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하나와 몸통 밖에 남지 않은 여자 마네킹, 태엽을 감아 움직이는 장난감 물고기, 그리고 그들에게 (진짜 당신이 알아먹을 수 있는) 말을 거는 카멜레온 한 마리. 그는 연기자다. 그는 자신이 선 땅이 자신의 무대라 여기며 자신을 최고의 연기자라 자부한다. 그러나 곧 자신이 두 발로 딛고 선 그 땅이 안주할 수 없는 무대임을 깨닫게 된다. 사막을 관통하는 아스팔트 한 가운데에 내동댕이쳐진 그는 비로소 자신을 위해 마련된 그 에덴이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어항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떨어진 모하비 사막이 생전 처음 만난 생지옥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뜨거운 사막 위에서 거듭 되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하지만 뒤늦게 해답을 얻는다. “누군들 될 수 있는, 나는 랭고다.”
디즈니의 해양 어드벤처 블록버스터 <캐리비안의 해적>시리즈를 연출한 고어 버빈스키의 첫 번째 애니메이션 연출작 <랭고>는 카멜레온으로 환생한 잭 스패로우에 관한 영화이거나 <캐리비안의 해적>의 무대를 사막으로 옮긴 웨스턴 무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건 (잭 스패로우를 연기하던) 조니 뎁을 카멜레온 형태로 리모델링한 주인공 랭고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동물 캐릭터들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그 중에서도 세 번째 시리즈였던 <세상의 끝에서>에서 구체화됐던 잭 스패로우의 물음은 <랭고>에서 또 한번 반복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랭고의 물음은 잭 스패로우의 그것처럼 자신에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정체성 찾기의 반복이자 자문에 가깝다. 동시에 이는 연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어느 인물이 겪게 되는 정체성의 모순 그 자체와도 맞닿는다. 애초에 카멜레온이라는 설정 속에 조니 뎁을 녹였다는 것 자체가 의도적인 농담처럼 보인다.
수많은 동물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랭고>는 의인화된 캐릭터들을 관습적인 방식으로 수용하는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의 형태와 거리를 둔 특수한 작품이다. 명랑하고 귀여운 개성을 지닌 각양각색의 동물 캐릭터들이 의인화된 행위를 펼치는, 혹은 그 나름의 동물적 특성을 캐릭터의 개성으로 연결시키는, 오랜 애니메이션의 관습적 태도와 달리 이 작품 속의 동물들이 펼쳐 보이는 행위와 언어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커뮤니티를 일찍부터 형성하고 있었던 고유의 풍경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이 단지 동물 탈을 쓴 사람들의 거짓 흉내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 더 발전시키자면 이는 동물들로 둘러싸인 하나의 가상적 커뮤티니의 세계, 혹은 평행우주를 염탐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귀엽거나 앙증맞기보단 거칠고 사나우며 메마른 웨스턴 세계의 비정성을 품은 이 애니메이션 속의 캐릭터들은 그 자체로서 역설적인 냉소를 뿜어낸다.
그 표면상의 이미지만으로도 <랭고>는 분명 웨스턴의 클리셰로 치장된 애니메이션이다. 쓸쓸한 사막지대 속에 자리한 낡은 풍경 속에는 미서부 개척시대의 정서를 온몸으로 간직한 억척스러운 풍경들이 갖은 형태로 그려 넣어져 있다. 선악의 대비가 불분명한 웨스턴 정글의 세계관 속에 놓인 인물들은 명확한 교훈적 의식으로 극의 기승전결을 밀고 나가지 않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소동극 속에서 발견되는 건 파란만장한 모험 속에서 우연과 필연의 여정을 거쳐 자아를 향해 달려들게 되는 도마뱀 랭고의 뚜렷한 여정이다. 그리고 이따금 튀어 나오는 허무주의적인 위트가 발견되고 인간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부정할 수 없게 드러나며 아동적인 취향을 완전히 걷어낸 형태로 극이 진전된다. 이 자체가 이 애니메이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들지만 동시에 이런 태도는 이 애니메이션의 정체성을 보다 강력하게 드러내는 일종의 역설적인 자아로 이 작품을 단련시킨다. 기시감과 미시감 사이에 정체성을 확보한다.
이 모든 특성을 비롯해서 할리우드의 VFX효과를 책임지는 ILM의 기술력으로 완성해냈다는 점 역시 픽사와 드림웍스의 왕중왕전이 펼쳐지는 애니메이션 월드에 새롭게 머리를 든 <랭고>의 특이점이라 할만하다. 물론 동화적이고 순수한 애니메이션의 기질을 박차버리듯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정서와 이미지로 무장한 <랭고>는 관객의 취향에 따라 명확하게 호불호가 갈릴 만한 작품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 호의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건 이 작품이 할리우드 장르물들의 관습을 포용하면서도 그것을 끝내 뭉개버리는 태도로서 되레 진화적인 감상으로 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시감으로 범벅이 됐음에도 그 모든 이미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며 단지 그것이 모호하거나 애매한 태도로서 감상의 뒤편에 남는 대신, 보다 적극적으로 호기심을 자극하고 감상을 진전시킨다. 할리우드 영화들의 관습을 대거 도둑질하듯 끌어다 차용하며 그런 관습적 전통들을 하나의 웃음거리로 만들지만 끝내 그 모든 가치들을 훼손시키지 않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개성을 설득시키며 이를 통해 색다른 위트와 문법들을 완성시켰다. 마치 장인들이 의도적으로 장난을 벌이고 있는, 심오한 소품에 가깝다.
늑대 사회의 계급은 사회지도층을 일컫는 ‘알파’와 늑대 사회의 하층민이나 다름없는 ‘오메가’로 구분된다. 케이트는 알파고, 험프리는 오메가다. 험프리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케이트와 달리 험프리 눈에는 케이트가 김태희고 전도연이다. 하지만 케이트가 험프리에게 관심을 가진다 해도 그건 단지 사회지도층의 윤리이자, 일종의 선행으로 끝나야 할, 오래된 늑대 사회의 계급적 운명론이다. 어쨌든 <알파 앤 오메가>는 늑대 종족을 구분하는 두 계급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케이트와 험프리의 모험과 로맨스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생소한 개념이겠지만 이 작품에서 내세우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늑대 사회의 계급은 단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늑대 사회는 세 계급으로 자신들의 우열을 구분하는데 그 순열에 따르면 알파, 베타, 오메가로 나뉜다. <알파 앤 오메가>는 계급의 양 극단을 지칭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계급적 배타성을 통해 늑대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 즉 늑대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출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설정이 그러할 뿐, 이 애니메이션이 셰익스피어의 그것(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지만 어쨌든 그것)처럼 절절한 로맨스의 비극 따위를 연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이 작품의 골자는 간단하다. 계급적 차이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쌍의 늑대가 있고, 그들 중 낮은 계급에 속하는 수컷이 암컷을 짝사랑하지만 사회지도층의 윤리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암컷은 수컷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종족의 미래를 위해 사랑하지 않는 이웃 늑대 부족의 사회지도층 수컷과 백년가약을 맺고자 한다. 하지만 그리 된다면 이야기는 재미없어지는 법, 갑작스런 인재에 휘말려 험프리와 케이트는 자신들의 보금자리에서 먼 곳으로 떠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두 사람의 진정한 관계가 재정립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이건 늑대 사회로 위장한, 계급적 신분차를 뛰어넘는 남녀의 로맨스물이다. 중간중간 골자로 코믹한 설정들이 끼어드는 로맨틱 코미디인 셈이다. 결국 중요한 건 이 애니메이션이 그 빤한 설정들을 불식시킬 만큼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나 탁월한 발상의 전환을 지니고 있느냐는 물음에 답변할 수 있는가라는 지점일 것이다. 하지만 <알파 앤 오메가>는 이에 충실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근거가 빈약한 작품이다. 픽사와 드림웍스가 매년 타이틀 매치를 벌이고,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같은 몇몇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다크호스처럼 떠오르기도 하는 전세계 애니메이션의 링에 등장한 라이온스 게이츠의 <알파 앤 오메가>는 어떤 특이성이나 기발함을 발견하기 어려운, 소위 요즘 날고 긴다는 애니메이션 작품 가운데 가장 몸값이 떨어지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 흉내 내는 늑대들과 몇몇 동물들이 등장하는 광경은 드림웍스 캐릭터들의 실패적인 아류처럼 보이고, 그들이 구사하는 유머란 다소 지나친 표현을 빌리자면 어디서 웃어야 할지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렵다. 사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그 역할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가 어려울 만큼 낭비적이며 전반적인 스토리텔링 역시 불필요한 사연을 늘려나간다는 인상을 넘을 만한 감상을 얻기 어렵다. 어드벤처로서 추천할만한 시퀀스를 찾는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물론 3D의 입체감을 활용하겠다는 야심만으로 그득해 보이는 몇몇 시퀀스는 입체안경의 쓸모를 재확인시켜주겠지만 그게 최선은 아니다. 한 가지 의미를 짚어본다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라이온스 게이츠의 애니메이션 사업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으로서의 쓴 유산이 될 것이라는 조언 정도가, 그게 최선의 칭찬이 될 것 같다. 물론 <알파 앤 오메가>를 (사실상 이 리뷰 따위가 필요 없는) 순수한 아동들을 위한, 동화적인 교육용 애니메이션 정도로 여긴다면 앞선 박한 언어들 따위는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발레는 가혹한 고통을 딛고 서야 완성되는 예술이다. 온 몸을 지탱하는 발가락 끝에서 전해져 오는 첨예한 고통을 지우고 자신이 두 발을 디디고 선 무대 위에서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감정에 몰입할 때, 비로소 한 명의 발레리나가 태어난다. 하지만 뉴욕의 발레리나들에게 이는 단지 입문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우수한 발레 유전자를 지닌 인재들이 모여드는 뉴욕의 발레 계에서 무대에 설 자격을 지닌 단 한 사람이 된다는 건 어쩌면 가혹한 일이다. <블랙 스완>(2010)은 바로 그 우아한 세계 뒤편에 자리한 치열한 경쟁과 은밀한 암투를 주목한다.
뉴욕시립발레단의 발레리나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새 시즌의 공연작인 <백조의 호수>의 프리마돈나를 갈망한다. 하지만 <백조의 호수>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아는 그 순수하고 고결한 백조, 오데트를 연기하는 것만으로써 이 무대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순수한 백조와 함께 요염한 흑조, 오딜을 연기해내는 자만이 그 무대를 차지할 수 있다. 훌륭한 기량을 갖춘 니나는 결국 발레단의 공연 감독인 토마스(뱅상 카셀)로부터 주인공에 발탁되지만 자신이 지니지 못한 요염함을 갖춘 발레리나 릴리(밀라 쿠니스)를 경계하게 되고, 차츰 요염한 흑조 연기에 대한 강박과 두려움에 빠져 든다.
앙상한 영광 밖에 남지 않은 어느 퇴물 프로레슬러의 현재를 조명한 <더 레슬러>로 자신의 경력 안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또 한번 화려한 발레 무대 뒤편의 혹독한 현실을 정신분열적인 방식으로 묘사해낸다. <블랙 스완>은 예민한 심성을 지닌 발레리나가 자신의 결점에 대한 강박으로 끝내 자기 파멸적인 성장을 이뤄버리는 과정을 면밀하게 연출해낸 작품이다. <더 레슬러>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현실을 둘러싼 갖가지 환경들을 세심하게 스크린에 수집해 넣으며 그 속에 자리한 인물의 심리를 날카롭게 포착해내는 <블랙 스완>에서도 아로노프스키의 장기는 유효하다.
<더 레슬러>가 남루한 영광을 덕지덕지 제 몸에 기워 넣은 채 누추한 현실을 버텨나가는 늙은 레슬러의 뒷모습을 애정 어린 연민으로 응시하는 전기라면 <블랙 스완>은 주변부의 기대와 스스로의 결핍 속에서 발전을 갈망하는 젊은 발레리나가 결국 파멸적인 성장을 이뤄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목격에 가깝다. 마치 뭉뚝한 연필심을 뾰족하게 깎아나가는 것처럼 극도로 첨예해지는 인물의 심리를 위태롭게 포착해내는 <블랙 스완>을 통해 관객은 그 심리상태 속에서 완성되는 발레리나의 연기적 극한을 경이롭게 목격하게 된다. 니나의 심리적 강박과 불안의 다양한 양태들은 악몽에 가까운 혼란으로 구체화되며 점차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수순으로 돌입한다. 아로노프스키는 인물 당사자의 다양한 경험적 착시를 관객이 공유하도록 이양시키며 이를 통해 인물의 심리적 강박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이시킨다. 이런 방식은 결국 니나라는 인물이 겪게 되는 혼돈을 관객의 감상적 심리로 연동시키고 그런 심리적 긴장감은 극의 말미에 다다라 얻어지는 감상적 전율의 밑천으로 축적된다.
물론 이런 일련의 감상 과정을 이루는 건 아로노프스키의 공이기도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공헌은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에도 놓여 있다. 이미 익숙해진 할리우드 배우 중의 한 명인 나탈리 포트만은 <블랙 스완>에서 기존의 자신이 해왔던 연기적 보폭 속에 놓여있지만 그 깊이에 있어서 궁극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의 연기적 극단을 완성한다. 유년 시절 발레 경험이 있는 그녀는 새로운 연마를 통해 사실적인 발레 동작을 구사해내며 자아의 붕괴와 자멸적 파괴를 거듭하는 인물의 성장을 치밀하게 연기해낸다. 이는 단지 탁월하다고 평하는 수준을 넘어 압권이라 해도 좋은 결과물이라 장담해도 좋다. <블랙 스완>에서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는 앞으로 그녀가 배우 생활을 거듭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경력의 전후를 이루는 새로운 기준이 될만한 것이다. 마저 펴 보이지 않았던 날개 한 뼘을 드러냈다고 할까. 또한 <블랙 스완>의 프리마돈나를 보좌하는, 뱅상 카셀을 비롯한 주변의 배우들은 각자의 포지션에서 최선의 연기를 선보인다. 다만 영화와 무관하게, 퇴물 발레리나로 출연하는 위노나 라이더는 마치 자전적인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는 착각을 느끼게 만든다.
발가락 끝에 모든 체중을 실어 회전하는 발레리나의 우아한 동작이 실로 위태로운 곡예인 것처럼, <블랙 스완>은 화려하게 날갯짓하는 발레 무대 뒤에서 치열하게 발버둥치는 발레리나들의 세계를 다루며 스포트라이트 뒤로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조명한다. 사실 이런 점에서 <블랙 스완>은 딱히 새롭거나 신선한 이야기는 아닌 셈이다. 누구나 상상할만한 이면의 세계를 보다 생생하게 비춘다는 것 이상의 놀라움을 넘어서는 영화는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 간편하면서도 식상한 방법론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며 완벽한 몰입의 결과물로 완성해냈다. 궁극의 경지에 다다른 발레리나의 파멸적인 완성은 극한의 긴장감을 넘어 압도적인 아름다움의 형태로서 지울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결말부에 다다라 얻어지는 이런 경이적인 감상은 말 그대로 놀라운 영화적 체험에 가깝다. 성장이나 완성과 마찬가지로 파괴나 파멸 역시 하나의 형태로서의 극단이라는 점을 명심한다면, <블랙 스완>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극단의 대리 만족, 바로 체험의 극한인 것이다.
한 남자가 있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인텔의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진짜 존재감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그는 언제나 틈나는 대로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가 정해놓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생의 쾌감을 좇아갔다. 그런 어느 날처럼 그는 무작정 유타주의 블루존 캐넌으로 도보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예기치 않게 동행을 만나 자신만의 루트 안에서 그들에게 새로운 쾌감을 안긴 뒤, 또 다른 영역으로 혼자 떠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던 그 사내는 위풍당당하게 협곡을 건너기 위해 틈새에 놓인 바위 위에 발을 내디딘다. 순간 발을 지탱하던 바위가 떨어졌고 그는 협곡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오른손이 협곡 사이에 끼인 바위 틈새로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통증보다도 경악스러운 건 결코 손을 뺄 수 없다는 것. 누구도 찾지 않는 깊은 협곡 속에서 오른팔을 볼모로 남자는 갇힌다. 그리고 결국 그 남자는 127시간을 버티다 자신의 괴사된 오른팔을 잘라내고 사막을 걸어 나와서 비로소 구조된다. 이는 실화다. 아론 랠스톤이 바로 그다.
15분. <127시간>이라는 영화의 타이틀은 영화가 시작되고, 영화의 타이틀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잊어버렸을 즈음에서나 떠오른다. <127시간>은 거기서 시작되는 영화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스타일리스트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시 새롭게 구축해내는데 성공한 대니 보일은 <127시간>을 통해 자신만의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동시에 서사적 구조의 운용력을 탁월하게 검증해낸다. 실화에 바탕을 둔 <127시간>은 그 사연만으로도, 오른팔을 잘라내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냈다는 어떤 남자의 진짜 사연만으로도 특별해질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대니 보일의, 그리고 제임스 프랭코가 연기한 <127시간>은 단지 그 사연을 재현한 영화라는 것으로만 언급될 작품이 아니다. 혹은 대니 보일의 스타일리쉬한 영상, 제임스 프랭코의 괄목할만한 연기, A.R.라만의 탁월한 음악도 주인공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결과적으로 그 남자의 생이 증명한 무언가를 위한 것이다.
오른팔이 협곡과 바위 사이에 끼인 채, 협곡에 갇힌 남자가 탈출하기까지 견뎌야 했던 127시간의 여정을 90여분의 러닝 타임 내에 녹여낸 <127시간>은 사실 어느 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매우 심심해 보이는 이야기인 것도 사실이다. 최근 개봉된 <베리드>와 비교되기도 하는 -대조가 아닌- 이 작품은 하나의 공간에 놓여 있으나 그 공간적인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 극복해내는, 어쩌면 그것을 통해 작품의 아이덴티티를 보다 확고하게 구축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라 여기던 사내가 좁은 협곡에 갇힌 채 자신의 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야금야금 좀먹어 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오른팔을 버리는 자해에 가까운 탈출을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생을 구원하게 된다는 과정을 재현하는 <127시간>은 단지 아론 랠스톤이라는 실화적 인물을 위한 장이 아니다.
<127시간>은 단지 어느 한 인물의 극한에 다다르는 자기 극복의 체험기가 아닌, 극한의 위기 속에서 생의 끝에 다다를 수도 있었던 어느 한 인간의 승리를 전 인류적인 승리로 승화시키는 작품이다. 협곡과 바위 사이에 끼인 자신의 오른팔을 빼내고자 안간힘을 쓰던 아론이 누군가의 구조를 기다리며 버티다 그 사이에서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이 당연하다 여기던 햇살 한줌의 은혜와 가족이라는 존재의 위안을 깨닫다 결국 생을 위해 자신의 오른팔을 버리고 지상으로 올라와 누군가의 도움으로 생을 되찾고 그 이상의 생을 깨닫게 되는 여정이란 그 참담했던 지난 날만큼이나 아름답고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자신의 팔을 자르는 남자의 모습이 처참하기 보단 통쾌함으로 느껴진다는 건 <127시간>이 그만큼 인간의 한계, 즉 자기 육체의 일부를 포기하고서도 생의 전부를 놓을 수 없다는 인간의 집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쾌감 덕분일 것이다. 이는 육체의 일부를 상실하고도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는 누군가의 삶을 지켜보는 것과 유사하다. 결과적으로 완전한 삶을 이루는 기본적인 조건에서 벗어나서도 결과적으로 삶은 가능한 것이라는 일종의 완전성에 대한 해방감이 전달된다. <127시간>은 그 실화 자체가 주는 일종의 경이감을 보다 현실적인 체험 혹은 체감으로 전달하는 진정한 인생실용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대니 보일의 스타일리시한 감각은 <127시간>에서도 빼어난 능력을 자랑한다. 분할컷으로 시작되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중간중간 다각도의 시점으로 상황을 묘사해내는 연출력은 <127시간>의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영화에 역동적인 인상을 부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가장 뛰어난 자질이다. 또한 홀로 협곡 속에 갇힌 채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감정적 변화를 겪은 실존인물을 대신해 그런 과정을 생생하게 대변해낸 제임스 프랭코의 연기 또한 탁월하다. 하지만 <127시간>을 이루는 모든 훌륭한 요소들은 하나 같이 어떤 하나의 의미를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들에 가깝다. 그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다. 식상하고 지루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127시간>은 그 심플한 사연을 이토록 거대한 가치로 승화시키는 영화다. 놀라운 실화의 의미를 넘어선 그 의미를 재발견하고 보다 쉽게 이해시킨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실화다. 적어도 당신을 감동시키기 위해 조작된 사연이 아니다. 그러니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오른팔을 내주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그건 바로 지금 당신의 삶이다.
터벅터벅,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여인의 시선이 공허하다. 두서 없이 움직이는 발걸음은 본능적으로 여인을 어디론가 밀어내고 있다. 멀리 달아나야 한다. 하지만 곧 여인의 눈에 어떤 깨달음이 맺힌다. 뒤를 돌아보고 다시 돌아서서 길을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곧 현실을 체감한다. 숨기고, 그 와중에 무언가를 먹는다. 살기 위해서 그렇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인의 귀 속으로 사이렌 소리들이 들어찬다. 그리고 떠오른다. 묵묵하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만추, Late Autumn. 그렇게 영화는 관객 앞에 떠오른다.
(필름 원본이 유실됐다고 알려진) 이만희 감독의 동명 원작을 김수용 감독이 한차례 동명의 리메이크작으로 완성한 바 있는 <만추>는 바닥으로 나뒹구는 낙엽이 되기 전, 혼신의 힘을 다해 제 몸을 빨갛게 물들이며 강렬하게 마지막 삶을 치장하는 단풍과 같은 멜로다. <만추>는 살인죄로 체포돼 수감된 여인이 어머니의 부음으로 7년 만에 3일 동안의 외출을 얻게 되고, 그 짧은 외출 중에 우연히 만나게 된 남자가 서서히 자신을 사랑으로 물들인다는 것을 직감하고 한 순간 강렬한 열애에 빠져든다는 로맨스물이다. 이미 같은 제목으로 두 번의 반복을 거친,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동명의 로맨스물로 리메이크한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이 묵은 감정의 허물을 벗기듯 오랜 신파의 유효기간을 다시 한번 연장한다.
(동명의 제목을 지닌) 이만희와 김수용의 <만추>가 시대상의 변화와 연출 형식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결과물이라면 시애틀의 이국적인 풍경으로 리모델링된 김태용의 동명 리메이크물은 그 상대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차별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애틀의 풍경 속에 놓인 동양의 남녀는 자신들이 밟고 선 그 이국에서 온전한 타인으로 대비되며 유령처럼 도시를 배회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잉태하지 않았던 이국의 풍광 속에 머무는 두 남녀의 몽타주는 그 단적인 풍경만으로도 두 사람의 외로움을 한껏 드러낸다. 복역 중인 수감자 신분으로서 3일만의 외출을 허락 받은 여자와 자신의 육체를 이국에서의 새로운 생을 위한 밑천으로 삼은 남자의 만남은 그리하여 운명적일 수 밖에 없다.
<만추>는 시작부터 끝까지 감정을 증발시켜버리듯 적막한 감상 속으로 관객의 시선을 묵묵하게 걷게 만든다. 대사 하나 없이 탕웨이의 초췌한 표정만을 스크린에 가득 채운 오프닝부터 모든 서사의 뒤에 홀로 남겨진 채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기약할 수 없는 미래를 응시하는 탕웨이의 설렘을 여운처럼 남긴 채 새로운 시작을 기원하는 엔딩까지, <만추>는 무언가를 짐작하게 만드는 시작에서 염원하고 싶은 현실에 대한 기도로 끝을 맺으며 관객을 점차 갈망하게 만든다. 뿌연 안개가 걷히듯 러닝타임의 흐름과 함께 서서히 기승전결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서사는 감정적 자극을 최대한 차단하며 훈(현빈)과 애나(탕웨이)의 개인적 서사를 유추할 수 있도록, 그리고 두 인물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돼 나가는지 찬찬히 관찰할 수 있도록 강물처럼 서서히 극을 떠내려 보낸다.
범상치 않은 전력을 지닌 두 남녀가 시애틀에서 우연히 만나 단 3일 동안 애틋한 감정을 나누고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경험한다. 서서히 서로에게 진한 감정을 물들이는 두 남녀의 거짓말 같은 러브스토리가 담긴 <만추>는 두 인물의 화학작용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온도차로 관객의 감상을 지배하는 멜로물의 특성에 발을 들이기 보단, 되레 감정을 증발시키고 저온으로 숙성된 감정을 결말에 다다라 여운으로 휘발시킨다. 고즈넉한 가을로 접어든 시애틀은 적막하고도 고요하며 그 속에서 방랑하다 조우하듯 마주친 두 동양 남녀의 사연은 저마다 처연한 짐작을 부르며 그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그만큼 숙연하게 무르익는다. 김태용의 <만추>는 마치 두 사람의 관계적 진전이 동시간대에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경험적 교감으로서 설득해낸다. 외로운 두 인물의 감정이 자연히 공감대를 이루고, 이런 감정적 교감의 가능성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넘어 점차 감정적인 깊이를 형성하게 된다.
백지와 같이 다양한 감정을 그려 넣기 좋은 표정을 지닌 탕웨이는 <만추>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평가될만한 자원이다. 그녀는 현빈의 들뜬 연기를 상대적으로 보완하는 동시에 극적인 흐름 안에서 분위기의 편차가 큰 <만추>의 균형을 잡아주는 추와 같이 자리한다. 현빈 역시 자신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캐릭터와의 궁합도 적절하다. 현빈과 탕웨이의 이례적인 조합도 김태용 감독이 포착한 수려한 풍경 속에 잘 녹아 드는 인상이다. 이국의 낯선 풍경 속을 떠도는 외로운 타인들의 짧고 강렬한 러브스토리, <만추>는 생의 끝을 예감하듯 빨갛게 제 몸을 태운 단풍이 낙엽으로 떨어져 나뒹굴기 직전의, 애잔하고 서글픈 설렘을 전하는 가을의 끝과 같은 멜로다.
사회지도층 공주로 태어났지만 마법의 금발을 타고난 덕분에 기구한 운명 속에서 성장한 소녀 라푼젤, 그녀는 자신을 유괴한 탐욕스런 여인 고델을 어머니로 알고 그녀의 반협박적인 모성애 연기에 속아 높은 탑 속에서 갇히듯 자라났다. 덕분에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긴 금발만큼 자라난 라푼젤의 성에 수배를 피해 달아나던 도적 플린이 침입하고 우연히 그를 붙잡게 된 라푼젤은 그가 지닌 보물을 숨긴 뒤, 자신의 소원과 맞바꾸자는 제안을 한다.
그림형제의 고전동화 <라푼젤>을 각색한 디즈니의 50번째 애니메이션 <라푼젤>은 묵은 영광 속에서 고성처럼 낡아가던 ‘디즈니 캐슬’의 새로운 리노베이션을 선언하는 작품과 같다. 지난 2009년,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를 각색한 <공주와 개구리>로 셀애니메이션 명가의 저력을 21세기에 증명한 바 있는 디즈니는 <라푼젤>을 통해서 CG애니메이션에서도 디즈니가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라푼젤>은 디즈니가 처음으로 시도한 CG애니메이션이 아니며 <볼트>를 통해 이미 자신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라푼젤>은 고전동화의 현대적 각색이라는, 디즈니의 전통적인 스토리 양식을 새로운 애니메이션의 기법 안에 녹여내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픽사의 수장 존 라세터는 디즈니의 전통적인 양식에 새로운 감각을 수혈해내며 디즈니를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냈다.
고전동화의 텍스트를 밑그림 삼아 다채로운 캐릭터를 세워 넣고, 위트 있는 활기로 덧칠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특유의 활기는 <라푼젤>에서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러브스토리와 권선징악이라는 두 개의 요소는 여전하되, 새롭게 각색된 고전동화의 현대적인 운용이 돋보인다. 개성 있는 캐릭터들의 마련은 아기자기한 위트와 어드벤처로서의 활기를 더하는 탁월한 수단이다. 캐릭터의 매력이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좌우하는 가장 큰 열쇠임을 생각한다면 <라푼젤>의 캐릭터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 작품의 성과를 증명하는 단서나 다름없다. 기존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들과 같이 <라푼젤> 역시 다양한 노래와 춤으로 극적인 감정들을 고조시키며 흥겨운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라푼젤>은 분명 디즈니라는 타이틀 안에서 빤히 읽혀지는 것들을 품은, 전형적인 디즈니 클리셰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날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상투성과 전형성 안에서 줄타기를 한다. <라푼젤>은 후자에 가깝다. 누구나 알만한 이야기라는 이해를 넘어서는 건 누구나 알지만 바라고픈 이야기라는 감동이다. <라푼젤>은 픽사와 드림웍스의 시대에서도 빤하다 못해 낡아 버린 듯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가치가 여전히 지속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불식시키는 답변이다. 사랑스러운 캐릭터와 아름다운 러브스토리, 디즈니의 인장이 뚜렷한 <라푼젤>은 바로 그 이름에 걸린 기대에 어울리는, 최상품의 감동으로 채워진 디즈니의 새로운 고전이다. 누구나 바라는 그 감동, 그것이 바로 디즈니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가치이며 <라푼젤>에 바로 그것이 있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동명 고전 소설을 현대적으로 리메이크한 <걸리버 여행기>는 어쩌면 그 원작과 유사한 평행우주라고 해도 좋은 작품이다. 다만 우연히도 과거 스위프트의 그 걸리버와 다른 시대를 사는, 현대의 또 다른 걸리버(잭 블랙)가 그와 다른 소인국으로 통할 수 있는 경로 안으로 휩쓸려 들어간 결과물이 바로 이 <걸리버 여행기>(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들은 일종의 사족이며 낭비다. 결코 심각해질 수도, 심각해질 필요도 없는 이 작품의 태도 앞에서는 말이다.
제목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원작과 마찬가지로 소인국으로 간 걸리버의 경험을 담은 것이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이 <걸리버 여행기>의 목표다. 물론 인간 세계에 관한 혐오적 풍자를 가득 담아낸 조나단 스위프트의 의도는 논외다. 단지 소인국으로 간 현실의 인간이 겪는 좌충우돌 그 자체를 전시하는 것이, 그리고 이를 통해 관객의 흥미를 돋우는 것이 이 영화의 확실한 목표지점인 셈이다. 물론 이 영화의 핵심적인 묘미는 거인 ‘잭 블랙’의 위트 있는 활약상을 지켜보는 것 그 자체일 것이다. 단지 그 익살스러운 표정만으로도 웃음을 자아내는 잭 블랙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87분, 이는 곧 이 영화가 딱히 많은 이야기를 할만한 여력이 없는 작품임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단점이 아니다. 어떤 아이디어에서, 구체적으로 현대판 ‘걸리버 여행기’를 만들어보자는 발상에서 출발한 이 영화의 두 번째 스텝은 그 발상을 현실로 착상시키기 위해 기본적인 요소들을 채워 넣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자신의 번뜩이는 아이디어 이상의 탁월한 이야기를 설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상적일 수 없는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최대한 짧은 러닝 타임을 할애하는 것이니까.
그런 이해에도 불구하고 <걸리버 여행기>가 너무도 손쉽게 모든 상황들을 굴려 보내고 있다는 건 결코 간과하기 어렵다. 이르시니 행하노라, 라는 식이다. 소인국의 인물들은 말만 하면 무엇이든 이뤄내는 만능 재주꾼들이며 그들의 현실을 두르고 있는 모든 환경들을 고려할 때 결코 이뤄질 수 없을 것까지 완성하고 마는 놀라운 재주를 지닌 이들임에 틀림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유치한 지적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딱히 상식적인 상황을 마련하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영화다. 그냥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거듭 나열하면서 그 어이없음을 자신의 영화적 태도로 치장해내는, 장난스런 결과물에 가깝다. 마치 정색하면 지는 게임에 가깝다고 할까.
영화에서 등장하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은 어떤 영화의 기시감을 부르기도 하는데, 그건 바로 <걸리버 여행기>를 연출한 롭 레터맨의 전작인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몬스터 vs 에이리언>이다. 갑자기 거인이 된 탓에 괴물로 취급당하는 여성이 거대 로봇을 조종하며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을 막아선다는 이 애니메이션의 설정은 실사영화인 <걸리버 여행기>와 상당 부분 유사한 지점이 있다. 심지어 외계인이 조종하는 로봇의 디자인마저도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소인국의 로봇과 유사하다. 이런 기시감들은 이 영화가 그만큼 창의적이지 않은 결과물임을 증명하는 또 다른 단서들이다. 동일한 감독이 만든 두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차이를 제외하면 일종의 동어반복에 가깝다.
그러니 거기까지, <걸리버 여행기>는 잘못 만든 영화가 아니라, 애초에 잘 만들 의도가 없었던 영화다. 좀 심한 말인가. 다시 말하자면 <걸리버 여행기>는 그럴 듯한 아이디어 하나를 살리기 위해 수많은 허풍들이 동원된 영화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인물의 성장에 관한 교훈이나 감동은 그저 영화적 구색을 맞추기 위해 마련된 소품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소품이다. 이야기가 유치하다고, 스토리가 엉성하다고, 이 영화의 단점에 대해서 나열하는 것 자체가 쓸모 없는 짓이다. 거대한 잭 블랙이 펼치는 우스꽝스러운 몇몇 장면에 폭소하거나, 그의 애드립에 감탄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말 그대로 지금까지 당신이 읽은 이 리뷰 자체가 일종의 에너지 낭비라는 말이다.
보스턴의 찰스타운은 가족사업처럼 범죄가 대물림 되는 도시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더그 맥레이(벤 애플렉)도 은행 강도를 저지르다 검거되어 교도소에 수감된 아버지와 같이 역시 범죄의 길로 발을 들인지 오래다. 선택의 여지 없이 은행강도의 길로 들어선 그는 자신의 삶이 인생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지만 발을 빼고 다른 길을 걷는 것 역시 덫과 같은 관계들 때문에 자칫하다 발목이 날아갈 판이라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순탄치 않은 삶에 특별한 인연이 찾아온다. 은행강도 중 현장에 있던 여자 부지점장 클레어(레베카 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 그 사랑이 맥레이에게 어떤 결심을 도모하게 만든다.
저명한 범죄소설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가라, 아이야, 가라>를 연출한 벤 애플렉의 감독 데뷔는 성공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해도 좋을 결과였다. 4살 소녀의 실종을 통해 격발되는 미스터리 범죄물인 이 작품은 사회의 온갖 모순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동시에 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던지는 원작의 세계관을 인상적으로 포착하며 배우 벤 애플렉의 연출력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집어 던지게 만든 수작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다시 유명한 범죄소설작가 척 호건의 <PRINCE OF THIEVES>를 자신의 두 번째 연출작으로 선택한 벤 애플렉의 하이스트 무비 <타운>은 전작과 일관된 태도가 발견되는 동시에 또 다른 그의 연출적 시도가 동원된 작품이다.
보스턴 출신의 벤 애플렉이 보스턴을 주무대로 삼는 데니스 루헤인과 척 호건의 작품을 차례대로 선택한 건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단 두 편의 영화를 만든 벤 애플렉을 거장의 반열로 올리는 건 성급한 일이겠지만 그가 만든 두 작품은 마치 뉴욕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와 같은 길을 보스턴에서 걷겠다는 신념을 선언하는 야심처럼 보인다. 사회적인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동시에 그 부조리 속에 놓인 어느 개인의 본성을 끌어내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적 시선은 벤 애플렉이 연출한 두 편의 작품에서 엿보인다. 또한 이 모든 현실적 관점이 휴머니즘을 기초로 한 드라마로 유려하게 풀어낸다는 점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흔적을 의심하게 만든다.
전작과의 우열을 논하자면 <타운>은 <가라, 아이야, 가라>보다 더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꺼려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타운>은 전작에 비해 보다 생동감이 넘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영화의 초반과 후반부를 장악한 사실적인 총격신의 연출 덕분일 것이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총격신은 현장에 위치한 3자의 시선을 빌려 사건을 중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부여할 정도로 빼어난 연출력을 선사하고 있다. 또한 사건의 중심에 놓인 갱단의 평범한 일상을 정적하게 비추던 카메라가 같은 방식으로 담담하게 범죄 현장을 중계할 때, 하나의 시선에 놓인 정보의 차이로 인해 파격적인 감상이 도모된다. 연속적인 삶의 일상 속에서 분리된 일상을 넘나드는 갱단의 이야기는 이런 연출 방식을 통해 보다 현실적인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타운>은 문제의식을 던지는 전작과 달리 보다 적극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다. 범죄의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인물에 대한 연민을 강요하기 보단 그 인물의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 빚어내는 파국을 조명하고 아이러니한 심정을 고스란히 객석의 여운으로 승화시킨다. 스토리의 운용면에서 인위적인 장치적 설정들이 드러나긴 하지만 <타운>은 무리 없이 흐르는 인과를 설득시키는 작품이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스토리 라인 속에서 드라마틱한 감정적 여운과 공정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의식을 남긴다는 점에서 <타운>은 좋은 각색물의 수준을 넘어선 수작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에서 또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해낸 벤 애플렉은 자신이 연출한 전작이 결코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내는데 성공했다.
한때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 꼽혔던 김상남(정재영)은 이제 구단 내에서도 손사래를 치는 사고뭉치 퇴물투수에 불과하다. 음주에 폭행시비까지 휘말린 그는 선수생명에 제동이 걸린 위기에 몰린 가운데, 학창시절 절친이자 매니저인 철수(조진웅)에게 떠밀려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충주 성심학교의 야구부 감독직을 맡게 된다. 야생마처럼 길들이기 어려운 퇴물 투수가 소리가 없는 세상 속에서 배트를 휘두르고 글러브를 쥔 소년들과 함께 다시 한번 그라운드에 나선다.
아마도 <글러브>에서 가장 뚜렷하게 주목되는 대상은 어느 배우들도 아닌 강우석 감독일 것이다. <글러브>는 전작 <이끼>와 함께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발견되는 변화적 흐름을 감지하게 만드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시사적인 이슈들에 밀착한 상업 영화들을 만들어내던 강우석 감독은 본격적인 장르물에 도전한 <이끼>로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글러브>는 ‘착한’ 휴먼드라마로서의 감정에 무게를 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가장 무딘 날을 세우고 있다 평할만한 작품이며 강우석이라는 이름 안에서 또 한번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하게 만드는 결과물로서 이목을 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반박의 여지는 있다. <글러브>는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 학생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둔 각색물이란 점에서 역시 현실적인 이슈를 스크린 속에 녹인 강우석 감독의 전례들과 이어진 일관성이 유지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글러브>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시사적인 이슈들을 적절한 시기에 스크린에 수용해내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 특유의 태도와는 분명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글러브>는 실화를 모티프로 삼고 있으나 그것이 정치적인 가치평가를 염두에 두게 만드는 소재가 아닌, 드라마틱한 보편적 감동에 무게를 얹는 소재로서 수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강우석이라는 이름을 건 전례들과 차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뒤집어서 ‘강우석 감독의’ 라는 부연을 제하면 사실 <글러브>는 굉장히 빤하게 수가 읽히는 영화다. 청각장애를 지닌 소년들과 한때 프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망나니 투수가 만나 세상의 편견에 맞서고 함께 성장해나가는 눈물 겨운 감동스토리가 빤히 읽히는 <글러브>는 그런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진짜 빤한 영화다.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지점이 있다면 140분이 넘는 러닝타임이라고 할까. 스스로 감동을 웅변하는 대사들이 숱하게 등장하는 이 영화는 ‘감동’드라마임을 스스로 주창하는 올드한 휴먼드라마다. 단도직입적으로 촌스럽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글러브>는 직구다. 포수의 미트 안으로 정직하게 뻗어 들어오는, 치기 쉬운 직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 투구되는 영화다. 장애를 극복하는 아이들과 덜 자란 어른의 뒤늦은 깨달음이 성장드라마라는 그라운드 안에서 차례대로 진루하다 어렵지 않게 홈까지 걸어 들어오는 양상이다. 치기 쉬운 볼을 받게 되는 타자의 입장과 같이 관객은 손쉽게 감동을 얻어내겠지만 동시에 큰 감흥에 다다르기 어려울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사들은 거창하고, 표정들은 비범하나, 감정이 얕다. 목청은 크지만 울림이 없다.
적당한 진루타는 쳐내지만 홈런 한 방이 부족한 휴먼드라마라는 점에서 <글러브>는 인상적인 결과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동시에 야구 영화치고 경기 장면이 재미없다는 건 어쩌면 이 영화가 지닌 최대의 에러일 것이다. 그나마 정재영의 살아 있는 표정이 영화의 빤한 승부수 속에서 흥미진진한 역투 노릇을 한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인 한 행성에서 부모의 기지로 우주선에 탑승한 한 아이가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바로 옆 행성에서 탈출한 또 다른 아이와 평행선을 그리며 우주를 비행하다 함께 지구에 불시착한다. 비슷한 운명을 타고난 두 아이는 판이한 외모만큼이나 대립적인 성장기를 보내고 결국 최고의 적수로 자라난다. 초능력을 통해 온갖 사랑을 독점하며 자란 ‘훈남’ 아이는 메트로시티의 영웅 ‘메트로맨’이 되고 ‘비호감’이었던 아이는 메트로시티의 악당 ‘메가마인드’가 되어 끊임없이 맞선다.
영웅질도 딴지를 거는 악당이 있어야 인정 받을 수 있듯, 악당질도 가로 막는 영웅이 있어야 할만한 법이다. <메가마인드>는 영웅이 사라진 도시에서 활개치다 스스로 심심해졌음을 깨닫게 된 악당의 딜레마를 그린다. 관심 받고 싶어서 악명을 떨쳤지만 그 관심을 부각시켜줄 영웅질이 없으니 악당은 자연스레 초조해진다는 것이 <메가마인드> 속 악당의 면모다. 분명 순진한 이야기다. 진짜 악당이 아닌, 관심을 얻기 위해 악당을 흉내 내는 법을 익힌 이의 사연이 결국 <메가마인드>의 본체인 것이다. 이는 교육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교훈적 메시지로 연결된다. 칭찬 받고 자라지 못한 아이는 어떻게 비뚤어지는가에 관한, 장난끼 가득한 우화라고 할까.
물론 <메가마인드>는 그리 심각하지도, 진지해질 생각도 없는,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위트적인 작품이다. 다양한 히어로 무비의 메타포들을 잔뜩 끌어들인 뒤, 그 평면적인 이미지들을 전시하고 그 안에 담긴 패러다임들을 가볍게 조리한다. 또한 <슈퍼배드>와 같이, 영웅의 활약상을 묘사하고 숙명에 가까운 고독한 심리를 포착해내는데 초점을 맞춘 슈퍼히어로 무비의 최근 경향을 위트 있게 패러디하는, 안티-안티히어로물에 가깝다. ‘모태 영웅’ 슈퍼맨과 ‘스킨헤드’ 악당 렉스 루터를 연상시키는 <메가마인드>의 메트로맨과 메가마인드는 히어로 무비의 컨벤션이나 다름 없는 이미지를 입고서 히어로 무비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킨다.
천부적으로 영웅 기질을 타고난 아이와 반대로 강력한 비호감의 기운을 풍기는 아이는 영웅과 악당으로 자라나 각자 유명세를 떨친다. 셀리브리티와 같은 만인의 영웅 메트로맨의 인기와 자신이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님을 깨닫고 인생 방향을 악당으로 전향한 메가마인드의 악명은 대조적인 동시에 협조적이다. 영웅과 악당이라는 이분법적 관계의 교묘한 공존 체제를 풍자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이를 유머로서 승화시키는데 주력한다는 점에서 유쾌하다. 동시에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몰라도 사랑 받고 태어난 아이가 세상의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교훈을 전달한다. 특유의 과장된 연출로 익살스러운 위트를 던지는 동시에 넘치지 않는 감동을 수확해내는 드림웍스의 방법론이 또 한번 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