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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으로 포화 속에 갇힌 동심을 위로하기 위해 C.S.루이스는 아이들에게 판타지의 대륙을 선사하고자 했다. 전쟁을 피해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간 네 아이들이 옷장을 넘어 나니아 대륙이란 신세계로 들어서게 된 건 그런 연유에서다. 그리고 C.S 루이스의 ‘나니아연대기’가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시리즈를 상기시키지만 본심은 <판의 미로>에 보다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이 점에 있다.

‘나니아 연대기’가 성인들에게 유치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건, 그것이 애초에 아동들을 위해 집필된 동화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을 집필하는데 큰 영향을 얻었다는 J.R.R. 톨킨의 고백처럼 ‘나니아 연대기’는 ‘중간계’를 잉태한 판타지의 원전으로서 명백한 가치를 지닌다. 대자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종적 구성원(<반지의 제왕>)들로 이뤄진 현실 이면의 판타지적 세계관(<해리포터>)은 <나니아 연대기>가 판타지라는 대륙을 안착시킨 원형임을 입증하는 것과 같다. <나니아 연대기: 사자, 옷장, 그리고 마녀>에 이어 제작된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이하, <캐스피언 왕자>)는 4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의 두 번째 시리즈이자 7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된 원작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분기점이기도 하다.

전작에 이어 모험을 주도하는 아이들, 피터(윌리엄 모슬리), 수잔(안나 포플웰), 에드먼드(스캔더 킨즈), 루시(조지 헨리)가 전작과의 서사적 간격을 증명하듯 과거에 비해 훌쩍 자란 모습으로 등장하는 <캐스피언 왕자>는 확실히 유아적 취향에 머물렀던 전작에 비해 성인을 고려했다고 할만한 것으로 성숙했다. 이는 동물의 왕국을 방불케 하는 전작의 전투씬에 비해 <캐스피언 왕자>의 전투씬이 체계가 잡힌 인위적 전투의 양상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캐스피언 왕자>가 성장기에 접어든 캐릭터의 고뇌와 숙명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니아 왕국의 수장이 된 피터와 대대로 이어온 왕위를 복원해야 하는 캐스피언 왕자는 각각 강박에 시달리듯 자신의 숙명 앞에 고뇌한다.

피터가 성장통을 겪는 사이, 그들 중 가장 어린 루시는 아슬란을 봤다고 유일하게 말한다. 성인이라 부를만한 연령에서 가장 동떨어진 루시가 보는 것을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한다. 이는 아동의 순수한 믿음이야말로 성스러운 것에 가깝다고 믿는 C.S.루이스의 신념을 대변하는 것과 같다. 의무감에 빠진 피터가 무리수가 예상되는 작전을 강행하다 실패를 맛보고, 모사의 간계에 이끌린 캐스피언 왕자가 마녀의 부활에 이용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나는 것과 달리 구원의 가능성을 본다. 이는 C.S.루이스가 ‘나니아 연대기’를 집필하던 폭력의 시대에서 아동들에게 주고자 했던 구원의 메시지이자 성인들을 향한 일말의 훈계였을 것이다. 동화를 원형으로 했지만 ‘나니아 연대기’는 분명 성인의 발상으로 이뤄진 함축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 <캐스피언 왕자>는 전작이 지니지 못했던-실상 원작으로 인해 지닐 수 없었던- 비범함을 가미하며 단순한 구조의 권선징악 스토리를 원전의 위엄에 한발자국 접근시켰다. 아이들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시리즈도 성숙했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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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1

time loop 2008. 5. 12. 02:00

#1.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한국에서 살 수가 없다고 일본까지 뛰쳐나갔던 이 친구는 드디어 짐을 싸들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좋은 곳이다.

물론 이 친구가 돌아올 이 곳에서 이 긍정적인 마인드의 친구가 잘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


#2.

긴 시간동안 이야기를 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생각들을 총동원하고 그것들을 정리해나갔다.

대화란 건 나에겐 중요한 시간이다. 관념의 우주 속에서 무중력처럼 떠도는 생각들이 충돌하지 않도록 궤도를 형성시키고 각자의 개념들이 지닌 장력의 거리를 유지시킬 수 있는 기회이니까.

어지럽게 돌던 생각들의 일부가 나름 정리됐다.


#3.

피곤해졌다.

일시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머리가 핑해지는 듯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친구 말처럼 난 피곤하게 살고 있다.

그 많은 생각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냐고 물었다.

심지어 애완견과 나 사이에 놓인 형평성의 문제까지 들먹이는 나는 정말 피곤한 존재인 게 맞다.

친구는 진심으로 걱정을 하고 있었다.


#4.

집에 가는 길에 인사를 했다.

만남과 같이 헤어짐도 별다를 게 없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란 그렇다.

반가움도 아쉬움도 무덤덤하다.

그건 밋밋한 사이라서가 아니라 그만큼이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난 그게 싫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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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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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열등감

time loop 2008. 5. 11. 02:54

요즘은 이 시간 즈음되면 미친 듯이 마음이 요동친다.

하루 종일 해놓은 것 하나 없이 방에 쳐 박혀서 모니터만 보다 하루가 지났다.

휴일날, 날씨는 좋았고, 방은 어두웠다. 발가락을 핥는 어린 강아지가 발로 차고 싶을 만큼 심술이 밀려온다. 물론 발로 차지 않았다. 난 생각보다 마음이 약하다.

헛소리는 넘기고, 뭔가 써야 할 것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하려고 앉아있었으면서도 아무것도 못하고, 아니 안하고 하릴없이 시간을 집어삼켰다.

이런 빌어먹을. 욕 나온다.

 

요즘은 이 시간 즈음되면 미친 듯이 좌절감이 밀려온다.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초현실적이다. 나를 필자랍시고 받아준 나와바리가 가련할 정도로 난 매일같이 절망감에서 허덕이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문장은 부끄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뭔가 지껄여야만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배 뒤집고 헥헥거리는 어린 강아지마냥 귀엽게 볼 수도 없는 문장들이 종종 눈에 띈다. 부끄럽다. 그 때마다 코 박을 접시 물이라도 찾아야 될 심정이다. 물론 접시물에 코 박아봐야 죽지 않을 것을 아니까 하는 말이다. 난 솔직히 삶을 포기할만한 용기를 가진 위인은 아니다. 이런 빌어먹을, 또 욕 나온다.

 

의외지만 때때로 예기치 않게 칭찬이 들려올 때도 있다. 그들은 내가 잘 아는 지인이 될 때도 있고, 내가 전혀 모르는 3자일 때도 있다. 양심을 걸고 맹세하자면 난 그때마다 자격지심을 느낀다. 이건 결코 금슬 좋은 척하던 연예인 부부가 그 다음날 이혼 발표를 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매일같이 사투를 벌이듯 커서와 싸우다 보니 지치지 않을 수 없다. 가끔씩은 궁금하다. 아니,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런 글을 쓰는 거야. 이런 생각이 종종 전두엽을 강타할 때면 난 홀로 아득해진다. 물론 그 사람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을 쓸 수도 있겠지. 문제는 같이 쥐어뜯으며 써도 실물대비 격차가 지나치다는 거다. 그 간극은 나에겐 넘사벽과 같은 열등감으로 광속처럼 되돌아온다.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내가 힘들다고 하는 건, 결코 글을 쓰는 행위가 아니다. 마치 그건 일기를 쓰는 것과 같다. 내가 지녔던 온전한 감상들이 시간에 밀려 풍화되길 거부하는 의도적 행위에 가깝다. 그것이 유일하게 짧은 기억에 대항하는 순수한 방식이기도 하다. 다만 스크린을 응시하는 순간, 마치 숏과 컷처럼 분열되는 발상과 관념, 생각들이 문장으로 온전히 치환되지 못하고 뒤편의 프레임처럼 아득해질 때, 난 지독하게 괴롭다. 한때는 모 선배의 말처럼 영화를 보며 기록하는 방법을 열심히 실행했으나 그 때마다 지독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어떤 방식으로든 온전히 상념을 보존할 수 있는 비결 따위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요즘은 오락가락이다. 그랬다가 말았다가, 그런 와중에 길을 잃었다. 전기가 나갔다. 반짝이는 것이 사라졌다.

 

밑천이 얕은 탓이다. 요즘 들어 날 괴롭히는 상념은 우물의 깊이다. 채워 넣어야 할 것은 많은데 난 그 반대의 행위를 하고 있다. 악순환이다. 들어오는 건 없는데 나가는 건 많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우겨서 하는 기분마저 든다. 이건 지독한 열등감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인 표본으로서 드러나는 바다. 얕은 지식에 대한 한계를 내가 알아버렸다. 좁은 시야를 가리던 자신감들이 증발했다. 내가 할 짓이 아니다. 하루에도 백만번은 느낀다. 지독한 자괴감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뭔가 결심해야 한다. 이 글을 써놓고도 난 또 다른 글을 쓸 것이다. 부끄럽지만 아직 내 삶은 아직 자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이젠 제자리에서 돌 때는 아닌 거 같다. 다시 공전주기를 찾아가야 한다. 이 글은 그 시기에 대한 막연한 다짐과도 같다. 동시에 부질없는 현실에 대한 일말의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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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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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내에서 서로 뿔뿔이 흩어져 사는 한인 주부들이 뭉쳤습니다.
 
  많은 미국내 한인 주부들은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일부 미주 한인회의 성명서 발표에 분노를 느끼고 있으며, 이들 한인회의 입장이 마치 전체 미주 한인을 대변하는 것인 양 호도되는 기사들에 답답한 마음 금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노와 답답함을 느끼던 주부들이 뭉쳐 이번에는 우리들의 입장도 발표를 해보자며 온라인 상에서 며칠간 의견을 주고 받으며 공동으로 성명서를 작성했습니다.
 
  일부 미주 한인회가 우리와 같은 미국땅에 살고 있다고 해서 또 한인회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달고 있다고 해서 결코 미국에 사는 한인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님을 이 성명서를 통해 여러분께 알립니다.
 
  성명서
 
  미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주부들은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미국산 쇠고기 전면개방을 반대하며 재협상을 촉구합니다!!
 
  가족의 건강과 식탁을 책임지고 있는 미주 한인주부들은 금번 미국 쇠고기 협상으로 앞으로 광우병 위험에 노출될지도 모를 한국동포들에 대한 우려와 걱정에 시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도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과 불신은 커져가고 있습니다.
 
  올해 미국 내 축산업계는 도축 직전 소의 건강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현행법을 어기고 광우병의 증세가 의심되는 소를 도축하였고 이 업체의 쇠고기가 학교급식용을 비롯 미전역의 시장에 유통되어 결국 미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쇠고기 리콜을 야기했습니다.
 
  또한 지난달 4일, 캔자스의 Elkhorn Valley Packing LLC 라는 업체는 광우병 위험물질인 편도를 제거하지 않은 채 유통했다가 결국 냉동 소머리 406,000 파운드를 자발적으로 리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캔자스 주 고급 육 생산업체인 Creekstone Farms에서 소 뼈 파동으로 막힌 일본 수출시장을 열기 위해 업체내의 자발적인 전수검사의 의지를 밝혔지만 미 농무부가 이를 최근에 불허하였습니다. 업체의 자발적인 검사마저 가로막는 미농무부의 태도는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심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사례들은 미국 내에서 조차 쇠고기 안전성 검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더욱이 미국 내에서 동물성 사료는 아직도 사용이 완전히 금지되지 않았으며, 비인도적이고 비위생적인 축산환경 또한 지속적으로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도 되지 않는 광우병 검사비율로 미국 쇠고기의 안전성을 장담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미국 내에서도 유기농 쇠고기나 풀 혹은 식물성 사료를 먹여 키운 쇠고기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증가하고 있고, 호주 및 뉴질랜드 등 광우병 청정지역에서 수입된 쇠고기의 소비 또한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미국 내 쇠고기 소비행태가 이같은 변화를 보이고 있고 쇠고기 안전성에 대한 불안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미주한인회는 미주 동포들이 먹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는 무조건 안전하다는 식의 성명을 발표하여 마치 이것이 전체 미주 한인들의 목소리인 양 사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호도하고 있는 바, 이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230만 재미동포 중 미 축산업의 실태를 알고 있는 한인들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과 위생성에 비판적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산 쇠고기 소비에 더더욱 신중을 기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현재 미국의 축산 환경은 육우 사육, 광우병 검사, 도축 그 어느 과정에서도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데, 이번 협상의 결과로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발견되더라도 한국은 수입거부권조차 없이 국제수역사무국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검역주권도 없이 30개월 이상 소의 살코기와 30개월 이하 소의 뼈, 내장까지 모조리 수입을 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금번 미국 쇠고기 협상결과는 국민의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정부는 국민건강과 검역주권을 포기한 채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해제한 졸속적인 금번 협상을 무효화하고, 재협상을 추진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2008년 5월 7일
 
  쇠고기 수입 재협상 실행을 요구하는 미주한인주부들의 모임.

백분 토론을 봤다면 알겠지만 이것이 바로 현실정이다.

자꾸 정치적인 목적의 선동이라고 정부 스스로가 국민의 목소리를 폄하하는 것도 현실정이다.

여기서 우리의 기회비용은 정치적 견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현실을 지탄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목적으로 현실을 유린하는 자들의 관점 흐리기에 휘말리지 않으며 현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부는 국민의 혈세를 7억 가량이나 소비하면서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광고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광고에 더 많은 비용을 소모할 예정이라고 한다.

어째서 대한민국 국민이 낸 세금이 미국 쇠고기가 안전하다는 광고문구를 위해 소비되야 할까?

정부의 태도는 정말이지 이상할 따름이다. 백분 토론에서도 재차 언급됐지만 어째서 정부는 스스로 우리가 직접 미국산 쇠고기를 먹겠다, 는 논리로서 그러니 국민 여러분도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라고 권유할까?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란 현안에서 우리가 민감한 건 '미국산'이 아닌 '쇠고기'다. 쇠고기가 어디서 왔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에서 온 쇠고기가 어떤 방식으로 수입되고 있는가가 문제란 것이다.

30개월 미만 소를 전면으로 그것도 미국인의 기준에 맡긴 채 전면 수입하고 그것을 국내에서 3% 샘플링 추출해서 검사하니까 어차피 부작용은 날 수 밖에 없다는 정부측 인사의 발언을 통해 참혹한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면 의문을 품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을 섬긴다는 정부가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지, 미국 쇠고기 유통업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지, 분간이 안되는 현실을 한번쯤은 직시해야 할 시점이다.

어째서 우리가 미국에서 넘어온 소의 잠재적 위협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지 않나?

이건 통계수치로서 확신할 수 있는 확률의 문제가 아니니까.

이건 인간 대 인간이라는 존엄성 보존의 문제다. 문제가 나면 검역 제한을 하겠다는 정부의 논리는 어떤 희생을 감안하라는 무책임한 태도와도 같다. 결국 그 희생이란 건 우리의 누군가의 몫이나 다름없다. 잠재적인 통계적 수치로 나타나는 확률의 미약함을 과학적이라고 두둔하면서도 그것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는 그들의 태도는 분명 가증스럽다고 할만한 것이다.

우리에게 미국 도축업자들을 믿을 수 없다면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그들의 발언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야 할지 막막하다. 협상테이블이라는 건 서로간에 발생하는 불신을 제도로서 규정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라는 걸, 전문가라는 그분들이 몰랐을까? 미국에 사는 사람들조차 불안하다는 미국 검역체계를 믿으라고 전도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지향하는 건 대체 무엇일까?


이건 정치적 쟁점의 사항이 아니며 상식의 논리에 위배되는 사항이다.

10대도 뿔났고, 미국에 사는 재미교포들조차도 뿔났다.

당연히 성인의 문턱을 넘은 20대이자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나도 뿔났다.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그 누구라도 이런 행위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흔히 먹는 걸로 장난치지 말라고 한다. 정부는 지금 먹는 걸로 장난치고 있다. 그 뒤에 내려앉은 꿍꿍이 따위는 알 바 아니지만 그들이 바라는 히든 카드를 위해 국민의 권리를 올인하는 것이 그들의 실용주의라면 이건 분명 오만이라고 단정지을만한 것이다. 우리가 맞서야 하는 건 그 오만한 비상식적 믿음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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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MBC

도화지 2008. 5. 9. 03:16



정곡을 찔렀다는 그 문제의 조선일보 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5/08/2008050800030.html

개인적으로 코멘트할 필요도 없는 내용.
이것이 바로 진실.
당신이 주목해야 하는 건 바로 이것.
그건 바로 정치적 핵심이 아닌 현실적 사안.
그리고 MBC에 진심어린 경의를.
언론의 존엄성이란 바로 이런 짧은 코멘트만으로도 정립될 수 있는 것.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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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 60주년 기념작.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하, <영화관>)의 목표는 이처럼 자명하다. 거장이라 명명된 35명의 감독들이 모인 것도, 그들이 3분으로 국한된 러닝타임의 과제를 받아들인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영화관>은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준 영화 그 자체에게 바치는 오마주이자 자신의 일상을 무덤덤하게 발췌하는 수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영화를 존재케 하는 관객을 위한 헌사에 가깝다.

제목에서 발견되는 ‘그들’이란 단어의 의미는 영화를 만든 거장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화를 보는 관객이다. 원제의 ‘그들’이 ‘their’가 아닌, 성별이 불분명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his’로 표기된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왜냐면 ‘그들’이 감독 자신이라면 제인 캠피온과 같은 여류 감독이 포함된 자신들을 결코 ‘his’로 묶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와 같이, <영화관>은 말 그대로 영화를 보는 우리들, 즉 관객을 바라보는 감독들의 자발적인 주객전도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3분이라는 폐쇄적인 러닝타임을 통해 무려 32작품을 나열하는 <영화관>은 각각의 작품을 매만진 주인들의 이름만큼이나 매혹적인 것들로 채워졌다. 32구간의 여정은 프랑스 다큐멘터리의 거장 레이몽 드파르동의 <야외 상영관>에서 출발해 켄 로치의 <해피 엔딩>에서 멈춘다. 3분이란 짧은 시간 안에 보여지는 제 각각의 사연들은 무덤덤하게 현실을 응시하거나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상황으로 연출되며, 우연처럼 보이는 상황극을 그려내거나 감각적인 영상을 통해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이 일맥상통한 건 하나같이 스크린이 걸린 영화관-실내가 됐든, 실외가 됐든, 절대명사적 공간 의미가 아닌 영화를 트는 장소로서 명명되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장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한 이들이지만 그들의 태도는 각기 다르며 그들이 모두 다 하나같이 영화에 매혹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것도 아니다. 단적으로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가 상영되는 극장의 텅 비었다시피 한 상영관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며 영화에 몰입한 늙은 매표원과 그 뒤에서 격정적인 애무를 즐기는 연인이 등장하는 안드레이 콘잘로브스키의 <어둠 속의 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화는 애무를 즐기는 연인을 조롱하지도 혹은 늙은 매표원의 진지한 관람 행위를 미화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본다. 그들의 상영관은 각자에게 개별적인 의미가 있을 뿐, 그 자체로서 규정된 가치로 이해되지 않는 공간이다. 감상의 다양성과 영화에 접근하는 태도의 차이는 상영관에 다양한 풍경을 연출한다.

<상영관>은 3분이란 데드라인으로 나열되는 다양한 진풍경을 나열한다. 거장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감독들은 각자의 양식으로 자신만의 상상을 스크린에 담아낸다. 그 안에는 심오한 의미적 해석도, 혹은 가치 부여에 대한 동기 유발도 하나같이 무의미하게 만드는 순수한 영화가 있을 뿐이다. 영화를 기다리는 시골 아이들의 눈동자도,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흘리는 감동의 눈물은 영화를 위대하게 만드는 가치이자 영화를 존재케 하는 이유다. <상영관>은 우리가 영화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혹은 영화란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에 대해서 한번쯤 되묻고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란 지나친 예술적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자본의 수단으로 몰락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우리는 이를 통해 한번쯤 재고할 필요가 한다. 지나치게 경도된 취향을 계급주의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포식자의 식성처럼 유희적 탐욕을 남발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모두 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을 찾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꿈을 꾼다. 어떤 이는 팝콘을 씹어대며 낄낄거리고, 어떤 이는 눈가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려 보낸다. 어떤 이는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어떤 이는 결벽하게 오로지 스크린만을 응시한다. 각자의 취향대로, 혹은 관람의 목적대로, 그들은 상영관을 찾음으로써 영화를 존재하게 만든다. 거장들이 그들에게 바치는 경배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화를 사랑하듯 자신들의 영화를 사랑해주는 관객들에게 진심 어린 헌사를 보내고 있다. <상영관>은 바로 관객이라는 지지자를 위한 영화의 애정 어린 편지와도 같으며 관객화된 영화의 객석관람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것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들은 왜 굳이 큰 걸 하려는 걸까.’ 영화가 인용하는 짐 해리슨(Jim Harrison)의 말은 32편의 짧은 영화들의 태도를 함축한다.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때로 영화를 통해 꿈을 꾼다. 그건 우리가 어리석은 인간이라서 만은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현실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기에, 그 현실을 완전하게 이루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다. 영화가 존재하는 건 우리가 꿈을 꾸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꿈을 꾸는 한, 극장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며 언제나처럼 우리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꿈을 확인하고 되새길 것이다. 그건 평범한 거장이나, 위대한 관객이나 마찬가지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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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를 위협하는 리얼리티와 풍만한 색채가 보편화된 동시대 애니메이션들을 떠올린다면 이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극의 대부분이 흑백 컬러로 채색되고 앙상한 선이 그대로 드러난 드로잉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띄운 셀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가 말이다. 하지만 2000년에 출간된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인 유명 그래픽 노블을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페르세폴리스>는 상상력의 유희와 드라마틱한 구성, 그리고 의미심장한 시대적 단상을 통해 기술이 충만할 수 없는 감수성의 깊이를 보여준다.

독재정권인 팔레비 왕조의 오랜 탄압에 반발한 이란 국민들의 대대적인 항거는 무력진압을 맞이하고 이는 결국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페르세폴리스>는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혁명이 발발한 1970년대 이란에서 시작된다. 마르잔은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자유로운 집안에서 자라 활발한 아이다. 이소룡을 좋아하는 소녀는 혁명의 기운이 증폭되는 테헤란에서 지인들과 자유를 논하는 부모님들의 성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스스럼없이 혁명을 외친다. 결국 혁명은 이뤄지고 독재왕권은 몰락하며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세상을 기대한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마호메니 정권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토대로 한 새로운 정권의 기치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고 이로 인해 국민들은 혁명 이전의 정권보다도 더욱 극심한 탄압에 시달린다.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던 여성들에게 챠도르를 씌우며 극심한 보수로 들어서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마르잔은 펑크락을 듣고, 강압에 저항한다.

혁명과 독재, 그리고 전쟁까지, 강압의 알레고리들이 넘실대는 굴곡이 심한 시대적 상황을 견디기에 마르잔은 너무나도 자유분방하다. 결국 마르잔의 부모는 딸의 왕성한 혈기가 지독하게 폐쇄적인 이란의 현실을 인내하기엔 역부족임을 깨닫고 마르잔을 프랑스로 유학 보내고 만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타국에서 삶을 꾸려야 하는 소녀는 끝없이 방황하다 결국 피폐해지고 나서야 다시 이란의 부모곁으로 돌아온다. 물론 여전히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강압적 폐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란의 정치적 현실을 단순하지만 명쾌한 이미지로 그려낸 <페르세폴리스>는 간단히 말하자면 마르잔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녀가 격변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육체라는 점이 간과될 수 없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유쾌하고 활기차게 세상을 바라보던 소녀가 자조적이고 망연자실한 눈빛의 여인으로 자라나기까지, 그 순탄치 않은 삶이 이란의 격동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했던 민중의 외침이 또 다른 견고한 형태의 억압을 이루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는 소녀의 성장기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개인의 정체성에 의문을 부여한다. 국가적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듯 파리로 출국한 마르잔이 그곳에서 느끼는 생경함은 결국 자기 정체성의 자각기회를 박탈당한 인간의 고독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체제적 오류는 끝내 수정되지 않으며 결국 그 안에서 개인은 고통을 인내해야 할 따름이다. 마르잔은 오류적 믿음을 강압하는 폭력적 체제 속에서 방황하고 인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문득 깨닫는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심플한 영상은 때론 재기발랄한 웃음을 유도하며 때때로 뭉크의 ‘절규’와 같은 표정으로 경악을 표출한다. 단순하지만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캐릭터들의 명확한 표정만큼이나 뚜렷한 가치관을 지닌 <페르세폴리스>는 설득력을 갖춘 이야기를 통해 올곧은 정치적 자의식을 강건하고도 유연하게 전달한다. 대부분 흑백컬러의 영상으로 이뤄진 <페르세폴리스>는 (8만장의 드로잉 작업 덕분인지 몰라도) 아날로그적인 호감을 부여하며 때론 기록처럼 읽히는 이미지에 설득력을 더한다. 긴 고난의 여정 속에서 어느 새 성숙해버린 마르잔은 다시 한번 파리에 홀로 서지만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은 이성을 잃게 하고 사람을 비굴하게 만든다’는 할머니의 충고처럼 마르잔은 ‘항상 정직하게 살라’는 의미를 드디어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이란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소망한다. 그렇게 소녀는 거대한 비겁한 체제의 폭력에 대항하는 건강한 방식을 터득하며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그리고 우리는 소망(해야) 한다. 그녀에게 금지된 것들을.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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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정연하게 정사각형의 대오를 갖춘 원색들로 알록달록하게 채워진 스크린이 만화경처럼 빙글빙글 돈다. 서로의 경계로 스며들 듯 가늘게 늘어지면서도 제 영역을 교묘히 유지하는 원색들의 회전. 정의할 수 없는 황홀경은 제 이름을 지닌 원색들로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스피드 레이서>는 그 황홀경을 선사하는 도입부처럼 실체가 존재하나 실로 환상에 가까운 것이다. 만화의 색상으로 구현한 실사의 세계, <스피드 레이서>는 새로운 물감을 통한 모사가 아닌 새로운 터치로 창조해낸 유례없는 가상이다.

1967년에 제작된 TV애니메이션 <마하 고고고>는 자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뒤, 미국에서도 <스피드 레이서>란 제목으로 방영되어 센세이션에 가까운 반향을 불렀다.-국내에선 <달려라 번개호>라는 제목으로 방영됨.- (어린 시절 이에 열광했다는) 워쇼스키 형제를 통해 스크린에 재현된 <스피드 레이서>는 영화화된 원작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답습했지만 그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완성했다. <스피드 레이서>는 만화에서나 가능할법한 비현실적 세계관을 영화로 재현한다. 롤러코스터의 노선처럼 아찔하게 높고 가파른 레이싱 트랙 위를 고속 주행하는 레이싱카의 드리프트는 차마 현실적이라 할 수 없는 비정상의 속도를 체감하게 만들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쾌감은 다분히 현실적이다.

카(car)와 쿵푸를 조합해 만들었다는 ‘카-푸(car-fu)’라는 생소한 용어로 명명된 레이싱카의 움직임은 <스피드 레이서>가 선보이는 가장 흥미로운 볼거리다. 마치 운전자의 수족처럼 활용되는 자동차 바퀴의 쓰임새와 재주넘기하듯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차체의 날렵한 움직임은 동물적인 반사신경을 느끼게 한다. 육중한 무게감을 발생시키는 차체의 충돌, 스피디한 질주 속에서 뒤엉켜 회전하는 차량간의 맞물림, 그에 때론 공중으로 붕 떠올라 ‘플라잉 킥’처럼 상대차를 가격하는 움직임은 실로 흥미롭다. ‘이건 그냥 쇠 덩어리가 아니’라는 대사는 <스피드 레이서>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본보기와 같다. 순진무구한 유아적 믿음을 정의로 승화시키는 만화적 가치관을 <스피드 레이서>는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 솔직함은 유치할 만큼 단순한 것이지만 <스피드 레이서>는 이를 명쾌하고 정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유채색이 만연한 <스피드 레이서>의 세계는 무채색으로 그늘진 <매트릭스>와 이미지를 그려내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인간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스템의 함정은 존재한다. 시스템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개인의 운명은 <매트릭스>에 이어, (워쇼스키 형제가 제작한) <브이 포 벤데타>에 이어, <스피드 레이서>로 계승된다. 다만 두꺼운 서적과도 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일관했던 전자들에 비해 <스피드 레이서>는 막대사탕처럼 달고 가볍다. 팝 아트(pop art)의 색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원색적인 나열이 이루는 <스피드 레이서>의 이미지들은 자극적이라기보단 신선하다. 스피드 레이서(에밀 허쉬)라는 직설적인 이름은 더더욱 그렇다. 가치관의 윤리를 이름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들이 <스피드 레이서>에는 유치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존재한다. 직설적인 상징들이 자기 존재를 스스로 명명하는 원색의 세계에서 선악의 대비는 더욱 분명하고 간결한 신념은 한층 명확해진다.

기계문명에 의해 능동적 삶을 말살 당한 인간들이 환각과도 같은 가상체험의 주입 속에서 사육되거나(<매트릭스>), 일원화된 권력 구조의 수호를 위해 개인의 자각을 철저하게 거세하는 전체주의적 강압의 공포에 굴복해야 하는(<브이 포 벤데타>) 현실들에 비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 주체로서 개인이 보존된 온전한 현실이란 점에서 <스피드 레이서>는 전자들에 비해 한층 여유롭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거대한 구조적 억압은 소수자아의 정당성을 착취하고 짓누른다. 재능과 노력을 통해 승리가 부여되는 경쟁윤리는 자본의 음모로 훼손되고 정당성으로 위장된 굴절된 가치관의 편법이 사회를 조종한다. 질서를 유린하는 시스템의 은밀한 거래 속에서 개인은 선택을 강요 받는다. 그곳에서 재능의 가치란 탐욕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에 불과하다.

레이서 모터스는 가내수공업으로 모든 것이 수급되는 가족기업이다. ‘레이싱은 우리 가족에게 종교와도 같은 것’이란 스피드의 말처럼 그들에게 레이싱은 삶에 있어 가장 숭고한 가치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레이싱에서 중요한 건 선수와 경기가 아니라 돈과 권력’이라고 말하는 로열튼 기업의 대표 아놀드 로열튼(로저 앨럼)에게 레이싱은 그저 돈벌이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를 지배하는 건 스피드가 아닌 로열튼이다. 그는 자본력으로 매수한 권력을 통해 레이싱의 배후를 조종하고 이윤을 창출하며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다진다. 그에게 뛰어난 실력만으로 우승을 거머쥐는 스피드는 위협적 상대이자 포섭의 대상이다. 매트릭스(matrix)의 환각 속에서 진짜가 아닌 안위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그를 벗어나 고난을 견디고 진짜 삶을 되찾을 것인가. 스피드는 네오와 마찬가지로 빨간 약과 파란 약의 갈래에 선다.

정신과 육체의 대비. 형형색색한 원색들이 형광빛을 내는 <스피드 레이서>의 트랙은 환상과 실재의 영역 구분이 없을 뿐, 그 현실은 또 다른 매트릭스로 작동한다. 결승지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본질적 목표를 잊은 채, 오로지 그를 저지하기 위해 트랙 위에 올라선 수많은 상대에게 둘러싸인 스피드는 그 트랙 위에서 홀로 유일하게 결승선을 바라보고 달린다. 그는 네오처럼 홀로 유일하게 숙명을 짊어졌다. 거대한 기업의 담합은 레이싱을 허상으로 조작한다. 그에 열광하는 관객들도, 그 트랙 위를 달리는 선수들도 하나같이 거짓을 향유하고 영위할 뿐이다. 스피드는 그 안에서 진실을 본다. 매트릭스의 태연한 삶이 결코 안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정당한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트랙 위에서의 승리가 결코 누릴만한 호사가 아님을 안다. 단순히 결승트로피의 명예를 탐욕하는 것이 레이싱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스피드는 그 트랙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며 이는 끝내 기술의 영역을 뛰어넘은 예술적 경지로 거듭난다.

<스피드 레이서>는 기술적 향연의 범주에 속하는 블록버스터의 체험을 넘어서 예술적 성취를 드러낸다. 자본력의 동원을 통한 CG기술의 진화는 영화의 구현을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오늘날의 영화들은 제각각 거대한 현실을 스크린에 부지런히 전시한다. 관객은 블록버스터를 통해 비현실적인 현실을 대리적으로 체감하고 이를 통해 불가능한 현실을 탐닉한다. 하지만 <스피드 레이서>는 기술을 통한 예술의 창조력이 무엇인가를 증명한다. 단지 변신로봇과 거대괴물이란 허구적 산물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것만이 기술의 본질이 아님을 입증한다. 비현실의 색채를 통해 창조된 <스피드 레이서>의 세계는 예술적이라고 명명되는 가치를 지녔다. 만화적 상상력을 단순히 영화적 형식을 빌려 재현한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해석을 통해 개별적인 작품을 완성시켰다.

자본의 수하로 고용 당하길 거부하는 자신과 가족을 위협하는 거대한 실체에 대항하고자 하는 본능은 분명 숙연한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가 추궁하는 승리의 실체는 그 모든 부조리의 극복에 있다. 장애물 같은 적을 넘어 결승선을 향해 내달리는 스피드의 질주가 육체적 쾌감을 뛰어넘은 숭고함으로 거듭나는 건 그 때문이다. 우승을 가로막으려는 무리들의 비열한 공작을 이겨내고 결승선을 향해 집념의 페달을 밟는 스피드는 그 상대를 뛰어넘고 결국 속도의 경지마저 뛰어넘고 인간의 한계마저 극복한다. 이는 본질을 수단으로 삼는 이들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선요한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가 감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 뛰어난 경지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경지에 오르는 이의 숭고한 정신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승리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된 경쟁을 믿는 자만이 이룰 수 있는 미학적 가치가 <스피드 레이서>에 존재한다. 예술을 간과하고 상업을 중시하는 이들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재능과 열정이 스크린에서 황홀하게 빛을 발한다. <스피드 레이서>는 그렇게 블록버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영화의 신기원은 이렇게 당도했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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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동아일보)

지난 27일 시청을 점거한 중국인 폭도들이 성화봉송의 출발지인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한국인을 집단 폭행했다고 한다.
폭행당한 그는 '티벳 평화연대'에서 나눠준 홍보용지를 들고 있다는 이유로 오성홍기를 든 중국인들에게 바닥에 내팽개쳐진채 발길질을 당했다고 한다.
필자도 한국인을 구타하는 사진을 보고 엄청난 분노를 머금었다. 이는 사람이기에 엄연히 당연한 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팩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들 잡아 족치자, 가 아닌 것이다. 감정에 감정으로 대응하자면 끝없는 반복의 악순환에 시달리게 될 것이 자명하다.
이성을 찾아 대응해야 한다. 일단 색출이 가능한 중국인들에게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중국에 유감을 표명한 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단의 최선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최선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국제관계의 역학에서 취해야 할 존비적 정책에 불과하며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제스쳐에 불과하다. 그것이 지난 일요일 시청에서 길길이 날뛴 오만한 중국인 유학생들에 대한 메시지로 작용될 가능성은 없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건 물리적 대응책이다. 경고적인 대응을 끝냈으면 그 다음으로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 분명 그들이 저지른 형사사건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 단지 중국 정부에 대고 유감을 표명하는 건 그저 국가적 의무의 수순일 뿐이다.
발본색원해서 시위에서 과격한 행위를 한 자들을 잡아서 그에 마땅한 처벌을 해야 할 것이다.
그건 그들이 우리나라 국민을 때리고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신경질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들이 범법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이 앞서는 문제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단지 인터넷에 올라온 얼굴을 보고 비방의 댓글 다는 수순으로 끝나거나 혹은 그들을 마주친 누군가가 멱살잡이를 해서 끌고 가는 것으로 해결되서는 안될 문제다.
지금이라도 대한민국은 공권력을 동원해서 그 무질서한 현장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는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의 존엄성을 세우는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사안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단지 이성을 잃은 무지한 분노에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성적인 가능성이자 그들과 다른 우리의 차별성이기 때문이다.
시위라는 민주적 방식에 대항한 그들의 무자비한 폭력을 준법으로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폭도들의 몰지각을 일깨울 우리의 이성적 포용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추후에 이 땅에서 비슷한 일련의 사례를 방지할 수 있는 적절한 대응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용을 넘어선 그들의 행위가 어디서든 통할 수 있다는 무례함을 다스릴 수 있는 최선책이기도 하다.

P.S1>참고로 사진상에 등장한 전경들의 정지된 컷은 그들의 안일한 대응이라기 보단 10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에 벌어진 상황을 촬영한 카메라에 담겨지지 못한 그들의 대응이 생략된 팩트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손가락질 해야 하는 상대는 그들이 아니다. 또한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았을, 성화 봉송에 8000여명의 인원 배치를 지시했음에도 정작 중국의 인해전술을 방관하고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지시 책임자의 윗선에게도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P.S2>어떠한 이유에서라도 티벳의 독립은 응원되어야 한다. 엄연한 주권국가에서도 저리 날뛰는 중국인, 그것도 유학생들의 태도가 저리할 정도면 현재 티벳의 상황은 무시무시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에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우리는 그 용기에 무의식적으로나마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목격한 무례한 그들의 태도에 맞서는 또다른 정당성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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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중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엄연히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무시무시한 광경이다.
오성홍기를 휘날리는 중국인들이 위풍당당하게 한국에 체류하는 티벳인을 폭행하는 장면이다.이들은 그와 함께 미국, 캐나다인 6명을 오성홍기를 앞세워 구타했다. 27일 시청 앞 광장에서, 백주대낮에, 우리는 단지 티벳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깡패짓을 일삼는 중국인 무리들에게 아무런 저항없이 구타당하는 상황을 묵묵히 지켜봐야했다.

개같은 짱개들, 이라고 분노를 피워올리기 전에 당신은 한가지 생각을 먼저 품어야한다.
어째서 이들이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마음껏 난장판을 벌일 수 있는 것일까.
같은 시각 중국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이 이뤄지는 도로변에는 8000여명의 경찰 특공대가 파견되어있었다. 그들은 '성화봉송을 저지하는 시위에 강력히 대응하기 위해서' 성화봉송자 1인의 주변을 겹겹히 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울 한복판에서 베이징 올림픽에 보이콧하는 무리들을 응징하는 중국인들의 무법천지를 국가는 방관하고 있었는가. 그건 아니다. 현장에도 경찰은 투입됐다. 약 10여명의 경찰들이 중국을 수호하기 위해 모인 인해전술에 맞서고 있었다. 다만 숫자가 열악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10여 명 남짓의 경찰과, 8000여명의 경찰특공대라는 어마어마한 부등호를 그리게 만든 동시간대의 다른 상황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혐의를 부른다.

중국의 성화봉송을 안전하게 이루기 위해 8천명의 경찰이 배치된 상황의 반대편에서 우리는 중국에 대한 반대를 용인하지 못한다는 폭력의 공포를 온몸으로 대면했다. 국가가 보호한 건 국민이 아니라 성화였다. 공권력은 중국에서 벌어질 베이징 올림픽을 무사히 치르는 것에 총력을 기울였으되, 그 반대편에서 중국인들의 알력적 폭력에 마치 의도적인양 무관심했다.
 
국가의 이해관계는 경제적인 관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성화봉송을 위해 8000여명의 특수경찰을 투입한 건 중국과의 이해관계에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완연한 의지에서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바가 아니다. 다만 경제적 관념을 떠나 이 땅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누려야 마땅할 국가적 존비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과연 이 나라의 실용주의가 누구를 위해 국가의 이해관계를 유력하게 생각하는 건지 의심스럽다. 성화를 보호하기 위해 동원될 공권력은 존재하지만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공권력은 없단 말인가? 동시에 자국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듯한 외국인의 무분별한 난동을 방관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인가?

대한민국 정부가 티벳의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하지 못하거나 베이징 올림픽에 보이콧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백주대낮에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미친 듯이 난립하는 중국인들을 두 눈 멀겋게 뜨고 바라봐야했을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모르겠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은 결국 대한민국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만한 것이다. 물론 그 정체성을 표방하는 건 실권자들이다. 대한민국의 실권자들에게 중요한 건 성화봉송이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보호받고 살 권리가 있는 국민들은 시청 앞 대낮에서 벌어진 공포의 도가니를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아야 할 것이다. 지독한 민족주의를 구호로서, 그리고 폭력적 행위로서 도출하는 중국인들의 몰지각한 행동양식만큼이나 무시무시한 건, 그것을 방관하는 대한민국 실권자들의 몰염치한 사대주의적 근성일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실용적이라고 믿는 것이라면 더더욱 침통할 수 밖에 없다. 제 국민의 안위를 버리고 밖으로 나갈 이익에 눈먼 정부의 방침은 결국 집을 돌보지 않고 외도하는 남편에 대한 불신감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믿고 있는 힘이라면 그만큼 어리석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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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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