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메운 빌딩숲으로 형성된 스카이 라인을 부감으로 비추던 카메라는 서서히 미끄러져 강을 건너고 그 위로 달리는 기차에 다가선다. 그리고 그 기차 속에서 잠에 들었던 듯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한 남자가 갑작스럽게 놀라며 깨어난다. 그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 여자가 그의 일행인 듯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 하지만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여자의 정체를 묻는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헬기를 조종하는 콜터 대위(제이크 질렌할)라고 신분을 밝힌 남자는 자신이 거기에 왜 있는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인은 누구인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한다. 그러나 곧 끔찍한 찰나를 경험한 뒤, 또 한번 좀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끌려오듯 정신을 차린 남자는 반복되는 8분 간의 동일한 경험을 거듭 체험하며, 그리고 그것이 가상적 체험을 넘어서 실물적인 경험으로서 자신에게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자신의 존재와 상황의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소스 코드>라는 제목은 원래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프로그래밍 정보가 저장된 파일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인간의 두뇌를 컴퓨터의 메인보드에 대비시킨 듯한 상상력을 통해 구상된 작품처럼 보인다. <소스 코드>는 인간의 두뇌 속에 보관된 8분 간의 기억적 정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백업된 8분 간의 기억 속으로 침투하여 그 기억에 담긴 정보를 탐색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셈이다. 여기서 8분은 보관될 수 있는 기억의 한계량이며 이를 재생하는 방식에 대해 영화는 고난도의 양자역학의 원리를 통해서라고 설명한다. 중요한 건 이런 논리가 어느 정도의 설득력으로 관객을 현혹시키느냐의 문제다. 어떤 식으로든 고난도 과학 원리를 빌려서 거짓말 같은 상황의 재현이 가능하고, 그것이 과학의 힘을 빌린 사실적인 상황임을 설득한다면 영화의 원리에서 발생하는 오류의 편차는 중요하지 않다. 죽은 이의 두뇌에 보관된 기억 속에 삽입되어 8분간 재현되는 그 과거 속에서 모든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관객이 믿게 만든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소스 코드>는 성공사례에 가깝다.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가상의 경계 속을 넘나드는 인물의 존재론에 관한 고찰과 리얼리티와 버추얼 사이를 오가는 인물의 선택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소스 코드>는 <인셉션>이나 <매트릭스>와 같은 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소스 코드>는 전자들처럼 시공간에 관한 특별한 발상을 설득력 있게 포장해낸다. 평행우주론에 입각한 시간여행 이론에 가까운 <소스 코드>의 시공간 개념은 인간의 의식 속에 잠재된 무의식의 양태를 하나의 의식적 세계로 확장해서 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적인 확신이 불가능하나 흥미로운 결과인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의심되는 오류는 있다. 사실 타인이 경험했던 1인칭 시점의 과거로 잠입해서 그 기억을 토대로 둔 시점을 대신 시뮬레이션하고, 그 기억이 펼쳐진 모든 환경들을 롤플레잉으로 운용한다는 영화적 설정에는 분명 의심할 만한 오류가 잠재돼 있는 것이다. 경험자의 경험이 미치지 못한 시공간의 영역까지 대체자가 대신 경험할 수 있다는 설정이란 그렇다. 하지만 <소스 코드>는 이런 설정의 무리수에 대한 고민을 지워버릴 만한 매력적인 자질이 농후하다.
시간여행과 평행우주라는 초자연적 과학원리에 대한 이론적 체험은 재난과 로맨스, 미스터리라는 다양한 장르적 묘미와 확대된다. 반복되는 시공간의 이동 속에서 한 꺼풀씩 벗겨지는 미스터리의 묘미는 시공간의 한계를 되레 탁월한 스토리텔링의 무대로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소스 코드>의 시간여행 원리는 하드디스크에 파일을 복사하는 복제의 특성에 가깝지만 이를 자가적으로 진화시키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동시에 던칸 존스의 전작인 <더 문>과의 연관성도 발견된다. 자아를 잃어버린 복제 자아가 진짜 자아의 꿈을 대신 실현해내듯 복원이 불가능한 현실을 벗어나 가상의 리얼리티 속에서 삶을 회복시키는 인물의 태도, 이는 현실보다 나은 이상적인 가상을 추구한다는 리얼리즘의 역설을 겨냥하고 있다. 이는 마치 <인셉션>의 결론, 즉 팽이가 멈추었는가를 두고 벌어지는 분분한 의견에 대한 진보적인 의견처럼도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자질의 성과는 데이빗 보위의 아들이자 <더 문>을 통해서 발견된 던칸 존스는 ‘시공간의 새로운 지배자’로 거듭나며 재능을 확신시킨다. 또한 그가 <소스 코드>의 메가폰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이크 질렌할은 매력적인 배우로서의 성장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또한 어느 영화보다도 매력적인 웃음을 선보이는 미셸 모나한과 특유의 연기력으로 극의 감정선을 고취시키는 베라 파미가도 탁월한 연기를 선보인다.
신의 세계 ‘아스가르드’를 통치하는 최고신 오딘(안소니 홉킨스)은 군대를 이끌고 난폭한 거인족의 수장 라우페이가 이끄는 ‘요툰하임’의 위협에 맞서 세계를 구한다. 오딘의 통치 아래 오랜 평화를 맞이한 신계는 오딘의 첫째 왕자 토르(크리스 헴스워드)에게 절대무적의 병기 ‘뮬니르’를 하사하는 왕위계승식이 있던 날, 갑작스러운 요툰하임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진다. 왕위 계승식을 방해 받게 된 토르는 불 같은 성격을 다스리지 못하고 오딘의 명령과 주변의 만류를 어긴 채, 동생 로키(톰 히들스톤)와 동료 전사들을 규합해서 요툰하임을 공격한다. 결국 이에 격분한 오딘은 토르로부터 뮬니르와 힘을 빼앗은 뒤, ‘미스가르드’ 즉 지구로 추방한다.
그리스 신화만큼이나 인간과 닮은 호전적인 신들이 등장하는 북유럽 바이킹 신화에 기초한 슈퍼히어로물 <토르>는 <스파이더맨>이나 <아이언맨>, 그리고 (차후에 <퍼스트 어벤저>라는 제목의 영화로 공개될) <캡틴 아메리카> 등과 함께 마블 코믹스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시리즈로 꼽히는 작품이다. 번개를 다스리는 북유럽 신화의 수장 토르는 그리스 신화에 빗대자면 제우스 격에 가까운 최고신이다. 동시에 마블코믹스의 라이벌격인 DC코믹스의 히어로 캐릭터 중,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슈퍼맨에 대적할 수 있는 마블의 히어로이기도 하다. 사실 코믹스물에서 묘사되는 토르는 본래 호전적인 신화의 양태와 달리 기독교적인 희생으로 인류에게 헌신하는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는데 영화 역시 이런 측면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토르는 이국의 오랜 신화의 외형을 빌려서 자기 입맛에 맞게 각색한 사생아 같은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화와 원작을 떠나서 <토르> 자체에 집중해 보자면, 이 영화는 토르라는 캐릭터가 겪는 질풍노도의 성장드라마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벤저스>의 전초전 성격에 가까운) <토르>는 토르의 본격적인 활약상을 선보이기 전에 캐릭터의 정체성을 소개하는, 일종의 캐릭터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상 마블 엔터테인먼트가 마블 슈퍼히어로 올림픽이라 해도 좋을 <어벤저스>로 가는 수순으로서 자신들의 모든 캐릭터들을 하나씩 스크린에 소비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토르> 역시 이 캐릭터에 대한 심오한 치장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벤저스>에 기대를 걸고 있는 매니아들과 캐릭터의 기원조차 알지 못하는 일반적인 관객들 사이에서 감상의 편차가 발견될 수 있는 건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토르>는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라는 엔터테인먼트적 기본기를 갖춘 작품이다. 신계와 인간계, 즉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를 오가는 카메라는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신계의 풍경과 북유럽 신화를 고스란히 차용한 특별한 아이템들을 전시하며 자신만의 볼거리를 과시한다. 또한 신과 인간의 만남, 초자연과 과학의 만남이라는 대비적 특성을 발견하게 만드는 토르와 제인(나탈리 포트만)의 인연을 통해 멜로적인 드라마를 구축하고 이런 감정선을 토대로 성장드라마의 노선을 밟아나간다. 또한 전시 수준에 가까운 선악의 극명한 대비도 오락적 취향의 갈등을 삽입한 의도로 보이며 이 역시도 깊은 수준의 감정을 잉태할만한 자질은 엿보이지 않지만 이 영화가 취하는 태도, 즉 거대한 계획을 염두에 둔 소품적인 태도를 염두에 둔다면 이런 얄팍함이 용인되지 못할 것은 아닌 셈이다. 다만 CG로 완성한 가상적인 이미지의 전시력에 비해서 액션 시퀀스의 파괴력이 미흡해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영화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자질을 충분히 설명해내는 수준을 유지해낸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장 잘 해석해내는 감독으로 꼽히는 케네스 브레너의 재능이 보다 탁월하게 반영될만한 슈퍼히어로물로 거듭나지 못했다는 건 일면 아쉬운 지점이다.
어쨌든 마블 코믹스가 잉태한 슈퍼히어로 올스타전이라 불려도 좋을 <어벤져스>의 영화화를 계획한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전초전이 하나씩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은 바야흐로 슈퍼히어로 무비의 새로운 전환점이 열리는 시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토르: 천둥의 신>(이하, <토르>)은 <아이언맨> 시리즈를 통해 구체화된 마블의 슈퍼히어로 대통합전을 위한 또 한번의 전초전이다. <어벤저스>로 가는 또 하나의 징검다리와도 같은 이 작품이 토르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한다 하여 섭섭하다면 2년여 간의 유예 기간을 기다릴 것. <어벤저스>의 문을 여는 캐릭터가 토르임을 염두에 둔다면 진짜 활약상을 볼 기회는 여전히 유효하다. <토르>는 진정한 토르를 보기 위해 건너야 하는 무지개 다리, 즉 아스가르드의 ‘비프로스트’라는 말이다. (그래도 스크린에서 구출해오고 싶을 정도로 존재감이 미비한 아사노 타다노부가 안쓰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여인과 소녀의 과도기에 자리한 듯한 한 여자가 어느 저택을 뒤로 한 채 덧없이 걸음을 옮겨 나간다. 어디론가 바쁜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한 언덕에 멈춰선 뒤, 황망한 얼굴로 세상을 응시하다 이내 영문을 알 수 없는 울음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윽고 한껏 습기를 빨아들인 먹구름으로부터 매서운 비가 쏟아지고, 그녀는 ‘폭풍의 언덕’을 벗어나 비를 피해 어디론가 걸음을 옮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대신 정처 없이 나아가던 그녀는 외딴 집의 불빛을 발견하고 대문 앞에 다다라 문을 두들긴다. 이를 발견한 한 남자는 그 여자를 집 안으로 들이고 두 여동생과 함께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준 뒤,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그녀는 답한다. “제인 에어” 그녀가 제인 에어다.
<제인 에어>는 여동생인 에밀리 브론테와 함께 영국의 고전적인 여류 소설가로 꼽히는 샬롯 브론테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투영된, 기독교와 남성성으로 무장한 세태 속에서 여성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며 성장한 한 여성의 진보적인 삶을 다룬 이 작품은 수세기를 걸쳐서 숱하게 출판됐으며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통해서 여러 판본으로 재생된 바 있다. 이는 곧 캐리 후쿠나가가 연출한 <제인 에어>가 그 가운데서 가장 근래에 제작된 판본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단지 또 한 번의 재현을 뛰어 넘는 <제인 에어>의 새로운 현시에 가깝다.
전체적으로 원작의 서사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 작품은 사실 원작소설의 서사적 줄기를 추출해서 최대한 잔가지를 쳐내버린 상태로서 스토리텔링을 다듬어낸 축약판에 가깝다. 하지만 원작과 영화의 부피차를 염두에 둘 때 이것이 불가피한 선택임을 감안한다면 영화가 성공적인 결과물을 완성해냈다고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순행적인 원작과 달리 서사의 중후반부 즈음을 먼저 재생시킨 뒤, 플래시백의 시동을 거는 이 영화의 서사적 선택은 결국 사연의 전후를 완전하게 가리고 그에 따르는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감상을 유도하는데 적합하다. 이는 단지 모두가 알거나 익숙한 원작의 서사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형태적 의미만을 염두에 둔 결과가 아니다. 이러한 서사적 호기심은 영화가 연출하는, 미스터리한 연출과 연결되어 영화에 묘한 서스펜스를 불어넣는다.
이는 <제인 에어>의 본질적인 줄기가 되는 로맨스를 언급하는 방식 안에서도 효과를 발휘한다.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에 대한 호감과 열정만으로 다가서는 남녀, 제인 에어(미아 와시코우스카)와 로체스터(마이클 파스벤더)의 관계적 긴장은 이러한 외부적인 서스펜스를 화려한 장식처럼 걸치며 진실한 감정의 응축에 일조하고 이는 로맨스라는 감정적 덩어리를 보다 쉽게 인식시키는 촉매로서 작동한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낭만적인 로맨스에 예기치 못한 반전적인 진실에 가 닿는 광경에서 이런 효과는 보다 극대화된다. 이는 원작이 지닌 고딕 로맨스의 형태에 가장 잘 근접한 형태라 이해되며 원작이 품고 있던 절실한 로맨스의 감정을 역시 보다 탁월하게 살려낸 영화적 해석이라 할만하다. 시대로부터 풍겨져 나오는 부조리한 광기를 세심하게 포착하고 인물의 감정과 행위에 섬세하게 이입시킨 뒤, 미스터리한 상황 속에 밀어 넣어진 인물의 혼란과 착시적인 시행착오들을 유려한 기승전결의 멜로드라마로 담백하게 풀어낸다. <제인 에어>는 조 라이트의 <오만과 편견>과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영국 고전 로맨스의 새로운 판본이자 효과적이면서도 독창적인 패기가 자리한 고전 각색물이라 할만한 수작이다.
풍요로운 광량을 입은 자연친화적인 풍광으로 생동감 있는 숨결을 불어 넣고 고전적인 품위를 걸친 인물들의 행위로서 품격을 전시하는 <제인 에어>는 이런 기반을 무대로 밟고 선 인물들을 통해 가장 본질적인 드라마의 감정선에 주목해 나간다. 무엇보다도 미아 와시코우스카가 연기하는 제인 에어는 이 영화의 핵심이자 주축이다. 유년시절부터 삶의 부침을 견디며 성장해야 했던 제인 에어가 희망과 절망의 질곡을 건너 진정한 사랑의 결실을 맺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대변하는 그녀는 또렷한 자태와 투명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롤타이틀을 확고하게 구축해낸다. 또한 낭만과 비극 사이에 선 ‘차가운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게 따뜻한’ 로체스터를 연기하는 마이클 파스벤더는 캐릭터의 특성과 함께 자신의 매력까지 어필하는데 성공한 인상이다. 그 성공적인 성장세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감상을 부르는 제이미 벨도 눈여겨볼만하다. 이러한 자질의 융화를 이끌어낸 캐리 후쿠나가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새로운 계기를 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 라이트의 인상적인 데뷔작 <오만과 편견>을 연상시키듯 그는 <제인 에어>를 통해 고전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마음껏 과시해냈다.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나간 여인의 초상처럼 당돌하지만 선명하게, 이 오래된 연인들의 사연을 현대에 복원해내는 수준을 넘어서 탁월하게 재증명해낸 것이다.
반짝이는 설원의 적막하고 고요한 풍경을 밟고 선 순록 한 마리, 그리고 이를 응시하는 소녀. 평온한 이 풍경은 소녀의 손 끝에서 퉁겨져 나간 화살 한 촉과 피를 흘리며 달아나는 순록과 이를 따라 질주하는 소녀를 통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나>라는 제목은 바로 그 미스터리한 소녀 한나(시얼샤 로넌)를 위한, 그리고 한나에 의한, 한나에 대한 영화다. 어떠한 지정학적 정보가 등장하지 않는 설원의 한 곳에서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단절되듯 성장한 소녀 한나는 그녀를 인간병기로 길러내는 전투교관이자 매일 같이 책을 읽어주는 헬러(에릭 바나)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라났다. 어떤 실체도 드러나지 않는, 동시에 무언가 불확실한 사연이 감지되는, 그 부녀의 사정은 세상에 나아갈 준비가 됐다는 한나의 확신과 짐작이 쉽지 않은 헬러의 결심을 통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한나>는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 <솔로이스트>까지 창백한 광량을 능숙하게 활용하며 감수성 짙은 드라마를 만들어오던 조 라이트의 액션 스릴러라는 점에서 이례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장점은 이 작품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난다. 설원과 사막을 건너 도시 속으로 들어선 한나의 여정은 조 라이트가 수집한 풍요로운 광량을 머금고 빛을 발한다. 또한 전작들에서 엿보인 사운드 감각도 <한나>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케미컬 브라더스가 매만진 강렬한 비트와 노이즈로 무장한 <한나>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조 라이트의 비주얼 감각과 융화를 이루며 영화에 공감각적인 시너지를 형성한다.
<본>시리즈의 소녀 판본이라도 해도 좋을 <한나>는 복수극의 형태로서 비정한 스릴러의 문체를 뽐내는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녀의 감수성이 깊게 배인 성장드라마이면서도 곳곳에 매복된 액션 시퀀스를 통해 역동적인 동선을 확보하기도 한다. 액션영화로서 <한나>는 액션 시퀀스의 물리적 중량감이 대단한 영화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시리즈와 같이 현장감 있는 액션 시퀀스들을 지니고 있지만 속도감이나 현실감도 상대적으로 새롭다고 평할만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정적이면서도 건조한 정서적 분위기와 영상의 질감 속에서 연출되는 영화의 몇몇 액션 시퀀스는 분명 인상적이다. 특히 초중반부에 등장하는 한나의 탈출 시퀀스에서 보여지는 사운드와 비주얼의 조화는 역동적인 공감각의 리듬을 지니고 있으며 롱테이크 기법으로 촬영된 헬러의 도주 신 역시 대단히 완성적인 리얼리티와 극적인 연출감을 공유하고 있다. 디테일한 액션의 포착은 실패했으나 시퀀스를 두르고 있는 전체적인 요소들의 조화가 흥미롭다.
결과적으로 <한나>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바로 캐릭터들의 개성 자체에 있다. 롤타이틀 한나를 비롯해서 그녀의 조력자 헬러와 그 반대편에 선 마리사(케이트 블란쳇)까지, 이 세 명의 캐릭터가 이루는 갈등 구도는 영화가 마련한 내러티브의 말판에 역동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 훌륭한 말의 임무를 수행해낸다. 특히 영화의 근간이나 다름 없는 한나 역의 시얼샤 로넌은 이 영화가 이룬 최고의 성취이자 발견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를 통해서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으며 근작인 <웨이 백>에서 뚜렷한 육체적 성장을 보여준 시얼샤 로넌은 <한나>를 통해 배우로서 확고한 아이덴티티를 대중에게 어필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기대감을 넘어선 확신까지 부여할 정도로 ‘미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를 우직하게 떠받드는 에릭 바나와 악랄한 카리스마로 어린 주연의 존재감을 드높이는 케이트 블란쳇의 서포트도 훌륭하다. 재능 있는 신예와 이를 돋보이게 비추는 기성배우들의 관록이 이루는 조합이 근사하다.
액션과 스릴러라는 장르적 문법 안에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과시한다고 말하기엔 머뭇거려지지만 <한나>는 분명 인상적인 작품이다. 갇혀 있던 존재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확고한 정체성을 차지하기까지의 과정은 이색적인 성장드라마로서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사운드와 비주얼을 어루만지고 조합하는 조 라이트의 감각도 한층 더 빛을 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는 겉으로 드러난 장르적 외피의 강도보다도 그 내면을 감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부르는 흥미가 보다 탁월한, 주목할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좋은 기대감을 부르는 배우의 발견이란 점에서 보다 즐겁다.
1952년, 대전환점을 얻게 된 의료 과학 분야로 인해 인간의 불치병 치료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1967년, 인간의 평균 수명은 백 살을 넘게 된다. 이 놀라운 변화란 희생을 담보로 한 혁신이었다. 고장 난 부품을 갈아 끼우듯 급속도로 발전된 장기 이식술로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제공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타인의 갱생시키기 위한 일환으로서의 삶을 순순히 받아들인 채 살아야 했다. 1978년 헤일샴의 기숙사에서 성장했던 캐시(캐리 멀리건)와 토미(앤드류 가필드), 루스(키이라 나이틀리)도 그런 부류의 삶을 살아야 했다.
2005년, 일본계 영국인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집필한 SF소설 <나를 보내지 마(Never Let Me Go)>를 원제 그대로 영화화한 <네버 렛미고>는 누군가의 삶을 대체하기 위해서 부품처럼 길러진 어떤 이들의 삶을 비춘 SF픽션이다. 미래적인 소재를 지난 20세기의 풍경에 대입한, 이 시대착오적인 소설은 비사실적인 시대상을 배경으로 삼아 되레 현실적인 감정을 이식하고 진지한 감정선을 주입한다. 섬세한 문체로 사건의 흐름과 인물들의 심리를 회상하는 이 1인칭 시점의 소설은 서정적인 정서를 두른 채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비극적인 예감을 담담하고 쓸쓸하게 진술해낸다.
<네버 렛미고>는 이런 소설의 자질에 밑지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는 원작에 종속된 영화의 한계라기 보단 원작이 지닌 가장 탁월한 장점을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할 수 밖에 없는 영화의 필연적 선택에 가깝다. 도입부부터 이야기에 잠재된 비극적 예감을 보다 직설적인 구술로서 명확하게 야기시키는 동시에 희미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의 결말에 비해 보다 직접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서사의 전략적 변주를 제외하면 소설과 원작은 전반적으로 유사한 서사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 역시 원작과 마찬가지로 캐시의 담담한 1인칭 독백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수채화처럼 맑고 안온한 풍경을 입은 섬세한 분위기 속에서 서정적인 흐름을 유지한 채 서서히 흘러나간다.
다만 서사적인 사건의 흐름 속에서 인물들의 관계적 긴장과 심리적 상응이 예민하게 발견되는 원작에 비해서 인물의 심리적 이해와 시선의 깊이가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얕은 편이다. 덕분에 영화의 안온한 인상이 심심하고 밋밋하다는 인상으로 감지되기도 하지만 이는 큰 단점이라 지적될만한 사항은 아니다. 지난 과거를 회고하는 캐시의 나직한 독백은 낭만적인 추억에 가깝게 묘사되는 과거의 이미지 속에서 더욱 쓸쓸하게 비극적인 예감을 유지하며 결말에 다다라 간절함이 깃든 인물의 처연한 감정을 수려한 여운의 그림자로 드리우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또한 성장드라마로서의 흥미와 로맨스물로서의 긴장을 보다 도드라지는 형태로 발전시킴으로써 감정적인 온도차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긴 호흡을 지닌 소설을 축약된 이미지와 대사로 전달하는 이 영화는 변주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에 아기자기한 해석을 가미하며 영화만의 의미를 간직해낸다.
자신들이 처한 비극적인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채 아스러져 가는 젊은 청춘의 삶. 비사실적인 현실을 그린 이 영화가 되레 지극히 현실적인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젊은 배우들의 잠재력 덕분일 것이다. 캐리 멀리건, 키이라 나이틀리, 앤드류 가필드는 <네버 렛미고>에서 성장드라마와 로맨스물의 결을 이루는 좋은 원목과 같다. 특히 1인칭 독백으로 서사를 열고 닫는, 떨림이 깃든 담담한 어조로 감정의 수면에 고요한 파문을 일으키고, 정서적 가지에 가녀린 떨림을 만드는 캐리 멀리건의 연기는 그녀가 지닌 너른 가능성을 짐작하게 할만한 대목이다.
홀로 방 안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는 그득한 불길함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현실로 박차고 나온다. 아내의 유산이 두 딸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는 것에 대한 의붓아버지의 분노는 학대적인 행위로 번진다. 그리고 폭력적인 그를 피하려던 소녀는 위기에 놓인 여동생을 보호하고자 총을 든다. 손가락 끝에 걸린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총구로 총알이 튕겨져 나온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를 스치고 지나간 총알은 여동생을 관통한다. 여동생의 죽음과 함께 경찰에게 연행된 소녀는 의붓아버지의 동의 하에 정신병원에 인도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베이비돌(에밀리 브라우닝)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처참한 일상에 직면한다.
일단 앞서 설명한 서사의 줄기를 읽은 당신이라면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예고편에서 줄기차게 등장하는) 거듭되는 액션 시퀀스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써커 펀치>에서 등장하는 액션 시퀀스는 소녀 베이비돌의 상상 속에서 구현되는 판타지 혹은 망상이다. 소녀가 정신병원에 수감되기까지의 과정을 별다른 대사 없이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션으로 중계하던 영화는 어떠한 예고나 조짐도 없이, 어느 한 찰나에 급작스러운 시공간의 점프컷을 이행한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소녀는 퇴폐적인 물랑루즈의 쇼걸로 전락한다. 공간에 대한 정보가 모호한 이 영화는 캐릭터들의 행동과 심리를 액션 시퀀스로 연동시키는데 주력하는 반면, 그 캐릭터들이 속한 체제의 현실감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사실 이는 연출자 개인의 야심이 강력하게 피력된 일종의 수단에 가깝다. 잭 스나이더는 <써커 펀치>를 완전한 자기 취향의 전시적 행위 혹은 전리품으로 인식한 것처럼 보인다. 장단은 그 지점에서 등장한다. 스팀펑크적 모티프를 배경으로 한 아날로그적인 전투 시퀀스, 거대한 사무라이 로봇이 등장하는 일본식 무협, 미래적인 테크놀로지의 이미지가 눈에 띄는 SF액션, 거대한 드래곤이 등장하는 판타지까지, <써커 펀치>는 재패니메이션을 비롯해서 망라한 만화적 취향이 총동원된 액션물이다. 또한 바디수트와 가터벨트, 망사팬츠, 세일러복까지, 일본 망가의 미소녀 캐릭터가 연상되는 여전사 이미지는 스테이지 형식으로 진전되는 단계적인 액션 시퀀스와 함께 완전한 버추얼 게임의 속성을 띠기 시작한다.
단계적인 게임 스테이지의 속성을 띤 <써커 펀치>는 <인셉션>과의 구조적 비교가 가능하며 야심 또한 유사한 영화다. 꿈과 현실이라는 단면을 재료로 다양한 액션 시퀀스 연출이 가능한 신을 마련하기 위해 구조적인 합의를 구축해나간 <인셉션>과 마찬가지로 <써커 펀치>는 현실과 무의식 속의 상상을 구체적인 이미지의 시퀀스로 세워나간다. 하지만 <써커 펀치>는 <인셉션>에 비해 이성적인 구조로 설정의 무리수를 설득해내는 영화가 아니다. <써커 펀치>는 무의식 속에서 스펙터클하게 확장되는 파편적인 액션 시퀀스들을 전시하고 수집하는, 무리수를 스스로 감당해낼 수 있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영화다. 이는 대단한 야심이기에 그만큼 위험한 방식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이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동시에 강력하게 밀어붙이는데 여념이 없다. 그렇기에 이런 연출 방식은 의도 자체로서 성공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런 의도가 완벽한 설득을 이루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또 한번의 문제가 발생한다.
<써커 펀치>는 잭 스나이더라는 어느 개인의 취향이 총아를 이루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취향이, 오락적인 자극의 역치를 이루는 액션 시퀀스들이 즐비한 이 영화를 고립시킨다. CG로 범벅이 된 이 영화의 액션 시퀀스는 여러 모로 눈여겨볼만한 완성도를 자랑하며 그 가짓수만큼이나 흥미도 확대될만하다. 하지만 거듭되는 버추얼 액션 시퀀스가 자극의 역치를 높이는 반면 상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현실은 급속도로 흥미를 반감시키고, 동시에 반복되는 액션 시퀀스의 자극의 역치 또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버리는 측면이 있음을 간과하기 어렵다. 이 영화가 품은 의도나 태도에 대한 이해 여부에 따라 작품 자체가 존중 받을 길은 있으나 결과적으로 이런 연출적 형태로 완성된 영화가 완벽한 자신만의 이상향에 다다랐다고 말하기에도 석연찮은 덕분이다.
비주얼리스트로서 할리우드에 자신의 입지를 구축한 잭 스나이더에게 <써커 펀치>는 그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소품에 가깝다. 디스토피아적인 정서와 여전사의 면모를 지닌 걸캐릭터들, 그리고 화려한 액션 시퀀스의 화력과 톤다운된 화면의 질감, 비트가 강한 일렉트로니카와 락넘버들, 이 자극적인 요소들로 점철된 <써커 펀치>는 그 대단한 화력을 무기로 삼아 감상을 초토화시킨다. 여기서 감상의 초토화란 영화에 장악 당한다는 의미일수도 있고, 반대로 지나친 자극이 영화적 몰입의 장애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전자보다는 후자로서의 가능성이 더욱 커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개인적인 야심과 취향이 매력적인 유혹을 일으키지만, 오르가슴을 공유하지 못하고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한 섹스뿐인 상대와의 관계는 불화로 나아갈 가능성이 농후한, 치명적인 약점 아닐까.
풋풋한 아이들로 가득한 어느 교실의 풍경, 하나 같이 손에 우유를 들고 마시는 아이들에게서 활기가 넘친다. 하지만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한 교실의 풍경은 어딘가 비정상적인 기질로 가득하다. 교탁 앞에서, 그리고 교실을 한 바퀴 도는, 아마도 담임선생님처럼 보이는 한 여인의 말이 학생들을 향하고 있음에도 마치 독백처럼 들리는,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교실 속 아이들의 무관심한 소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충격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그녀의 한 마디가 아이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 반에 있습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추리소설 <고백>은 아이를 잃게 된 미혼모 선생 유코가 자신의 반 학생들의 종업식 자리에서 밝히는 충격적 고백을 통해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 되는 유코의 일인칭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녀의 고백 속 사건과 관련된 세 명의 학생과 한 명의 학부모의 일인칭 시점을 갈아탄 뒤, 다시 유코의 시점으로 갈무리된다. 소설은 다소 충격의 강도가 높은 내용에 비해 비교적 담담한 일인칭 화법의 구어체 서술로 진전되며 이런 특유의 분위기는 사건 자체의 놀라움을 감정적인 감상으로 전달하기보단 이성적인 이해로서 응시하고 해부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또한 단순히 충격적인 사건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이를 통해 교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플롯 자체에 충실한 냉소적인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를 영화화한 나카시마 테츠야의 <고백>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다섯 명의 시점을 통해 사건을 중계한다. 하지만 텍스트로 읽히는 소설과 달리 이미지와 사운드가 동원되는 영화는 두 매체의 형식적 차이가 관점의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물론 소설과 영화의 내러티브는 동일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건조한 화법을 유지해나가며 감정의 온도차를 발생시키지 않는 소설의 결말과 달리 영화가 좀 더 격양된 톤의 분위기를 지닌 결말을 연출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두 작품은 분명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그 차이란 기본적인 스토리의 태도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매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감상적인 접근 방식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유려한 이미지와 이펙트가 강한 락 넘버로 치장된 영화 <고백>은 건조한 소설과 달리 인위적인 연출 기법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이는 역설적으로 소설의 냉소적인 분위기를 영화적으로 반영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담담한 문체의 저변에 놓인 충격적인 사건과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소설은 활기찬 교실의 풍경을 비추는 유려한 영상의 밑바닥에 끔찍한 진실이 잠재돼 있음을 전해 듣는 과정으로 대체된다. 표면적인 영상의 느낌과 영상 속에 잠재된 분위기가 뒤틀려 있다는 감상은 고백의 시작과 함께 그것이 일종의 위장과 같은 전술적 의도임을 깨닫게 만든다.
<고백>은 이는 개인주의를 넘어선 폐쇄적 관계 회로 속에 매몰된 이들의 출현으로 병리적인 사회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현대 일본 사회의 문제에 관한 의식을 전달한다. 개인주의의 확산과 극심한 세대차, 극단적인 무관심, 공격적인 보호 본능과 충동적인 살해 등, 다양한 병리 현상이 세대의 밑바닥까지 내려오고 있음을 지적하는 충격적인 진단에 가깝다. 관심의 결여가 만들어낸 거대한 괴물이 타인의 영역까지 침범해서 삶을 파괴하고 사회 전체에 거대한 해악을 형성해 나간다는 진리, <고백>은 이 모든 과정을 단지 단 하나의 학급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 속에 온전히 담아내고 그 끔찍한 충격의 강도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다만 종종 인위적으로 조장된 위악적인 플롯과 영상이 자연스러운 감상을 방해하는 단점도 발견된다. 하지만 이마저도 어쩌면 의도적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이 냉소적인 영화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온전히 구현해내는데 충실하다. 무엇보다도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부조리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옳고 그름을 판별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 <고백>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어느 누구라도 쉽게 지나치지 못할, 소름 끼치는 충격에 가깝다. 당신의 사회는 안전한가?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가?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그 고백은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괴물은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생은 시작과 달리 예정 없이 끝난다. 죽음이 슬픈 건 그래서일 게다. 죽은 자들의 빈 자리는 그 곁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들의 생 한복판을 공허하고 황량하게 비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히어애프터>는 바로 그 죽음을 소재로 둔 영화다.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의 기억 속에 놓인 망자들과 접속하는 조지(맷 데이먼)와 인도네시아를 휩쓴 쓰나미로 인해 죽음의 목전까지 다다랐던 프랑스의 유명 저널리스트 마리(세실 드 프랑스), 그리고 죽은 쌍둥이 형을 간절히 그리는 소년 마커스(조지 맥라렌)까지, 제각기 발 딛고 선 땅 위에서 직간접적으로 죽음과 사후를 경험한 이들의 뿔뿔이 흩어진 사연이 서로의 교감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경험의 진위와 무관하게, 죽음이란 결국 개인적인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묘사하는 영화들이 대부분 그 초현실적 영역에 환상을 뒤집어씌운 결과물로 완성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히어애프터> 역시 사후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영화들이 취하던 관습을 크게 뒤집지 못한다. 빛으로 가득 채워진 무의 영역처럼 보이는, <히어애프터>의 사후 이미지는 죽음을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설정된 결과물이라지만 결국 이 불분명한 사후의 상은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저 허구적인 이미지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고 말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히어애프터>를 관통하는 핵심이 아니다.
<히어애프터>는 죽음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담보로 영화를 신비로 치장하는 영화가 아니다. 사후라는 초현실적 영역을 실존적 경험으로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통증에 관한 드라마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각각 먼 곳에 떨어진 세 인물은 죽음에 속박된 삶을 살아간다. 무시무시한 쓰나미 이미지로 극초반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블록버스터의 재난 스펙터클 유희와 달리 <히어애프터>의 쓰나미 시퀀스가 관객에게 쥐어주는 건 극심한 통증이다. 압도적인 죽음의 물결은 빠르고 신속하게 평화로운 일상을 수장시키고 수많은 삶을 집어삼킨다. 이는 <히어애프터>가 주목하는 죽음이 단지 생 이후의 단계로서의 영역 찾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생의 상실이 야기시키는 현실적 통증을 진단하기 위한 것임을 웅변하는 첫머리 말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작위적으로 설정된 상투적 요소들이 존재한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이유가 분명한 사연을 품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매개로 한 이 개별적인 사연들이 옴니버스적인 스토리 안에 상주하고 점차 그 흐름 속에서 맞물려나갈 때, 인위적인 의도의 위장에 실패하고 있다는 인상이 감지된다. 세 개의 줄기를 엮어 넣은 <히어애프터>의 옴니버스적 스토리에 종속되며 이런 인물들의 사연은 죽음이라는 경험의 단면을 소개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에 가깝다. 죽음에 근접한 경험을 해봤거나,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목격했거나, 타인의 기억과 경험 속에 내재된 죽음을 끊임없이 감지하는 세 인물은 제각각 죽음에 대한 경험의 너비를 확장해내기 위한 요소에 가까운 캐릭터들이다. 이 영화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두른 말판과 같다면, 그 주제를 품은 이야기 속에 자리한 캐릭터들은 일종의 말인 셈이다. 어떤 주제의식을 관철시키기 위해 요소들을 조정하고 있다는 인위적인 양상이 발견되며 그로 인해 내러티브는 종종 불가피하게 산만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어애프터>는 분명 특별한 덕목을 지닌 영화다. 죽은 자와 접속하는 영매의 삶을 사는 조지의 능력은 타인에게 재능이라 여겨지지만 스스로에겐 둘도 없는 저주다.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죽음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품는 이중적인 심리를 연상시킨다. 누군가와의 접촉만으로 산 자에게 남겨진 망자의 기억을 목격하고, 망자의 전언을 전달해야 하는 자신의 삶에 진력이 난 조지는 타인을 위로하면서도 정작 스스로의 삶을 돌볼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한 마리는 삶의 기반을 상실하면서도 자신이 목격한 것들 것 대해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전달하길 멈추지 않는다. 어린 쌍둥이 형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한 마커스 역시 그 죽음이 남긴 상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 모든 인물들의 삶은 누군가의 죽음이 그 주변에서 살아 숨쉬던 이들에게 남기는 영향력의 너비를 대변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의 죽음은 곁에 있던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거나 멈춰 서게 하거나 뽑아내 뒤흔든다.
영화에서 가장 명징한 순간은 마리가 겪는 쓰나미의 스펙터클을 한 차례 경험한 뒤에 등장하는 조지의 심령술 신이다. 살아 있는 이에게 죽은 이의 메시지를 전하는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끝내 치유시킨다. <히어애프터>는 그 경직된 형식과 무관하게 보는 이의 영혼을 감화시키는 명료한 찰나들이 곳곳에 자리한 영화다. 이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관통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시선이 단순히 이미지의 연출을 뛰어넘어 어떤 정서와 조응해낸 덕분일 것이다. <그랜 토리노>를 통해서 강직한 보수주의자의 현명한 죽음을 그려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제 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산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마련했다. 죽은 이들의 영역을 갈망하는 산 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히어애프터>는 결국 사자들을 위한 송가가 아니라, 그 망자들의 곁에 머물던 산 사람들을 위한 기도에 가깝다. 죽음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되레 이를 뛰어넘는 인정의 방식으로서 그 이전의 실제적인 삶을 위로하고 구원한다. 거대한 재난이든, 사소한 죽음이든, 생사는 언제나 갈대처럼 흔들린다. 죽음은 결국 삶 이후의 영역이다. 산 사람들은 그렇게 죽음을 위로하며 제 생을 구원하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 죽음을 통해 삶을 일으키는 법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엄숙하지만 온화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멀지 않은 땅에서 삽시간에 휩쓸려 나간 수많은 생들에게 깊은 애도를. 그 곁에서 숨쉬던 모든 이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이 거대한 참사 앞에 상처 입은 세계의 영혼에 치유를.
전주시의 지휘 아래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4대 사고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이 계획된다. 전주시청 한지과로 발령을 받게 된 7급 공무원 한필용(박중훈)이 실록 복본화 프로젝트를 일임하게 된다. 그 가운데 유명 다큐멘터리 감독 민지원(강수연)은 전주시청에 한지 다큐멘터리 제작 협조를 요청하고 전주시장은 그것이 복본화 작업에 시너지를 부여할 것이란 판단에서 이를 수락한다. 그것이 달갑지 않은 한필용은 이로 인해 그녀와 반목하게 되지만 점차 한지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처럼 그녀에게도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필용은 뛰어난 지공예가였으나 뇌경색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아내 이효경(예지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녀의 고향을 찾고자 노력을 기울인다.
<달빛 길어올리기>, 시적인 제목을 지닌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작품은 영화의 스토리와 같은 맥락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을 진행하는 전주시장 송하진은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민병록 교수에게 한지를 소재로 한 영화 제작을 의뢰했고, 이는 임권택 감독에게 전달됐다. 판소리와 민속화라는 <서편제>나 <취화선>, <천년학>이 그러했던 것처럼 <달빛 길어올리기> 역시 민족적인 정서를 발굴하는 극영화라는 점에서 임권택의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은 세계다. 다만 그 전례가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는 것과 달리 <달빛 길어올리기>가 관영적인 의뢰를 통해서 제작된 작품이란 점에서 출발점이 다르다. 물론 <달빛 길어올리기>가 관영적인 홍보에 충실한 기능적인 영화라는 지적이 아니다.
의외로 <달빛 길어올리기>는 작품의 제작 동기와 무관하게 임권택 감독의 개인적인 소망이 간절하게 투영된 한지 영화로 완성됐다. 특히 <달빛 길어올리기>는 그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보다 차별적인 형식의 시도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극영화의 형식을 표방하고 있지만 <달빛 길어올리기>는 다큐적인 면모가 보다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실상 전주시청의 실록 복본화 작업에 참여했던 7급 공무원의 실화가 바탕이 된 드라마투르기 속의 인물들은 한지라는 주인공을 수식하기 위한 장치처럼 삽입된 것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한필용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서사에 몰입하던 관객은 시점숏으로 관찰되던 한지 수공예품들이 갑작스럽게 정직한 인서트 숏으로 대체되는 광경 앞에서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극영화로서의 요소와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두 요소가 밀착하지 않고 분리된,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방식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형식성의 실패처럼 보이지만 다시 한번 되짚어보면 그 무리수를 감안하고 밀어붙인 창작자의 의도 안에서는 성공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실에서 점차 그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가는 한지를 조명하고자 한 임권택 감독은 그 소재 자체를 조명하는 것이 극영화적인 형식성의 완성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임권택의 세계관에 익숙한 이들에게 굉장히 낯선 형식의 영화가 될 것이며 반대로 그런 형식성을 기대하지 않았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당혹스러운 감상을 부여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어쩌면 임권택 감독은 한지라는 전통적 가치가 현실 속에 놓인 처지를 자신의 입장으로 이해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추측을 배제하고 한지 자체의 소재를 조명하는 이 영화의 방식을 고려했을 때, <달빛 길어올리기>는 감독 자신이 한지라는 소재 자체의 조명에 자신의 세계관이 함몰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형식적인 실패를 밀어붙인, 의도적인 성공의 결과물에 가깝다.
그런 형식성의 차이와 무관하게 이 영화는 역시 임권택 감독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내공의 시선을 견지한 작품이다. 종종 임권택 감독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단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동적인 선경은 이 영화에서도 두루 발견된다. 한필용과 민지원이 오롯이 빛나는 달 아래서 차를 타고 가는 나이트신이 담긴 원경은 고요하고 그윽하다. 달밤 아래 깊은 계곡 속에서 전통적인 한지 제조에 전념하는 이들의 풍경으로 갈무리되는 결말 역시 숭고하고 애잔한 정서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모든 풍경들은 물리적인 기능성으로 대변될 수 없는, 장인의 내공을 통해 살아있는 풍경 속에서 길어 올린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임권택 감독이 <창>(1997)을 연출한 이후로 15년 만에 현대극을 완성했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이는 어쩌면 <천년학>에 걸린 100번째 영화라는 수식어의 무게를 뒤로 한 채, 자신 스스로도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다는 임권택 감독의 집념을 보다 강력하게 반영한 또 하나의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대외적 의미를 배제하고 단순히 이 영화가 지닌 현대극적인 완성도를 본다면 적절한 수준의 성과를 지니고 있다고 평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내러티브의 흐름과 달리 플롯과 플롯을 잇는 과정에서 기이한 단절이 발견된다. 인과적으로 플롯을 마무리지어야 할 대사들이 종종 삭제되거나 시퀀스를 정리할 마지막 숏이 증발된 느낌이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일종의 과업처럼 완성된 작품이지만 그 의무에 짓눌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존중받아도 좋을 작품이다. 하지만 그 의도에서 벗어나 냉정한 시선으로 이 영화를 정리한다면 임권택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전달을 넘어서는, 한 영화의 완전한 잉태에는 다다르지 못한 미완의 야심처럼 보인다.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길어 올린 한지와 같지만 그 정성스러운 낱장의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듯하여 일말의 아쉬움을 떨치기가 어렵다. 깊게 배어든 정성을 쉽게 펼쳐내기가 쉽지만은 않았던 것일까.
미키 워드는 WBU 웰터급 챔피언 경력을 지닌 미키 워드는 화끈한 난타전을 불사하는 인파이터로 정평이 난 복서였다. 하지만 그가 챔피언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메사추세스 로웰의 슬럼가에서 태어난 그는 배다른 형제와 누이들을 포함한 9남매 가운데 유일한 남자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재능 있는 프로복서였다지만 약물에 중독된 퇴물 복서에 가까운 형의 트레이닝은 언제나 아슬아슬했고, 푼돈에 가까운 파이트머니를 좇다 아들을 백업선수로 전락시킨 어머니의 매니지먼트는 참담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경기 스타일처럼 정신력으로 자신의 삶의 키를 놓지 않고 전진했다.
<파이터>는 바로 앞에서 설명한 미키 워드(마크 월버그)에 관한 전기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파이터>는 단순히 미키의 고단했던 삶과 그 삶을 극복해낸 인간의 집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이터>는 주인공을 접대하지 않는 작품이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주인공을 아웃포커싱시키고 주변의 인물들에게 포커싱을 맞춘 작품이라 해도 될 것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미키 워드의 인간 승리적 드라마를 정직하게 연출해내는 빤한 방식보다도 그 주변부에 놓여 있는 이들의 부조리를 관찰하는 것이 보다 흥미로운 일인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 흥미로운 인물들은 바로 미키 워드의 형 디키 에클런드(크리스찬 베일)와 그의 어머니(멜리사 레오)를 포함한 9남매들, 그리고 그의 애인 샬린 플레밍(에이미 아담스)이다.
이런 측면은 <파이터>에 대한 장르적인 기대감을 바로 잡게 만(들도록 유도하고 싶게 만)든다. <록키>를 비롯한 아메리칸 드림의 복싱영화들이 주로 취하던 드라마틱한 스토리, 즉 가난한 복서가 지난한 삶 속에서 결국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은 <파이터>의 골자가 될만한 유력한 스토리 문법에 가깝다. 하지만 데이비드 O. 러셀은 이런 전형적인 문법에 따르는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의 영화를 원한 것 같다. 쉽게 정리하자면 <파이터>는 어떤 유망한 복서를 둘러싸고 있는 어느 지난한 가족에 관한 실화를 재현하는 가족드라마다. 이는 복싱영화라는 측면에서 얻어낼 수 있는 주인공의 성장통을 희석시키고 스포츠영화로서의 쾌감 역시 반감시키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의외적이다.
하지만 <파이터>는 그 의외적인 선택이 되레 전략적인 목표를 거뒀다고 말해도 좋을 결과물로 완성됐다. 이는 저마다의 인물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서로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자리하고 있는 덕분이다. 이로 인해 <파이터>는 캐릭터 영화와 같이 캐릭터 자체를 지켜보는 관찰적인 재미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결과를 보장하는 건 배우 개개인의 극대화된 역량이다. 마크 월버그가 ‘단단한 주먹’이라면 크리스찬 베일은 ‘현란한 스텝’에 가깝다. 체급을 바꾼 선수의 경기를 관람하는 것처럼 의외적인 면모를 선보이는 에이미 아담스도 돋보인다. 관록 있는 선수가 경기를 이끌어 나가듯 캐릭터를 운영하는 멜리사 레오는 영화의 흐름을 탁월하게 리드한다.
<파이터>가 진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둔 이야기라는 점에서 오차범위를 활용할 자질의 여분이 부족하다. 이는 되레 이 영화의 연출력과 스토리 흐름의 선택을 보다 돋보이게 만든다. 복싱 시퀀스를 마치 중계적인 광경처럼 연출해내는 모습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완성된 영화라는 것을 스스로 감추지 않고 있다는 방증에 가깝다. 이는 <파이터>가 실화를 바탕으로 둔 영화적 각색이라는 느슨한 우회론을 택하지 않고도 전형적인 이야기에서 탈피해냈다는 점에서 소재 자체가 지닌 가능성의 단면이 어디에 놓여있는가를 탁월하게 파악했다고 인정하게 만든다. 물론 하나 같이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는 배우들의 열연이 없었다면 이런 장점들은 완전히 묻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마치 큰 기대를 품게 만들지 않는 선수의 인상적인 경기 배후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력자들의 정체를 알게 되는 느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