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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으로 한걸음 들어갔다. 그러나 돌아 나와야 할 때 그 길은 끝이 없는 길이 돼있었다.' 우민(송승헌)의 독백과 함께 미끄러져 나가는 <숙명>은 시작부터 파국을 예감하게 만든다. 돌아나올 수 없는 어둠으로 들어간 수컷들의 이야기, 이쯤 되면 우리가 종종 느와르라고 정의하는 장르적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숙명>은 의리와 우정이란 남자들의 비범한 가오를 알량한 허세로 전복시키는 느와르의 세계관을 선포하며 말문을 연다.

전사를 과감히 중략한 채 한 차례의 액션 시퀀스로부터 튕겨져 나가듯 시작되는 <숙명>은 전반부에 이미 관계의 엇갈림을 드러내며 갈 길을 명확히 둔다. 배신과 복수의 상관성은 <숙명>이 필연적으로 몸을 내던질 숙명적인 마찰이다. 조폭성이란 껍데기를 뒤집어 쓴 의리라는 집합의 원소로서 남성성의 교열을 맞춰나가는 수컷들은 피비린내를 동반한 배신의 필터를 거쳐 파국의 내리막길로 뒤엉켜 구른다. <파이란> 등과 같은 작품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연출하기도 했던 김해곤 감독은 그의 지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숙명>에서도 촌철살인의 대사를 통해 진창 같은 영화적 현실을 환기시킨다.

빠르게 돌진하던 초반부와 달리 <숙명>은 시간의 공백을 두고 다시 시작되는 사연을 통해 이야기의 리듬을 한차례 느슨하게 조율한다. 배신으로 인해 파국을 맞이한 얄궂은 의리는 돌아온 탕아로 인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로 이어질 법한데 <숙명>은 그로부터 잠시 숨을 돌린다. 단순한 복수 신화로 대책 없이 승천하기 보단 현실적인 국면으로 천착한 드라마적 선을 살리려는 것인지 영화는 혈기를 누르고 흩어진 관계의 복원에 힘쓰는 우민의 고군분투를 조명한다. 물론 그 중간에 우민과 대립선에 선 철중(권상우)과의 마찰이 삽입되고 약물 중독에 빠진 도완(김인권)은 인물들의 심리적 혼란을 야기시킨다. 그리고 우민과 과거 연인 관계였던 은영(박한별)의 사연이 주변을 맴돌며 속내를 알 수 없는 영환(지성)이 전반적인 관계를 유일하게 오간다.

중첩되고 혼밀한 캐릭터의 상관성을 이루는 <숙명>은 개별적인 캐릭터의 사연을 이야기에 엮어내려다 오히려 본래 이야기의 선을 지워버린다. <숙명>에는 분명 일관된 이야기의 선이 있으나 군웅할거하듯 제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려는 캐릭터들은 중구난방하듯 난립하여 이야기를 부질없이 헤매게 만든다. 물론 애초에 <숙명>은 차라리 캐릭터 영화였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사연의 밑바닥을 드러내지 못해도 적당한 유추가 가능할 정도로 가공된 캐릭터들은 이를 반증한다. 하지만 마치 제 목소리를 내는 캐릭터들의 사연은 비중에 따른 목소리 차이만이 있을 뿐, 저마다 딴소리를 내다가 일관된 이야기의 밀도를 훼손한다. 장르도 있고, 드라마도 있고, 캐릭터도 있지만 <숙명>은 이를 녹여낼 발화점을 찾지 못하고 불씨를 찾아 헤맨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캐릭터가 지닌 사연은 좀처럼 간극을 좁히지 못하다 감춰둔 필살기로 승부를 끝내듯 캐릭터의 이면에 감춰둔 비수 같은 반전을 통해 비극적 결말을 내던지곤 황급히 상황을 종식시켜버린다.

<숙명>은 불균형한 영화다. 마치 발화점이 다른 연료들을 연소시키기 위해서 무리하듯 온도를 높인 것만 같다. 물론 캐릭터를 뒤집어 쓴 배우들은 모두 다 하나같이 안간힘을 다하곤 있다. 그러나 원래 타고난 이미지에 갇혀서 외모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누구의 캐릭터와 전체적인 극의 무게감 안에서 홀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듯한 기이한 캐릭터로 정리된 누구의 캐릭터를 보고 있자면 <숙명>의 가장 큰 적은 캐스팅이 만들어낸 배우와 캐릭터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회의감이 든다. 그렇다고 배우의 연기력을 탓하기엔 마녀사냥 같고, 감독의 연출력을 꼬집기엔 부적절해 보인다. 이는 전체적인 조율의 문제다. 송승헌과 권상우, 그리고 우정출연이라는 형식으로 끼워 맞춘 지성까지, 꽃미남들을 비열한 거리로 내몬 <숙명>은 적어도 그들에게 진정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거리에서 그들이 소모될 수 밖에 없는 설득력 있는 인상을 부여했어야 했다. 하지만 <숙명>은 스크린을 빛나는 외모의 한류스타를 전시한 쇼윈도처럼 행세하고 있다. 그 와중에도 캐릭터의 날을 세우는 김인권은 산만하게 매장된 캐릭터의 전시관에서 연기적 구색을 맞추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허망하게 소모된다.

<숙명>이 의리를 참을 수 없는 저열함으로 몰락시키는 건 수컷들의 본능적인 책임감에서 비롯된 성공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숙명>은 남성성의 신화처럼 호명되곤 하던 의리의 저열함을 한시적으로 드러낸다. 하나같이 가족이라는 자신들의 원천적 기반 앞에서 약해지거나 소신을 굽히는 남성들은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고자 하는 본능 앞에서 강인해짐과 동시에 비굴해진다. 철중이 친구들을 배신했던 것도, 우민이 복수라는 날을 세우기보단 삶을 바라보는 것도, 하나같이 그 귀속적 본능을 모른 척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느와르라는 장르적 감수성에도 부합할 수 있는 내면적 가능성이 <숙명>에 분명히 잠재되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숙명>은 소품처럼 활용한다.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고자 하는 남성의 막중한 본능적 책임감보다도 의리를 앞세운 지독한 오지랖을 확인시키는 <숙명>은 결국 자신의 본심이 무엇인지도 헤아리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폼생폼사의 소모품으로 전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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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으로 만든 리얼 돌(real doll)을 애인이라고 소개하는 그를 미친놈 취급하기 전에 ‘라스는 착한 녀석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 곳은 분명 선량한 사람들의 공동체다. 하지만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이하, <사랑스러운 그녀>)는 현실에서 반허공에 뜬 착하기만 한 이야기라고 지나칠 수 없는 영화다. 그건 착한 이야기가 절실한 감정을 진심 어린 표정으로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단적으로 기피하는 라스(라이언 고슬링)는 함께 식사를 하자는 형수(에밀리 모티어)의 권유에 머뭇거리다 달아나고, 여자 직장동료(켈리 가너)의 적극적인 관심도 피해 다니기만 한다. 하지만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항상 온화한 얼굴로 기억되는 착한 사람이며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인망도 두텁다. 하지만 항상 자신의 집에 홀로 박힌 그의 일상에 대해 형수는 걱정이 깊고 이웃들의 친절한 관심은 끊이지 않는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형의 집을 찾아와 멀리서 자신을 찾아온 여자친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한다. 의외의 소식에 화색이 된 그들은 그녀에게 내어 줄 방까지 준비하며 설렘을 감추지 못하지만 이내 그가 데려온 그녀의 정체 앞에서 멍해질 따름이다. 그가 데려온 모종의 여인, 비앙카는 실리콘으로 만든 섹스토이 리얼 돌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큰 문제는 장난이나 농담이라 말하기엔 너무나 진지한 그의 태도다. 그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리얼돌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비앙카라고 소개하는 라스와 대면하는 이들의 당혹감은 설명할 필요 없이 표정만으로 드러난다. 게다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돌아올 리 없는-인형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행동하는) 라스의 모습을 (관객으로서가 아닌 극 중 주변인으로서) 지켜본다면 심히 걱정이 앞설 것이 자명하다. 물론 당연히 라스의 곁에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형과 형수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애정표현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때론 뜨악한 심정을 토로한다. 하지만 인형을 향해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흉측하게 바라보는 대신 그 특별한 로맨스의 주인공을 위한 연극에 기꺼이 조연으로 참여하는 그들의 노력은 진심만이 전달할 수 있는 감동을 숙성시켜나간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점차 행위에 진심을 담기 시작하며 허구적인 이야기는 점차 실존의 설득력을 얻기 시작한다.

<사랑스러운 그녀>에서 라스의 리얼돌은 마을이라는 공동체, 즉 인간적 유대감을 흔드는 어떤 물음과도 같다. 라스의 기이한 애정행각은 망상(delusion)이라는 의학적 진단을 얻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라스를 환자 취급하려 들지도, 그를 섣불리 치료하려고 들지 않는다. 단지 그의 애인 비앙카를 자신들의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사랑을 인정할 뿐이다. 그 과정을 이뤄내는 건 선량한 이들의 무조건적인 감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비정상과 정상에 대한 구별이 아닌 소수의 특수성을 받아들이는 다수의 포용력. <사랑스러운 그녀>가 특별한 이야기 이상의 값어치를 매길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타인, 혹은 대부분과 다른 소수의 행위를 비정상으로 판명 짓지 않는 선택은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에 대한 이성적 도발을 감성적인 유대감으로 극복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인간미로 거듭나며 이는 상처받은 인간을 치유하는 현명한 처방전이기도 하다.

영화가 드러내는 것처럼 태생적 트라우마에서부터 기인한 라스의 방어적 본능은 성장기에 견뎌내야 했던 외로움을 통해 더욱 견고해진다. 자신의 외로움을 털어내는 것에 익숙지 않은 라스는 몸만 성장한 채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른이’다. 타인과의 접촉만으로도 통증을 느끼는 그의 질환은 지독한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방어적 본능에 가깝다. 그가 유일하게 소통을 거부하지 않는 상대가 인간이 아닌 리얼돌이 된 것도 그가 접근하기엔 타인의 체온은 너무 뜨겁기 때문이다. 관계에 있어서는 미숙아에 가까운 라스의 칩거에 가까운 일상은 비앙카를 통해 활동영역을 넓히고 점차 관계적 소통의 폭까지 넓혀나간다. 라스는 자신의 내면을 비앙카와 동일시하며 스스로가 쉽게 드러내 보일 수 없었던 내면적 고뇌를 비앙카라는 대리적 자아에게 투영해 타인과의 소통을 시도하거나 혹은 관심을 유도한다. 결국 비앙카는 라스의 태생적 모성 결핍을 치유하는 대리모이자 폐쇄된 내면에 갇힌 자아를 이끄는 구원의 손길과도 같다. 비앙카의 손을 잡고 소통의 걸음마를 한걸음씩 내딛는 라스는 결국 홀로서기가 가능한 지점에서 비앙카와 이별을 고하게 된다.

현상보다도 그 안에 놓인 인간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랑스러운 그녀>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투명한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순백으로 채색된 선량한 감정적 동의를 요구하지 않으며 순수란 이름으로 가공되는 기성복 같은 감동을 값싸게 내놓지도 않는 <사랑스러운 그녀>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유히 흐르는 플롯 위를 부유하듯 떠내려오는 일목요연한 감정의 유유자적함이 돋보인다.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며 감정의 격양을 부르기보단 한산하게 흘러내리는 시냇가처럼 한껏 여유로운 <사랑스러운 그녀>는 흐르는 물길 주변의 여백에 채워진 이웃의 군상을 확인하게 만든다. 홀로 선 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줄 수 있는 인간들과의 소통이 가능한 그곳은 우리가 결코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믿음과 신뢰가 존재하며 이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투명의 소박한 극치에 가깝다. 너와 나의 차이를 넘어 우리를 이루는 믿음의 소통, 그 인간적 신뢰로부터 한발씩 디뎌나가는 <사랑스러운 그녀>는 선량한 눈빛을 넘어 끝내 투명한 감동으로 성장한다. 이는 종종 우리가 기적이라 부르는 것과 매우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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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치는 쇠는 불꽃을 튀며 돌을 부순다. 단단한 두 형질의 충돌은 약한 쪽의 육체를 박살내고야 만다. 귀를 후벼 파는 듯한 파열음의 공명에서 비롯되는 <데어 윌 비 블러드>(이하, <블러드>)는 파국적 결말을 암시하듯 경보를 울리며 시작되고 그와 함께 시선에 잡힌 산은 마치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절대적 존재의 형상처럼 보인다.-하근찬의 ‘수난이대’에서 마지막에 언급되는 산의 형세와 같이- 마치 그곳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라는 것을 예감하고 암시하듯.

20세기 초, 캘리포니아 석유개발사업의 이면을 파헤친 업톤 싱클레어의 소설 ‘오일!(Oil!)’을 바탕으로 제작된 <블러드>는 한남자의 야망을 읽어내려가는 일대기다. 깊은 갱도 속에서 홀로 곡괭이질을 하는 남자 곁을 지키는 카메라 앵글의 건조한 시선은 의문스러운 갈증을 느끼게 할 정도로 묵묵하다. 그 뒤, 갱으로 추락해 다리가 부러져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하던 남자가 무언가-은으로 추정되는-를 찾아낸 뒤 힘겹게 땅 위로 올라 산을 기어내려가는 집념을 묵묵히 주시하는 앵글 너머로 갈증은 다시 한번 도모된다.-그 직후, 남자로부터 찬찬히 들어올려지는 앵글의 시선은 시작에서 보여졌던 산을 같은 구도로 다시 올려다보고 사이렌 같은 BGM이 다시 경보처럼 울린다.- 정확히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얼마 후, 무리를 이끌고 조직적인 작업을 펼치던 그 남자가 홍조를 띠는 순간, 의문은 해갈된다. 그의 미소를 부르는 건 땅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새까만 석유. 하지만 새어 들어온 희열 너머로 예기치 못한 비극이 밀려온다. 석유가 가져다 준 포만감이 찾아온 지 얼마지나지 않아 그들은 죽음을 맞이하고 목격한다. 그러나 피를 머금은 인간의 욕망은 더욱 어두운 탐욕으로 짙게 드리운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남자, 다니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음성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한다.

검은 석유의 빛깔은 인간의 어두운 탐욕과 지독하게 어울린다. 땅으로부터 솟구친 원유비를 뒤집어쓴 인간의 미소가 짙을수록 역설적인 사악함도 짙게 드리운다. 그리고 욕망의 중심지대에 바로 다니엘 플레인뷰가 서있다. 그는 <블러드>의 욕망이 시작되는 근원지점이다. 하지만 그는 욕망을 갈취하기 보단 성취하는 타입이다. ‘정당한 우리 몫을 벌거야!’라는 그의 의지는 현실적인 고난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이자 추진력이 된다. 그는 자신만을 신뢰하고 타인을 경멸하는 염세적 자아를 지닌 자기중심적 인간이기에 때로 오만해 보이지만 결코 어리석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을 통해 인생의 좌표를 개척하는, 철저하게 강인한 인간이다. 관계가 분명치 않은 아들 H.W.(딜런 프리지어)를 끔찍이 아끼던 그가 다친 아들을 뒤로 하고 불타는 유정탑으로 달려갔던 것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끔찍하게 아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석유업자이며 가족사업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입에 발린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가 타인을 혐오하는 건 그의 신념이 결코 타인을 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인간관계는 자신이 배려하지 않는 타인 이상의 관계, 즉 혈육(이라는 믿음)이다. 자신의 신념을 십자가처럼 짊어진 남자는 골고타의 언덕과도 같은 고독의 여정을 함께 넘어갈 자신의 분신을 갈망한다.

엘라이 선데이(폴 다노)는 플레인뷰의 대척점이자 그와 가장 밀접하게 닮은 상대다. 그는 외부의 힘을 빌어 자기 신념을 표방하는 인간이며 플레인뷰와 같은 탐욕을 갈망하지만 대비적인 신념으로 스스로를 위장한 자다. 플레인뷰가 엘라이를 혐오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그의 맹신적 태도가 불경스러워서, 혹은 플레인뷰 자신이 반신앙적이라서가 아니라 엘라이가 경도된 신앙을 이용해 은밀하게 플레인뷰의 성취를 탐하고 있는 까닭이다. 엘라이는 플레인뷰의 사업의욕을 통해 활성화된 지역경제를 기반으로 수혜를 누린다. 이는 가족사업을 표방하는 플레인뷰가 지역민의 신뢰를 점해야 할 위치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에 가깝다. 유정탑의 부근에서 ‘제3계시교’의 전도를 행하기도 하는 엘라이는 플레인뷰가 유정탑의 개수를 늘려가고 인부를 끌어들일 때 교회를 확장하고 신도를 모은다. 석유사업의 활성화와 함께 변모하는 마을의 풍경 속에서 엘라이의 교회는 플레인뷰에게 쇼에 불과해보이는 성령의 퍼포먼스를 펼친다. 플레인뷰는 자신이 일군 토양 위를 가식적인 숭고함으로 점하려는 엘라이의 행위가 둘도 없는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블러드>가 향하는 세계로 통하기 위한 스펙트럼과도 같다. 그의 사적인 탐욕은 그 세계의 탐욕으로 번져나가고 그는 구체적인 탐욕의 상을 지목하는 영화의 내재된 눈과 같다. 하지만 <블러드>는 시대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를 펼쳐내거나 정치적 태도를 견지하기 보단 그냥 묵묵히 그 현실을 바라보고 인물의 행위를 지켜본다. 다니엘 플레인뷰는 영화의 전체를 관장하는 주동인물임에 분명하지만 영화는 그에게 악의와 선의 중 어떤 감정이입도 도모하지 않는다. 그의 일대기는 영화의 전부이면서도 전체는 아니다. 영화는 국지적인 인물의 상을 충실히 묘사한다기 보단 인물이 드러내는 일화를 통해 영화의 윤곽을 확장하거나 형성시킨다. 캐릭터를 통해 영화의 일가를 이루지만 영화에는 족보가 없다. 영화로부터 발견되는 시대성은 인물로부터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로부터 새어 나오는 기운으로부터 막연히 감지되는 부가적인 영역일 뿐이다. 캐릭터의 일대기로 이뤄진 영화의 골조가 완성하는 건 그들의 일대기를 유도하는 시대의 기운이다. 인간은 시대의 징후를 따라 광기로 들어선다.

<블러드>가 재현하는 현실은 분명 20세기 초, 미국의 자화상이다. 그 시대가 발견한 석유라는 자원을 통해 자본의 가치가 활성화되고 신앙의 소비가 급증한다. 하지만 자본과 결탁하는 신앙은 실상 자본의 수하로 전락한다. 의미심장한 제목처럼 영화가 예감하는 피의 전조는 그 불균형적인 공생 구조 자체만으로 예언된다. 플레인뷰와 엘라이는 시대가 잉태한 두 개의 다른 신념을 지닌 맹주다. 자본과 신앙에 결탁한 신념은 각자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 근본을 둔 믿음의 힘을 빌리고 있으며 이 대립적 형태의 신념을 통해 그들은 시대에 배팅을 건다. 모든 것을 독식해야 성이 차는 플레인뷰에게 엘라이는 공생할 수 없는 착취자에 불과하다. 결국 다른 형질을 지닌 욕망의 맹주는 서로 으르렁거리다가 결국 맞붙어 뒹굴고 다른 한쪽의 피를 부른다. 이는 자본을 숭상하는 다른 형태의 믿음, 즉 자아를 믿는 자와 신의 뜻을 비는 자의 충돌과도 같다. 형질이 다른 두 신념은 하나의 가치를 향해 결국 충돌하고 이는 결국 더욱 극악한 신념을 지닌 자를 살아남게 한다. 하지만 그 승리는 살아남은 자를 위한 것도 죽은 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플레인뷰와 엘라이는 각각 서로를 상대로 한번씩의 공수교대를 한다. 송유관으로 가는 땅을 얻기 위해 자신의 폐부를 찔려가면서도 거짓간증을 완수하는 플레인뷰와 달리 자신의 가식적인 신념을 무너뜨리고 비굴하게 진실을 토로하는 엘라이는 패배자로 몰락하며 자본의 노예로 전수된다. 이는 결국 위선의 탈을 쓴 나약한 신념이 단단한 본성으로 채워진 강건한 신념에 부딪혀 부서지는 형태로 드러난다. 십자가를 거쳐 자본과 간접적인 유통구조를 형성하려 했던 엘라이에 비해 송유관을 통해 자본과 직접적으로 결탁한 플레인뷰-I have a pipeline-의 간결한 유통구조는 자본을 향해 배팅한 두 신념의 승패를 단명하게 갈랐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파멸시키는 시대의 기운은 쇠와 같은 플레인뷰가 엘라이를 돌처럼 부수는 파국을 맞이한다. 결국 플레인뷰는 파멸을 내림으로써 스스로 파국의 무대로 올라선다. 결국 그 처절한 승부는 파멸을 맞이한 자와 파멸을 부른 자 모두 파국의 결말로 뛰어내리게 만든다.

그 파멸의 종국에서 살아남은 건 무엇일까. 믿음의 본체는 사라졌지만 소산은 전도된다. 자본에서 비롯된 집념은 신념의 형체를 막론하고 하나의 광기를 잉태했다. 그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도 성령의 이름도 모두다 몰락하는 형상에 불과하다. 결국 자본이라는 물질주의적 신앙의 태동은 인간의 피를 제물로 한 파멸의 의식을 거쳐 굳건한 제단으로 자리를 잡는다. 마치 원유로부터 솟구치는 불기둥처럼 그렇게 욕망은 한껏 더 활활 타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는 도래했다. 자본을 먹고 자란 미국의 거친 서사는 피로 물든 역사를 봉인한 채 현재를 맞이했다. <블러드>는 그 시대의 광기를 먹고 성장한 미국의 유년기에 대한 쓸쓸한 자화상이다. 하지만 <블러드>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플레인뷰의 마지막 구절-I’m finished-이 아니다. 플레인뷰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란 H.W.는 청력을 손실한 덕분에 그의 변해가는 표정을 남보다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바라보는 건 인간의 변화, 즉 자본의 광기로 지탱하는 인간의 피폐해져 가는 초상이다. <블러드>는 자신의 아버지가 잉태한 세계를 되돌아보는 동시에 자신이 그려 넣을 새로운 자화상의 청사진을 살며시 드러낸다. 플레인뷰와 엘라이의 시대를 지나 성장한 H.W.(러셀 하버드)는 시대의 광기를 물려받길 거부한다. 그는 스스로 지금이 변화해야 할 때임을 선포하고 –It’s time to make change-플레인뷰의 곁에서 떠난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뒤로 아버지 세대의 광기는 파국을 드리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마찬가지로 <블러드>는 광기를 선포하는 시대의 자화상을 그린다. 이는 현재 미국이란 나라가 짊어진 미래에 대한 불안한 징후이자 과거로부터 이어진 업보의 초상이다. 자본과 결탁한 삭막한 팍스 아메리카나의 출발지를 들여다보는 두 영화는 다른 풍경을 지니고 있지만 같은 것을 보고 있다. 탐욕은 인간을 전진하게 만들지만 결국 이에 이끌려가는 인간은 파멸을 면치 못하거나 파국의 예감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포스트 9.11시대에서 분노를 기회로 국책사업을 펼치던 부시의 악랄함과 달리 혜안을 지닌 어떤 미국인은 자신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던 흐름의 실체를 추적할 수 있음을 정중하게 증명한다. 특히 <블러드>는 과잉 같은 기교를 사족처럼 끼워 넣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이례적으로 클래식한 고전적 분위기를 관성적으로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 이는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동시대에 이 작품이 탄생했다는 우연적 사실과도 연관된다. 인간의 존재의 가치가 날로 나약해지는 시대의 불길한 징후, 두 영화는 같은 것을 주목하고 있다. 가치가 전복되는 시대에서 중후한 두 작품은 시대의 질서를 다시 한번 새롭게 정립해야 함을 중후한 고전적 화법으로 드러낸다. 또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배경음을 거세함으로써 시대의 앙상한 기운을 건조하게 묘사했던 것과 반대로 <블러드>는 마음을 밑바닥부터 요동치게 만들거나 신경의 깊숙한 곳까지 찌르고 들어와 곤두서게 만드는 배경음으로 감상을 자극한다. 이는 심리적 평형을 유지하던 전자와 반대로 심리적인 격양을 유도하며 이는 각자의 배경에 걸맞은 적절한 테크닉으로 구사된다. 동시에 마치 하나의 옥타브를 차례로 연주하듯 높낮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를 품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광폭한 연기는 소름 끼칠 정도로 대단하다. 또한 1인2역을 맡은 폴 다노는 마치 식물적인 표정을 통해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의 양면성의 너비를 드러내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태평양 건너 먼 이국에서 날아온 이 작품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의 현실과도 멀지 않다. 기업화되고 권력화되는 종교 집단의 온상과 자본의 논리로 재편되는 사회적 질서의 맥락 속에서 <블러드>의 파국은 우리가 불러들일 파멸의 묵시록을 예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그분의 사업이 이 땅을 배불리 먹일 것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모든 것을 돈의 가치로 환원시키겠다는 정책적 포부가 구체화될 이 땅의 미래 속에서 쓸모를 인정받지 못한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판명될 것인가. 엘라이는 자기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표독스럽게 말한다. ‘게으르고 멍청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우리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돌이 아니라 쇠가 되는 길을 택해야 할지 모른다. 부서지는 쪽이 아니라 부수는 쪽이 되어야 하는 운명. 그곳에 흐르는 피가 자신의 것이 아니기 위해서는 더욱 단단해져야 할 것이다. 모두에게 행운을 빈다. 물론 그 끝에서 어떤 파국을 만나게 될지 누구도 모르지만.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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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의 사생활은 대중의 관심이며 이는 때로 기자를 위한 이슈가 된다. 동시에 스타는 자신의 발언에 적당한 제한선을 지정하고 스스로의 상품성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인터뷰는 대화를 가장해 스타의 상품성을 매매하는 공식적인 협상테이블로 전락할 때가 많다. 인터뷰어(interviewer)는 상대에 대한 진심을 드러내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인터뷰이(interviewee)는 상대의 의도를 파악해 적절한 답변을 내민다. 그 과정에서 대화는 도박이 되기도 한다. 비밀이란 믿음을 담보로 내보일 수 있는 최선의 카드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진심을 얻기 전엔, 혹은 진심이란 것을 확신하기 전엔 함부로 내보일 수 없는 것이다. 톱스타의 인터뷰는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그들의 비밀에 접근할 수 있다는 흥미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매력을 부른다. 허나 동시에 그들이 드러내 보인 것이 완벽하게 진실을 기반으로 한 결과란 확신도 쉽지 않다. 이 과정에서 인터뷰는 수를 읽고 패를 던지는 심리전의 양상으로 발전한다.

2004년, 이슬람 여성의 인권유린을 고발한 <굴종>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근본주의자에게 살해당한 네덜란드의 국민감독인 테오 반 고흐-빈센트 반 고흐의 증손자이기도 한-의 영화 중 세 작품의 리메이크를 결정한 할리우드 프로젝트 중 첫 번째 기획에 해당하는 <인터뷰>는 톱스타와 기자의 인터뷰를 통해 펼쳐지는 미묘한 심리적 공박을 흥미롭게 끌어낸다. 연기보단 가십란을 주로 장식하는 카티야(시에나 밀러)를 인터뷰하게 된 정치부 기자 피에르(스티브 부세미)는 그녀와의 인터뷰보다도 워싱턴의 정세에 관심이 많다. 게다가 그녀의 출연작보다는 그녀의 가슴축소수술이 더욱 궁금한 그의 태도는 공격적이며 이런 태도에 질린 그녀는 결국 인터뷰를 거절하는 수순에 이르고 만다. 하지만 그 후, 피에르의 택시사고에 미약하지만 일조(?)하게 된 카티야는 그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부근에 있는 자택으로 그를 데려가게 되고 본격적인 인터뷰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정치적인 태도에서 벗어난 카티야와 피에르는 진심을 가늠할 수 없는 본심과 위장의 줄타기를 서로 넘나든다. 하룻밤 동안 카티야의 집에서 술을 동반하며 계속되는 그들의 대화는 서로를 로맨틱한 연인처럼 끌어당기기도 하고 애틋한 부녀관계처럼 보이게도 하며 때때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원수지간으로 회귀시킨다. 진심을 엿보고자 하는 의도적 접근은 때론 예기치 않게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게 만드는 친근함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비의도적인 탐색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단서들은 돌발적인 공격을 유도하기도 한다.

<인터뷰>는 제목처럼 인터뷰라는 대화 방식이 내포할 수 밖에 없는 심리적 장벽 그 자체로 흥미를 유발한다. 인터뷰어든, 인터뷰이든, 자신의 솔직한 단면이 우연한 계기로 인해 상대방에게 하나씩 드러나게 되고 그를 통해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 (듯한) 과정은 피상적인 관계가 진심으로 인해 극복되고 있다는 믿음을 부여하며 그런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쏠쏠한 재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결말부에 드러나는 믿음의 진실이야말로 <인터뷰>가 지닌 백미의 순간이다. 카티야에 대한 비밀을 쥐게 된 피에르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카티야에게 지불하지만 이는 결국 <인터뷰>의 관계를 역전시켜버리는 반전으로 환전된다. 그 지점에서 지식인이 지닌 옹졸한 자만심은 결국 진심을 볼모로 잡히게 되는 치졸함으로 몰락하게 되며 그가 우습게 여겼던 셀레브리티의 천박함은 결국 그의 자존심을 구기는 백치미의 연기로 승화된다. 이는 결국 스타의 이면에 가린 인간적 진실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가중시키며 그 진실에 대한 명확한 답변에서 한발자국 물러남으로서 묘한 신비를 배가시킨다. 하지만 그 끝에서 카티야가 보게 된 피에르의 비밀, 그리고 피에르가 보게 된 카티야의 진솔한 모습은 그들의 인터뷰가 실상은 진솔한 대화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결국 그들의 피상적 관계는 결코 진심을 이룰 수 없다는 관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원인을 알면서도 그 폭을 좁힐 수 없다는 관계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그것이 비단 스타와 기자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미니멀한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걷잡을 수 없게 쏟아내는 그들의 대화는 인간의 다양한 심리적 양상을 풍부하게 드러낸다. 어떤 의도적 메시지를 읽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없이 그 자체로서 읽히는 인간과 인간의 심리적 양상의 변화를 체감하는 것 자체가 <인터뷰>를 즐기는 핵심에 가깝다. 스타의 사생활을 소비하는 행태의 이중적 위선을 허접하다고 말하는 정치부 기자의 허세와 화려한 셀레브리티의 얼굴로 위장한 교묘한 정치성이 서로를 고발하는 <인터뷰>는 천박하지 않은 풍자로 웃음을 던지고 지적이되 허영심이 없다. 마치 진짜 정치기자처럼 보이는 스티브 부세미와 진짜 셀레브리티의 탈을 쓴 시에나 밀러의 캐스팅만큼이나 영화는 적당한 높낮이를 조절할 줄 아는 절묘한 리듬을 지녔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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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커다란 상실을 겪은 자아로부터 지속된 켄지(아사노 타다노부)와 코즈에(미야자키 아오이) 삶은 각각 10년과 7년이 지나서야 다시 이야기를 얻었다. <헬프리스>와 <유레카>를 통해 각각 자아의 붕괴를 겪고 척박한 여정을 꾸려나가던 이들의 삶에서 시선을 돌렸던 이오야마 신지 감독은 긴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한번 그들의 삶을 돌아본다.

상처 입은 아이들의 여정이야 어찌됐건 그네들의 삶은 현실에 봉착했다. <헬프리스>의 전사를 짧게 응축해버리는 무덤덤한 자막처럼 지나버린 삶은 허망할 겨를도 없이 현실을 들이민다. 중국인 밀항선을 돕는 일을 하던 켄지는 아버지의 주검 옆에 아무 말없이 앉아있던 어린 아춘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함께 산다. 도입부의 자막에서 간단히 소개되는 (<헬프리스>의) 야스오의 동생 유리(츠지 가오리)를 돌보던 켄지는 아춘까지 자신의 식구에 편입시키며 유사가족 공동체를 이룬다. 그리고 가출을 한 (<유레카>의) 코즈에는 마미야 운송을 찾아가 일을 구하고 그 부근의 숙소에 상주하게 된다. 그러다 대리운전을 하던 켄지는 우연히 마미야 운송의 사장차를 몰게 되고 그의 행선지에서 그가 마주친 것은 다름아닌 10년 전 그를 버리고 집을 나가 그가 모신 사장의 아내가 된 어머니(이시다 에리)다.

10년이 지난 전사(前史)도,(<헬프리스>) 7년이 지난 전사도(<유레카>),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서사의 공백이 분명치 않은 과거의 기억일 뿐이다. 켄지와 코즈에가 각자 맞닥뜨려야 했던 삶의 방황은 서로의 운명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교감이었을까. <새드 배케이션>은 공동체의 붕괴가 튕겨낸 파편에 상처 입었던 동시대적 청춘의 삶을 동일한 시간의 흐름 위에 흘려 보낸 뒤 같은 위치에 다다를 때즈음 건져낸다. 하지만 구원 없는 삶에서 반목하던 켄지의 삶과 긴 방황의 길 위에서 갈림길을 체감한 코즈에의 삶은 현재의 좌표가 다르다. 오랜 삶 속에서 분노를 삭이고 갈등에 지쳐버린 남자의 삶과 달리 허망하게 찾아온 삶의 공포를 유랑하다 도피적 삶의 막다른 길을 발견한 여자의 삶은 성숙의 차이로 드러난다.

어머니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세계에 편입되지만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를 교란시킴으로서 복수를 감행하는 켄지와 달리 코즈에는 자신이 머무르는 세계 안에서 자신의 삶을 뿌리내림으로서 삶을 포용한다. 켄지의 응어리진 내면의 분노가 현실의 삶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소통되고 이를 통해 그가 완수하려던 일방적 복수는 자신이 몰랐던 어머니의 끝없는 자애심을 깨닫게 되는 과정으로 변색되며 결국 오랜 방황의 선상을 헤매던 그의 여정이 옹졸하기 짝이 없는 응어리만을 단단히 결속했을 뿐임을 스스로 깨닫는다.

<새드 배케이션>은 삶의 언저리를 돌던 인물들의 인생이란 본질적인 삶의 가치를 호명하기 위한 귀속적 굴레일 뿐임을 생경하지만 선명한 어조로 말한다. 내면으로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상처들에 떠밀려나간 외부적 삶의 여정은 이탈의 경로를 거쳐 다시 궤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자리로 돌아온, 혹은 그 자리를 되찾은 켄지는 현실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삶을 다시 한번 튕겨낸다. 하지만 튕겨나간 삶이 예전과 다른 건 그 삶을 보듬어 안아줄 어머니가 있다는 것. 철없는 남자의 본성은 탯줄의 흔적을 부정하지만 결국 따뜻한 양수의 포근함을 뒤늦게 깨닫고야 만다. 만삭 같은 어머니의 자애심은 결국 남자들의 치졸한 자존심을 꺾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어리석음을 깨닫게 만든다. 아버지로 인해 붕괴된 울타리 안에서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남몰래 쌓았던 아들의 비좁은 삶은 결국 모정으로부터 마련된 자궁의 넉넉한 온정을 체감할 따름이다.

결국 그 남자가 애써 부정하려 했던 어머니는 결국 그 남자가 돌아가야 할, 혹은 돌아가길 갈망했던 염원의 지표였다. 비범한 허세의 무게를 짊어진 남자(들)의 삶은 비로소 비누방울처럼 덧없이 부서지고 여자(들)의 웃음이 날이 선 남자들의 긴장마저 깎아낸다. 그곳에 가족이 있고, 어머니가 있으며, 아내가 있고, 여동생이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코즈에는 사채업자의 횡포에 떠는 고토(오다기리 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렇게 남자의 삶은 여자의 성숙에 안긴 채 안도의 한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그 쯤해서 이야기는 끝나지만 삶은 계속될 것이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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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자신의 권위를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꼰대들이 너무 많다.

물론 나이많은 어른을 공경해야 되는 건 기본이지만

나이를 무기로 무례한 짓을 서슴치 않아도 된다는 인간들은 역겨워서 그 꼴을 봐줄 수 없다.

자기 행실에 대한 책임감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더욱 신중해지고 견고해져야 할 터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의 꼴값을 정당화시키려는 묵은 인생들을 보면 어린 애들 보기 민망할 정도로 짜증이 난다.

정말 생각만해도 열받지만 어젯밤엔 정말 인간적인 예의따위는 접어두고 싶을만큼 분노를 부르는 사건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택시기사분들이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어떤 꼴같지 않은 엿같은 택시기사와 승강이를 벌인 어제 일은 정말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물론 인내심을 발휘한 건 다행이다.

아버지뻘 되는 어른에게 쌍욕을 날린 것도 되돌아 생각하면 약간 부끄러워진다. 물론 그 인간에게 욕을 날렸다는 것이 부끄러운 건 아니다. 욕은 그럴 때 쓰라고 만든 것이니. 다만 내가 지키고 싶은 인간적 예의를 스스로 부서버려야 했던 상황에 대한 자괴감이 자리잡았다는 건 스스로에게 치명적이었고 그에 대한 후회가 남는다.

내가 더욱 참아야했던 건 나를 위해서였다.

쓰레기같은 어른 앞에서 대범한 청년이 되지 못해서 원통하다.

게다가 그런 이가 모는 게 '모범'택시라니, 기가 찰 지경이다.

암튼 각설하고,

그 엿같은 택시 기사의 사망한 인격을 추모하며.

덧붙이고 싶은 말은 나이 뒷구멍으로 쳐먹지 말자.

그리고 '가다 죽어버려!'라고 나에게 소리지른 아저씨, 오래사세요. 벽에 똥칠하면서.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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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가 올랐다.

하루가 다르게 물건값들이 가격표를 바꿔달고 있다.

천원에 네개하던 붕어빵은 세개로 줄었고, 오백원 짜리 호떡은 이제 칠백원을 주고 사먹어야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숨이다.


사람이 죽었다.

유명 프로야구 선수였던 그는 일가족 네명을 무참히 살인하고 그 중 어린 소녀 몇을 토막내 묻기까지 했다.

그는 지인에게 어린 아들을 잘 돌봐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한강에 투신했다.

안양에서는 79일동안 실종됐던 혜진이가 돌아왔다.

하지만 부모는 딸을 껴안을 수 없었다.

딸들의 몸은 여러조각으로 토막나 땅에 묻힌 채 발견됐다.

부모는 오열했고 범인은 여전히 무명이다.

건너편에 사는 혜진이의 친구 예슬이는 여전히 실종상태다.


여수에 기름이 유출됐다.

다행히 해안가에서 떨어진 거리라 일찍이 오일 펜스를 치고 방제작업을 펼친 덕분에 해안가의 양식업 등에는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태안이 기름으로 쑥대밭이 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난 기름 유출사건은 반갑지 않았다.

게다가 충돌한 유조선은 태안 당시 사고를 일으킨 단일 선체라고 한다.


삼성의 황태자가 면죄부를 얻었다.

삼성의 황태자로 불리던 삼성전자 이재용 전무가 특검 수사에서 무혐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특검은 증거불충분을 사유로 이재용 씨를 무혐의 처리했다.

e삼성 인터넷 사업으로 200억 이상의 적자의 손해를 낸 그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9개 삼성 계열사가 기업자금을 동원한 것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했다.

하지만 다양한 시민단체와 정치권은 반발하고 있다.

증거를 못찾은 건지 안찾은 것인지 모르겠다는 비아냥도 나왔다.


학원 영업도 24시간 시대다.

서울시의회 교육문화위원회는 학원들에게 24시간 교습을 허용하는 조례개정안 통과를 발표했다.

게다가 추가로 학원의 지하실 교습도 일부 허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는 오는 18일 본회의에서 관련 조례안을 처리할 예정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여론이 일고 있어 원안 처리 여부는 불투명하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전, 초,중학교 학생들이 전국 일제진단고사를 치뤘다.

서울시교육청 등은 다음 주 중1 학생들의 시·도 단위나 전교 석차나 석차백분율 등을 매긴 성적표를 통지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서열을 매긴 성적 공개를 막아달라고 청와대와 진정서를 제출했다.



사회가 감수성을 잃고 있다.

실용주의를 주창하는 국가 지도자를 선두로 한 자본주의 첨탑시대에서 공적 감수성은 사라졌다. 게다가 이성적인 해결책조자도 눈에 띠지 못한 채 우왕좌왕이다.

물기를 잃어버린 사회는 메말라버린 논두렁마냥 삭막한 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잘 먹고 잘 살자고 외쳤던 새마을 운동은 끝났지만 사회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밥그릇 싸움에 열중이다.

전 국민에게 실용적 석차를 메기려는 새정부의 알량한 국민받들기는 이미 시작부터 낯을 가리지 않는다.

이유 없는 죽음들이 이어지고 원인이 뚜렷한 사고들이 터져나와도 이 사회에는 그것들을 막아낼 방편도 추진력도 분명치 않다. 치부를 가리기 급급한 사회, 당장 터져나온 고름을 닦아내도 상처는 안에서 곪아가는 것임을 외면하는 사회.


없는 자는 없는 자대로 돈에 환장하고 있는 자는 있는 자대로 돈에 환장한다. 부를 추구하는 서열화의 첨탑 시대에서 너는 내가 밟고 넘어야 할 경쟁자일 뿐, 우리가 될 수 없다.

힘과 권력만이 이 사회에서는 지상최대의 과업일 뿐, 그 과정에서 옆집 아이가 반토막나도, 바다가 시커멓게 물들어도 상관없다.

그 와중에 부자아빠가 되기 위해서 애들은 벌써 남보다 높은 등수 차지하는 법부터 배우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갈증을 느낀다. 목이 마르다. 어른들의 감수성 증발은 이미 아이들에게 전이되고 있다. 하나같이 삭막한 시대다. 애나 어른이나. 언젠가는 태어날 아이들 목에 등급을 매기는 시대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새로운 계급주의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자본이라는 알량한 자유 식민시대에서 말이다.
게다가 더이상 젊은 세대가 정의를 외치지도, 자신의 이념에 대해 말하지도 않는 시대에서 말이다. 어둠은 좀 더 깊어질 것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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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에 표현의 날개를 달다. 무기와 로봇으로 변신해서 관객을 현혹시키는 CG도 있지만 보호색을 띠고 배경으로 은둔해서 관객을 속이는 CG도 있다. 한국영화에서 CG가 눈에 띠지 않았던 건 주로 후자 쪽이었기 때문이다. 촬영이 이뤄지는 현장조건이 모든 걸 좌우하거나 카메라에 보여지는 것만이 영상의 모든 것이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 CG는 카메라에 걸리는 불필요한 배경들을 지우개처럼 지워버리거나 원하는 풍경을 능청스럽게 조합해버린다. 작년에 개봉된 <M>이 최소한의 세트 안에서 촬영됐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상에서 다양한 공간을 구현할 수 있었던 건 모두 CG의 힘이다. 하나의 공간은 CG를 통해 다른 거리로 탈바꿈했고, 블루스크린이 덩그러니 놓여있던 창 밖은 산홋빛 해변으로 환골탈태했다.

표현력의 확대는 다양한 컨텐츠를 활용할 수 있는 창작의 기반이 됐다. CG기술의 발전으로 영화가 제시할 수 있는 카드가 늘어난 셈이다. “CG기술발전은 과거와 달리 이제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가 가능해졌다는 걸 제작자와 투자자들에게 깨우쳤다. CG기술이 컨텐츠의 다양성에 기여한 바가 있다.” ‘DTI픽쳐스’ 이수영 기획실장의 말대로 만약 CG가 없었다면 DTI픽쳐스가 <중천>을 통해 대종상과 청룡영화제 기술상을 탈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태풍>의 스펙타클한 해상장면도 같은 맥락이다. 세트장에서 블루스크린을 배경으로 촬영된 모형배는 CG작업을 거쳐 거대한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위를 항해했다. 만약 CG가 없었다면 직접 바다로 나가 배를 침몰시켜야 했을 <태풍>은 투자자로부터 비웃음이나 살만한 과대망상이었을 것이다.

 

 

 

 

    1. 이명세 감독 <M> 미장원 골목 촬영 원본                        2. 배경합성을 위한 마스킹 작업

  

 

 

 

    3. 매트 페인팅 작업                                                        4. 결과물

실제로 영화가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다양한 장르가 개척됐고 더욱 효과적인 연출이 용이해졌다. 2007년 말, 사극에 판타지를 가미하며 새로운 장르적 시도를 하며 관심을 모았던 <태왕사신기>는 기존의 드라마들이 꾀하지 못했던 장르 개척이라는 성과를 올렸다. 이는 분명 국내CG기술의 기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시도였으며 동시에 기술영역의 확보가 창작범위의 확장으로 연결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서 'DTI픽쳐스'의 현장 슈퍼바이저로 활약하는 류재환 감독은 이렇게 전한다. “영화인들이 CG를 공부해야 하듯 우리도 영화를 공부해야 한다. 실사촬영과 CG작업 중 어느 것이 비용과 노력 면에서 더 나은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전반적으로 계산하고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장의 협조도 중요하다. 카메라 무빙을 비롯해 소스 촬영까지 CG작업을 위한 현장 스태프와 전반적인 협의가 필요하지만 CG작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던 초창기 현장은 이런 요구들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물론 요즘은 과거와 달리 CG의 필요성이 인식되는 만큼 협조적으로 변해가는 추세다.

예전에는 난이도가 높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액션 연출에도 CG는 힘을 발휘한다. 정면으로 달려오는 자동차들을 피해가며 도로를 역주행하는 오토바이 씬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야수>의 초반 카체이싱은 순수 스턴트의 결과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CG에 빚진 결과다. CG가 그려 넣은 승용차 덕분에 오토바이에 탄 스턴트맨은 느리게 달려오는 자동차 몇 대를 유유히 피해 다니며 노고를 줄일 수 있었다. <무영검>의 수중격투씬과 <아라한 장풍 대작전>의 빌딩경공술씬 역시 블루스크린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CG는 와이어에 매달린 배우들의 액션 장면을 각각 물 속으로 잠수시키거나 공중으로 부양시켰다. 또한 잔인한 신체훼손 장면에서도 CG는 몸은 사리지 않는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육중한 폭발장면에 신체가 찢겨지는 인간을 겹쳐내는 CG로 전장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편, <오래된 정원>에 출연한 배우 염정아도 CG덕을 봤다. CG가 머리카락을 가려준 덕분에 삭발투혼을 면한 것. CG는 배우의 사적인 인권마저 보호한다. 

 

 

 

 

1. <아라한 장풍 대작전> Before                                       2. After

하지만 한국영화에서 CG가 가진 최고의 미덕은 제작비에 비해 비용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대규모 군중이 운집하는 장면의 어려움은 통솔이 어렵고 실제 그 인원을 모두 모으는 것도 쉽지 않다는 점에서 CG의 활용도는 꽤나 유용하다. 최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덴마크 결승전의 관중석을 가득 채우지 못한 엑스트라의 공백은 CG가 메웠다. 또한 <태극기 휘날리며>의 1.4후퇴 씬에서 등장했던 수만 명의 중공군 중 실제 엑스트라는 3백 명 남짓이었다. 남은 공백을 채울 1인 다역은 모두 CG가 맡았다. 이런 상황에서 CG는 복사와 편집의 기능을 한다. 현장에 동원된 인원을 촬영한 뒤 그것을 재배열해서 이어 붙이면 이는 결국 스크린을 가득 채운 인파로 완성된다. 실제 현자에 있던 인물은 대규모 인파의 일부이며 동시에 전부가 되는 것이다. 이는 제작비에 큰 영향을 주는 인건비 절감으로 이어진다.

CG작업이 단지 영화의 크랭크업 이후, 후반작업에만 관여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영화의 제작팀을 제외하고 작품의 기획부터 개봉 직전까지 영화제작 전반에 참여하는 건 오로지 CG팀뿐이다. 요즘은 영화의 기획 단계에서 카메라의 구도를 대략적으로 그려 넣은 콘티를 3D영상으로 제작하는 ‘프리 비쥬얼(Pre-Visualization)’ 시스템이 적극 활용되고 있다. 덕분에 카메라와 캐릭터의 동선을 체크하고 그에 따른 구도를 미리 모니터하고, 이를 직접 테스트함으로서 실제 촬영시 나타날 수 있는 혼선을 줄이는 것이 가능해졌다. 실제로 이 시스템을 적용한 <청연>의 공중 비행씬은 당초 예상했던 3개월의 촬영기간을 단 11일로 줄이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오늘날 CG는 영화의 후방을 견인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전방까지 사수하고 있다.

블루스크린에 그리는 미래 영상의 청사진 미국 현지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한국인 CG디렉터들의 활약은 국내CG기술에 대한 대외적 신뢰 구축에 이바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인기를 모았던 <트랜스포머>는 할리우드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VFX회사인 ILM과 디지털 도메인에서 각각 ‘크리쳐 기술 전문가(Creature Technical Director)’로 활약하는 홍재철과 ‘디지털 아티스트(Lead Digital Artist)’로 활약하는 서명철, 표영일이 참여해 화제가 됐다. 그 밖에도 최근 <베오울프>에 참여한 소니픽쳐스이미지웍스의 정유진을 비롯해 적지 않은 인원들이 할리우드 현지에서 한국인력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있다.

근래에 몇몇 국내업체의 해외진출이 성사됐다는 고무적인 성과도 있었다. 현재 국내CG업체인 ‘DTI픽쳐스’, ‘매크로그래피’, ’풋티지’가 공동으로 이연걸과 성룡의 동반출연작인 <포비든 킹덤> 후반작업을 진행 중이며 <태왕사신기>의 CG를 맡았던 ‘모팩 스튜디오’는 장동건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알려진 <런드리 워리어>에 참여한다. 하지만 이것이 회사의 운명뿐만 아니라 국내산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책임감을 가질 필요성도 있다. 수요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공급은 반대로 시장의 출입을 막는 법이다. 국내의 주먹구구식 관행과 달리 할리우드의 현장시스템은 계약서 두께부터 차이가 난다. 작업을 위한 스케줄을 보장하는 만큼 확실한 단계적 성과를 증명하길 요구하며 그것이 가능해야 장기적인 파트너쉽을 기대할만한 신뢰감을 구축할 수 있다. 파이가 적은 국내시장의 한계를 생각한다면 해외시장은 필요조건에 가깝다. “<런드리 워리어>는 기존의 국내작업에 비해 세배 이상의 이윤과 네 배 이상의 작업기간이 확보된 만큼 예전 국내작업보다 좋은 퀄리티로 완성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다. 또한 잉여자금을 R&D(연구개발비)에 재투자할 수 있어서 더욱 발전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모팩 스튜디오’ 장성호 대표의 말처럼 국내회사의 해외진출은 시장성의 확보와 함께 작업 환경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에 매력적이다. 특히 최근 할리우드가 자국보다 비용대비효과가 큰 유럽과 아시아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에 국내업체들의 충분한 대비가 더욱 요구되는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우. 생. 순> Before                                                       After

Before                                                                         After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는 작년에 유체 시뮬레이션 기술 연구를 통해 난이도가 높은 맥주 거품을 구현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CG분야에서 국제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시그라프(SIGGRAGH) 2007’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으며 관련 논문의 채택도 이뤄졌다. 외국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에 의지하면서도 고급기술에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국내현실을 고려한다면 이는 상당히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국가 정책으로 주도한 소프트웨어의 개발 실적을 국내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상용화 방안의 실질적인 모색도 필요하다. 기술적 성과를 산업적 이익으로 연결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에 대한 산업적 논의가 좀 더 구체화될 필요성이 있다.

피터 잭슨 감독이 <반지의 제왕>을 통해 자국회사인 ‘웨타 워크샵(WETA Workshop)’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는 건 투자의 기회비용이 창출할 수 있는 산업적 효과를 증명한다. 단기적인 작품의 성과도 중요하겠지만 기회 비용을 지불하는 투자가 산업의 근간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국내영상산업의 밑거름이 될 CG산업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을 갖춘 시도가 요구된다. ‘하드 서피스(hard surface)’라는 기계적 질감의 CG작업으로 유명했던 ‘오퍼니지(Orphanage)’는 <괴물>을 통해 캐릭터CG의 경험치를 습득했다. 만약 그 노하우가 국내에 흡수될 수 있었다면 국내CG산업의 성장을 위한 양질의 밑거름이 됐을지도 모른다. <괴물>은 작품의 개별적인 성과를 남겼지만 영화에서 시도된 특수효과 기술이 국내산업의 노하우로 흡수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말의 아쉬움을 남긴다. 경험을 통한 노하우만큼 좋은 자산은 없다. 산업적인 보호도 여전히 미비하다. 국가적 지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공해 벤처 산업을 굴뚝 달린 제조업에 엮어 넣는 시대착오적 정책의 변화는 한번쯤 재고할 필요가 있다. 또한 CG를 단순히 영상의 기술적 소품으로 생각하며 창의적 가능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몰지각한 태도도 지양해야 할 것이다.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use) 시대에서 CG기술의 발전은 영화뿐만 아니라 CF, 뮤직비디오, 게임을 포함한 영상분야의 파급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다양한 파트에 기술적 역량을 공급할 수 있는 영향력을 확보해서 다양한 수익 모델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다.” 10년 넘게 한국영화와 파트너쉽을 유지하고 있는 ‘인사이트 비쥬얼’의 강종익 대표가 그리는 CG산업의 청사진이다. 결국 CG산업은 국내영상산업의 발전에 기여하는 촉매로서 비전을 지닌다. 열악한 국내여건 속에서도 우직하게 토양을 일군 인력들의 땀을 먹고 국내CG기술은 오늘날까지 자라왔다. ‘단지 기술자가 아니라 창작에 참여하는 일원’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의 열정이야말로 영상산업의 미래를 디자인하는 좋은 밑그림이 될 것이다.

(무비스트) * 이 글은 모닝캄 3월호에 게재됐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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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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