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과 함께 필름 뉴요커로 자리해온 마틴 스콜세지는 전세계 영화의 수호자다. 일흔에 다다른 나이에도 녹슬지 않는 열의와 애정으로 영화를 촬영하고 발굴한다. 언젠가 영화가 될 그 삶에 대하여.
“내 모든 삶은 영화와 종교에 머물러 있다. 어쩌겠나. 그뿐인걸.” 마틴 스콜세지의 유년시절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었다. 뉴욕 맨하튼 동부의 리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스콜세지는 가톨릭계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밀집한 그곳에서 언제나 죽음과 맞닿은 폭력을 목격하거나 내몰리며 자라났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란 스콜세지에게 일종의 동아줄이었다. 영화란 그 ‘비열한 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꿈이었고, 그는 그 꿈을 향해 적극적으로 투신했다.
할리우드의 6~70년대는 영화광들의 시대를 맞이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와 같은 흥행사들을 비롯해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브라이언 드 팔마 등 작가주의적인 성향의 감독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영화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영화학과 출신 세대들, 즉 아카데믹한 씨네필들이자 테크니션이었다. 뉴욕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스콜세지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단편을 감독하며 연출자로서의 경력에 시동을 걸던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 가문 출신의 고백적인 작품으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스콜세지의 데뷔작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1968)는 여성을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대하는 카톨릭계 이탈리아 이민자 청년의 잠재적 폭력과 이중적인 심리를 다룬 문제적 수작이다. 스콜세지에게는 시대적인 공기를 파악하고 현상의 근원을 살피는 능력이 있었다. 1930년대 미국에서 강압적인 불평등 처우로 가난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무법자가 되어 벌이는 사건을 그린 <공황시대>(1972)를 비롯해서 <비열한 거리>(1973), <택시 드라이버>(1976), <분노의 주먹>(1980) <좋은 친구들>(1990) <카지노>(1995) 그리고 <갱스 오브 뉴욕>(2002)까지, 뉴욕의 이민자 출신 갱단들과 남루한 뒷골목 소시민들을 비춘 스콜세지의 카메라는 가난과 차별이라는 담보로 상환한 비극적 폭력성을 담아냈다. 무엇보다도 스콜세지는 그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해나가기 위해서 폭력 그 자체를 유전자에 새긴 듯 살아가는 비열한 갱단들의 이미지를 강렬하고 사실적으로 포착한다. 그 특별한 방식의 삶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해나가는 이 세계의 일부로서 편입시킨다.
스콜세지는 이주민들로 채워진 뉴욕에 깃든 폭력의 역사를 탐구해낸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뉴욕이라는 도시의 이면들을 발췌해온 진정한 필름 뉴요커다. 1920년대 뉴욕의 사교계를 배경으로 그린 은밀한 삼각관계에 관한 <순수의 시대>(1993)는 시대극이란 점에서 이례적이나 유럽과 같은 뉴욕 사교계 문화의 풍경을 들춘다는 점에서 그답다. 무엇보다도 뉴욕 상류층의 향락을 살핀 이 작품은 미국의 근간을 이룬 그들 역시 대서양을 건너온 영국의 이주민이란 사실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주요하다. 또한 스콜세지의 이례적인 작품 <특근>(1985)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불분명한 정체성을 보다 확고하게 밀어붙인다. 우연히 만난 여인에게 끌려서 한밤중에 집을 나선 한 남자가 처음 마주한 뉴욕의 이방인 같은 여성들과 거듭 만나며 미궁과 같은 하룻밤을 보낸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좀처럼 제 정신으로 살 수 없을 만큼 혼란한 도시의 현실 그 자체를 패닉에 가까운 과장된 스토리텔링으로 녹여낸다.
<쿤둔>(1997)과 <비상근무>(1999)로 쇠퇴의 기미를 지적 받던 스콜세지는 다시 한번 폭력의 역사로 들어선다. 혹독한 뉴욕 이민자들의 역사를 그린 <갱스 오브 뉴욕>은 괴물의 탄생을 그린 영화다. 폭력의 도가니 속에서 안착한 갱단들의 비열한 정서를 그린 스콜세지의 초기작과 달리 폭력 속에서 생존을 터득하고자 본능적으로 체득해 나가는 폭력성, 즉 폭력의 계승을 그린다. 미국의 미스터리한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의 전기물 <애비에이터>(2004)는 뉴욕의 이주민들이 꿈꾸던 환상, 아메리칸 드림에 근접한 어느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진취적인 도전을 거듭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듯 뛰어난 수완을 거둔 남자는 끝내 스스로의 욕망으로 자신마저 불사른다.
스콜세지에게 비로소 생애 첫 아카데미 트로피를 안긴 <디파티드>(2006)는 홍콩의 <무간도>(2002)를 보스턴의 풍경으로 변환한 그의 탁월한 접근 방식으로 점철된 작품이다. 비정한 정서가 짙게 드리운 <무간도>와 달리 비열한 거리의 물리적 폭력이 체감되는 <디파티드>는 명분을 중시하던 <무간도>의 인물들과 달리 사적인 지배욕으로 팽배한 사내들의 생존 전장으로 변환된다. 무간지옥의 윤회 대신 비열한 거리 위에서의 구원을 행하는 사내들의 정조는 태평양을 건넌 리메이크작의 진수를 드러낸다.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을 영화화한 <셔터 아일랜드>(2010)는 <케이프 피어>(1991) 이후 처음 연출한 장르물이다. <셔터 아일랜드>는 마치 생존을 위해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던 스콜세지의 괴물들이 끝내 분열증과 망상증으로 내몰려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되묻는 과정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으로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인물의 태도는 폭력을 관찰해온 스콜세지가 보다 적극적인 답변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보다 새롭다.
스콜세지는 끊임없이 자신의 녹을 닦아온 거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첫 가족영화이자 3D로 촬영된 작품인 <휴고>(2011)는 분명 의외의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휴고>는 가족을 위한 영화도, 3D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한 영화도 아니다. 뤼미에르가 촬영한 달리는 기차 이후로 움직이는 그림으로서 관람의 대상이 된 영화에 스토리텔링이라는 영혼을 불어넣은 영화의 진정한 창시자 조르주 멜리에스에 대한 내용이 담긴 원작은 스콜세지의 마음을 당길만한 것이었다. 특히 뤼미에르의 달리는 기차 영상을 비롯해서 다양한 무성영화의 레퍼런스들을 3D로 체험한다는 건 진귀한 체험에 가깝다. <휴고>는 움직이는 그림이 영화라는 예술이 되기까지, 무성영화가 오늘날의 디지털 3D영화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역사를 스크린에 집약시킨다. 영화 그 자체를 오마주한다.
스콜세지는 말한다. “영화는 역사다. 영화의 모든 흔적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문화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 그리고 각자 서로와 자기 자신을 향한 연결고리를 잃게 된다.” 70세에 이른 나이에도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는 스콜세지는 전세계 필름의 발굴과 복원 사업에 힘쓰며 끊어진 필름의 역사를 이어나가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 그 자체를 스크린에 투영하며 대중을 영화라는 마술로 인도하고자 한다. 결코 녹슬지 않는 감각과 애정으로, 영화의, 영화에 대한, 영화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 영화와 함께 하는 그 삶이 언젠가 영화가 될 것이다.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는 미국인들의 가슴에 ‘그라운드 제로’를 남겼다. 트라이베카 필름 페스티벌은 그 위에 피어난 영화제다. 9.11테러를 목격한 미국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뉴욕의 경제적 타격을 만회하고자 시작됐다. 로버트 드니로를 주축으로 미국 영화산업 발전의 근거지인 맨해튼 남부에서 개최된 트라이베카 필름 페스티벌의 의미는 그만큼 남다르다. 오는 4월 21일부터 5월 2일까지 열리는 이번 영화제는 <슈렉 포에버>(2010) 같은 화제작의 공개와 함께 다양한 인디필름들의 경연이 벌어진다.
빡빡한 도시의 삶이 버겁다고요? 매일 같이 단조로운 일상이 지겹나요? 일단 그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여행이라도 떠날 수 있다면 좋겠군요. 하지만 당장 시간도 없고, 막상 어디로 떠나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그렇다면 영화라도 한 편 보세요. 그 영화가 당신의 길잡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때때로 영화는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된다. 대사로, 음악으로, 그리고 풍경으로, 관객의 뇌리에 서로 다른 흔적으로 깊게 각인된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찰나의 풍경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그 풍경들은 현실을 벗어난, 또 다른 세계를 꿈꾸게 만든다. 당신이 발 딛지 못했던 세상을 꿈꾸게 만든다. 그리고 이제, 꿈꾸던 당신, 떠나라. 스크린 속 그 풍경으로. 극장에서 만끽했던 환상을 당신의 현실에서 만날 차례다. 머뭇거릴 당신을 위해 여기 몇 가지 좌표를 마련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오스트리아 비엔나 잘츠부르크
“도레미파솔라시, 도! 솔! 도!” 7음계를 이용한 ‘도레미송(Do-Re-Mi)’만으로도 유명한 <사운드 오브 뮤직>은 브로드웨이 인기 뮤지컬을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1965년, 전세계적으로 개봉된 이 고전 뮤지컬은 천진난만한 동심과 애틋한 로맨스가 어우러진 작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발랄한 음표들이 귀를 사로잡는 가운데,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다채로운 경관이 호화롭기 짝이 없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의상이나 다름없는 그 장관은 모차르트의 고향이기도 한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잘츠부르크에서 빌려온 풍경들이다. 볼프강 호수의 시원한 전경으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는 호헨잘츠부르크요새가 올려다 보이는 카피텐 광장과 잘차흐강을 건너는 모차르트 교각, 잘츠부르크 대성당과 미라벨 궁전의 정원 등, 잘츠부르크의 고풍스러운 정경 곳곳을 누비며 밝은 음색을 채워 넣는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풍경 대부분은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며 영화의 흥행 이후로 늘어난 관광객들을 위해 현지에서 운영하는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를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그 흔적들을 수집해나간다면 더 좋은 의미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 특히 마리아가 아이들과 함께 ‘도레미송’을 연습하던, 알프스를 병풍처럼 두른 몽크스산에 오른다면 씩씩한 걸음을 옮기며 노래하던 아이들처럼 절로 마음이 순수해질 거다.
<브로크백 마운틴> 캐나다 알버타 로키 산맥
울창한 숲과 험한 산세 아래 양떼를 지키기 위해 야영하던 두 명의 카우보이 잭과 에니스는 어느 날, 감정의 선을 넘는다. 산속이라 시차가 커서 밤이면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추운 야영지에서 모닥불로 손을 녹이고 좁은 텐트 안에서 뒤엉키듯 잠을 청하던 두 사내는 스스로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애틋한 감정이 줄기처럼 자라남을 직감하고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 금기적인 로맨스의 증인이 되는 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캐나다 알버타의 로키 산맥이다. 사실 동명원작소설의 작가 E. 애니 프루가 쓴 ‘브로크백 마운틴’은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고, 미국 와이오밍의 빅혼 마운틴을 모델 삼아 글을 써내려 갔다고 밝혔다. 제작사는 빅혼 마운틴 주변에서 촬영을 시도했으나 여건상 포기한 뒤, 촬영지 선택에 난항을 겪다 비로소 알버타를 찾았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험준하고도 풍요로운 로키 산맥의 풍광은 결말에 다다라 진한 여운을 남길 영화적 감수성을 깊고 너르게 채우는 원천이나 다름없다. 양떼를 몰다 설산이 내려다 보이는 산턱에서 한낮의 망중한을 즐기기도 하고, 깊은 밤에 찾아온 산의 한기를 몰아내며 모닥불을 피운 채 따뜻한 잔에 손을 비비던 두 남자의 추억은 그 인상적인 풍경을 통해 잊을 수 없는 감정적 여운으로 거듭난다. 만약 트래킹과 스키를 즐기는 이라면 그 만년설의 절경을 보다 적극적으로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뉴욕의 가을> 뉴욕 센트럴파크
굳이 뉴요커의 꿈을 꾸지 않았다 해도, 뉴욕의 명소들에 대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들어봤을 게다. 사실 뉴욕을 말한다는 건 식상한 일임에도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건 언제나 뉴욕을 그리는 영화들이 인상적인 기억으로 회자될 수 밖에 없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을 소재지로 둔 너무도 많은 영화 가운데서도 <뉴욕의 가을>은 제목이 직시하는 도시와 계절의 풍경을 풍만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맨하탄과 브룩클린, 퀸즈, 브롱크스, 스테이튼 아일랜드까지, 뉴욕의 전경을 부감숏으로 포착하며 시작되는 영화는 그 이후로 뉴욕에 배어든 가을의 흔적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민다. <뉴욕의 가을>의 두 주인공 윌과 샬롯의 만남이 시작되는 센트럴파크는 노란 은행잎으로 물든 가을의 향연 그 자체다. 세계 최대의 공원으로 꼽히는 뉴욕 맨하탄의 센트럴파크는 전세계 인종의 교차로라 해도 좋을 뉴욕의 중심에 자리한 뉴요커들의 안식처이자 쉼터이다. 삭막하고 번잡한 도시의 체증을 피해 잠시나마 안식을 부여한다. 그리고 영화처럼 센트럴파크를 거닐다 보면 운명 같은 연인을 만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그네들 역시 센트럴파크에서 마주한 건 그저 영화 속 우연일까, 운명일까? 적어도 후자의 낭만을 부정할 이유는 없을 거다. 그리고 그게 당신의 삶이 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고.
<맘마미아!> 그리스 스포라데스 제도의 스코펠로스 섬
전설적인 팝그룹 아바의 명곡들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브로드웨이 인기 뮤지컬 <맘마미아!>가 스크린으로 무대를 옮겼다. 영화 <맘마미아!>가 동명의 원작 뮤지컬보다 특별할 수 있는 건 스크린에 펼쳐진 그리스 제도의 그림 같은 풍경들 덕분이다. 촬영에 앞서 한 달 전부터 제작진은 <맘마미아!>의 무대가 될 공간을 찾기 위해 그리스 전역을 샅샅이 뒤졌다. 그 결과 스포라데스 제도의 스키아토스 섬과 스코펠로스 섬, 다무하리 섬을 찾아냈으며 대부분의 바닷가 신을 거기서 촬영했다. 특히 스코펠로스 섬은 <맘마미아!>가 선사하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진경의 핵심이다. 에메랄드 빛 바다를 여백처럼 두른 채 붉은 지붕과 하얀 벽으로 이뤄진 집들이 높낮이가 다르게 옹기종기 모여 앉은 스코펠로스 타운의 주택가를 비롯해 서쪽으로 22km 떨어진 카스타니 해변에 펼쳐진 백사장에서 스크린을 통해 봤던 그 모든 풍경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결혼식 신을 위해 100m 높이의 암벽 위에 재건한 예배당도 여전하다. 눈을 정화시키던 스크린 너머의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 당신은 어쩌면 모든 것을 다 얻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그 인생의 승자라 믿어도 좋다. <맘마미아!> 속 그 노래처럼, ‘The winner takes it all’.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로부터 배어나는 낭만적 기운을 로맨틱한 에피소드와 연결한 기획적 옴니버스다. 파리를 배경으로 18편의 옴니버스를 직조한 20명의 감독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을 통해 파리라는 도시의 환상성을 부추긴다. 사실상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의 고유적 낭만성을 증명하기 이전에 긴 세월 동안 환상성을 구축한 도시가 로맨스라는 감정을 얼마나 탁월하게 보좌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사랑해, 파리>에 이어 새로운 낭만도시 프로젝트의 제작에 착수한 엠마뉘엘 벤비히가 <뉴욕, 아이러브유>로 뉴욕을 새로운 로맨틱 시티로 낙점한 것도 그 도시를 동경하는 이들의 환상을 등에 업은 것이나 다름없다.
18편의 에피소드마다 명확한 구획을 나눈 <사랑해, 파리>와 달리 <뉴욕, 아이러브유>는 각 단편의 시작과 끝을 이어 붙이며 마침표의 영역을 지워버렸다. 주가 되는 단편 사이마다 다리 역할을 하는 짧은 전환점(transition)을 삽입하고 이를 통해 사연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그만큼 매 순간의 감정을 음미할 여유가 줄어든 반면, 다음 작품에 몰입할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산만한 인상을 줄 확률도 적지 않다. 매 단편마다 적확한 마침표를 찍어내듯 경계를 둔 <사랑해, 파리>보단 보다 불친절한 형태로 완성된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번잡함을 영화적 구성 그 자체로 승화해버린 것마냥 번잡한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부르는 동경심의 너비만큼이나 풍요로운 로맨스의 만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각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이와이 슌지를 필두로 11명의 감독이 만들어낸 로맨틱한 상상을, 그것도 다채로운 배우들의 얼굴을 빌려 뉴욕의 사랑담을 그려내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일면 의미 있는 일이다. 작품마다의 편차를 떠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모티브로 삼은 러브스토리의 향연을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감흥이 배어난다. 특히 감각적인 영상미와 함께 황홀한 충격을 선사하는 세자르 카푸르와 고전적 무게감 속에서도 섬세한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는 이와이 슌지의 단편은 <뉴욕, 아이러브유>안에서 단연 빼어난 감상을 부여한다. 그 밖에도 장난끼 넘치는 반전을 품은 브렛 라트너와 이반 아탈의 작품, 그리고 수다스럽지만 귀여운 노부부의 애틋한 감정을 깊게 전달하는 조슈아 마스턴의 영화 또한 꽤나 인상적이다. 감독으로 데뷔한 나탈리 포트만의 깔끔한 연출력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관심사가 될만한 지점이다.
번잡한 뉴욕의 교차로를 건너듯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단편적 상상력을 따라잡는 건 그만큼의 집중력을 요하기에 피곤한 감상을 부여할지 모른다. 동시에 옴니버스의 특성상 작품마다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도 일종의 맹점이 될만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그 다채로운 감각과 다양한 상상력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먹음직스러운 만찬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어느 도시에서나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랑해, 파리>와 <뉴욕, 아이러브유>는 특별한 도시의 로맨스라기 보단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둔 특별한 로맨스적 일화의 총망라에 가깝다. 떨리는 찰나의 이끌림도, 담담한 영원의 엇갈림도, 낮과 밤을 아우르며 도시를 떠돌다 그 거리에 낭만을 켜켜이 채워나간다. 낭만을 먹고 자란 도시는 전인류적 동경을 끌어안고 그 환상을 품에 안은 채 또 다른 낭만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뉴욕, 아이러브유>는 도시를 위한 낭만의 헌사라기 보단 유려한 도시를 풍경으로 낭만을 증명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새로운 낭만은 또 다른 도시로 전파된다. 아마도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랑을 꿈꾸는 도시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다소 유치한 스토리와 조악한 설정이 또렷하게 보이지만 산만한 캐릭터들의 수다스런 조합이 플롯의 빈곤함을 메운다. <슈렉>과 함께 드림웍스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로 등극한 <마다가스카>의 속편 <마다가스카2>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마다가스카2>는 그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더 이상 ‘마다가스카’를 중심에 둔 사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제목이 다시 한번 활용되는 건 이 타이틀의 기시감이 시장성이 유효한 브랜드 네임밸류를 지닌 덕분이다. 전편의 대단한 성공에서 잉태된 기획상품에겐 새로운 자기 정체성보다도 자기 기반의 뿌리가 중요할 따름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속편 역시 일종의 모험담이다. 모험 속에서 캐릭터들은 성장한다(고 묘사된다). 뉴욕의 왕이라 자처하던 동물원의 사자 알렉스(벤 스틸러)가 친구인 하마 글로리아(제이다 핀켓 스미스), 기린 멜먼(데이빗 쉼머)과 함께 동물원을 뛰쳐나간 얼룩말 친구 마티(크리스 락)를 쫓아 담을 넘었다가 마다가스카 섬까지 표류하게 되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연의 이후로 덧붙여진 사연이다. 새로운 행선지는 아프리카다. 뉴욕을 향해 출발한 비행기가 불시착하면서 그들은 지명이 묘연한 아프리카 대륙으로 떨어진다.
동화적인 <슈렉>의 세계와 우화적인 <마다가스카>의 세계는 의인화를 통해 공통적으로 각자의 세계관을 지탱하고 있다. 인간과 공존하는 동시에 인간과 별다를 바 없는 비인간 캐릭터들의 행위엔 모순을 뛰어넘는 위트가 담겨있다. 물론 <마다가스카>는 <슈렉>보다도 캐릭터에 대한 의존도가 강한 작품이다. 디즈니 동화의 클리셰를 전복시키는 이야기적 태도로 풍자적 웃음을 발생시키는 <슈렉>과 달리 <마다가스카>는 특유의 의인화된 동물 캐릭터들의 수다와 슬랩스틱에 가까운 연기적 액션을 통한 유머로서 관객을 적극 공략한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속편의 장기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네 동물 캐릭터의 성격은 여전하고 그들의 행위는 과거와 별다르지 않다. 장점은 전작만큼의 너비를 유지한다. 캐릭터들은 여전히 수다스럽고 산만하게 뛰어다니며 유희적인 연기를 펼친다.
그에 비해 단점은 좀 더 덩치가 커졌다. 캐릭터의 개성과 조합으로 가려지던 이야기의 열악함이 예전보다 커진 군살을 가리지 못한다. 알렉스의 사연을 축으로 사연의 맥락을 집중시키던 전작과 달리 비해 이번 작품은 각자의 캐릭터를 줄기로 삼아 이야기에 가지치기를 시도한다. 이야기의 유치함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산만함이 예전에 비해 더욱 활발해졌다. 네 캐릭터의 비중을 각자 키워나가다 보니 전체적인 조합이 흐트러진다. 동시에 저마다 가벼운 사연들이 자신의 경로를 고집하는 것처럼 비효과적인 태도도 없다. 질적으로 발전되지 못한 이야기가 양적으로 팽창했다. 결국 극심하게 산만해진 이야기를 작위적인 감동으로 메우려 하나 이 역시 효과적이지 못하다. 전작의 인기에 편승한 기획의 한계가 여실하다.
‘롤링 스톤즈’가 길 바닥의 구르는 돌멩이만큼의 관심거리도 안 되는 이에게 이 영화를 권하기란 힘들지 모를 노릇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담긴 공연이 어떤 극영화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 무대가 롤링 스톤즈의 것이기 때문이다. 1962년 런던의 클럽에서 데뷔해 ‘비틀즈(Beatles)’와 함께 브리티쉬 인베이션(British invasion)의 신화를 쌓아 올린 로큰롤의 악동들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단단한 팀워크를 자랑하며 여전히 패기만만하게 살아있다. 2005년, 13번째 정규앨범 타이틀 ‘A bigger bang’을 발표하며 이뤄진 월드투어이자 최다수익을 기록한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된 ‘Bigger Bang tour’ 중 뉴욕의 비콘 극장(Beacon Theater)에서 이뤄진 공연실황을 담아낸 <샤인 어 라이트>는 이 밴드의 거창한 역사를 뜨겁지만 담백하게 소개하는 스포트라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9년, 마이클 워드라이가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촬영한 20시간 분량의 필름을 4시간 가량으로 편집해 <우드스톡>을 완성한 장본인이 마틴 스콜세지임을 제시한다면 <샤인 어 라이트>의 설득력은 더해진다. 게다가 밥 딜런의 도발적인 이미지들을 생생히 기록하며 뮤지션의 모호한 내면을 들춤으로써 그 아우라를 강건하게 재생하는 <노 디렉션 홈: 밥 딜런>(2005)을 경험한 누군가라면 소통이 난해한 뮤지션에 대한 탁월한 접근을 이룬 마틴 스콜세지의 내공을 이미 알고 있기에 <샤인 어 라이트>의 무대가 변변찮은 라이브 클립에 불과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할지도 모른다.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공연실황 라이브클립으로 치부(?) 당할 수도 있는 이 작품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싶다면 이 공연실황을 카메라에 온전히 담아낸 이가 뉴욕의 필름 거장 마틴 스콜세지라는 점이 든든한 근거가 되어줄 것이다.
공연을 앞둔 롤링 스톤즈 멤버들의 여유로움과 공연 셋리스트를 기다리는 마틴 스콜세지의 초조함을 대비시키며 출발하는 <샤인 어 라이트>의 초반부는 긴 세월 동안 자기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남은 뮤지션과 영화감독의 치열한 대립구도를 은밀하게 드러낸다. 밴드의 생존력을 여전히 무대에서 증명하는 뮤지션의 풍모와 필름을 관통한 시선으로 긴 세월을 관조한 영화감독의 치열한 자의식은 중후한 관록의 형태로 융합되어 영화에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는 결국 공연을 기다리는 공연장의 관객들만큼이나 카메라를 통해 무대를 보게 될 관객들의 긴장을 불어넣는데 적합한 역할을 한다. 라이브 무대가 펼쳐지기 전, 마틴 스콜세지는 공연 이전의 풍경들을 끌어와 무대의 열기를 이루기 위한 발화점의 온도를 찾는다. 비로소 롤링 스톤즈의 무대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무대를 향한 객석의 열기는 적절한 온도로 상승하고 이내 마틴 스콜세지의 슛 사인과 함께 시작되는 첫 번째 넘버 ‘Junpin’ Jack Flash’와 함께 세차게 가열된다.
19곡의 셋리스트로 이뤄진 공연은 관객들의 열광만큼이나 멤버들의 나이를 믿기 힘들 정도로 무대에 넘치는 활력을 거침없이 분출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건 끝내주는 공연이다. 앙상하지만 섹시하게 하늘거리는 몸동작으로 열정적인 보컬을 선사하는 믹 재거의 무대 장악력과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조니 뎁이 연기한 잭 스패로우의 모델로 알려진 키스 리차드의 독특한 패션만큼이나 시선을 빼앗는 기타연주와 무대매너는 단연 훌륭하다. 또한 키스 리차드의 기타를 보완하는 로니 우드와 그들의 뒤에서 차분하게 드러밍에 집중하는 과묵한 찰리 와츠는 파수꾼처럼 무대를 든든하게 이룬다. 또한 '화이트 스트라입스(White Stripes)'의 잭 화이트, 블루스의 장인 버디 가이와 팝의 뮤즈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게스트로 등장하며 특별한 즐거움을 더한다. 총 16대의 카메라는 세련되면서도 박력 있게 무대 너머로 흐르는 열기를 생생하게 포착한다. 특히 곡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롤링 스톤즈의 과거 인터뷰 장면을 비롯한 기록들은 롤링 스톤즈의 오랜 여정을 서술하며 무대의 저력에 깊은 감상을 부여한다. 오랜 관록으로 카메라를 조율하는 마틴 스콜세지의 깊은 음악적 조예는 인물에 대한 탁월한 접근적 시선을 더하며 <샤인 어 라이트>에 깊이 있는 열광을 부른다. 게다가 그것은 관객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지 않으면서도 그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의 표정을 예상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가 지켜봤던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스크린이 무대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샤인 어 라이트>는 그저 롤링 스톤즈의 명곡들이 담긴 라이브 실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스크린을 통해 무대를 재현하는 일종의 체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롤링 스톤즈의 무대와 그것을 바라보는 마틴 스콜세지의 시선은 거대한 관록의 시너지를 이룬다. 연륜 있는 필름거장은 위대한 라이브 제왕의 무대에 영원을 헌정한다. 그리고 그 무대를 바라볼 주체는 바로 관객이다. 비로소 2시간 여의 공연이 끝나고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밴드의 뒤를 쫓는 카메라는 하늘로 솟아올라 뉴욕의 거대한 야경을 비춘다. 그 풍경과 함께 흐르는 넘버 ‘Shine a light’의 가사, ‘shine a light on you’처럼 조명은 무대를 비추지만 그건 결국 객석에 앉은 당신을 위해 비춰지는 빛이다. <샤인 어 라이트>는 당신을 위해 마련한 VIP석이다. 실로 그 무대를 즐길 줄 아는 관객에게 <샤인 어 라이트>는 실로 비좁은 상영관의 좌석을 박차고 일어나 몸을 흔들며 환호하고 싶을 만큼 전율적인 흥분을 선사한다.
부엌은 비좁아도 상관없지만 옷장만큼은 넓어야 한다는 캐리(사라 제시카 파거)의 마놀로 블라닉 구두는 <섹스 앤 더 시티>(이하, <섹스&시티>)에 대한 기호를 파악하는 기준과도 같다. 그 누군가에게 호가의 사치품으로 인식될만한 마놀로 블라닉 구두는 <섹스&시티>의 캐리에겐 필연적 기호다. 그 기호에 대한 수긍과 부정은 <섹스&시티>를 뉴요커에 대한 환상과 된장녀에 대한 질시로 구분하는 척도로 작동한다.
<섹스&시티>는 그녀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것이다. 섹스 칼럼니스트 캐리와 그녀의 친구들, 미란다(신시아 닉슨)와 샬롯(크리스틴 데이비스), 사만다(킴 캐트럴)의 노골적인 성담론과 진솔한 경험담으로 발췌되고 집약되는 뉴욕 커리어우먼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6시즌의 대장정으로 진열한 TV시리즈 <섹스&시티>는 그에 대한 열광과 혐오를 통해 대중들의 관심사를 얻었다. 하지만 속물적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사소한 일상을 여백 없이 배치하며 그에 담긴 의미를 자문하는 <섹스&시티>의 미덕은 분명 그로부터 축적된 삶으로부터 진솔한 답변을 얻고 삶의 경지를 터득한다는 점에 있다. <섹스&시티>를 둘러싼 취향의 잡음은 섹스와 시티의 표면과 내면, 그 어느 쪽을 인정하느냐에 달렸다.
극장판으로 버전업 된 <섹스&시티>는 말줄임표처럼 늘어뜨려진 채 여운을 남긴 TV시리즈의 에필로그와 같다. 혹은 시즌6을 잇는 시즌7의 2시간 분량 압축이라 해도 무방하다. 게다가 TV시리즈와 극장판 사이에 놓인 3년간의 공백을 콜라주 영상으로 간략히 정리해주는 영화의 도입부는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직장과 가정 생활로 바쁘게 지내는 미란다와 불임으로 고생하다 중국에서 입양한 딸과 함께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리는 샬롯, 그리고 누구보다도 성적 유희에 충실했던 사만다가 배우로 일하는 연하애인과 할리우드에서 동거 중이란 사실을, 그리고 TV시리즈의 긴 에피소드 속에서 끈질기게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던 빅(크리스 노스)과 캐리가 다시 열애 중임을 캐리의 자전적 내레이션으로 총망라한다.
극장판의 형식은 TV시리즈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캐리의 내레이션을 통해 던져지는 인생과 사랑에 얽힌 물음은 시크한 도시적 취향으로 포장되고 은밀한 성적 담론을 여과 없이 나누는 네 여성의 솔직한 대화와 주변 경험을 거쳐 역시 캐리의 음성으로 답변된다. 다만 2시간 여의 러닝타임으로 이뤄진 영화적 규격에 맞춰 TV시리즈의 리모델링이 불가피했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극장판은 빅과 재회한 캐리의 에피소드를 축으로 그녀의 세 친구들의 사연을 주변부에 고르게 배치한다. 이는 매회마다 중심인물을 바꾸며 그로 인해 발견된 명확한 주제의식으로 끝을 맺던 TV시리즈와의 차이라 할만하다. 이런 면에서 극장판 <섹스&시티>는 TV시리즈의 오랜 목차에 연연하거나 그에 대해 민감하게 의문을 품지 않는 이에겐 무난한 로맨틱 코미디 정도로 관람해도 무방할 만큼 평이한 구성으로 완성됐다. 특히나 ‘색칠(coloring)’이란 단어로써 이뤄지는 그녀들의 섹스토크는 TV시리즈만큼 노골적이진 못하지만 시리즈의 위상을 각인시킬 만큼 발칙한 웃음을 제공한다.
하지만 극장판은 되려 기존의 TV시리즈에 팬덤을 지녔던 이에게 또 한번의 지루한 동어반복으로 여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캐리와 빅의 지긋지긋한 구간반복 로맨스는 또 한번 열애와 파탄을 오가고, 그 안에서 캐리의 좌절과 극복 역시 또 한번 반복된다. 게다가 자신들의 배우자 혹은 애인에게 종종 불안감을 조성하는 여성들의 히스테리나 스스로 자책할 만큼 후회할 짓을 반복하는-특히 빅!- 남성들의 답답한 소심증은 극장판의 도처에 깔려있다. 이는 한 인물을 축으로 단락적인 에피소드에 집중한 TV시리즈의 에피소드를 매회 보는 것과 달리 극장판이 네 인물의 전반적인 사연을 한 시즌을 전방위적으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차이이며 극장판이 감수해야 할 당위과제처럼 보인다. 게다가 간결한 에피소드 안에서 순발력 있게 구성된 사연들의 재미에 비해 긴 러닝타임만큼이나 극장판은 지나치게 호흡이 긴 인상을 주며 사연 속에 농축된 성찰의 깊이도 분산되는 에피소드 속에서 다소 밋밋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섹스&시티>극장판은 개별적 완성도 여부를 따지기 전에 시리즈의 서비스 정신을 높게 사는 편이 더 온당해 보인다. 화려한 패션에 열광하고, 개방적인 취향에 수긍하고, 뜨거운 사랑을 열망하면서, 서로의 우정을 중시하는 그녀들의 20여 년간의 뉴욕 연대기가 7년 동안 6시즌으로 지속될 수 있었던 건 이 시리즈의 매력이 그만큼 유지된 까닭이기도 하거니와 그녀들을 향한 팬덤이 그만큼 지속됐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당신이 이 시리즈에 깊은 호감을 지닌 이라면 결말부에 이르러 그 지지부진한 연애에 확실한 종지부를 찍는 캐리의 모습에 감정이입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캐리가 자신이 처음 뉴욕에 입성했던 20년 전을 회상하는 것처럼 당신도 언젠가 과거 스스로를 회상할 때 즈음, 이 시리즈를 회상할 것이다. 단지 캐리의 마놀로 블라닉을 흠모했건, 캐리의 내레이션에 담긴 예리한 경험적 성찰에 공감했건 간에 <섹스&시티>극장판은 그녀들의 네버 엔딩 스토리를 꿈꾸는 이들에 대한 무한한 보답과도 같다. 마흔을 자축하는 그녀들의 사연이 거듭 재생되지 않아도 팬심은 계속된다. 그리고 <섹스&시티>극장판은 분명 그 추억을 한 뼘 자라게 해줄 만한 요량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