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키우는 개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가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 일러스트 작가인 올리버(이완 맥그리거)에게는 45년 동안 부부로 살았던 어머니와 사별한 아버지 할(크리스토퍼 플러머)이 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는 고백했다. 자신의 진짜 삶을 찾고 싶다고. 할은 게이였다며 아들에게 커밍아웃한다. 40대가 넘은 아들에게 70대 중반을 넘긴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제 삶을 찾아나서는 광경은 심란하듯 놀라운 발견이었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지인들에게 무료한 삶의 복판에서 스스로의 삶을 방치하듯 사는 그에게 아버지의 고백과 그 고백 이후의 삶은 잔잔하게 물결치는 파문이었다.
일상을 무기력하게 수동적으로 전전하던 남자는 능동적인 선택을 머뭇거린다. 그 선택으로 인해서 얻어질 변화가 그에게는 두렵기만 하다. <비기너스>는 바로 그 결정적인 선택을 통해서 능동적 변화를 맞이하기까지의 한 남자의 일상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아버지의 기습적인 커밍아웃으로 인해서 출렁이던 삶을 담담하듯 받아들인 올리버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을 조금씩 인식해나간다. 인생의 종말을 예감하면서도 기존의 삶에 접어놓았던 진짜 삶을 펼쳐놓고 그 위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에게 일종의 배반이면서도 생경한 자극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삶에 새로운 계기가 되는 건 사랑이다. 프랑스 출신의 여배우 애나(멜라니 로랑)와의 만남으로 인해 그의 평온한 일상이 들끓기 시작한다.
<비기너스>는 제목처럼 새로운 삶을 살아나가는 이들에 관한 영화다. 좀 더 정확하게, 새로운 삶의 문턱 앞에 들어선 이들에 관한, 그 시작 직전에 선 연인들의 시간을 살피는 영화다. 하지만 <비기너스>에서의 로맨스는 극의 중심을 관통하는 사연이라기보단 어떠한 전체를 이루는 조각의 요소처럼 보인다. 영화는 올리버를 중심으로 그가 목격하는 아버지 할과, 그와 직접적으로 감정을 교류하는 연인 애나와의 관계를 통해 극의 너비를 확보해나간다. 이 모든 관계는 올리버의 시선을 통해서 목격되고 해석되는데, 이는 곧 올리버의 시선이 <비기너스>에서 관객의 시선을 대변하는 눈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올리버라는 인물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 인물의 변화보다도 그 변화를 완성하고 돕는 주변의 관계적 너비를 살피는 것이 <비기너스>의 핵심적인 감상에 가깝다.
물론 그 모든 관찰과 감정의 대상인 올리버의 변화가 <비기너스>의 화두인 건 맞다. 하지만 그 주변 관계에 대한 목격과 그 목격을 통해서 얻어지는 감정적 변화가 <비기너스>의 주를 이룬다는 건 다시 말해서 올리버가 그만큼 능동적인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는 인물이라 이해될 수 있는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중심인물인 올리버의 주변, 그 주변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아버지의 삶을 목격하는 과정을 통해서 묵묵하지만 묵직한 성찰을 이끌어낸다. 인생의 막바지를 준비하는 나이에서도, 그것도 말기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가 뒤늦게 자신의 지난 삶을 부정하듯, 반대로 진짜 자신의 삶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듯 확고한 커밍아웃을 알리며 새로운 삶을 살아나가는 여정은 마흔을 넘어서도 확실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지 못하는 아들에게 어떠한 식으로든 자극을 안긴다. 그리고 사랑을 예감하면서도 한발 물러서서 경계선 앞에서 머뭇거리던 아들의 삶이 변한다. 누군가의 삶이 결국 가까운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키고 나아가게 만든다는 것. <비기너스>는 삶의 주체가 되는 이에게 영감을 주는 주변인의 삶을 비춤으로써 어느 개인의 삶이 단지 그 개인의 너비에 국한된,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어머니에게도 ‘소녀시대’가 있었고, 철없는 시절에 함께 하면 무서울 것이 없었던 친구들과의 추억도 있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어린 나이에 할 수 없는 무언가를 거듭 겪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어떤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절에서만 가능했던 무엇들을 더 이상 체험할 수 없다는 상실을 체감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써니>는 우리의 지난 날, 80년대를 지나쳐 보낸 어떤 어른들을 위한 송가다. <써니>는 주부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삶에 치이고 부대끼며 살아가던 여인 임나미(유호정)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고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데뷔작 <과속스캔들>로 기록적인 흥행 성공을 얻어낸 강형철 감독은 <써니>를 통해서 자신의 취향을 보다 확실하게 어필한다. 미혼모 문제를 대안가족적인 온기와 화합적인 낭만으로 끌어올린 <과속스캔들>의 드라마틱한 정서는 혈기왕성한 젊은 날의 꿈으로부터 멀어진 중년 여인들의 의기투합과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지닌 <써니>로 거듭난다. 자잘한 소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도 유효하다. 세심하게 풍경의 근접한 양태들을 유유히 포착해내는 오프닝 시퀀스의 리듬은 <과속스캔들>과 동일한 접근방식이라 할만하다. 또한 윤리적인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낭만성, 즉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털어내고 그 시대에서 발견되던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이를 재현의 도구로서 활용하는 방식 역시 그렇다. 물론 이는 시대적인 공기를 단순히 가볍게 간과한다거나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느 개인이 지니고 있던 시공간의 개념이 중요할 뿐, 그 시대의 공기를 재현하고자 하는 의욕은 <써니>의 의도와 무관하다.
시대적인 풍경을 재현해낸다는 건 그 시대를 지나온 이들과의 교감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써니>가 재현하는 80년대의 풍경들은 바로 그 시대를 지나온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묵은 말들이 살아있는 풍경으로 재생되고, 그 안에서 지나간 날들이 떠오를 때, 그 시절을 건너온 관객들은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영화 속의 인물들과 동화될 수 밖에 없다. <써니>가 자아내는 공감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다만 그 공감대를 보다 깊고 너르게 완성해낼 수 있는 자질은 영화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셈이다. 그런 의도 안에서 <써니>는 성공한 결과물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그러니까 영화의 두 시점은 이를 감상하는 이들의 시점을 대변하듯 그 시절의 풍경을 온전히 스크린에 전시하고 있다. 다소 과시적이거나 과잉적인 측면도 없는 건 아니지만 추억을 되새긴다는 건 허기보다는 포만이 더 어울리는 법이다. <써니>는 80년대에 향수를 지닌 오늘날의 중년 세대들을 위한 포만의 장이다. 영화가 쏟아내는 오래된 이미지들은 오늘을 향유하지 못하는 과거 세대들을 위한 성찬과 같다.
물론 이는 반대로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일종의 체험이다. <써니> 속에서 등장하는 갖은 풍경들은 그 시대를 공유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는, 희귀한 풍경일 것이다. 이를 하나의 볼거리로 승화시키는 건 그 과거적인 소품들 속을 누비는 어린 소녀들일 것이다. 창고에서 꺼내든 오래된 소품들을 추억으로 공유할 수 없는 세대들이 <써니>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죽은 시간을 생동감 있게 재생시키는 극 속 인물들인 셈이다. ‘7공주’라고 스스로를 명명하며 시대를 재현하는 소녀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각인시키며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연의 너비를 넓혀나간다. 때때로 감정적인 활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인상도 들지만 <써니>는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어쩌면 언젠가 오늘날의 젊은 날을 뒤돌아보게 될 어린 세대들에게 <써니>는 좋은 지침서 역할을 수행할지도 모른다. 세대 간의 단절된 기억 속에서 지난 세대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가 지닌 최고의 덕목일지도 모른다.
시대적 소품의 디테일한 활용 능력, 저마다 개성을 확보한 캐릭터들의 표현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써니>는 그러한 재현성을 단지 향수를 건드리는 자극의 촉매로 장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진짜 감정을 건드리는 간절한 낭만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이러한 감각은 강형철 감독이 지닌 윤리적 중립성과 도덕적 해탈감에서 비롯된 쿨함 그 자체에 있다. <써니>는 <과속스캔들>과 마찬가지로 쿨한 영화다. 이는 소품을 활용하고 비추는 카메라의 양식을 넘어서서 심각한 인상에서 도피하지 않고 완벽하게 탈출해서 자신만의 쾌감을 불어넣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강형철 감독의 상업적 감각은 스토리텔링의 기승전결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김용화 감독과 비견될만하며 앞으로의 행보도 주목할만하다. 또한 <써니>의 일등공신들, 과거와 현재 속에 놓인 전후의 인상을 책임지는 배우들의 존재감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무엇보다도 심은경은 <써니>가 전달하는 낭만의 팔 할을 책임지는 일등공신이다.
과거와 현재 속에서 놓인 인물들은 우리가 지나친 것들, 즉 돌아갈 수 없는 시대에 대한 추억을 아련하게 환기시키면서 쿨하게 깔깔댄다. 그게 되레 낭만적이다. 낭만이라는 게 결국 슬픈 일이 아니지 않나. 추억이 있기에 오늘을 버틸 수 있다는 것, 이 영화는 그것을 깨닫게 만든다. 오래된 친구가 반가운 것은 그 시절을 환기시키는 유쾌한 수다가 뒤따르는 덕분이지 않던가. 그리고 삶은 그 추억을 먹고 한 뼘 더 자라난다.
생은 시작과 달리 예정 없이 끝난다. 죽음이 슬픈 건 그래서일 게다. 죽은 자들의 빈 자리는 그 곁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들의 생 한복판을 공허하고 황량하게 비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히어애프터>는 바로 그 죽음을 소재로 둔 영화다.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의 기억 속에 놓인 망자들과 접속하는 조지(맷 데이먼)와 인도네시아를 휩쓴 쓰나미로 인해 죽음의 목전까지 다다랐던 프랑스의 유명 저널리스트 마리(세실 드 프랑스), 그리고 죽은 쌍둥이 형을 간절히 그리는 소년 마커스(조지 맥라렌)까지, 제각기 발 딛고 선 땅 위에서 직간접적으로 죽음과 사후를 경험한 이들의 뿔뿔이 흩어진 사연이 서로의 교감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경험의 진위와 무관하게, 죽음이란 결국 개인적인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묘사하는 영화들이 대부분 그 초현실적 영역에 환상을 뒤집어씌운 결과물로 완성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히어애프터> 역시 사후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영화들이 취하던 관습을 크게 뒤집지 못한다. 빛으로 가득 채워진 무의 영역처럼 보이는, <히어애프터>의 사후 이미지는 죽음을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설정된 결과물이라지만 결국 이 불분명한 사후의 상은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저 허구적인 이미지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고 말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히어애프터>를 관통하는 핵심이 아니다.
<히어애프터>는 죽음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담보로 영화를 신비로 치장하는 영화가 아니다. 사후라는 초현실적 영역을 실존적 경험으로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통증에 관한 드라마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각각 먼 곳에 떨어진 세 인물은 죽음에 속박된 삶을 살아간다. 무시무시한 쓰나미 이미지로 극초반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블록버스터의 재난 스펙터클 유희와 달리 <히어애프터>의 쓰나미 시퀀스가 관객에게 쥐어주는 건 극심한 통증이다. 압도적인 죽음의 물결은 빠르고 신속하게 평화로운 일상을 수장시키고 수많은 삶을 집어삼킨다. 이는 <히어애프터>가 주목하는 죽음이 단지 생 이후의 단계로서의 영역 찾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생의 상실이 야기시키는 현실적 통증을 진단하기 위한 것임을 웅변하는 첫머리 말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작위적으로 설정된 상투적 요소들이 존재한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이유가 분명한 사연을 품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매개로 한 이 개별적인 사연들이 옴니버스적인 스토리 안에 상주하고 점차 그 흐름 속에서 맞물려나갈 때, 인위적인 의도의 위장에 실패하고 있다는 인상이 감지된다. 세 개의 줄기를 엮어 넣은 <히어애프터>의 옴니버스적 스토리에 종속되며 이런 인물들의 사연은 죽음이라는 경험의 단면을 소개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에 가깝다. 죽음에 근접한 경험을 해봤거나,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목격했거나, 타인의 기억과 경험 속에 내재된 죽음을 끊임없이 감지하는 세 인물은 제각각 죽음에 대한 경험의 너비를 확장해내기 위한 요소에 가까운 캐릭터들이다. 이 영화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두른 말판과 같다면, 그 주제를 품은 이야기 속에 자리한 캐릭터들은 일종의 말인 셈이다. 어떤 주제의식을 관철시키기 위해 요소들을 조정하고 있다는 인위적인 양상이 발견되며 그로 인해 내러티브는 종종 불가피하게 산만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어애프터>는 분명 특별한 덕목을 지닌 영화다. 죽은 자와 접속하는 영매의 삶을 사는 조지의 능력은 타인에게 재능이라 여겨지지만 스스로에겐 둘도 없는 저주다.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죽음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품는 이중적인 심리를 연상시킨다. 누군가와의 접촉만으로 산 자에게 남겨진 망자의 기억을 목격하고, 망자의 전언을 전달해야 하는 자신의 삶에 진력이 난 조지는 타인을 위로하면서도 정작 스스로의 삶을 돌볼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한 마리는 삶의 기반을 상실하면서도 자신이 목격한 것들 것 대해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전달하길 멈추지 않는다. 어린 쌍둥이 형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한 마커스 역시 그 죽음이 남긴 상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 모든 인물들의 삶은 누군가의 죽음이 그 주변에서 살아 숨쉬던 이들에게 남기는 영향력의 너비를 대변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의 죽음은 곁에 있던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거나 멈춰 서게 하거나 뽑아내 뒤흔든다.
영화에서 가장 명징한 순간은 마리가 겪는 쓰나미의 스펙터클을 한 차례 경험한 뒤에 등장하는 조지의 심령술 신이다. 살아 있는 이에게 죽은 이의 메시지를 전하는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끝내 치유시킨다. <히어애프터>는 그 경직된 형식과 무관하게 보는 이의 영혼을 감화시키는 명료한 찰나들이 곳곳에 자리한 영화다. 이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관통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시선이 단순히 이미지의 연출을 뛰어넘어 어떤 정서와 조응해낸 덕분일 것이다. <그랜 토리노>를 통해서 강직한 보수주의자의 현명한 죽음을 그려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제 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산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마련했다. 죽은 이들의 영역을 갈망하는 산 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히어애프터>는 결국 사자들을 위한 송가가 아니라, 그 망자들의 곁에 머물던 산 사람들을 위한 기도에 가깝다. 죽음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되레 이를 뛰어넘는 인정의 방식으로서 그 이전의 실제적인 삶을 위로하고 구원한다. 거대한 재난이든, 사소한 죽음이든, 생사는 언제나 갈대처럼 흔들린다. 죽음은 결국 삶 이후의 영역이다. 산 사람들은 그렇게 죽음을 위로하며 제 생을 구원하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 죽음을 통해 삶을 일으키는 법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엄숙하지만 온화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멀지 않은 땅에서 삽시간에 휩쓸려 나간 수많은 생들에게 깊은 애도를. 그 곁에서 숨쉬던 모든 이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이 거대한 참사 앞에 상처 입은 세계의 영혼에 치유를.
지난 수요일 저녁부터 목요일 아침까지, 그러니까 추석 연휴를 맞이하기 전날,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사실 날을 새려고 간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다 보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친구의 얼굴은 밝았다. 하지만 그 너머에 깊게 눌린 슬픔이 읽혔다. 난 좀처럼 말을 하기 어려웠다. 뒤늦게 도착한 동창이나 선후배와 종종 화기애애하게 떠들곤 했지만 쉽게 침묵했다. 그 친구가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떠안고 있는지 섣불리 짐작하기 어려웠다. 자리를 지켜야겠다 싶었다. 덕분에 술도 많이 마셨고, 전날 외고 마감 때문에 몇 시간 잠들지 못한 나는 새벽 즈음에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감당하기 어려움을 느끼다 잠깐 눈을 붙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 지하철 속에서 꾸벅꾸벅 졸다 겨우내 집에 도착했다. 출근 시간까진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고, 1시간 정도 눈이라도 붙이자는 마음으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러다 식도를 타고 넘어오는 이물감을 느끼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토악질을 했다. 집에 와서야 나를 비트는 취기를 느꼈다. 요즘은 이상하게도 집에 와서야 취기를 직감할 때가 많다. 어쨌든 양치질을 하고 침대 위에서 정신을 잃듯 쓰러졌다. 눈을 떴다. 벨소리가 들렸다. 금요일마다 원고를 넘겨주는 선배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고 정신을 차리니, 젠장, 출근시간이 1시간 정도 넘었다는 걸 알게 됐다. 편집장님께 전화를 드리고 부랴부랴 출근준비를 한 뒤 강남역에 있는 사무실로 날아갔다. 추석 전날이라 오전 근무만 하는 날인데 지각을 했다. 머쓱했다. 편집장님의 아량으로 별 탈은 없었다.
오후까지 볼 일을 보다 버스에 짐처럼 앉아서 집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만나서 수다라도 떨고 싶었다. 온 몸에 덕지덕지 붙은 피곤에 당장이라도 넋이 나갈 것 같았지만 그랬다. 하지만 정작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네. 선약이 갑자기 깨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명절 전날이라 다들 분주했다. 아니면 그만큼 내 인간관계가 얄팍하나 보지. 그냥 그 거리에서 사라지듯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뒤늦게 발인에 참가한 친구들과 안부를 나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처음 만난 친구와 회포를 풀었던 그 자리의 기억이 선연했다. 그 자리에서 친구의 출산 소식을 전해 듣고 축하한다는 전화를 걸었던 기억도 선명했다. 누군가가 죽음 앞에 슬픔을 뉘고 있을 때, 누군가는 탄생 앞에 기쁨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역설적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겠지. 부질없는 생각이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장례식장의 분위기란 묘한 것이다. 실상 죽은 자의 슬픔이란 산 자가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위로한다는 건 산 자를 위한 일이 아니던가. 죽음 너머로 살아있는 자들은 연민을 공유하며 서로를 치유한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웃음을 나누며 서로를 위무했다. 아이러니하지만 산 자들은 죽은 자가 남긴 슬픔을 그렇게 부둥켜안으며 서로를 지탱한다. 죽음이 각별한 건 죽음에 대한 애도를 넘어 삶에 대한 각성을 일깨우는 까닭이다. 그 죽음이 남기는 건 허무가 아닌 사유다. 우린 그 사유 안에서 생을 전진시켜 나가는 것이다.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얻은 건 산 사람들과의 조우였다. 죽은 자를 위한 자리에서 산 사람들이 모여 관계를 되새긴다. 기묘한 일이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삶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친구도 살 것이다. 나도 살 것이고, 모두 다 살아갈 것이다. 사라진 사람이 남긴 기억을 흘려 보내며 산 사람들은 새로운 기억을 공유한 채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산 자들의 눈물 위로 떠내려가는 망자로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잘 살아야겠다.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후회 없는 삶을 살아보련다. 죽음을 통해 삶의 일깨움을 얻었다. 역설적이다. 산다는 게 참 그런 건가 싶을 정도로.
칸 영화제는 잘 다녀오셨나요? 만만치 않은 일정을 소화하셨을 것 같은데요. 칸에 가서 당일 하루는 쉬고, 그 이튿날 시사하고요. 그 이튿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15분 간 딱딱 끊어서 인터뷰 쭉 했고요. 영화를 보고 어찌나 박수를 쳐주는지, ‘나를 되게 좋아하나 보다’ (웃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 다음 이튿날에 한국 와서 하루 뒤에 언론시사회 하고, 오늘은 VIP시사회한다고 하는데 내가 이걸 하고 있다는 게 완전히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 하고 있네요.
체력적으로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건강 관리가 중요할 것 같은데요.
힘들어요. 되게 힘든데, 평소에 건강 관리는 하죠. 운동을 조금씩 해요. 러닝 머신도 하고, 아령 같은 걸로 하는 운동도 하고요.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운동은 하루마다 하는 건 아니고, 종종 할까, 말까, 한 시간쯤 고민하다가 슬슬 걸어가서 한 시간 반쯤 놀다가 쉬다가 그렇게 하고 오죠. (웃음) 그래도 하고 나면 '난 운동했다' 그런 기분 때문에 하지 않은 것보단 훨씬 기분이 좋아져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전 무조건 자요.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면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서요. 그냥 무조건 자요. 자지 않으면 펑펑 터질 것 같아요.
나이에 비해 피부도 너무 고우세요. (웃음)
왜 그럴까. 일단 담배피지 마세요. (웃음) 난 이제 담배 끊은 지 12년 째 됐는데요. 그때부터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20일에 한번씩 피부 케어도 받아요. 적어도 한 달은 넘기지 않아요.
봉준호 감독의 전작을 보셨나요?
<살인의 추억>은 봤어요.
어떻게 감상하셨나요?
저는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니까 영화를 극장에서 잘 안 봐요. 비디오 테이프로 나온 다음에 보니까 1년 뒤에나 영화를 보게 되는데 뒤늦게 <살인의 추억>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저런 불란서 영화 같은 영화가 있네, 멋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 즈음에 봉준호 감독과 얘기하게 되고, 정말 좋았죠. 내가 좋아했던 영화의 감독이 저에게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니.
봉 감독 별명은 아세요? 봉 테일이라고 하는데.
저도 처음 알았어요. 스태프들이 이야기해주더라고요. 본래 봉 테일이라고. 그러니까 그건 디테일하다는 말이잖아요. 정말 빈틈없는 사람이에요. 예를 들어서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어요. 이렇게 저기에 무슨 소품 하나라도 빠진 게 (머리를 가리키면서)이리로 느껴지나 봐요. 제가 많은 영화감독들하고 일해보진 않았지만 드라마도 많이 했으니까, 그냥 제 느낌으로 보자면 정말로 막 촉수가 이리저리 다 뻗쳤는데도 그게 산만하지 않게 정확히 제자리로 뻗치는 것처럼 보여서 놀랐어요.
봉준호 감독과 영화를 찍게 된다 하니 주변에 계시는 분들의 반응이 어떻던가요?
김수현 씨가 옛날에 내가 영화 하려고 할 때 “혜자씨, 영화 하지 마. 영화는 드라마와 달라서 심플하지 않은 것 같아”, 그랬는데 이번에는 봉준호 씨가 감독하니까 하면 좋겠다고 하는 거에요. 내가 특별히 누구하고 얘기한 게 없어서 그것밖에 들은 게 없어요.
단편드라마 <여>에 출연했던 김혜자 씨를 보고 봉준호 감독이 <마더>를 구상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봉 감독이 어려서부터 TV를 많이 봤더라고요. <전원일기>도 아주 다 꿰고 있어요. 식구들이 TV를 즐겨보는 가족이었대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TV많이 보고, TV에 나오는 배우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그리고 그렇게 연극을 많이 보러 다닌다고 해요. 그래서 낯 익히지 않은 새로운 배우가 필요할 때 캐스팅하죠. 좌우간 일에 대해서 열정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부지런한 감독인 거 같아요.
봉준호 감독이 본격적으로 김혜자 씨에게 러브콜을 보낸 건 <살인의 추억> 이후부터라고 들었어요. 배우 입장에서는 마치 열렬한 구애를 받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행복한 일이죠. 정말 촉망 받는 젊은 감독이 저를 갖고 어떤 영화를 기획한다는 말 자체가 배우로서 저를 너무 행복하게 하는 말이었어요. 실현이 되든, 안 되든, 그랬어요. 전 항상, “5년 전에 생각해놓고 중간에 나한테 말한 거 부담 느껴서 자꾸 진행시키려고 무리하지 마라. 난 나한테 말해준 것만으로 고맙다.” 그렇게 몇 번이나 얘기했어요. “너무 시간도 많이 가고, 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어떻게 내가 20대 아들의 어머니를 할 수 있겠냐.” 그런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 아니면 전 이 영화 덮어요.” 그러면서, “선생님 보이는 대로 찍을 거에요.” 그렇게 얘기했어요. 사람들은 김혜자 씨가 안 하면 이거 누구 시킬 거냐고 물었다는데, 그거 다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김혜자 선생님 때문에 떠오른 생각이고 만약 안 된다면 없었던 걸로 하겠다고 했다네요. 자기가 계획했던 걸 절대로 바꾸지 않더라고요.
보이는 대로 찍겠다는 말처럼 영화에서 적나라하게 얼굴이 클로즈업되곤 하더군요.
영화를 보니까 어떤 때는 너무 나이 들게 나오고, 어떤 때는 너무 젊게 나오고. 그런데 이 영화가 그냥 한 장면에 머물러서 저 여자를 관찰할 틈을 안 주는 영화에요. 그렇죠? 엄마의 나이가 상관이 되지 않는 영화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봉준호 감독도 별로 개의치 않았던 거 같아요.
자신의 표정을 구상해본 적은 없으셨나요?
거울 보고 그럴 틈은 없었어요. 수시로 감정이 변해야 되는 상황에서 거울보고 연습할 새가 있어야죠. 끝나고 나서 방에 들어와서 아까 한 걸 가만히 생각해보면서 ‘내가 아까 어떻게 했지’ 하고 가끔 본적은 있어요. 자기 전에 세수하고 와서 그걸 해보자고, 거울을 이렇게 보고 그래 봤지만 그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됐어요.
김혜자 씨만이 이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봉준호 감독의 공언이 영화를 보기 전까진 실감나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니까 그 의미를 알겠더군요. 진짜 알았어요? 아이, 좋아라. (웃음)
스크린에 쏟아져 나오는 김혜자 씨의 표정 자체만으로도 영화가 놀라웠어요. 그런데 그런 표정의 가능성을 봉준호 감독이 이미 예감하고 접근했다는 것이 더욱 놀라워졌어요.
저도 무섭다니까요. 얼마나 영리하고 천재적인 사람일까, 어떻게 나한테서 저런 게 나올 거라 예상했을까. 저도 모르게 그런 표정이 나오게 상황을 몰고 가는 거에요. 그게 일부로 거울 보고 연습해서 지어낸 표정이겠어요? 아니지. 난 깜짝 놀랐다니까. 제 눈이 이렇게 돌아가는 걸 보고, ‘어머나!’ 이랬다니까. (웃음) 왜 사람이 환장하면 눈이 돈다 그러잖아요. 진짜 눈이 돌더라니까. 모니터보고, ‘어머나, 진짜 눈이 뒤집히는구나’ 그랬지.
<마더>는 언제 처음 보셨나요.
정식으로 본 건 칸에서였어요. 여기선 떨려서 못 보겠더라고요. 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TV모니터도 제 방에서 혼자 했거든요. 내가 나오는데 누가 옆에서 한눈 팔고 딴짓하면 다 느껴지잖아요. 이러면 막 짜증나고 신경질 나기 때문에 혼자 문 꾹 닫아놓고 보고 그랬지. 근데 이제 좀 많이 둥그래져서 같이 보긴 하지만 이번에는 같이 못 보겠더라고요. 특히나 기술 시사에선 거의 완성본을 보여준다는데 불 켜고 난 다음에 사람들 표정이 어떨까 무섭고 민망해서 못 봤어요.
<마더>에서 묘사하는 어머니는 일반적인 모성상으로 이해될만한 평범한 어머니가 아니죠. 어쩌면 그 지점이 <마더>에 대한 흥미가 생길만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그런 어머니였기 때문에 하고 싶었어요. 이제 일상적인 어머니를 너무 많이 했잖아요. 물론 <엄마가 뿔났다>같은 경우는 자기를 찾으려고 애쓰는 조금 다른, 아직도 우리나라 사회에선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깨인 엄마를 연기했잖아요. 그래서 사실 <엄마가 뿔났다>하기 전까진 굉장히 공백 기간이 길었어요. 그 정도로 하고 싶은 작품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마더>도 이런 엄마였기 때문에 한 거죠.
사실 <마더>에 나오는 어머니는 어미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짐승 같죠. 애미도 아니고 어미에요. 그 여자가 화장터에서, ‘우리 아들이 안 그랬거든요’ 이러면서 눈이 이렇게 뒤집어지는 걸 모니터로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내 눈이 어떻게 저렇게 되냐고. (웃음) 그니까 그건 어미죠. 개나 짐승이 새끼 낳고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으르르하잖아요. 그런 것과 똑같이 자기 새끼를 해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 거의 짐승 같았어요, 이 엄마는.
이성적인 합리를 먼저 정립하는 것보다도 본능적인 에너지에 대한 필요성을 먼저 자구할만한 캐릭터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니까 아마 전 크게 병 날 거에요. 어느 영화보다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연기였기 때문에. 그런데 정신은 굉장히 맑아졌어요. 육체는 피곤할지 모르지만 정신은 맑아지고, 새로워졌다고 할까요.
뭔가 새로운 기운을 얻었다고 느끼시는 건가요?
땅을 일군다고 하잖아요. 저는 이 영화를 하면서 그 동안에 저한테 딱딱하게 굳어져있던 속을 다시 일군 거 같아요. 비료도 주고, 나한테 고착돼있던 어떤 생각들,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것들이 다시 이렇게 새로워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머니로서 <마더>에서 연기한 인물의 모성에 대해서 이해하실 수 있으세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자식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건 엄마밖에 없다고. 그 말은 곧 자식을 위해 죽을 수도 있지만 자식을 해치려 그러면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 돼요. 그만큼 아무 것도 안 보인다는 말이 되거든요.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론 관객들은 좀 놀라겠죠. 그렇지만 놀라면서도, ‘그래, 자식이니까 저러지’ 그러실 거 같아요. 그리고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란 애니까 측은하고, 내 목숨하고 바꿨으면 좋겠다 싶은 자식이니까. 저도 정말 걔만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책을 읽으면서부터 도준이란 인물이 너무 가슴 아픈 자식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친구라고는 동네 건달인 진태밖에 없잖아요. 정말 인간 말종이라고, 종자부터 틀렸다고 엄마가 표현하지만 마음 한편으론 고마운 거에요. 내 아들의 친구가 돼주니까.
연기를 오랫동안 해오셨지만 <마더>에서의 김혜자 씨는 기존에 보여주셨던 연기와 차원이 다른 새로운 모습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김혜자 씨께서도 처음이라 할만한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처음 해본 게 많아요. 정말. 사실 국내에서는 얼굴을 알아보니까 외국으로 여행을 많이 가도 국내에선 어디 여행을 잘 못 다녀요. 이게 서울에 있는 스튜디오에서만 찍은 게 아니고 영화팀과 같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찍었잖아요. 관광지가 아닌 곳인데도 ‘우리나라 산천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라는 걸 느꼈고, 공기도 맑고, 인정도 좋고, 그런데 사니까 두통도 없어지더라고요. 전 평생 두통을 달고 살았는데 두통도 없어지고, 서울에 있을 땐 배고픈 지도 모르고 그러는데 배도 고프고, (웃음) 그래서 밥 언제 먹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새로운 일에 대한 열정이 저한테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저는 저한테 열정이 죽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점에서 봉준호 감독한테 감사해요. 저한테 불씨만 남아있던 열정을 다시 타게 해줬으니까.
<마더>는 <마요네즈>(1999)이후로 10년 만에 출연을 결정한 영화에요. 그 사이에 작품 제의가 있었을 것 같은데 한 작품도 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같이 하자고 그러시는 분들이 몇 분 계셨지만 내가 TV에서 너무 많이 했던 비슷한 역할들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에요. 내가 우선 그런 역할에 싫증이 나는데 누가 그걸 극장까지 보러 오겠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내가 아닌 사람이 하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은 거에요. 그래서 그 분들한테, “이건 사람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사람에게 시키던가 하지, 내가 나가서 하면 무슨 흥미가 있겠느냐”, 그랬어요. 그런데 봉준호 감독은 처음부터 이건 선생님에게서부터 영감을 얻어서 기획한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안 하신다 그러면 이건 그냥 덮어버린다, 그랬어요.
결국 10년 만에 스크린으로 자신의 얼굴을 본 셈이에요. 그런 점에서도 감회가 남다르지 않았나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웃음) 예. 감회가 남다르네요. 정말로. 이제 막 생각하게 됐어요.
오랜만에 영화 현장에서 작업하는 기분은 어땠나요?
드라마 같이 쫓기지 않아서 좋았어요. 말하자면 배우의 창의력이 발휘되기 좋다는 점이 달라요.
아무래도 생각처럼 항상 연기가 잘 되는 건 아니었을 텐데요. 촬영하지 않을 때는 쉬라고 캠핑카가 마련돼있었거든요. 잘 표현이 안될 때는 그 속에 들어가서 울었어요. 답답해서. 내가 이렇게까지 밖에 표현이 안되나 싶어서.
사실 영화 속에선 우는 연기가 거의 없잖아요. 감정을 안으로 눌러 담으면서도 그걸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답답한 부분도 적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드러내야 되는 거에요. 물론 우는 것도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그래도 우는 건 울면 되니까. 눈물 없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라는데 잘 안되잖아요. 그래서 차에 가서 막 울었어요.
그럴 때 봉준호 감독의 반응은 어땠나요?
감독이 달래주러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나가라고 그랬어요. 해줄 말 있으면 문자로 해주라고. (웃음) 그랬더니 문자를 했더라고, 진짜. ‘아무리 부인해도 세상에 화날 땐 인정하세요’ 괜히 나 위로하려고 그러는 거지. 잘 안된 건 자기가 제일 잘 알잖아요. 그렇게 생각했어요. 많이 배려해주지만 자기 맘에 안 드는 연기는 추호도 봐주는 게 없었어요.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하고, 다시 하고, 그런 점이 저하고 같았어요.
문자도 하실 줄 아세요?
제가 <마더>때문에 처음으로 이 핸드폰을 썼어요. 하도 답답하니까 영화사에서 사줬거든요. (웃음) 그리고 봉 감독이 핸드폰에 취미를 갖게 하려고 문자 하는 법도 알려주고 그랬죠.
인터넷은 할 줄 아시나요?
인터넷은 잘 몰라요. 대신 우리 아들이 좋은 얘기 나왔을 땐 와서 보여줘요. “엄마, 여기 재미있는 얘기 있어. 와봐.” 그래서 읽어주다가, “이거 보려면 쑥 내려.” 그리고 딴 데 가요. 그런데 저는 내리다 보면 다른 게 나와요. 그래서, “얘!” 부르면 “아이, 참, 엄마, 그냥 보지 마세요.” 그러곤 하죠. (웃음) 그런데 나쁜 얘기는 안 보여주겠죠. 좋은 얘기만 보라고.
봉준호 감독이 아들처럼 느껴질 때는 없었을까요?
아~니, 전 그 사람 존경해요. 나이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도 그 사람 하는 거 보면 존경할 수 밖에 없어요. 정말 똑똑한 사람을 보면 존경해요. 그 분은 굉장히 천재적이고요, 정확한 사람이에요. 자기 머리 속에 확실한 그림이 서있어요. 우물쭈물하는 법이 없어요.
봉준호 감독이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는 걸 느낄만한 주문이 있었나요?
"다 좋은데 한번만 다시 해보세요." (웃음) 나도 찍으면서 봉 감독이 오케이 할 때, “아니, 나도 한번만 더해보고 싶어요” 그래도 자기가 됐다고 생각하면, “아니요, 됐어요”, 그래요. 정말 못 됐어. 진짜로. (웃음)
어쩌면 뭔가 그 이상을 끌어낼 수 있는 기대감에 계속해서 연기를 요구한 건 아닐까요.
봉 감독이 여러 버전으로 해보길 원해요. 그러니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러다 보면 저도 모르는 좋은 게 나와요. 어쩌면 틀에 박힌 듯이 할 수 있는 걸 이렇게, 저렇게 해보고 그러니까 더 재미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더라고요.
외로움을 느낀 적은 없으셨나요? 소통이 불가한 고립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그만큼 배우 스스로도 캐릭터의 고립감을 느끼면서 연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맞아요. 그런 점에서 그랬어요. 나하고 소통되는 사람이 없잖아요. 말은 하지만 누구와 말을 주고 받는 게 아니고 나 혼자 중얼거렸다가 무시당하고 그러지, 그러니까 허공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았어요.
체력적으로도 소모가 많았을 텐데요. 연기적으로 힘들다고 느꼈던 고비가 있으셨나요?
제일 힘들었던 건 뛸 때도 아니고 내 맘대로 연기가 안될 때. 아까 말한 것처럼 형언할 수 없는 표정 지으라고 써 있는데 그게 안될 때 감독은 ‘그게 바로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에요’, 라고 말하지만 어떡하란 말이야, 도대체, 지가 한번 해보라지! (웃음)
영화 안에 모호한 표현이 많더군요. 완전한 정답이나 확신을 주지 않고 의심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많잖아요.
저는 책보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책 읽을 때 행간을 읽는다고들 그러잖아요. 그런 것처럼 여기 참 숨은 그림이 많구나 싶었어요. 제 역할에 대해서, 그리고 아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애매하게 표현된 점이 있어요. 그냥 저 사람들은 모자관계일까, 아니면 모자관계이상일 수 있을까, 그런 것도 아주 그렇게 안개 속같이 표현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약간 그리스 비극 같은 생각도 들고. 남편에 대해서도 아무 언급이 없잖아요. 골방에 들어가서 사진을 찢을 때도 그 옆엔 애 아빠가 있었겠구나, 이런 암시만 남잖아요. 그러니까 이 남자를 무지무지하게 사랑한 여자였나, 아니면 어떤 사랑을 했길래 저러나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너무너무 많은 생각을 했죠. 그러다가 구상이 점점 추상으로 가는 것처럼 뭔가 구체적으로 많이 생각했다가 붓 하나 찍 긋는 것처럼 연기는 심플하게 한 거죠.
칸에서도 <마더>를 통해 다양한 평을 얻으셨을 텐데요. 아무래도 김혜자라는 배우에 대한 인식과 선입견이 뚜렷한 국내 관객의 기대나 감상과 다른 신선한 반응을 목격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달라요. 그 분들은 <전원일기>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선입견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원빈의 엄마로 받아들이는 거야. 아마 우리나라 분들은 ‘원빈이 아들이야? 봉준호가 아들 뻘 아닌가’ 그런 선입견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기자 분들 책임이야. 꼭 이름 옆에 가로치고 나이를 적어서 그렇다니까. (웃음) 나이가 배우를 결박 씌우는 거에요. 그 분들은 오히려 선입견이 없기 때문에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영화에서 굉장히 늙어 보일 때가 있지만 어떤 때는 굉장히 젊어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 나이를 너무 잘 알죠. 기자들이 자꾸 써주니까, 친절하게. (웃음) 그러니까 배우 나이는 안 쓰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냥 짐작하는 것과 자꾸 이렇게 적어놓은 걸 보는 것하곤 틀리거든요. 제가 몇 살쯤 됐다는 거야 다 알겠죠. 언제적 김혜자인데. 근데 그걸 못박아서 써줄 때와 아닐 때는 또 다를 거 같아요.
사실 중년 배우들을 주인공으로 다룰만한 작품이 우리나라에선 드물기도 하죠.
그렇죠. 그런데 자꾸 이렇게 나이 밝히고 그러니까. (웃음) 이건 농담이고요. 사실 젊은 사람들 얘기가 예쁘잖아요. 보고 나면 재미있고. <마더>처럼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연기가 요구되는 경우는 흔치 않겠죠. 그렇죠?
작품을 마치고 난 지금은 마음이 어떠신가요?
저는 꼭 작품이 끝나면 아파요. 지금은 아직 시사도 있고, 기자 분들 만날 일도 있고, 개봉하면 인사도 다녀야 되니까 그때까진 안 아플 거에요, 아마. 그런데 그게 다 끝나면 아플 거에요. 많이 아플 거에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신 적은 있나요?
맥을 놔서 그럴 거에요. 이 엄마가 떠나가면 아파요. 떠나가면서 나를 병이 나게 하고 갈 거에요. 지금은 아직도 이 엄마가 내 속에 있기 때문에 괜찮은 거겠지.
최근 인터뷰에서 레드 카펫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고 밝히셨더군요. 사실 칸 영화제 레드 카펫이라면 배우로서 한번쯤 꿈꿀만한 자리일 텐데요.
저는 이번에 <엄마가 뿔났다>하기 전에 활동한지 너무 오래돼서 백상예술대상이나 KBS 연말 대상 시상식 같은 데서도 레드 카펫을 까는지 몰랐어요. 그 때도 ‘여기 뒷문 없어?’ 그래서 뒤로 들어왔어요. 무안해서. 그건 그냥 젊은 사람들이 예쁘게 입고 관객들 즐겁게 해주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지. 저한테 그런 환상은 별로 없으니까요.
올해는 시상식에서 정문으로 들어오시겠죠.
칸에서 그랬으니까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해야겠죠. 그렇죠? 이번에도 뒷문으로 가면 저 여자는 해외에서만 저러고 국내에서는 안 그런다고 하겠죠. (웃음)
스스로 자식들에게 어떤 어머니라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자식들한테 약간 폐가 되는 엄마일 걸요. 맨날 한심한 말 하고 그러니까.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있고, 밥 좀 먹으라고 몇 번씩 말을 해야 그래, 그러면서 먹고.
보통 어머니들께서 자식에게 밥 먹으라고 하시는 게 보통인데 말이죠.
집에 가만히 있으면 배가 안 고픈 걸 어떡해. 그러니까 제가 대표적인 엄마상이라는 게 약간 어폐가 있죠. 사람들은 누구나 무엇을 하든 허상이 있다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그 동안 어머니 역을 잘 했으니까 그렇게 얘기하겠죠. 내 사생활은 엉터리였어도.
최근 출연하셨던 <엄마가 뿔났다>의 한자도 집을 나가서 안식년을 갖겠다고 선언하죠. 사실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당연한 삶처럼 여겨지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한자도 상당히 이례적인 어머니 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자는 상당히 선구자적인 엄마에요. 그런데 보통 자기 친구들도 만나면서 가끔 자기 즐거움을 찾는 주부들도 정말 안식년을 가져야 된다고 그러는데 전 거기에 대해서는 좀 생각을 달리해요. 안식년을 요구할 수 있는 엄마는 정말 가족을 위해서 자기는 하나도 없었던 엄마에요. 이렇게 저처럼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무슨 안식년이 필요 있어요? 이게 안식이지. 오로지 집에서 식구들을 위해 정말 자기를 다 바쳤다고 말할 수 있는 엄마들만 쉬는 시간을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는 건데 너도 나도 다, ‘집 잘 나왔어’ 이러는 거에요. 물론 어떤 분들은, ‘아니, 그만하면 살지’ 그러시더라만. (웃음) 어쨌든 저는 그래서 김수현 씨가 앞서가는 선구자적인 작가라고 생각해요. 이젠 그런 시대가 올 거에요. 가족만을 위해서 헌신하는 엄마는 점점 없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작품활동을 하지 않을 때는 주로 무엇을 하시나요?
공상해요, 공상. (웃음) 아니면 자요. 복잡하면 잠 오고, 깨 있으면 졸 거 같으니까 그냥 자요. 그렇게 자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니까 그 때부터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TV도 재미있는 건 보는데 어떨 땐 그냥 안 키죠. 켜면 쓸데없이 하루가 휙 가버리더라고. 얻은 것도 하나도 없이. 그래서 기분이 안 좋을 때가 있다니까. ‘뭐했을까, 하루 종일’ 이러면서. 그런데 그것도 버릇이더라고요. 눈 뜨면 TV켜버릇하면 그렇게 되요. 그런데 눈 뜨면 좋은 음악을 딱 틀어버리면 또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어떻게 습관을 들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 같아.
사람과 어울리는 것보단 혼자 보내시는 시간이 많으신가 보네요.
원래 사람들 많이 있는데 가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성격이라 그냥 혼자 있는 걸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친구가 없으면 참 불행하다는데, 저는 그런 면에서 보면 불행한 사람인 거죠. 제가 혼자 이렇게 있는 걸 좋아하니까 옆에 친구가 별로 없어요. 그런데도 전부 다 저를 보호해주려고 그러는 거 생각하면 난 참 인복이 많구나, 하나님께 감사하다, 이럴 때가 정말 많아요. 내가 이렇게 나밖에 모르고 내 안에만 갇혀서 사는데도 사람들은 날 이렇게 치유해주려고 하니까. 진짜 하나님께 감사해요.
그런데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봉사활동도 활발하시잖아요.
저는 세상을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을 만나면 힘들어요. 그런데 애들은 모르잖아요. 애들은 배고픈 거, 아픈 거, 그런 것만 알잖아요. 애들하고만 있으면 내 머리가 복잡해지지 않는다고요. 아픈데 약 발라주면 되고, 그런 것만 해주면 되지, 내가 그 사람 생각에 맞춰서 머리 굴려야 되고 그렇지 않잖아요. 전 그런 걸 못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앞에 가면 기운이 쑥 빠지면서 졸려요, 금방. 그러니까 사람들 많은데 가면 왜 그렇게 졸린 지 몰라. (웃음) 지금은 인터뷰하는 자리니까 말을 많이 하지. 말도 많이 하면 에너지가 굉장히 소진돼요. 그래서 저는 말도 잘 안 해요. 지금 내가 안 하면 안되니까 하는 거지. 잘 써달라고. (웃음)
연기자라는 직업도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일이지만 그 불편함을 상쇄할만한 가치가 있으니 유지가 가능한 것이겠죠?
저에겐 배우가 직업이기 보단 곧 저의 삶이에요. 물론 ‘어큐패이션(occupation, 직업)’ 란에는 ‘액트리스(actress, 여배우)’라고 써요. 그렇지만 전 직업이 배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냥 삶의 일부지.
연기가 삶의 가장 큰 목적이라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그니까 제 존재의 의미에요. 제가 연기를 안 하고 보이지 않을 때는 죽었다고 생각하면 되요. 살아있어도 제가 작품에 나오지 않으면 그건 그냥 반쪽의 저만 있는 거에요. 아이들 만나고 다니고, 그렇게 반쪽의 삶은 사는 거지만 배우로서의 저는 죽은 거에요.
김중만 작가의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쓰고 싶다고 종종 말씀하신다고 들었어요.
나, 그 말 젊었을 때부터 했어요. 예쁜 사진만 보면 이거 영정사진으로 해야지. (웃음) 습관처럼 입에 달고 다녀서 우리 애들이 질색을 해요. 엄마는 맨날 잘 나온 사진 보면 영정 사진 쓴다고 해서.
영정 사진을 준비한다는 건 사실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거잖아요.
저는 그러니까 항상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그리고 언제가 돼도 상관없어요, 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건가요?
저는 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죽음이 그렇게 두렵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오래 사는 게 이상하다니까요. 저희 애들은 아주 질색해. 엄마는 왜 맨날 그러냐고 그러는데 사실이 그러니까. 김중만 씨는 옛날에 한 20년 전에 알았을 때부터 사진을 잘 찍었는데 항상 그 사람이 찍어준 사진보고 이걸로 영정사진 해야지, 그랬기 때문에 그 사람이 매년 영정사진을 바꾼다고 얘기하는 거에요. (웃음)
벌써부터 김혜자 씨의 여우주연상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더군요.
저는 그런 말을 참 잘해요. 이거 찍어서 그냥 우리끼리만 봤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보는 게 두려워요. 그냥 제가 연기를 좋아하니까 우리끼리 찍어서 우리끼리만 보고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만약 나중에 상을 준다면 상 탈 때는 행복하죠. 그런데 상이 저한테는 그렇게 큰 의미는 없어요.
사실 <마더>까지 단 세 편의 영화를 했지만 그때마다 상복은 있었던 것 같아요.
첫 번째 영화 <만추>도 마닐라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탔고요. <마요네즈>는 케라라국제영화제에 갔는데 거긴 여우주연상이나 남우주연상이 없었고 작품상만 있는 영화제였어요. 그런데 말하자면 우리나라 지방영화제 같은 거니까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거기서 <마요네즈>가 그랑프리 탔어요. 유인호 감독님이 가서 타오셨는데 그쪽 신문 1면에 한 장면이 크게 나왔더라고요. 감독님이 그 신문 갖고 와서 저한테 줘서 어디다 잘 간직했는데 지금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미안해.
허벅지에 침 놓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요. 그 장면이 다양한 해석을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자신의 기억을 봉인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요.
내가 스스로를 찌르는 고통스러움을 통해 마음 속의 아픔을 잊음으로써 그 기억 자체를 잊으려고 한다고, 그냥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것만으로 나을 거란 생각은 안 해요. 아마 허깨비처럼 살 거에요. 마음은 절벽에서 이미 투신했다는 김남조 시인의 시처럼 그 아들 때문에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그냥 허깨비로 살겠죠.
결국 이 어머니 역시 김혜자 씨 본인에게 봉인되는 캐릭터가 될 거 같네요. 그러다가 언젠가 이 캐릭터를 다시 꺼내 생각할 때가 오지 않을까요.
저는 흘러간 건 잘 안 떠올리는 편이거든요. 떠올리면 자꾸 잘못했던 것들만 생각나요. 그래서 괴로우니까 안 떠올려요. 그런데 <마더>는 다른 작품보단 저에게 좀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뭐라고 설명드릴 순 없지만 앞으로도 떠오를 것 같아.
시를 많이 읽으시는 편인가요? 저는 시를 좋아해요. 짧은 단어 속에 너무 많은 뜻이 있어서.
2004년도에 출간된 저서인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에서 헤르만 헤세의 ‘행복해진다는 것’의 시-인생에 주어진 의미는 다른 아무 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를 인용하면서 이를 반박하셨던 기억이 나요.
예.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행복해질 의무가 있다는데 이런 애들을 못 봤으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 천상병 시인의 시에 이런 말이 있어요. ‘어떤 아이가 대문 앞에 울고 있다. 오줌을 싼 벌일까. 이렇게 다섯 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가 울고 있다. 그러면서 넌 왜 우니.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그런 내용의 시가 있어요. 제가 그 시를 적고 그 밑에다가 ‘선생님, 다섯 여섯 살에도 인생이 뭔지 아는 애들이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썼어요. 다섯 여섯 살에 지네 엄마 아빠가 총맞아 죽는 걸 본 애들도 있고, 이 분도 그 아이들을 못 봤기 때문에 이런 시를 쓰셨구나 했죠. 얼마나 당신이 고통스러웠으면 이런 시를 쓰셨을까.
사실 천상병 시인도 상당히 비극적인 삶을 살았죠.
그렇죠. 그 분 시가 얼마나 비참해요. ‘아이론(iron) 밑의 와이셔츠 같았다’고 하셨잖아요. 아이, 끔찍해. 정말로. 그게 다리미로 다져질 와이셔츠 같다니.
사실 그만큼 남들이 끔찍하다 말하기 쉬운 삶을 사셨죠. 하지만 한편으로 당사자의 시점에서는 그 삶을 부정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해요.
그렇죠. 하늘로 돌아갔다고, 즐거웠다고 이야기하겠다고 하셨으니까.
결국 자신의 이해에 따라 삶의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마더>의 혜자가 취한 선택 역시도 타인에게는 극악한 선택이지만 당사자에게 있어선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방편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게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때때로 자신이 이해하는 자신과 타인이 이해하는 자신의 차이를 느낄 때도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어떤 때는 ‘가면의 생’이라는 소설 있잖아요. 그런 게 생각날 때도 있어요.
CF를 통해 어필한 어머니 이미지도 강했던 거 같아요. 요즘엔 사실 출연하시는 CF는 없으신 것 같은데 제의는 꾸준히 들어오나요?
맨날 하기 싫은 CF는 끝없이 들어오는데 저는 안 하는 게 좋으니까 별로 관심은 없어요.
CF를 많이 하는 젊은 배우들이 종종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글쎄요. 다 생각이 있어서 하겠죠. CF만 많이 하는 배우도 그게 맞는 사람이 있어요. 많이 해도 별로 싱겁지 않은 사람이 있고, 많이 하면 왜 저러냐, 그런 사람이 있고 그렇잖아요. 그냥 자기 생긴 대로 사는 거 같아요. 그게 누가 충고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요. 전 누구 충고할지도 몰라요. 그리고 저도 충고 받는 거 싫어하고, 그냥 저도 생긴 대로 사는 거 같아요. 자기 생긴 만큼 사는 거니까.
꽃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꽃 좋아하죠. 저는 정말로요. 봄에 땅이 아직도 꺼뭇꺼뭇하잖아요. 커다란 소나무 밑에 시커므리한 곳에서 어쩌다 수선화가 노랗게 펴있는 거 보면 눈물이 나더라고요. 이 그늘 밑 시커먼 땅을 뚫고 네가 나왔구나, 싶어서 걔하고 얼마나 많은 얘기를 하는지 몰라요. ‘너 정말 애썼다. 기특하다. 정말로.’ 예전엔 겨울이라 복도에 들여다 놓은 자스민 한 송이가 펴서 아침에 일어나서 문을 열어보니 계단 밑에서 자스민 향기가 얼마나 많이 퍼지는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화단도 가꾸신다면서요?
화단 정말로 예뻤는데. 우리 아들이 개를 좋아해요. 개도 조그만 개가 아니고 맹인견하는 레브라도 리트리버 같은 종이니까 걔네 들이 한번 화단을 왔다 갔다 하면요, 꽃들이 다 누워요. 그래서 아들하고 맨날 싸우다 싸우다 제가 포기했어요. 꽃보다는 아들이 중요하지. (웃음) 그래서 한번은 아침에 나가서 봤더니 밤새 개를 풀어놔서 꽃들이 다 짓밟혀 있길래 제가 부은 채로 앉아서 하도 울었어요. 그랬더니 “내가 다 다시 심어줄게.” 그러더라고요. 우리 아들이. 그래서 “다시 심는 게 문제가 아니야. 얘네들도 다 생명이 있고, 생각이 있어. 짓밟혔을 때 생각 좀 해봐.” 그리고 제가 어떤 시인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러더라고요. “개들을요. 돌아다니는 나무라고 생각하세요.” (웃음) 그래서 그 다음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돌아다니는 꽃이라고. 그 대신 정원은 황폐화됐어요.
OBS에서 <김혜자의 희망을 찾아서>란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셨는데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천연덕스럽게 질문하시는 모습이 어떤 인터뷰어라도 답변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기분이 들더군요.
어머, 그걸 봤어요. 고마워요. 진짜. (웃음) 주철환 씨가 자꾸 그걸 하자고 했어요. 주철환 씨와 20대부터 친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걸 어떻게 해요. 그랬더니 할 수 있대. 그런데 제가 어떤 때는 ‘알았어, 할게요’ 그랬다가, ‘아니, 못해요’, 이걸 수 십번 반복했더니 나중에 내일 신문 보래. ‘주철환, 김혜자에게 배반당해 자살’ 이런 기사 날 테니까. (웃음) ‘진짜로 그러면 어떡하나. 에이, 설마.’ 이러면서도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한번 해보지 싶어서 했어요. 그런데 게스트 오시는 분들에게 항상 부탁하죠. “제가 원래 말하기도 싫어하는데 MC를 하라네요. 그런데 제 말을 못하니까 저 대신 재미있게 얘기 좀 많이 해주세요.” 이렇게 미리 부탁하고 그러니까 그 분들이 오히려 안쓰러워서 얘기를 더 많이 한 거죠. 물론 작가가 있었지만 그 작가가 적어준 건 이분이 이런 일을 했다는 거니까 그걸 참고만 하고 제가 아무 거나 되던 말던 물으니까. (웃음)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무장해제를 시키는 재주가 있다고. 그런데 그건 재주가 있다기 보단 그냥 궁금한 걸 물은 거에요. 끝나고 나니까 봤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네요.
주철환 대표도 봉준호 감독처럼 김혜자 씨에게 계속 러브콜을 보낸 셈인데, 누군가가 자꾸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것이 당사자에겐 때때로 놀라운 일이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어떨 땐 웃겨요. (웃음) 근데 난 주철환 씨가 한번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어서 참 좋았어요. 김혜자는 어머니 역도 잘 하는 배우다. 난 그렇게 써주는 게 좋아요. 무슨 제가 국민엄마에요, 국민엄마는. 솔직히 국민 들어가는 게 너무 많아서 싫어요. 국민오빠, 국민 아버지, 왠 국민이 이리도 많은지. 이 역 저 역 다 잘하는데 엄마 역도 잘한다, 이런 평가가 더 감사하죠.
10년 만에 <마더>로 스크린에 복귀하셨으니 차후에 영화제의가 들어올지도 몰라요.
아직 그런 생각은 안 해요. <마더>가 아직도 꽉 차있기 때문에 충분히 앓고 난 다음에 이게 어느 정도 흥행이 돼서 어느 분께서 제의를 해주신다면 그 때 가서 생각해볼지 몰라도 지금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을지 누가 알아. (웃음)
그러니까 건강 검진도 꾸준히 받으셔야,
싫어. 병 있다 하면 어떡해. 아이, 귀찮아요. (웃음) 난 괜찮아. 우리 아들이 이러면 질색해요. 그래도 할 수 없지. 난 별로 죽는 게 무섭지도 않고, 그냥 내 인생을 언제쯤 잘 끝맺었으면 좋겠어요. 그립다, 김혜자, 그 배우, 그렇게만 끝맺었으면 좋겠어. 일찍 죽고 늦게 죽고 이런 건 별로 생각 안 해요. 그러니까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거고, 그러면서 항상 작품을 하죠. 그리고 사실 몰라요. 진짜 내가 5분 후에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안담? 그런데 자꾸 이런 얘기하니까 이런 생각이 드네요. 내가 이러다 백 살까지 살면 어떻게 하나? (웃음)
비키(레베카 홀)와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지금 막 미국에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 친구 사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은 특히 남자에 대한 견해가 판이하다. 조건을 꼼꼼히 따지며 신중하게 접근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지닌 약혼자가 있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최근 새 남자친구와 이별을 겪었다.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왔지만 두 사람의 기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Vicky Christina Barcelona>(이하, <내 남자>)는 심플한 원제처럼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바르셀로나’에서 겪은 이야기다. 건축학 석사논문에 도움이 될만한 가우디 건축물을 기대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새로운 경험과 상대를 원한다. 비키와 크리스티나의 전혀 다른 꿍꿍이는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밀어낸다. 물론 그 계기는 엉뚱하게 찾아온다. 우연히 미술관에서 마주친 화가 안토니오(하비에르 바르뎀)에게 반한 크리스티나는 비키와의 식사 테이블로 찾아와 여행에 초청하겠다는 안토니오의 뻔뻔한 청을 받아들인다. 비키는 이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결국 그 여행에 합류하게 되고 그 여행은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이탈시킬 만한 비밀을 선물한다.
크리스티나의 위궤양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비밀을 얻게 된 비키는 이로 인해 자신의 일생을 뒤흔들릴만한 충동을 겪게 된다. 한편 여행을 병석에서 보낸 크리스티나는 다시 바르셀로나에 돌아와 안토니오와 연인이 된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유명한(!) 전처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가 나타나고 기묘한 삼각관계가 이뤄진다. <내 남자>는 두 개의 삼각관계를 중첩하는 세 여자와 한 남자 사이에 놓인 기묘한 사연을 펼쳐놓은 영화다. 한 쪽은 비밀에 휩싸여 있으며 한 쪽은 기묘하게 얽혀있다. 누군가에게 익히 비정상이라 불릴 만한 관계 속에서도 로맨스는 이뤄지고 일상은 반복된다.
특별한, 혹은 기이한 사연을 담담하게, 혹은 유쾌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그 사연을 대하는 영화의 관점이 한없이 사소한 까닭이다. 동시에 리드미컬한 내레이션과 경쾌한 배경음이 불미스러움으로부터 그 인물들의 행위를 구출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두드러지지 않지만 소소하게 묻어나는 유머 감각이 산재한 이 막장 스토리를 조율하는 우디 알렌의 감각적 리듬이 영화의 중심에 있다. 저마다의 감정을 이루고 동선을 펼치는 캐릭터들의 조합은 어떤 약속도 없는 이야기를 펼쳐내듯 흥미롭게 사연을 구성한다. 우연적인 감정과 필연적인 본능에 휩싸일 때 사연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튄다. 그러나 그 예기치 못한 사연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주체들을 결심하거나 체념하게 만든다.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각각 예상 밖의 경험을 얻는다. 안토니오와 그의 전처 마리아는 그 경험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그 경험을 통해 비키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가치관의 진동을 느끼고, 크리스티나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가능성을 발굴한다. 자신과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일상을 체험하거나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성을 발견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비키와 크리스티나에게 불가능한 영역을 선사하거나 선물한다. 물론 대단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경험담을 관통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 남자>가 그저 그래서 허무할 것 같은 이야기 따위는 아니다. 형태적으로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비키는 자신의 약혼자와 결혼한 채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또 다른 충동을 꿈꾼다. 하지만 그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의 인생에 미묘한 변화를 부르는 첫 번째 도미노가 된다. 약혼자와의 잠자리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거나, 아무런 재능도 없다고 믿어지는 삶에서 뷰파인더의 가능성을 찾는다. 또한 서로 사랑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믿는 안토니오와 마리아 역시 크리스티나를 통해 완전한 삼각관계(!)를 이루고 만족스런 일상을 보낸다.
우디 알렌은 항상 인물들의 작은 사연들을 관망하듯 수집한 뒤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그 세계엔 윤리적 태도보다도 결과적인 이야기의 형태만이 끝내 자리잡는다. <내 남자>도 그 과정 끝에 남는 어떤 결과만이 존재할 뿐이다. 스토리텔링은 어떤 훈계를 위해 복무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저 스토리텔링으로서 순기능에 충실하며 인물들은 저마다의 삶을 산다. <내 남자>는 그 사연이 부르는 후일담이 대단하다기 보단 순간을 채우는 관계와 사건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한 이야기다. 누군가의 흥미로운 경험담을 듣는 즐거움에 가깝다. 결국 그 이야기 속에서 한 차례 경험담을 거친 인물들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간다. 뭔가 대단한 형태의 결과를 기대한다면 한편으로 허무에 시달릴지 모를 일이나 그저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면 충분한 만족감을 얻을 만하다. 훌륭한 재담꾼의 이야기는 그저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만족감을 부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간과할 수 없는 감상포인트가 된다. 특히 페넬로페 크루즈는 남미의 태양처럼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뿜어낸다. 물론 한 가지 애석한 점은 심플하고 도도한 원제를 천박한 막장 드라마 반열에 올린 한국개봉명이랄까.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제목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도, 만족감도, 하나 같이 깎아 내릴만한 작명 센스다.
예민한 접사를 통해 누군가의 생채기를 세심하게 더듬어 가는 시선의 끝엔 영문을 알 수 없는 어떤 죽음이 존재한다. <우리집에 왜왔니>(이하, <우리집>)는 비극적이라 단정짓기 쉬운 결과를 통해 시작되는 영화다. 물론 영화엔 어떤 비극적 암시가 없다. 그 비극은 단순히 상황 그 자체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 실상 영화적 태도와 무관하다. 온전히 영화의 태도를 빌려서 말하자면 이건 비극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의 특별한 사연일 뿐이다. 그 죽음은 누군가의 기억을 다시 온전히 되돌리는 계기가 된다. 김병희(박희순)는 다시 한번 기억을 따라간다. 그 기억엔 이수강(강혜정)이 있다. 만남부터 이별까지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한 여자가 있다. 이야기도 거기서 시작된다.
김병희는 막 생을 끊으려던 참이었다. 아내를 잃은 뒤로 그에게 있어 삶이란 그저 버거운 일이었다. 세상은 감옥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삶을 포기하는 시도가 그저 처음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제 막 벽에 못을 박고 노끈을 묶어 자신의 목을 조일 고리를 만들었고 설마 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할까 잡아당겨보기까지 했던 차였다. 그리고 결심의 순간, 고통과 환희가 교차하는 그 중요한 순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겼다. 그녀가 등장했다. 거짓말처럼, 불쑥 찾아와 남의 집에서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녀는 불미스럽게 그의 결단을 또 한차례 꺾어버린다. 이수강과 김병희의 만남은 생소하듯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누군가의 인생을 급격히 틀어버린 혹은 다시 제자리로 튕겨버린 우연은 그토록 현실감 없게 일방적으로 찾아온다. 심지어 엽기적이라 느껴질 만큼 기막힌 방식으로.
현재를 축으로 차근차근 되짚어 나열되는 과거는 김병희의 1인칭 시점과 내레이션을 통해 재구성되는 시점과 이수강의 과거를 플래쉬백하는 시점으로 나뉜다. 현재에서 파생된 병렬 구조의 과거가 나란히 배열된다. 두 사연의 간격은 동떨어진 것처럼 무관하지만 동시에 현재를 떠받드는 궁극적 인과의 실마리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우리집>은 그 사연의 끝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그리고 그 사연이 무엇을 가리키며 시작되는지, 강한 호기심을 부르는 영화다. 모든 호기심의 축은 이수강이란 인물에게서 시작된다. 그녀의 정체를 비롯한 모든 행위는 물음표를 소환하지 않고선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이수강의 사연이 큰 테두리라면 김병희의 사연은 핵심에 가깝다. 관객이 <우리집>을 통해 머금게 될 호기심은 입체적이라서 흥미로운 것이다.
두 인물에게 걸쳐지는 의문은 사실상 영화 내에서 서로의 존재감을 보좌하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삶엔 어떠한 연관도 없다. 단지 밑바닥까지 내려앉은 삶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재앙처럼 다가온 진실로 인해 한 순간 좌초된 삶을 맞이한 병희와 스스로의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관계의 결렬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사회적 인물로 몰락한 수강은 헤어날 수 없는 지경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엇비슷하다. 결과적으로 그 만남은 지독한 우연에 불과한 것이지만 동거와 공모는 필연처럼 이뤄진다. 그 기이한 연대는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지만 그 비현실적인 형태 안에서 드러나는 현실적인 사연들이 감정적 동의를 구축하고 이 모든 총합이 이야기에 설득력을 덧씌운다.
정체불명의 해프닝처럼 시작된 사연이 양파껍질처럼 거듭 벗겨지며 사연의 실체에 접근할 때 얕은 호기심은 점차 깊은 연민으로 번진다. <우리집>은 분명 비극적인 사연인 까닭이다. 하지만 실상 영화는 담담하며 때때로 역설적인 유머를 장착하기도 한다. <우리집>은 너무나도 부조리한 광경을 연출하기 때문에 한편으로 해학적인 인상마저 풍기는 영화다. 그 죽음엔 어떤 불행의 기운이 감지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그 죽음은 누군가의 인생을 다시 복구시킨다. 게다가 한 여자의 오랜 착각은 누군가에게 있어서 지독한 간섭이거나 악몽이기도 하지만 실상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구실이란 점에서 연민을 부르고 한편으론 위안을 준다. 수강의 과거를 모두 벗겨낸 이야기는 핵심적으로 병희의 사연을 벗기며 핵심을 들어선다. 그 지난한 과정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의지를 되새겨버린 남자의 인생을 좌초시킨 근본을 비로소 고백한다.
지나친 우연이라 할지라도 무리가 아닌 사연에 감화될 수 있는 건 그 안에 놓인 진실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비현실적이라 믿어지는 것들을 통해 유지되고 지탱된다. 필연은 어쩌면 우연을 쌓아 올린 결과에 불과하지 않다. <우리집>은 첫인상이 낯설어 생소하지만 보면 볼수록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다. 스스로의 비극에 갇힌 이가 누군가의 담담한 비극을 마주한 뒤 자신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실상 부조리해서 불공평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수긍할만하다. 사실상 자신의 비극을 인식하는 병희와 수강의 태도가 겉보기와 무관하게 너비를 벌린 까닭이기도 하다.스토킹과 납치, 자살미수로 거칠게 포장된 사연이 너른 공감대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심지어 역설적으로 미소를 발생시키고 이를 연민까지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우리집>은 특별한 사연이다.
물론 본질적으로 사연의 형태는 여전히 비극에 가깝지만 그 비극의 중심에 놓인 자들은 죽음으로서, 혹은 그 죽음을 인지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비극으로부터 탈출한다. 물론 영화의 마지막 물음엔 답이 없다. 그건 그저 그랬기 때문일 뿐이다. 이유는 중요치 않다. 단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대부분의 필연이라는 게 어차피 우연처럼 시작되는 것처럼, 그들은 그렇게 엽기적으로 만나 애틋하게 헤어진다. 그 만남 속에서 비극은 비극을 구출하고 미련 없이 소진된다. 게다가 영화는 노숙자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공정한 시선을 견지한다. 일방적인 동정의 여지를 발생시키기 보다도 그 현실을 과감히 묘사함으로서 대안의 의지를 촉구한다. 정치적 주장이나 투쟁이 아닌 시선의 견지 자체로 하나의 쟁점을 마련한다. 이는 분명 공정한 시선이라 그만큼 깊은 배려다.
오랜만에 특별한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강혜정의 캐릭터에 대한 반가움도, 번거로운 과제나 다름없는 1인칭 나레이션을 탁월하게 소화한 박희순의 대단한 소화력도 <우리집>을 보좌하는 훌륭한 일원이다. 무엇보다도 엽기적이라 할만한 사연의 테두리 안에서 보편적인 감수성을 야기시키는 <우리집>은 황수아 감독의 데뷔작이란 점에서 분명 새로운 발견이라 할만한 성과다.
그 남자의 사전에 ‘예스(Yes)’란 없다. 오로지 ‘노(No)’만 존재할 뿐. 어떤 제안에도 거절이 뒤따른다. 심지어 물음이 끝나기 전부터 거절을 서두른다. 세 번 정도는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흔한 미덕도 아니다. 그런 그에게 ‘예스’의 삶이 찾아온다. 우연한 기회를 통해 그 남자는 어떤 일에도 무조건 예스만을 말할 것을 스스로의 마음에 서약한다. 그 뒤로 그 남자는 예스에 귀속된다. '노'밖에 모르던 그가 '예스'만을 말한다. <예스맨>의 삶이 시작된다.
은둔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칼(짐 캐리)의 행동엔 어떤 이유가 명시된다.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자기방어적 성향은 이혼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전처의 앞에서 달아나듯 사라지는 칼의 모습에서 모종의 트라우마가 감지된다. 칼은 자신에 대한 모든 관심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 노력한다. 홀로 집구석에 쳐 박혀 매일같이 DVD나 보면서도 친구의 전화엔 항상 바쁜 척이다. 심지어 오랜 친구의 약혼식마저도 귀찮다. 소통에 실패한 지난 경험이 소통을 거부하게 만든다. 타인을 통해 얻은 상처로 타인과 거리를 두는 것이 익숙해졌다. 외로움에 무감각해졌다. 집에서 홀로 DVD를 보다 죽어버린 자신을 발견한 친구들의 조롱을 악몽처럼 꾸면서도 자신의 외로움을 외면한다. 처방은 간단하다. 자신의 믿음을 역전시킬만한 계기만 있으면 된다. 다만 믿음이 필요할 뿐이다. '노'에 대한 강박처럼 '예스'에 대한 강박도 비슷한 양상이다. 미처 자라지 못한 아이처럼 삶에 대한 미숙함이 칼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진짜 성장이 필요한 사람이다. 관심에서 달아나는 법이 아니라 관심을 극복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하는 어른이다. 그런 그가 우연처럼 '예스'를 실천하다 앨리슨(주이 드샤넬)을 만난다. 삶이 변한다.
<예스맨>은 소통에 관한 이야기다. 스스로 꽉 막힌 채 살아가게 된 한 남자가 어떻게 변했고, 무엇을 알게 됐는지에 관한 가벼운 드라마다. 일종의 해프닝과 같은 사연이지만 주제는 흥미롭다. 삶을 부정의 모토로 끌고 가던 한 남자가 타의로 인한 긍정을 통해 삶을 변화시킨다는 점은 지극히 성찰적이고 시사적이다. 개인주의적인 경계를 중시하는 현대 도시 사회에서 <예스맨>은 정도차가 있을 뿐 보편적인 사연이다. 다소 작위적이고 비약적이지만 <예스맨>은 설득력 있는 캐릭터를 통해 적절한 타협점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 변화를 통해 어떤 가능성을 묘사하면서도 그 가능성의 한계를 동시에 제시한다. 소심한 듯 기괴한 짐 캐리의 연기도 설득력을 지닌다. 코미디의 기능성과 드라마의 진정성을 겸비하는 짐 캐리의 연기는 뻔한 듯 하지만 점점 자신만의 관록을 자랑한다. 종종 넘치려 하는 짐 캐리의 애드립을 적절하게 받아넘기는 주이 드샤넬의 리액션도 자연스럽다. 무엇보다도 짐 캐리의 한국어 연기가 이색적이나 반가운 묘미를 팁처럼 부여한다.
삶은 '예스'와 '노'라는 양면적 선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선택으로 삶은 가늠할 수 없다. 예스와 노가 혼재된 것이 삶이고 인생이다. 칼이 예스를 선택하고 곤경에 빠졌다가 앨리슨(주이 드샤넬)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것처럼 어떤 일방적인 선택이 우연한 행운을 가져다 줄 순 있겠지만 그 효력이 언제나 유효한 건 아니다. <예스맨>은 수동적인 인간이 능동적인 삶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노’를 일삼으며 자신의 삶을 황량하게 방치하거나, ‘예스’를 일삼으며 자신의 삶을 과도하게 전시하던 철없던 어른이 뒤늦게 자신의 삶을 어른답게 선택하는 과정을 그린다. 아이들도 성장하지만 어른들도 성장을 겪는다. <예스맨>은 로맨스를 통해 성장하는 어른을 통해 삶을 간략히 정리한다. '예스'나 '노'라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깜빡이를 넣고 달려야 할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끝없는 갈림길이 삶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삶을 가늠할만한 가장 좋은 신호는 바로 사랑이라는 것. 끝없이 충돌하고 부딪히면서도 나아가는 게 바로 삶이다.
김기덕의 영화는 항상 김기덕으로 수렴한다. 김기덕의 영화를 논리정연한 서사의 텍스트로 해석하는 건 무리다. 근래 발표하는 작품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의식의 흐름에서 비롯된 추상적 퍼포먼스를 씬과 씬 사이에 이어 붙이곤 하는 김기덕의 영화를 서사적 논리의 연속성을 염두하고 쫓아간다면 난감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것은 ‘김기덕’이란 고유명사적 자의식으로 채워져 있다. 지극히 사적인 관념 안에서 응축되거나 확장된 추상적 자의식을 추적하기란 편한 일이 아니다. 때때로 사소한 미장센조차도 잠재적 의미가 존재하리라 의심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적확한 해석은 결국 그 해석의 대상만이 지닌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관찰자의 추론은 그 의식적 흐름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김기덕의 열다섯 번째 영화 <비몽>도 마찬가지다.
차를 몰고 가던 진(오다기리 죠)은 차사고를 낸 뒤 뺑소니를 치려다 사람을 칠뻔한 상황에서 잠에서 깬다. 모든 것은 꿈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생생하여 그 현장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놀랍게도 현장엔 진짜 자신이 꿈 속에서 들이받은 자동차가 있었다. 하지만 사고의 용의자는 집에서 자고 있던 란(이나영)이다. 그녀는 집에서 자고 있다고 말하지만 차는 심하게 찌그러져 있고 무인 카메라에 찍힌 사진마저도 본인이 확실하다. 남자가 꿈을 꾸면 여자는 잠든 사이 자신도 모르게 행동한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두 사람의 관계 안에서 기이하게 뒤틀린다. 진과 란은 배타적인 성별의 육체로 구분된 자웅동체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라지만 진과 란은 그 속세의 진리로부터 타자화된 영역을 공유하고 있다. 너무나도 생생한 진의 꿈은 란의 몽유적 현실로 도래한다. 진과 란이 나란히 잠들게 되면 진이 꿈을 꾸고 란이 행동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꿈과 현실은 각자에게 역설을 부여한다. 진은 자신의 꿈을 통해 사랑했던 과거의 연인(박지아)을 찾아가지만 그때마다 란은 자신이 혐오하는 옛 연인(김태현)에게 무의식적으로 발길을 옮긴다. 남자는 잊지 못한 사람을 매번 꿈으로 찾아가지만 여자는 지우고 싶은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대면하고 돌아온다. 진의 가상적 행복은 란의 현실적 불행으로 중첩된다. 마치 이란성 쌍생아의 육체를 지닌 도플갱어(Doppelganger)처럼 그들은 서로를 배반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두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라는 의사(장미희)의 진단처럼 두 사람의 육체는 하나의 자아를 나눠 담은 일종의 경계와 같다.
흰색과 검은색은 같은 색이다(白黑同色). 두 사람의 분리된 삶은 별개의 자아가 꿈꾸는 배반적 욕망이다. 진과 란은 사랑으로부터 잉태된 배반적인 감정의 형태로 구현된다. 꿈과 현실의 괴리만큼이나 사랑이란 감정의 양극단에서 진과 란은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감싼다. 하나의 욕망이 두 개의 극단적 자아로 분리될 때 그 이룰 수 없는 감정은 두 개의 욕망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하나의 욕망에서 비롯된 두 개의 자아는 서로를 배반하는 형태로 동떨어지려 하지만 결국 자석의 다른 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는 운명으로 점철된다. 결국 진과 란은 동일한 감정이 형성시킨 극단의 양태로 물화되지만 비로소 하나의 운명으로 점철되어 완전한 일체를 이룬다.
<비몽>은 김기덕 감독의 자의식이 해부한 로맨스의 추상적 견해, 혹은 그로부터 건축된 로맨스의 피상적 추론이다. 강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추상적 이미지는 때때로 그 안으로 매몰되듯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의지로 상징적 의도들을 일관된 양식으로 건축해나간다. 남자와 여자, 꿈과 현실, 그리움과 혐오, 재회와 이별, 삶과 죽음. <비몽>에서는 대립적인 형태로 구현된 심리적 잠재태들이 구체적인 양태로 나열되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두 개로 양분된 육체적 자아로서 내면의 너비를 구체화한다. 하나의 감정을 완성하는 양면의 육체가 서로를 향할 때, 그 지난한 사랑도 완전해진다. 잠을 자는 것과 죽는 것이 다르듯, 꿈과 현실로 양분된 극단의 욕망은 비로소 자신의 육체를 소멸시킨 후에야 완벽하게 교감한다. <비몽>은 극단적인 수난을 통해 정신적인 변태를 거듭한다는 김기덕 감독의 양식적 지론이 부분적으로 날것처럼 복원된 작품이다. 그는 여전히 육체적 피탈(避脫)의 경지를 꿈꾸는 열반의 지향점을 그린다. 상징적인 욕망들로부터 구현된 화법은 여전히 김기덕으로 수렴하는 <비몽>은 개인적인 의식에 충실한 만큼 사적인 사유 속에 갇혀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칭구도의 문학적 발상에서 비롯된 상징성은 극단적인 구체화를 거쳐 우아한 시적 양식으로 거듭난다. 궁극적으로 잿빛과 같이 출발되던 세계관은 고요하게 투명해진다. <비몽>은 흑백의 조화처럼 이상적인 공존을 꿈꾸고, 현실로 투영한다. 그 안에서, 얇은 삶 하이얀 죽음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꽃망울들이 눈물이 번지듯 이지러진다. 구름이 이동한다. 바람이 분다. 화창한 어느 날, 대기는 평온하다. 17살 여고생 다이아나(에반 레이첼 우드)와 모린(에바 아무리)이 화장실에서 난데없이 찾아온 죽음의 기로에 당면한 그 순간에도 대기는 평온하다. <인 블룸>은 몽환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 안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다이애나와 모린의 급박한 상황을 비춘 뒤, 그로부터 달아나듯 15년 뒤의 다이애나(우마 서먼)를 등장시킨다.
총기난사사건 15주년 추도식을 예고하는 힐뷰고등학교 교정 앞에 선 다이애나의 얼굴에 그늘이 서린다. <인 블룸>은 15년 전 다이애나가 그 급박한 기로에 닿기까지의 이전에 해당하는 과거완료진행형의 대과거시제와 15년 후 그 상황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현재진행형의 현재시제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간다. 다이애나의 잃어버린 15년은 흔적이 없다. 그녀에겐 단지 15년 전과 15년 후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부터 의문은 시작된다.
<모래와 안개의 집>을 통해 삭막한 부동산 경제 법칙에 고립되고 잠식되어가는 인간의 내면적 갈망을 포착했던 바딤 페럴만 감독의 <인 블룸>은 또 다른 인간의 갈망을 그린다. 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버지니아 총격사건, 더 앞서서 콜럼바인 총기난사사건이 떠오른다. 좀 더 규모를 키워보자면 그라운드 제로 앞에 묵념하는 미국인들의 포스트 9.11 증후군의 잔상이 어린다. 하지만 <인 블룸>에서 그런 구체적인 현실적 예시문을 언급하는 건 그리 썩 좋은 일이 아니다. <인 블룸>은 현실을 명징한 영화적 소환이라기보단 어느 가상을 통해 고찰하는 현상적 신비다.
현재와 과거가 반복되는 영화적 서술형태는 단지 서사적인 거리감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두 개의 평행적인 서사는 실마리를 알 수 없는 15년 간격의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묘하게 대칭적인 뉘앙스를 풍기거나 서로 간에 꼬리를 물 듯 연계되는 속성을 지닌다. 마치 그건 어떤 염원에서 비롯된 염사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그 15년 전 그 상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TV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조차 거부감을 느끼는 다이애나는 현실에서 자신의 과거를 되새기거나 혹은 현실의 타인에게서 자신의 과거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일련의 태도나 행위를 목격한다. 또한 현실의 다이애나가 겪는 착시와 환각은 묘하게 과거와 연동되고 과거와 현재 사이를 잇는 씬도 긴밀하게 교차되곤 한다.
영화의 끝은 시작과 같다. 그 끝은 시작의 평온함과 달리 커다란 울림을 동반한다. 15년 전과 15년 후의 균형을 유지하던 그 결정적 순간에 대한 진실이 폭로될 때, 우아하면서도 지독하게 아련하여 서글픈 여운이 슬프고도 고요하게 밀려온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기에 심정적인 변화가 극단적으로 실감난다. 죽음 앞에 직면한 자의 삶의 요구가 간절하게 적시된다. 찰나가 영원으로 번져나가고 정체가 모호하던 현실의 환각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과거를 명확하게 비춘다. 일생은 너무 짧다. 하지만 그 일생의 끝은 너무도 길다. 삶은 죽음을 대면하는 순간 지독하게 간절해진다. ‘만약’은 유령과도 같은 단어다. 그것은 현실에서 이미 죽어버린 시간을 추모한다. <인 블룸>은 그 유령 같은 시간을 처연한 신비에 담아 고찰한다.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는 순간에도 꽃은 피고 진다. 고요한 세상 안에서 삶과 죽음은 찰나를 오가며 교차된다. 삶은 죽음 앞에서 더욱 빨갛게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