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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잃어버린 서울의 밤거리. 유흥의 자본으로 세워진 네온사인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밝히고 그 아래엔 밤을 잊은 호스티스들이 향흥의 환락가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살아간다. <비스티 보이즈>는 도시의 밤이 만들어낸 빛의 허상을 좇아 거리로 내몰린 불나방 같은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다.

전작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군대라는 남성적 특이집단을 들춘 윤종빈 감독은 <비스티 보이즈>를 통해 남성 호스티스라는 또 다른 특이집단을 들춘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비스티 보이즈>는 남성성에서 뻗어나간 양극단의 환경을 배경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대척점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은 진배없다는 점에서 동일한 속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체제적 복종을 완수하기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군대와 수익적 복종을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남성 호스티스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닮았다. 다만 그것이 남성성이란 지점의 양극단이란 점에서 명확한 거리감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호스트가 자신의 손님을 물주로 삼는다는 ‘공사’, 자신이 일하는 업소에 돈을 끌어서 쓴다는 의미의 ‘마이킹’, 실적에 따른 성과급수당을 지칭하는 ‘티씨(T/C)’ 등, 그 세계만의 전문용어가 소통되는 <비스티 보이즈>의 세계는 분명 특화된 구역이다. <비스티 보이즈>는 호스트바라고 불리는 특수한 세계를 스크린에 호기롭게 재현하며 리얼리티의 흥미를 유발한다. 하지만 <비스티 보이즈>가 작동시키는 리얼리티는 단순히 영화가 두른 병풍에 불과하지 않다. 강남 일대의 풍경을 담아낸 네거티브 질감의 영상은 그 거리에 팽만한 욕망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들춘다. 때때로 페이크 다큐나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같은 현실감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철저한 현장조사를 거쳐 만들어낸 영화의 리얼리티가 탁월한 까닭이며 동시에 연기라는 장막을 걷어내고 실제 자신을 캐릭터에 이입시켰다고 생각될 정도로 캐릭터에 잘 스며든 배우들의 연기가 누구 하나 손색없는 덕분일 것이다.

몰락한 강남 2세인 승우(윤계상)는 잠시 호스트의 삶에 기대고 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면서도 자신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괴리감을 때론 감당하지 못한다. 업소의 에이스로 추대될 만큼 호스트로서의 자질이 충분하지만 그 위장된 얼굴로 가린 내면의 자격지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 삶에 저항하듯 다혈질의 성격을 토해내곤 한다. 그 와중에 지원(윤진서)을 만나 그녀를 통해 삶의 통로를 찾아나가지만 진심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닥에 내몰린 승우는 끝없이 의심을 헤매다 결국 치정의 미궁으로 스스로 빠져든다. 도박의 늪에 빠져 큰 빚에 억눌린 재현(하정우) 역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으로부터 도피하려다 극단에 내몰린 경우다. 하지만 재현은 현실에 타협하며 끝없이 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비굴하게 내몰리면서도 눈치를 살피는 약삭빠른 근성은 천덕꾸러기처럼 그를 괄시하게 만드는 반면, 그가 호스트로서 천연덕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생존력의 기반이 된다.

강남의 밤거리에 불을 밝힌 호스트바는 물질적 욕망이 넘실거리는 향락의 무대와 같다. 청춘을 볼모로 한 청년들은 그곳에서 몸바쳐 주머니를 채운다. 청년들은 저마다 가지각색의 표정으로 손님의 시중을 들지만 꿈은 결코 그 자리에 있지 않다. 그곳으로 흘러 들게 된 사정이야 어찌됐건 재현이나 승우에게 호스트바는 자신의 삶을 꿈꾸게 할 기회의 땅임과 동시에 언젠간 박차고 나가야 할 바닥이자 나락의 비상구로 통하는 길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어 희망도 없는 청년들은 암담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강남의 네온사인 아래 모여든다. 꿈을 쫓기 보단 돈을 쫓는 법을 먼저 배운 청춘들은 어떤 가치도 깨닫지 못한 채 돈을 향해 뛰어간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란 말처럼 승우나 재현이 소비하는 호화로운 삶은 그들의 현실에서 껍데기로 소화되는 것에 불과하다. 고급 차를 몰고 명품 옷을 입고 비싼 임대료를 내고 강남에서 살아도 그들은 결코 부유한 강남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자본이 꾸며놓은 진풍경 아래 살아가지만 그들의 호사는 그 거리의 주인의 모습이 아니라 향락을 서비스하는 거리의 노예에 불과하다. 에이스가 되고, 텐프로(10%)가 된다 한들, 수입의 주체가 아닌 소비의 주체로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자본의 저변에 불과하다. 그건 어머니의 가게에서 이름은 같으나 얼굴이 다른 지원(윤진서)에게 목걸이를 사주지 못하는 승우의 꿈과 같다. 마치 자신의 것처럼 모든 것을 누리지만 결코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변두리의 주체. 끝없이 물욕이 샘솟는 그 거리에서 그들은 자본의 주인이 되길 원하지만 소모품으로 전락할 따름이다.

이는 88만원 세대의 절망감과 무관하지 않다. 원대한 꿈보다 자본의 속박을 먼저 체감하는 청춘은 그 수하로 무기력하게 편입되어 덧없는 물욕을 꿈꾸지만 쳇바퀴 도는 제자리의 삶은 꿈을 아득하게 밀어내고 현실의 무게는 더더욱 삶을 짓누른다. 끝없는 경쟁을 고수하는 교육과정을 체득하고 사회로 나와 취업난에 허덕이며 자본에 의한 패배주의를 체감한 젊은 세대의 무기력함은 막연한 미래를 꿈꾸며 현실을 소모하는 호스트의 삶과 진배없다. 경쟁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고달픈 삶을 자연스럽게 익힌 청년들은 자본의 첨탑에 기어오르기 위해 스스로를 탕진할 따름이다. 손님들과 잔을 주고받으며 진심을 연기하는 호스트들이 메말라가는 자신의 영혼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자신이 내몰린 구석에서 처량함조차 잊으며 피폐한 삶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결국 반짝거리는 조명처럼 환락이 넘실거리는 서울의 밤을 뜨겁게 누비던 승우는 갈 곳을 잃고 나서야 스스로가 어두운 곳에 내몰렸음을 깨닫고 좌절한다. 한편, 현실로부터 달아나듯 사라진 재현은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에서조차 진심을 가장한 호스트의 얼굴로 살아간다. 그건 압구정의 밤처럼, 신주쿠의 밤도 자본으로 세워진 네온사인 불빛에 불나방들이 몰려드는 덕분이다. 그리고 지금도 영혼을 저당 잡은 청춘들은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공사상대를 찾아 술을 따른다. 어지러운 세상, 파이팅 하면서. 그렇게 밤조차 밀어낸 도시의 허영심에 미혹된 불나방 같은 청춘들은 그것을 희망이라 믿고 그쪽으로 날개를 퍼덕이다 제 몸을 태우고 스스로 소진되거나 끝없이 몸을 부딪히며 살아간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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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인가. 홍상수 감독은, 혹은 그의 영화는 항상 그 고민을 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답다라는 말이 현실적이다라는 말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결부되어 있는지, 그의 영화는 항상 그걸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사실 나는 생각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스크린은 가끔 (혹은 대부분) 현실을 향해 젖혀놓은 창처럼 보인다. 실제로 촬영 순간에 임박해서야 배우에게 대본이 주어진다는 그의 영화작업을 생각해보자면 영화라는 작업이 현실이라는 중력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밀착해갈 수 있다는 믿음의 소산물 같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물론 이것이 숭고하다라는 식의 작위적 수식어로 의미 부여되지 않길 바란다.- 홍상수 감독의 8번째 작품 <밤과 낮>을 보고나니 마치 그의 영화가 너무나 현실 같아서 낯설다는 느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동시에 그것이 영화라는 기교적 장막을 모두 다 걷어내고 나서야 온전한 감상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비취색을 띠는 창호지 재질(같아 보이는) 종이 위에 붓 펜으로 쓰인 듯한 궁서체 프롤로그가 무언(無言)으로 말하듯 <밤과 낮>은 대마초를 피웠다가 들켜 파리로 도피한 국선화가 김영남(김영호)의 34일 간의 수기(手記)다. 3인칭 관찰자 시점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프롤로그가 지나가고 나면 파리 공항에 도착한 김영남의 모습이 등장하고 그로부터 그의 34일간의 고백담이 펼쳐진다. 서사의 영역을 구분하는 날짜가 프롤로그와 마찬가지 형식으로 잠깐 동안 화면을 정적으로 메우고 나면 그의 일기체 내레이션 혹은 그의 일상적 행위들이 그 간격 사이를 채운다. 간격에는 일정한 룰이 없으며 그 간격의 단위도 일정치 않다. 그건 때로 하루가 되기도 하고 이틀이 되기도 한다. 김영남의 독백은 일기체 형식으로 이뤄지지만 그건 왠지 기록된 것이 아닌 것 같다. 마치 기억의 단편을 끄집어 내듯 자신의 기억 속에 담긴 선명한 것들을 차례대로 끄집어 나열한 것에 불과해 보인다. 그래서 그것은 자신이 추억하고 싶어하거나 잊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선명하고 구체적이지만 자신의 무의식 중에 기억났거나 기억나지 않은 것들은 어떤 내레이션을 동반하지도 않거나 그냥 가볍게 뛰어넘어버린다.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밤과 낮>이 엄연히 김영호의 기억에서 끌어들인 수기이며 그의 시점으로 이뤄진 단상들의 조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은 대부분 그의 시점을 통해 그녀들을 대하거나 감상하고 세상을 관조하거나 살아갔다. 하지만 이를 남성중심적인 태도라고 말하기 석연찮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들 앞에서 속물이었을 뿐이니까. 남성을 위한 합리화는 없었다.-물론 그들을 향한 질시가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밤과 낮>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밤과 낮>의 시점은 전작들과 미묘하게 다르다. 그건 <밤과 낮>의 일기체 형식의 서사와 관련이 있다. 일기란 지나간 일을 기록하는 행위이며 그 형식을 따르는 <밤과 낮> 역시 지나가버린 과거와 대면하는 회상이란 의미다. 전작들이 현재형의 이야기를 했던 것과 달리 <밤과 낮>은 과거형의 이야기를 하며 이는 전작들과 <밤과 낮>의 형식이 달라진, 혹은 달라져야 했을 근간적 연유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일기체 형식의 서사는 상당히 어울리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일상에 대한 퇴고처럼 삶을 대구로 반복하곤 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삶은 일상의 흐름의 지속 그 자체를 드러낸다. 그 반복적인 일상이 대구로 느껴지는 건 그 일상을 부유하는 인간의 심리가 변모되기 때문이다. 변화는 삶을 채우는 인간의 내부에서 비롯된다. <밤과 낮>은 그 일정한 흐름 안에 담긴 인간의 미묘한 대구적 삶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밤과 낮>의 대구를 이루는 건 시간과 공간의 진리적 변화일 뿐, 행위가 아니다. 이야기 흐름의 양면성을 이루던 주체적 행위는 서사 위를 흐르는 시간의 범주 위에서 흘러가고 그 주변의 영역이 대구를 이룬다. 파리와 서울, 그리고 꿈과 현실. 파리로 도피한 영남의 좌절감이 유정(박은혜)을 만나 기묘한 설렘으로 변모하기까지, 그리고 유정과 사랑에 빠진 뒤 갑작스럽게 서울로 돌아와 성인(황수정)과 재회하기까지, 균등하지 않은 서사의 흐름을 따르는 <밤과 낮>은 일상을 더듬어가는 편린의 기억을 통해 영화의 재현성을 갖춤과 동시에 현실을 반추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현실소통의 언어로 재생된다.

파리라는 지정학은 이질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한국적 소통을 부각시키는 보색적 환경성을 띠고 있다. 이는 시시콜콜한 한국적 풍경을 가득 내포하고 있음에도 타향의 감수성-구체적으로 프랑스-을 연상하게 만들던 전작들을 떠올렸을 때 역설적이다. 이는 홍상수 감독이 에릭 로메르나 장 으스타슈와 같은 누벨바그 양식을 따르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들의 행위는 비현실적이라기 보다 비(현대상업)영화적이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대사나 명확하지 않은 동선은 결벽한 연출력과 거리를 두며 영화적 현실에서 그들은 타자화되어 공간의 기운을 변질시킨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이질감의 기운은 공간을 생소하게 만든다. –이는 현실의 모순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브레히트적인 것과 맥락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밤과 낮>은 (본래 홍상수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단순히 국적의 관계에 상정되지 않고 지정학적 중력에서 이탈하던 홍상수식 영화들의 근본적 까닭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밤과 낮>은 홍상수 감독의 변처럼 밤과 낮의 서사가 다른 지구 반대편을 가로지르는 통화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이야기다. 대구적인 시간의 영역 속에서도 공유되는 동 시간대의 삶. 결국 보편적인 삶은 인간의 중력들이 끌어당긴 관계로 이뤄지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기억으로 채워진 서사가 된다. 그 보편적인 삶 속에는 기억나는 서사와 기억나지 않는 서사가 부유한다. 결국 인간의 삶은 특수한 기억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보편적인 서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밤과 낮>은 삶이라는 특이한 서사 위를 흐르는 고유의 시간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한계영역이다. 그 삶 안에는 현실이 있고 동시에 꿈이 있다. 꿈과 현실은 각각 우리의 밤과 낮을 지배하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며 그 영역 위에 존재하는 우리는 꿈을 꾸거나 현실을 살아가며 그렇게 밤과 낮을 지나 자신만의 기억으로 채워진 특별한 삶을 꾸려나간다. 마치 하늘을 채우는 구름이 매일같이 그 너비를 달리하듯 인간의 삶은 보편적인 시간의 영역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채워나갈 따름이다. 미묘한 기법의 변화도 눈에 띠지만 <밤과 낮>은 통찰과 직관을 아우르는 화폭의 순수한 역량을 먼저 느끼게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바로 영화라는 고민에 대한 홍상수 감독의 진심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성의 음부를 ‘세상의 기원’이라 했던 쿠르베처럼 홍상수 감독은 현실의 진솔한 풍경을 영화의 기원이라 말하고 있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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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팔, 무쇠다리,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쇠를 두른 팔, 무쇠를 두른 다리. 무쇠로 만든 인조인간 로봇이 아닌 티타늄 고합금 갑옷을 입은 인간. ‘맨’자 돌림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아이언맨>은 코믹스 출신 히어로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스크린의 새로운 아이콘이다. 배다른 형제 히어로들과 마찬가지로 <아이언맨>은 세상을 구원하는 ‘맨’으로서의 의무를 스크린에서 성실히 이행한다. 하지만 그는 놀라운 초인이라기보단 유능한 개발자에 가까우며 안티히어로의 고독을 벗어 던진 외향적 히어로다.

선친의 대를 이어 무기회사 스타크 기업(Stark Industry)의 CEO 자리에 오른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재벌2세로서의 부(富)뿐만 아니라 유전자적 자질까지 물려받았다. 미국의 핵미사일 개발에 공헌했다는 부친의 유능함은 어린 나이에 엔진을 만드는 아들의 재능으로 이어졌고 MIT공대를 졸업한 천재적인 과학자로서의 명성은 CEO로서의 사업적 재능과 결탁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매력에서 비롯된 여성편력을 가십으로 제공하며 셀레브리티 못지 않은 대중적 영향력을 뽐내기도 한다. 하지만 평화란 적보다 더 큰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는 아버지의 말을 신조처럼 여기는 그의 신념이야말로 토니 스타크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다.

<아이언맨>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 히어로들이 그러했듯, 거대한 스케일에 가득 채운 영상 테크놀로지를 전시하는 블록버스터의 체험을 전시하기 이전에 서사적 설득력을 구성한다. 하지만 <아이언맨>은 그 형제 히어로들과 다른 타입의 캐릭터 구상도를 그린다. 자신의 회사가 개발한 새로운 신무기를 시연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미군기지로 날아간 스타크는 테러범들의 습격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힌다. 생명유지장치를 통해 가까스로 생을 유지한 그는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었던 무기가 자신의 회사에서 만든 것임을 알게 된다. <아이언맨>은 냉전 이후, 세계를 장악한 서구와 중동의 분쟁지역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는 <아이언맨>의 정체성이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적절한 대답이 될만한 것이다.

스타크는 피터 파커(<스파이더맨>)나 브루스 웨인(<배트맨>)보단 (<본>시리즈의) 제이슨 본이나 (<매트릭스>의) 네오를 닮았다. 산업적으로, 혹은 국방적으로나 국가적 수호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진실을 목도한 뒤에서야 완전히 전복된다. 이는 초현실적 능력을 지닌 히어로들의 사적 고뇌와 맥락이 다른 사례다. 뉴욕 타임스퀘어를 나는 영웅의 현실적 딜레마(<스파이더맨>)나 돌연변이 유전자를 초인적 능력으로 전시하는 특이성(<엑스맨>), 유년시절에 비롯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정의구현(<배트맨>) 등 기존의 히어로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자신의 능력이 되려 세상과 반동되는 형질의 것임에 고뇌하는 것과 다른 맥락이다. 마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의 언덕에 오르는 것처럼 인내하던 기존의 영웅담과 달리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는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세상의 오류를 깨닫고 원점으로 돌아가,(<본>시리즈) 자신을 함몰시킨 세계에 대항하고 맞서 싸운다.(<매트릭스>)

물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아이언맨>은 고도화된 이미지 기술을 전시할만한 그릇의 너비를 넓히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이는 애초에 <아이언맨>이 <본>시리즈나 <매트릭스>와 같은 성찰보단 <트랜스포머>와 비견될만한 스펙타클을 지향한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됐다’는 토니 스타크의 신념은 자신이 만들어낸 폭력의 구심을 척결하겠노라는 결심을 부르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행위는 결국 더 강한 힘을 통한 합리적 수단의 공격력을 갖추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강한 힘을 구사하는 캐릭터의 폭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캐릭터의 성숙을 끼워 맞추는 수준에 머무른다. –이는 후에 <아이언맨>이 시리즈로 발전한다면 개인적 딜레마로 작용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물론 그것은 단지 영화적인 한계라기 이전에 영화가 인식하는 현실주의적 자괴감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현실적 자포자기, 혹은 상황을 그렇게 몰고 가는 현세태의 공격성-

거대한 스케일로 관객의 말초신경을 압도하던 블록버스터의 관성적 변화-진화가 아닌-가 무감각해진 시대에서 <트랜스포머>는 육중한 외형을 전시하는 것만큼이나 세밀한 구조변화를 조작하는 것도 유용함을 입증하는 사례가 됐다. <아이언맨>은 이를 응용한 포스트<트랜스포머>다. <트랜스포머>에서 변신로봇의 디테일한 변신과정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아이언맨>에서 초합금 갑주가 장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흥미롭다. 마치 유년시절 변신로봇을 조작하던 재미만큼이나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던 것처럼. 또한 인간의 연약한 피부를 금속슈트로 감싼 아이언맨의 대결은 육중한 변신로봇들이 불꽃을 튀며 금속재질의 몸체를 부딪히던 <트랜스포머>와 유사한 이미지를 그린다.

다만 <트랜스포머>가 별나라에서 날아온 외계 우주인이라는 캐릭터의 서사적 공백을 스펙터클로 대체했던 것과 달리 <아이언맨>은 중반부가 넘어서는 순간까지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캐릭터에 대한 서사에 집중한다. <트랜스포머>에 비해 진지한 접근을 꾀하는 <아이언맨>은 전자에 비해 좀 더 성인적 취향의 스토리텔링을 고수한다. 게다가 포토제닉한 동시에 섹스 어필한 토니 스타크 역시도 성인 취향의 캐릭터에 가깝다는 점에서 <아이언맨>은 <트랜스포머>보다 성인을 배려한 장난감이라 할 수 있다. 스타크가 자신이 개발한 슈트를 장착한 뒤, 고공을 활주하며 내지르는 탄성은 마치 바이크나 스포츠카를 타고 질주하는 것과 비견해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의 슈트가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은 바이크나 스포츠카에 옵션을 달거나 혹은 이를 튜닝 했을 때의 흡족함과 유사해 보인다.

물론 의문의 여지는 있다. <아이언맨>에서 첫 번째로 적대화되는 대상은 아프가니스탄의 무장단체로서 이는 유사 ‘알 카에다’의 이미지즘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대상임과 동시에 메카닉 슈트를 입은 토니 스타크에 비해서, 혹은 자신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어떤 이보다도 무지하고 열악해 보인다. 서구와 중동의 대립구도 안에서 이뤄지는 이미지의 단순한 대비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되, 그것이 선악의 대립과 맞물리는 동시에 우열의 이미지로 인식될만한 사안이란 점은 다소 문제가 있다. 물론 <아이언맨>은 그들의 테러행위를 뒤로 돕는 무기회사의 중역 오베디아(제프 브리지스)를 본질적인 악의 축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굴과 천막에서 생활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장세력을 처단하고 그 이전에 그들의 살육행위를 전시하는 영화의 태도가 합리적인 폭력을 전시하기 위한 소모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란 혐의를 부른다. 이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천명하며 끝을 낸 <아이언맨>이 (장차 시리즈로 진행된다면) 해결하지 못한 미성숙의 과제로 고민할만한 것이다.

스타크가 두른 갑옷의 상용화 여부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고 (난해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이론적 근거들에 적절히 수긍할 수 있는 이에게 <아이언맨>은 충분히 유희할만한 오락물로서 기능할만하다. 게다가 하이퍼 테크놀러지 공학기술을 자아의 갑옷으로 두른 인공 초인의 면모는 수준 이상은 아니더라도 함량미달은 아니다. 개과천선한 영웅의 면모가 가볍게 그려지긴 하지만 <아이언맨>은 그 직설적인 태도를 애써 심각하게 포장하기보단 확고하게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도 명쾌하다. 현실이 야기시키는 문제의식을 간과하지 않으며 이를 오락적 물량공세로 치환하는 의도는 참신하면서도 정치적으로도 무리가 없다. 이는 여름용 블록버스터가 유지할만한 적절한 평형감각이란 점에서 평가할만하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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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4대기서 중 하나로 꼽히는 오승은의 ‘서유기’를 모티브로 한 <포비든 킹덤>이 원작으로부터 취한 것은 영화적 각색의 동기부여에 불과하다. ‘서유기’의 연유가 되는 손오공이 오행산에 갇히게 된 연유에 변주를 가하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포비든 킹덤>은 원작의 허구를 밑천으로 영화적 허구를 재생산한다. 전설적인 고전은 <포비든 킹덤>을 위한 모티브이자 허구 속에 또 다른 전설이 됐다.

원작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는 대비적 설정으로서 원작을 다시 비춘다. 서역으로 향하는 손오공과 저팔계, 사오정, 삼장법사는 <포비든 킹덤>에서 오행산으로 향하는 4인조, LA뒷골목에서 손오공 전설로 소환된 소년 제이슨(마이클 안가리노)을 비롯해 그를 오행산으로 이끄는 루얀(성룡)과 란(이연걸), 스패로우(유역비)로 대비되고 서역의 천축국(인도)을 향한 원작의 여정은 <포비든 킹덤>에서 본래 여정이 시작되던 오행산을 향한 여정으로 착안됐지만 원작의 일행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는 것처럼 영화 속 그들도 사막을 건넌다. 손오공이 오행산에 갇히게 된 연유에 변주를 가함으로써 원작과 판이한 영화적 허구를 창작했으나 기본적인 설정의 큰 틀을 원작에서 고스란히 따온 <포비든 킹덤>은 영화의 모티브가 된 원작의 소스를 고스란히 영화에 재활용하는 효율적인 창의력을 구사한다.

쿵푸를 동경하는 서양소년이 차이나타운의 골동품 가게에서 여의봉을 발견한 뒤, 전설 속 왕국으로 소환된다는 유약한 설정은 <포비든 킹덤>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가리키는 바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포비든 킹덤>이 <라이온 킹>과 <스튜어트 리틀>을 만든 롭 민코프 감독의 작품이란 점을 안다면 그 의도는 더욱 자명해진다. 어드벤처와 판타지, 거기에 무협 액션을 두른 <포비든 킹덤>의 다양한 초식이 내뻗는 궁극적인 한 수는 소년의 성장드라마다. 이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부터 <트랜스포머>와 같은 버라이어티한 오락영화들이 지향하는 가족적 관람의 묘미이기도 하다. 특히 ‘서유기’를 모태로 한 동양적 세계관은 서양인들에겐 둘도 없는 판타지로 비춰지기 적당하고 현란한 쿵푸의 몸놀림은 단연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포비든 킹덤>이 할리우드의 자본으로 제작될 수 있었던 수지타산의 근거는 이처럼 분명하다.

하지만 <포비든 킹덤>의 성장드라마는 큰 감흥을 줄만한 거리는 못 된다. 그것은 우격다짐에 가까운 도입부의 설정만큼이나 제이슨의 성장드라마가 성인을 만족시킬만한 풍만한 수준의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포비든 킹덤>이 가장 큰 밑천은 영화포스터가 말해주듯 마이클 안가라노가 아니라 성룡과 이연걸이다. 마치 성룡과 이연걸의 풍모를 고스란히 캐릭터로 반영한 듯한 <포비든 킹덤>의 루얀과 란은 그들의 동시출격만으로도 단연 흥미를 부른다. 어드벤처와 판타지, 그리고 성장드라마의 모든 장르적 기교가 동원됐음에도 무협고수들의 현란한 몸놀림만큼 매력적인 것은 없어 보인다. 특히 중반부에서 (원화평의 합에 맞춰) 이연걸과 성룡이 자웅을 겨루는 대결씬은 근래 보기 드문 무협영화로서의 현란한 재미를 선사한다. 게다가 <포비든 킹덤>은 무협에 열광하는 미국소년의 특별한 취향처럼 할리우드 자본이 무협영화에 바치는 이색적인 오마주처럼 보인다. <포비든 킹덤>에 구미를 당길만한 관객이 누구인지를 가늠하는 척도도 그것이다. 그건 마이클 안가라노에게 눈길이 가지 않아도 성룡과 이연걸을 바라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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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happiness), 기쁨(pleasure), 슬픔(sorrow), 사랑(love). <내가 숨쉬는 공기>에서의 공기(air)란 기화된 원소의 질량을 가늠하기 위한 명명이라기 보단 부피로서 상정되는 공간성에 대한 공유를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가늠할 수 없는 동선의 접촉으로 이뤄지는 타인간의 관계 맺기. 일정한 시공간의 공유로 인해 교차되는 동선의 필연적인 접촉은 활성화된 원소들의 충돌이 이루는 개인의 삶이 지닌 질량을 재기 위한 것과도 같다.

네 가지 감정의 문구들로 경계를 정한 뒤, 제 각각의 동선을 배회하는 <내가 숨쉬는 공기>는 은밀한 접점을 이루는 옴니버스 형식의 에피소드를 통해 하나의 결과를 도출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시작에서 명명되는 테마에 맞는 이야기를 수행하는데 그에 따라 이야기의 중심 인물도 각각 달라진다. 미묘하게 맞닥뜨리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인물들의 개연성은 적당한 이해심을 동반한다면 그만큼의 설득력을 지닐 만큼은 된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숨쉬는 공기>는 스토리텔링으로 보자면 옴니버스라는 분절된 형식에서 일관된 맥락을 놓치지 않는 어리석은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역량이 충분한 배우들이 포진한 만큼 그들을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감상을 부를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각각의 사연이 담고 있는 테마는 이야기의 내면에 비해 과잉의 인상을 부른다. 말 그대로 행복이라 부르기 애매한 것을 행복처럼 위장하는 전술처럼 <내가 숨쉬는 공기>는 자신이 내건 테마에 이야기의 구색을 맞추거나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게끔 유도한다. 구체적인 주제 의식에 비해서 모호한 의미로 여운을 남기는 각각의 이야기는 결론에 이르러 명확한 상을 남기지만 그만큼이나 전자의 주제들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 애매하게 만든다. 그건 아무래도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겉멋이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숨쉬는 공기>는 이야기의 개연성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러로서의 이지호 감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만든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걸출한 배우들을 총동원하게 만들었다는 그의 시나리오가 궁금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을 가장한 우연을 통해 개연성을 확보하는 이야기를 특정한 주제의식으로 엮어 넣으려는 의도는 다분히 무리수처럼 보인다. 배우들의 녹록하지 않은 연기를 지켜보는 것으로 상쇄되지 않는 싱거운 뒷맛은 아무래도 이 때문이다.

(씨네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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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권을 행사하지 않는 건, 의무의 짐을 더는 것이 아닌 권리를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민주주의란 과실을 누리기까지 긴 고난의 역사를 전제로 해야 했다는 걸 이 땅에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간과하고 있나 봅니다.

정치가 나날이 자기 목적을 간과하여 권력화되고 민중의 터전을 밑천으로 투기행각을 벌이는 현실에서 50%가 되지 않는 투표율은 그 사항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적절한 반증이겠죠.

혹세무민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현실이 야기시키는 자본의 논리에는 민감해 재테크를 논하고 집값을 걱정하는 이들이 그런 걱정을 야기시키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서는 유난히 둔감해지는 형국입니다.

지금은 지성이 중요한 역할을 해내야 할 시기인 까닭은 그 떄문이죠. 행위로서 투쟁하지 않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건 현실에 대한 첨예한 지적을 통해 그 행위를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기성세대들의 정치적 폐단에 당당히 맞섰던 건, 지금의 386세대들, 즉 그 시대의 젊은 지식인층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에서 젊은 지식인들은 지나치게 혈기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푸념은 할지언정, 그 푸념의 근원에 대해서 투쟁하긴 회피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유신 시대냐, 계엄령이라도 선포했냐, 화염병이라도 던질까, 라고 깐죽거린다면 물론 그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이 유신 시대도 아니고, 계엄령이 선포되지도 않았으며, 화염병을 던질 수 없는 시대이기에 더욱 지성의 날을 세워야 한다고 강변할 것입니다.

과거에는 시야적으로 확보되는 해악적 움직임의 형태가 존재했지만 지금은 형태가 아닌 관념으로 그것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오히려 당신의 눈을 가린 채, 혹은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 와중에도 사회적 질서와 관념이 기이한 구조로, 어떤 충돌도 없이 쉽게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죠.

또한 과거처럼 행위를 통제하는 시대가 아니라 사고를 통제하는 시대이며 이로써 다양한 무의식의 발현을 쉽게 규합해버리는 질서의 야합적 통제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행태가 만연한 시대적 속성은 어디로부터 출발했을까요.

다양성을 배제하고 경쟁을 중시하는 첨점 쟁탈의 교육을 거친 세대는 그 시스템의 적용을 벗어나서도 끝없이 트랙 위를 달리는 것을 삶이라 여기며 미련하게 앞만 보고 내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손에 쥔 것에 만족하기보단 더 많은 것을 쥐어야만 행복할 것 같다는 관념은 어디서 왔을까요. 대체 우리는 왜 경쟁의 도가니에서 한시도 자기의 삶을 향해 뒤돌아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큰집과 좋은 차, 명품이 성공의 척도가 된 걸 왜일까요.

더 쉽게 예를 들어서 어째서 회사원들은 퇴근시간이 돼서도 상관의 퇴근 여부를 눈치껏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좀 더 나아가서는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시위나 집회 앞에 불법이라는 수사가 따라붙는 걸까요. 어째서 합법적인 시위는 좀처럼 보기 드문 걸까요.

 

우리 사회는 교육을 빙자해서, 혹은 사회화라는 명목으로 그 모든 것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관념을 반복적으로 세뇌시켜왔습니다.

서울대와 연고대에 가는 학생을 우대하던 학창시절을 거쳐, 삼성 같은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의사, 검사처럼 자 돌림 직업에 호의를 베푸는 과정을 반복해서 관찰하다 보면 결국 삶의 우대를 누리기 위해서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야 한다는 논리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든 사람이 올라서기엔 첨탑의 꼭대기는 너무 비좁다는 것입니다. 결국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 구조에서 열패감을 안고 위를 바라봐야 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이 구조는 약자의 패배감을 깊게 각인시키기 때문이죠. 결국 그 구조상에서 아래로 밀려났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은 자신이 사회적 주춧돌에 불과하다는 타성에 쉽게 수긍하게 됩니다.

MB의 실용주의가 메시아의 전령처럼 작용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파이의 확대가 더욱 많은 첨탑을 세울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윤택한 삶을 위한 경우의 수로서 정함수의 그래프처럼 그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어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숭배의 대상이었을 테니까요. 당신에게 이 사회가 현재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있다면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건 지독한 우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삶의 질을 위한 발전을 거듭해왔습니다. 수출무역국 10위권의 나라에 사는 국민이 OECD가입국 중 자신의 삶의 질을 최악으로 여기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모두가 다 루이비통을 메고 다녀야만 우리는 행복할까요? 돈 없어도 해외 유학 갈 수 있게 해주는 이명박의 선언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일까요?

당신이 어리석지 않다면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욕망을 좇는 개인들이 망상이 뭉쳐낸 신기루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정욱을 뽑는다고 해서 노원구 주민들이 77장의 삶을 살 수 없음에도 그에게 한 표를 행사한 어떤 들은 분명 자신에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권리를 내준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만약 노회찬을 뽑았다면 그건 사표일까요? 적어도 당신이 던진 한 표가 당선에 유효한 표가 안됐을지 몰라도 그 투표의 의미까지 퇴색되진 않습니다. 적어도 그 한 표가 의사를 반영한 행위이기 때문이죠. 투표율 46%의 당선자와 투표율 70%의 당선자는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상대를 찍는 움직임이 한 표라도 늘어난다면 견제 당하는 이의 심기는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당신의 한 표가 당선자의 것이 되지 못한다 해도 그 한 표는 분명 당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작동합니다.

 

만약 당신이 투표하지 않았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의사를 반영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건 결국 그들이 어떤 짓을 해도 당신이 책임을 물을 권한이 없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그건 결국 어떤 투쟁 심리를 잃어버린 온순한 사자를 보는 것마냥 재미없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권력을 견제하는 건 그 권력을 추대한 이들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투표율이 46%가 나오든, 100%가 나오든, 결국 누군가는 권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46%의 견제를 의식하는 이와 100%의 견제를 의식하는 이의 본능은 완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자리를 되찾아야 할 상황이 왔을 때,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정당성은 그 자체로 상실된다는 셈이죠. 결국 무효표를 던지는 것과 달리 투표권을 버리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체념하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죠.

 

결국 그런 상황은 당신이 알게 모르게 루이비통을 메는 것이 성공의 척도라는 기준을 고착화시키는데 유용하게 작동합니다. 그런 식으로 권위를 거머쥔 이들은 자신이 누린 호사를 그저 자기 승리로 기만할 따름입니다. 결국 확실한 검증을 거치지 못한 채 쉽게 자리를 얻은 이들은 스스로가 의무를 위한 존재가 아닌 권리를 누리는 존재로 인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타인을 위한 헌신보단 자신을 위한 투자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민생은 셀프로 여기고, 골프에 매진하는 사태에 육박하는 셈이죠. 지나친 비약이라고요? 성추행까지 일삼은 의원이 관성적으로 재선되고, 정치적 능력이 미약해 보이는 엔터테이너가 유명 당사 메이커를 메고 나와서 당선되고, 우익을 빙자하며 역사를 왜곡하거나 한국에서 열린 자위대 기념행사에 당당히 참석하며 역사적 의식조차 무시하는 이들이 당선되는 세태 속에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뭘까요. , 이렇게 살아도 난 되는구나, 라는 관성은 과연 배제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과거를 뉘우치거나 자신의 몰염치를 반성할 계기란 게 과연 있을까요? 결국 이는 어떤 짓을 해도 첩탐에 서면 된다는 논리를 방조하는 어리석은 행위로 계승될 따름이죠.

이건 짝퉁이라도 루이비통을 메고 거리를 활보해야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거리의 모습과도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야한다는 무의식의 발현이 바로 이 사회 구조의 맹점에서 흘러나오는 착시현상이며 그것이 현상 유지에 걸맞은 삶의 질 찾기를 포기시키는 원인에 가깝습니다. 당신이 알게 모르게 우리는 정치적 공작에서 비롯된 사회 제도의 허술함을 떠받치기 위해 지독하게 무리했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너무 오래 믿어왔습니다.

 

선거를 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도장 찍고 유세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삶이 척박해지는 건 지금까지 우리가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고 관성적으로 삶을 그러려니 방치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학창시절에 머리를 짧게 깎는 것에 대해 반발할 수 없었던 구조가 우리의 사회적 행태와 어떤 식으로든 직결되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이유 있는 항변을 반항으로 몰아붙이는 구조에 어떤 식으로든 타격을 줘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무기는 투표입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 뽑을 사람이 없어 무효표를 던졌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런 표가 나머지 56%를 차지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과연 그 사람들이 무덤덤하게 나 당선됐네, 라고 노래를 부를까요?

 

한번쯤은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까요? 굳이 루이비통을 얻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자본의 논리로 재편된 계급적 무의식 속에서 열등감 느끼고 살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우리에게 실용주의란 많은 돈을 버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식 교육을 위해 거액의 학비를 보태야 되는 사회 구조를 척결하는 것입니다. 신기루를 없애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신기루를 볼 수 있는가라는 전제가 따를 뿐이죠. 당신은 그 전제 앞에 놓여있습니다. 한번의 기회는 지났고, 앞으로 많은 일이 벌어지겠죠. 그 때까지 정신 놓지 말고 앞 똑바로 보세요. 그리고 다음에는 꼭 투표하세요. 누구를 찍던 간에, 정말 실용적인 투표를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당신이 젊다면 더더욱 움직이세요. 이건 당신의 미래를 위한 일이니까. 당신 자녀의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허리 휘지 않기 위한 일이자 정당한 대가를 얻기 위해 합법적으로 시위할 수 있는 사회로 가는 중요한 의사 표현일테니까.

 

우리가 지금 현실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의료제도 민영화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100% 공공 의료보험의 확대적용을 희망하는 쪽이라야 옳습니다. 그게 바로 현실에서 당신의 한표가 절실해야 할 가장 충분한 이유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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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과도한 방 구조개혁 사업에 몰두한 관계로 중천에 해가 기울만한 시간에 눈을 떴다.

밤을 먹고 컴퓨터를 켰다가 투표율 30%대가 어쩌고 하는 뉴스를 봤다. 그래, 가야지. 갔다. 도장 찍고 왔다.


투표소는 한산했다.

빌어먹을 투표소 위치를 잘못 확인한 탓에 뱅 돌아서 엄한곳을 들렸다가 집 옆에 있는 투표소를 겨우 찾았다. 5분 남짓 거리를 30여분에 걸쳐 갔다. 빌어먹을.

그래, 비도 오긴 하지만 나름 산책도 하고 좋다, 이런 기분으로 투표소를 들어섰다.


사람이 없었다. 썰렁했다.

투표용지를 얻기 위해 신분 확인을 하는 곳에는 네 분의 어른이 앉아계셨는데 그 중 한 남성 분께서 옆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게 들렸다.


이 정도면 오늘 개표는 10시도 안되서 끝나겠는걸.


투표를 한뒤, 집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다시 방정리를 했다.

언제부턴가 내 책상 두개를 지배하며 탑을 쌓았던 잡지들을 모조리 처분했다. 덕분에 내 책상은 간만에 안식을 얻었다. 책상 서랍에 있던 불필요한 잡동사니들도 비슷한 꼴을 당했다. 덕분에 쓰레기를 버리러 부지런히 대문을 출입하는 수고가 있었지만 홀가분했다. 두개의 탑을 무너뜨린 반지원정대의 마음이 이토록 후련했을까.


버리는 것도 능력이라고, 가볍게 사는 것도 나름의 묘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무거웠던 방이 가벼워졌다. 나름 효율적인 공간 구성이 가능해졌다.


인터뷰 마감을 위해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한나라당 과반석 이상 확보. 원래 예상했던 일이다. 졸속같은 민주당이 대세를 엎기엔 역부족이리라 확신했다. 게다가 민주당 따위는 한나라당과 함께 개밥으로 주기 딱 좋은 당이니까, 기대하고 싶지도 않다.


까놓고 말하자면 난 비례대표 13번 진보신당을 찍기 위해 투표소에 들렸다. 진보신당은 득표율 3%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난 지금 조금 슬프다. 한나라당 메이커를 달고 나온 듣보잡들, 게다가 유정현이라는 얼치기 마저도 당선이 되는 시국에서 진보신당은 3%의 득표율도 얻지 못했다.


이쯤되서, 한마디 하련다.

만약 당신이 오늘 엄청나게 중대한 일이 있어서 투표를 할 수 없었건 말건, 알바는 아니고.

만약 투표장에 가서 도장을 찍었건 안 찍었건 투표용지를 만져보지 못했다면 세상 어쩌고 지껄일 생각마라.

난 정치 따위는 관심없어서, 어차피 그놈이 그놈 아냐?

이딴식으로 쿨한 척하려거든, 조까라 마이신이나 쳐먹고 해외 이민 가던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판단할 겨를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됐는지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인정해라. 세상에 염세적이라서, 혹은 무관심하다는 것을 자랑처럼 떠벌리지 마라. 당신은 젊은 나이에 이미 자신이 살아가는 주변을 방관하고 있는 관념의 아류일 뿐이다.


대놓고 말해서 당신은 자격이 없다. 월드컵 4강 때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호프집에서 건배하는 것이 애국심이라 착각하고 투표날을 4년 혹은 5년 마다 돌아오는 휴일 정도로 생각한다면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아가리 닥쳐라.


미안하지만 당신에겐 그럴 자격없다. 그대가 나와 친한 누구더라도 결코 그럴 자격없다. 그러니 자격없으면 앞으로 세상 돌아가는 꼴 잘 지켜보고 반성하고 느껴라.
당신은 한나라당 과반수에 찬조하기 위해 한표를 던진 사람보다도 못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라. 기권도 의견행사라고 주장하고 싶거든 투표장에 가서 무효표를 던져라. 그게 기권이다. 당신의 호사스런 방관을 의미있는 기권으로 빙자하진 마라.
인정해라. 그리고 앞으로 세상 돌아가는 꼴 잘 봐라. 다음에 투표를 하던가, 말던가. 그리고 잘 결정해라. 당신의 젊음이 무관심의 관성에 빠져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는 세상의 풍토에 뒤늦게 푸념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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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지금도 거북이의 노래를 좋아하게 될 것이란 말은 못하겠다.

하지만 제목조차도 명확히 모르는 그들의 노래가 종종 귓가에서 맴돌았음을 부정하진 않겠다.


물론 그들의 노래가 조금 싸보여서가 아니란 말도 못하겠다.

그 단순한 후렴구가 질릴 정도로 단순해서가 아니란 말도 못하겠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건 그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노래를 즐겨듣진 않았지만

단순하면서도 발랄한 거북이의 노래가

가끔은 너무나도 익숙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들의 노래가 쉽게 지겨워져서 즐기지 못했을 뿐,

그들의 행위 자체에 어떤 관념적 비하를 섞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거북이는 분명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던 가수도 아니었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던 가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거북이의 리더인 터틀맨의 죽음은 왠지 모르게 숙연했다.

사실 난 그가 터틀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도 몰랐고 그저 그가 속한 그룹의 이름을 마치 그의 이름으로 호명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건 나뿐만은 아닌거 같다. 모 기자 선배가 나에게 거북이가 죽었다고 네이트온으로 알려올 때, 난 그 순간에도 그래서 누가 기르던 거북이를 생각했으니까. 그래, 그건 나뿐만 아니었던 거다. 그런 면에서는 조금 다행이다.


난 연예인을 공인으로 직결시키는 관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단지 유명세를 탄다고 해서 공인이라는 개념은 인정할 수 없으니까. 그건 마치 그들에게 전근대적인 강압의 감투를 씌우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하지만 그들의 유명세가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종종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표피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은 종종 그들의 죽음을 기사로서 접하게 되는 순간이다.


연예인의 죽음이란 건 좀 묘한 감상을 부른다.

실제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정체불명의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고야 만다.

어떤 인간적 관계를 맺지 못했음에도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들의 부고는 이상한 허망함을 부르고야 만다.

물론 모든 인간의 죽음은 삶에 대한 허망함을 고찰하게 만든다.

어떤 인생도 죽음을 비켜갈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는 누구나 한번씩 겪어야 하는 실증과도 같은 거니까.


어쨌든 그가 끝까지 테이프 음반을 고집했다는 걸 그가 죽어서야 알았다.

그 이유도 그의 골수팬들의 상당수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직업 운전사들이기 때문이란 것도 그가 죽어서야 알았다.

나처럼 고상한 척하는 사람은 언제나 뒤늦게 이런 이야길 들으면 역시나 감동받은 척할 수 밖에 없다.


많은 사족을 돌아왔지만 그냥 고인의 명복을 빈다.

터틀맨이든, 임성훈이든, 누군가에게 즐거운 노래를 들려준 당신의 명복을 빈다.

물론 난 당신의 노래를 여전히 좋아할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당신이 적어도 나보단 의미있는 인생을 산 것 같다고 인정하련다.

수고했다고, 그냥 이 말 한마디 전해주고 싶어서 뒤늦게 지나간 길에 인사남긴다. 잘 가라고.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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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이분법으로 나누던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시대적 유산으로 기억되고 있다 해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냉전의 접경을 품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물론 그 앙상한 경계 이남에서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이를 체감하지 못하는 불감의 시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20대 초중반을 지나는 남성에게 날아올 입대영장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이데올로기의 현재를 일시적으로 자각하게 만든다. 이념의 대립이 만든 불길은 잦아들었음에도 그 불씨는 여전히 이 땅에 주거한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이념적 강압의 폐쇄성을 한번씩 경험케 한다.

공수창 감독은 전작 <알포인트>를 통해 베트남 참전이란 한국 근대사의 유물론적 트라우마를 소환시켜 외부에서 발생한 폭력의 전장에 내몰린 이들의 내면적 공포를 장르에 빙의시키며 그 공포를 야기시킨 실세들의 죄의식을 물었다. 이와 반대로 <GP506>은 그 구시대적 산물이 현전하는 이 땅의 구태의연한 지표로 침투해 들어가 시대적 흐름 속에 함몰됐을 뿐, 여전히 뇌관이 살아있는 한반도 이데올로기의 잠재적 실체를 추적한다.

GP(Guard Post)는 휴전선 남방한계선보다도 북에 가깝게 위치한 최전방초소로서 북의 동태를 살피는 최전선이라 할 수 있다. 비무장지대라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무장태세를 갖춘 병력들이 상주하는 GP는 결말을 보지 못한 유효한 전쟁이라는 잠재적 불안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한반도의 아이러니를 극단적으로 대변하는 영토에 가깝다. 구시대적 망각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문서적으로 유효한 이념적 폭력은 그곳을 거니는 소수의 청년들에게 일시적으로 묵언적 힘을 행사한다.

<GP506>은 그 불분명한 형태를 지닌 이념의 실체로부터 발생하는 살상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다. 아들과 함께 죽은 부인의 영전을 지키던 국방부 군수사대 소속 노성규 원사(천호진)는 최전방GP에서 벌어진 소대원 몰살 사건 수사에 즉각 투입된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는 동시에 고위 장성인 육군총장의 아들, GP506의 GP장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후, GP에 도달한 그는 끔찍하게 살해당한 GP소대원들의 시신을 마주보며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라는 의문을 얻게 되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생존자들의 묵묵부답은 이를 윽박지르게 만든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강진원 상병(이영훈)은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져있고, 그 와중에 본래 GP소대원의 수에서 하나가 모자랐던 시신의 수는 생존자의 발견으로 채워진다. 그는 자신이 GP장 유정우 중위(조현재)라고 주장하면서도 사건의 실체에 대해 묵묵부답이며 오히려 남몰래 증거를 파기시키려 한다. 결국 원인은 쉽게 규명되지 않고 사건은 점점 미궁에 봉착하며 그 와중에 GP로 들어선 새로운 병사들은 이상한 기운에 휩싸인다. 접점이 보이지 않는 난자된 의문의 더미 속에서 수사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며 그 사이에서 은폐의 의혹은 짙어진다. <GP506>은 미스터리를 표방하며 장르적 특성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사실 그 외피가 감싸고 있는 본심은 정치적인 것에 가깝다.

소대원이 몰살당한 내무반의 참상은 결코 보편적이라 말할 수 없는, 특수 사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군대라는 폐쇄적 체제가 유발할 수 있는 극단적 폭력의 잠재적 재현이란 점은 심상치 않다. 그들에겐 때로 실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북이란 객관적 주적보다도 배타적인 계급적 폐쇄성으로 이뤄진 내부적 체제에 대한 주관적 증오가 가깝게 도사린다. 폭력을 억누르기 위한 폭력의 방식으로 순환되는 체제의 유지는 개인적 자의식을 억압으로 은폐할 뿐, 개개인의 내면에서 남모르게 응축된 체제적 반감은 때로 한계치를 넘어 극단적으로 폭발되곤 한다. 영화와 직결된 사항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GP506>이 2005년에 발생했던 김일병 총기난사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건 소재의 연관성을 떠나서 일방적 통로에 놓인 한국의 징병 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된 극단적 사례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칠갑이 된 청년들의 시체는 폐쇄적 체제의 한계성이 빚어낸 극단적 실패의 사례다. 하지만 그 체제의 상석에 앉은 지도부는 그 실상을 묵인하는데 급급할 뿐이다. 수사를 진두지휘하는 노성규 원사는 이에 맞서 의지를 표하지만 드러나는 단서들은 하나같이 새로운 의혹의 미로를 형성할 뿐, 사건의 갈피를 향한 출구를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GP506>은 복잡한 미로와 같은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는 동시에 그 미로를 헤매는 이들의 혼란에 주목한다. 음습하게 내려앉은 GP에서 발생한 살상사건의 배후를 쫓는 수사가 좀처럼 진전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장에 투입된 병사들은 폐쇄적 공포의 미궁으로 한발자국씩 들어선다. 사건에 한걸음씩 다가갈수록 의혹은 짙어지며 규정할 수 없는 새로운 의혹은 남몰래 진전되기 시작한다.

(결정적인 스포일러라 직접 언급할 수 없는) 어떤 원인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GP506 병사들과 무관한 새로운 경계지원병들은 전자들이 맞이했던 파국을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전자와 무관했던 이들이 맞이하게 되는 상황의 반복은 GP라는 동일한 공간에 발을 들인 이들의 운명적 굴레를 상징하며 이는 체제의 유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프로파간다의 진실과도 같다. 국가의 위기를 강조하여 애국심을 권유하며 이를 볼모로 국가의 권위를 세우는 체제의 비열함은 폭력에 노출된 최전선의 젊은이들의 희생을 애국적 희생으로 미화함으로써 다시 한번 안보의 권위를 굳건히 다진다. 참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중첩되며 진행되는 새로운 파국의 진전은 <GP506>을 어지럽게 분산시킨다. 이와 함께 <GP506>의 미스터리는 쉽사리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끊임없이 이목을 분산시키고 어지러운 동선을 그려나간다. 그 과정에서 인과관계의 접점이 명쾌하게 맞아떨어지지 못하는 장르적 혼선이 발생하기도 하며 동시에 파국적 결말은 모호한 여운을 남기며 다시 원점으로 상황을 되짚게 만드는 무리수도 발생한다.

사실 <GP506>은 <알포인트>와 유사한 이야기 흐름과 캐릭터 구조를 지니고 있다. 군인이라는 동일한 신분의 인물들이 밀폐된 공간에 들어서서 파국을 맞이한다는 과정은 두 작품을 비교선상에 올려놓게 만든다. 다만 전작이 초자연적 현상이라는 심리적 공포를 장르적 매개로 삼았던 것과 달리 후작은 질환적 현상이라는 물리적 공포를 장르적 매개로 삼는다. 하지만 후작은 전작과 달리 원인의 발생지점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어떤 차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알포인트>가 과거와 타국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달리 <GP506>은 현재와 국내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다. <알포인트>와 <GP506>의 인과적 명확성이 차이를 보이는 건 전자와 후자가 서로 다른 배경을 두르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전자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개인들의 죄의식을 다룸으로서 역사적 과오라는 고지를 명확하게 참배한다면 후자는 징병과 휴전이라는 불명확한 현재진행형의 관념적 전선에 내몰려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류가 발생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원인을 쉽게 규정할 수 없고, 해결책도-혹은 해결의지도- 불분명한 난제는 마치 이유를 알 수 없는 미궁의 사건처럼 불명확할 따름이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인과관계의 구조, 그리고 원인을 알게 된 순간 직감할 수 밖에 없는 파국의 결과. 마치 <GP506>의 미스터리는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의 난제를 보는 것처럼 어지럽다.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서 개인을 착복하는 권력의 수혜는 과연 어디로 방출되는가. 군대라는 체제에 편입되어 (상부에서 하부로 가는) 권력적 복무를 완수한 청년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체계는 어떠한가. 전쟁의 상흔으로부터 세월은 멀리 떠내려왔지만 이념의 선전을 통한 권력의 착취는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GP506>은 그 모순 같은 반복의 세월을 피칠갑된 청년들의 시체로서 반문한다. 그 죽음이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가 아니라 그 죽음을 착취하는 실체는 무엇인가. 젊은 병사들의 경계는 외면적으로 훈육된 주적을 향하고 있지만 실은 내부적인 강압이 만들어낸 폭력의 구조로 이미 뻗어나간 것임을, 그리고 결국 그 잠재적 가능성의 파국은 언제라도 발화점에 도달해있음을. 결국 권력의 도구로 변질된 이념의 그늘은 폭력적 세뇌를 통해 억압적 체제를 유지시키며 국가적 권력의 수하로서 국민을 몰락시킨다. 혼란을 가중시키는 흐름으로 인해 장르의 집중력이 미흡하다는 거슬림을 인지하면서도 <GP506>이 주목될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유는 이런 속성에서 기인한다. 거대한 국가적 사명감을 통해 개인을 억압하는 체제는 결국 괴질과도 같은 사회적 병폐를 야기시킨다. 결국 그에 종속된 개인들은 강압을 의무로서 수행하며 체제의 병세는 더욱 악화된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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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조운이라고도 불리는 상산 조자룡은 창술의 달인이자 유비 현덕의 의형제 관우 운장, 연인 장비와 함께 유비 현덕을 가까이 보필하고 후에 유비가 건립한 촉나라의 오호장군에 오르기도 하는 용장으로 그려진다. 장판파에서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했던 그는 후에 장강에서 오나라 군사로부터 한번 더 아두를 구해오기도 한다. <삼국지: 용의 부활>(이하, <용의 부활>)은 소설 ‘삼국지’가 충직한 용장으로 그리는 조운, 상산 조자룡(유덕화)을 중심으로 개작된 ‘삼국지’라고 할 수 있다.

<용의 부활>은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필자에 의해 번역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하되 영화적 허구를 노골적으로 숨기지 않는다.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삼고초려를 하며 천하삼분의 계를 얻기 이전에 이미 유비는 조운을 가까이 두었다. 또한 장판파에서 조자룡이 아두를 구하기 전, 조조의 군대를 이끌고 온 하후돈과 대적하게 된 박망파 전투에서 하후돈의 군사를 화공으로 괴멸시키기 위한 유인책에 제갈량은 조운을 이미 중용하기도 했다. 그런 조자룡을 제갈량의 얼굴도 잘 몰랐으며 장판파에서 아두를 구하기 직전에 유비와 처음 대면하는 평범한 병사로 그린 <용의 부활>은 ‘삼국지연의’의 서사를 일부 묵과하고 재편하는 것과 같다.

물론 <용의 부활>에서 상세하게 묘사되는 전후반의 전투는 엄연히 소설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 조자룡의 활약을 그리는 전후 두 번의 전투 중 전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삼국지연의’ 중, 조운이 혈혈단신으로 아두를 구출한 장판파 전투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다소 허구가 많이 포함된 후자는 유비와 조조의 사후, 뒤를 이은 촉의 황제 유선을 모시던 제갈공명이 출사표를 던지고 조조의 뒤를 이은 조예의 위나라로 북벌을 결행한 이후, 두 나라의 군대가 처음으로 맞붙은 봉명산에서 선봉에 선 조자룡이 그에 맞선 한덕과 그의 네 아들간의 전투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용의 부활>은 이에 조영(매기 큐)이라는 조조의 손녀를 가상인물로 내세우며 조자룡의 비범한 최후를 그린다.

장대한 서사와 함께 각양각색의 개성을 지닌 캐릭터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삼국지’는 현대에도 다양한 해석과 감상을 부른다는 점에서 효율적이다. 무엇보다도 <용의 부활>은 ‘삼국지’를 토대로 한 영화화 자체란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지금까지 그 장대한 스케일 덕분에 섣불리 시도되지 못했던 ‘삼국지’의 영화화 작업이 무르익은 기술력과 연출력을 기반으로 이뤄진다는 건 분명 매력적이다. 물론 ‘삼국지’의 전사를 영화화한다는 건 상당히 무리한 일이다. <용의 부활>이 조자룡이란 인물을 중점으로 ‘삼국지’를 재편했다는 건 결국 이 장편 서사를 스크린에 옮길 수 없다면 그 일부를 극대화시키는 방편으로 영화화시킬 수 있음을 입증하는 바와 같다. –이는 현재 오우삼의 <적벽>이 인상적인 일부의 서사를 영화화시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소설에서의 관계 구조를 염두에 두지 않고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을 삽입하기까지 하며 사건 자체를 자기 방식으로 재편하는 건 신화적인 영웅들의 이야기인 삼국지 안에서도 조자룡이라는 인물을 극대화시키려는 수단의 방편처럼 보인다. ‘운명은 사람 손에 달려 있다’는 그의 되뇜처럼 <용의 부활>에서 묘사되는 조자룡은 ‘삼국지’ 안의 영웅 조자룡에서 발췌한 인간적 면모의 부각이라고 해석된다. 결국 <용의 부활>은 조자룡의 백전백승 일대기보다도 백전노장의 가공된 실패담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일깨우고 동시에 영웅이라 불리는 자가 짊어져야 하는 숙명 같은 고뇌를 관객에게 짊어주려는 듯 보인다.

결국 <용의 부활>에서 조자룡은 우리가 아는 삼국지에서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고유명사라기보단 ‘영웅’이라는 고유명사에 가깝다. 나안평(홍금보)이라는 가상인물을 관찰자이자 화자로 삽입하며 영웅이 될 수 없는 자의 비애를 조명하는 건 이를 대비시킴으로서 영웅의 고뇌를 부각시키려는 수단으로 보인다. 하지만 <용의 부활>은 이런 의도를 이해시킬 뿐,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삼국지’라는 가상적 원형에 굳이 변주를 넣어가며, 그것도 다소 격에 맞지 않는 여성캐릭터를 배치하면서까지 어떤 구색을 맞추려는 설정은 너무나도 뻔해 보인다. 정사도 아니고 연의도 아닌 ‘삼국지’의 영화적 변주는 그것이 원작과 달라져야 할 합당한 근거를 명석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아 보인다. 결국 이는 원판을 잘 숙지한 이들에겐 오독(誤讀)이 될 가능성이 높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오역(誤譯)이 될 우려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무예의 현신들이 구체적인 상으로 등장하는 ‘삼국지’는 그 세계관을 스크린에 전시한다는 것 만으로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매력을 반감시키는 건 애매모호한 영화의 성취다. 커다란 스펙트럼을 지닌 영웅의 면모에서 인간을 발췌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용의 부활>은 커다란 가능성을 미약한 성과로 깎아 내렸다. 그저 ‘삼국지’라는 소설의 판본을 영화적으로 시도해봤다는 것 이상의 가치가 <용의 부활>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원본을 훼손하는 방식의 무리수를 두고도 탁월한 성과로 거듭나지 못했다는 건 여러 가지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유덕화의 관록이 조자룡의 위엄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은 일말의 위안이다. 하지만 그를 보좌하는 가상의 캐릭터, 조영과 나안평은 자신을 잉태한 영화의 모성애를 전혀 얻지 못한 채 존재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고 앙상하게 목숨을 부지하다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어떤 인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TIP>소설과 달리 영화는 가상적인 설정을 통해 삼국지를 재편한다. 애초에 원명 교체기에 집필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진나라 진수의 ‘삼국지 정사’를 토대로 민간구전을 덧씌운 문학적 가공을 거쳐 완성됐다는 점에서 이를 원형으로 하는 현대의 ‘삼국지’ 역시 많은 부분을 과장된 허구에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비의 도원결의로부터 시작되는 ‘삼국지연의’는 나관중이 후한 혈통을 계승한 유비가 건립한 촉한을 노골적으로 두둔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며 이런 지적도 적지 않다. <삼국지: 용의 부활>에서 묘사되는 조자룡의 전투의 원형인 '삼국지연의'의 기록을 소개한다.

영화가 조자룡을 처음에 유비군의 일개 병졸 취급하는 것과 달리 조자룡은 이미 공손찬의 휘하에 있을 당시부터 유비와 인연을 맺었고, 언젠가 뜻을 같이 하자는 약조도 나눈다. 결국 후에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망한 뒤, 조자룡은 유비의 휘하에 들어가고 이는 유비가 삼고초려 끝에 제갈공명을 얻는 것보다도 이른 지점이다. 또한 그 이전에 박망파 전투에서 제갈공명이 하후돈을 유인하는 계책에서 중책을 맡길 정도로 조자룡은 공명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조자룡이 공명의 얼굴도 알지 못한다거나 자신이 아두를 구하겠다며 유비 앞에 무명의 장졸로 등장하는 건 영화만의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조조의 80만 대군에 쫓겨 신야성을 버리고 강릉으로 향하던 유비는 장판파에 이르러 조조의 군대에 가로막혀 고전하고 가까스로 경산으로 피한 유비와 달리 그의 두 아내 감부인과 미부인, 그리고 아들 아두는 고립된다. 유비 가족의 호위를 맡았으나 적들과의 교전 사이에서 결국 그들을 놓친 조운은 30여기의 부하를 이끌고 적진을 헤매다 감부인을 찾아 구출해온 뒤, 다시 장판파로 향한다. 결국 미부인과 아두를 찾았지만 미부인은 상처입은 자신을 이끌고 가면 조운이 힘들어질 것을 알고 우물로 뛰어든다. 결국 조운은 갑옷을 끌러 가슴에 아두를 안고 장판파에서 조조의 80만 대군-실제 정사에서는 5천 정도로 기록됨-을 단신으로 뚫고 간다. 한편, 이를 지켜보던 조조가 조홍에게 급히 물었다. ‘저기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듯 칼을 휘두르고 달리는 장수가 누구인가?’ 조홍은 조조와 함께 전황을 내려다보던 경산 아래로 내려가 목소리를 높여서 ‘장군! 성함이 어찌되시오?’ 라고 묻자 검을 높게 빼든 그 장수가 외쳤다. ‘나는 상산 조자룡이다! 그대도 내 앞길을 막으려는가?’ 이윽고 조홍이 다시 경산에 올라 조조에게 보고하자 조조는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저 자가 조자룡이구나! 저런 용장이 우리 진에 있다면 천하를 얻지 못해도 한이 없겠다!’ 그리하여 조조는 장수가 상하지 않게 각 진에 활을 쏘지 못하게 명하고 사냥하듯 조운을 몰아 생포하려 했지만 유비의 아들인 아두를 품에 안은 조운은 결국 필사적인 결의로 포위망을 뚫고 장판교를 지키던 연인 장비에게 뒤를 맡기고 유비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그 뒤로 조운을 쫓던 조조의 군대는 장판파에서 버티는 장비의 위엄에 눌리고 결국 그의 뒤 수풀 속에서 움직이는 기병의 모습에 후퇴를 감행한다. 하지만 이는 불과 20여기에 불과한 기병이 수풀 뒤에 숨어서 오간 것에 불과했다. 이 싸움에서 조운은 조조가 총애하는 하후돈의 동생 하후은을 죽이고 그에게 조조가 하사한 보검인 청강검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후, 유비는 결국 오나라로 넘어가 손권에게 의탁하고 이는 그 유명한 적벽대전으로 이어진다.


조영이라는 조조의 손녀를 가상인물로 내세우며 조자룡의 비범한 최후를 그리는 <용의 부활>과 달리 ‘삼국지연의’에서 조자룡은 전사하지 않았다. 조자룡의 비범한 최후를 그린 <용의 부활>의 후반부는 유비의 사후, 유선-조자룡이 두 번에 걸쳐 구한 아두-이 촉의 황제에 오른 뒤, 그 유명한 출사표를 던지며 단행했던 제갈공명의 북벌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북벌군을 편성할 당시 제갈공명은 조자룡의 나이를 염두에 두어 그에게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하지만 촉의 오호장군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제갈공명과 함께 남만정벌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던 조자룡은 출전을 요청하고 공명도 그의 뜻을 받아들여 등지를 부장에 두고 5천 군사를 주어 그에게 선봉의 임무를 맡긴다. 이에 위의 대장을 맡은 하후무는 자신의 네 아들과 함께 한덕을 선봉으로 삼아 조자룡에 맞서게 했다. 하지만 결국 영화에서와 같이 한덕의 네 아들은 조자룡에 의해 제압당했는데 영화와 달리 둘째인 한요는 사로잡았고, 나머지 세 아들인 한영, 한경, 한기는 모두 조자룡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했다. 또한 한덕 역시 하후무의 질책에 부끄럼을 참지 못하고 조자룡과 교합을 벌이지만 결국 그도 창에 찔려 죽었다. 한편, 그 뒤로 봉명산에 진을 친 하후무의 참군 정욱의 아들 정무가 세운 계책에 빠진 조자룡은 위군의 매복군에 둘러싸여 고립되는 위기에 처했지만 관우와 장비의 아들인 관흥과 장포로부터 구출되었고, 그 뒤로 전투에 앞장서며 혁혁한 공을 세우다 후에 공명의 명을 어긴 마속으로 인해 중요한 고지였던 가정(街亭)을 위의 사마의에게 뺏긴 후, 결국 공명은 한중으로 귀환했다. 이때 조자룡은 마지막까지 후방을 사수했으며 후에 제갈공명이 직접 이 공을 치하했다. 또한 그 후, 명을 어긴 마속을 문책한 공명이 결국 그를 처형하라 명한 뒤, 통곡했으며 이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그 후, 한중에서 북벌을 위해 공명이 군대를 조직하는 중에 조자룡은 천수를 다했고, 그가 죽던 날 공명의 집 앞뜰 소나무 가지가 부러졌다고 한다. 그 후로 북벌을 거듭하는 공명과 그에 맞서는 사마의의 전투가 거듭된다. 한편, 1차 북벌 당시 공명은 마속을 잃은 대신 강유를 얻었으며 강유는 훗날 공명의 뒤를 잇는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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