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독 오스카네어(Oscarnaire)! 현지시각으로 2월 22일 오후 5시경, 미국 LA 코닥극장에서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거행됐다. 사회를 맡은 휴 잭맨은 화려한 뮤지컬 무대로 포문을 열며 시상식의 열기를 띄웠다. 그러나 이날 시상식의 주인공은 단연 <슬럼독 밀리어네어>였다.
지난 골든글러브에서 4관왕을 차지했던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이어진 아카데미에서도 저력을 발휘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8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벌어들이며 제81회 아카데미에서 가장 큰 수익을 올렸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경쟁이 치열했던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8관왕에 오르며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13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3관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주요부문에선 단 한차례도 호명을 받지 못하며 체면을 구겼다. 숀 펜과 히스 레저에게 각각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안겨준 <밀크>와 <다크 나이트>는 2관왕에 오르며 실속을 챙겼다. 이미 수상이 예정된 것처럼 보였던 히스 레저의 이름이 남우조연상에 호명되는 순간, 코닥 극장에 자리한 전 참석자가 기립박수로서 고인의 영예를 추대했다. 수상식은 가족의 대리 수상으로 이뤄졌다.
한편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독점했던 케이트 윈슬렛은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로 노미네이트 된 오스카 여우주연상 부문까지 석권하는 파란을 이어나갔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페넬로페 크루즈 역시 수상자로서 연단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월-E>로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차지한 픽사 스튜디오는 <라따뚜이>에 이어 오스카 2연패에 성공했다. 외국어영화상은 일본의 <굿’바이>에게 돌아갔다. 그 밖에도 <공작 부인: 세기의 스캔들>이 의상상에 호명됐다. 유난히 많은 수작들이 쏟아진 이번 아카데미 역시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대작보단 작품성 위주의 작품들을 선별했다.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연기 부문에 호명된 배우들의 다국적성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도 비 할리우드 영화인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최고 수혜자로 선정됐다는 점에서 최근 오스카의 보수적 취향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설에 무게가 실릴 전망이다. 한편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비롯한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작품들이 개봉 중이거나 개봉 예정인 만큼 아카데미의 선구안을 국내 극장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81회 아카데미 수상작 리스트
작품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감독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대니 보일 남우주연상 <밀크 Milk> 숀 펜 여우주연상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케이트 윈슬렛 남우조연상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히스 레저 여우조연상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Vicky Cristina Barcelona> 페넬로페 크루즈 각색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사이몬 뷰포이 각본상 <밀크 Milk>더스틴 랜스 블랙 편집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크리스 디킨스 촬영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앤쏘니 도드 맨틀 미술감독상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도널드 그레이엄 버트, 빅터 J. 졸포 의상상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 The Duchess> 마이클 오코너 분장상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그렉 캐놈 음악상(Original score)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R. 라만 주제가상(Original song)“Jai Ho” from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R. 라만, 굴자 음향상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리차드 킹 음향효과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이안 태프, 리차드 프리케, 레슐 푸커티 시각효과상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에릭 바바, 스티브 프리그, 버트 달튼, 크레이그 바론 장편애니메이션 상 <월-E WALL-E> 장편다큐멘터리 상 <맨 온 와이어 Man on Wire> 단편다큐멘터리 상 <스마일 핑키 Smile Pinki> 단편애니메이션 작품상 <작은 육면체의 집 La Maison en Petits Cubes> 단편영화 작품상 <토이랜드 Spielzeugland> 외국어영화상 <굿, 바이 Departures> 일본
지난 11일 미국 현지시각 8시, 베벌리 힐튼 호텔에서 제6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열렸다. 지난해 작가 노조의 파업에 동참한 배우들의 보이콧으로 인해 사상 초유의 시상식 무산이라는 진통을 겪었던 골든글로브는 올해 다시 아카데미 전초전의 열기를 띄웠다. 그리고 돌아온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풍성한 작품만큼이나 다양한 이변을 연출했다.
대니 보일의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4관왕에 올랐다. 감독상, 각본상, 드라마 부문 작품상, 주제가상까지 쓸어담은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주요부문 석권과 함께 4개의 트로피를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 외교관 출신 작가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했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인도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작품이다. 지난 해 미국 비평가들의 찬사와 지지를 한 몸에 얻었던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지난 8일 열린 미국 비평가상 시상식에서도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작품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 해 제65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레슬러>는 골든글로브 2관왕에 올랐다. 다사다난한 인생 역정을 지닌 미키 루크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레슬러>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노래한 ‘The Wrestler’로 주제가상을 수상하며 2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샘 멘데스가 연출한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케이트 윈슬렛은 스티븐 달트리가 연출한 <더 리더>로 여우조연상까지 수상하며 이례적인 겹경사를 맞이했다. 한편 <다크 나이트>에서 괴력적인 연기로 보여준 히스 레저는 남우조연상에 호명되며 고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 밖에도 뮤지컬코미디 부분에서는 우디 알렌이 연출한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가 작품상을, <킬러들의 도시>와 <해피 고 럭키>에서 주연을 맡았던 콜린 패럴과 샐리 호킨스가 각각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장편애니메이션상은 픽사 스튜디오의 <월-E>가 선정됐다. 이로서 지난 2004년 신설된 이래로 픽사 스튜디오는 <카><라따뚜이>에 이어 <월-E>까지 3번 연속 골든글로브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공고히 다졌다. 외국어영화상엔 이스라엘 출신 감독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에게 돌아갔다. 아리 폴만의 실화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에 대한 경종을 울릴만한 작품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지난 해 골든글로브 세실 B. 드밀 평생공로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스티븐 스필버그는 1년이 유예 끝에 한해를 건너 미뤄둔 영광을 찾았다.
올해 제6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영국 출신 영화인들에게 많은 트로피가 수여됐다. 대니 보일을 비롯해 영국 출신 배우 케이트 윈슬렛과 샐리 호킨스, 아일랜드 출신의 콜린 패럴까지 영국출신 감독과 배우들의 저력이 빛났다. 한편 데이빗 핀처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론 하워드의 <프로스트 VS 닉슨>은 5개 부문 후보로 지명됐으나 한 부문에서도 호명되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반면 지난 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기록된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는 남우조연상 단 1개 부문 후보로 올랐지만 히스 레저의 수상으로 일말의 체면을 살렸다. 과연 아카데미 전초전의 결과가 오스카 트로피의 향방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제6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영화부문 수상작
감독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대니 보일 수상 각본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사이먼 뷰퍼이 수상 드라마_작품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선정 드라마_남우주연상 <레슬러 The Wrestler> 미키 루크 수상 드라마_여우주연상 <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케이트 윈슬렛 수상 뮤지컬코미디_작품상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Vicky Cristina Barcelona> 선정 뮤지컬코미디_남우주연상 <킬러들의 도시 In Bruges> 콜린 패럴 수상 뮤지컬코미디_여우주연상 <해피 고 럭키 Happy-Go-Lucky> 샐리 호킨스 수상 남우조연상 <다크 나이트 Dark Knight> 히스 레저 수상 여우조연상 <더 리더 The Reader> 케이트 윈슬렛 수상 장편애니메이션상 <월-E> 앤드류 스탠튼 수상 외국어영화상 <바시르와 왈츠를> 아리 폴만 수상 음악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 R. 라만 수상 주제가상 <레슬러 The Wrestler> 브루스 스프링스틴 ‘The Wrestler’ 선정 세실 B. 드밀 평생공로상 스티븐 스필버그 수상
아이맥스 카메라의 앵글에 비춰진 광대한 도시의 밤 풍경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거대한 고담시의 어두운 밤거리, 고층빌딩 위에서 그 거대한 진풍경을 내려다보는 배트맨은 실로 고단하다. 짙게 드리운 고담시의 어둠 속에서 배트맨은 홀로 악당들과 맞서 싸운다. 광대한 고담시에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은 배트맨이 짊어진 고단함의 무게를 대변한다. 도시를 지배하는 암묵적 질서가 부패한 정경유착의 뿌리를 내리고 악의 편의를 손쉽게 도모할 때, 배트맨이 홀로 일으키려는 정의는 과연 그 도시에서 어디까지 유효한 것인가.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도시의 밤을 고층 빌딩 위에 홀로 서서 관조하는 배트맨은 고민이 깊다. 그래서 그의 형상은 실로 고독하다.
범죄로 얼룩졌던 고담시의 거리는 밤마다 거리를 누비는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의 청결한 의지로 미화되고, 고담시의 밤을 지배하던 갱들은 죄악이 행해지는 곳에 어디든 나타나는 배트맨의 서치라이트 아래 몸을 사린다. 하지만 배트맨은 여전히 고민이 많다. 그는 악의 행동반경을 좁혀놓을 뿐, 박멸할 수 없다. 자신의 존재적 공포로 고담시의 밤거리를 지배했을 뿐, 그가 홀로 악을 몰락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배적인 억누름만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그에게 희망은 제도적 질서의 복원이다. 배트맨이 청렴하고 정의로운 검사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를 도시의 구원자라고 지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한 살충제를 뿌릴수록 강한 해충이 나타나는 것처럼, 고담시의 악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고 믿는 배트맨의 앞에 무시무시한 상대가 등장한다. 자본에 연연하지 않고 혼돈에서 비롯된 순수한 공포를 신봉하는 조커(히스 레저)는 순수한 악으로써 배트맨의 뒷면을 차지한다. -넌 날 완전하게 만들어.- 배트맨은 조커에게 존재의 목적을 부여한다. 조커는 배트맨의 기반을 전복시키며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배트맨이 가면을 벗고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무고한 시민을 죽이겠다는 조커의 경고에 시민들은 경찰 앞에서 외친다. ‘무법자가 무고한 시민의 목숨보다 중요한 거요?’ 가면을 벗은 브루스 웨인은 가면을 쓴 배트맨 앞에서 갈등한다. 어둠을 지배한 배트맨은 악당을 지배하는 과시적 존재인가. 그의 영웅놀이가 되려 시민을 위험으로 내모는 것일까.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영웅으로 죽거나 오래 살아서 악당이 되는 거지.
<다크 나이트>에서 중심포석은 당연히 배트맨이다. 하지만 수를 던지는 건 조커(히스 레저)다. <다크 나이트>는 조커를 제압하는 배트맨의 영웅수기가 아니다. 되려 반대로 배트맨의 존재적 가치를 시험하는 조커의 광기를 더욱 중요하게 다룬다. <다크 나이트>는 조커를 통해 배트맨의 가치적 양면성을 조명한다. 그것은 이 세계의 불완전성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조커는 배트맨을 비추는 거울이자 배트맨에 대한 불완전 연소를 돕는 촉매이며 그의 드러나지 않은 뒷면의 표정이다. 밤마다 가면을 쓰고 블랙슈트를 착용한채 악을 소탕하는 배트맨의 형상은 적나라하게 드러난 체제의 오류를 증명하는 바나 다름없다. 악이 지배하는 도시의 질서를 암묵적으로 수긍한 채 무기력하게 형태만 갖춘 권위 없는 제복의 사회. 도시를 피폐하게 만드는 부패와 강탈이 암묵적인 질서로 사회 밑바닥을 제압해버린 살풍경. 배트맨은 더 이상 제 기능을 이루지 못하는 사회제도의 부실한 팀워크를 돌파하는 단독드리블 주자다. 배트맨의 존재 자체가 고담시의 오류이며 사회적 시스템의 악순환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배트맨의 아이러니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고자 악의 무리를 소탕하는 배트맨의 존재는 결국 사회적 시스템의 한계가 구현하지 못하는 정의의 지표를 떠받드는 주춧돌에 가깝다. 배트맨의 월등한 기능성과 신속한 가동성은 악당들을 제압하는데 심리적으로, 활동적으로도 효과적으로 작용하며 결국 그의 존재 자체가 고담시의 평화를 유지하는 하나의 상징성으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배트맨은 제도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조커가 배트맨의 위기를 부각시키는 건 그 지점이다. 배트맨은 제도적 구속을 탈피한 개인의 능력으로써 제도의 지지를 견인하지만 이는 결국 제도적 허점의 정곡을 찌르는 행위에 가깝다. 조커는 배트맨의 딜레마를 공격한다. 가면을 쓰고 폭력을 통제하는 이의 폭력이 실은 제도적 질서를 유린하는 것임을, 폭력을 제압하는 필요악의 존재로써 배트맨을 규정하고 그의 결백한 정의를 자극한다. 자신의 폭력성과 배트맨의 폭력성이 양면의 동전처럼 맞닿아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것임을 부각시킨다. 그 와중에 시민들은 배트맨으로 인해 얻었던 평화의 기저에 억눌려 있던 폭력의 잠재성을 더욱 강하게 경험하고 인식한다. 정의를 구현하던 영웅 배트맨은 고담시를 조커의 표적으로 내모는 악의 소환자로 몰락한다. 그 과정에서 배트맨은, 그리고 브루스 웨인은 갈등하고 고민한다. 선을 넘어버린 영웅은 더 이상 돌아갈 수도, 돌아갈 곳도 없다.
조커는 일종의 사회학적 행위실험자에 가깝다. <다크 나이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의도가 개입되는 건 조커일 것이다. 제도적인 모순을 공격하는 행위자, 조커는 결국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양식으로써 작동되는 현대의 질서가 과연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를 되묻는 발의에 가깝다. 조커의 존재는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오류조차도 다스리지 못해 제도 밖의 능력을 빌어오는 현시대의 질서가 과연 보존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되묻는 상징적 부호이기도 하다. 그건 마치 조커의 끔찍한 기억을 잉태하고 보존하는 입가의 흉터가 그에게 미소의 형상을 부여한다는 아이러니와도 결합된다. 배트맨이 구축한 고담시의 평화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것이다. 그는 힘으로써 힘을 봉인했지만 결국 그건 방편적 행위에 불과하다. 결국 그가 정리한 쓰레기들을 정화하는 건 고담시의 법적 질서여야 하지만 제도는 더디고 무력한 검증은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조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 고담시는 혼란에 빠진다.
배트맨이 억눌렀던 폭력은 되려 조커의 광기를 입고 예전보다 거대하게 되돌아왔다. 하지만 배트맨은 가면을 벗을 수 없다. 배트맨의 가면은 제도의 한계가 만들어낸 기형적 마지노선이다. 부정을 잠재우기 위한 정의의 예외적 방편으로써 배트맨은 존재한다. 결국 배트맨의 가면은 보존된다. 하지만 그 보존을 위해 많은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희생된다. 그와 함께 스스로가 증명하고자 했던 정의의 구원자마저 타락한다. 배트맨은 더더욱 고립되어 간다. 블랙슈트의 아우라가 감추던 인간적인 나약함이 <다크 나이트>에서 넘쳐흐른다. <다크 나이트>는 이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처연한 응답과도 같다.
강렬한 액션 시퀀스조차 널뛰기적인 흥분을 발생시키지 않는 건 <다크 나이트>를 철저히 통제하는 어떤 지배력 덕분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이나 그리스 신화에서 튀어나온듯한 캐릭터들의 깊은 트라우마가 연동되어 <다크 나이트>의 내러티브에 거대한 감정의 바다를 형성한다. 강렬한 씬의 이미지가 아니라 지속적인 내러티브의 심리가 영화의 형태를 장악한다. 박쥐를 두려워하는 브루스 웨인이 박쥐형상을 한 배트맨으로 내면적인 공포를 외부로 방출하는 것처럼 자신의 찢어진 입을 광대와 같은 유희적 화장으로 가리는 조커는 (불분명한) 외부적 충격으로 학습한 경험적 공포를 외부로 확산시켜 나간다. 두 인물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공포로 발전시킨다는 측면에서 맞닿아 있다. 유사한 통과의례를 거쳤으나 이질적인 내면을 지니게 된 두 인물의 심리적 격돌은 격랑처럼 거칠지만 심해처럼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감정을 압도한다.
조커가 형성한 공황장애적 공포는 영화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하지만 그 정점을 찍는 건 투페이스다. 조커가 <다크 나이트>의 키워드라면 투페이스는 키홀더다. 궁극적으로 투페이스의 존재는 <다크 나이트>가 증명하고자 했던 역설의 종착역과도 같다. 인간의 나약한 심리는 때론 강건한 의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덧없이 몰락한다. 자신이 믿던 정의로부터 배반당했다고 믿는 투페이스의 잔혹한 얼굴은 인간의 나약한 심리가 빚어내는 비극적 양상을 연출한다. 그건 정의를 위해서 이중생활을 도모해야 하는 배트맨의 고단함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한 좋은 답변이기도 하다. 인간의 불완전성은 결국 체제적 오류를 발생시킨다. 모든 선악의 기제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작동된다. 끊임없이 제도는 인간의 변동적 심리로부터 도전을 얻는다. 결국 인간의 불완전성은 제도적 결함을 발생시킨다. 결국 그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건 일부 개인의 희생과 헌신이다.
무력한 질서를 유린하는 조커의 시험은 결국 정의로운 질서의 구축을 희망하던 배트맨을 패배자로 내몰지만 그는 자신의 패배를 통한 질서의 전진을 선택한다. 불의에 맞서는 정의의 사도들은 하나같이 희생양으로 몰락하거나 그 비극적 기제 안에서 더욱 지독하게 타락한다. 자신을 비난하는 시민의 손가락보다도 배트맨을 절망하게 만드는 건 자신이 희망으로 삼았던 정의적 선봉장의 타락이다. 분노로 인해 투페이스가 된 하비 덴트는 결국 배트맨의 영웅적 권위를 상실시킨다. 제도의 타락적 패배를 지우기 위해 배트맨은 자신에게 주어진 영웅으로써의 명예를 스스로 반납한다. 배트맨은 스스로 악당임을 자처한다. 세계를 구원하려던 개인적 헌신은 몰락해도 체제적 정의의 숭고함은 강건해진다. 무력하게 흐르던 체제의 몰락은 비범한 영웅의 희생을 볼모로 갱생한다. 영웅을 갈망하면서도 결국 영웅을 몰락시키는 모순적 체제는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비롯된다.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 해묵은 슈퍼히어로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낸 크리스토퍼 놀란의 의도는 <다크 나이트>에 이르러 명확해졌다. 배트맨의 기원을 다룬 <배트맨 비긴즈>는 단순히 시리즈의 부록이 되기 위한 프리퀄의 기능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배트맨의 기원뿐만 아니라 배트맨 슈트의 기술적 가능성까지 설득해버린 이 영화의 반도체적 세심함은 <다크 나이트>의 양식이 어떤 설득력을 포용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만드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배트맨 비긴즈>의 말미에 고든(게리 올드만)이 배트맨에게 내미는 조커 카드를 내미는 순간, 묻혀 있던 야심이 강렬하게 드러났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팀 버튼이 유아적인 악몽처럼 채색한 <배트맨>시리즈의 세계관과 평행한 지점에서 자신만의 치밀한 소묘를 채워 넣는다. 만화적인 양식을 배제하지 않되 완벽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재창조해냈다. 어쩌면 좀 더 논리정연하고 개연성이 확고한 반도체적인 히어로 무비를 완성시키고자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배트맨 비긴즈>가 그러했듯 <다크 나이트>는 그가 슈퍼히어로 만들기의 야심에 머무르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는 초현실적 비범함으로 무장한 영웅의 슈트 안에 웅크린 인간의 내면심리를 탐구한다. 시선은 점점 정치로, 사회로, 세상으로 확대된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인간에게 달렸다. 인간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배트맨의 뒷모습처럼 영웅은 점점 외롭고 고단해진다. 배트맨은 과연 그 고단함을 견딜 수 있을까. 브루스 웨인은 잠들 수 있는 밤을 맞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리고 이 세계는 영웅을 보존할 수 있을만한 그릇이 되는가. 이는 과연 촛불이 어둠을 밀어낼 수 있는가라는 고민처럼 힘겹지만 현실에 발붙인 이들이 지녀야 할 절박한 물음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시리즈의 위기를 목격했습니다. 이런 작품이 나온 이상, <배트맨>시리즈의 차기작을 누구도 맡으려 하지 않을 거에요.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시리즈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적어도 캣우먼까지 한번 욕심내 달라고 간절히 애원하고 싶네요.
<다크 나이트>를 봤습니다. 뒷골을 맞은 듯한 충격, 따위는 없었어요. 단지 보는 내내 스크린에 눈알을 박고 손톱을 물어뜯었답니다. 덕분에 제 왼쪽 엄지손톱은 만신창이가 됐군요. 하지만 괜찮아요. 미국 평론가들의 설레발을 태평양 건너에서 보고 마음채비를 갖추고 있던 어린 놈의 쉐이가 그 설레발을 수긍할 수 밖에 없고, 절대적으로 지지해야 함을 가슴 뛰는 기분으로 만끽하고 있다면 그건 필시 행복하고 뿌듯한 일이니까요.
어쩄든 히스 레저의 빈자리가 뒤늦게 태평양 바닷물이 사라졌음을 직감하듯 쓰나미처럼 밀려옵니다. 과연 이 영화만큼 상업적이고 예술적인 감각을 겸비한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요? 전 쉽사리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말하기가 힘듭니다. 엔딩 너머로 고요한 슬픔에 짓눌렸어요. 예수는 이런 심정으로 골고타 언덕을 넘었겠죠. 우리가 신의 아들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다크 나이트>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거죠. 전 그저 어린 양입니다. 전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죠? 맙소사. 아무리 생각해도 전 오늘 정말 엄청난 것을 봐버린 겁니다. 마이클 조단의 페이드 어웨이 만큼이나 그건 말도 안되는 느낌이라고요.
지난 2005년, 영국BBC방송은 ‘세상을 바꾼 대중문화’란 주제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밥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이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통기타 선율을 밑그림으로 삼아 나지막하게 흐르는 밥 딜런의 포크송은 겉으로 소박했지만 듣는 이를 안으로 요동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의 광기가 도사리고 차별이 만연하던 시대에서 밥 딜런의 노래는 대중의 처참한 분노를 대변했고 그들의 삶에 일말의 위안을 안겨줬다. 물론 그것이 그가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극 초반, 스크린에 나열되는 문구-Inspired by the music & many lives of Bob Dylan-와 같이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의 음악과 많은 삶으로부터 얻은 영감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쥬드(케이트 블란챗)를 비추는 카메라 너머로 들려오는 나레이션은 그의 영혼이 안식을 얻었음을 선포하며 게걸스러운 대중이 그의 유물을 공유할 것이라 말한다. 그 이미지는 각각 시인(poet), 예언가(prophet), 무법자(outlaw), 가짜(fake), 인기스타(star of electricity)의 얼굴로 나열된다. 이는 <아임 낫 데어>가 밥 딜런의 육체를 재연하는 전형적인 전기영화가 아님을 표명하는 바이기도 하다.
<아임 낫 데어>에서 등장하는 연령과 생김새가 각각 다른 6인의 이미지는 7가지 삶으로 호명된다. 그들은 각각 밥 딜런이 아니지만 그를 연상시키는 단면으로써 밥 딜런을 이룬다. 그들은 밥 딜런이면서도 밥 딜런이 아니다. 동시에 그 개별적 이미지들은 밥 딜런의 것이 아닌 ‘(게걸스러운) 대중’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 이미지를 생성한 건 타인으로부터 추상적으로 인지된 밥 딜런의 초상들이다. <아임 낫 데어>는 타자화된 밥 딜런을 콜라주 하듯 배열하며 스크린에 수집한다. 그는 세상의 불의에 맞서던 정의로운 포크 싱어였지만 일렉기타를 든 포크의 변절자였다. 좀처럼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적 은둔자이며, 세상의 규격에 맞추길 거부하는 무례한 저항가였다. 그는 무력한 급진주의자였으며, 강건한 자유주의자였다. 영화는 이처럼 밥 딜런을 규정하던 다양한 세계적 시선 속에서 무심코 존재하던 밥 딜런의 조각들을 거칠게 조립한다.
물론 밥 딜런을 연상시킬 만큼 그와 근접한 이미지의 쥬드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인물은 그의 삶 일부를 채취해내듯 낯설거나 그가 남긴 궤적을 통해 얻어지는 영감의 흔적처럼 막연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밥 딜런으로부터 발생한 것이거나 그를 만들어낸 근본이라 추측되는 것들이다. 하나같이 인물들은 밥 딜런을 향하고 있는 동시에 밥 딜런을 갈망하게 만든다. 예리한 추상과 철저한 해석으로부터 완성된 인물들은 밥 딜런과 현격하게 동떨어진 모습으로써 그를 완벽하게 배려한다. 심지어 밥 딜런의 이미지에 가장 근접한 쥬드가 여배우인 케이트 블란챗의 육체로 이뤄졌다는 점은 <아임 낫 데어>가 철저하게 인물들과 밥 딜런 사이에 괴리감을 형성시킴으로써 인물에 대한 주관적 시선들을 철저하게 객관화시키려 했음을 드러내는 징표와 같다.
<아임 낫 데어>가 밥 딜런을 규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써 밥 딜런을 연상시킨다는 점은 이 영화가 진정 밥 딜런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미지로 구체화시킬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드넓은 단상들을 하나로 융합하지 않고 스펙트럼 그 자체로 펼쳐놓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아임 낫 데어>는 가장 규정하기 힘든 전기적 영화이자 밥 딜런이라는 불가해한 이미지에 가장 탁월하게 접근한 작품으로 남을 수 있게 됐다. 모든 규정을 거부한 밥 딜런을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을 탁월하게 연상시킨다. 스크린에는 밥 딜런을 제외한 밥 딜런의 모든 것들이 담겨있으며, 그를 통해 관객은 밥 딜런이 존재하지 않는 밥 딜런의 영화를 통해 밥 딜런을 이해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이해’란 결코 정의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인지를 의미한다. 결국 <아임 낫 데어>는 한 인간에 대한 일방적인 시선으로부터 탈피함으로써 한 인간을 완벽하게 재생한다. 그것은 너비가 불분명한 스펙트럼을 지닌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경의에서 비롯된 탐구라 할만한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이 영화의 캐스팅 경위도, 뛰어난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한 이 영화의 OST 역시도, 하나같이 그 경의를 위한 것이라 말하기에 손색없이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