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대통령을 지지하는 북군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미국에서 승리에 도취된 북부인들의 분노를 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극을 관람하던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 초유의 대통령 암살을 겪게 된 북부인들은 암살에 가담한 용의자들을 추적해서 체포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해내고 재판석에 앉힌다. 그 가운데에는 용의자들의 아지트를 제공하고 그들을 후원했다는 혐의를 얻었으나 이를 부인하는 여인, 메리 서랏(로빈 라이트)이 자리하고 있었다. 변호사 출신으로 전쟁에 참전한 북군 장교 프레데릭 에이컨(제임스 맥어보이)은 친분이 있는 변호사 출신의 장관 리버디 존슨(톰 윌킨슨)의 요청으로 그녀의 변호를 맡게 된다. 덕분에 링컨의 암살자를 변호하게 됐다는 차가운 시선을 얻게 된 그는 개인적인 신변의 어려움을 겪어나가면서도 그녀의 주변을 조사하던 중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된다.
링컨 암살 사건 이후, 그 암살자들을 법적 제도로서 처리하는 과정을 그린 <음모자>는 법정을 배경으로 두고 있으나 법정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물론 죄의 유무를 가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젊은 변호사 에이컨이 거짓 증언을 가려내고, 북군 정부의 일방적인 처벌적 음모를 분쇄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그리고 이는 법정 스릴러로서의 서스펜스보다도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인물의 노력에서 새어 나오는 숭고함과 편견이 섞인 관점으로부터 벗어나서 객관적인 시각을 회복하게 되는 인물의 변화와 성장을 지켜보는 과정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흥미를 유발시키는 방아쇠는 바로 진실의 여부에 주목하는 영화의 관점 자체에 있다. 뒤집기 어려운 결과를 향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이의 행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서스펜스가 된다.
<음모자>는 이미 정해진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사건에 얽힌 진실 그 자체를 조명해내는 사실적 진술에 전력을 쏟는 역사물이다. 남북전쟁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것을 시작으로 그 시공간을 장악하고 있던 일방적인 관점과 그 관점에서 발전된 광기적 현상에 초점을 맞춰낸다. 미국 최초의 여자사형수이기도 했던 메리 서랏이 누명을 쓰고 사형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정해진 결과를 재현하고 있는 이 영화가 법정 스릴러로서의 장점을 얻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장르적 특성보다도 보편적인 가치를 논하는 이 영화는 그만큼 정직한 문법과 성실한 기술로서 뚜렷한 형태를 완성하고, 묵직한 무게를 얻어낸다.
무엇보다도 실화의 재현에 주목하고 있는 이 영화가 흥미를 부르는 건 그것이 단순히 그 시대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녀사냥에 가까운, 법치적인 제도를 통해서 이루는 반법치적인 처벌은 <음모자>가 재현하는 그 시대의 전후로도, 미국 이외의 수많은 땅 위에서도, 전세계적으로 종종 발견되곤 하는 인류의 부조리한 역사적 단면에 가깝다. 대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묵살하고, 국가적 명분을 위해서 인간 본연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는 인류가 쌓아 올린 역사 안에서 거듭 발견돼 왔다. 실존인물에 대한 서사와 실제적인 음모론의 풍경을 묘사해온 바 있는 로버트 레드포드는 <음모자>를 통해서 또 한번 거대한 명분에 짓눌려야 했던 어느 개인의 비극적인 역사를 들춰낸다. 특별한 기교보다는 우직한 정면승부처럼 나아가는 이 작품은 시대와 사건을 관찰하는 작가의 관점과 시선을 통해서 나름의 멋을 얻어낸다. 연륜과 패기, 이 빤한 수식어가 잘 맞아떨어지는 로빈 라이트와 제임스 맥어보이의 조합은 어쩌면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준수한 볼거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
자, 다시 한번 거대로봇들이 지구를, 엄밀히 말하자면 미국 도심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지구를 구하(고 있다고 말하)는 시간이 왔다. <트랜스포머 3>는 지구를 링으로 삼아 벌이는 살아있는 로봇들의 불꽃 튀는 전투 영화다. 이 시리즈가 지닌 최고의 볼거리는 바로 그 대형 변신 완구 로봇들이 펼치는 치열한 몸싸움에 있다. CG기술의 진화를 통해서 완구 로봇에 숨을 불어넣고 LA도심 한복판에서 벌이는 육탄전을 통해서 새로운 시각적 롤러코스터 장난감을 개발하는데 성공한 할리우드발 롤러코스터는 또 한번 살아 움직이는 로봇의 위용을 앞세워 전세계 관객을 현혹시킬 채비를 하고 있다.
짚고 넘어가자. <트랜스포머> 시리즈가 기대를 모으는 이유는 단 하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이언 갑옷을 피부로 입고 있는 거대 변신 로봇들이 격돌하는 스펙터클한 액션을 볼 수 있다는 것. 사실 시리즈의 시작점이 된 <트랜스포머>가 공개될 당시에는 매끈한 스포츠카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광경만으로도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변신 로봇이라는 유례없는 영화적 소재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센세이션한 이벤트였다. 이 보기 드문 볼거리를 두르고 있는 서사의 병풍 따위는 그저 수단에 불과했다. CG의 발전으로 개척된 이 신세계적인 볼거리는 서사의 수준 따위를 깡그리 무시하고도 남을 만큼 위력적인 것이었다.
또 한번 전세계 박스오피스를 정복해내겠다는 야심으로 무장한 이 세 번째 속편의 맥락은 지난 전편들과 딱히 다를 게 없으며 새로울 리 없다. 중요한 건 무엇을 또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관객들의 기대감을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는가였을 것이다. 하지만 3편에 다다르기까지 이 시리즈에서 극명하게 업그레이드된 건 변신 로봇들의 가짓수를 늘려 새로운 볼거리의 너비를 넓히고 그 로봇들의 기능과 성능을 충분히 전시하며 시각적 카타르시스를 충족시키는 것보다도, 지구 방위대로 전락한 외계 로봇들의 지구 수호에 관한 서사를 비범하게 수식하는 작업이었다. 2시간이 넘는 첫 작품 이후로 두 편의 속편이 2시간 30여분에 달하는 거대한 러닝타임을 얻게 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 로봇들이 평화주의자와 호전주의자로 갈려 지구를 걸고 결투를 벌인다, 는 1편의 서사는 점차 친지구인 로봇 오토봇과 반지구인 로봇 디셉티콘으로 나뉘어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는 2편으로 나아갔고, 3편에 다다라 달의 표면과 지구인 숙주론까지 닿는 외계 음모론의 수준으로 확장된다.
팔릴만한 볼거리의 생명 연장을 위해 서사의 연결고리를 이어나가는 기획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고민의 몰두가 시리즈의 연속적인 기획 위에서 필요 이상으로 판을 벌리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특히 <트랜스포머 3>가 이런 인과를 설명하기 위해 제공하는 정보량은 과부하 수준에 가깝다. 음모론에 얹힌 서사의 설정은 흥미롭다. 인류의 달 진출이 비확인물체의 달 불시착을 확인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며 그것이 외계 로봇들과 깊은 연관이 있었노라는 서사의 착안은 이 세 번째 시리즈의 필요성을 어필할만한 흥미로운 떡밥이다. 문제는 이 시리즈가 자신들이 지닌 최고의 장점 대신 불필요한 설명과 설정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일 게다. 단적으로 말해서, 세 번째 속편에 다다른 이 시리즈에서 인간들의 위치란 로봇들의 한판 승부를 위한 작은 조연들에 불과하다. 그런 인간들, 더 정확하게 지목하자면 샘 윗윅키(샤이아 라보프)의 활약상이 로봇들의 활약에 비해 보다 도드라지는 이번 시리즈의 서사 안배는 달의 뒤편에 대한 의문보다도 미스터리하다.
무엇보다도 같은 것을 거듭해서 재확인하고 있다는 시각적 피로감 역시 <트랜스포머>라는 시리즈가 지닌 오락적 흥미의 한계를 확신하게 만든다.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로봇들의 스펙터클의 첫 번째 목격 이후로 두 편의 시리즈를 통해 얻어낸 건 보다 거대한 파괴적 행위로 나아가는 로봇 스펙터클에 불과하다. 딱히 로봇들의 육박전 시퀀스의 물리적 너비가 늘어나지 않은 가운데 지난 작품들에 비해서 러닝타임이 확대된 이번 작품에서는 그만큼 상대적으로 그 특별한 볼거리를 즐기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인내력이 보다 요구된다. 심지어 <트랜스포머 3>는 본격 로봇 영화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헷갈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디셉티콘의 모선들은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키고, <트랜스포머 3>의 끝에 가 닿는 감상은 <인디펜던스 데이>의 그것과 유사하다. 육중한 로봇들이 화끈하게 뒤엉켜 구르는 광경을 지켜보는 재미는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동어반복적이라 식상해진 감이 없지 않으며 그 결정적인 볼거리를 즐기기 위해서 감내해야 할 시간이 길다. 낭비적으로 확장된 서사 속에서 시간 죽이기가 이처럼 어렵다는 것을 거듭 체감하게 된다.
3D비주얼은 어쩌면 새로운 이미지를 개척하기 어려워진 이 시리즈의 유용한 도피처였을 것이다. 때때로 이는 효과적이다. 커다란 아이맥스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입체적인 비주얼로 구현되는 로봇들의 위용은 분명 이 시리즈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볼거리다. 하지만 역시나 로봇이 빈 자리에서는 3D도 무용지물이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인간들의 고군분투는 <트랜스포머>라는 이름 아래 사족과 같다. 그러니까 샘 윗윅키의 삼각 관계나 디셉티콘에 맞서서 비범하게 활약하는 인간들의 무용담 따위보다는 로봇의 변신 시퀀스 하나라도 더 보는 게 관객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라는 것이다. 소총부대와 토마호크 미사일을 동원해서 로봇을 사냥하는 감동적인 인간 승리 따위를 바라는 게 아니지 않나. 오른팔을 내주고도 지는 법이 없는 옵티머스 프라임의 간지나는 결투 장면을 보기까지 너무도 오랜 인내력을 요구한다니, 심지어 그것은 전편에서 옵티머스 프라임이 펼치는 3:1 결투 장면보다도 짧고 밋밋하다. 그러니 보는 입장에서 지치고 피로해질 수 밖에.
폭력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거대한 포화로 폐허가 된 전장에서도, 어느 집 골방의 남녀 사이에서도 크고 작은 폭력들이 자라나 저마다의 상흔을 남긴다. 소통의 불가해, 가치관의 차이, 수많은 부조리와 편견의 그늘 아래서 숱하게 자라난 폭력들은 각각의 세계에 흠집을 낸다. 그 상흔을 치유하는 것은 결국 그 폭력의 뿌리이자 근원인 인간이다. <인 어 베러 월드>는 자신들에게 가해진, 혹은 자신들이 가한 폭력의 역사에 화해를 처방하고, 치유를 행하는 인간들의 행위를 그린 휴머니즘 드라마다.
영화는 두 공간을 응시한다. 두 공간을 잇는 건 의사 안톤(미카엘 페레스브란트)이다. 덴마크에 거주하는 그는 아프리카의 난민 캠프를 찾아가서 그곳에 거주하는 난민들의 상처를 돌보고 통증을 다스린다. 하지만 힘없는 이들에게 거친 폭력을 자행하는 이들의 테러 앞에서 그는 무기력하다. 그리고 아픈 이들을 돌보고자 먼 이국으로 향한 의사는 그러한 무기력을 안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어린 아들 엘리아스(마쿠스 리가르드)가 있다. 그는 아들을 사랑한다. 아들도 아버지를 따른다. 하지만 아들은 학교에서 어린 학우들의 폭력에 시달리는 중이다. 안톤 역시 부인 마리안느(트리네 뒤르홀름)과 별거 중이다. 그런 엘리아스 곁에 크리스티안(윌리엄 요크 닐센)이 나타난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크리스티안은 엘리아스를 괴롭히는 무리들을 폭력적으로 응징한다. 크리스티안은 폭력적 불의에 폭력적 정의를 행사하는 것이 옳다고 믿고 있다. 크리스티안의 아버지 클라우스(율리히 톰센)는 아들을 사랑하며 또 걱정한다. 하지만 그 아들은 아버지를 증오한다. 증오가 깊어지는 만큼 폭력적인 복수에 대한 믿음은 광기로 웃자라나간다.
아프리카에서 자행되는 무질서한 폭력과 평화로운 덴마크 속에서 살아가는 한 소년의 폭력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폭력은 타인에게 폭력을 전이시키고, 상처를 입힘으로써 또 다른 폭력을 잉태한다는 동일한 현상 안에 놓여있다. 수잔 비에르는 두 세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간극을 평등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평행하게 배치함으로써 현상을 야기시킨 본질을 발췌해낸다. 인권에 대한 의식이 전무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테러 행위나 발전된 문명 속에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서방의 한 국가에서 자라난 한 소년의 원초적인 복수 의식은 분명 다른 기질의 본질에서 출발하는 폭력이며 그 폭력의 양태도 전혀 다르다. 이 작품은 전혀 다른 두 세계 속에서 발전해나가는 폭력의 현상을 관찰하게 되는 한 인물의 동일한 시선을 통해서 그 폭력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인 어 베러 월드>는 폭력의 근본적 문제를 진단하기 보단 그 폭력에 대응하는 인간의 방식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폭력에 맞서는 폭력은 당장의 폭력적 사태에 있어서 강력한 제어력을 발휘하지만 결국 새로운 폭력의 전이로 나아간다는데 있어서 결국 폭력에 대한 패배나 다름없다. <인 어 베러 월드>는 어째서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명제에 관한 정해진 답변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지 순수한 이상으로 점철된 답변을 내놓기 보다는 그 폭력에 대응하는 폭력적 복수의 되돌이표적인 현상이 어찌하여 방관될 수 밖에 없는가라는 물음에 관한 충실한 답변이기도 하다. 비폭력적인 대응, 화해와 용서에 관한 주장을 펼치면서도 그것을 무기력하게 주장하기 보단 그것의 현명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만연하는 폭력 앞에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세계와 잠재적인 폭력의 씨앗이 방치되는 세계, 극명한 문명 이기의 발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세계 속에 자리한 폭력은 결국 동일한 상흔을 남기고 파괴를 부른다.
중요한 건 결국 그 폭력에 맞서는 이들의 의지와 헌신에 달렸다. <인 어 베러 월드>는 제목 그대로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는 방식에 관한 강인한 답변이다. 폭력에 맞서는 가장 큰 복수가 더 큰 폭력이 아닌 그 폭력조차 무력화시킬 수 있는 인내와 의지임을, 그리고 주먹에 맞서는 화해의 손과 포옹의 체온이 결국 이 세계를 그 폭력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궁극의 수단임을 이 영화는 뚜렷한 응시로서 주장하고 있다. 저마다의 인물이 짊어진 갖은 감정의 굴레를 드라마틱한 내러티브로 직조해낸 수잔 비에르의 화술은 직설적인 주장 대신 설득력 있는 예시로서 보다 유용하다. 또한 그 예시 속에서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해내는 배우들의 공헌도 뛰어나다. <인 어 베러 월드>는 좋은 의도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좋은 언어를 동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음을 깨닫게 만든다. 더 나은 오늘은 끔찍한 어제를 여러 번 거친 뒤에야 이뤄진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험난한 세계를 거쳐왔다. 중요한 건 결국 그 믿음을 향한 헌신인 것이다. <인 어 베러 월드>는 바로 그 믿음과 헌신을 통해 이룬 사랑과 용서, 포용을 설득해낸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폭력에 관한 가장 강력한 복수일 것이다.
<슈퍼 에이트>를 이루는 줄기는 이렇다. 결핍과 불화가 잠재된 가족 내에서 성장하는 소년, 거대한 기차 탈선 사고, 미스터리한 실종과 도난 사고의 연속, 군이 개입된 정부적 음모론, 그리고 무시무시한 미지의 존재. 하지만 <슈퍼 에이트>라는 제목의 의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을 누군가에게 보다 중요한 정보는 따로 있다. 슈퍼 8mm 카메라로 영화를 촬영하는 아이들. <슈퍼 에이트>라는 제목의 출처는 이렇다. 아이들의 영화 찍기는 <슈퍼 에이트>가 품은 갖은 요소들의 변두리를 돌면서도 언제나 그 모든 요소들로부터 동떨어지지 않은 채 존재하는 행위다. 이는 동시에 이 영화의 태생적인 목표를 대변하고 그 야심을 담고 있는 도구를 겨냥한 제목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슈퍼 에이트>를 이루는 이 모든 줄기들로부터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면, 아마 당신은 최소한 80년대 즈음에 개봉하거나 TV로 상영된 인기 외화를 보고 자란 세대일 것이다. <슈퍼 에이트>는 80년대를 주름잡던 앰블린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다양한 자양분을 뿌리 삼아 자라난 오마주 덩어리다. J.J.에이브람스가 연출을 맡았지만 제작을 맡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향력이 더욱 농후해 보이는 앰블린의 21세기적 재현에 가깝다. <E.T>나 <구니스>와 같이, SF와 어드벤처의 자양분이 가족영화라는 테마 안에서 귀결되고 적절한 성취를 거두던 그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련된 서스펜스와 현대적인 스타일이 결합된 오늘날의 감각을 자랑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J.J.에이브람스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 같다. 이 작품에서 에이브람스는 스필버그의 자장 속에서 자란 자신의 추억을 환기하는데 여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지 그 오랜 추억의 재현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과 감각을 동원해 그 오래된 세계를 오늘날의 취향에 걸맞은 것으로 치장해낸다. <E.T>와 <클로버필드>의 조우라고 불릴 만한 이 작품은 고전적인 할리우드 가족영화의 감수성을 현대적인 엔터테인먼트의 감각으로 끌어올린다. 타이틀 시퀀스로부터 15분여 만에 등장하는 기차 탈선 사고의 스펙터클 이후로 관객들에게 정체불명의 의문을 쥐어준 영화는 이를 방치한 채 아이들의 영화 찍기에 관한 사연에 집중하면서도 종종 그 의문을 좀처럼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미끼를 던져나간다.
일명 ‘떡밥의 제왕’이라 불리는 에이브람스의 술법은 <슈퍼 에이트>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의 흥미를 극대화시키고 달아나버리는 맥거핀으로 집중되기 보단 다채로운 영화적 요소들을 한 자리에 엮어내는 매듭의 역할을 해낸다. 아이들의 영화 찍기는 거대한 사고의 목격으로 이어지고, 이는 거대한 음모론에 관한 의문과 추적, 미스터리한 존재에 관한 서스펜스로 확장된 뒤, 미지의 세계로 탈출해버린 뒤, 그 모든 요소들을 감싸고 있던 인물들의 화해로 귀결된다. 에이브람스가 단지 관객의 호기심을 낚아내는데 능한 재주꾼 정도로 인식했다면 이 영화를 통해서 그의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해도 좋을 것이다. 조각처럼 펼쳐진 소재들을 하나의 줄기로 이어나가는 에이브람스의 화술은 <로스트>나 <프린지>와 같은 ‘미드’에서도 유효했으며 새로운 <스타트렉>시리즈를 프리퀄과 시퀄의 평행우주로 띄우는데 혁혁한 공헌을 한바 있다.
대단한 스펙터클을 전달하는 기차 탈선 사고는 미스터리한 의심과 연동되고, 어떤 식의 추측은 가능하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미지의 존재의 파괴적 행위를 의문스럽게 전시하며, 이 모든 사건에 개입하는 군의 행위는 음모론적인 추측을 낳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슈퍼 에이트>는 한 소년의 성장을 비추는 드라마다.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갈등하던 소년은 자신의 취향과 친구들과의 영화적 작업을 통해서 모험에 뛰어들게 되고, 사랑을 깨닫게 되며 이를 위해 뛰어든 위기 속에서 미지의 세계와 조우한 뒤, 자신을 비롯한 모두를 구원한다. 앰블린 엔터테인먼트의, 그 가운데서도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절대명사의 장르를 채운 다양한 양식들로 병풍을 세운 <슈퍼 에이트>는 에이브람스 특유의 감각과 화술을 통해 긴장과 유머를 넘나들고 끝내 순수한 감동을 건져낸다.
우연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갖은 사건을 건너는 동안, 필연적인 결과물의 완성에 다다른다. <슈퍼 에이트>에서 액자처럼 자리한 아이들의 영화 만들기는 사실 이 영화의 본체와 같다. 대단한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아이들의 영화는 이 영화의 끝에 다다라 소품처럼 전시된다. 그리고 어쩌면 <슈퍼 에이트>는 이 소품을 전시하기 위해 건너는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영화를 되새긴다는 것, 즉 누군가의 과거 속에 자리한 추억의 현시. <슈퍼 에이트>는 추억을 위한 영화다. 그 추억이란 결국 영화관람의 행위에 관한 것이며 그 행위의 기억을 통해서 추억될 수 밖에 없는 어떤 작품들에 관한 언급으로 재생되는 것이다. 결국 <슈퍼 에이트>는 바로 당신이 기억할만한 혹은 기억해낼 지난 날의 추억들을 환기시키는 도구인 셈이다. <슈퍼 에이트>는 추억마저 낚아내는 에이브람스의 슈퍼 탤런트로 엮어낸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재현이자 재해석인 것이다.
젊은 남녀가 만났다. 우연한, 하지만 필연적인 만남이었다. 몸을 섞었다. 남자는 그것이 일발적인 우연이라 여겼지만 여자는 운명을 원했다. 여자는 상처 입었고, 남자는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둘은 만났다. 서로 닮아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보다 절실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만남은 마냥 설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어떤 선을 넘어섰고, 그것이 자신을 해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문제는 여자였다. 여자 자신에게도, 남자에게도 그 만남은 독이 든 성배였다. 하지만 이미 세상의 끝까지 내몰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는 그 만남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상일 감독의 <악인>은 너무도 담담하여 되레 끔찍하게 처연해지는 영화다. 제목 그대로 어떤 악인을 그리는 이 작품은 오히려 극명하게 악인으로 내몰린 이가 몸담고 있던 세계를 조명함으로써 명료하게 가로지를 수 없는 선악의 경계를 묻고 답한다. 쭈뼛하게 선 머리칼처럼 예민한 소설의 문체는 의뭉스럽고 건조한 낯빛의 영상 기법으로 변주되어 스크린에 투영된다. 소설에 내재된 장르적인 서스펜스나 냉소적인 태도보다는 좀 더 진지한 관찰자로서의 시선이 견지된 영화는 원작에 비해서 감성적인 여운이 깊게 확보됐다.
스릴러나 추리물에 걸맞은 소재를 지니고 있으며 극초반의 전개 방식 또한 그러한 의문을 발생시키는 형식으로 진전되고 있지만 <악인>은 서스펜스를 위한 무대가 아닌, 멜로적인 감수성이 보다 짙게 드리운 작품이다. 세상의 끝에 내몰린 듯한 두 남녀가 만나 서로에 대한 절실함으로 진짜 세상의 끝에 다다를 때, <악인>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그 흔한 논리로도 어찌할 수 없는 로맨스의 깊고 너른 영역을 대변해낸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악인’이라고 규정된 인물이 그 ‘악인’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정황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인물들을 비추는 과정을 통해서 진짜 악인의 실체를 드러내고 그 악인을 둘러싼 세계의 참상을 비춰낸다.
<악인>에서의 피해자들은 동시에 가해자들이고, 가해자들은 결국 피해자들이다. 그들은 누군가로 인해 삶이 망가진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망쳐버린 가해자이기도 하다. 무언가에 대한 소중함이나 절실함이 사라진 상실의 시대, 그 속에서 무언가를 아끼고 바라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이 내던진 말 한마디에 내몰리다 때때로 악인이 되어 그 세계로부터 달아난다. <악인>은 그 상실의 시대 속을 살아가던 어느 남녀가 만나 이루는 처연한 로맨스다. 서사적 흐름, 소재의 착상, 주제의식 등, 전형적인 멜로의 문법과 동떨어진 이 작품은 그런 여건을 통해서 보다 신선한 흥미를 자아내지만 끝에 다다라 결국 어느 멜로보다도 짙고 아득한 여운을 드리워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악인>은 그런 감정의 깊이를 통해서 선악의 경계를 보다 강렬하게 사유해낸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 드러나는 직설적인 강변은 <악인>이 다다르고자 했던 궁극적인 끝일 것이다. 세상의 끝에 다다라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두 남녀의 감정을 허물고 붕괴시킨 단초의 씨앗을 향해 영화는 경고하고 또 질타한다. 너무나도 순진한 명제라서 되레 잊거나 무시하는 이들에게 요구하는 극렬한 고찰, <악인>은 그러한 진지함이 마땅하고 옳은 일임을 설득시키는 명징한 영화다. 타인의 진심을 비웃지 말 것. 그것이 이 세계의 악을 몰아내고, 선을 보존하는 최선의 인간적 선택이자 방도이므로,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가치이므로, 그렇다.
세 편의 시리즈와 한 편의 스핀오프에 이은 프리퀄. <엑스맨>시리즈는 확실히 동력이 다해가고 있는 낡은 모선과 같았다. 특히 근작인 울버린에 관한 스핀오프 <엑스맨 탄생: 울버린>의 심각한 수준은 브라이언 싱어의 두 전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얻었던 <엑스맨 3: 최후의 전쟁>조차도 우월해 보이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낡은 시리즈의 심장을 되살리는 할리우드의 심폐소생술 공식을 충실히 따른 결과물이다. 프랜차이즈화되어 질주하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리즈들이 끝내 전복하는 현상 속에서 할리우드가 새롭게 찾아낸 대안은 질주하던 시리즈의 출발선을 살피는 일, 즉 <스타워즈>시리즈가 일찍이 꾀했던 프리퀄의 제작이다. 그러나 어떠한 기획 의도와 무관하게 이 작품은 시리즈의 갱생을 위한 성공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시리즈가 울버린(휴 잭맨)을 필두로 한 엑스맨 캐릭터들의 파티였다면 새롭게 메가폰을 잡고 이 시리즈의 원점을 응시한 매튜 본의 <엑스맨>은 당연히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서사에서 출발한다. 자비에(제임스 맥어보이)가 프로페서 X라는에릭(마이클 패스빈더)이 매그니토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그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만났으며 갈라서게 됐는가를 살피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이른바 <엑스맨>시리즈의 창세기나 다름없는 작품이다. 두 인물을 중심으로 진전되는 서사는 다양한 돌연변이 캐릭터의 수식을 통해 보다 입체적인 감상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서사적으로 속편에 해당되는 지난 시리즈에 애정을 지니고 있었을 팬들에게는 ‘엑스맨’이라는 유닛이 어떻게 탄생하고 대립하게 됐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충실한 답변과 같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수많은 돌연변이 캐릭터보다도 그 돌연변이들을 조율하는 매튜 본일 것이다. 근작인 <킥 애스: 영웅의 탄생>을 통해서 자신만의 능력을 인정받았던 매튜 본은 그 이전부터 탄탄한 시나리오 집필력과 유연한 연출력을 갖춘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 히어로물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을 얻은 <킥 애스>에 이어서 가장 유명한 히어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엑스맨>에서도 그의 녹록하지 않은 재능이 발견된다. ‘페이스오프’되거나 새롭게 업데이트된 돌연변이 캐릭터들의 활약상은 이 시리즈가 지닌 최상의 보폭이다. 지난 시리즈에서도 등장했던 몇몇 캐릭터의 젊은 날을 연기하는 인물들은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감상을 부른다는 점에서 특별한 재미를 부여한다. 무엇보다도 유머와 서스펜스, 드라마와 액션이 탁월하게 배합된 이 작품의 감각은 매튜 본이 브라이언 싱어 못지 않게 재능 있는 감독임을 다시 한번 설득시킨다. 그는 이 시리즈의 장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자신의 방식에 녹여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의 성과는 연식이 오래된 시리즈를 새롭게, 그리고 근사하게 리노베이션했다는 점에 있다. 어느 히어로물보다도 대단한 물량공세가 가능하며 제각각의 캐릭터가 지닌 특별한 능력들이 전시되는,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이르는 거대한 세계관의 묘미를 다시 한번 탁월하게 즐길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는 것,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이 시리즈가 다시 한번 날개를 펴고 부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마련만으로도 충분한 제 역할을 해낸 작품인 것이다. 지난 시리즈가 진행되는 사이, 언뜻언뜻 등장하던 몇 가지 단서들이 확실하게 공개되고, 이를 통해서 또 한번 새롭게 서사의 갱신이 가능해졌다. 브라이언 싱어가 처음으로 이 매력적인 돌연변이를 소개한 2000년 이후로 이제야 비로소 그들을 위한 단단한 뿌리가 생긴 셈이다.
국수집을 운영하는 거위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뚱뚱한 팬더 포가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던 용의 전사로 간택되어 세계의 평화를 지켜냈다는, <쿵푸팬더>는 쿵푸와 팬더라는 중화적 요소들을 결합시켜 이뤄낸 드림웍스의 새로운 성과였다. 그리고 <쿵푸팬더>의 성공을 이끈, 슈렉 이후로 가장 성공적인 드림웍스 프랜차이즈 캐릭터라고 해도 좋을 ‘쿵푸팬더’ 포를 앞세운 속편 제작은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쿵푸팬더 2>는 포복절도할 만한 재미로 무장한 전편의 기시감으로 인해 기대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지만 언제나 속편으로 거듭해 들어갈수록 전편의 아성을 거침없이 깎아 먹어온 드림웍스의 전례를 생각했을 때 우려 또한 쉽게 거둘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드림웍스를 지탱하던 <슈렉>과 <마다가스카>의 기력이 쇠퇴한 마당에서 새롭게 부흥한 <쿵푸팬더>나 <드래곤 길들이기>와 같은 프랜차이즈의 싹을 가꿔나가는 것이 중요해진 드림웍스에 있어서 <쿵푸팬더 2>는 그들의 비전을 제시할 새로운 출발선이란 점에서도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얼떨결에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던 용의 전사로 지목되어 수련을 받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쿵푸로 진짜 세상을 구하게 된 포는 이제 진정한 용의 전사로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나간다. 하지만 어김 없이 평화로운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당은 등장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포는 활약하며 또 한번 세상을 구한다. 매회마다 새로운 스테이지를 마련하고 새로운 악당을 상대하는 영웅의 업그레이드를 그리는 대부분의 영웅담들처럼 <쿵푸팬더 2> 역시 새로운 적을 마련하고 포의 새로운 활약을 전시해낸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강점은 팬더 포의 무용담보다도 이 뚱뚱한 팬더가 쿵푸의 고수로서 활약하는 과정 속에서 빚어지는 우스꽝스러운 행위의 전시에 있다. 진보하는 캐릭터의 능력을 구경하는 것보다도 어설프게 뒤뚱거리면서도 끝내 임무를 완료하는 팬더 포의 포복절도할 만한 활약을 지켜본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탁월한 묘미인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팬더 포, 그리고 그가 빚어내는 사건의 스케일을 넓히는 주변 캐릭터들의 존재가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작품의 서사란 이 파괴력 있는 캐릭터들의 활동을 전시하는데 일조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물론 상투적인 클리셰를 지닌 성장드라마를 단순하고 명료한 드라마로 승화시킨 전편의 서사는 캐릭터의 매력을 탁월하게 설명해내는 가이드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쿵푸팬더 2>는 그런 전편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된 속편임을 가리기 힘든 작품이다. 등장만으로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포의 존재감은 분명 <쿵푸팬더>라는 프랜차이즈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슈렉>이 그러했듯이, <쿵푸팬더> 역시 긴 호흡을 염두에 둔 기획물로서 적극적인 창의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오랜 청사진을 그리기가 쉽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게 만든다.
새로운 적의 등장과 임무의 형성, 그리고 활약상의 전시까지, 속편으로서 예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절차를 밟아나가는 <쿵푸팬더 2>는 서사적인 형태의 구축과 새로운 캐릭터의 마련에는 성공했으나 그 모든 것들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서 녹여내는 재주가 미흡해 보인다. 캐릭터가 발생시키는 위트와 성장드라마로서의 미덕이 조화를 이룬 전편과 달리 이번 속편에서는 캐릭터가 지닌 파괴적인 유머의 위력만이 거듭 확인된다. 물론 그 웃음의 파괴력만으로도, 그리고 그런 웃음을 발생시키는 캐릭터들의 치명적인 존재감만으로도 <쿵푸팬더 2>는 분명 여전히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한 오락물이다. 하지만 한 발로 작품을 지탱하는, 거대한 웃음을 통해서 서사적 결함을 덮어내려는 시도는 장기적으로 이 프랜차이즈의 비전을 염두에 둔다면 좋은 결과라 말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단적으로 말하자면 <쿵푸팬더 2>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출렁거리는 뱃살만큼이나 넉살 좋고, 식탐만큼이나 능청스러움이 하늘을 찌르는 팬더 포의 ‘미친 존재감’은 이 프랜차이즈의 생명력을 증명한다. 특히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대목은 선악의 대결로 점철되던 이 작품의 식상한 서사를 구원하는 일말의 은총과 같다. 특히나 앙증맞게 식탐을 자랑하는 어린 포의 출현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소’다. 전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서사적인 긴밀함이 느슨해졌으며 인위적인 설정의 무리수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매력은 여전하고, 웃음은 보다 강력해졌다. 눈에 보이는 장점은 극대화된 반면, 눈에 띄지 않는 기본적 요소들은 간과된 경향이 있다. 초식의 조화보다도 파괴력 있는 결정타에 의존한다. <쿵푸팬더 2>는 분명 90여 분의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탁월한 오락물이다. 이 모든 우려는 곧 현재가 아닌 미래를 향한 것인 셈이다. 드림웍스의 지난 전례들로 인해 불가피하게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어떤 징조들 때문이랄까.
물 밑으로 가라앉아가는 배의 선단에 서서 유유히 뭍으로 착륙하는 잭 스패로우(조니 뎁)의 인상적인 등장은 새로운 해양 어드벤처 블록버스터 시리즈의 성공적인 안착을 알리는 시작점이었다.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이하, <낯선 조류>)는 이 프랜차이즈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된 속편이자 새로운 시리즈의 출발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지난 세 편의 시리즈를 이끌었던 고어 버빈스키 대신 새로운 시리즈의 키를 잡은 선장으로 탑승한 롭 마샬과 지난 세 편의 헤로인이었던 키이라 나이틀리 대신 새롭게 이 시리즈에 올라선 페넬로페 크루즈는 이런 야심을 대변하는 대목이다. 물론 이 시리즈의 엔진이나 다름없는 잭 스패로우의 존재감은 대단하며 그의 숙명적인 라이벌 바르보사(제프리 러시) 역시 시리즈를 밀고 나가는 돛과 같다.
팀 파워스의 판타지 소설 <낯선 조류 On Stranger Tides>가 원작이라 알려져 있지만 영화 <낯선 조류>는 소설을 모티프 삼아 제작된 <캐리비안의 해적>의 속편일 뿐이다. 물론 소설이 영화를 위한 껍데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매 작품마다 새로운 해적의 등장을 통해 작품의 항로를 이어나가던 시리즈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낯선 조류> 역시 검은 수염(이안 맥쉐인)의 등장을 통해서 새로운 물길을 연다. 실존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해적 검은 수염의 등장과 스페인 모험가 폰세 데 레온이 발견했다고 전해지는 ‘젊음의 샘’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소설로부터 이양해온 영화는 가장 기본적인 밑그림을 얻어낸 셈이다. 그리고 이 밑그림은 시리즈의 아이콘 잭 스패로우와 연관된 에피소드로 발전됐으며 전편과의 맥락을 잇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감독의 교체 그리고 시리즈의 얼굴을 이루던 중심 캐릭터들의 유입은 <낯선 조류>가 시리즈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선전과 같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이 시리즈의 아이콘인 잭 스패로우에게 놓여있다. 지난 세 편의 시리즈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줄기처럼 자라난 윌(올랜도 블룸)과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의 로맨스로 인해 잭 스패로우의 무용담은 점차 서사를 장식하는 주변부의 소품처럼 위치를 점해나갔다. 시리즈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되레 시리즈의 중심에서 밀려나가는 현상은 분명 기이하다고 할만한 것이었으나 이런 요소는 <캐리비안의 해적>을 보다 흥미롭게 치장하는 측면이기도 했다. 잭 스패로우는 두 남녀의 로맨스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이 시리즈의 볼거리를 보다 입체적으로 수식하는 포석의 역할을 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조류>에서 잭 스패로우라는 캐릭터의 중심 이동은 시리즈의 변화를 대변하는 주요한 지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장단이 있다.
시리즈의 팬을 자처하는 관객들의 입장에서 잭 스패로우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맞춘 시리즈의 변화는 반가울 만한 일이다. 하지만 주변부에 놓인 것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잭 스패로우에게 집중한다는 건 그만큼 그 이외의 캐릭터들이 주목 받을만한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새롭게 보강된 캐릭터, 특히 엘리자베스를 대신하는 헤로인 안젤리카(페넬로페 크루즈)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지만 정작 그녀는 <낯선 조류>에서 잭 스패로우와의 로맨스를 위해 고안된 장식품 이상의 기능감을 발휘하지 못하는 인상이다. 물론 잭 스패로우의 라이벌 바르보사의 존재감이 극을 견인하고 일회적인 캐릭터임에도 강렬한 인상을 전하는 검은 수염의 포지셔닝도 적절하나 윌과 엘리자베스, 잭 스패로우의 삼각관계로부터 빚어지던 감정적인 입체감에 비하면 <낯선 조류>가 품은 캐릭터의 너비는 상대적으로 협소해 보인다. 또한 지난 서사와 새로운 서사의 맥락을 이어나가기 위해 동원되는 설명이 긴 탓에 초중반부까지 스토리 진행이 더딘 인상도 들지만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속도감이 붙어나간다.
고어 버빈스키 특유의 기괴한 감각으로 치장된 지난 해적선들에 비해서 롭 마샬의 해적선은 상대적으로 깔끔해 보인다. <낯선 조류>는 상대적으로 지난 시리즈에 비해서 해양에서 펼쳐지는 사연의 비중도 적다. 캐릭터의 변화와 함께 이런 전반적인 변화들로 인해 <낯선 조류>는 <캐리비안의 해적>이라는 프랜차이즈의 특성이 희석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낯선 조류>는 지난 시리즈가 지닌 강점들이 보다 약해진 작품인 셈이다. 하지만 <낯선 조류>는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는 잭 스패로우로 인해 가능성을 품은 시리즈의 전환점이다. 캐릭터의 강화, 해양 어드벤처 블록버스터로서의 특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이 시리즈의 항해는 보다 멀리 나아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조류>는 시리즈의 방향키를 새롭게 제시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추친력이 대단한 시작은 아니지만 거듭되는 시리즈 안에서 가속력을 발생시킬 동력은 충분하며 무궁무진한 항로의 개척도 기대된다는 점에서 <낯선 조류>는 분명 여전히 외면할 수 없는 볼거리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대단한 잭 스패로우의 존재감은 시리즈를 순항시키는 아이콘의 힘을 증명한다.
1987년에 공개된 <천녀유혼>은 청나라 초기의 문인 포송령이 집필한 16권 분량의 기담집 <요재지이>에 수록된 단편 <섭소천>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당시 중화권 톱스타로 떠오른 장국영과 왕조현을 앞세운 이 작품은 무협과 느와르를 필두로 한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대변하는 흥행작이었으며 올드팬들에게는 여전히 향수를 부르는 고전적인 아이콘이다. 새롭게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은 이런 전설적인 인기에 영합한 기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작품을 새롭게 단장한다는 기획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어떤 식으로든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이 전작과의 비교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메이크된 판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내러티브에 있다. 왕조현이 연기한 소천과 장국영이 연기한 영채신의 러브스토리가 주를 이룬 전작과 달리 새로운 <천녀유혼>은 유역비가 연기하는 소천과 여소군이 연기하는 영채신의 로맨스 이전에 고천락이 연기하는 퇴마사 연적하와 소천의 내밀한 사연을 프롤로그로 삽입한다. 이로 인해서 전반적인 캐릭터들의 비중이나 형태도 변모했다. 소천과 영채신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사연이 소천과 영채신, 연적하가 이루는 삼각구도의 관계로 변모한 것. 또한 과거 연적하와 동료였으나 그에게 실망을 느끼고 대립하게 된 하설풍뢰(번소황)와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도 새롭다. 이처럼 전작에 비해 보다 복잡해진 캐릭터 관계도는 내러티브의 전개에도 영향을 끼쳤다.
연적하와 소천의 관계가 두드러지는 리메이크작에서 영채신은 극을 주도하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극의 전개에 있어서 영채신은 여전히 주요한 캐릭터다. 다만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보장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단순히 캐릭터의 중요도가 변화했음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그런 변화가 리메이크작에서 일종의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리메이크 판본은 영채신과 소천의 로맨스보다도 소천과 연적하의 사연이 감정적 중추를 차지하는 형태로 발전된다. 이런 선택은 두 사람의 로맨스로 귀결되는 원판의 감정선을 보다 입체적으로 치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잉태한다. 하지만 역으로 리메이크 판본의 선택은 영채신과 소천의 감정선을 중화시키고, 소천과 연적하 사이의 감정선마저 소품처럼 몰락시킨다. 감정적인 구조를 확장시키고 있으나 그 감정에 긴밀함을 불어넣는 재주까지 마련하는데 실패한 느낌이다.
이는 캐릭터들의 매력, 더 나아가서 배우 스스로가 어필하는 매력의 결핍 덕분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리메이크 판본은 원전에 비해서 캐릭터들의 매력이 떨어지는 인상이다. 청순함과 요염함을 오가던 왕조현과 유약하면서도 섬세하고 순정적인 장국영에 비해서 유역비와 여소군은 평범하다. 이는 온전히 배우 때문이 아니라 캐릭터에 관한 묘사력과 그들에게 주어진 행동 반경의 제약 탓이기도 하다. 캐릭터 관계가 확장됐다는 건 극의 중추를 이루던 캐릭터들이 자신의 활동반경을 그만큼 잃어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반경을 잃어버렸다는 건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도 그만큼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롭게 자신의 공간을 확보한 캐릭터들이 그만큼의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맹점이다. 상황은 보다 분주해졌으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캐릭터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건 감상의 집중력도 약해짐을 의미한다.
1987년에 공개된 <천녀유혼>의 묘사력은 지금의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하지만 그 열악함이 발생시키던 재미가 있었다. 이를 테면 소품으로 제작된 시체들이 기어 다니는 광경은 그 자체가 지닌 원초적인 긴장감이 있었으며 영화는 이를 영리하게 이용하며 위트를 발생시킨다. 슬랩스틱의 요소와 함께 고전적인 무협물로서의 매력이 존재했다. 그 열악함이 B급 취향의 흥미를 부르기도 한다. 새로운 <천녀유혼>은 오늘날의 발전된 CG기술을 통해 보다 매끈하고 깔끔한 이미지를 구축했지만 되레 그것이 이 영화를 심심하게 만든다. 진보한 기술이 되레 원작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퇴화시킨 셈이다. 무협물로서 액션의 묘사는 보다 디테일해졌지만 날것처럼 등장하던 소품들의 귀기 어린 기운들은 사라졌으며 영계와 인간계 사이의 신비감도 되레 증발한 것 같다. 거친 단면들을 말끔하게 밀어냈지만 오히려 그것이 <천녀유혼>을 평범한 작품으로 인식시킨다. 깔끔할수록 보기는 좋지만 때때로 그것이 심심할 수 있다는 것,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이 증명하는 건 어쩌면 이런 아이러니가 아닐까. 장국영에 대한 향수는 덤이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어머니에게도 ‘소녀시대’가 있었고, 철없는 시절에 함께 하면 무서울 것이 없었던 친구들과의 추억도 있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어린 나이에 할 수 없는 무언가를 거듭 겪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어떤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절에서만 가능했던 무엇들을 더 이상 체험할 수 없다는 상실을 체감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써니>는 우리의 지난 날, 80년대를 지나쳐 보낸 어떤 어른들을 위한 송가다. <써니>는 주부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삶에 치이고 부대끼며 살아가던 여인 임나미(유호정)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고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데뷔작 <과속스캔들>로 기록적인 흥행 성공을 얻어낸 강형철 감독은 <써니>를 통해서 자신의 취향을 보다 확실하게 어필한다. 미혼모 문제를 대안가족적인 온기와 화합적인 낭만으로 끌어올린 <과속스캔들>의 드라마틱한 정서는 혈기왕성한 젊은 날의 꿈으로부터 멀어진 중년 여인들의 의기투합과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지닌 <써니>로 거듭난다. 자잘한 소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도 유효하다. 세심하게 풍경의 근접한 양태들을 유유히 포착해내는 오프닝 시퀀스의 리듬은 <과속스캔들>과 동일한 접근방식이라 할만하다. 또한 윤리적인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낭만성, 즉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털어내고 그 시대에서 발견되던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이를 재현의 도구로서 활용하는 방식 역시 그렇다. 물론 이는 시대적인 공기를 단순히 가볍게 간과한다거나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느 개인이 지니고 있던 시공간의 개념이 중요할 뿐, 그 시대의 공기를 재현하고자 하는 의욕은 <써니>의 의도와 무관하다.
시대적인 풍경을 재현해낸다는 건 그 시대를 지나온 이들과의 교감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써니>가 재현하는 80년대의 풍경들은 바로 그 시대를 지나온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묵은 말들이 살아있는 풍경으로 재생되고, 그 안에서 지나간 날들이 떠오를 때, 그 시절을 건너온 관객들은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영화 속의 인물들과 동화될 수 밖에 없다. <써니>가 자아내는 공감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다만 그 공감대를 보다 깊고 너르게 완성해낼 수 있는 자질은 영화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셈이다. 그런 의도 안에서 <써니>는 성공한 결과물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그러니까 영화의 두 시점은 이를 감상하는 이들의 시점을 대변하듯 그 시절의 풍경을 온전히 스크린에 전시하고 있다. 다소 과시적이거나 과잉적인 측면도 없는 건 아니지만 추억을 되새긴다는 건 허기보다는 포만이 더 어울리는 법이다. <써니>는 80년대에 향수를 지닌 오늘날의 중년 세대들을 위한 포만의 장이다. 영화가 쏟아내는 오래된 이미지들은 오늘을 향유하지 못하는 과거 세대들을 위한 성찬과 같다.
물론 이는 반대로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일종의 체험이다. <써니> 속에서 등장하는 갖은 풍경들은 그 시대를 공유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는, 희귀한 풍경일 것이다. 이를 하나의 볼거리로 승화시키는 건 그 과거적인 소품들 속을 누비는 어린 소녀들일 것이다. 창고에서 꺼내든 오래된 소품들을 추억으로 공유할 수 없는 세대들이 <써니>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죽은 시간을 생동감 있게 재생시키는 극 속 인물들인 셈이다. ‘7공주’라고 스스로를 명명하며 시대를 재현하는 소녀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각인시키며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연의 너비를 넓혀나간다. 때때로 감정적인 활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인상도 들지만 <써니>는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어쩌면 언젠가 오늘날의 젊은 날을 뒤돌아보게 될 어린 세대들에게 <써니>는 좋은 지침서 역할을 수행할지도 모른다. 세대 간의 단절된 기억 속에서 지난 세대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가 지닌 최고의 덕목일지도 모른다.
시대적 소품의 디테일한 활용 능력, 저마다 개성을 확보한 캐릭터들의 표현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써니>는 그러한 재현성을 단지 향수를 건드리는 자극의 촉매로 장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진짜 감정을 건드리는 간절한 낭만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이러한 감각은 강형철 감독이 지닌 윤리적 중립성과 도덕적 해탈감에서 비롯된 쿨함 그 자체에 있다. <써니>는 <과속스캔들>과 마찬가지로 쿨한 영화다. 이는 소품을 활용하고 비추는 카메라의 양식을 넘어서서 심각한 인상에서 도피하지 않고 완벽하게 탈출해서 자신만의 쾌감을 불어넣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강형철 감독의 상업적 감각은 스토리텔링의 기승전결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김용화 감독과 비견될만하며 앞으로의 행보도 주목할만하다. 또한 <써니>의 일등공신들, 과거와 현재 속에 놓인 전후의 인상을 책임지는 배우들의 존재감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무엇보다도 심은경은 <써니>가 전달하는 낭만의 팔 할을 책임지는 일등공신이다.
과거와 현재 속에서 놓인 인물들은 우리가 지나친 것들, 즉 돌아갈 수 없는 시대에 대한 추억을 아련하게 환기시키면서 쿨하게 깔깔댄다. 그게 되레 낭만적이다. 낭만이라는 게 결국 슬픈 일이 아니지 않나. 추억이 있기에 오늘을 버틸 수 있다는 것, 이 영화는 그것을 깨닫게 만든다. 오래된 친구가 반가운 것은 그 시절을 환기시키는 유쾌한 수다가 뒤따르는 덕분이지 않던가. 그리고 삶은 그 추억을 먹고 한 뼘 더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