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키우는 개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가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 일러스트 작가인 올리버(이완 맥그리거)에게는 45년 동안 부부로 살았던 어머니와 사별한 아버지 할(크리스토퍼 플러머)이 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는 고백했다. 자신의 진짜 삶을 찾고 싶다고. 할은 게이였다며 아들에게 커밍아웃한다. 40대가 넘은 아들에게 70대 중반을 넘긴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제 삶을 찾아나서는 광경은 심란하듯 놀라운 발견이었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지인들에게 무료한 삶의 복판에서 스스로의 삶을 방치하듯 사는 그에게 아버지의 고백과 그 고백 이후의 삶은 잔잔하게 물결치는 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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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어머니에게도 소녀시대가 있었고, 철없는 시절에 함께 하면 무서울 것이 없었던 친구들과의 추억도 있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어린 나이에 할 수 없는 무언가를 거듭 겪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어떤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절에서만 가능했던 무엇들을 더 이상 체험할 수 없다는 상실을 체감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써니>는 우리의 지난 날, 80년대를 지나쳐 보낸 어떤 어른들을 위한 송가다. <써니>는 주부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삶에 치이고 부대끼며 살아가던 여인 임나미(유호정)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고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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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은 시작과 달리 예정 없이 끝난다. 죽음이 슬픈 건 그래서일 게다. 죽은 자들의 빈 자리는 그 곁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들의 생 한복판을 공허하고 황량하게 비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히어애프터>는 바로 그 죽음을 소재로 둔 영화다.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의 기억 속에 놓인 망자들과 접속하는 조지(맷 데이먼)와 인도네시아를 휩쓴 쓰나미로 인해 죽음의 목전까지 다다랐던 프랑스의 유명 저널리스트 마리(세실 드 프랑스), 그리고 죽은 쌍둥이 형을 간절히 그리는 소년 마커스(조지 맥라렌)까지, 제각기 발 딛고 선 땅 위에서 직간접적으로 죽음과 사후를 경험한 이들의 뿔뿔이 흩어진 사연이 서로의 교감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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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역설

도화지 2009. 10. 3. 23:28

지난 수요일 저녁부터 목요일 아침까지, 그러니까 추석 연휴를 맞이하기 전날,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사실 날을 새려고 간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다 보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친구의 얼굴은 밝았다. 하지만 그 너머에 깊게 눌린 슬픔이 읽혔다. 난 좀처럼 말을 하기 어려웠다. 뒤늦게 도착한 동창이나 선후배와 종종 화기애애하게 떠들곤 했지만 쉽게 침묵했다. 그 친구가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떠안고 있는지 섣불리 짐작하기 어려웠다. 자리를 지켜야겠다 싶었다. 덕분에 술도 많이 마셨고, 전날 외고 마감 때문에 몇 시간 잠들지 못한 나는 새벽 즈음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감당하기 어려움을 느끼다 잠깐 눈을 붙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 지하철 속에서 꾸벅꾸벅 졸다 겨우내 집에 도착했다. 출근 시간까진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고, 1시간 정도 눈이라도 붙이자는 마음으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러다 식도를 타고 넘어오는 이물감을 느끼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토악질을 했다. 집에 와서야 나를 비트는 취기를 느꼈다. 요즘은 이상하게도 집에 와서야 취기를 직감할 때가 많다. 어쨌든 양치질을 하고 침대 위에서 정신을 잃듯 쓰러졌다. 눈을 떴다. 벨소리가 들렸다. 금요일마다 원고를 넘겨주는 선배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고 정신을 차리니, 젠장, 출근시간이 1시간 정도 넘었다는 걸 알게 됐다. 편집장님께 전화를 드리고 부랴부랴 출근준비를 한 뒤 강남역에 있는 사무실로 날아갔다. 추석 전날이라 오전 근무만 하는 날인데 지각을 했다. 머쓱했다. 편집장님의 아량으로 별 탈은 없었다.

 

오후까지 볼 일을 보다 버스에 짐처럼 앉아서 집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만나서 수다라도 떨고 싶었다. 온 몸에 덕지덕지 붙은 피곤에 당장이라도 넋이 나갈 것 같았지만 그랬다. 하지만 정작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네. 선약이 갑자기 깨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명절 전날이라 다들 분주했다. 아니면 그만큼 내 인간관계가 얄팍하나 보지. 그냥 그 거리에서 사라지듯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뒤늦게 발인에 참가한 친구들과 안부를 나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처음 만난 친구와 회포를 풀었던 그 자리의 기억이 선연했다. 그 자리에서 친구의 출산 소식을 전해 듣고 축하한다는 전화를 걸었던 기억도 선명했다. 누군가가 죽음 앞에 슬픔을 뉘고 있을 때, 누군가는 탄생 앞에 기쁨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역설적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겠지. 부질없는 생각이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장례식장의 분위기란 묘한 것이다. 실상 죽은 자의 슬픔이란 산 자가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위로한다는 건 산 자를 위한 일이 아니던가. 죽음 너머로 살아있는 자들은 연민을 공유하며 서로를 치유한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웃음을 나누며 서로를 위무했다. 아이러니하지만 산 자들은 죽은 자가 남긴 슬픔을 그렇게 부둥켜안으며 서로를 지탱한다. 죽음이 각별한 건 죽음에 대한 애도를 넘어 삶에 대한 각성을 일깨우는 까닭이다. 그 죽음이 남기는 건 허무가 아닌 사유다. 우린 그 사유 안에서 생을 전진시켜 나가는 것이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얻은 건 산 사람들과의 조우였다. 죽은 자를 위한 자리에서 산 사람들이 모여 관계를 되새긴다. 기묘한 일이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삶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친구도 살 것이다. 나도 살 것이고, 모두 다 살아갈 것이다. 사라진 사람이 남긴 기억을 흘려 보내며 산 사람들은 새로운 기억을 공유한 채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산 자들의 눈물 위로 떠내려가는 망자로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잘 살아야겠다.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후회 없는 삶을 살아보련다. 죽음을 통해 삶의 일깨움을 얻었다. 역설적이다. 산다는 게 참 그런 건가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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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 인터뷰

interview 2009. 6. 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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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레베카 홀)와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지금 막 미국에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 친구 사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은 특히 남자에 대한 견해가 판이하다. 조건을 꼼꼼히 따지며 신중하게 접근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지닌 약혼자가 있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최근 새 남자친구와 이별을 겪었다.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왔지만 두 사람의 기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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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접사를 통해 누군가의 생채기를 세심하게 더듬어 가는 시선의 끝엔 영문을 알 수 없는 어떤 죽음이 존재한다. <우리집에 왜왔니>(이하, <우리집>)는 비극적이라 단정짓기 쉬운 결과를 통해 시작되는 영화다. 물론 영화엔 어떤 비극적 암시가 없다. 그 비극은 단순히 상황 그 자체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 실상 영화적 태도와 무관하다. 온전히 영화의 태도를 빌려서 말하자면 이건 비극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의 특별한 사연일 뿐이다. 그 죽음은 누군가의 기억을 다시 온전히 되돌리는 계기가 된다. 병희(박희순)는 다시 한번 기억을 따라간다. 그 기억엔 이수강(강혜정)이 있다. 만남부터 이별까지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한 여자가 있다. 이야기도 거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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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사전에 ‘예스(Yes)’란 없다. 오로지 ‘노(No)’만 존재할 뿐. 어떤 제안에도 거절이 뒤따른다. 심지어 물음이 끝나기 전부터 거절을 서두른다. 세 번 정도는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흔한 미덕도 아니다. 그런 그에게 ‘예스’의 삶이 찾아온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그 남자는 어떤 일에도 무조건 예스만을 말할 것을 스스로의 마음에 서약한다. 그 뒤로 그 남자는 예스에 귀속된다. '노'밖에 모르던 그가 '예스'만을 말한다. <예스맨>의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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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영화는 항상 김기덕으로 수렴한다. 김기덕의 영화를 논리정연한 서사의 텍스트로 해석하는 건 무리다. 근래 발표하는 작품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의식의 흐름에서 비롯된 추상적 퍼포먼스를 씬과 씬 사이에 이어 붙이곤 하는 김기덕의 영화를 서사적 논리의 연속성을 염두하고 쫓아간다면 난감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것은 ‘김기덕’이란 고유명사적 자의식으로 채워져 있다. 지극히 사적인 관념 안에서 응축되거나 확장된 추상적 자의식을 추적하기란 편한 일이 아니다. 때때로 사소한 미장센조차도 잠재적 의미가 존재하리라 의심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적확한 해석은 결국 그 해석의 대상만이 지닌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관찰자의 추론은 그 의식적 흐름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김기덕의 열다섯 번째 영화 <비몽>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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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망울들이 눈물이 번지듯 이지러진다. 구름이 이동한다. 바람이 분다. 화창한 어느 날, 대기는 평온하다. 17살 여고생 다이아나(에반 레이첼 우드)와 모린(에바 아무리)이 화장실에서 난데없이 찾아온 죽음의 기로에 당면한 그 순간에도 대기는 평온하다. <인 블룸>은 몽환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 안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다이애나와 모린의 급박한 상황을 비춘 뒤, 그로부터 달아나듯 15년 뒤의 다이애나(우마 서먼)를 등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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