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석이 처음 무대에 올랐던 것도 어느덧 10년 전 일이다. 그래서 올해엔 데뷔 10년을 기념하는 무대에 올랐다. 그 무대에서 소년이 됐다. 어색하지 않았다. 조정석은 아직 소년이다. 소년처럼 꿈꾸는 배우다.
2년 전, 조정석은 꼭 다시 무대에 오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 해 조정석은 팬들에게 약속했다. 내년엔 꼭 무대에서 만나자고. 올해 조정석은 뮤지컬 <블러드 브라더스>로 무대에 올랐다. 팬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사실 이는 본인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조정석은 10년 전 서울 양재동에 있는 서울문화교육회관의 무대에 올랐다. 데뷔 무대였다. <호두까기 인형>이란 뮤지컬이었는데 쥐나 깡통로봇과 같은 비인간 1인 다역을 도맡았다. 객석에 앉아 있는 그 누군가였다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한 역할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정석에겐 실로 특별한 순간이었다. “감회가 새롭다는 말이 실감났다. 조정석이란 이름을 걸고 데뷔하는 날이었으니 얼마나 떨렸겠어요. 그런데 <블러드 브라더스> 무대에 처음 오를 때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왔어요. 기분 좋은 설렘? 친정으로 돌아왔다는 걸 실감했죠.” 3년 만에 오른 무대에서 10년 전 자신을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의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에서 자신의 오늘을 이끌어준 무대를 향한 사명감도 잊지 않았다. “내가 즐길 수 있는 공연을 하고 싶었고, 뮤지컬을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쇼의 요소보단 이야기 자체가 훌륭한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 <블러드 브라더스>였다.” 7살 남짓의 소년으로 무대에 등장해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인물을 연기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등에 업고 3년 만에 무대에 처음 올라섰을 때, 그가 느낀 건 떨림보단 설렘이었다. 세포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무대 체질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조정석이 무대에 다시 오르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던 건 그를 기다리는 새로운 무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3년간 조정석은 다섯 편의 영화와 두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건축학개론>으로 시작된 영화 경력은 개봉을 앞둔 <나의 사랑 나의 신부>까지 포함해 다섯 편으로 늘었다. 처음으로 상투를 틀고 도포를 입은 <관상>과 처음으로 칼을 휘두르며 액션을 했던 <역린>에선 날고 기는 배우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영화의 흥망과 무관하게 조정석은 반짝였다. 아마 조정석의 ‘화양연화’가 있다면 지금일지도 모른다. 그의 화양연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신민아와 함께 주연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이명세 감독이 1990년에 발표한 동명 원작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필연적으로 원작과 다른 시대성과 세태를 담고 있지만 원작이 품고 있었던 결혼에 대한 보편적인 관념과 특별한 성찰을 고스란히 끌어안았다.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원작의 옴니버스식 설정을 그대로 흡수하며 원작에 경의를 표한다. 특히 조정석에겐 자신이 생각하는 결혼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결혼이란 게 마냥 행복하고 달콤할 거 같지만 막상 해보면 벗어나고 싶거나 구속된다는 기분을 느낄 때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충돌과 갈등을 뛰어넘는 새로운 행복도 존재할 거라 생각해요.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할 동반자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저희 영화가 그런 느낌을 전달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조정석이 꿈꾸는 인연이란 어떤 것일까. “저는 운명론자는 아니에요. 스스로 개척하고 일궈나가야 한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니까 어떤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걸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 여자와의 관계도 새로운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가고 개척해나간다고 생각하는 쪽이죠.”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로 접어든 조정석에게 결혼이란 막연하면서도 가까운 화두다. “결혼 생각은 하지만 특별히 그런 생각에 쫓기면서 살고 싶진 않아요.” 당장 급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함께 어울리며 자라온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의 문턱을 넘었고, 그렇게 아버지가 됐다. 지금도 한 동네에 사는 덕분에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들은 애 아빠가 됐어도 그에겐 위안을 주는 존재들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기운을 얻어요. 걔네들도 제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용기를 얻는 것 같고요. 동네에서 소주 한잔 하면서 얘기하다 보면 리프레시된대요. 그런 얘길 들으면 저도 기분이 좋죠.” 오랫동안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건 어쩌면 조정석 역시 쉽게 변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일지도 모른다. 그에겐 뚜렷한 주관이 존재한다. “사실 제가 안 좋은 사람은 아닌 거 않아요. 최소한 어리석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할 사람은 아닌 거 같단 말이죠. 주관이 뚜렷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손쉽게 놓을 수 있어요.” 쉽게 포기한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갖기 위해 무리하는 대신 정말 자신이 쥐어야 할 것을 확실하게 선택한다는 말이다.
조정석은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어릴 때 태권도를 배웠는데 체육관에서 겨루기를 하다가 다운을 받으면 앞에선 티를 내지 않았지만 집에 와선 분해서 울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다음 심사 땐 걔를 꼭 다운시켰죠.” 그는 배우로서의 승부욕을 감추지 않는다. 다만 자신만을 위한 승부욕을 고집하는 게 아니다. “배우에겐 승부욕이 있어야죠. 다만 승부욕이 드러나는 순간 배우를 그만 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그 욕심이 연기에서도 드러나거든요. 연기를 할 땐 그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나을 버리려고 노력해야죠.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나가듯이 캐릭터를 만들어내야지, 배우로서 돋보이려고 하면 그저 욕심이 드러나는 거죠. 그런 욕심이 드러나면 안되죠.” 그러니까 조정석이 말하는 승부욕이란 배우 개인의 머리를 들고자 하는 욕심이 아니라 완전히 작품에 녹아 들어가겠다는, 프로로서의 마음가짐이다. 자신과의 싸움인 셈이다. “자신감과 자만심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누구보다 자신감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연기할 수 있었을 테고요. 이런 자신감은 열심히 노력했던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봐요. 물론 정말 잘하는 배우들을 보면 좌절감을 느끼는 순간도 있죠. 그래서 항상 나를 새롭게 전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호흡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사실 지금 조정석은 그 누구보다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블러드 브라더스>의 공연이 끝나면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홍보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고, 차기작인 영화 <시간이탈자>의 프리프로덕션에 참여해야 한다. 게다가 곧 부산국제영화제도 시작된다. 3년째 맡고 있는 대만 홍보대사로서 대만에도 다녀와야 한단다. 혹시 워커홀릭일까.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일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아요. 만약 흥미가 생기지 않는 일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시나리오만 봤다면 당연히 하지 않았겠죠.” 조정석은 지금 궤도 위에 올랐다. 궤도 위에 올랐으니 궤도 위를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건축학개론>이 2012년에 개봉됐으니까 제대로 이름을 알린 건 사실 얼마 안됐잖아요. 사람들에게 아직 소년처럼 어린 존재처럼 느껴질 수 있잖아요. 성장기로 보자면 소년의 시기를 지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소년답게 야망을 품어야죠. 배우로서의 야망을 품고 계속 노력해나가는 게 중요할 거 같아요. 그럴수록 저를 아끼는 이들이 많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조정석은 소년처럼 활짝 웃었다. 2년 전에 보았던 것처럼 단단하고 푸른 웃음이었다.
(ELLE KOREA OCTOBER 2014 NO.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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