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빛이 있었다. 빛은 이미지를 낳았다. 영화는 이미지의 예술이다. 영화는 빛이 낳은 예술이다. 그 빛을 통해 보다 밝게 영화를 밝힌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영화를 통해 세상은 빛난다.
이명세
이명세의 연출데뷔작 <개그맨>은 안성기의 대사로 시작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한낱 꿈속의 꿈인가, 꿈속의 꿈처럼 보이는 것인가.” 이는 이명세가 추구하는 영화적 세계를 짐작하게 만드는 언어나 다름없다. 그는 마치 실재와 환상에 두 발을 걸친 것처럼 현실의 스크린에 자신의 꿈을 투영해왔다. 그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단편적인 이미지로서 표현하는 수준을 넘어 고유한 창작적 세계관으로서 자리매김하는 비주얼리스트로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가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디테일하게 연출된 명암의 대비를 통해 시공간의 경계를 허문다. 특히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형사>, <M>과 같은 근작들의 인물들은 뚜렷한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과 허구를 오가고 이를 통해 실재와 환상이 스크린에 투사된다. 영화는 이명세가 꾸는 꿈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 현실을 산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서 영화를 꿈꾼다. 선명한 빛이 내리고 그림자가 드리울 때 꿈이 시작된다.
이와이 슌지
<러브레터>나 <4월 이야기>와 같이, 사랑과 기억에 관한 애틋한 송시와 같은 멜로로 유명한 이와이 슌지는 사실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영화적 표현이 이미지를 통한 감정의 전달에 놓일 수 있었던 것도 그 토대에 있다. 특히 ‘이와이 월드’라는 팬덤을 구축하게 만든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그가 단순히 로맨틱한 감성주의자에 불과하지 않은 감각적인 스타일리스트임을 증명하는 단초와 같은 작품이었다. 이와이 슌지가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들은 창백할 정도로 극대화된 명도를 통해 영상을 밝히는데 이는 하나같이 그가 묘사하는 세계에 자리한 인물들의 순수한 내면을 보조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순수한 심성을 지닌 인물들로 구축된 백색의 도화지와 같은 세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때로 연필로 흑칠을 해내듯 어두운 단면들을 그려내기도 하지만 이내 지우개로 지워버리듯 인물들의 순수를 보존하고 감성을 정화시킨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감수성으로 자신의 세계를 향해 안부를 묻고 안녕을 빈다.
구스 반 산트
구스 반 산트는 <굿 월 헌팅>과 같이 드라마틱한 성장드라마를 연출하며 스토리텔러로서 먼저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그는 유려하고 심오한 영상미를 구사하는 시네아스트로서 확고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실화를 스크린에 재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구스 반 산트는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을 소재로 <엘리펀트>를 완성했고 이를 통해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구스 반 산트는 “추악하고 화창한” 그 날의 기억을 종용하고 근본을 추궁하는 대신, 풍요로운 광량을 바탕으로 여전히 생이 자리하던 그 곳의 공기를 묵묵하게 환기시킨다.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 <파라노이드 파크>를 관통하는 건 죽음이 내려앉기 직전까지 그곳에 생이 있었다는 흔적들이다. 그는 죽음을 되묻는 것보다도 그 죽음에 앞서 선행된 생의 시간을 먼저 살피고 죽음에 앞서 생의 의미를 짚는다. 죽음 앞에 삶은 무력하다. 하지만 죽음이 멈출 때 삶은 나아간다. 그래서 구스 반 산트는 언제나 추악한 죽음보다도 화창하게 삶을 응시한다.
왕가위
“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영화에 드러내고 싶다.” 스스로의 말처럼 왕가위는 결코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감정을 풍경의 공기에 담아 관객의 기억 속에 뿌리내린다. 그의 시간 속에서 모든 이들은 사랑하고 또 아파하며 다시 그리며 살아간다. 몇 마디의 대사로도 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찰나의 풍경으로 번져 스크린을 채운다. 애틋한 그리움, 진한 갈망, 깊은 상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는 갖은 심정들이 찰나를 메우다 영원으로 흘러간다. 서서히 달아올라 뜨겁게 달궈진 뒤, 차갑게 식어내리는 감정들은 왕가위의 시간 속에서 단단한 결정과 같은 컷의 연속으로서 물결처럼 흐른다. 오래된 사진처럼 퇴색되어 가는 지난 기억 가운데서도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아련한 로맨스의 추억들이 점멸하는 이미지가 되어 그의 영화 속에서 흐르고 또 흐른다. 사랑은 변한다. 그리고 왕가위는 기억한다. 지난 시간 속에 절경처럼 자리한 ‘화양연화’를, 기억 위에 내려 앉은 먼지마저도 애틋한 감정처럼 붙잡고 싶던 그 시절을.
조 라이트
제인 오스틴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오만과 편견>으로 스크린에 입문한 조 라이트는 문체 속에 담긴 우아한 기품과 감정의 체온을 이미지로 승화시키며 성공적인 데뷔를 이뤘다. 그리고 이언 매큐언의 <어톤먼트>를 영화화하며 또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한다. 사실적인 시대상을 묘사하는 동시에 시대적 공기를 담아내고, 인물의 내면적 심리와 감정의 흐름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며 텍스트에 담긴 의미를 넘어 그 감정 자체를 완벽하게 스크린에 구현해내는데 성공했다. 근작인 <솔로이스트>는 내용면에서 주춤하지만 인물 간의 심리적인 조율을 묘사해내는 그의 능력은 유효하다. 그는 풍부한 자연광을 통해 영화 속에 감정의 결을 새겨 넣는다. 서로 사랑을 속삭이고 영원을 다짐하는 남녀가 마주한 저택의 정원 잔디 위로, 해변 위를 걷는 남녀의 발등 위를 적시는 푸른 바닷물 위로, 도심 한 곳에서 새어 나오는 연주음을 좇아간 신문기자 앞에 모습이 드러난 노숙자가 키는 바이올린 위로, 빛이 떨어진다. 저마다 다른 감정의 결정체가 되어 빛을 발한다.
근육질 액션스타의 시대는 갔다. 꽃미남과 짐승남이 공존하는 메트로섹슈얼의 시대 속에서 남성성을 어필하는 방식도 변하고 있다. 여자를 정복하는 마초의 시대에서 벗어나 여심을 사로잡는 남자들의 비결이 궁금하다면, 기억하라. 그래도 제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트로이>
호메로스의 고전 대서사시 <일리야드>의 무대가 된 트로이 전쟁을 스크린에 옮긴 <트로이>는 서로 눈이 맞아 정분이 나버린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의 도주로부터 발단이 된 트로이 전쟁을 그린 블록버스터 전쟁서사극이다. 하지만 <트로이>는 고전적인 웅장함을 자랑하는 전쟁영화이기 전에 안드로겐의 욕망이 낳은 트라우마와 딜레마 속에서 펼쳐지는 아드레날린의 대서사시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매혹 당한 왕자, 자신의 여인을 빼앗긴 채 복수심에 불타는 왕, 이를 빌미로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려는 또 다른 왕, 그리고 그 전선 속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는 전사 등, <트로이>는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남성성의 승부욕이 경합하는 거대한 전장이다. 무엇보다도 무적의 영웅 아킬레우스 신화만큼이나 <트로이>가 주목한 것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였다. 무분별한 야심의 각축장 속에서도 트로이를 사수하는 임무에 충실하던 명장 헥토르의 처연한 죽음은 <트로이>를 지켜보는 여성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007 카지노 로얄>
“본드, 제임스 본드”이 대사는 자신의 성과 이름이 2어절로 구성됐음을 굳이 친절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제임스 본드는 이 대사를 통해 사열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두바퀴는 될 본드걸들을 양산해왔다. 전세계가 사랑한 스파이 <007>의 제임스 본드는 거듭되는 시리즈 속에서 첩보의 정석보다도 작업의 정석을 설명할 때 보다 익숙한 캐릭터로 변질되어 갔다. 그러나 21번째 시리즈 <007 카지노 로얄>과 함께 6대 제임스 본드로 선정된 다니엘 크레이그는 점차 호색해지던 <007>시리즈에 낯선 남자의 향기를 불어넣었다. 원조 제임스 본드였던 숀 코네리의 터프함을 연상시키는 다니엘 크레이그는 제임스 본드에게 강인한 남성성을 부여한다. 무엇보다도 다니엘 크레이그는 시리즈 최초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제임스 본드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대단한 여성 편력으로 세상 모든 남성들의 부러움을 사던 제임스 본드는 거칠지만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남자로 거듭나며 낡아가던 클래식에 뉴타입의 전기를 마련했다.
<록키 발보아>
자신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종종 손님들에게 영광의 시절을 이야기하는 록키는 링과 멀어진 지 오래인 퇴물 복서일 뿐이다. 하지만 새롭게 떠오른 젊은 챔피언은 노장의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든다. 90년대를 호령하던 액션스타 실베스터 스탤론의 프랜차이즈 <록키>시리즈의 5번째 시리즈로부터 무려 10년이 지난 뒤에 등장한 속편 <록키 발보아>는 시대를 호령하던 액션스타였지만 뒤안길에 선 실베스터 스탤론의 자전적 삶을 떠올리게 만든다. 단순히 근육질 스타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실베스터 스탤론의 록키가 복싱만 아는 바보가 아니었듯 <록키>시리즈는 각본가이자 연출가로서 스탤론이 지닌 재능의 총아와 같은 작품이다. 실베스터 스탤론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한 <록키>시리즈는 결국 <록키 발보아>를 통해 퇴물 액션배우로 낡아가던 그에게 회심의 크로스 카운터가 됐다. 자신이 사랑하던 애드리안의 무덤가에서 쓸쓸히 지난 날의 록영광을 회고하는 록키의 모습은 근육 속에 감춰져 있던 감성과 열정이 우리가 록키에게 열광을 보냈던 이유였음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300>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기초로 프랭크 밀러가 완성한 그래픽노블 <300>은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의 하이라이트로 알려진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를 무대로 둔 작품이다. 이를 영화화한 잭 스나이더의 <300>은 실존적인 역사적 사건을 음울한 잿빛톤의 필터를 씌운 실사로 완성하며 환상적인 마초 판타지를 완성해냈다.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져야 한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스파르타 전사들은 팬티 한 장에 망토 걸친 헐벗은 몸이라도 스파르타식 식스팩 하나면 남자의 패션이 완성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한다. 동시에 그 식스팩이 단지 몸짱 화보를 찍기 위한 전시용이 아닌,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한 생존의 수단임을 증명하는 실전용임을 증명하는 스파르타 전사들은 마초 가족주의에 대한 환상을 이두박근의 두께만큼이나 증강시키는데 성공했다. 짐승남의 어원이 스파르타에 있었던 것인가 의심하게 만드는 그들은 진정한 남자의 매력이 4주 완성 식스팩에 있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하는 진정한 쾌남이다.
<아저씨>
<레옹>의 한국판 꽃미남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아저씨>는 아동매매조직에 납치된 소녀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자의 활약을 그리는 액션누아르다. CG로 그린 듯한 초현실적 몽타주와 슬림한 식스팩으로 뭇여성들의 안구를 정화시키고,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파괴력 있는 액션을 구사하며 뭇남성들의 심장까지 쫄깃하게 만든 원빈이 스스로를 ‘아.저.씨’라고 일컫는 순간, 대한민국 청년 99%는 ‘그래도 내 얼굴 정도면’이라는 오만을 떨치고 스스로 잉여로 전락했다는 수모를 감당해야 했다. 이웃집 소녀를 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제 목숨을 걸고 사지로 뛰어드는 강인하고 고독한 꽃미남의 활약을 지켜본 당신이 먹지 말고 백날 피부에 양보한들 그의 우월한 유전자를 따라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면 쉽게 인정하라. 그대가 그냥 커피라면 원빈이 TOP라는 것을. 만약 원빈 앞에서 눈에 하트가 그려진 애인에게도 너 역시 그냥 커피라고 비아냥 거리며 있을 때 잘하라는 진리의 확률을 실험하고 있다면 그 따위 탐구정신은 그냥 넣어둬. 그 전에 솔로는 일단 눈물 좀 닦고.
오래 전부터 인간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운명을 점쳤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류는 매일 같이 뜨고 지며 차오름과 이지러짐을 반복하는 달에 수많은 사연을 담아왔다. 오늘도 달이 차오른다. 그러니 가자. 우주에 매혹 당한 영화 속으로.
<스타워즈>
1977년, 모든 것이 변했다.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으로 서부극 일색의 1970년대 할리우드에서 우주시대를 열었다. 사실 많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 시리즈는 루카스의 취향이 총 집약됐다 말해도 좋을 ‘스페이스 오페라’다. 대학시절부터 우주전쟁영화를 꿈꾸던 루카스가 집필한 대하드라마 초안 중 하나의 에피소드가 영화화된 뒤, 대단한 흥행을 거둠으로써 <스타워즈> 시리즈의 역사는 시작됐다. 광선검을 휘두르는 ‘제다이’들은 사무라이 영화의 영향력을, 우주에서 전투를 벌이는 ‘X-윙’의 곡예는 전쟁영화의 공중전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셰익스피어를 연상시키는 비극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들의 관계도 분명 흥미로운 것이다. 무엇보다도 디테일한 미니어처를 비롯해서 자동으로 작동되는 모형 로봇을 제작하고 다양한 크리처 디자인을 선보이는 등, 일일이 수작업을 거쳐 완성된 대부분의 특수효과는 이 시리즈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하는 동시에 새로운 영화적 미래를 제시한 ‘새로운 희망’ 그 자체였다.
<아폴로13>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디디기 직전까지 전세계의 인류는 흑백TV 앞에 모여들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가 달에 남긴 발자국은 인류에게 새로운 열망을 부여했다. 그리고 다음해, 역사적인 두 번째 발걸음을 꿈꾸며 우주로 날아간 아폴로 13호의 승무원들은 우주의 미아가 될 위기에 처했다. 미연방항공우주국 나사의 역사상 최악의 실수로 꼽히는 우주사고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아폴로 13>은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나흘 간 무중력과의 사투를 펼치는 우주비행사 3인의 ‘성공적인 실패’를 다룬 SF휴먼드라마다. 자신들이 꿈꾸던 달과의 조우를 앞두고 설레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던 세 우주비행사는 불의의 일격과도 같은 기체 고장으로 인해 원대한 꿈을 뒤로 하고 귀환을 위한 생존의 레이스를 펼친다. 수동으로 기체를 조종하며 대기권 진입의 마지막 고비를 넘긴 세 인물이 지구로 귀환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인물들의 노력과 헌신은 인간의 집념과 의지가 한데 모여 이루는 감동의 화음과도 같다.
<콘택트>
소녀는 어려서부터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했다. 자신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존재할 누군가와의 교신을 바라며 단파방송기 앞을 떠날 줄 몰랐던 소녀는 자신이 따르던 홀아버지마저 여읜 뒤에도 단파 통신을 멈추지 않으며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고 결국 천체물리학자로 성장한다.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집필한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콘택트>는 과학적 진리가 절대적인 것이라 간주하는 여성 과학자 앨리(조디 포스터)의 신비한 체험을 통해 그 너머의 가치를 되묻는다. 자신이 추구하던 과학적 명제 너머의 무언가를 목격하지만 결국 자신의 체험을 증명해내지 못하는 앨리는 곧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의 비좁은 가능성을 깨닫는다. 이는 보이는 것만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이 세계의 신비를 증명하는 영화적 설득과도 같다. “단지 이 우주에 인류만 존재한다면 대단한 공간의 낭비가 아닐까.” <콘택트>는 자신이 머문 이 세계의 신비를 가늠하지도 못한 채 한 세기 안에서 소멸하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영험한 성찰을 부른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갑자기 지금 우리가 두 발을 붙이고 사는 지구가 소멸한다면? 더글라스 애덤스의 장편 SF소설을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이 뜬금없는 물음이 과감히 실현되는 이상한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허무맹랑한 우주기행기다. 미래 세계를 건축하겠다는 실현성의 야심을 품거나 비범한 예언적 의지로 무장한 대부분의 SF영화들과 달리 이 작품은 그저 우주와 외계라는 미지의 세계를 우스꽝스럽고 껄렁한 농담 따먹기의 장으로 활용하는데 주력한다. 대단한 과학적 이론을 읊어대는 비범한 SF작품들과 달리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을 허풍선처럼 떠들어대는 이 작품은 설명이 불가능한 상상력을 마음껏 나열하고 확장해나가는 낙관적 태도를 통해 유쾌한 매력을 자랑한다. ‘로키산맥을 칠하는 페인트공과 대서양에 물을 채워 넣은 인부들이 없었으면 지구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랑스러운 상상력으로 도배된 이 작품은 마치 우주로 나가는 산책처럼 가볍고 편안한 웃음의 유영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더 문>
화석에너지의 고갈로 위기에 직면한 가까운 미래의 인류는 달에서 채취된 청정에너지 ‘헬륨3’를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새로운 인류의 희망은 곧 한 남자에게 거대한 고독을 안겼다. 달에서 자원을 채취해 지구로 발송하는 업무를 홀로 해내는 샘 벨(샘 록웰)은 광활한 우주를 메워버리고도 남을 만큼의 고독을 품은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밀어낸다. <더 문>은 드넓은 우주의 한 점과 같은 달에서, 역시 한 점처럼 작은 존재에 불과한 한 남자의 광활한 고독을 담은 모노드라마다. 거대한 우주의 풍광이 목격되는 달 위에 놓인 남자의 모습만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고독이 체감되는 <더 문>은 예측할 수 없는 궤도로 들어서는 스토리를 통해 가스와 먼지처럼 불분명한 호기심을 단단하게 다진다. 적막한 달 위에서 홀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일상을 역설적인 서스펜스로 달구다가 끝내 진한 페이소스로 띄워 보낸다. 데이빗 보위의 아들인 신예 감독 던칸 존스의 <더 문>은 창의력이란 단어의 의미를 대변하는 좋은 예시다.
자신의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이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그 재능이란 실로 부러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단지 부러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만든 세상을 보라. 그리고 즐겨라.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그 재능이 당신을 풍요롭게 만들 지이니.
찰리 채플린 –영화에 숨결을 불어넣은 희극지왕
찰리 채플린을 그저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의 달인 즈음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히치콕이 서스펜스의 창시자라면 찰리 채플린은 코미디의 개척자다. 채플린은 단순히 움직이는 영상 즈음으로 여겨지던 무성영화에 예술의 의미를 새겨 넣었다. 삼류 연극 배우였던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란 채플린은 가난하고 불우했던 유년 시절의 경험들을 희극으로 전복시키며 세상의 비애를 돌봤다. 자신의 경험을 필름에 투영한 기념비적인 장편 데뷔작 <키드> 이후로 채플린은 <황금광 시대>나 <서커스>를 통해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을 역설적인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부조리한 세상을 겨눈 <시티 라이트> <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등의 작품을 통해 코미디를 저항적 유희로 끌어올렸다.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채플린은 삶이야말로 진짜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한 희극지왕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슬픔을 어루만지는 진심이자 불의를 향한 강력한 저항으로서 여전히 세상에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킨 장인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같이 시대를 앞서 나간 작품들은 되레 동시대인의 공격을 얻곤 한다. 스탠리 큐브릭은 아마 이 방면에서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공개될 당시 저명한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온전히 기술에 심취해 버린 껍데기처럼 취급해 버렸다. 하지만 오늘날 큐브릭의 작품들은 창작자의 직관과 도전이 이룬 독창적인 성과로서 인정받았다. 큐브릭은 기술로서 시대를 선도하는 테크니션이었지만 일찍이 씨네필이었던 그는 단지 기술적 실험의 매체로서 필름을 남용하지 않은, 기술의 미학적 가능성을 제시한 필름 장인이었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지만 그를 작가적 반열에 올린 건 SF의 고전으로 꼽히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 오렌지>와 같은 작품이었다. 특히 폭력적이고 암울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그린 <시계태엽 오렌지>는 당시 런던에서 영화가 개봉되면 가족을 살해하겠다는 위협을 얻을 정도의 문제작이었지만 이 작품은 영화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걸작으로서 큐브릭에게 영생을 부여했다.
레오 까락스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는 시네아스트
프랑스가 전세계 영화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누벨바그는 영화의 비현실성을 하나의 표현 양식으로 끌어올린 ‘새로운 흐름’그 자체였다. 그리고 누벨바그의 포스트 세대라 할 수 있는 누벨 이마주는 영화를 이미지의 예술로 승화시킨 또 다른 사조였다. 그 누벨 이마주의 중심에 레오 까락스가 있었다. 레오 까락스의 영화는 시퀀스의 이미지 혹은 단 한 컷만으로도 깊은 인장을 남긴다. 물론 그는 단순한 비주얼리스트가 아니다. 그가 구현하는 영화적 이미지는 그 찰나만으로 영원을 설득할 수 있을 낭만이나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는 비범한 광기가 서려 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통해 유려하면서도 심오한 시네아스트로서의 재능을 선보인 그는 <나쁜 피>와 <퐁네프의 연인들>을 통해 고통과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비현실적으로 꿈틀대는 사랑을 무언으로 설득한다. “도시의 어디에나 내 사랑이 있다.”까락스의 영화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이 한 줄의 대사는 자신의 영화처럼 좀처럼 말이 없는 까락스의 절망이 진정한 사랑을 위한 통과의례임을 깨닫게 만든다.
쿠엔틴 타란티노 – B급으로 위장한 컬트의 수집가
일명 B급 영화라고 국내에서 통칭되는 ‘B무비’는 동시상영관을 의미하는 ‘그라인드하우스’에서 떠리처럼 상영되던 삼류영화들을 지칭하는 언어에 불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이 B급 영화들이 컬트의 영역으로 승격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남자의 공이 8할이다. ‘키치’라는 용어를 훈장처럼 미화시킨 주범이기도 한 쿠엔틴 타란티노는 유년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극장을 드나들며 다양한 영화적 형식을 목격하고 그 모든 취향을 제 것으로 섭렵해낸다. 이는 결국 그의 창작적 뿌리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됐다. 그는 B급 영화의 경박한 완성도 속에 자리한 통렬한 쾌감을 포착해내고 이를 하나의 위장된 영화적 트릭으로 활용하는데 성공한 재간꾼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즐겼던 다양한 영화들, 즉 필름 누아르부터, 웨스턴 무비,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쿵푸영화, 일본 사무라이 영화 등 자신을 흥분시켰던 다양한 영화적 이미지들을 재현하고 탁월하게 조립하며 자신의 영화로서 재창조해낸다. 영화광이었던 소년은 스스로를 B급으로 무장하며 그렇게 컬트의 중심에 섰다.
크리스토퍼 놀란 –역설의 경계를 지배하는 야심가
<메멘토>의 망각과 기억, <인썸니아>의 수면과 각성, <프레스티지>의 환상과 트릭, 크리스토퍼 놀란은 언제나 대조적인 관념이 공존하는 세계관을 오가는 인물의 혼돈과 착시를 설득시키고야 마는 야심가다. 등을 돌리듯 맞선 두 세계의 대조적인 단면을 의식과 무의식의 대칭적인 구조로 설계하고 이를 통해 두 세계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킴으로써 자신의 논리를 명료하게 설득해낸다.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 호흡정지 진단이 내린 히어로 시리즈의 생명연장을 이룬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 이르러 블록버스터를 거대한 철학적 명제의 장으로 끌어올리며 전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거대한 스케일을 반도체적인 세심함으로 완성해낸 <다크 나이트>는 작은 결점조차 허락하지 않는 놀란의 이성적 두뇌가 총 집약된 야심작이다. 그리고 <인셉션>은 놀란이라는 작가의 뇌구조를 대변하는 총아적인 단서나 다름없다. 꿈과 현실을 넘나 드는 인물들의 분투는 <다크 나이트>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새삼 각인시키며 전세계를 ‘꿈의 해석’으로 끌어들였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 드는 듯한 놀란의 꿈은 상업주의와 작가주의의 경계를 지배하는 야심으로서 세계를 매혹시키고 있다.
바야흐로 뱀파이어물의 바로크 시대다. 고전적인 호러 장르의 유물이나 다름없었던 뱀파이어는 지금 과도기적인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새롭게 줄기를 뻗어나가는 뱀파이어물의 진화가 엿보이는 다섯 편의 계보를 소개한다.
<박쥐성의 무도회>
용감한 뱀파이어 킬러 혹은 실례합니다만, 당신의 이빨이 내 목을 물었어요(The Fearless Vampire Killers Or Pardon Me, But Your Teeth Are In My Neck). 고전적이면서도 음산한 한글 제목과 달리 긴 영문 원제는 모종의 위트를 품고 있다. 거장이라 불리는 로만 폴란스키가 연출과 출연을 겸한 1967년작 <박쥐성의 무도회>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이례적이란 수사로 치장되는 작품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거듭하며 과감한 폭력 묘사조차 불사하는 그의 극단적인 연출 방식 안에서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유머를 만날 수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 B급 감수성으로 무장한 이 뱀파이어 영화는 중후한 서스펜스 대신 백치스러운 소동극을 곳곳에 포진시켰다. 이 영화는 비극적인 후일담을 낳았다. 여주인공 역의 샤론 테이트는 이 영화로 만난 로만 폴란스키와 결혼한 뒤 임신 8개월에 이른 당시 살인마 찰스 맨슨이 이끄는 광신도 집단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덕분에 이 영화에 박힌 유머들은 역설적인 비극으로 맺혔다.
<노스페라투>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나우르의 1922년작 <노스페라투>는 흡혈귀 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큐라>를 영화화한 작품으로서 독일 표현주의 고딕영화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성적인 메타포를 서스펜스와 연결하며 뱀파이어 영화의 섹스심벌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한 작품이자 뱀파이어라는 캐릭터의 묘사에 있어서 어떤 원형의 이미지를 제시한 작품이기도 하다. 뱀파이어 영화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을 동명 그대로 리메이크한 1979년작 베르너 헤어조크의 <노스페라투>는 원작의 성과를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발전적 성과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원작에 비해 보다 간결해진 캐릭터 관계를 통해 서사적인 몰입도를 높인 리메이크작은 시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원작의 분위기를 보다 관념적인 형태의 메시지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중심 캐릭터로 등장하는 세 배우의 뛰어난 연기가 눈에 띄는 가운데 특히 강인한 이미지를 전하는 이자벨 아자니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드라큐라>
브람 스토커의 원작에서 영향을 받은 후대의 수많은 뱀파이어 영화 가운데 그 원작의 형태에 가장 충실하게 접근한 작품으로 꼽히는 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1992년작 <드라큐라>다. 드라큐라의 고전적인 중후함이 잘 표현된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사악한 악의 상징으로서 드라큐라를 묘사해온 뱀파이어물의 관성에서 벗어나 그 이면에 놓인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하며 이를 매혹적인 대상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제작된 의상이 시대극으로서의 사실감을 더하는 가운데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세트는 장르적인 위력을 더한다. 이는 관능적인 에로티시즘을 통해 강력한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동시에 궁극적으로 멜로적인 감성을 부각시킨 코폴라의 연출적 야심과 효과적인 시너지를 이룬다. 키아누 리브스, 위노나 라이더, 안소니 홉킨스 등, 화려한 출연진만으로도 호화로운 이 작품에서 드라큐라 역을 맡은 게리 올드만의 열연은 단연 돋보인다. 최초로 컴퓨터 편집을 시도한 작품으로서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 작품은 아카데미 3개 부문을 수상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앤 라이스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낡은 유물처럼 여겨지던 캐릭터를 회춘시킨, 그러니까 보다 현대적인 배경 안에서 뱀파이어라는 캐릭터를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확신하게 만든 작품이다. 할리우드의 꽃미남 스타에서 세계 영화시장을 선도하는 큰 손으로 자란 두 배우,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가 함께 출연한 이 작품은 당대 꽃미남 스타였던 두 배우의 외모만으로도 뱀파이어에 대한 판타지를 부추긴다. 영원히 늙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서의 영원성에 대한 환상과 고독한 존재에 대한 연민이라는 양면적 특성을 부여한 이 영화는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보다 입체적으로 치장하고 있다. 고전적인 캐릭터를 현대적인 배경에 녹여내며 악마적인 공포를 한 꺼풀 벗기고 한층 더욱 신비로운 캐릭터로서의 이미지를 덧씌우는데 성공함으로써 영화적 캐릭터로서 뱀파이어의 수명을 연장하는데 큰 기여를 한 작품이기도 하다.
<렛 미 인>
자신의 방 안에서 칼을 꺼내든 소년은 허공을 위협한다. 매일 같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대상이 없는 윽박 뿐이다. 어느 날처럼 홀로 집 앞의 나무를 대상으로 화를 풀던 소년은 등 뒤에서 기이한 인기척을 느낀다. 소년, 소녀를 만난다. <렛 미 인>의 원제 <Let the right one in>은 뱀파이어 소녀를 초대하기 위한 주문이다. 외로운 소년과 고립된 소녀는 해가 지고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밀회를 시작한다. <렛 미 인>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로맨스이자 절절하고 시린 멜로의 감성을 품은 뱀파이어 호러다. 창백하듯 투명한 스웨덴 설원은 평화와 공포가 함께 머무는 중의적 공간이다. 새하얀 눈 위로 내려앉은 햇살이 사라지면 그 위로 피가 맺힌다. <렛 미 인>은 간혹 무덤덤하게 머리를 드는 긴장감에 심박이 뛰다가도 순수한 동심이 진지하게 반짝이는, 뱀파이어라는 소재에 깃든 악의적 관성을 천진난만하게 막아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비범한 재능으로 완성된, 실로 아름답고도 경악할만한 로맨스를 선사한다.
모든 인생은 결국 운명처럼 귀속되는 여정이다. 하지만 그 운명이란 수많은 우연과 필연의 지표들을 거쳐서야 다다르는 종착역일 뿐, 인생에 정해진 지도는 없다. 우린 인생이란 길 위에서 매 순간의 선택을 통한 결과로서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내다본다. 인생이란 운명을 향한 선택의 여정이다. 그리고 그 선택과 여정을 그린 다섯 편의 운명이 여기 있다.
<원스>
아일랜드 더블린 시내에서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던 ‘그’는 그 거리에서 운명적으로 ‘그녀’를 만난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그와 그녀는 순간의 만남을 인연으로 넓혀나간 뒤, 서로를 향해 눈빛을 반짝이며 자신에게 스며들어가는 사랑을 노출하지만, 점차 어둡게 내려앉는 땅거미처럼 현실을 체감하고, 서서히 희미해지는 황혼처럼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일상의 너머로 내려 보낸다. 탁월한 음악영화이자 애틋한 멜로영화인 <원스>는 모든 사연의 시작이 운명적인 찰나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한 남녀는 운명적인 예감을 꿈꾸지만 서로에 대한 진심을 추억으로 떠내려 보내며 각자의 길로 다시 걸어나간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가 부딪히고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When you’re mind made up. There`s no point trying to change it.’마음을 정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운명은 선택을 통해 완성되고, 마법 같은 시간은 그 길 위에 놓여 있으니.
<더 로드>
재앙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것들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재앙 아래, 삽시간에 스러져간 세상의 앙상한 풍경이 살아남은 인간들을 더없이 무력하게 치장한다. 끝나버린 세계, 의미 없는 삶, 그곳에서 생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희망은 완전히 증발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짐승들이 비틀거리며 죽음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그 폐허 속을 걷는 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불을 옮기는 사람이야.”그리고 아이는 묻는다. “우리는 착한 사람들인가요?”인간의 이성이 더없이 무력해진 세상의 끝에서 부자는 선을 짊어지고 남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원작 텍스트를 신 바이 신의 이미지로 승화시킨 듯한 <더 로드>는 비범한 원작을 비범하게 재현한다. <더 로드>는 너무도 참혹하여 살아나갈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그 황폐하고 참혹한 세계의 길 위로 걸어나가는 부자의 뒷모습이 마음에 불을 지피는 힐링 시네마다.
<어톤먼트>
찰나의 파문이 만들어낸 동심원의 너비는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까? 이언 매큐언의 원작소설 <속죄>를 동명 원제 타이틀 그래도 스크린에 옮긴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는 어느 한 순간의 충동에서 비롯된 소녀의 선택이 남녀의 삶을 지울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넣는 과정을 유려한 화법으로 그려나간다. <오만과 편견>을 통해 문학적 감수성을 시각적인 심상으로 연출하는데 대단한 감각적 재능을 보인 조 라이트는 <어톤먼트>를 통해 한층 더 성숙해진 감정적 여운을 선사한다. “소설에서는 상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연극에서는 배우에게 달렸다.”하지만 현실은 무대도, 배우도 없다.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적인 삶으로서 나타날 뿐이다. 오해는 현실을 왜곡하고 삶을 파괴하지만, 후회는 너무나도 늦고 속죄는 더디다. 결국 삶이란 허구로 귀결될 수 없는 실존의 엔딩을 향하고 있으며 찰나로부터 번져나간 파문은 때로 비극과 희극을 꿈꾸거나 선택할 겨를도 없이 삶을 수면 밖으로 밀어 보낸다. 삶이란 그만큼 허망하지만 그래서 더욱 절실한 것이다. 단 한 순간의 출렁임으로 예기치 않게 떠밀려 보낸 타인의 삶에 대한 속죄가 여리고 시리다.
<미스 리틀 선샤인>
육두문자 섞인 식단 투정을 내뱉는 할아버지, 자신의 커밍아웃과 자살 경험담을 털어놓는 외삼촌, 이를 비꼬며 완강한 흑백논리로 대화를 경직시키는 아버지, 염세주의적인 경향으로 묵언수행 중인 아들, 미녀 선발대회에 집착하는 딸까지, 식탁 앞에 모여 앉은 이 가족, 콩가루다. 그 가족들이 덜컹거리는 밴에 구겨 앉아 여행을 떠난다. 막내딸이 원하는 소녀미인선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대륙을 횡단한다. 순탄치 않은 여정 속에서 가족들은 서로를 꼬집고 할퀴며 서로에게 생채기를 낸다. 서로를 힐난하던 가족은 예기치 못했던 상실감을 공유하고, 누군가의 좌절감을 목격하며 점차 마음을 열어나가며 관계를 기워나가기 시작한다. 예측불허의 상황을 연출하며 소소한 웃음을 끌어내는 <미스 리틀 선샤인>은 감동적인 로드무비 가족드라마다. 콩가루처럼 흩날릴 것 같던 가족들은 험난한 여정 속을 공유하며 찰진 반죽처럼 서로를 끌어안는다. 클러치가 고장난 고물 밴을 함께 밀다가 달려나가기 시작하는 밴을 좇아 달려오는 이들을 붙잡아 차 안으로 끌어주는 가족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지만 따뜻한 가족애를 선사한다.
<가을로>
봄이 여름으로 피어나는 소생기라면 가을은 겨울로 저무는 소멸기다. 완연한 초록잎들이 고개를 떨구고 갈색으로 낙하하는 하강의 계절. 마치 저물어 가는 인연의 끝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처럼 이별을 준비하는 쓸쓸하고 고요함처럼, 거친 바람을 견뎌내기 위한 대자연의 섭리처럼 보다 강인하게 1년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 <가을로>는 예감할 수 없었던 연인과의 이별을 맞이해야 했던 한 남자가 연인이 남기고 간 다이어리에 기록된 자취를 홀로 더듬어 가는 여행기다. 소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윤회하듯 돌아오는 계절처럼 침전되고 퇴적되는 기억 안에서 인연은 지고 핀다. 죽은 연인이 남긴 유품과 같은 여정을 따라 걷던 남자는 그 길 위에서 상처 입은 시간을 치유하고, 단단하게 돋아난 희망을 마주 하며 비로소 내일을 향해 다시 한번 손을 잡고 걸어나간다. 울퉁불퉁한 길을 포장하듯이 지난 추억 위로 내려앉은 추억은 삶을 매만지고 보살핀다. 따뜻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 겨울을 견뎌야 하듯, 아픔도, 슬픔도, 이겨내야 할 시간이 있음을 말하는 <가을로>는 마치 단풍처럼 곱고도 절실한 여운을 남긴다.
전쟁은 인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끔찍한 행위다. 전쟁은 이념이나 명분을 통해 시작되지만 정작 전장 한가운데서 그 모든 언어는 파기된다. 단지 살아남기 위한 살육과 파괴가 거듭될 뿐이다. 시간의 인력 안에서 기억들은 끌려나가듯 지워지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들이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기억하게 만든다. 다만 명심하라. 우리가 보는 전쟁은 우리의 현실에서 결코 추억이 될 수 없음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전쟁은 가치관의 대립으로 시작되나 그 끝은 가치관의 증명과 무관하다. 그저 남겨지는 건 파괴된 풍경과 심정에 대한 각인 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시대적 광풍에 스러져가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어느 개인들을 조명한다. 영국의 침략으로 얼룩진 아일랜드 근대사 속에 놓인 두 형제는 총을 들고 외세에 맞서지만 그들에게 남겨지는 건 독립의 영광 대신 예기치 못한 불화와 갈등의 흔적이다. 바람에 스러져 눕는 보리이삭처럼 세계의 광풍에 흩날리듯 살아가야 했던 형제는 밀알을 꿈꾸며 세월을 견딘다. 공정한 정치관에 뿌리를 둔 켄 로치의 사실주의적인 시선은 역사를 관통하며 심중한 답변을 남긴다. “무엇에 반대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쉽지만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대답은 쉽지 않다.” 전쟁은 세계를 흔들고, 이념 앞에서 인간은 덧없이 흔들리지만 끝내 다시 일어나 이 세계를 채운다.
<피아니스트>
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피아노 연주가다. 그는 지금 건반 앞에 앉아있다. 하지만 건반 위에 놓인 손가락에는 연주자의 품위가 뻗어내린 대신 절박한 생의 갈망이 흘러내린다. 그는 유대인이다. 그를 지켜보는 건 한 단어로 그의 생사를 가로지를 독일군 장교다. 동료도, 친구도, 모두 한줌의 재가 됐다. 하지만 그는 살아서 연주한다. 살아남아서 연주하길 원한다. 그는 마치 벼랑에 매달리듯 열 개의 손가락을 들어 건반을 누르고 흐느끼듯 선율을 울려낸다. 인류 역사상 야만의 계절이었다 말해도 좋을 홀로코스트 한가운데서 살아남은 어느 피아니스트의 자전적 삶을 스크린에 옮긴 로만 폴란스키는 눈물의 위로 대신 냉정한 눈빛으로 시대를 응시한다. 유대인들은 죽었지만 피아니스트는 살아남았다. 인간 자체로서 생을 존중 받을 수 없었던 시절에 대한, 참혹하고도 슬픈 기억을 선율로 기록한다.
<지상최대의 작전>
“적이 상륙하면 우리에게나 적에게나 그 날이 가장 긴 하루가 될 것이다.” ‘사막의 여우’라 불리던 독일의 백전노장 롬멜의 예언처럼 그 날은 길고도 길었다. 나치의 수하에 들어간 유럽을 탈환하기 위해 북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작전을 펼친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 벌어진 만 하루 동안의 전투를 스크린에 옮겨 담은 <지상최대의 작전>은 기록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흑백필름을 통한 사실적인 고증과 전투 자체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통해 전쟁영화로서 한 획을 그은 고전이다. 전쟁 블록버스터의 아버지라 불려도 좋을 만큼 당시로서는 대단한 자본력을 동원해 완성된 작품이자 시네마스코프로 촬영된 상륙신은 전투신의 교과서적 연출로서 지금도 회자될만큼 유효한 장면이다. 물론 체험적 쾌감보다는 전투를 앞둔 병사들이 향수에 젖은 표정으로 되뇌는 추억이 아픈 시절을 대변하고 있음을 간과하거나 망각하지 말 것.
<작은 연못>
하늘은 푸르렀고, 태양은 빛났지만, 땅은 피로 물들었다. 작은 마을에 모여 평화롭게 살아가던 대문바위골 사람들은 미군들의 강압적인 요구에 짐을 싸서 남으로 피난을 떠난다. 그리고 노근리에서 그들은 지옥보다도 끔찍한 현실에 대면하게 된다. 빗발치는 총알과 거대한 포탄이 선한 양처럼 끔뻑거리던 양민들의 몸에 떨어지고 박힐 때,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바라볼 때, 죽은 역사는 다시 한번 살아서 꿈틀댄다. 적층되는 시간 속에서 매몰되지 않도록 끝없이 환기시켜야 할 역사가 있다. <작은 연못>은 격동적인 한국의 근대사 가운데 덧없이 회자되다 희미해진 ‘노근리 사건’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다. 8년간의 끈질긴 제작기간을 통해 60년 만에 빛을 본 진실을 마주 한 당신의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아마 당신의 피도 붉은 색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 붉은 진실을 가슴으로 기억하라.
<아버지의 깃발> &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전쟁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가, 가 아닌 무엇에 의해서 싸우는가, 의 아비규환.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친’ 젊은 용사들의 피는 과연 오늘날 어떤 의미로서 전해지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바로 그 전장에서 마주 보며 서로를 겨누던 양진영의 젊은이들을 나란히 비추며 그들의 심상을 묵묵히 예우한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거울과 같은 영화다. 이오지마에 상륙한 미군과 이를 저지하는 일본군을 제각각의 위치에서 바라본 두 영화는 전쟁이란 것이 인간을 얼마나 혹독하게 몰아세우는지 적나라하게 들춘다. 생애 처음으로 마주 선 양국의 젊은이는 서로를 향해 총을 겨냥하고 칼을 휘두르며 짧은 인연을 나눈다. 그렇게 젊은 영혼이 저물 때 헛된 명예만이 드높게 펄럭인다. 거짓 같은 명예를 두르고 죽어간 청년들을 위한 진심 어린 추도란 이런 것이다.
<허트로커>
올해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석권하며 명실공히 최고의 영화로 등극한 <허트로커>는 ‘포스트 9.11’의 최전선에 놓인 작품이다. ‘9.11 테러’로부터 8년, ‘이라크 전쟁’으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과 중동의 대립각은 여전히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있다. 이라크 현지에서 폭발물을 제거하는 EOD대원들의 활약을 비추는 카메라는 거친 핸드헬드 영상을 통해 도처에 웅크린 의심스런 징후들을 스크린에 수집하며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듯한 긴장감을 응축해낸다. <허트로커>의 현장감은 생생한 체험의 쾌감을 넘어서 그 현장의 중심에 내던져진 것과 같은 통증을 야기시킨다. 끝없는 자기 암시를 통해 매일 같이 직면하는 죽음에 맞서며 공포를 망각하는 이들은 결국 그 생존게임에 중독되어 살아있는 시체처럼 화약고와 같은 대지를 전전한다. <허트로커>가 재현하는 것은 전쟁이라는 통증 그 자체다.
빡빡한 도시의 삶이 버겁다고요? 매일 같이 단조로운 일상이 지겹나요? 일단 그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여행이라도 떠날 수 있다면 좋겠군요. 하지만 당장 시간도 없고, 막상 어디로 떠나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그렇다면 영화라도 한 편 보세요. 그 영화가 당신의 길잡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때때로 영화는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된다. 대사로, 음악으로, 그리고 풍경으로, 관객의 뇌리에 서로 다른 흔적으로 깊게 각인된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찰나의 풍경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그 풍경들은 현실을 벗어난, 또 다른 세계를 꿈꾸게 만든다. 당신이 발 딛지 못했던 세상을 꿈꾸게 만든다. 그리고 이제, 꿈꾸던 당신, 떠나라. 스크린 속 그 풍경으로. 극장에서 만끽했던 환상을 당신의 현실에서 만날 차례다. 머뭇거릴 당신을 위해 여기 몇 가지 좌표를 마련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오스트리아 비엔나 잘츠부르크
“도레미파솔라시, 도! 솔! 도!” 7음계를 이용한 ‘도레미송(Do-Re-Mi)’만으로도 유명한 <사운드 오브 뮤직>은 브로드웨이 인기 뮤지컬을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1965년, 전세계적으로 개봉된 이 고전 뮤지컬은 천진난만한 동심과 애틋한 로맨스가 어우러진 작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발랄한 음표들이 귀를 사로잡는 가운데,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다채로운 경관이 호화롭기 짝이 없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의상이나 다름없는 그 장관은 모차르트의 고향이기도 한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잘츠부르크에서 빌려온 풍경들이다. 볼프강 호수의 시원한 전경으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는 호헨잘츠부르크요새가 올려다 보이는 카피텐 광장과 잘차흐강을 건너는 모차르트 교각, 잘츠부르크 대성당과 미라벨 궁전의 정원 등, 잘츠부르크의 고풍스러운 정경 곳곳을 누비며 밝은 음색을 채워 넣는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풍경 대부분은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며 영화의 흥행 이후로 늘어난 관광객들을 위해 현지에서 운영하는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를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그 흔적들을 수집해나간다면 더 좋은 의미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 특히 마리아가 아이들과 함께 ‘도레미송’을 연습하던, 알프스를 병풍처럼 두른 몽크스산에 오른다면 씩씩한 걸음을 옮기며 노래하던 아이들처럼 절로 마음이 순수해질 거다.
<브로크백 마운틴> 캐나다 알버타 로키 산맥
울창한 숲과 험한 산세 아래 양떼를 지키기 위해 야영하던 두 명의 카우보이 잭과 에니스는 어느 날, 감정의 선을 넘는다. 산속이라 시차가 커서 밤이면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추운 야영지에서 모닥불로 손을 녹이고 좁은 텐트 안에서 뒤엉키듯 잠을 청하던 두 사내는 스스로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애틋한 감정이 줄기처럼 자라남을 직감하고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 금기적인 로맨스의 증인이 되는 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캐나다 알버타의 로키 산맥이다. 사실 동명원작소설의 작가 E. 애니 프루가 쓴 ‘브로크백 마운틴’은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고, 미국 와이오밍의 빅혼 마운틴을 모델 삼아 글을 써내려 갔다고 밝혔다. 제작사는 빅혼 마운틴 주변에서 촬영을 시도했으나 여건상 포기한 뒤, 촬영지 선택에 난항을 겪다 비로소 알버타를 찾았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험준하고도 풍요로운 로키 산맥의 풍광은 결말에 다다라 진한 여운을 남길 영화적 감수성을 깊고 너르게 채우는 원천이나 다름없다. 양떼를 몰다 설산이 내려다 보이는 산턱에서 한낮의 망중한을 즐기기도 하고, 깊은 밤에 찾아온 산의 한기를 몰아내며 모닥불을 피운 채 따뜻한 잔에 손을 비비던 두 남자의 추억은 그 인상적인 풍경을 통해 잊을 수 없는 감정적 여운으로 거듭난다. 만약 트래킹과 스키를 즐기는 이라면 그 만년설의 절경을 보다 적극적으로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뉴욕의 가을> 뉴욕 센트럴파크
굳이 뉴요커의 꿈을 꾸지 않았다 해도, 뉴욕의 명소들에 대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들어봤을 게다. 사실 뉴욕을 말한다는 건 식상한 일임에도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건 언제나 뉴욕을 그리는 영화들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회자될 수 밖에 없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을 소재지로 둔 너무도 많은 영화 가운데서도 <뉴욕의 가을>은 제목이 직시하는 도시와 계절의 풍경을 풍만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맨하탄과 브룩클린, 퀸즈, 브롱크스, 스테이튼 아일랜드까지, 뉴욕의 전경을 부감숏으로 포착하며 시작되는 영화는 그 이후로 뉴욕에 배어든 가을의 흔적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민다. <뉴욕의 가을>의 두 주인공 윌과 샬롯의 만남이 시작되는 센트럴파크는 노란 은행잎으로 물든 가을의 향연 그 자체다. 세계 최대의 공원으로 꼽히는 뉴욕 맨하탄의 센트럴파크는 전세계 인종의 교차로라 해도 좋을 뉴욕의 중심에 자리한 뉴요커들의 안식처이자 쉼터이다. 삭막하고 번잡한 도시의 체증을 피해 잠시나마 안식을 부여한다. 그리고 영화처럼 센트럴파크를 거닐다 보면 운명 같은 연인을 만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그네들 역시 센트럴파크에서 마주한 건 그저 영화 속 우연일까, 운명일까? 적어도 후자의 낭만을 부정할 이유는 없을 거다. 그리고 그게 당신의 삶이 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고.
<맘마미아!> 그리스 스포라데스 제도의 스코펠로스 섬
전설적인 팝그룹 아바의 명곡들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브로드웨이 인기 뮤지컬 <맘마미아!>가 스크린으로 무대를 옮겼다. 영화 <맘마미아!>가 동명의 원작 뮤지컬보다 특별할 수 있는 건 스크린에 펼쳐진 그리스 제도의 그림 같은 풍경들 덕분이다. 촬영에 앞서 한 달 전부터 제작진은 <맘마미아!>의 무대가 될 공간을 찾기 위해 그리스 전역을 샅샅이 뒤졌다. 그 결과 스포라데스 제도의 스키아토스 섬과 스코펠로스 섬, 다무하리 섬을 찾아냈으며 대부분의 바닷가 신을 거기서 촬영했다. 특히 스코펠로스 섬은 <맘마미아!>가 선사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진경의 핵심이다. 에메랄드 빛 바다를 여백처럼 두른 채 붉은 지붕과 하얀 벽으로 이뤄진 집들이 높낮이가 다르게 옹기종기 모여 앉은 스코펠로스 타운의 주택가를 비롯해 서쪽으로 22km 떨어진 카스타니 해변에 펼쳐진 백사장에서 스크린을 통해 봤던 그 모든 풍경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결혼식 신을 위해 100m 높이의 암벽 위에 재건한 예배당도 여전하다. 눈을 정화시키던 스크린 너머의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 당신은 어쩌면 모든 것을 다 얻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 인생의 승자라 믿어도 좋다. <맘마미아!> 속 그 노래처럼, ‘The winner takes it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