 스스로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결국 제 자리였어요. 진짜로 달라졌다고 생각하면 나만의 비법을 가진 것처럼 잘난 척도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니까요. 정말 모르겠어요.”
충무로는 여배우에게 척박한 땅이다.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전달받기란 드문 일이다. 그만큼 경쟁도 치열하다. 실력으로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다. 전도연은 작품 작업 중에는 다른 시나리오를 보지 않는다. 밀양에서 <멋진 하루>(2008)에 대한 제의를 받은 전도연은 서울에서 시나리오를 보고 작품을 결정하기로 했다. 비로소 모든 촬영이 끝났다. 그녀는 서울로 올라오며 새롭게 쌓여있을 시나리오들을 기대했다. 하지만 매니저가 건넨 시나리오는 단 하나, <멋진 하루>뿐이었다. “만약 시나리오가 별로였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거에요. 그래서 고마웠어요. 제가 좀 더 빨리 차기작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요.” 언론과 대중은 <멋진 하루>의 전도연을 주목했다. 칸에서의 수상 뒤 첫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욕심은 굉장히 많은데, 꿈이 없어요. 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는 무엇이잖아요. 전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욕심이 많아요.” 목 아래까지 단추를 채우고 반듯하게 몸을 세운 듯한 <밀양>과 달리 옷을 살짝 풀어헤치고 느슨하게 누워있어도 좋을 것 같은 <멋진 하루>는 보다 여유로워진 전도연의 관록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작품이 끝나면 공허하죠. 무언가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하루 아침에 여운도 없이 끝나버리는 거니까. 돌이켜 보면 이 작품이 정말 마지막인 것처럼 보든 열정을 다 쏟아 부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평소에 열정을 쏟아 넣을만한 게 없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결국 남는 건 작품이죠.” 그랬다.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전도연은 작품을 삼키듯이 쉬지 않고 연기해왔다. 결혼을 했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데뷔 이후로 처음 2년여 간의 공백을 경험한 그녀에게 이제 연기란 무엇일까.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마음 써야 할 게 많아지니 연기가 더욱 절실한 것임을 알게 됐죠.” 그녀의 구미를 당기는 시나리오는 여전히 드물었다. 그 가운데, <하녀>(2010)는 일종의 오아시스였다.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김기영의 <하녀>(1960)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에서 전도연은 파격의 옷을 가벼운 깃털처럼 걸치듯 연기했다.
허종호 감독의 입봉작 <카운트다운>(2011)에서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구가하는 전도연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시나리오를 검토했고, 출연을 결정했으며, 제 역할에 정진했다. 최근의 출연작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두드러지는 스릴러물에서 전형적인 팜므파탈을 연기한다. 전도연의 변신이라는 수사가 으레 따라왔다.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변신을 목적으로 작품을 선택해본 적이 없어요. 그저 인물 안에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기에 작품을 선택했고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죠.” 사람들은 그녀에게 묻곤 했다. 지난 번 그 곳은 험준한 봉우리가 아니었냐고, 완만한 능선이 아니었냐고. 하지만 정작 전도연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여기 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저를 내리막길에 내려놓기도 하고, 꼭대기에 올려놓기도 했지만 그건 제 자신과 상관없어요. 저는 항상 평행선을 걸어왔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언제나 일정한 걸음으로 연기적 보폭을 넓혀왔다. 길은 열려 있었고, 그저 걸어왔을 뿐이다. 그렇게 다시, 전도연은 발을 내딛는다. 또 한번 길이 열린다.
사라진 동생 소진(심은경)을 찾아나서는 희진(남상미)이 맞닥뜨리는 상황을 대변하는 건 형사 태환(류승룡)의 잦은 대사다. “그게 말이 돼?’당연히 말이 될 리가,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일 앞에서 당연한 질문. 하지만 그게 말이 되건 말건 간에 누군가는 믿을 수 없는 일을 겪는 세상. 말 그대로 불신지옥, 누군가가 믿어줄 수도 없는 일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의 삶이란 이토록 괴롭고 처연하다. 지독한 믿음을 지닌 자들이 만들어낸 지옥에 믿을 수 없는 자가 갇히게 되는 상황은 공포 그 자체다.
<불신지옥>은 자신의 광기를 전도하는 자들의 믿음이 만들어낸 지옥도다. 믿는 자들의 광기에 치여 사는 인간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때때로 공포가 된다. 건조한 톤으로 내려앉은 영화는 시종일관 서늘한 낯빛으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복도식 아파트와 지하실과 같은 한국적 풍경을 적극 활용한 호러적 연출은 꽤나 인상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무엇보다도 <불신지옥>이 ‘(한국식)기독교’와 ‘무속신앙’을 묘사의 대상으로 삼은 건 형태적으로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 종교가 사실상 한국 사회 내에서 뿌리깊은 병리적 맹신을 전도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형 체육관에 모여 통곡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나 종을 울리고 춤을 추며 굿판을 벌이는 행위는 실상 그 믿음의 외벽에 놓인 자들에게 기괴한 감상을 부르는 병리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믿는 자들이 만들어낸 광기는 믿지 않는 자들의 눈에 공포를 비춘다.
믿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없는가의 물음은 종교와 신앙이라는 단어 안에서 반복돼왔다. <불신지옥>은 그 물음에 답변할 개인적 권리를 침해하는 자들의 광기를 공포로 치환한다. 믿음의 본질과 무관하게 그 형태 자체에 미쳐버린 자들은 자신의 주변에 놓인 자들을 파괴하는 형태로 그 믿음을 전도해나간다. <불신지옥>은 연출적 면모와 주제적 접근 모든 면에서 주목 받을만한 작품이다. 초자연적인 분장을 빌리지 않고 실생활의 표정만으로 섬뜩한 공기를 형성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다만 지나치게 모호한 해석을 부르는 결말이 조금 아쉽다. 마치 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입을 급하게 다무는 느낌이랄까. 강한 이미지적 자극을 원하는 관객이라면 정적인 영화의 분위기에 지루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신지옥>은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장르적 성취를 드러낸다. 뛰어난 연출력과 연기력을 기반으로 소재의 특성을 세계관에 반영하는데 성공했다. 근 몇 년간 국내 관객을 질식시키던 수준 이하의 호러를 잊어도 될만큼 인상적이다.
난 어려서부터 야구광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광주로 내려간 뒤 10년을 넘게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난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살았다. 선동렬과 이종범은 둘도 없는 우상이었지. 심지어 아침마다 신문을 펴고 스포츠 면 야구 기사에 검정색 모나미 볼펜으로 줄을 치면서 봤다. 덕분에 부모님 역성이 대단했다. 그래도 그 망할 짓을 포기하지 않았고, 부모님은 결국 날 포기했다. 어쨌든 그랬다.
내게 있어서 야구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좋아했던 스포츠이자 그만큼 좋아해본 적 없는 스포츠였던 것 같다. 해태 타이거즈가 기아 타이거즈로 변하고 종이 호랑이로 몰락한 뒤, 잠시 국내 프로야구에 관심이 시들했던 적도 없지 않았지만 작년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척하던 기아를 열심히 지켜봤다. 메이저리그까지 챙겨볼 겨를은 없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당시 박찬호의 18승에 감격했고, 재수 시절 김병현의 월드시리즈 홈런 연타 사건에 충격을 먹기도 했다. 당시 김병현이 홈런볼을 던지기 직전마다 이러다 홈런 맞는 거 아냐, 라고 중얼거리다 주변인들에게 재수없는 주둥이로 낙인 찍혀버린 가슴 아픈 사연도 있단다. 어쨌든 야구란 내게 참 재미있는 게임이다.
내일이면 WBC결승이다. 종범신의 대단한 활약에 감격했던 전 대회에서 한국은 4강이었다. 3번이나 이겼던 일본을 상대로 단 한번 졌는데 하필 그게 4강전이었고 덕분에 짐 싸서 돌아왔다. 내일은 결승이다. 또 일본이다. 이번엔2:2무승부. 이게 무슨 한일 슈퍼리그냐. 아니면 한일전 및 월드 베이스볼 초청 시범경기냐. 게임은 미국에서 열리는데 정작 주인공은 삽질로 물러나고 그 이상한 대전 규칙에 의해 한국과 일본만 죽어라 맞붙는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서로가 지겹고 지겨워서 다시 보기 싫어 죽을 판에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다. 뭐 이딴 시나리오가 있냐고 대본을 내던지고 싶어도 글러브를 내던질 순 없지. 지는 쪽은 최악이고 이기는 쪽은 최상이다. 리얼리티 버라이어티 쇼 따위는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흥미진진한 리얼타임 쇼가 벌어지는 셈이다.
종목을 불사하고 한국을 대표해서 국제대회에 나간 선수들에게 우승해서 돌아오라는 압박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선의의 응원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내일만큼은 이겨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일단 내가 지는 꼴을 보고 속상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하거니와, 그네들이 가장 속상할 것 같아서 말이지. 차라리 미국이 올라왔다면 그냥 결승전을 만끽하고 돌아와도 좋다고 말할 순 있겠다만, 어쩌다 보니 또 일본이다. 이젠 그 악연에 종지부를 찍는 게 좋겠지. 다만 그게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다. 이긴 편은 우리 편, 이라고 외칠 수 없는 상황에서 이긴 편이 우리 편이 됐으면 좋겠다. 다져스 스타디움에 태극기를 꽂아서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알려주세요, 따위는 모르겠고 그 세레모니를 통해 본인들 스스로 환희에 차는 순간을 봤으면 좋겠다. 나라 꼴도 지랄 맞고 ‘뉴딜’이란 단어 하나 익혔다고 여기저기 적용하며 생색내는 MB의 꼴 같지 않는 작태도 흉악한 판에 야구는 그나마 지친 사람들에게 일말의 낙이 되고 있다. 김연아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내일만큼은 국민을 위해서, 대한민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네들 당신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그 다져스 스타디움에 태극기를 꽂고 기쁨에 만끽할 수 있었으면 한다. 최선을 다했으니 꼭 그 보답을 얻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