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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는 고뇌한다.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서, 무언가가 되고 싶어서. 자신을 둘러싼 규정과 정해진 정답 대신 자신만의 삶을 갈구한다. 이상일 감독이 그려내는 젊음은 그렇다. <식스티 나인>처럼 깡있는 발랄함으로 내달리기도 하고 <스크랩 헤븐>의 주체할 수 없는 허탈감으로 내려앉기도 했다. 그리고 <훌라걸스>. 그곳에서 소녀들은 외친다. ‘내 삶은 내꺼야!’ 석탄처럼 어두운 갱 속에서 화려한 무대로 도약하고자 하는 소녀들의 몸부림이 그곳에 있었다.

치기어리고 대책 없음이 젊음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한다면 이상일 감독의 영화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그래서 이상일 감독의 영화가 좋다. 하지만 거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식스티 나인>이, <스크랩 헤븐>이, 그리고 <훌라걸스>가 이상일의 목적지인가? 그는 야자키인가? 신고인가? 기미코인가? 그는 분명 아직 어딘가로 가고 있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젊은 피가 어디로 솟구치길 원하는가? 내가 던지는 물음표는 그가 내미는 느낌표로 돌아왔고 그 사이에 맺힌 이상일의 고뇌가 알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터져 나온 수많은 알맹이는 단 한마디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상.일.이다.’

한국에 온 것이 처음은 아니다. 올 때마다 기분이 어떤가?
부산영화제 때문에 종종 왔었고 서울에 오게 되는 경우는 영화 홍보 때문이었다. 항상 일 로만 오게 되서 아쉽다.

민감한 질문 하나 하겠다. 간담회 때도 그리 달가워하진 않던데.
(웃음)얼굴에 드러나던가?

약간? (웃음) 재일 교포 출신 성분 때문에 한국을 찾게 되면 항상 그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솔직히 기분이 어떤지 궁금하다?
예전에 한국에서 하인즈 선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사례를 보면 한국인들은 아마도 해외에서 성공한 한국인들에게 관심이 많고 호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아무래도 나에게도 역시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고, 결국 그런 질문들은 그런 관심의 표출이라 생각된다.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것에 어떤 제약이나 차별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혹시 그게 감독의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 아닐까? 감독으로 이름을 알리기 전에 그런 경험이 없는가? 영화와 무관했던 시절에라도.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조선학교를 다녀서 주변사람들이 모두 동포였기 때문에 그런 기억이 없다. 그 뒤 대학교에 진학해서도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감독이 된 이후로 출신성분은 오히려 내게 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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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다?
일단 외국인 출신이라 일본인들보다 주목을 쉽게 받게 된다. 남들과 다르다는 점은 그런 면에서 유리하다. 또한 나의 출신 성분은 이야기를 끌어내는데도 유용하다. 일본인들과 다른 출신이라는 것은 분명 내가 그들과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고 다른 시선을 지니게 하는 부분이니까. 그래서 일본인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볼 때도 있고 다른 각도로 보게 될 때도 있고. 아무래도 나의 출신 성분은 내게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는 것 같다.

첫 작품이자 졸업 작품인 <아오, 청>이 평단의 지지를 얻어 수상도 많이 했고 두 번째 작품인 <보더라인>도 해외 영화제에 초청되고 괜찮은 평가를 얻어냈다. 이는 분명 감독이라는 네임밸류에 긍정적인 작용을 했을 법한데.
일단 무언가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앞에 내놓는 입장이니 어떤 형태로든 그것이 주목을 받을 필요성은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만든 성과물에 대한 최소한의 달성을 얻었다는 점은 중요한 일이다. 일본에선 감독 데뷔보다도 감독으로써 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으려면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한 성과물이 필요하다. 그 성과물은 작품에 대한 평단의 평가든, 관객의 동원이든 어떤 형태로라도 자신의 작품을 어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결국 내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초기 작품들의 긍정적 반응들에 대한 연장선상이 되는 셈이고 그런 점에서 나 자신에게 큰 의미가 있다.

작년 한해는 이상일 감독에게는 특별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훌라걸스>가 일본 아카데미에서 수상도 많이 하고 흥행도 어느 정도 이뤄졌으니 이상일이라는 이름이 감독으로서 확실히 각인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일본에서는 사실 영화감독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는 일이 거의 없어서 그 이상은 잘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칭찬을 듣게 되면 약간 우쭐해지는 스타일이라 스스로 들뜨는 기분을 자제하려고 노력한다. (웃음)

겸손할 줄 알았는데 의외다.(웃음) 한국에서도 이상일이라는 이름이 감독으로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는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그저 순수하게 기쁠 뿐이다.

이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이상일 감독의 영화는 모두 젊은 세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식스티 나인><훌라걸스>를 보면 그 젊은 세대가 존재하는 시간은 과거 60년대이다. 흘러간 과거를 통해 젊음이 이야기된다는 것은 조금 묘하다. 특별한 의도라도?
사실 60년대에 특별히 의미를 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려보고 싶은 이야기나 다가가고 싶은 캐릭터가 그 시절에 존재했던 것뿐이다. 말 그대로 60년대가 내 영화의 시간배경이 된 것은 우연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영화를 만들고 나서 스스로 생각해보니 만약 내가 현재를 배경으로 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조금 부정적인 시선을 지니게 되는 것 같았다.

어떤 이유에서 부정적인 시선을 지니게 되는가?
부정적이라는 단어가 조금 부적절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동시대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내 자신이 좀 더 심각해지는 면이 있다. 일단 나 자신이 지금의 젊은 세대이고 이 세계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40여 년 전의 젊은이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경험하지 못한 하나의 판타지가 된다. 그래서 원래 젊은이들이 지닌 에너지나 열기, 어리석음 그 자체 본래의 성향을 그려보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에서 그 시절이 적합했던 것 같다. 결국 겪어보지 못한 과거는 내가 그리고자 하는 이야기의 적절한 밑거름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부정적인 시선이 드러난 영화가 <스크랩 헤븐>이라고 봐도 되나?
글쎄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스크랩 헤븐>이 그런 이유에서 나온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훌라걸스>나 <식스티 나인>에 비해 <스크랩 헤븐>은 어둡고 무겁다. 초기작들도 그렇게 볼 수 있는데 어떤 이야기가 자신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여러 가지 성향을 자신의 내면에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든 영화도 내안의 한 가지 감정을 투영한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의 상황에 맞는 감정이나 경험들, 혹은 이전부터 자신의 내면에 축적되어 지니게 된 여러 가지 것들이 하나의 영화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가 완성된 후에 그것을 들여다보면 내가 만든 작품에 대한 반론이 생기기도 해서 다음에는 그것과 완전 다른 방향으로 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결국 나 자신도 나에게 어울리는 색을 잘 모르겠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꺼려지는 일이다. 무엇이 나에게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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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가 발산하는 에너지를 무모하게 소진시키기 보단 적극적인 의지로써의 소비를 꾀하는 것 같다. 그 의지가 관객에게 어떻게 읽히길 원하나?
사람의 삶은 다양한 선택의 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선택이 시작되는 것은 젊은 나이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여러 가지 선택을 할 때 그 개개인은 자신 스스로를 통한 선택을 했으면 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결코 편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 책임에 대한 각오도 해야 하고 그 선택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도 해야 한다. 그런 생각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니 그런 의도가 읽혀지길 원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적 기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자신들의 의지가 무언가를 행하려고 할 때 기성세대로부터 비롯된 환경이나 가치관에 부딪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작용이 묘사되는 듯하다. 쉽게 말하면 세대 차이라고나 할까. 한국에서도 그런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나곤 하는데 일본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일단 성장하는 젊은이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선택하고 자아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기성세대가 먼저 축적한 가치관들과 부딪치고 갈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건전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이상한 것이다. 특히 내 영화는 젊은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 부분은 당연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부분인 듯하다.

작년 일본 영화가 외화의 점유율을 많이 뛰어넘었다.
많이라.. 많이 까지는 아니고..조금. (웃음)

물론 이를 영화산업의 질적 발전의 척도로 삼을 수는 없지만 분명 일본 영화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무된 상황일 것이다. 이상일 감독 본인을 포함해서 말이다. 한국도 몇 년 동안 자국 영화의 점유율이 외화를 누르고 있다. 하지만 요즘 한국은 영화산업의 위기론이 제기되는데 과열 투자로 인한 거품현상 때문이라는 의견도 나오는 실정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자국영화가 사랑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현재 일본에서 흥행되는 작품들 중 필요 이상의 관심을 얻는 작품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내가 개인적으로 보고 싶거나 사람들이 많이 봐주길 원하는 작품이 외면되는 상황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 상황의 단순한 측면만을 보고 기뻐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분명 한국에서도 그런 고민을 품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최근 일본영화는 젊은 성향의 영화가 많이 제작되는 것 같다. 일단 이상일 감독의 영화도 그렇고. 젊고 연기를 잘 하는 배우들이 많은 덕일 수도 있고. 가벼운 소재로 특별한 감성을 주입하기도 하고 독특한 발상으로 다가가기도 한다. 소박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현재 일본 영화만의 매력이 아닌가 싶은데.
그건 한국인의 시각이기에 일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읽어지고 매력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하면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의 특색이 한국인보다는 일본인들에게 쉽게 어필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솔직히 종종 한국 영화를 보면 부러울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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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점이?
현실적인 문제 때문일 수도 있는데 영화를 기획할 때 제약을 받는 부분이 존재한다. 젊은 세대의 이야기가 많이 되는 것은 질문처럼 젊은 배우들의 역량 덕분일 수도 있지만 뒤집어 말하면 젊은 관객층의 동원이 용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영화만 제작되는 것이 아니지만 다른 취향의 영화들이 기획되고 제작되는 환경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현실적인 문제제기를 딱 부러지게 들이댈 수 있는 괜찮은 작품이 기획되고 제작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종종 한국영화처럼 심각한 현실적 단면을 들추는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해보고 싶기도 하다.

일본인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헐리웃 블록버스터나 지브리산 애니메이션 우선이라고 들었다. 물론 작년 일본 영화의 자국 점유율이 늘었지만 이런 경향이 오래 지속된 것으로 안다.
그건 아마도 관객들이 요구하는 성향의 영화가 명확히 드러나는 부분이라 보인다. 현실적인 문제나 아픔보다도 자신과 무관할 수 있는 판타지나 자신이 손가락질 당할 필요 없는 긍정을 2시간동안 즐기고자 하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고.

이런 부분은 감독으로서 느끼는 고충이 아닐까 싶다.
결국 관객들이 원하는 성향에 따라 그들의 흥미를 떨어뜨리지 않고 나의 문제제기를 작품 안에 잘 포함시켜가며 관객들을 극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관객의 만족과 나의 만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도록 말이다.

앞에서 일본에서 영화감독이란 위치가 대중적으로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자리까지는 아니라고 했다. 예전에 안도 마사노부가 감독과 함께 내한했을 때 자신에게 열광하는 한국 관객들을 보고 자국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놀라웠다는 소감을 밝힌 적도 있는데, 일본에서 배우든 감독이든 영화인이 일반인들에게 인지되는 위치가 어느 정도인가?
일단 개개인의 차이가 많은데 안도 마사노부 같은 경우는 그 배우의 인지도가 떨어진다기 보단 개인적인 소신에 의해 대중성이 높은 작품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단 영화보다는 TV에 자주 나오는 배우들이 대중들에게 쉽게 인지되는 것이 사실이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를 한국 영화 중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송강호가 인상적이라 했는데..혹시 <괴물> 봤는가?
물론 봤다.

방금 말한 두 편의 영화 외에 인상 깊은 한국의 영화나 배우들이 있다면 말해 달라!
<오아시스>. 설경구와 문소리.........너무 평범한 대답인가? (웃음)
좋은 영화는 누가 봐도 좋은 것 같다.

최양일 감독을 비롯해 일본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재일교포 출신의 영화인이 5~6명 정도 있다고 말했는데 혹시 그들과 은연중 연대감이 생기는 경우는 없는가?
연대감이라 할 수 있는 그런 경우나 관계는 없는 거 같다.

개인적으로 친한 분은?
최양일 감독님은 몇 번 뵌 적이 있다. 그때마다 ‘자네. 감독 협회에 빨리 가입해!’라고 하신다. (웃음) 그리고 ‘어려운 일 있으면 이야기해’라고도 하시고. 하지만 크게 친분이 있는 사이까진 아직 아니다.

최근 최양일 감독이 국내에서 <수>라는 영화를 찍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 영화를 찍어볼 의사가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결정된 게 어떤 것도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 찍어야 될 필요성이 있는 작품이라면 꼭 찍고 싶다.

혹시 지금 기획되고 있는 작품이나 아직 기획되진 않았더라도 차기작에 대한 대략적인 구상이 있다면?
지금 기획 개발이 시작된 단계라 뭐라 말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몇 가지 생각이 있긴 하다. 물론 노코멘트다. (웃음) <훌라걸스>의 성공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아져서 기획 개발 과정에 그런 것을 많이 반영할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이상일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이 엉뚱하거나 장난끼가 많은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마치 <식스티 나인>의 야자키(츠마부키 사토시)처럼. 자신에 대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혹은 주변에서 본인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던가?
주변에서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웃음)
일단 <식스티 나인>의 야자키는 사실 나와는 전혀 다르다. 나는 어떤 상황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오히려 내가 되었으면 하는 부러운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의 영화에서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캐릭터가 있는가? 아니면 자신을 모델로 해서 만든 캐릭터라든지?
사실 어느 한 캐릭터를 찍어서 말하기는 힘든 것 같다. 캐릭터마다 조금씩 나의 일부분이 표현된 것 같기도 하고..어쩌면 <훌라걸스>에서 토요카와 에츠시가 연기한 기미코의 오빠가 나와 가장 닮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듣고 보니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루 종일 인터뷰 중인 것으로 아는데 <훌라걸스>가 한국에서 개봉하면 이 수고를 보답받길 바란다.
<훌라걸스>를 관람한 한국 관객들이 이 영화를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 그럼 충분하다!

(무비스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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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자발적 참여는 좋다. 그건 순수한 결백의 의지다.

허나 선동당하는 모습이 눈에 띄는 건 사실이다. 우리는 어리숙해질 수 밖에 없다. 이끄는 주체가 확실하지 않은 집단적 상황에서 누군가가 시위를 주도하고 목소리를 높이면 다 함께 와, 하는 분위기로 몰려가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다소 위험하다. 프락치만큼이나 위험한 일부 과잉 선동 세력에게 종종 끌려다는 양상은 우려된다.

물론 지금 이 주장은 경찰이 주장하는 시민 매도용 도매금 규정과 맥락이 다르다. 그들은 어떻게든 시위자들을 반사회주의적 인간들로 몰아넣으려는 까닭에서 선동을 외치는 것이지만 내가 말하는 선동은 순수한 시위자들을 이용하려는 몇몇 정치적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행위가 몇몇 시위자들로 인해 적발되곤 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731773&hisBbsId=D003&pageIndex=1&sortKey=regDate

물론 이것이 확실한 물증은 아니지만 분명 의심을 부를 만한 행위이며 실제로 이날 확성기를 들고 주도한 여성은 네티즌들의 조사로 인해 다함께, 라는 사회주의 집단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1&articleId=1688182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731422&hisBbsId=total&pageIndex=1&sortKey=regDate&limitDate=-30&lastLimitDate=-30

http://www.alltogether.or.kr/new/index.jsp <-- '다함께' 홈페이지

프락치 논란도 위험해보인다. 프락치는 진압세력이 시위내부의 정보를 캐내려는 공작행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위험한 상황이 야기되는 건 내부적인 분란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목소리를 내야 할 시위대가 내부적으로 서로에 대한 의심에 빠져든다면 분명 내부적으로 위험요소가 될 것이 뻔하다. 이 경우 결국 필요한 건 믿음이다. 적을 분별하기 위한 날카로운 시선도 중요하지만 결국 더 중요한 건 내부적 결속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성적 판단이 중요하다.


중요한 건 대부분의 시민이 선량한 의지로 거리에 나섰다는 것이다. 염려되는 건 그래서다. 결코 불미스러운 일을 당해서는 안되는 순수한 세력들이 몇몇 소수 집단과 몰염치한 정부세력의 작태로 희생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헌신적인 목표를 지닌 이들의 순수한 행위가 3자의 불순한 의도로, 그리고 더러운 권력가들의 토끼몰이에 짓눌려 몰락하지 않길 바란다.


Hasta La Victoria Siempre! 승리의 그날까지!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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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경이 문득 초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정국은 서로 무관한 젊은 청년들을 이토록 대치하게 만든 것일까.
전경도 무고하고, 시민도 무고하다.
결국 이 싸움을 야기한 주체는 무고한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어디선가 또 다른 방패막이 활용전술을 동원하고 있을 것이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인가, 에 대해서는 난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란 건 알겠다.

우린 그동안 지나치게 안일했다.
어르신들이 피땀 흘려 한걸음 전진했던 민주주의를 우린 완성됐다고 쉽게 믿어버린 것만 같다.
그 사이, 보수의 탈을 쓴 기득권들은 사익에 나라를 팔고 그에 저항하는 국민들을 쉽게 진압할 수 있도록 판을 짜버렸다.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았다고 생각했던 10년 동안 보수 기득권 층은 칼을 갈고 있었다. 게다가 진보라고 명명되던 세력들은 하나같이 안일했고, 나태했다. 사실 진보는 없었다. 그저 보수의 상대 개념으로서, 그리고 보수조차도 그저 이익 구조를 통해 정체성 없이 두른 이상한 대립관계만이 유지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진보는 무너졌고, 보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시장구조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대적 흐름에 맞춰 자신들의 사익 기반을 철저하게 유리한 방향으로 꾸려나가려는 이들의 체제적 구실로서의 이념일 뿐이다.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온 것이 단지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에 불과한 것일까. 그들은 이 정국의 흐름에 대한 불안감을 감지하고 있다. 단지 쇠고기는 마지노선일 뿐이다. 만약 이것이 이대로 쉽사리 그들의 뜻대로 이뤄진다면 그 무기력은 5년 동안 반복될 것이다.
동시에 지금 이명박 정부가 시위를 강하게 진압하는 것도 이와 맞닿아있다. 그들은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있다. 대운하, 공사 민영화, 등, 반발이 강할 정책들을 차례로 내밀어야 할 판이니 정책 초기부터 국민을 다스려야 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어차피 도덕성 따위가 자신의 대통령 되기에 흠이 되지 않음을 알았던 이명박에게 도덕성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제도적으로 그는 개인의 도덕성을 기회비용처럼 여기고 경제적 실리를 원한 이들의 표를 얻어 대통령직에 오른 사람이다.-물론 그것도 벌써 신기루였음을 대부분 깨달았겠지만-

중요한 건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우린 5년 간 이보다 험한 꼴을 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권초기부터 여론을 괴담으로 몰고, 그에 저항하는 국민의 평화적 시위를 폭력으로 다스리는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거나 혹은 아예 뿌리뽑지 못한다면 우린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야 할 것이 자명하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넘었던 예수처럼, 처절하지만 숭고한 마음으로 이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 모든 무기력에 맞서 싸우면서 동시에 좀 더 힘을 비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더이상 애꿎은 방패막이를 양산하지 않는 길이며, 동시에 그들과 부딪히며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을 수 있는 불가피한 저항인 것이다. 우린 좀 더 먼 곳을 찌르기 위해서 일단 지금 그 자리를 밀어내고 전진해야 한다.

-written by kharismania-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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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새벽에 종각으로 나갔습니다.


쓰던 원고를 접고 택시를 타고 나갔죠.


가슴이 뛰었습니다. 긴장감이 엄습했습니다.


현장 부근에 도착해서 택시를 내리는데 멀리서 전경들의 이상한 구호가 들렸습니다. 초조했습니다. 나 지금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그건 분명 두려움이었습니다. 어쩄든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도착해보니 현장은 생각보다 치열하진 않았습니다. 마치 한번 정도 정리가 된 느낌이기도 했고요. 양 도로를 전경들이 막아서고 인도로 통하는 좁은 차도에서 시민들은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전경들이 방패를 두드리고 악다구니를 썼습니다. 사람들은 야유를 퍼부으면서도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그 공간엔 분노와 공포가 함께 구르고 있었습니다. 종종 대치상황에서 엉켜붙어 연행되거나 충돌하는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몇번 정도 그 안에 몸을 섞어서 밀고 당기기도 하고, 나가떨어지기도 했습니다. 방송 카메라들은 악착같이 달라붙었습니다. 아팠습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또 한번 두려움이 맺혔습니다.


전경의 얼굴을 바라봐도 시민의 얼굴들을 바라봐도 하나같이 처연했습니다. 그 안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사람들이란 하나같이 약하고 여린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종종 조소를 담은 표정의 전경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무표정했습니다. 그 너머로 어떤 피곤함이 밀려왔습니다. 억울함도 아닌, 어떤 무기력함이 그 안에도 존재했습니다. 의무적인 체제 아래서 견뎌나가야 할 폭력의 체증이 그 안에서 군말없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악다구니를 쓰는 전경들의 얼굴에는 그렇게 젊은 시절의 청량감이 사라진 채 살아남기 위한 각오만이 존재했습니다.


시민들이 밀어내고자 하는 이도, 시민들을 밀어내는 이란 누군가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전 문득 두려워졌습니다. 그들은 내부에서 훈육된 증오로 시민들을 진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손가락질 하는 건 권력의 수혜자들인데 그들은 그 너머에서 자신들이 길들인 서민의 자식들을 방패로 삼고 숨어있었습니다. 그들과 맞서 싸우자니 분노를 표출할 길이 없었습니다. 내가 외치는 구호가 전해져야 할 곳은 그들이 아님을 알면서도 구호를 외치는 동안, 또 다른 분노와 무기력이 동시에 양산됐습니다.


그러던 와중, 거리는 진압되고 시민들은 인도로 몰렸습니다. 그 와중에 전경들이 길을 막아서곤 했지만 다들 부지런히 청계광장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그보다 조금 앞서 그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 와중에 호프집 마당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이들도, 술에 취해 흔들거리는 취객들도 만났습니다. 하나의 공간을 넘어서자 다른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뭔가 초현실적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을 미워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 거리에 나선 이들의 목적은 그 자리를 지키지 않은 자를 손가락질하기 위해서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런 자유를 보호하고 싶어서 모인 겁니다. 다만 불과 몇 발자국 너머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방금 전의 상황에 지나치게 달라서 적응이 되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맞붙은 공간은 그렇게 서로에게 등을 돌리듯 너무나도 이질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청계광장에 다시 모인 이들은 촛불을 하나씩 켜더니 옹기종기 앉아 자유발언을 시작했습니다. 전 그런 모습들이 하나같이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습니다. 마치 패잔병들처럼 옹기종기 앉아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것처럼 처연했습니다. 그러다 무기력함이 밀려왔습니다.


그 거리에서 우리가 얻은 건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이내 아찔해졌습니다. 전 여전히 제 안에 공포가 잔존함을 느꼈습니다. 한번쯤 전경들에 밀려보니 그 무게를 함부로 견딜만한 것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그 방패에 가격이라도 당할까 두려워 몸이 움츠려듬을 느꼈습니다. 그 와중에 청계광장에서는 박수와 함성이 일곤 했습니다. 그 곳에 사람들은 희망을 말하고 있었고 전 그 희망에 맺힌 처연함을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침울해진 기분으로 그 곳을 떠나 거리를 걷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그토록 고요했습니다. 꿈을 꾸듯 현실이 아련하게 밀려왔습니다.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중에 날이 밝았습니다.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역시 동네는 고요했습니다. 그곳은 평화로웠고, 하나같이 차분했습니다. 집으로 들어서서 문을 밀고 들어가니 강아지가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아지 머리를 쓰다듬어줬습니다. 너와 난 이리도 평온한데 그 거리에서 우리는 왜 그리 치열해야 할까, 왜 이리 살기가 힘들까, 그리곤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차분한 여명 너머로 밀려온 슬픔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그 밤의 구호가 아침에 밀려 아득한 꿈으로 흩어지는 것 같아서 전 조금 슬펐나봅니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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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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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로 상 Out!

도화지 2008. 5. 27. 22:28

깜찍해서 간만에 웃었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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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풍경은 최루탄 날리던 시절에도 어린 나이라 보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풍경을 실제로 보게 되리라고 짐작도 못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공포가 밀물처럼 밀려왔지만 동시에 썰물처럼 분노가 밀려나갔다.
마하트마 간디라면 과연 이 현장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부는 멀쩡한 국민을 폭도로 몰고, 그들에게 엄중처벌을 내리겠다고 으름장까지 놓고 있다.
그것이 자신들이 믿는 힘이라면 결국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애초에 능력조차 제대로 검증되지 못한 이명박을 믿고 지지한 이들의 한표가 아쉽긴 하지만 이 사태는 진정 그 한표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역설이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국민을 적으로 삼는 정부의 태도가 과연 어떤 꼴을 맞이하는지에 대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다면 성공할 가능성은 충분해보인다.

21세기에 울리는 80년대의 구호는 서글프면서도 강건하고 결백하여 아름답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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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경의 제복을 입은 청년들은 자신들의 분노가 어디로부터 주입된 것인지 깨닫을 새 없이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응어리진 분노를 담아 시민을 가격한다. 언론은 입에 재갈을 물었고, 그 와중에 시위에 나간 이들만이 하나같이 몸부림치고 처연한 목소리를 허공에 뿌렸다.
6월 항쟁도 합법 시위였을까? 유관순은 10대가 아니었는가?
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권력의 수호를 위해서?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국민이 외치는 권리를 탄압하기 용이한 법은 무엇을 위시한 것인가.
꿈틀거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처연하고 아련하지만 분명 그 안엔 힘있는 목소리가 있고, 양심이 있다. 누군가는 영리하지 못한 일이라 했지만 본질은 그 본질에 가까운 행위로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평화시위를 지피는 불길에 폭력의 찬물을 끼얹은 정부의 행위는 가증스럽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날을 샜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청계천 소라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자유연설을 하고 있다 한다. 방패에 찍히고 곤봉에 맞아 부상자가 속출했다지만 그들은 오그라들지 않았다.
이 경험은 소중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우리로부터 나온다.
난 이렇게 노래하는 그들로 인해 진정으로 가슴이 뛰었고, 눈시울이 젖었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이 자명해졌을 때, 투쟁과 항거는 빛을 발하는 법이다. 자유는, 그리고 정의는 그렇게 완성된다.

조금 더 힘내자. 우린 이 나라의 힘이다.
어린 전경들 너머에 숨어서 국민을 우롱하는 정부의 더러운 작태와 그에 맞서는 순수한 민주주의적 열망은 분명 먼 훗날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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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26

time loop 2008. 5. 26. 02:17
담배를 끊은지 1년하고도 3개월 정도 됐다.
참으로 오랜만에 담배 한 대 피고 싶어졌다.

세상이 하수상하면서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광화문과 청계천은 그리도 시끄럽다는데, 이리도 조용한 우리동네에 있으니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도 같았다.
그 때 광주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문득 처연해졌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얼마나 절실할까, 또 한번 문득 처연해졌다.

몸이 기진맥진해서 혼미해진 정신이 간만에 돌아왔다.
덕분에 일거리는 쌓이고 의욕은 아직 부족하며 심란한 정세까지 눈에 들어온다.
세상은, 그리고 나는 이리 돌아가고 있구나.
밥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기운을 차려야지.
내 방의 평온함조차 지독하게 고요하여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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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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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도 아닌 1989년이다. 전작이라고 명명되어야 할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의 개봉연도가 말이다. <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이하, <해골의 왕국>)은 그로부터 20년에서 1년이 모자란, 무려 19년 만에 제작된 속편이다. 이는 분명 어떤 이들에겐 상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 그리고 해리슨 포드가 함께 한 새로운 <인디아나 존스>를 21세기에 스크린으로 볼 것이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도 못했던 올드팬들에게 <해골의 왕국>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일어나보니 산타 할아버지가 왔다 가셨더라, 는 말처럼 진위만 분명하면 이유 따위야 알 바 아니란 듯이 들뜨게 되는 일이다.

어떤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가죽 중절모와 무엇이든 낚아채고 때론 밧줄처럼 활용되는 채찍은 20여 년이 지나도 쓸모가 대단하다. 물론 흰머리가 무성한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 이하 ‘인디’)는 분명 세월 앞에 장사 없음을 실감하게 하지만 여전히 그는 지적이면서도 화끈하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조롱 섞인 위트를 날릴 줄 알며 코 앞까지 닥친 위기 앞에서 순발력 있게 기지를 발휘하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예전 같지 않다고 한숨 쉬지만 여전히 그는 쉼 없이 달리고 주먹을 날리며 악에 대항한다.

물론 20세기 아날로그 방식으로 채워진 <인디아나 존스>는 흡사 어드벤처 영화의 유물이라 할만한 것이다. 특히나 디지털 방식이 대세인 21세기에서 그것은 실로 시대착오적이라 할 만큼 쉰내 난다고 소박맞을 물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이하드 4.0>으로 돌아온 존 맥클레인이 ‘죽지 않아’를 증명했듯 인디아나 존스 역시 21세기에서 현저하게 불필요한 노동으로 분류된 아크로바틱 액션의 진가를 여지없이 발휘한다. <해골의 왕국>은 철저하게 <인디아나 존스>라 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고대 유물에 얽힌 전설, 그리고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정, 유치하고 조악해 보이지만 마음을 설레게 하는 모험심을 유발하게 만드는 낭만. <해골의 왕국>은 <인디아나 존스>가 관객에게 쥐어주던 의미를 간과하지 않았다.

세월의 변화를 증명하듯 전작에서 악의 축으로 등장하던 나치는 사라지고 빈자리를 메운 건 공산진영의 소련군이다. 1930년대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두르던 전작들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건 비단 영화 밖만이 아니다. ‘Better dead than red(빨갱이가 되느니 죽음이 낫다)’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적나라하게 증명하듯 <해골의 왕국>은 미소진영의 대립이 한창이던 1950년대 냉전시대의 미국에 서있다. 게다가 의미심장하게도 <해골의 왕국>은 <인디아나 존스>시리즈의 서막인 <레이더스> 말미에 등장했던 네바다 군사기지 51구역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덕분에 <레이더스>에서 인디가 찾아냈던 성궤도 잠시 형체를 드러낸다.- 그곳에서 그들은 포로로 잡은 인디에게 무언가를 찾아내라 종용한다.

<인디아나 존스>에 대해서 알만큼 아는 당신이라면 이 시리즈가 지닌 이야기 맥락이 예상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몰랐다면 이제라도 알아둬라.- 숨겨진 보물과 이를 악용하려는 무리들의 음모에 맞서 인디는 한두 명의 파트너와 함께 모험을 감행한다. 그리고 숱한 난관을 이겨내고 보물을 찾아내지만 이를 소유하려는 악은 소멸하고 인디는 살아서 제집으로 돌아온다. <레이더스>에 등장했던 메리언(카렌 알렌)이 재등장하고, 이전에 그녀의 아들이자 인디와도 깊은 관계임이 밝혀지는 머트(샤이아 라보프)가 동행하는 모험은 원전에 충실한 반가운 것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신선한 감각이 수혈된 것이다. 다만 인디의 아버지 헨리(숀 코네리)는 죽어서 사진으로만 등장한다.-숀 코네리가 나이 관계상 출연제의를 고사했다고 한다.-

동세대를 배경으로 하는 블록버스터와 달리 인디가 ‘공산당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1950년대가 새로운 <인디아나 존스>의 배경이 된 건 인디의 나이를 고려한 것이자 모험의 실효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역동적인 액션을 펼쳐야 할 인디의 나이를 고려할 때, 1930년대를 배경으로 했던 전작 시리즈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거니와, 성스런 유물을 악용하려는 무리들이 존재해야만 모험은 이뤄진다는 점에서 냉전시대 소련은 나치만큼이나 유효한 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냉전의 이념대립이 구시대의 산물이 된 요즈음에 소련이 전작의 나치들마냥 악의 무리처럼 활용된 것이 불편한 사실이 될 수 있겠지만 전작들이 그러했듯 <인디아나 존스>에서의 악은 그저 모험을 성립시키는 구실로서 활용되는 것에 불과했을 뿐, 불필요하게 감정을 유발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우크라이나 억양의 이리나 스팔코 역으로 케이트 블란쳇이란 매력적인 배우가 악역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빼면 전작들에서 등장했던 소모적인 악역들과 <해골의 왕국>에서의 그들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해골의 왕국>은 올디스(oldies)한 시리즈의 감성을 현대에서도 구디스(goodies)하게 살렸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하다. 단지 인디아나 존스의 채찍질이, 그리고 그의 치킨 레이스가, 그리고 세월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푸념마저도, 돌아온 풍운아 존 맥클레인의 아날로그 액션에 비견할 만큼 환호와 열광을 점지해도 좋을 만한 것이다. 동시에 무모하면서도 땀내나는 인디의 액션은 인간적 유대감을 형성시킬 정도로 숭고한 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디지털 기술을 두른 동세대 영웅들의 초현실적 몸놀림으로 즐비한 블록버스터의 현세태에서 아크로바틱 액션과 아날로그의 감성이 주를 이루는 <해골의 왕국>은 구시대적 유물의 현대적 희소성을 환기시킨다.

물론 <해골의 왕국>은 모험 그 자체로 이뤄졌다. 오랜 팬에게는 실로 반가운 귀환이자 <인디아나 존스>가 낯선 세대에게는 생소하지만 만끽할만한 체험이 될만한 것이다. 물론 의외성은 존재한다. 마치 멀더와 스컬리가 제기했을 만한 <엑스파일>스러운 결말은 무시무시한 스케일이 가공할만하지만 세대를 막론하고 빵상 아줌마를 대면했을 때나 느낄만한 생소하고도 난감한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특유의 어드벤처 감수성은 <해골의 왕국>의 말미에 이르러 SF적 경이로움으로 치환된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인디는 ‘그들도 고고학자였다’며 감탄사를 날리지만 그것이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지지한 범우주적 프로젝트의 실상에 대한 충격을 상쇄시킬만한 위력으로 작용하지 못한다.–이건 호불호에 대한 말이 아니다.- 모험의 종착역은 지금까지 <인디아나 존스>에서 봐왔던 초자연주의적 신앙을 초월한 것이며 경이롭고도 경악적인 것이다.-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알고 봤다 해도 결국은 당했다고 말할만한 것이다.- 마치 도입부에서 등장하는 핵폭발 씬만큼이나.

중요한 건 <해골의 왕국>이 미래보단 현재에 충실하며 과거를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인디아나 존스>는 유년시절에나 꿈꿀만한 유치하고 조악한 상상을 영화적 모험으로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그 당시 관객들이 그것에 열광했다는 것. 그건 그 단순하고 유치한 꿈이 매번 낭만과 위트를 지닌 정의로운 인간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대 관객의 취향이 과거 당시와 많이 달라졌다 할지라도 인간이 지닌 기본적인 감수성은 세대를 넘어 전승된다. 그리고 <해골의 왕국>은 취향을 뛰어넘을만한 보편적 기질이 가득하다. 다시 한번 고고학 노동자, 인디아나 존스가 주목 받을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게다가 핵 떨어져도 죽지 않는 진정한 ‘다이하드’ 노장 인디아나 존스는 죽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다만 사라질 뿐. 물론 이전과 다르게 인디아나 존스 가족의 재구성이란 점에서 이번 시리즈는 각별하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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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우리가 지배한다(We own the night).’ 명암이 뚜렷한 도시의 뒷골목에서 발생하는 알력을 지배하는 자와 이를 제압하려는 자들이 지향할만한 중후한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제목으로 내건 <더 나잇>은 그 먹이사슬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본의 아니게 그 사이에 끼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 자의 운명을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더 나잇>의 관심사에 가깝다.

미국의 뒷골목을 지배하던 갱과 이들을 소탕하려는-혹은 그들을 장악하려는- 경찰들의 관계의 간극에서 비롯된 사연은 미국범죄영화들의 오랜 소재기반으로서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범인을 검거하는 경찰들, 하얀 마약가루와 바늘 달린 주사기들. 무덤덤한 회상처럼 사건기록사진처럼 보이는 흑백의 스틸컷이 차례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도입부는 <위 오운 더 나잇>(이하, <더 나잇>)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공표하는 것과 같다. <더 나잇>은 1980년대 뉴욕에서 상반되는 지점에 선 형제의 관계 변화를 통해 시대적 공간에 담긴 세태의 모습을 묵직하고도 담담한 시선으로 스크린에 담아낸다.

디스코 음악과 현란한 조명 아래 음주가무에 들뜬 인파들, 매일같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뉴욕의 유명클럽에서 매니저를 맡고 있는 바비 그린(호아킨 피닉스)은 도시의 밤이 잉태한 향락을 기반으로 엔조이한 삶을 계획한다. 하지만 그의 부푼 꿈은 뉴욕 경찰서장인 아버지(로버트 듀발)와, 역시 촉망 받는 경찰인 형 조셉(마크 윌버그)이 주도하는 마약수사로 인해 혼선을 빚고 그로 인해 형제는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뒤늦게 안 바비 그린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숙명을 깨닫고 그로 인해 그는 예측범위를 벗어난 삶의 진로에 놓이게 된다. 나이트 클럽의 매니저로서 자신의 사업만을 골똘히 구상하던 바비 그린이 경찰 배지를 달기까지의 과정을 진지하게 보여주는 <더 나잇>은 어떤 의문을 품게 한다. 소시민적 행복을 추구하던 거리의 탕아는 왜 제도적 질서에 편입돼야 했을까? ‘네가 조만간 우리 편에 서지 않는다면 마약꾼 편에 서게 된다’는 아버지의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비 그린이 경찰이 되기로 결심한 건 그가 질서유지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기 보단 가문을 수성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희생은 바비 그린을 각성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한번의 선택으로 인해 삶의 수평이 흔들린 바비가 자신의 삶을 완전히 한 방향으로 기울일만한 선택을 다짐하는 건 적을 완벽하게 제거함으로써 가문을 수성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애초에 자신의 계획과 가장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된 바비는 자신이 양부처럼 모셨던 클럽의 회장과 반대편에 서게 된다. 결국 그는 가족을 위해 꿈을 상납하고 기꺼이 국가 질서의 수하로서 국경 밖에서 유입된 악의 세력을 처단한다. 선택을 종용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갈등하고 변화를 고민하는 바비 그린을 묵묵히 묘사하는 <더 나잇>은 국경의 외부에서 유입되는 위험에 노출된 미국인이 제도로서 자신을 재무장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다양한 인종의 유입으로 이뤄진 미합중국의 힘은 때로 무분별하게 유입된 외부의 불순분자들로 인해 거리의 질서를 훼손당하고, 결국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동원된 공권력은 종종 되려 그들의 역습으로 명예를 훼손당한다. 동시에 뉴욕의 밤거리에서 거래되는 마약은 미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순한 외부 유입물이다. <더 나잇>에서 바비 그린의 경찰되기는 결국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한 미국인의 결속과도 같다. 그 과정에서 거리의 질서는 회복되고 가족의 평안은 유지되지만 결국 개인의 주체적 삶은 제도적 강건함을 위해 소모된다. 경찰제복을 입고 형과 나란히 단상 위에 앉아 형제애를 나누는 바비 그린의 모습은 거듭난 미국인의 초상과 같다.

<더 나잇>은 다양성을 통해 존립의 기반을 마련한 미국사회가 스스로 야기시킨 자기모순의 희생자는 누구인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미국은 끊임없이 외부의 적과 싸워왔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적을 단결시킨다. 미국인들은 끊임없이 외부의 적과 맞서며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각성해왔다. 그것이 아메리카 드림의 양면성이자 그라운드 제로를 품은 미국적 현실이다. <더 나잇>은 중후한 80년대 범죄드라마의 형식을 통해 과거를 되짚고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세련된 자성에 가깝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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