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가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에 대단한 극찬을 부여할 수 있는 건 단지 뛰어난 내러티브를 완성할 줄 아는 능력 때문이 아니다. 픽사의 스토리에는 체온이 있다. 대단히 능수능란한 유머를 구사하면서도 끝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고야 마는, 진짜 ‘감동’의 결정을 품고 있다. <토이 스토리 3>는 픽사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결정이다. 전편을 뛰어넘는 속편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속설을 2편도 아닌, 3편에서 다시 한 번 무색하게 만드는 결과물을 보고 있노라면 이걸 뭐라 해야 하나, ‘픽사’의 재능은 창작이 아닌 마법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랄까. <토이 스토리 3>는 애니메이션의 영역을 넘어서 감히 영화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트릴로지의 완결편이자 가장 멋진 피날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걸작이다. 하긴 최근 몇 년 사이 픽사가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은 하나 같이 걸작이었다. 사랑스럽다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건 그저 고맙다는 말이다. 픽사의 작품이, <토이 스토리 3>가 그렇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전편인 <슈렉 3>는 <슈렉>시리즈의 명성을 죄다 깎아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지 시리즈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강박과 캐릭터의 인기에 온전히 기대버린 듯한 성의 없는 완성도는 지난 두 편의 전작이 일궈낸 성과의 발목을 잡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슈렉 포에버>는 어딘가 의심스러운 작품이다. 단지 <슈렉 3>의 속편이란 점만으로도 <슈렉 포에버>는 시리즈의 배수의 진이나 다름없다. 전편의 실패를 만회할 것이냐. 하지만 <슈렉 포에버>는 다른 의미의 승부수를 던졌다. 시리즈의 피날레, <슈렉 포에버>는 시리즈의 마지막을 공언한 작품이다. 이는 비장한 결의의 일종이거나 모종의 비겁한 변명이다. 물론 판단은 작품의 완성도에 달렸다.
<슈렉 포에버>는 더 이상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전시용 괴물이 되어버린 듯한 슈렉의 불만스런 일상을 비춘다. 자신을 빼닮은 세 아이와 사랑하는 아내 피오나,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곁을 지키는 친구 동키와 장화 신은 고양이, 슈렉은 이들과 함께 매일 같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아니, 적어도 다른 사람들 눈에 행복하게 보일 것 같은 일상을 버틴다. 결코 변하지 않는 매일은 쳇바퀴 돌듯 찾아오고, 안락한 삶은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된다. 그러니까 슈렉이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의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점차 프리하고 와일드한 지난 날의 일상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그에게 단 하루나마 그 일상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다시 한번 냉정하게 말하자면 <슈렉 포에버>는 더 이상 이 시리즈가 원래의 아이덴티티를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증거처럼 보인다. 그리고 스스로 시리즈의 마지막을 선언한 지금의 입장에서는 마치 고백처럼 이해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리즈 안에서 성공적인 결과물이었다 평할 만한 <슈렉>과 <슈렉 2>는 기존의 디즈니 월드로 대변되는 착하고 순수한 동화적 패러다임을 전복시키는 패러디 세계관이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의 위트나 유머와 연동됨으로서 시리즈만의 확실한 가치를 어필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슈렉 3>를 비롯해 <슈렉 포에버>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그 세계관의 온전한 상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앞선 두 편과 달리 그 뒤를 잇는 두 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특징은 애초에 <슈렉>이 패러디하던 세계관이 온전히 껍데기만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자신이 패러디했던 세계관에 대한 독설은 사라지고, 그 알맹이가 사라진 껍데기들이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이며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물론 <슈렉 포에버>에서도 여전한 건 활기 넘치는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 그 자체다. 슈렉은 여전히 슈렉이다. 하지만 <슈렉>은 여전히 <슈렉>이 아니다.
물론 서사적으로 <슈렉 포에버>는 극명한 실패의 사례라고 해도 좋을 <슈렉 3>보다 나은 완성도를 품고 있다. 시리즈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작점과 연결된 에피소드를 착안하며 나름의 전개적 논리를 마련한 것도 발전적이다. 하지만 이는 애초에 <슈렉>이라는 시리즈의 아이덴티티를 회복할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닌, 혹은 그럴 가능성조차 희박해보이는 기획이다. 동화적 세계관의 껍데기를 엮어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함으로서 스스로 동화가 되려는 것처럼 보이는 <슈렉>을 본다는 건 자신의 앞선 전력을 온전히 망각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슈렉은 그렇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따위가 <슈렉>이 할 수 있는 해피엔딩이었던 것일까. 그나마 다행인 건 <슈렉 포에버>가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제 슈렉이 돌아왔다, 는 변명 따위로 끌려나온 슈렉의 어색한 모습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좋다는 말인 게다.
‘픽사(PIXAR)’가 늘 수준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모범생이라면 ‘드림웍스(Dreamworks)’는 머리는 뛰어나지만 때때로 노력이 부족해서 열등한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게으른 우등생 같다. 마치 ‘좋은 예’와 ‘나쁜 예’가 뚜렷하다고 할까.드림웍스의 신작 <드래곤 길들이기>는 그 중에서도 좋은 예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버크섬은 바이킹 부족의 고향이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가축을 약탈하고 목숨을 노리는 용과 맞서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강인하고 용맹한 전사가 되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꿈이자 업이었다. 부족 내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로 통하는 바이킹 족장 스토이크는 용을 괴멸시키기 위해 그들의 거주지를 찾아내길 원한다. 하지만 그 전에 더욱 더 큰 고민은 그의 아들 히컵이다. 도무지 전사와는 거리가 먼 체격과 성격을 지녔음에도 아들은 용과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며 번번이 사고만 치니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 스토이크의 고민은 말끔히 해결된다. 약골이라 용과 맞서기 어려울 것이라 믿었던 아들이 그 누구보다도 용을 다루는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 하지만 덕분에 히컵에게는 아버지가 모르는 고민이 하나 생긴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드림웍스라는 브랜드의 네임밸류 안에서 잉태된 기존의 작품들과 다른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슈렉>시리즈의 성공 이후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들은 의인화된 캐릭터들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춰 왔다. 동물의 탈을 썼을 뿐, 인간이나 다름없는 캐릭터들의 활동을 통해 위트를 건져내는 방식으로서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은 유효했다. 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는 명확하게 인간과 자연의 대비를 그리는 작품이다. 용과 대립하는 인간들의 세계관을 통해 두 대상 간의 교감을 그린다는 점에서 자연과 인류의 경계가 중첩적이던 전작과 뚜렷하게 다른 지향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드래곤 길들이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아바타>의 대단한 흥행 이후로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는 3D영상의 구현이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아바타>이후로 스크린에 가장 탁월한 3D영상을 구현하는 작품이라 자부할만한 작품이다. 물론 두 작품 사이에 간극은 있다. 실사를 바탕으로 구현한 <아바타>의 3D영상과 달리 <드래곤 길들이기>는 기본적으로 CG애니메이션의 툴을 바탕으로 제작된 3D영상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두 작품의 완성도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는 분명 <아바타>이후로 3D영화라는 포맷 안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좋을 작품임에 틀림없다. 3D기술을 볼거리로서 충분히 활용하는 동시에 단순하고 명료한 스토리에 적절한 감동적 요소를 삽입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적 몰입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드림웍스의 전작인 <몬스터 vs 에이리언>이 습작과 같은 3D애니메이션이었다면 <드래곤 길들이기>는 완성형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드래곤 길들이기>는 드림웍스의 메인 프랜차이즈였던 <슈렉>시리즈의 뒤를 잇는 포스트 드림웍스 시리즈로서 빈자리를 채울만한 작품이라 단언해도 좋다. 이미 새로운 시리즈 제작에 착수한 <쿵푸팬더>처럼 <드래곤 길들이기>의 시리즈 기획 역시 이미 공표된 상태다.다만 그 동안 드림웍스가 시리즈를 거듭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유지하지 못했던 전례들을 생각해본다면 불안한 예감이 동반되는 것도 사실이다. 데뷔에 성공한 캐릭터를 밑천으로 삼아 방향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무작정 서사적 레일만 깔고 전진해나가듯 시리즈를 거듭하는 방식은 <쿵푸팬더>와 <드래곤 길들이기>를 통해 새로운 국면 전환에 성공한 드림웍스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 할만하다.
물론 차후의 고민을 떠나서 현재의 성과, 즉 <드래곤 길들이기>는 상당히 인정받을만한 성과에 가깝다. 명확한 기승전결로 이야기의 줄기를 뚜렷하게 세우고, 교감과 성장이라는 테마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통해 명료한 감동마저 거둔다. 또한 다양한 디자인과 개성을 캐릭터와 순발력 있는 위트를 통해 탁월한 오락적 재미를 더한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오락영화로서의 평형감각과 기술과 연출의 균형감각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대한 큰 스크린을, 3D상영관을 찾길 권한다. 지갑을 열수록 재미는 극대화될 것이다.
픽사가 늘 수준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우등생이라면 드림웍스는 재능은 뛰어나지만 게으른 우등생 같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다행히도 드림웍스의 ‘좋은 예’에 해당한다. 가능하다면 최대한 지갑을 열어라. 가장 큰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3D 입체영상으로 관람할 때 만족도는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감동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교과서적인 작품이라 추천할만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영국의 수학자인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루이스 캐럴이란 필명을 앞세워 1965년에 발표한 동화다.지극히 개인적인 의식의 흐름을 통해 진전되는 서사와 비상식적인묘사가 동원된이 작품은 비논리적인 기괴한 설정들이 도처에 난무함에도 직관적인 상상력과 천진난만한 감성을 동반하며 그 세계관에 대한 호기심을 당긴다. 동명의 제목 그대로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럴이 창조한 그 기이한 세계관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하지만 팀 버튼은 루이스 캐럴이 손으로 써내려 간 세계를 영상으로 치환하려는 노력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팀 버튼이 참고한 건 비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뿐만이 아니다. 또 한번 앨리스를 통해 특별한 모험담을 그려낸 루이스 캐롤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역시 팀 버튼의 세계로 편입됐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루이스 캐롤이 아니라 그 결과물이 온전히 팀 버튼의 것이란 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본격적인 서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그것처럼 앨리스(미아 와시코우스카)의 굴 속 추락으로 시작된다. 분명 유사한 방식으로 그 특별한 세계관에 침입하듯 발을 들이지만 전반적인 이야기는 그 원판과 다른 뉘앙스를 발생시킨다. 최소한 루이스 캐롤의 원작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애초에 그 세계관에 발을 들일 뿐 재현적 가치에 관심이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원작의 포스트(post)로서 서사를 설정하고 있다. 서사적인 순차로 볼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후에 등장한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등장 캐릭터와 세계관을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보다 흥미롭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두 작품을 포괄하고 변주하되 어느 쪽에도 부합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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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헬레나 본햄 카터)과 하얀 여왕(앤 헤서웨이)이 서사의 주요 대목을 차지하고 있으며 트위들디와 트위들럼(매트 루카스)과 같은 캐릭터도 등장하는 동시에 재버워키나 도도새처럼,역시 후자의 세계관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서사의 결정적 줄기에 활용된다. 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 제목과 달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영역을 넘어 루이스 캐롤이 창조한 앨리스의 세계관을 뒤엉켜 아우르고 있음을 명시한다. 모자 장수(조니 뎁)와 하얀 토끼(마이클 쉰 목소리)는 두 작품을 포괄하는 상징적 장치에 가깝다.원작에 비해 성숙한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그 세계에 등장하는 소녀와 동일한 인물이되 팀 버튼의 야심을 대변하기 위해 내세워진 캐릭터다. 더 확실히 말하자면 앨리스는 팀 버튼 그 자신이라도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이 완성한 ‘이상한 세계’를 다시 한 번 팀 버튼이 재창조한 이상한 세계다. 궁극적으로 루이스 캐롤의 취향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그 세계는 역시나 개인적인 취향을 예술적 감각으로 승화시킨 팀 버튼에게 남다르지 않은 감상을 부여했을 것이다. 덕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팀 버튼 스스로가 자신을 위해 마련한 자전적 작품으로 치장했다 해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비정상적 기질을 창의적 에너지로 변환시킨다는 건 분명 여러 모로 남다르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직접적인 대사까지 동원하며 비정상적이라 규정된 창의력에 대한 응원을 전달하기도 한다. –멋진 사람들은 대부분 비정상이지.- 마치 팀 버튼 자신 스스로에게 바치는 헌사이거나 연민과 같은 위로처럼 들릴 정도로 때때로 비장한 느낌이 동원되기도 한다. 앨리스에게 과거에 ‘이상한 나라’에 온 적이 있다고 말하는 ‘이상한 나라’의 캐릭터들은 ‘이상한 나라’의 현실이 꿈이라 믿는 앨리스의 망각을 일깨운다. 이는 팀 버튼 스스로의 다짐이거나 혹은 그가 전달하고 싶은 일종의 메시지처럼 보인다. 동심의 망각, 혹은 자유로운 사고의 고갈은 대부분 어른이 되면서 벌어지는 관성적인 변화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가 당면해야 했던, 혹은 감내해야 했던 현실을 반영하듯 앨리스의 극복을 유치할 정도로 비장하게 묘사해낸다. 이상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팀 버튼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세계관을 디자인으로 삼아 팀 버튼의 취향을 담아낸 결과물이다. 이는 곧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팀 버튼에 대한 호불호에서 시작할 때 보다 온당한 접근이 가능한 작품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인위적인 색감만으로도 <찰리의 초코릿 공장>을 연상시킨다. -하물며 두 작품은 원작 동화를 스크린에 옮겼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원작을 도구처럼 참고한 뒤,온전히 자신만의 판본을 디자인했다는 점에서특별한 작품이다. 원작의 캐릭터들은가공된 이미지를 얻고, 관계 구도는 뒤섞이고보다 강한 성격을 자랑하는 캐릭터로서 위치를 지킨다. 캐릭터의 변주는 원작과 영화의 거리감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요인이다.동시에 배우들의 연기는 그 의도를 수행하기 위한 자산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헬레나 본햄 카터인데 외형만으로도 눈에 띄게 과장된 머리 크기로 등장하는 그녀는 히스테릭한 블랙코미디로 극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를 어필한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끝에 다다를수록 그 기이한 세계를 목격하는 이들에게 허전한 감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그 세계관의 디자인은 팀 버튼이 품은 기괴한 발상의 결과물로서 스크린에 착상되지만 그 디자인에 담아낸 서사는 (팀 버튼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상투적이며 한편으로 식상할 정도로 안이해 보인다. 평범을 강요하는 세계에서 고립되듯 살아가던 이상한 앨리스가 비정상적인 이상한 나라 속에서 자아를 찾고 강한 의지에서 비롯된 성취를 완성하는 과정이란 팀 버튼 스스로를 이입해내는야심의 반영에 가깝다. 하지만 그 야심을 품은 서사에는 어떠한 야심도 없어 보인다. 마치 디자인을 전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제작된 결과물처럼 단조로운 서사는 특별한 감흥으로부터 객석을 차단해낸다. 3D를 전면에 내걸었지만 그 효과도 딱히 탁월해 보이지 않는다.-애초에 이 작품은 3D로 촬영되지도 않았다.-결국 팀 버튼을 설명하기 위한 작품으로서는 유용하지만 팀 버튼의 대표작이라 불릴 만한 작품이라 말하긴 어렵다. 그가 지금까지 선사했던 매혹적인 작품들을 경험했던 이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단지 이상한 이미지로 가득한 팀 버튼의 모방작이거나 습작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매혹이 사라진 팀 버튼의 기괴함이란 그만큼 허전하다. 멋진 사람들은 대부분 비정상일지 몰라도, 비정상이 항상 멋진 건 아니다.
지난 해 11월, AFM(American Film Market)에 한국VFX업체들의 공동 부스가 차려졌다. AFM은 칸 국제영화제 필름마켓(Marche du Film), 밀라노 필름마켓(MIFED)와 함께 세계 3대 필름마켓으로 꼽히는 행사다. 문화체육관광부(문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한콘진)의 주최로 이뤄진 이번 마켓 진출에 참여한 국내 7개 업체, 인사이트비주얼, 모팩 스튜디오, EON디지털필름스, DTI픽쳐스 등은 해외영화관계자들과의 미팅을 통해 활발한 홍보활동을 펼쳤다. 이 자리에서 문광부와 한콘진은 할리우드의 바이어를 초청한 비즈니스 미팅을 추진하는 등 국내업체들의 홍보를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일임했다. “영세한 국내 업체가 국제행사에 참여해 부스를 내는 건 예산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공동부스라는 개념으로 국내업체들에게 기회를 열어준 셈이다.” 한콘진 미래융합콘텐츠단 조하섭 차장의 말이다.
“전체적인 그림에서 AFM은 지원정책의 일부다.메인은 국내외 영화나 방송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CG업체에게 제작지원을 일부 지원해주는 정책이다. 업체의 가격경쟁력과 제작 품질을 높일 수 있도록 직접 지원하자는 취지다. 그런 차원에서 AFM참여는 마케팅까지 부가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문광부 융합콘텐츠팀 박상욱 대리의 설명이다. 업계는 이에 대해 고무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할리우드는 검증이 된 업체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초기 진입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조건을 이루며 시작될 수 없겠지만 정부 지원을 통해 한 작품을 잘 끝낸다면 지속적인 거래를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 본다.” 인사이트 비주얼 손승현 제작 이사의 의견이다. 결국 정부의 지원은 개별 업체들의 자생적 토양을 마련하기 위한 비료로서 분명 유용한 것이다.
문광부는 지난 1월 14일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CG산업 육성계획’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CG산업의 육성을 위해 오는 2013년까지 약 2천억 원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라 밝혔다. 문광부가 전달한 자료에 따르면 2013년까지 산업육성을 위해 5대 중점과제에 2천억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 5백억 원대에 이르는 CG전문 펀드를 조성하고, 국내 업체들에 대한 제작비 환급 등의 세제 지원 사업을 펼치는 동시에 영세한 업체들의 기술력 확보를 위해 고가의 제작장비와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실효적 방안을 마련한다. 또한 그 동안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업체가 개별적으로 실행하기 어려웠던 기술투자계발을 지원한다. 이를 통해 국내 VFX업체들의 기술적 발전을 꾀하고 동시에 전세계적으로 대두되는 3D기술을 확보해나간다는 방침이다. 그리고 글로벌 시장 개척을 위해 국내업체들의 해외프로젝트 참여를 이끌고 칸영화제나 AFM등의 마켓에서 비즈매칭(Business Matching)과 같은 자리를 마련하는 등, 마케팅 중계를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이런 밑그림을 토대로 국내업체의 해외진출을 성사시킴으로써 2013년까지 1조 1천억원의 시장 확보와 약 3만 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문광부의 움직임은 현재 영상산업 전반의 변화적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아바타>의 전세계적 돌풍은 그동안 막연한 예언처럼 떠돌던 3D영상의 비전을 보다 확실한 증언이 됐다. 이는 단지 영화와 같은 영상예술의 방향성 뿐만 아니라 디스플레이를 비롯한 모든 영상산업 전반의 움직임을 가속화시키는 실정이다. 현재 문광부의 CG산업 지원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아시아 최대의 CG제작기지 구축’이라는 거대한 밑그림도 전세계 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정부의 태도를 보다 확고히 대변한다. 하지만 단지 시장의 규모와 기술적 접근성만으로 산업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계산에는 위험한 구석이 있다. “할리우드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영화 컨텐츠를 팔기 때문에 <아바타>와 같은 5천 억 규모의 제작비를 투입할 수 있다.” <아바타>의 VFX를 담당한 웨타 디지털에서 텍스처 아티스트와 라이팅 테크니컬 디렉터를 맡았던 정병건의 말이다. 시장의 스케일을 확장하는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도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동반했을 때 보다 발전적인 해답이 가능하다. “단순히 기술적으로만 놓고 보자면 우리가 할리우드의 7~80% 수준은 된다고 본다. 문제는 아무리 기술력이 발전해도 그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거다. 기술력을 과시할만한 컨텐츠가 부재하다.” DTI픽쳐스 양석일 실장의 말이다.
그동안 정부의 문화지원 정책은 항상 자본의 결과적 성과만을 염두에 두고 이뤄졌다. 게임 산업과 만화 산업은 좋은 전례다. 기존에 산업적 인프라가 존재했던 게임 산업은 정부의 지원을 통해 보다 확고한 산업적 가치를 창출했다. 하지만 만화 산업은 반대로 정부의 지원이 독이 됐다. 자본의 투자에는 인내심이 없다. 만화 산업의 열악한 인프라는 단지 산업적 기반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닌, 창작적 기반의 틀이 확고하지 않다는 데서 비롯된 문제였다. 하지만 정책은 확실한 실물적인 결과물을 원했고, 그 결과 졸속으로 완성된 지원적 결과물들이 되레 창의적 욕구를 감퇴시키며 산업적 가능성에 찬물을 끼얹었다. 현재 정부의 CG산업 육성은 3D영상산업의 비전까지 내다보고 있다. 문제는 그 정책의 태도다. 장기적인 인프라의 확충과 기술력의 확보를 염두에 둔 정책의 발효는 열악한 토양 위에서 발전을 거듭해온 국내 업체들을 고무시킬 만한 사안이다. 하지만 산업의 육성에 대한 장기적인 플랜과 당장의 손실을 감수할만한 인내력이 있는가라는 사안에 대해서 고심한 흔적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아바타>의 흥행이 남긴 자본적 가치를 선망하기 이전에 <아바타>라는 작품이 만들어진 산업적 배경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할리우드가 만들어내는 흥행작들은 단지 기술력의 발전만으로 이룩한 결과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 기술력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창작자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국내CG산업의 발전을 단순히 해외시장의 자본가치만으로 한정짓는 태도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다.
사실 정부의 정책적 주도는 국내 업체들의 요구를 통해 이뤄졌다. 사실 오래 전부터 영세한 국내 업체들은 정부의 지원에 대해 개별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가 전달될 통로를 찾지 못했다. 지난 해 CG산업협의회의 설립은 이런 요구를 통합할 필요성을 느낀 업체들의 합의에 따른 것이다. 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예술대학 디지털 아트과 김재하 교수는 말한다. “기술발전에도 불구하고 영세한 규모를 벗어나지 못하는 업체들의 목소리가 모아졌다. 글로벌 프로젝트를 위한 얼라이언스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등장했고 이를 전달할 창구가 절실해졌다.” 2008년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협의회는 지난 해 8월에 설립됐고, 정부의 정책적 자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AFM참여와 이번 육성계획 발표는 그 첫 번째 결과물이다. EON디지털필름스의 정성진 실장은 이와 같이 말한다. “일단 협회의 설립은 큰 의미를 지닌다. 기존의 정통부 시절부터 애니메이션 분야를 키우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시장을 키우는 게 목적이었지만 실패한 셈이다. 업체들이 바쁘게 일해도 잘못된 목소리를 듣고 그들만의 잔치를 치른다면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협회를 만들어서 한 목소리를 낼 때 정부 쪽에서 그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건 발전적이다.” 결국 정책의 성패는 실무자들이 시장과 현장의 실정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 수 있는가에 달린 셈이다. 의미 있는 첫걸음이 마지막까지 큰 족적을 이룰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유년 시절부터 플린트는 남달랐다. 그 아이는 남들이 떠올리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해냈고,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었다. 문제는 그 재능이었다. 그 재능은 일종의 불운처럼 주변사람들을 비롯해 자신에게마저도 끝없는 민폐를 끼쳤다. 자신의 발명이 세상에 유익한 재능이 되길 바라던 소년은 결국 마을의 골칫거리로 소문이 자자한 성인으로 자랐다. 그리고 성인이 된 플린트는 발명가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마을에 끝없는 민폐를 이어나간다. 그런 어느 날, 그 삶에 반전이 찾아온다. 먹을 거라곤 정어리밖에 없는 마을에서 살아가던 플린트는 물을 음식으로 바꾸는 기계를 발명하고 우연히 기계를 하늘로 띄워보낸 플린트는 이를 통해 마을에 무전취식의 행운을 가져다준다. 말썽의 원흉이라 손가락질 당하고 모든 이들의 무시를 한 몸에 받았던 플린트는 이로 인해 마을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사실상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이 취하는 기본적인 설정, 예를 들자면 하늘에서 음식이 떨어진다는 상황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이미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인지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음식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그 자체가 이미 끝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갖가지 음식 세례를 맞은 몸은 소스로 범벅이 될 것이며 길거리는 부패한 음식의 악취가 들끓을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은 현실적인 세계관을 두르고 있되, 그 현실성을 풍자의 수단으로 치장한 작품이다. 영화가 연출하는 갖가지 상황들은 고의적인 농담에 가깝다. 사실적 증명에 실패한다기 보단 고의적인 비틀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 유머가 겨냥하는 팔할의 과녁은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가 차용하던 패러다임의 전복적인 패러디에 가깝다. 농담에 가까운 상황을 마구잡이로 건너뛰는 캐릭터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농담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단순하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던 아들을, 그리고 마을의 사고뭉치를 모든 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키는 과정은 할리우드 영웅스토리의 진부함을 그대로 차용한 결과물에 가깝다. 다만 진지한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크고 작은 농담들로 이뤄진 코미디의 틀거리로서 이해할 때 이는 유용한 방식이 된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은 드라마로서의 내러티브를 통해 이야기로서의 뼈대를 세우되, 본질적으로 자신의 목적이 양념처럼 쏟아지는 유머의 향연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작품이다. 만화적인 과장성을 노골적으로 내세우면서 그것의 활용도를 극대화시키는, 장르적 허용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해내고 있다. 진부한 성장드라마의 약점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유머와 재치로서 극복해냈다. 그리고 그 유머와 재치가 즐길만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얻어맞을지 모른다는 현실적 두려움보단 그 상황이 주는 놀라운 재미를 만끽하게 만든다. 관습적인 사연에서 벗어나지 않는 드라마의 진부한 가뭄은 지속적인 강우량을 자랑하는 번뜩이는 유머로 극복된다.
(연원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근미래에 인류는 지구로부터 4.4광년 떨어진 ‘판도라’ 행성에서 대체에너지 ‘언옵타늄’을 채굴해 지구로 공급한다. 소량만으로도 고효율의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자기장 물질 언옵타늄은 지구에서 kg당 2천만 달러에 거래되는 덕분에 기업의 영리적 욕망을 부채질한다. 미해병대 출신이지만 다리가 마비되어 보행이 불가능한 제이크 셜리(샘 워딩턴)는 약 5년여 간의 수면우주비행을 거쳐 판도라 행성에 착륙한다. 그가 판도라 행성에 온 건 언옵타늄의 채굴과 관련해 과학자로서 핵심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중, 죽음을 맞이한 일란성 쌍둥이 형의 과업을 이어받기 위해서다.
그 과업이란 제이크 셜리의 일란성 쌍둥이형의 유전자를 판도라 행성의 원주민인 '나비(Na'vi)'족의 유전자에 결합해 만들었다는 ‘아바타’를 형과 유전자가 일치한 제이크 셜리에게 맡기는 것. 나비족의 주둔지에 매장된 막대한 언옵타늄을 채굴하려는 기업적 야심은 제이크 셜리에게 불구가 된 다리를 고칠 수 있는 수술비를 보장하며 그를 판도라 행성으로 이끌고 그에게 아바타의 육체를 입고 나비족의 본거지를 염탐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아바타에 접속한 제이크 셜리는 자신이 빌린 새로운 육체가 두 발을 땅에 딛게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발을 디딘 판도라 행성의 밀림에서 거대한 현지야생동물의 습격을 받게 된 그는 일행으로부터 낙오돼 죽을 고비를 맞이하지만 나비족 여성 네이터리(조 샐다나)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그리고 비로소 ‘생명의 나무’가 있는, 나비족의 본거지로 들어서게 된다.
친자연적인 노스탤지어 이미지
<아바타>는 분명 혁신적인 비주얼만으로도 그 가치에 대한 의심이 불필요한 영화다. 지금까지 '3D'라는 수식어를 걸고 등장한 기존의 작품들이 시도라는 단어 안에서 존중받아 왔던 것과 달리, <아바타>는 비로소 성과라는 단어를 동원해도 좋을만한 값어치를 드러낸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스크린에서 3D비주얼을 실험하며 답보와 약진의 데이터를 구축해온 로버트 저메키스와 달리 제임스 카메론은 장고의 시간을 인내하며 단 하나의 결과물로서 온전히 새로운 토대를 구축해버릴 참이다. <아바타>가 새롭다는 수식어를 얻을 수 있는 근거는 이미지에 놓여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단지 그 이미지의 형태를 지칭하는데 국한되는 건 아닐 것이다. <아바타>의 세계관으로부터 거둬들일 수 있는 특별함은 그 외형적 디자인보다도 판도라의 대자연과 (유사인류 형태를 띤) 나비족의 내면적인 교감방식을 전시하는데서 비롯된다.
<아바타>는 디지털 네트워킹 시스템을 시냅스의 유기적 신호로 호환하며 창의적 소재와 친화적 주제를 동시에 납득시킨다. 판도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나무’는 판도라의 메인보드이자 심장이다. 판도라의 대자연은 생명의 나무와 교감하는 방대한 네트워크 망이자 형광색 혈액이 흐르는 혈관으로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다. 판도라 행성의 식물과 대지는 마치 센서를 장착한 터치스크린처럼 외부의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때마다 LED조명에 가까운 선명한 조도를 밝힌다. 개체들의 반응은 서로를 연결한 네트워크를 통해 거대한 정보망을 구성한다. 형광 색채감을 드러내는 판도라의 야경은 시각적으로 황홀한 결과물이지만 그 조직적 체계를 완성한 아이디어가 보다 놀라운 산물에 가깝다. <아바타>는 창조와 응용이라는 창작적 협주로서 거대한 세계관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전율을 이루는 영화적 클라이맥스로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이나 다름없다.
현대적인 감각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판도라의 풍요로운 원시림 이미지는 주제의식을 단단하게 매만지는 수단으로서 효과적인 역량을 발휘한다. 디지털 문명에서 비롯된 착상이 자연적 풍경과 접목됐을 때 발생하는 감상적 결과가 단순한 교훈적 주제를 순수의 경지로 이끌어낸다. 오만한 기계적 문명을 동원해 나비족의 자연을 파괴하고 유린하는 인류의 민폐는 판도라 행성의 풍요로운 대자연을 통해 더욱 날카롭게 두드러진다. 동시에 3D비주얼을 위시하는 기능적 이미지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기술적 발전을 과시하는 이미지 기술을 진정한 영화적 표현 방식으로서 영화에 녹여낸다는 점에서 더욱 선명한 성과가 드러난다.
자연친화적 노스탤지어, <아바타>는 노골적인 주제의식을 2시간 40여분의 러닝타임 동안 단순하고 명확하게 밀고나간다. 문명의 발전 속에서 영리를 추구하는 인류의 어리석은 욕망은 손쉽게 자연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주거지를 무덤으로 만들어나간다. <아바타>에서 인류는 점차 푸른빛을 잃어가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외계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곳에서마저 파괴를 일삼는 비루한 종족으로 묘사된다. 문명과 자연의 대비를 통해 인류의 오만을 지적하는 주제의식을 지닌 영화들은 <아바타>이전에도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래서 <아바타>가 상투적인 영화라고 확신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단순하다’와 ‘엉성하다’의 의미는 명확히 다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바타>의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주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가라는 형태로서 이야기될 때 더욱 마땅한 평가가 가능해보인다.
휴머니즘을 역설하는 ‘아바타’ 세계관
<아바타>가 전시하는 판도라의 생태계는 사실상 지구의 생태계를 리모델링한 것에 가깝다. 그 이미지의 형태가 익숙한 것이라기 보단 그 이미지의 모티브가 명확히 읽힌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보고 있지만 새로운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에 다다르진 않을만한 풍경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판도라는 지구의 ‘아바타’ 같은 행성이다. 사실상 <아바타>의 세계관 자체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토대로 구축된 ‘아바타’ 같은 세계관이며 이로서 <아바타>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거대한 우화로서 기능한다. 아바타의 육체를 빌어 가상의 세계로 로그인해 생소한 외계문명에 링크한 뒤 대자연의 정보를 공유하고 그 세계를 체험하는 제이크 셜리는 곧 관객을 위한 ‘아바타’이며 <아바타>라는 영화 자체가 이 세계의 발전적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한 ‘아바타’와 같은 영화인 셈이다.
<아바타>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모티브는 그 외형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자의식마저도 이 세계와 연동돼있다. 제국주의 근대사를 비롯해 강자가 약자를 침탈하는 수난의 기록이 역사로서 당당히 자리한 인류의 서사는 <아바타>를 이루는 가장 명확한 근간일 것이다. 오랫동안 지속된 인류의 폐해적 역사를 2시간 40여분의 러닝타임에 반영한 <아바타>는 폭력적인 인류의 욕망을 고발하는 이미지와 그 욕망의 자멸을 그리는 내러티브로서 강한 공분과 희열을 전달한다. 나비족의 본거지를 무참히 파괴하는 인간들의 공세는 그 자체를 보는 관객의 마음을 짓이겨버릴 것이다. 판도라의 대자연이 붕괴되는 광경을 통해 관객은 인류가 저지른 침탈과 파괴의 역사를 환기시킬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단순하고 명확하게 의표를 찌른다. 후반부에 (아바타의 육체를 빌린) 제이크 셜리가 이끄는 나비족의 역공이 대단한 쾌감을 부르는 것도 그런 감정으로부터 연동된 상승효과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동족들의 죽음에 대단한 희열을 느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바타>는 인류의 자멸을 통해 인류의 휴머니즘을 역설하는 작품인 셈이다. 이미지의 혁명이란 수사는 실상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아바타>가 영화의 미래라 불릴만한 근거도 이 지점에 있다.
<아바타>의 스크린은 단순히 기술적 진화를 전시하는 윈도우가 아니다. <아바타>에 동원된 기술적 진화는 영화적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 도구로서 제 위치를 확고히 지킨다. 이는 3D비주얼이라는 기술적 대안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 안에서도 발전적인 답변이다. 단순히 전시적 효과로서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3D비주얼은 분명 ‘영화적’이란 단어 안에서 충분한 가치를 설득한다. 물론 <아바타>는 단순히 체험적 행위만으로도 가치가 온당한 영화다. <아바타>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건 그 대단한 수준의 체험이 숭고한 감정적 파고를 이끌어낸다는 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바타>는 기술적으로도, 표현적으로도, 현존하는 3D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완성을 이뤘다 장담해도 좋은 첫 번째 성과다. 제임스 카메론은 로버트 저메키스가 결코 헤어나지 못한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의 무덤 옆에 자신의 비석을 세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모션 퍼포먼스 캡쳐’라는 새로운 촬영기술을 도입해 완성했다는 <아바타>의 디지털 캐릭터들은 낯선 이미지를 통해 비현실적인 판타지의 상상력을 두른 채 실사적인 체험을 가능케 한다. <아바타>는 디지털 캐릭터의 눈동자에 감정을 구현했다. 실제 배우의 외모가 서린 동시에 나비족의 외형적 특성이 포장된 <아바타>의 디지털 외계인들은 선명한 눈동자의 자연스런 동공 수축과 근육 이완을 디테일하게 전시하며 이를 통해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킨다. 그리고 그 디지털 캐릭터들의 눈망울은 <아바타>의 감정적 깊이를 드러내는 호수나 다름없다. 그 눈은 제임스 카메론을 테크놀로지의 장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방점인 동시에 <아바타>의 기술적 진보에 진심마저 담아낸 진화의 산물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를 통해 우리가 두른 세계의 폐해를 진화시키고자 ‘아바타’와 같은 세계를 묘사하고 이를 통해 신인류의 탄생을 촉구한다.
<타이타닉>을 통해 자신을 세계의 왕이라 천명했던 제임스 카메론의 오만한 발언은 <아바타>를 거쳐 진정한 자신감으로 진화했다. <아바타>라는 결과물로서 자신의 왕좌를 증명해냈다. <아바타>는 분명 새로운 세기를 일군 영화적 유산이라 불릴 만한 작품이다. 장담하건대 분명 장차 그렇게 일컬어질, 21세기 고전이 탄생했다.
<아바타>를 치장하는 팔 할의 수사는 이미지의 혁신이다.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제임스 카메론이 12년의 장고 끝에 공개한 <아바타>는 분명 기존의 3D영화들과도 온전히 궤가 다른 이미지의 역작이라 칭할만한 결과물이다. 단순한 시각적 체험만으로도 본전은 거두다 못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해도 좋을 만큼 <아바타>가 전시하는 이미지들은 대단한 만족감을 부여한다. 하지만 다만 그것뿐이란 평은 온당치 않다. <아바타>를 상찬할만한 근거를 단순히 그 이미지의 형태에 국한해 발색할 필요는 없다. <아바타>는 그 거창한 이미지로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근미래의 인류는 지구로부터 4.4광년 떨어진 ‘판도라’ 행성에서 고효율 자기장 에너지원인 ‘언옵타늄’을 채굴해 지구의 에너지난을 극복한다. kg당 2천만 달러에 거래되는 언옵타늄은 기업의 영리적 욕망을 부채질하는 물건이다. 다리가 마비된 탓에 보행이 불가능한 제이크 셜리(샘 워딩턴)는 판도라 행성에서 언옵타늄 채굴과 관련된 핵심프로젝트를 수행하다 죽음을 맞이한 일란성 쌍둥이 형의 과업을 이어받기 위해 약 5년여 간의 수면우주비행을 거쳐 판도라 행성에 착륙한다. 그곳에서 그는 형의 유전자를 판도라 행성의 ‘나비(Na'vi)'족 유전자에 결합해 만든 ‘아바타’에 접속하고 나비족의 본거지를 탐색하라는 명령을 이행한다.
지금까지 '3D'라는 수식어를 내세운 작품들이 시도라는 단어 안에서 존중 받아 왔다면 <아바타>는 이제 그 첫 번째 성과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될만한 작품이다. <아바타>가 선사하는 3D비주얼은 분명 그 이전의 어떤 3D영상들과도 차별화된 진화적 눈높이를 선사한다. 로버트 저메키스가 오랜 시간동안 답보와 약진을 전전하는 사이, 제임스 카메론은 단 하나의 결과물로서 완성적 성과를 드러낸다. 시각적 피로감이 낮아진 반면, 보다 생생한 이미지를 선사하는 <아바타>는 디지털캐릭터의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마저 뛰어넘는다. 잔상의 오차가 현격하게 사라진 <아바타>의 디지털캐릭터는 빠른 속도감 속에서도 선명한 형태를 유지하며 현격한 입체감을 전달한다.
향상된 이미지의 성과로만 <아바타>를 설명하기란 섭섭한 일이다. 사실 <아바타>가 구축한 판도라 행성의 세계관은 지구의 이란성 쌍둥이라 해도 좋을 만큼 명확한 모티브를 두르고 있다. 크기와 형태가 다르지만 인간을 연상시키는 '나비(Na'vi)'족을 비롯해 판도라를 채우는 생태계 이미지는 대부분 지구로부터 이양된 세계관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에 인류의 ‘아바타’라 할만한 세계를 그려낸다. <아바타>를 비범하다 명할 수 있는 궁극적 이유도 그 지점에 놓여있다. <아바타>는 문명과 자연의 대비를 통해 인류의 오만한 역사를 성찰하고자 한다. <아바타>가 동원하는 판도라의 이미지는 그 성찰을 도모하기 위한 기시감의 현장이나 다름없다. 형태의 차이가 발견되지만 궁극적으로 판도라는 지구의 또 다른 판본인 셈이다. 그 또 다른 판본의 세계관을 유린하고 파괴하며 그 안에 자리한 약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들의 군상은 결국 인류가 걸어온 오만한 역사의 재현과 같다.
디지털 네트워킹 시스템을 시냅스의 유기적 신호전달 체계로 호환하는 <아바타>의 자연적세계관은 보다 인상적이다. 판도라의 메인보드이자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나무’와 교감하며 거대한 네트워크 망을 구축하는 판도라의 대자연은 살아 숨쉬는 유기체의 질서를 이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 숭고한 자연적 가치를 발생시킨다. 외부의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형광의 색채를 띠는 판도라의 대지와 식물들은 터치스크린의 센서와 같고, LED조명에 가까운 조도를 밝힌다. 디지털 문명이 이룬 발전적 결과가 판도라의 대자연에 적용될 때, 그 광경은 황홀한 신비를 발산한다. 결국 그 대자연의 신비는 인간의 조악한 감수성과 대비군을 이룬다. 황홀한 판도라의 대자연적 풍요를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정복하겠다는 인류의 야심은 익히 초라하게 몰락한다. <아바타>는 분명 명확한 주제를 단순한 스토리텔링으로 진전시키는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그 이유로서 폄하될 수 없는 근본적 가치를 품고 있다. <아바타>는 그 단순한 이야기를 현명하게 밀고 나가는 우직한 작품으로서 이해돼야 마땅하다.
<아바타>는 진화된 3D비주얼을 선사한다는 점만으로도 새로운 영화적 발견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충분한 작품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건 <아바타>가 구현하는 테크놀로지가 영화에 복무하는 방식이다. <아바타>에서 그 뛰어난 이미지는 단순한 전시적 효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영화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충심 어린 보좌관으로서 제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한다. 인류의 오만한 역사를 되짚는 우화의 세계를 묘사하기 위한 이미지적 수단으로서 보다 우월한 휴머니즘적인 가치를 역설한다.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를 통해 우리가 두른 세계의 폐해를 진단한다. 그리고 신인류의 탄생을 촉구한다. <아바타>는 말 그대로 인류의 새로운 진화를 촉구하기 위한, 신인류의 탄생을 그린 ‘아바타’적 이상인 셈이다.
벌써부터 로버트 저메키스의 한숨이 들린다. 저메키스가 오랫동안 약진과 답보 사이를 전전하는 사이, 제임스 카메론은 한 방으로 모든 것을 바꿔놓을 참이다. 현격한 기술력의 진화가 대자본의 투자 가치마저 설득할 정도로 놀랍다. 문명과 자연의 대비라는 닳고 닳은 소재를 순수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건 아이디어의 힘이다. <아바타>의 세계관은 디지털 네트워킹 시스템을 시냅스의 전기적 신호로 호환하며 창의적 소재와 친화적 주제를 동시에 납득시킨다. 아바타의 육체를 빌어 가상의 세계로 로그인해 생소한 외계문명에 링크한 뒤 대자연의 정보를 공유하고 그 세계의 가상적 체험을 가능케한다. 접촉을 감지할 때마다 형광빛의 색채감과 LED에 가까운 조도를 밝히는 판도라의 대자연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인테리어된 원시림의 풍요를 접목하며 환상적인 감상을 부른다. 기술적 진화가 완성한 이미지는 감성적 체온마저 전달한다. 그 모든 것이 3D라는 기술적 도구를 효과적인 표현 양식으로 이해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돈만 있다면 누구라도 찍어낼 수 있는 <2012>가 거대한 사치라면, <아바타>는 자본만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진짜 명품이다.
<아바타>의 블록버스터적인 스케일을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3D관람을 권장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만큼 <아바타>를 통해 목격할 3D비주얼이 체험 이상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바타>는 현존하는 3D영상 가운데 유일하게 완성을 이뤘다 평해도 좋은 첫 번째 작품이다. 단순히 체험적 값어치만을 따진다 해도 기회비용을 따져 물을 필요는 없다. 제임스 카메론이 또 한번 자신을 세계의 왕이라 천명한다 해도 <아바타>는 그 발언마저 자만이 아닌 자신감이라 이해시킬만한 작품이다. <아바타>는 영화 역사상 새로운 세기를 일군 혁신적 유산이라 불려도 좋을 작품이며 장담하건대 분명 장차 그렇게 일컬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