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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5.31 한예슬 인터뷰
  3. 2008.05.31 엄지원 인터뷰
  4. 2008.05.31 이안 감독 인터뷰
  5. 2008.05.31 이연희 인터뷰
  6. 2008.05.31 윤세아 인터뷰
  7. 2008.05.31 박진희 인터뷰
  8. 2008.05.31 손병호 인터뷰 1
  9. 2008.05.31 장근석 인터뷰
  10. 2008.05.31 이기우 인터뷰

김강우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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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잘 빠지는 편 아닌가?
놀면 금방 찐다.

예민한 성격처럼 보인다.
맞다. 예민해서 일을 하거나 신경을 많이 쓰면 살이 금방 빠진다.

우여곡절 끝에 출연작들이 개봉됐다. 올해 초중반엔 조급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생각은 안 가졌다. 만약 내가 생각하기에 작품의 질이 떨어지거나 메리트가 없어서 개봉이 연기됐다면 불안했었을 텐데, 그런 건 없었기 때문에.

올해 개봉한 작품들은 사실 하나같이 개봉이 미뤄진 작품들이었다.
작년에 찍었거나 찍기 시작했던 영화가 다 올해 개봉을 했는데, 글쎄, 뭐 그건 내가 의도했던 것도 아니니까. (웃음) 작년부터 올해까지 영화 시장이 힘들었던 것도 있고, 그래서 개봉이 미뤄진 탓이 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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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같은 경우는 원작에 대한 기대도 어느 정도 있었을 거라 짐작되고, <타짜>의 흥행을 지켜본 입장에서도 어떤 예감이 있었을 법하다. 나름대로 기대될만한 작품의 개봉이 미뤄진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나?
아무래도 인지도가 있는 작품이다 보니, 우리가 어떤 노력을 더한다고 해도 한편으론 부담이 있더라. 원작이 워낙 많이 팔렸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일간지에 연재까지 됐던 만화이기 때문에 기대되는 한편으론 부담감이 생기지. 기존에 작품을 좋아했던 팬이 많은데 우리가 그에 대한 기대치만큼 할 수 있을까라는 부담감. 그리고 우리가 <식객>을 찍기엔 다소 적게 느껴지는 예산을 가지고 촬영에 들어갔기 때문에 보여지는 면들이 좀 미흡하지 않을까라는 나름대로의 고민들은 있었다.

결과적으로 흥행이 됐다. 더욱 기쁜 일이 된 셈이다.
흥행하면 당연히 배우들은 기분 좋다.

앞서 올해 개봉한 두 편의 영화들이 나름의 보답을 해준 것 같다. <경의선>으로 토리노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식객>은 흥행배우의 타이틀을 줬으니까.
찍을 때 마음고생을 했던 작품들이 보답해준 것 같다. 물론 흥행이나 수상 같은 건 내가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던 대로 했을 뿐이다. 어쩌면 적은 예산 때문에 주목 받지 못할 수 있었던 영화나 저 예산 영화였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했던 것도 있는 것 같고.

예전에 인터뷰했던 기사에서 언제쯤 기회가 오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을 봤다. 올해 그 기회가 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식객>에 캐스팅될 때도 난 아무것도 없었다. 메인으로 주인공을 맡았던 것도 전작인 <경의선>밖에 없었고, <가면>도 <식객>촬영 중에 캐스팅됐으니까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없는 나를 써줬다는 자체부터 운이 좋았던 거다. 그게 나한테 기회였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래도 지금까지 뭔가를 해왔기 때문에 내가 노력해서 잡은 기회일 수도 있겠지. 그냥 해나가는 과정 안에서 언젠가는 (기회가) 올 거란 생각을 하긴 했는데……글쎄, 잘 모르겠다. 이게 그 기회인지. 물론 나를 더 극대화시켜 줄 수 있는 기회인 건 맞는 것 같다.

데뷔작이었던 <해안선>을 비롯해서 차기작이었던 <실미도>까지 초기 출연작 두 편이 군대와 관련된 영화였다.
내가 아무것도 없는 신인배우로서 영화를 고를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두 작품이 공개 오디션이란 기회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신인 배우들을 공개 오디션으로 뽑는 영화이기에 나한테는 그나마 기회가 있는 거였다. 처음 두 작품 이후로 하게 된 드라마 <나는 달린다>도 그런 식이었다. 보통 드라마는 신인들의 공개 오디션을 보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달린다>는 신인이건 기존 배우건 망라하고 그냥 공개 오디션을 통해 실력으로 캐스팅하는 특별한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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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되는 신분이고, 동시에 자신의 결정권이 없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이 원숙하게 자리잡지 못한 청년의 과도기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경의선>이전까지는 위태로운 청년의 내면을 드러내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다. 아마도 초반에 출연했던 작품들의 영향력이 아닐까 싶더라.
우연히 하게 된 <나는 달린다>의 이미지가 굉장히 독특했던 것도 있었다. 치기 어리지만 자기 의지대로 가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듯한. 그 이후로 <태풍 태양>도 그랬고, 그런 이미지들이 쌓여오게 되더라.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서른이란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느낌이다. 물론 동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웃음) 캐릭터를 통해 드러낸 이미지의 응축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이를 먹어도 눈동자는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건 특히 남자배우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한데, 소년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야 나이를 먹었어도 예전의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려고 노력한다. 사람은 모든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감정 표현을 가장 잘 한다. 그런데 교육 과정과 사회 생활을 거치면서 감정을 하나씩 없애버리게 되고 점점 나이 들면서 감정은 단순해져 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난 그 느낌만큼은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까지의 캐릭터들이 청년기의 불안함이었다면 <가면>의 조경윤이 지닌 불안함은 어른의 것이었던 것 같다. 이전의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불안을 충돌로서 극복했지만 조경윤은 도피하려고 했으니까. 그 불안으로부터 달아나서 안주해버리려는 태도는 어른의 습성에 가깝다고 본다. 그래서 조경윤은 지금까지의 캐릭터 중 어른에 가장 가깝게 느껴지더라.
내 생각에도 <가면>이라는 영화가 나한테 주는 의미는 나에게 소년과 청년의 중간 사이에서 성년으로 뛰어넘는 과정이다 싶었다. 또한 그 역할을 하게 된 것 같았고. <식객>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까지 내 이미지에 풋풋한 모습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가면>을 통해 그에 반(反)하는 이미지를 가하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거다. 나 역시도 그걸 어느 정도 염두에 뒀으니까.

그 동안은 본인이 가지고 있던 표정을 토대로 연기한다는 느낌이었다면 <가면>은 새로운 표정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가면>이 스릴러 장르라서 힘들었다. 일단 그렇게 느꼈다면 내겐 성공인 것 같다. 왜냐면 캐릭터 자체가 어떤 과거를 숨기고 있기 때문에 현재에 지니고 있는 어떤 생각을 눈을 통해서 얘기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면>이전의 영화들은 다른 상대 배역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캐릭터를 구축해나가는 것이었다면, 조경윤은 내 스스로의 눈으로 모든 걸 말해야 되는 캐릭터라서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그러한 것들이 읽히게끔 만들어야 했다. 동시에 오히려 그걸 어느 정도 숨기기도 해야 했고. 그런 것들이 제일 힘들었던 부분이었다.

<가면>의 엔딩은 출연작 중 <실미도>와 함께 가장 극단적이었다.
속이 후련했다. 왜냐면 조경윤이란 캐릭터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운명에 이끌려서 그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하지만 결국은 그 상황으로 다시 가서 자기 의지로 풀어버리니까. 어떻게 보면 <태풍태양>과도 비슷하게 뛰어들지만 그건 결국 도피였다. 결국 모기라는 아이는 결말을 짓지 못한 거다. 그게 바로 청춘, 청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의미할 수 있고, 내 스스로에게도. 하지만 <가면>은 다른 이상향을 찾아서 결말을 지어버린다. 이젠 자기 의지대로 삶과 죽음을 가를 수 있을 정도가 됐다는 거지. 그냥 내 개인적으로도. 물론 그것도 운명일 수 있지만 마지막에 악셀을 당기는 건 자기 의지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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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만으로 보면 언해피엔딩이지만 인물들의 뉘앙스는 해피엔딩처럼 보였다.
둘은 행복한 거지.

어쩌면 지금까지 출연작 중 가장 절절하면서도 유일한 로맨스 영화 아니었을까?
맞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조금 특별한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라는 점이다. 둘은 그렇게 손가락질 받지 않는 세상으로 떠나는 거지. 둘만 있으면 그게 남자건 여자건 뭐가 중요하겠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는데.

하지만 그게 너무 특별한 사랑이라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이야기를 접했을 때도 본인에게도 어떤 당혹감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올해로 서른이니까 아직 나이가 그렇게 많지도 않지만 대한민국의 남자로서 쌓인 고정관념이라는 게 무시할 수 없더라.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조금 충격 받긴 했다. 배우는 ‘내가 만일’이라는 개념으로 연기를 시작하게 되는데 절대로 이해가 안가는 경우가 있으니까 고민하게 됐고, 그 지점에 대해서 감독님과도 제일 많이 얘기했다.

결과적으로 작품을 선택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뭐였나?
하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이건 새로운 소재이고 내가 연기할 새로운 꺼리가 있는 캐릭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본인을 납득시키는 과정도 필요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더라. 남자, 여자라는 성별을 떠나서 본능적으로 끌리는, 인생 단 한번의 대상인 거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매몰차게 버리고 갔더라도 나이를 먹고 다시 우연히 만났을 때, 상황이 바뀐 것에도 불구하고 다시 끌리는 거지. 그래서 본능적으로 끌리는 운명에 따라가게 됐지만 또 그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찾아간다고 생각했다. 이 친구도 결국 자기도 모르던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다. 그리고 그걸 감추려고 더 남성적인 직업인 형사를 택하게 됐고, 마초적으로 살아갔던 게 결국은 이중적인 모습인 거다. 그리고 그게 비로소 조경윤의 가면이라는 거지.

그런 과정이 본인에게 극복이었나, 포용이었나?
도전의 대상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는 내가 가지고 있던 모습 중에서 하나를 꺼내 부풀려놓은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가면>은 나한테, 어떤 남자도 대부분 지니지 못한 요소를 만들어내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도전의 대상이고, 처음에는 두려웠었다.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그런데 그만큼 성취감도 있었다. <식객>같은 경우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이미지에서 플러스 마이너스였을 뿐이지만 <가면>은 지금까지 해왔던 그런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가는 거니까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더라. 이걸 안 받아주면 어떻게 하나, 내가 잘 해내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이런 두려움이 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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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의 이중성에 염두를 뒀을 것 같다. 이전까지의 캐릭터들은 직설적으로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낸 것에 비해 조경윤은 자신을 감춘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게 어른들인 거 같다. 연령이 낮은 친구들, 어린 친구들은 자신을 솔직 담백하게 드러낸다. 흔히 대표적인 예로 정치인들만 봐도 너무 이중적이지 않나. 그건 정치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사회 생활을 겪은 모든 성인들이 결국은 그렇게 이중적으로 변해갈 수 밖에 없는 거 같다. 자기의 약점들을 감추려고 들기 때문에 그에 반하는 겉모습으로 드러내는 거지. 그래서 센 척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약한 것처럼. 조경윤도 마찬가지다. 그도 성인인 거지. 그렇지만 본연의 순수함이 남아있었던 거다.

그런 의미에서 <경의선>의 만수는 청년에서 성인으로 가는 길목 같은 느낌이었다.
그럴 수도 있다. 왜냐면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모기까지만 하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것뿐이지, 그걸 생계수단으로 이용하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와 자꾸 부딪히게 되는데 만수는 악몽을 꾸면서까지 생계 수단에 담근 발을 빼지 못한다. 결국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다. 그리고 난 <식객>의 성찬도 초반에서 후반으로 가는 동안 완벽한 성인으로 성장했다라고 가정하고 싶다. 결국은 자기의 목표를 이룬 거고, 새롭게 꿈을 실현한 거니까. 그러나 그전의 모기는 그렇지 못했다.

조경윤은 다른 의미에서도 이중적이다. 평소엔 껄렁껄렁하게 곧잘 장난도 치다가 내면적인 혼란 속에서 진지함도 엿보이고.
나 역시도 그렇다. 사실 모두 다 그런 면들이 있지 않나? 양아치 같은 모습도, (웃음) 진짜 한없이 진지해질 때도.

아웃사이더의 느낌이 드는 캐릭터가 많았다. 그게 어쩌면 본인의 것이란 생각도 든다.
그게 내 성향인 거 같다. 주류를 좋아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그런 성향. 솔직히 잘 하고 싶다, 나도.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들이 보여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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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밖으로 드러내는 걸 많이 꺼려하나 보다.
난 남들이 내 사생활을 알거나 나에 대해서 알려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 가족들한테도 나에 대해서 속속들이 얘기하지 않는다. 한 2~30년쯤 후,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모르거나 관심 없어도 상관없다. 다만 내가 원하는 건 캐릭터로서 남는 거다. 물론 내가 만약 그때까지 스무 편의 영화를 했다면 스무 편의 영화를 다 본 관객은 별로 없겠지. 많아야 세네 편일 텐데, 그 영화 속의 이미지가 각자에게 남는 이미지였으면 됐다. <식객>의 성찬이 각자의 머릿속에 남아준다면 그건 배우로서 정말 해피한 삶이 될 거다.

베드씬 같은 경우도 처음이었다. 긴장되지 않던가?
긴장되지. 사람이 가장 민망한 게 자기 알몸을 보여주는 순간인데. 배우들이 연기의 일부분이라고 얘기했을 때, 이해하지 못했는데 많이 수긍하게 됐다. 물론 중요하지 않은 상황에 베드씬이 들어간다면 그건 얘기를 해봐야겠지만 <가면>에서 베드씬은 초반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장치이기 때문에, 이건 당연히 가야 하는 씬이니까 긴장은 됐지만 수긍하게 됐지.

기자시사 이후, 포털 사이트에서 <가면>을 검색해보면 그 베드씬에 관한 기사로 도배가 되어있더라.
좀 부담스럽다. 하지만 <가면>은 참 홍보하기 애매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기자 분들한테도 숨겨야 할 부분이 많고, 일반 관객에게도 공개를 감춰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건 그냥 반사적으로 다른 걸 찾게 된 상황에서 베드씬이라는 게 튀어나온 거 같다. 그래서 그거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진 않겠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연기했던 캐릭터들이 나름대로 본인과 잘 어울렸던 건 기존에 자신의 이미지를 특별하게 각인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나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가 없다는 게 좋고, 계속 그렇게 살고 싶다. 만약에 내가 대중들에게 많은 노출이 되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고정적인 이미지가 생겼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배우가 관객들에게 캐릭터에 대한 이입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관객이 영화를 보러 온다면 날 보러 오는 관객은 소수다. 결국은 영화 속의 캐릭터를 보러 오는 건데, 내 대중적인 이미지로 인해서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떨어뜨린다면 그건 분명 그 배우의 책임이라고 본다. 난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면을 많이 드러내긴 싫다. 어떻게 보면 저만의 전략이지.

그런 면에 있어서 같은 소속사(나무 액터스)에 속한 김태희 같은 배우가 반대의 케이스로 느껴진다. CF를 통해 쌓아온 스타 이미지가 작품 내의 캐릭터적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몰입도에 있어서 떨어지는 부분들이 분명 존재하는 거다. 그건 본인도 굉장히 속상할 거다.

사실 <가면>은 불쾌한 영화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건 영화의 적나라한 태도 때문일 수도 있고 어떤 혐오감을 드러내는 시선을 배치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것을 인식하는 관객의 무의식적인 고정관념을 자극하는 탓일 수도 있다.
어떤 사실이 분명히 있는데 모두가 그것을 소외시하고, 꺼내지 마, 덮어, 들추지 마, 하는 것이 있다. 분명 우리나라에서도 백년 전이나 이백년 전에 존재했던 사실이다. 예전에 발견된 오래된 화첩에도 동성애가 묘사된 그림이 있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신문에서 봤다. 하지만 유교 문화에서는 더더욱 터부시됐겠지. 외국은 그런 성향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정도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초기 단계인 것 같다. 하지만 난 이런 문제는 우리보다 어린 세대들이 봤을 땐, 별거 아니라고 느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이걸 받아들일까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해가 지날수록, '이게 뭐가 세?' 라는 반응이 나오는 게 더 무서운 것 아닐까라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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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은 현재 우리 사회가 소수의 취향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한 시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자기들과 다른, 평범하지 않은 특별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씹히기 좋은 가십거리가 분명히 된다. 게다가 성경의 기독교 사상에도 그에 대해서 죄를 치러야 된다고 명시되어 있고, 더군다나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했던 우리나라는 더더욱 그렇겠지. 물론 그에 대해서는 나도 확실히 말하긴 힘들다. 외국은 지금 동성결혼을 허용하느냐, 마느냐까지 발전이 됐지만 나도 역시 대한민국 남자고, 30년이란 세월을 그 틀에서 살다 보니까 그걸 깨는 게 쉽진 않을 것 같다.

데뷔 초기에 인터뷰했던 내용들을 보면 자신만만한 포부가 많이 드러났던 것 같다. 아마도 그건 그만큼 긴장이 돼서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간 게 아니었나 싶더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자신감밖에 없었던 거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거라도 없으면 나의 장점이 뭐라고 말할 게 아무 것도 없는 거다. 그러면 주문처럼 외우는 거지. 촬영이 들어가면 나는 최고다라는 주문을 외우는 거다. 그 기사를 보면서도 자신감을 되찾는 거지. 지금도 그 때 마음 그대로 똑같다. 지금 내가 연기가 나아져봤자 얼마나 나아졌겠어. 그냥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다시 도전하게 되는 거지. 그래, 할 수 있어, 이렇게. 나한테 모두 다 없는 면들이거나 있는 면들일 수도 있다. 다만 자신감이 없다면 내가 몰랐던 그런 면들을 꺼내놓지 못한다. 일종의 주문이지. 나에 대한 주문.

결국은 그것들이 자신을 위한 기록이 되는 셈이다. 마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일기장 같은.
난 인터뷰는 최대한 솔직하게 하려 한다. 가끔 어떤 분들은 자신을 꾸민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사실 그래 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냥 인터뷰는 그 당시 자신의 생각이 잘 묻어나는 게 가장 중요한 거라 생각한다. 물론 내 약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지금은 예전에 비해 어느 정도 안정감이 생긴 것 같다.
그냥 대처하는 법이 늘었을 뿐이지, 항상 두렵다. 작품 할 때마다 항상 무섭고, 항상 대본이 옆에 없으면 잠을 못 잔다. 정신적으로 굉장히 디테일하게 가야 하는 편이다. 항상 갖춰져 있어야 하고, 준비되어 있어야 되고, 긴장해야 되고. 그래서 작품 하면 살이 쭉쭉 빠지게 된다. 그래서 살이 안 찌냐는 질문도 받게 되는 거겠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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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올해 초에 촬영 현장에서 봤을 때보다 지금은 살이 쪘다.
그때는 의도적으로 음식도 안 먹었었고, 더 예민해져 있었고. <식객>끝나고 7kg 정도를 뺐으니까.

그런 예민한 성격은 <경의선>의 만수를 많이 닮았다.
거기에 내 이미지가 담겨 있었다. 초 단위로 살아가면서 굉장히 괴로워하는, 그런 면이 있었지.

연출을 배우기 위해서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고 들었는데 결국 배우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배우라는 삶을 굳히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 4년 동안 정신 없이 연극을 하고 나니까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거밖에 없더라. 결국 이제 사회에 슬슬 나가야 되는데,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었던 거지. (웃음)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어쩌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제 내 용돈은 내가 벌어야 될 나이가 돼버렸는데 할 줄 아는 건 이것뿐이고, 남자라면 이해되지 않을까.

용접공이나 요리사, 지하철 기관사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 쉽게 묘사되지 않는 전문직업에 종사하는 인물을 종종 연기했다. 그런 분야의 연기를 위해서는 나름대로 그 직업에 대한 탐구도 선행됐어야 했을 텐데.
탐구보단 먼저 중요한 게 이해더라. 그래서 나는 어느 한 곳에 안 꽂히려고 노력한다. 그러니까 어떤 걸 너무 좋아하지도 않고, 너무 싫어하지도 않고. 솔직히 난 특별한 취미도 없다. 예전엔 난 왜 그럴까 그랬는데, 이젠 오히려 그게 좋더라. 어디든 쉽게 동화할 수 있다.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지도 않고, 누가 좋지도 않고, 누가 싫지도 않고. 배우는 어떤 편에 들어야 되는지, 또 어떤 직업군을 갖게 될 지 모르는 거 아닌가.

<세잎클로버>나 <야수와 미녀>같은 작품을 선택했던 건 상업적인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고 종종 피력했던 걸 봤다. 아무래도 한때 배우로서 지명도에 대한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올해는 그와 반대로 흥행 배우의 타이틀을 얻게 됐다. 어떤가?
물론 그것도 나한테 중요한 과정이었고, 그 덕분에 여러 가지 느낌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건 나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다 내 작품이니까. 모두 그 당시 내 모습이다. 다만 조급할수록 그런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는 걸 느꼈지. 그때는 그게 나한테 어쩔 수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저것 고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선택 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마음가짐을 조금 더 길게 가져가야 한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됐다.

사실 초반에 출연했던 작품들이 대중에게 나름대로 어필됐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출연작이 흥행에 실패하고 캐릭터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가 있었을 것 같다.
색깔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었다. 나한테 어떤 옷이 맞는 건지, 나도 나에 대해서 몰랐으니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배우를 그만 두기 전까진 계속 색깔을 찾아가는 과정인 거 같다. 지금에 와서 그것들이 안 맞는 옷을 입었던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또 아닌 거 같다. 또 한번 그런 과정들이 다시 반복될 것 같다. 지금 작품이 흥행됐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옷이라고 인식하는 숫자가 많은 것뿐이지, 또 다시 계속 순환될 것 같다. 그리고 난 또 계속 찾아나갈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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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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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한예슬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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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미니홈피에 ‘Falling slowly’ 가사를 포스팅 해놓았던데.
좋았다. 최근에 봤는데 좀 꽂혀서, 내가 원래 아이리쉬 음악 밴드를 좋아한다.

나도 좋아한다. 그래서 미니홈피를 자세히 볼 생각은 없었는데 음악을 듣다 보니까.
자세히 보게 됐구나!

<원스>OST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데미안 라이스(Damien Rice)까지 나오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 (웃음)
그렇구나. 나랑 음악 취향이 비슷한 것 같다.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음악을 좋아하나 보다.
그렇지만 일렉트로니카 계열은 말고, 조금 더 약간 기타음이 들어간 음악이 좋다.

쟁글거리는 기타팝 부류의?
맞다. 그런데 음악 취향이 아주 좋으시네. (웃음)

사실 옛날엔 약간 과격한 음악을 좋아했었다.
나도, 얼터너티브(alternative) 락 같은.

나도 한때 그런지(grunge) 풍의 음악 많이 들었다. 너바나(Nirvana)는 지금도 좋아하고.
너바나,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

시애틀 그런지(Seattle Grunge)!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나이 먹으니까 좀 서정적인 쪽으로 가는 거 같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는 게 막 느껴지는데. (웃음)
조금 더 가면 완전 올드팝으로 빠질 지도 모른다.

아, 누가 보면 음악 매거진인 줄 알겠네. (웃음) 그런데 본인의 히트곡도 있지 않나. ‘그댄 달라요’같은. 난 사실 그 노래를 군대에서 줄기차게 들었다.
진짜? (웃음)

고참들이 너무 좋아해서 말이지. (웃음) 그런데 음악 매거진 인터뷰도 아니고, 이젠 음악 얘긴 그만. (웃음) 미니홈피를 보고 얼마 전, 청룡영화제 사건에 관련된 스타일리스트 분의 글을 보게 됐고, 본인의 코멘트도 읽게 됐다. 사실 말로만 들었었는데.
아, 그 해프닝에 대해서?

그에 대해서 감동적이라는 말이 많더라. 어떻게 보면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된 덕분에 그런 후일담 같은 사연까지 노출된 것인데 사실 사생활이 노출된다는 게 흔히 말하는 공인으로서 꺼려지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자신의 이미지를 상품화하는 배우라면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서 대중들과 간접적으로 만난다 해도 결국 직접적인 대상은 나인 셈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삶과 사생활의 선을 긋는다는 건 진짜 힘든 일이다. 공인으로서 활동하는 연예인이나 배우들은 다 짐을 짊어지고 가야 되는 게 아닐까. 어떻게 보면 그런 대중들의 관심이 자신의 커리어와 이어지는 것이니까.사적인 대중들의 관심도 없다면 그건 무관심일 테고, 그렇다면 커리어를 지켜나갈 수 없는 거다. 물론 너무 관심을 갖고 사랑하다 보면 아무래도 그 선을 조금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당연히 짊어가야 할 짐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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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야심만만에 출연했는지 인터넷에 기사가 도배됐더라. 내용으로 봐선 상당히 솔직하게 대답을 한 것 같던데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거리낌이 별로 없나 보다.
물론 그런 면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해야 된다는 건 안다. 배우로서 너무 많이 드러내는 것도 바람직하거나 똑똑한 대처법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쇼 프로그램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친근함을 주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인상이 대중들에게 있어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토픽(topic)이라면 굳이 드러내도 상관없겠다고 느껴졌다. 물론 내가 사생활을 드러낸다고 해서 남자친구와 어떻게 연애를 했는지, 몇 년을 사귀었는지, 그런 아주 사적인 내용들을 얘기한 것까진 아니니까, 그냥 내 일상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개인의 세계관 같은?
맞다. 대중들한테 예전에 있었던 해프닝 정도를 얘기하는 것까지 크게 숨겨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너무 숨기는 것도 좀 그렇잖아.

그런 솔직함이 어떻게 보면 한예슬의 숨겨진 매력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환상의 커플>의 나상실은 그런 단면이 잘 드러난 캐릭터라고 생각된다. 확실히 <환상의 커플>은 한예슬이란 배우에게 캐릭터라는 정체성과 환상을 동시에 만들어 준 작품인 것 같다.
배우들이 좋은 역할을 많이 맡고 싶어하는 건 대중들이 그만큼 공감해주기 때문이란 필요성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런 역할을 소화하는데 있어서는 그런 색깔을 잘 나타내줄 수 있는 자신만의 색깔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한테는 정말 둘도 없는 애정이 가는 역할이었지. 나도 그 순간만은 나상실로 살면서 행복했던 거 같다.

배우로서 그런 캐릭터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 그런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를 만났다는 건 좋은 운이라고 생각한다.
축복이지. (웃음)

사실 나상실은 한예슬이란 배우에게 타이밍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용의주도 미스신>은 나상실의 연장선상처럼 보인다. 이미지 굳히기 같아 보이기도 하고.
나상실처럼 <용의주도 미스신>의 신미수도 겉으론 못마땅한 구석이 많아 보일 수 있다. 좀 도도하고, 용의주도하다는 면이 어떻게 보면 꼴불견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 때문에 불쾌할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나상실이 갖고 있었던 어떤 순수함처럼 신미수에게도 그런 매력이 있다. 나름대로 신미수로 하여금 그렇게 용의주도하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상처가 있고, 내면에 여린 마음도 있고,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굉장히 귀엽고, 상큼하고, 그런데 한편으론 덤벙거리기도 하는 부족한 여자다. 사실 <용의주도 미스신>의 영화적 포인트는 신미수가 많은 남자와 연애를 하면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이다. 그게 재미있는 건 이 여자가 용의주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면 너무 완벽하게 용의주도하면 뻔하지 않나. 이 여자는 용의주도하려고 무진장 노력하지만 다 어설픈 거다. 그리고 이제 관객들이 봤을 때 그런 신미수의 어리버리함으로 빚어지는 에피소드 속에서 재미를 느끼는 거지.

결국 나상실처럼 신미수도 양면성이 있는 캐릭터다. 어쩌다 보니 그런 캐릭터를 계속 연기하게 된다.
내가 그런 걸 좋아한다. 뭔가 약간 특별한 색깔이 있는 역할을.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들을 보면 굉장히 다 정상적이지 않은 거 같더라. (웃음) 알다시피 정상적인 멜로라던가, 그런 역할을 한번도 해본 적 없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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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작부터가 정상은 아니었다. (웃음)
<논스톱4>에서부터 그랬지. 한 색깔로 꾸준히 지속되는 역할보단 복합적인 성향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재미있다.

사람들이 나상실에 열광했던 건 뒷면이 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론 도도하고 새침하지만 뒤로는 소심하고 때론 천박스럽기도 하다. (웃음) 자장면을 게걸스럽게 먹기도 하고. 그런데 그게 한예슬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로 어필되는 거 같기도 하다. 화려한 스타와 평범한 일반인의 입체감을 동시에 형성한다고 할까.
맞다. 나 정말 평범하다. (웃음) 실제 생활도 정말 평범하고.

그런데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건 직업상 요하기 때문에, 당신도 만약에 배우 생활을 한다면 많은 변화가 있을 거다. 사람은 직업에 따라서 풍기는 아우라가 틀려지는 것 같다. 그렇지 않나? 선생님은 선생님 같고, 사기꾼은 사기꾼처럼 생겼고, 음악가는 음악가처럼 아티스틱(artistic)하게 생겼고. 이렇게 직업에 따라서 풍겨지는 이미지가 틀려지는 거 같다. 당신도 계속 일하다 보면 더욱 기자스러워지는 면이 있을 거다. 배우도 신인 때는 배우로서 2% 부족한 느낌이 난다. 하지만 커리어를 쌓아가다 보면 나중에 언젠가 배우다운 아우라가 나올 때가 있겠지. 나도 그렇게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점점 배우 같은 이미지가 조금씩 소화되는 거 같다. 하지만 내가 학교 생활하던 학생이었다면 지금 같은 이런 느낌은 안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 외모가 어디 가겠나? (웃음)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혹시 한국에서 느꼈던 문화적 차이는 없었나?
난 나만의 성격이 있다. 나만의 색, 나만의 스타일이 있다. 얘길 할 때도 그래서 솔직하게 표현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게 신인이었었을 때는 너무 솔직하고 당당한 것에 대해서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쟤는 뭘 믿고 당당할까, 건방지다, 아니면 도전적이라서 기분 나쁘다. 이렇게 오해하게 되는 부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요즘에는 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오랫동안 일하다 보니까 이젠 사람들이 그걸 다르게 해석한다. 쟤는 프로 정신이 있는 것 같다, 당당하면서도 노력하는 모습이 예뻐 보인다. 그런 식의 변화가 있었는데 그렇게 위치에 따라서 사람들의 시선이 천차만별인 거 같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그런 점들을 이해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내가 미국에서 받은 교육 방식은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합리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일을 할 땐 정당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거 해!’ 이런다고 하는 게 아니다. 왜 그걸 해야 하는지 설명해주고, 들어야 하고, 그 일을 해야 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한 후에 일을 시작하는 거지. 그런데 신인 때는 내가 꼭 ‘왜 이걸 해야 해요?’ 이렇게 캐묻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있었던 거 같다.

체계에 대한 하위적 일방성을 강요하는 문화가 강한 게 사실이다.
한국은 항상 어른들 말씀하실 때는 대답 짧게 하거나 자제하고, 그저 조용조용히 있는 게 미덕이다. 하지만 미국은 항상 주위에 반대의견을 낼 수 있도록 분위기가 열려있다. 그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있고,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있고, 선배와 후배의 관계가 있다. 미국에서는 좀 낯선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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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동안에는 가족이 있는 미국에 머무른다고 들었다. 그런 면에서 충분히 자신의 개인 생활을 하고 배우로서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아지트처럼 보인다.
맞다. 한국에 있다 보면 배우들이 자유자재로 활동을 못하게 되고, 심지어 집에서 잘 나가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내가 외국으로 더더욱 나가려는 이유는 배우라면 자꾸 감성 훈련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생을 통해서,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서, 내가 기뻐하는 것, 내가 행복해하는 것, 내가 슬퍼하는 것, 내가 외로워하는 것, 이런 걸 충분히 만끽하면서 인생에 대해서 자꾸 배워나가야 된다. 왜냐면 나중에 배우로서 성숙한 역할을 표현해야 할 때, 인생을 모른다면 그걸 표현할 수 없지 않을까. 단세포적으로 아주 일차원적인 역할이나 어린 아이들이 하는, 아이돌 역할만 할 수 없잖아. 그렇지 않기 위해선 자꾸자꾸 커져야 한다. 그런 인생 공부를 하기 위해선 내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넓은 영역을 갖고 시야를 넓히는 게 중요한 거 같다. 물론 그게 책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난 직접 느끼는 걸 더 좋아한다. 사람들 관찰하는 것도 좋아하고.

생각보다 감성적인 성향이 짙어 보인다.
감성적인 면도 강하고, 또 직업상 감성적인 면도 훈련해줘야 되는 것이고.

상당히 말을 조리 있게 한다. 평소에 대화를 즐기는 편인가?
난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사람들과 말을 많이 하진 않는데, 다만 내 생각을 잘 들어주는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표현하는 건 좋다.

그렇다면 외로움을 많이 느낄 것 같다.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건 아니니까. 더욱이 지금처럼 한국에 와서 지내는 경우엔 더더욱.
외로움 잘 탔지. 예전에 20대 초반 때, 한국에 와서 혼자 활동하고 그럴 때는 아무래도 어리니까 굉장히 외로웠는데 그게 하나의 훈련이 된 거 같다. 지금은 그런 외로움을 어떤 일을 하거나 작품을 완성하고, 그에 대한 성취감으로 충족시킨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역할을 맡고 일을 하면서 그런 것들을 친구 삼아 사는 거 같다.

한국에 와서 좋은 사람은 많이 만난 것 같나?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다.

이번에 스타일리스트와 관련된 일도 결국 사람간의 문제였다. 어쨌든 관계를 돈독히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발전적인 결과가 된 셈인데 스스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면이 강한 것 같다. 자기 컨트롤에 능하다고 할까.
그것도 항상 잘했던 건 아니다. 사회 생활하면서 훈련을 통해서 이뤄진 거지. 처음부터 자기 컨트롤 잘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을 거다. 얼마만큼 훈련하고, 얼마만큼 자제하고,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틀려진다. 난 어느 분야에서건 성공한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런 훈련을 성공적으로 한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회 생활 속에서 성공한다는 게 쉽지 않겠지. 그 반대로 자기 컨트롤이 안 된다는 건, 가장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들은 많아질 텐데 그것들을 감당할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면 상당히 곤란하다. 컨트롤할 수 있는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아무리 큰 행운이 오거나 큰 일들이 주어진다 해도 모두 흩어져버리고 오히려 내가 그것들에게 삼켜지는 꼴이 될 테니까. 때론 갑자기 큰 관심을 얻었다가 그걸 힘들어해서 망가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성공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고 계시는 대부분의 분들은 그런 절차를 성공적으로 밟았다고 생각된다. 자기 어떤 컨트롤이지. 참아야 될 건 참아야 되고, 인내해야 될 건 인내해야 되고, 넘겨야 할 건 넘겨야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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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같은 경우도 배우로서 하나의 사생활인데, 그것이 종종 인내해야 할 것처럼 요구되는 경우가 있다. 얼마 전, 본인도 TV에서 그에 대한 질문도 받기도 했다.
연애를 아예 안 하는 건 아니겠지. 때로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데이트도 할 수 있는 건데, 단지 함부로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위치가 있고,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사실 진실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힘든 일이다. 난 연애를 대충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그냥 기다리는 것뿐이지, 난 배우니까 아직 연애하면 안돼, 이런 건 아니다. 좋은 사람 있으면 왜 못하겠어. 그렇지만 내가 일을 하면서 연애를 같이 감행할 경우엔 그에 대한 어떤 충분한 가치가 있어야 된다. 쓸 때없이 그냥 연애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한테 있어서는.

사실 연애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거지! 특히 배우의 감수성에 있어서 사랑은 더더욱 중요한 거다.

<용의주도 미스신>은 출연작 중 가장 많은 남자를 만난 케이스고, 앞으로도 이런 경우는 드물 것 같다.
그렇겠지. 그런데 난 신미수란 여성을 정말 이해할 수 있었다. 신미수는 굉장히 사랑 받고 싶어하는 여성이지만 그 사랑을 찾지 못하는 거다. 사람이 정말 먹고 싶은 건 없어도 배가 고프면 먹어야 된다. 이 여자도 외롭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했지만 사랑을 만나고 싶은 거다. 그래서 사랑을 하고 싶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여러 남자들을 만나면서 자기의 사랑을 합리화시키고 싶은 거다. 내가 이 남자를 왜 만나야 되지? 그렇게 사랑이 없으면서도 사랑해야 되는 이유를 찾는 거지. 그래, 얘는 재력이 있잖아, 모든 사람들이 재력을 좋아하고 또 존경해주잖아, 그렇기 때문에 그 남자랑 연애를 해도 정당성이 있는 거다. 그리고 사법고시 고시생이랑 연애할 때도, 장래성이 있는 예비 검사니까 날 지켜줄 수 있을 거야, 그런 조건도 사랑을 합리화시키는 거지. 진정한 사랑이 있었다면 신미수가 처음부터 갈등할 이유는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이성을 만날 때 조건을 따진다는 게 굳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이 여자를 사랑하고, 이 남자를 사랑해야 될 어떤 정당성을,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거다.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 중,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태를 풍자한 캐릭터 같다. 요즘 애정이나 사랑을 조건시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감정을 이성으로 해결하려 든다.
특히 한국 사회는 결혼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은 거 같다. 외국 같은 경우는 개인과 개인의 결혼이지만, 한국 같은 경우는 집안과 집안의 결혼이라 해야 맞는 거 같다. 한국은 시어머니, 시아버지, 오누이, 며느리, 친정 아버지, 친정 어머니, 이렇게 챙겨야 할 가족 시스템(system)이 워낙 많기 때문에 개개인이 결혼해서 행복하자고 해서 쉽게 행복해질 수 없다. 왜냐면 모든 가족이 다 융화가 되야 하니까. 그런 스트레스 때문에 조건을 생각하게 되는 거 같다. 왜냐면 나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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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맞아, 그런 거. 혼수 문제 때문에 얽히고 설키다 보면 또 서로에게 자꾸 섭섭한 게 생긴다. 아무리 우리 엄마가 그랬다고 해도 우리 엄마한테 너 이럴 수 있어? 이런 식으로 감정상하다 보면 그렇게 되겠지.

<환상의 커플> 이후로 공백이 있었다. 사실 배우로서 상종가인 시기에 기회가 상당했을 텐데, 오히려 몸을 추슬렀다는 게 다소 의외였다.
난 오만 방자하기 싫었다. <환상의 커플>로 사랑을 받게 돼서 캐스팅 섭외가 많아졌고 자칫하면 그릇된 초이스(choice)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발자국 물러서서 지금 내가 있는 정확한 위치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있는 정확한 위치에서 나한테 가장 걸맞은 역할을 하고 싶었다. 왜냐면 내가 <환상의 커플>로 대중들에게 심어주었던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대중들에게. 그리고 거품에 쉽게 휩싸이지 않는 그런 배우로 남고 싶었다.

결국 자기 보호를 위한 시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일관된 이미지의 캐릭터를 연기하다 보면 그런 이미지로 각인될 위험도 크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배우로서 어떤 이미지를 각인시킨다는 건 일종의 모험일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지금 한 색깔을 고집하는 배우들 중에서도 훌륭한 배우들이 많다. 로버트 드니로나 알 파치노도 있고, 미쉘 파이퍼도 그렇고. 훌륭한 배우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뚜렷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배우들도 많지만 대부분은 그런 것 같다. 또한 역할의 변신에 따라서 몰입도가 각각 다르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만의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난 단지 나만의 카리스마로 여러 역할을 소화해보고 싶은 거다. 그래서 그 어떤 일정한 캐릭터에 갇힐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대중들이 날 볼 땐 한예슬의 색깔을 보겠지만 그것도 다른 인터프릿(interpret), 해석을 통해서 새로운 색깔로 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당한 자기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난 대중들이 날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에 묶여서 배우 생활을 하는데 좌지우지되고 싶지 않다. 난 배우로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그러면서 대중들과 어떤 영감이 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고 싶다?
교감하고 싶은 거지. 그리고 난 다음 작품에서 다른 역할을 했을 때, 굳이 변신이라고 하지 않아도 그 역할로 자기 색깔을 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그리고 그전에 일단 난 배우이기 때문에 그건 내가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름의 태풍>같은 시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극적인 캐릭터도 언젠가 다시 도전해야 할 산이 아닐까.
좋다. 어떤 하이라이트나 악센트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원스>같은 영화라면. 정말 물 흐르듯이, 그런 잔잔한 역할도 너무 좋다. 어떤 역할에 대한 복합적인 느낌보다는 그 영화 자체가 주는 복합적인 느낌도 좋다.

단순히 어떤 두드러지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두드러져 보이기 위한 일부처럼 느껴질 수 있어도 좋다는 말인가?
그 영화는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르잖아. 왜 두 사람이 맺어지지 않았는지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잔잔하게 흘러가 버리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영화. 그런 것들이 너무 좋다. 그런데 솔직히 영화는 영화마다 너무 매력이 많다. 그렇지 않나? 물론 드라마도 좋지만 드라마는 아무래도 영화보다 완성도가 떨어진다. 영화라는 장르는 나로 하여금 다른 세계에 살 수 있게끔 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배우 활동을 함에 있어서 외로울 틈이 없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건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나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런 다양한 삶을 인생에서 여러 번 사는 것도 바쁜 거지.

마치 여행을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모르는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랄까. 마치 운명처럼 느껴진다.
난 솔직히 처음엔 연기가 싫었다. 내가 왜 연기를 해야 되는지 몰랐는데, 그냥 끌리는 거 있잖아.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갈 수 없게 끌리는, 그래서 난 처음에 연기할 땐 정말 울면서 연기했다. (웃음) 정말 싫은데, 그걸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이해가 안가는 거다. 그래서 엄마한테 매일 전화해서, 엄마, 나 미국 갈 거야, 미국 갈 거야. 그랬었다.

뭐가 그렇게 싫던가?
모르겠다. (웃음) 그게 왜, 신 내리면 무당이 하기 싫어도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잖아. 그런 걸 운명이라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나 같은 경우는 일단 한 작품이 끝났고 지금은 한창 영화 홍보에 바쁘지만 솔직히 6개월 정도 쉬면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할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벌써 다음 작품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푹 빠져버린 거 같다.
헤어날 수 없는 거 같다. (웃음) 내가 정말 너무 연예인 생활이 힘들어서 벗어나고 싶다고 해도, 이미 정신적으로 헤어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은 일과 사랑에도 중독되기 쉽다던데, 그렇게 일에 중독됐나 보다.
그런 가봐. 어떡해~. (웃음) 내가 예전에 인터뷰 할 땐, 항상 내 개인적인 삶과 일의 밸런스를 맞춰서 행복한 여자로 살 수 있도록 정말 균형 있는 삶을 유지하며 살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이 얼마나 좋으면 내 개인적인 행복을 희생해서라도 하고 싶을 만큼 이게 더 좋은 거다. 그건 위험한 거지, 솔직히. 그건 내 인생에 있어서 어떤 선을 넘는 순간인데, 그만큼 일이 좋아진다는 건 정말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그 선에 가까이 가고 있구나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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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연기에 대한 매력을 많이 느끼게 된 것 같다.
내 개인적인 삶과 일반적인 삶에서 줄 수 없는, 그런 세계에서 살 수 있는, 그런 삶이 너무 좋은 거 같다. 더 이상 그것만큼 내게 삶의 즐거움을 주는 어떤 것도 없는 거 같다. 너무 따분해지는 거 있잖아. 일상 생활이. 항상 다른 역할로 살다가 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매일 하는 식사와 그냥 주위 사람들과의 뻔한 대화와 일반 사람들과의 생활이 내게 더 이상 새롭지가 않은 거지.

그건 좀 위험한 것 같다.
예술가들 중 보통 왜 저렇게 살까라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분들이 많잖아. 이해가 갈 거 같더라. 왜 저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인지. 예를 들어 그림 그리시는 화가 분들 중 아예 사회와 교리를 끊고 정말 그림만 그리시는 분들 있잖아. 왜 저렇게 살까 하면 그분은 그 세상에서 하는 일이 즐거운 거겠지. 그런 게 있는 거 같다. 나도 돌아갈 수 없는 그런 선을......(웃음)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기에 용의주도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
어떤 기사에서 읽었는데, 용의주도의 의미를 사전으로 해석했더라. 용의주도란 매사에 신중하게 꼼꼼히 따져서 일을 그르침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뜻으로 해석한다면 용의주도하다는 건 필요한 거 같다. 그릇됨이 없이, 그르침이 없이. 하지만 일반 생활에서 해석되는 용의주도함이란 어떻게 보면 잔머리 굴리고, 어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뭐든지 한다는 듯한 뉘앙스가 있다. 그런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항상 진실되지 않은 행동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득이라고 생각될지언정, 그것도 진실이 아니라 가상으로 만들어낸 어떤 거품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이 진실로 이뤄낸 모든 일들은 그 일들이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 진실되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현실에서 용의주도한 삶이란 거짓 같은 인생에 가깝다는 것 같다. 그렇다면 본인은 용의주도한 편인가?
난 별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용의주도했다면 <환상의 커플> 끝나고 내게 들어왔던 CF에 모두 계약하고, (웃음) 그 다음에 섭외됐던 대작들을 모두 섭렵하고, 쉬지 않고 활동했을 거다. 나는 차근차근 수위를 높여가고 싶다.

배우가 된 뒤로 부모님의 반응은 어떤가?
처음에 저희 아버지께서는 굉장히 반대하셨다. 굉장히 보수적이시다. 사실은 내가 데뷔를 더 일찍 할 수 있었다. 길거리 캐스팅으로 먼저 손을 뻗는 경우 있잖아. 그래서 일찍 시작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못했다. 그래도 일단 일을 시작하게 돼서 이젠 인정해주신다. 어머니 같은 경우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날 도와주시는 편이시다. 저희 어머니는 내가 재능이 있다고 굳게 믿고 꿈을 펼치라고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시는 분이시다. 아마도 내가 그만 둔다고 그러면 어머니께서, ‘너 미쳤니? 왜 그 재능을 썩혀?’ (웃음) 그러면서 날 오히려 더 밀어 넣으실 거다.

<환상의 커플>로 많은 관심을 얻은 후, 그런 관심으로부터 다시 멀어질 수 있다는 부담감은 없었나?
난 그렇게 쉽게 사라지진 않을 거다. 밟아도 밟아도 뿌리 뻗는 잡초처럼. (웃음) 난 내가 잠시 얼굴을 안 비춘다고 대중들한테 잊혀지는 그런 배우였다면 이렇게 연기를 꾸준히 할 수 있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난 자신감 있기 때문에, 그리고 대중들한테 보여줄 게 아직도 많다고 생각하고, 대중들이 내 모습을 보길 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유를 갖고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잡초치곤 너무 예쁜 거 같은데. (웃음)
밟아도 밟아도 라는 말이 너무 웃기지 않아? (웃음)

미니홈피에서 인상적인 글을 하나 읽었다. 난 우주인이며 이중인격자다. 하지만 난 나를 사랑해주는 지구인들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계속 이 별에 눌러 살아야지. 물론 거기서 지구인은 팬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지. 그건 내가 신인 때, 미니홈피 막 시작하고 썼던 글이다. 이제 삭제할 때도 됐는데, 그냥 그때 그렇게 내가 적어놓은 글을 보면 그 생각들이 너무 귀엽다. 나의 세계관을 풍자해서 적은 글이라고 보면 된다. 나의 세계관은 비록 다른 사람과 틀리지만 나의 이런 점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에 대해서 고맙다는 걸 재미있게 풀어 쓴 거다.

지워버리긴 아까운 거 같다.
그럴까?

그리고 역시나 우주인 치곤 너무 예쁘다. (웃음) 그리고 오랫동안 눌러 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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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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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엄지원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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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개봉일인데 기분은 어떤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아, 오늘 개봉일이네? 무섭다.’ 막 이랬었다. (웃음)

이전까지의 작품들과 다른 느낌이라도 있나?
내 전작의 어떤 배우나 감독님들 중 ‘우리는 잘될 거야. 우리는 몇만은 돌파해야지’ 이런 얘기를 하던 사람들이 없었다. 그런데 <스카우트> 팀은 흥행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한다. ‘이건 몇 만 정도 갈 거야’ 이런 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저 사람들이 안 되면 어쩌려고 저런 얘기를 하나 싶더라. (웃음) 난 그런 분위기가 처음이라 낯설다.

하지만 출연작 중에서도 어느 정도 흥행성이 점쳐졌던 작품들이 있지 않았나?
그래도 그 전에 같이 했던 사람들 중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같이 나눈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근데 이 사람들은 왜 이러지? (웃음)

요즘에 질리게 듣는 이야기겠지만 나도 묻겠다. 야구 좋아하나?
맞다. 되게 많이 듣는다. 일단 잘 모르겠다. 경기 규칙과 야구는 볼 줄 아는데, 막 좋아해서 챙겨보진 않는다. 남자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만큼 정도는 아닌 거 같다.

개인적으로 양준혁 씨와 많이 친하다고 들었다.
많이 친하진 않은데. (웃음)

시구라도 하러 갔다가 친해졌나?
그건 아니고, 양준혁씨가 대구 분이고, 나도 대구 사람이다 보니까 그래서 인연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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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과거에 선동열, 이종범 광팬이었다. 두 분이 일본 진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야구 경기 다 챙겨봤었다.
어디로 가셨더라? 주니치였나?

생각보다 잘 아는 편이다.
그런 기본적인 건 안다. (웃음)

<스카우트>덕분에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혹시 <스카우트> 이전에 광주에 가본 적 있나?
예전에 <똥개>찍었을 당시 곽경택 감독님과 같이 광주영화제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처음으로 갔었다.

<스카우트>촬영으로 오랜만에 다시 찾으니 어떻던가?
이번에 <스카우트> 땐 세트 장에서만 촬영하고 숙소 주변에서만 머물러서 잘 몰랐다. 맨 처음에 갔을 때는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너무 좋았다. (웃음) 나에게 광주의 첫인상을 말하라고 한다면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는 거다.

그런데 사투리를 어찌나 잘 쓰던지.
아, 나 잘했나?

사투리도 사투리지만 그보다도 그 어정쩡한 표준어가 더욱 그럴 듯 했다.
(박수를 치면서)응~~! 그거! (웃음))

너무 유연하더라. 연습 좀 했을 것 같던데.
경상도 사람들은 서울에 와서도 그냥 경상도 사투리를 계속 쓰는 사람들이 많지만 광주나 전라도 사람들은 말씨가 완전히 달라져서 출신이 어딘지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정말 많더라. 예를 들면 김현석 감독님도 그렇고, 박철민 선배님도 그렇고. 세영이 같은 경우도 광주에서 왔다는 걸 티 안내고 싶어하고, 빨리 적응하고 싶어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 서울에서 오래 살지 않은 이상, 빨리 적응하고 싶어도 쉽게 되는 건 아니니까 흉내를 내는 거에 불과했겠지. 그렇게 어색하게 표준어를 쓰다가도 본래 사투리가 드러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 걸 혼자서 익혔을 리는 없고, 전라도 사투리에 능한 누군가가 도와줬을 것 같은데.
우리 매니저가 전라도 출신이다. 그래서 도움을 많이 받았지. 그랑께요~, 그랑께요~, 이게 맞아? 막 이러면서, (웃음) 저는~요, 이게 맞아? 아니면 저~는요, 이게 맞아? 이런 미묘한 것까지 하나하나 다 물어봤다.

<스카우트>에서도 노래를 부르더라. <극장전>에서도 했었는데, 솔직히 잘하는 편은 아니다.
잘 하지! (웃음) 왜~? 나는 나름대로 잘 한다고 생각하고 부른 건데.

그래도 박치는 아니더라. 고음 처리가 불안할 뿐. (웃음) 최근 박선주 씨한테 보컬 트레이닝도 받았다고 들었다.
그냥 내가 샤우팅이 잘 안 되는 거 같아서, 물론 연기할 때 그런 캐릭터를 아직 한번도 못 해봐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내 스스로가 큰 소리를 낸다는 게 잘 안될 것 같다는 막연한 부담감이 있었다. 사실 사람이 살면서 소리지를 일은 거의 없다, 정말 화가 나도. 하지만 배우라면 어찌됐건 앞으로 그런 게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샤우팅하는 게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거든. 물론 노래 때문에 그런 걸 하게 된 건 아니고. 질러보려면 많이 질러봐야 잘 하게 되니까 그랬던 거 같다.

말할 때 비음이 많이 나온다. 덕분에 유약하고 섬세한 인상을 준다. 게다가 소리를 지를 때는 마치 울먹이는 느낌도 나더라. 마치 유리 같은 이미지랄까.
어차피 영화 속에서 보여준 캐릭터를 통해서 배우들의 이미지는 유추되는 거니까. 분명히 내가 연기한 캐릭터들인 만큼 맞는 부분들도 있겠지만 내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앞으로 내가 하게 될 것에 대비시킨다면 정말 단면적인 캐릭터만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엄지원이 갖고 있는 10개 중에서 3개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런 평들에 대해서도 별로 괘념치는 않는 거 같다. 오히려 난 원래 일상에서는 기운이 좀 있고, 평상시 말투는 애 같은 편이다. (웃음) 그런데 평상시에도 막 정확하게 발음하려 하면 힘든 것 같다. 그래서 일이 아닌 평상시에는 그냥 편한 대로 말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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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스카우트> 출연을 고사했었다고 들었다.
그 때는 시나리오상의 세영이 굉장히 단면적이고, 그렇게 비중도 많지 않았다. 꼭 그런 거 보내주고서 배우한테 잘 해달라 그러더라. (웃음) 처음부터 보여줄 게 많은 걸 써서 보여달라고 하면 하겠는데 써놓은 것도 없으면서 왜 자꾸 내가 스스로 해야 되는 것만 많은 책을 왜 자꾸 보내? 이런 생각이 들어서 안 하려고 했었다.

시나리오가 맘에 안 들어서?
세영 자체만 그랬다. 시나리오 자체는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세영이가 좀 맘에 안 들어서 안 한다고 했었다. 그러다 내가 꿈을 꿨는데 영화가 너무 잘 되는 꿈을 꿔서 사양했던 세영이를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김현석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했었다. (웃음)

현장 분위기가 재미있었을 것 같다.
너무 좋았다!

난 비광시 때 완전 자지러졌었다. (웃음)
김현석 감독님께서 현장에서 직접 쓰셨지. 그 때 거의 다들 쓰러졌었다. 그 전엔 시나리오상에 ‘비광’이라고 대충 있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추후에 쓰겠다고 하셔서 우리도 실질적인 내용은 본 촬영 때 감독님께서 쓰신 뒤에야 알게 됐다. 그렇게 재미있는 일들이 영화 촬영 동안 참 많았다.

노래까지 부르자는 아이디어는 누가?
감독님. 술 먹다가 우리 노래해요, 막 이래서. (웃음)

의외로 임창정 씨가 빠졌더라. 가수 경력이 있는 사람이 빠지다니 의외다.
그게 아무래도 곤태(박철민)의 비광시이고, 가사 자체가 호창(임창정)의 얘기는 아니니까. 이제 시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노래로 만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창정 오빠가 부를 수는 없고, 박철민 선배는 노래를 자기는 너무 하고 싶지만 노래를 너무 못해서 못하겠다고 하셨는데 감독님이 그럼 내가 노래할게, 형은 랩해, 지원씨가 코러스하면 되잖아, 그렇게 된 거지. 정확히 말하면 권태를 위해서 우리가 다같이 만든 테마송이다. (웃음)

그런데 권태처럼 여자에게 헌신을 다하는 비광같은 남자야말로 진정 여자에게 좋은 남자 아닐까?
그건 그 남자에게 너무 슬픈 거 같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여자는 늘 도움을 받아서 잘 해주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거니까. 그렇지만 그 남자는 여자가 잘 해주는 것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거잖아. 잘해주는 기쁨이라도 얻으려고. 남자 입장에서는 순애보적일지 몰라도, 여자로서 봤을 때는 불쌍한 거 같아. 안타깝지.

결혼 생각은 아직 없나?
없다.

배우로서의 욕심 때문에?
꼭 그런 건 아닌데, 결혼은 별로 (잠시 생각하다가) 그다지 하고 싶다는 생각해 본적은 없는 거 같아요.

이상형을 아직 못 만난 탓일까?
그런가 보다. (웃음)

세영은 순수한 여자다. 그리고 그런 순수함이 사회적인 불합리에 저항하는 에너지의 기반이 돼서 결국 운동권이란 행동으로 보여주는 여자다. 세영이란 캐릭터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나?
감독님께서 저에게 연기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말씀하신 건 거의 없지만 딱 한마디 하신 건 운동권 학생이라고 너무 운동권 학생처럼 연기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원래 세영이가 시나리오 자체엔 대사도 거의 없기 때문에 대부분 현장에서 해나가야 되는 캐릭터라서 그런 부탁을 한 거 같다. 어떻게 보면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이기 때문에 그런 면을 세게 표현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감독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나도 세영이가 그런 의미의 강함보다 순수함과 연약함의 의미로 강한 것이 영화적 의미가 맞겠다고 생각했다. 어쨌건 간에 세영이가 10년이 지난 뒤에 좀 까칠해지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사람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연기하고 싶었던 대학 시절의 세영이는 좀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였거든. 사람은 쉽게 본질이 변하지 않으니까, 그런 백치 같은 구석도 좀 남아있으면서 정신이 살아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렇게 넘어가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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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발랄한 캐릭터는 <똥개>이후로 처음이고, 닭살 커플 연기도 처음이었다.
재미있었다.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았나? (웃음) 너무 잘 맞는 거 같아, 나랑.

그 동안의 연기를 염두에 두자면 본인에게도 색다른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중은 날 잘 모르지만 나는 날 안다. 사실 그런 연기가 내겐 자신 있는 편이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잘 할 수 있는 연기였던 거 같아서 별 생각 없이 쉽게 했던 거 같다. 다만 말한 것처럼 전작들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엄지원이란 배우가 저런 연기를 하면서 스스로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될 지도 모르지. 사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쩌면 김현석 감독이 그런 계기를 마련해준 셈 아닐까?
(정색하며)어! 그건 아닌 거 같아! (웃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전작들의 연기들이 내가 배우로서 가져야 할 어떤 조건들을 충족시켜줬다고 생각한다. 배우로서 지녀야 할 깊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소들, 그런 것들이 내 스스로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전작들을 선택하게 된 것 같다. <스카우트>같은 연기에 대해서는 스스로 자신이 있었고 언제든지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안 했던 거뿐이지. 하지만 사람들은 순차적으로 보는 거니까 할 수 있는데 안 한 건지, 못한 건지 잘 모를 뿐이다. 김현석 감독님도 사실 나를 실제로 만나보곤 너무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 성격 때문에. 그랬으니 감독님도 아마 내가 그걸 잘할 줄 모르고 캐스팅 하신 거겠지? (웃음)

그 말대로라면 스스로에게 자신 없는 연기부터 먼저 밟아나간 셈이다.
물론 <똥개>는 자신 있었지만, <주홍글씨>같은 경우는 정말 자신 없었다. 정말 스스로도 진짜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의 연기였으니까, 그런 면에서 자신이 없었던 거 같다. <극장전>은 정말 기회가 좋아서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거 같고,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와 전혀 다른 지점에 있는 작품인 거 같다. 그리고 나서 만약 <가을로>를 선택하지 않고 좀 더 빨리 <스카우트>같은 작품을 했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비슷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계속 맡아서 그렇게 보이는 면이 강한 것 같다.

연민을 부르는 캐릭터가 많았다. 그래서 영화마다 한번 이상씩은 우는 씬이 끼어있는 것 같더라. 평소에도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인가?
평소에도 잘 우는 편이다. 영화 속 눈물 연기도 정말 슬픈 감정이 전해져서 우는 건데, 사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안 슬프면 어떡해야 할까라는 스트레스가 있다. 어떤 감정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서 나에겐 안 슬플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똑 같은 코드로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그 인물이 직접 되기 전까지는 대본을 보면서도 울어야 되는 장면이 있으면 이거 할 때 안 슬프면 어떡해야 할까라는 스트레스가 있다. 물론 가짜로 울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런데 실제로 본인은 대학 시절에 어떤 사람이었을까?
지금이랑 똑 같은 성격이었다.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을 <극장전>하던 시기에 어쩌다가 한 번 쭉 보게 됐는데, 그 때 나도 되게 깜짝 놀랐었다. 지금이랑 성격이 똑같고 생각하는 것도 되게 비슷했더라. 그래서 깜짝 놀랐었다. 이제 또 그 시기에 비해서 시간이 다시 흘렀지만 생각해보면 인간의 본질은 크게 변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정과 사회 생활을 겪고 세상을 살면서 좀 더 성숙해지거나 깊어지는 건 있지만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어떤 특성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결국 대학시절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세영과도 비슷한 것 같다.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캐릭터니까.
비슷한 거 같다. 그래서인지 세영이 좀 연기하기가 굉장히 쉬웠나 보다. 너무 쉽게 촬영했으니까.

그럼 가장 힘들게 연기했다고 생각되는 캐릭터가 있나?
캐릭터에서 오는 무게감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냥 캐릭터에 시달림을 받았던 건 <주홍글씨>와 <가을로>였던 거 같다. 스스로는 그저 캐릭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가을로>같은 경우는 그래도 여행하는 기분이라 즐거웠을 것 같은데.
초반에는 그랬지만 나중에는 점점 길어지면서 고통스러웠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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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점에서?
한겨울에도 많이 찍었는데 사실 너무 추웠다. 막 칼바람을 맞으면서 가을인 것처럼 연기를 해야 되고, 그렇게 계절씬이 좀 길어지면서 힘들었던 거 같다. 그런데 오히려 요즘에 가을이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 아마도 <가을로> 촬영할 때는 가을의 풍광들에 대해서 많이 못 느끼고 무심히 지나갔었는데 이제서야 눈이 트인 걸 발견하게 된 거다. 그래서 지금 이 가을에 많이 느끼고 깨닫게 되는 거 같다. 결국 요즘 그 영화가 나에게 이런 선물을 주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임창정 씨나 박철민 씨처럼 개그 캐릭터에 능한 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나?
그냥 재미있었다. 뭔가 풀어져있는 사람들과 연기하는 게. 물론 그렇다고 내가 풀어져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배우에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솔직히 내가 그런 연기 스타일에 호감을 보이는 취향은 아닌 거 같다. 그러니까 영화를 좋아하는 거나, 보는 거나, 해석하는 거나. 그런 면에서 여러 가지로 신선한 경험이었던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아니면 혹시 5.18을 소재로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나? <화려한 휴가>처럼 직접적인 건 아니지만 <스카우트>도 5.18에 관련된 이야기라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민감한 대사들도 있었고.
전혀 없었다. 내 생각엔 <화려한 휴가>가 그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소시민들의 이야기라면 <스카우트>는 그런 시대상 속에 평범하게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세상은 그렇게 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모르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감독님도 그냥 그렇게 주문하셨고, 그래서 오히려 그런 부담 같은 게 없었던 거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영화에서 이렇게 됐다는 게 밝혀졌을 때 더 울림이 있는 거 같다. 작정하고 하는 것보단 그랬는데 이렇더라는 게 더 깊이 있게 다가올 수 있는 것도 그런 지점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땐 광주사람들조차 선동열이 누구냐고 하는 시절이었다. 이는 그들이 불과 며칠 뒤, 5.18이라는 무시무시한 참극을 맞이할 것이란 예감조차 못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그런데 세영이 호창에게 종종 광주를 떠나라고 재촉한 건 그런 예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세영은 그 상황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세영 자체는 영화 속에서 그런 걸 예감하고 가장 먼저 발 빠르게 행동하는 인물인 건 사실이다. 왜냐면 어쨌던 간에 전쟁으로 치면 최전방이랄까. 가장 가깝게 정보를 접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호창처럼 전혀 모르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하고. 사실 내가 그 시절을 직접 겪었던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라던가 그런 걸 많이 찾아봤다. 그렇지만 어떤 개인적인 느낌 같은 걸 연기에 많이 반영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연기에 임했다.

개인적으로 <스카우트>에서 가장 맘에 드는 장면을 꼽는다면?
과거 회상 장면에서 다시 현재로 넘어오는 씬. YMCA 사무실에 세영과 호창이 따로따로 앉아서 적막함이 흐르던 그 장면이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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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조실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호창과 주고 받는 대사 뒤에 순간적으로 세영이 머금던 미소가 아이러니했다. 그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의 속마음을 교감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 상황의 대사는 현장에서 김현석 감독님께서 갑자기 만들어 주신 거다. 원래 창정 오빠가 나한테 하는 대사도, 내가 창정 오빠한테 하는 대사도 시나리오에 없었고 호창이가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러 서울에서 왔다는 게 밝혀지면 그냥 취조실을 나가고, 세영이만 남겨지는 거였다. 그런데 김현석 감독님이 이런 대사를 해보는 게 어떨까라고 창정 오빠한테 제안했고, 창정 오빠가 그럼 세영이한테 한마디 하면 세영이도 한마디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해서 결국 나도 그렇게 대사를 하자고 동의했고 그렇게 현장에서 추가된 부분이다. 그냥 난 그 상황에서 서로에게 아직 마음이 남아있음을 전달하는 최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 장면도 되게 좋아한다. (웃음)

평소에 외출은 자주 하시는 편인가?
외출?

<극장전>처럼 길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떨까 궁금했다.
그냥 혼자 잘 다니고, 알아보는 사람들 있으면 반갑게 인사하고 그런다. 그런 부분은 영실이와 비슷한 거 같다. (웃음)

영화에서 촬영했던 장소를 다시 가본 적 있나?
의도해서 찾아가진 않지만 어쩌다가 지나가게 될 때는 기분이 남다르지.

배우는 게 많다던데, 욕심이 많은 거 같다.
기본적으로 무의미한 시간에 투자하는 거다. 사실 배우들이 촬영을 안 할 때는 시간이 많다. 그런데 바쁠 때는 또 너무 바쁘기 때문에 뭔가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 사람으로서 뭔가 발전적인 욕망이 커지는 거 같다. 그래서 그냥 하나씩 하게 되는 거 같다.

최근에 우정출연이나 특별출연도 많이 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라도?
굳이 안 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웃음)

어떻게 보면 배우로서 발을 넓히기 위한 어떤 전략 때문은 아닐까?
(고개를 흔들면서) 에이~! <기담>은 제작자이신 도로시 장소정 대표님이 저랑 너무나 친한 언니 사이고, 창립 작품이라서 제가 기꺼이 참여한 거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같은 경우는 워낙 화제작이고 내가 참여해서 나쁠 이유가 전혀 없는 작품이지 않나. 특별 출연이라 씬이 별로 없지만 김지운 감독님께서 부탁하시고 특별히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까 하게 된 거다.

선동열이나 이종범은 야구팬에겐 전설 같은 존재다. 배우로서 본인에게도 그런 전설 같은 존재가 있다면?
많지. (웃음) 한국에서는 이미숙 선배님 좋아하고, 이자벨 위페르도 좋아한다. 역할 모델 롤이 된다고 생각하는 배우는 꽤 있는 거 같아요. 메릴 스트립도 좋아하고.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케이트 블란쳇도 좋아한다. 가끔씩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모르면 속상하더라. (웃음)

본인은 배우로서 혹은 인생에서 몇회정도 왔다고 생각하나?
3회~!

왜 3회인가?
일단 시작은 했으니까 1회는 아니고, 그냥 스스로 생각할 때 아직 크게 만족할만한 정도에 다다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니까 5회는 아닌 것 같고, 말년도 아니니까 8~9회는 더 아니고, 3회 정도 되지 않을까? (웃음)

그럼 공격 중? 수비 중?
수비할건 없는 거 같은데. (웃음)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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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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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감독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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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의 한국 개봉에 대한 소감이 궁금하다.
한국은 내 고향인 대만과 같은 역사를 지닌 나라라 형제 같은 느낌이 든다. 일제 점령기의 역사를 공유한 한국에서도 <색, 계>에 대한 역사적 공감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와호장룡>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7년 만에 다시 <색, 계>로 한국을 찾게 됐다. 게다가 두 편의 영화가 모두 중국영화란 점에서 특별한 느낌이 든다.

한국에서 본인의 영화가 어느 정도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나?
그렇게까지 큰 인기가 있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내 영화에 관심 있는 관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한 관심도 있다. 어제 시사회와 레드 카펫에 참가하면서 한국의 여러 매체와 관객들로부터 따뜻하고 친근한 인상을 느꼈다. 그런 흥분과 열정을 극장에서 직접 느낄 수 있었던 사실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놀라웠다.

한국에서 <색, 계>의 무삭제 상영이 결정됐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기분 좋은 소식이 아닐까 싶다.
일단 <색, 계>를 풀 버전으로 상영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싶다. 왜냐면 섹스씬을 단순히 선정적이라고 여기거나 나쁘게 해석될 수 있는데 그것을 삭제하지 않았다는 건 그 장면을 미술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라고 받아들이는 평가라고 생각돼서 너무 감사하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나를 존경하게 될 수 있다는 것보다, 그런 기분은 내게 영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실이라서 굉장히 영광스럽다. 대만이나 홍콩의 경우, 영화 산업에 굉장한 붐이 일고 활성화되던 시기에 굉장히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반면에 영화 산업이 별로 활성화되지 못할 때는 배급에도 문제가 생겨서 감독이 직접 영화를 팔아야 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아시아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덕분에 다른 아시아권 국가에서 <색, 계>가 호평 속에 개봉했고, 대만과 홍콩에서는 레코드를 기록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들었다. 또 이런 상황이 더욱 활성화돼서 내가 받았던 그런 환호를 배우에게도 나눠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좋겠다.

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전작 <브로크백 마운틴>의 수상 전례로 예상하지 못했던 바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 당시 기분이 어땠나?
먼저 상을 받을 당시 너무 흥분됐다. 사실 그 전에 <색, 계>가 미국에서 NC-17등급을 받았고, 그 점이 여러 가지로 영화에 제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수상을 통해 <색, 계>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 같아 너무 기뻤다. 특히 7명의 심사위원들이 모두 감독들이었는데 그들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특히 기뻤다. 사실 전작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감독상을 받았고 그 당시도 흥분됐지만 그건 개인적으로 받는 상이라 부담이 됐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색, 계>는 작품 자체로 상을 받게 돼서 스텝들과 영광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더욱 기뻤다.

장아이링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고자 결심한 계기가 궁금하다.
장아이링은 중화권에서 워낙 사랑을 받는 작가이며 나도 개인적인 팬이다. 때문에 함부로 그녀의 작품을 각색해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색, 계>는 그녀의 다른 소설과 달리 작가가 오랫동안 공들였던 작품이고, 28페이지의 짧은 단편이었지만 그녀가 표현하고자 했던 절망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담겨 있었다. 게다가 여성의 심리가 잘 표현된 것은 물론 항일전쟁시기의 강인한 여성의 사랑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이 없어 두려웠지만 한 번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여주인공 ‘왕치아즈’가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내가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지만 작품을 아끼는 마음도 마찬가지로 컸다. 결국 이런 두 가지 마음을 담아 영화를 만들게 됐다.

<브로크백 마운틴>에 이어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두 작품 모두단편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허락되지 않은 금지된 사랑이야말로 더욱 로맨틱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더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그런 점 때문에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스무 살에나 받아들였어야 할 극적인 로맨스가 나이 오십이 돼서야 편해지고 다룰 수 있게 됐다는 게 다른 사람에 비해 남다르긴 하지만, (웃음) 난 지금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시간인 것 같다.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색, 계>의 원작은 굉장히 재능 있는 반면, 거친 문체를 가진 여작가들의 작품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서부시대를 바탕으로 펼쳐진 카우보이와 마초맨의 사랑이야기였기 때문에고 시대적으로 용납될 수 없었지만, <색, 계>는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건 애국심과 여성의 성정체성을 서로 저울질한다는 위험한 발상이고 그건 시대적으로 더욱 타부(taboo)시되는 일이기 때문에 영화화를 머뭇거리게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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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망설임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영화를 완성하고자 했던 욕망의 근원이 뭔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탈 때 고속으로 깊게 떨어질수록 스릴이 커지는 것처럼 내 안에 존재하는 두려움을 파헤치고 그걸 들여다 봤을 때 나 역시도 그런 흥분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더욱 그런 새로운 소재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그건 사실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운 작업이지만 그럼으로써 예술적으로 나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고 세상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그걸 해부하는 작업을 즐겨야 한다. 이런 작업은 내가 영화 감독으로서 항상 배역을 빌어서 내 연기를 보는 것과도 같다. 이번엔 왕치아즈를 빌어서 내가 연기를 한 셈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고통과 욕망 혹은 욕정을 달리 생각하면 그건 색(色)이다. 모든 산물이 갖고 있는 모든 색깔이 색이니까 내가 보는 시야에 있는 모든 사물을 난 색깔로 생각하고 그것들을 욕망할 때도 그 색을 떠올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어떤 나의 욕망, 색을 자제하고 그것을 감시하는 계, caution이 항상 공존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을 영화상으로, 화면상으로, 스크린으로 옮겨서 보여주는 작업을 하는 것이 내가 <색, 계>를 통해서 하고자 했던 작업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색, 계> 라는 제목의 의미를 직접 듣고 싶다.
<색, 계>는 불가에서 말하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지칭하는 용어다. 장아이링의 소설은 늘 두 가지의 대조적인 심리들이 그려지곤 한다. 계는 모든 방법을 이용하여 욕망을 물리치는 것이고, 색은 색정의 색, 색깔의 색을 가리킨다. 특히 색은 인간이 눈으로 보는 동시에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도 가리킨다. 인생에서 원하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그것을 배척하고 항거해야 할 때도 있다. <색, 계>는 그런 의미에서 대조적이지만 하나로 관통되기도 하는, 한가지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의미다.

<색,계>에선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강렬한 정사씬이 등장한다. 사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동성애도 그 자체만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계속해서 극단적인 방식의 사랑을 묘사하는 이유는 뭘까?
중년의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웃음) 난 과거에는 보수적이었고, 사랑에 대해서 평범한 느낌을 가진 사람에 불과했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평범한 가정생활을 통해 일반적인 사회적 의무들을 이행해 왔고, 상당히 정상적인 범주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무협, 애니메이션 같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시도하게 됐고 중년 이후가 되어서 젊었던 시절,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색다른 것들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잡을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고, <색, 계>는 그보다 노골적인 수위로 표현했지만 마찬가지다. 표현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두영화는 자매와도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결말부에서 보여지는 두 인물의 대조적인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죽음을 앞둔 왕치아즈(탕웨이)의 표정이 담담한 것에 비해서 살아남은 이(양조위)의 표정은 상당히 비극적인 슬픔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색, 계>는 마치 죽은 자의 비극처럼 포장돼있지만 오히려 살아남은 자의 비극이 아닐까 생각했다.
잘 본 것이다. 결말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언급하거나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관객들 스스로의 개인적인 해석을 열어두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에 나 역시도 동의한다. 한편으로 시대적 배경에서 생각해보면 누가 지배를 받느냐, 누가 지배를 하느냐라는 시대적 기로가 존재한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곳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상하이에서 이가 왕차이즈를 성적으로 지배하는 포지션은 각각 먹이와 사냥꾼 같은 관계를 이루고 있다. 중국의 옛날 이야기 중, 호랑이와 청이라고 부르는 귀신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청은 항상 호랑이를 따라다니면서 호랑이를 지배한다는 귀신인데 그런 옛날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기도 했다. 결국 여주인공이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서 어떤 희열을 느꼈고, 오히려 그 남자 주인공은 귀신 같은 여자의 기억에 의해 계속 고통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맥락을 이루고 있으니까 말한 대로 산사람의 비극이고 지옥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전쟁 영화에서는 선한 사람은 항상 죽고, 살아남은 자는 그에 대해 가책을 느끼면서 죽은 자만 못하게 살아간다는 그런 형식을 생각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건 징벌의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 불공정한 시대적 기운과 결탁한 인물에 대한 단죄이거나 복수라고 말이다.
정확하게 그건 어떤 슬픔이라고 본다. 그 여주인공의 죽음은 남자주인공에게 있어서 자신이 정말 유일하게 사랑했던 자신의 내면의 영혼, 청을 죽여버린 셈이기도 하다. 그건 두 사람이 각자 자기 자신을 억압하는 시대 속에서 진짜 자기 영혼의 솔직한 모습을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서 자신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게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색, 계>는 시대의 어떤 애국심이나 도덕심, 아니면 개인의 행동에 대한 어떤 룰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시대가 개인의 인생에 끼치는 어떤 영향력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그 사람과 사람간의 애매한 관계 속에 숨겨진 열정에 대해서 더 많은 흥미를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뭐가 맞는 건지, 뭐가 틀린 건지, 무엇이 정의로운 건지, 정의롭지 않은 건지에 대한 어떤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등장인물을 통해서 선이나 악, 삶이나 죽음을 아우르는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투영하고 싶은 의지가 있었다.

결국 결말을 열어둔 건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말처럼 들린다.
왕치아즈에 대한 어떤 견해나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도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가 애매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왕치아즈는 착한 여자가 나쁜 여자로 변장해서 그 삶을 살다가 결국은 그 나쁜 삶을 좋아하게 된 셈이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에 빠져버리고 좋아하게 된 개인의 복잡한 내면이 내재하고 상황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관객들에게 열려진 결말로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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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복잡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해야 하는 여배우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애초에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사실 여배우를 캐스팅할 때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다. <색, 계>는 여자 주인공이 극을 이끌어가는 영화이고, 원작자인 장아이링도 여성의 시각을 통해 항일전쟁시기의 강인한 여성상을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 속 여주인공이 젊은 여성이었기 때문에 신선함 역시 캐스팅의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 중요한 역에 신인 여배우를 캐스팅하게 된 사연이 있을 법하다.
지금 현존한 어떤 배우도 왕치아즈의 역할로 마땅히 떠오르는 이가 없어서 결국엔 공개 오디션을 하게 됐다. 그 공개 오디션에 만 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는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탕웨이를 봤을 때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일단 리딩이 굉장히 좋았고, 어떤 세계관이나 자세를 살펴봤을 때 그녀가 왕치아즈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겉으로 순수하고 연약해 보이지만 내면은 강인한 소설 속의 여주인공의 모습과 빼닮아 있었다. 사실 왕치아즈의 역할은 내 자신의 분신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내 자신의 분신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 큰 모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캐스팅은 최고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니까 어떤 영화든지 다 위험성이 있는 작업이다. 사실 탕웨이를 캐스팅하고 연기훈련을 거치면서 반 이상의 작업을 진전시키기까지 확신이 없었다. 굉장히 순수한 사랑을 꿈꾸다가 그로부터 퇴락되듯 욕정에 빠져드는 모습을 왔다갔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끌고 갈만한 연기력을 조율하는 게 이 캐릭터에서 힘들었던 점이었다. 그러나 훈련을 거치면서 탕웨이는 잘 따라와줬고 내가 원하던 여주인공의 신선한 느낌까지 잘 살려주었다. 배우에 대한 선호도도 중요하지만 결국 항상 중요한 건 배우가 그 역할에 충실하면 관객들이 배우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탕웨이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라서 대단히 만족스럽다. 또한 그녀가 신인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유명배우를 캐스팅한 것 보다 더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 반해서 양조위는 상대적으로 감독이라면 신뢰할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이라는 인물은 양조위를 염두에 둔 캐릭터였나?
항상 작품을 볼 때마다 대본을 먼저 보고 영감을 느끼면서 작업하기 때문에 한번도 배우를 먼저 설정하고 캐릭터를 설정한 적은 없다. 물론 <음식남녀>의 아버지 역할을 한 랑웅(Sihung Lung)은 애초에 아버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딱 한번의 예외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외엔 단 한번도 배우를 먼저 염두에 둔 적은 없다. 물론 양조위와는 늘 작업해보고 싶었고, 1년 전부터 언젠가 캐스팅해보고 싶다고 마음을 먹기도 했다.전체적으로 그의 역할은 여주인공보다 표현의 한계가 있었지만 그는 누구도 그보다 더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다. 양조위에게 이는 지금껏 자신이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악역으로서, 중국어 대사를 소화하고 중년남자를 연기하는 등 그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 도전을 이룬 양조위는 훌륭한 배우다. 그와 함께 작업하게 된 건 결국 내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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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가 지금껏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악역이란 기준에 대해서 더 듣고 싶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사람이 저지르는 죄와 정말 사악한 영혼을 갖고 태어났다고 느껴질 정도로 의도적인 범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내 기준으로 치자면 어떤 동정심을 부르는 죄인은 악역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양조위가 연기하는 이는 비틀어진 자아를 지닌, 문제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악역이지만 동시에 영혼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복합적이고 좀 복잡한 악역이라고 생각한다.

<색, 계>는 1930~40년대의 상하이, 홍콩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현 세대에겐 낯선 풍경인데 그 시대와 공간의 고증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 같다.
<색, 계>에 매료된 건 1930년대에 대해서 얘기하려 했기 때문은 아니고, 그 시대를 배경이 한 이야기였을 뿐이다. 하지만 고증은 중요하기 때문에 정확한 고증을 하려고 했다. 그 시대는 일본의 식민지였고 지금 중국을 살아가는 젊은 중국인 세대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치욕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다른 영화 감독들이 잘 다루지 못하는, 어찌 보면 금지된 이야기나 다를 바가 없는 시대다. 하지만 난 그 동안 영화를 하면서 그런 어려움을 통과할 수 있다는 확신과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확장시킬 수 있었고, 미술팀과 최선을 다해서 고증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세트의 상점가들은 그 시대에 있었던 상점가들을 고증해서 만들었다. 그 때 당시, 많은 해외망명자들이 그 상점가를 은신처를 삼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동서양이 교류하는 듯한 이상한 풍경을 그 시대에 발견할 수 있었다. 굉장히 매력적이고 화려한 그런 배경이 잘 다뤄지도록 노력했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다양한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이 넓다. 주로 어떤 것으로부터 흥미를 느끼는가?
한 개의 단순한 요소로 이뤄진 것으로부터는 흥미를 느낄 수 없고, 두세 개의 어떤 복합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것에 호기심을 느낀다. 항상 내게 신선하게 느껴지거나 호기심을 일으켜서 답을 찾고 싶게 만드는 것을 위주로 작업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서 답을 찾으려 하지만 반면에 답이 없는 결말을 만드는 작업과정이 즐겁다. <색, 계>처럼 여성의 성 정체성과 애국심을 저울질하는 두 가지 요소가 섞인 복합적인 이야기가 내게는 굉장히 흥미롭다.

처음 할리우드에 진출할 당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어려움을 극복한 상태에서 앞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금은 영어가 많이 향상됐지만 <센스 앤 센서빌리티> 당시엔 제인 오스틴의 원작을 가지고 영국 사람에게 가서 그들과 같이 일해야 했기 때문에 굉장히 큰 도전이었고 그 자체가 큰일이었다. 사실 그 이후로 모든 영화의 프로젝트를 할리우드에서 만들고 제작했기 때문에 어쩌면 내 모든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할리우드적인 영화는 <헐크>였는데 <헐크>는 내 생각에 예술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급 당시 힘들었던 점들이 있었다. 내가 추구하는 건 재료와 어떤 부분들만을 갖고 오되, 이것은 딱 이 장르다라고 할만한 영화는 만들지 않기 때문에 영화의 배급과 홍보를 하는데 있어서 나도 모르는 두려움이 있다.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이라면 배급이나 홍보 같은 메커니즘의 이해가 아닐까 싶다. 미국에선 비할리우드 영화는 독립영화고, 할리우드 영화는 주류영화다라고 나누기도 하는데, 난 그 중간지점(gray area)에 있는 영화를 하고 싶다. 또한 좋은 시나리오는 모든 것을 갖고 있지만 나쁜 시나리오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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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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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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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희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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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의 첫사랑>(이하, <백만장자>) 이후 두 번째 출연작이네요.
작년에 개봉했었죠.

그 두 번째 영화에 모이는 관심도가 높아 보이네요. 그만큼의 부담감과 기대감이 교차할 것 같아요.
작업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많은 부담을 받질 않았어요. 작업하는 동안만큼은 감독님과 재미있고 즐겁게 촬영했죠. 다만 감독님과 같이 작업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부담을 많이 가졌었어요. 이명세 감독님이랑 작업하게 되면 힘들다는 말들이 주위에 워낙 많이 있어서, 감독님께서 영화에 대한 집중력이 되게 강하셔서 연기자들이 힘들어 하기도 한다고, 그래서 어떻게 할까 했죠. 감독님만의 스타일이 강하잖아요. 이전에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계신 감독님과 작업을 해서 조금 힘든 것도 있었는데, 촬영하면서는 재미있게 촬영했던 거 같아요. 부담감은 그때 초반에만 잠깐 생각했고, 지금은 이제 기대가 좀 커요. 영화를 어떻게 보실지.

사실 이명세 감독님이 완성하고자 하는 어떤 이미지들로 이뤄진 영화라 연기를 하는 당사자인 배우는 영화에 대한 감이 잘 안 오는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앞뒤 연결 같은 건 전혀 생각 못했어요. 감독님의 머릿속에 영화가 다 들어있었기 때문에, 촬영할 때 저희는 씬만 가지고 고민했죠. 오늘 이 씬을 가지고 촬영하게 되면 이 씬만을 생각했지, 이 씬 앞에 뭐가 들어갔고, 뒤에 무엇이 이어지고, 어떤 씬일지 전혀 몰랐죠. 감독님께서 편집하기 나름일 테니까 잘 몰라서 그냥 하루 하루 해당되는 씬만 생각하며 촬영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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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님께서 기자시사회 때 ‘좋은 꿈을 꿨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잖아요. 그런데 어쩌면 진짜 꿈을 꾼 건 배우들이 아닐까 싶네요.
잘은 모르겠어요. 아직까지 감독님과 배우들이랑 같이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을 얘기해보진 못했거든요. 글쎄요. 보는 관점은 관객들마다 다르시잖아요. 저희 스텝들도 똑같을 것 같아요. 아닐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보는 관점은 똑같이 흘러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M>을 처음 본 건 부산영화제라고 들었어요. 본인에겐 어땠나요?
저는 이제 촬영한 장면장면마다, 씬마다의 배열만 알고 있었는데 붙여놓고 보니까 정말 잘 이어진 거 같아요. 그걸 감독님께서 너무나 잘 하셨던 거 같고, 저는 이제 이 영화가 이렇게 만들어질 영화였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이해가 안되거나 난해하다라고 느끼진 못했어요. 영화 한 장면마다 정말 너무나 생생히 느껴졌고, 잘 만들어진 영화 한편 같다고 생각했었거든요.

<M>같은 영화는 왠지 연기 경험이 많은 배우에게도 생경한 작업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경험이 짧은 배우한텐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몸에 밴 습관이 없기 때문에 이런 비전형적인 연기 경험을 먼저 겪어보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물론 이제 많이 어려울 거라고 촬영 전에 주위 분들께서 걱정해주셨지만 저도 더 걱정스러웠죠. 그래서 주위 분들에게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라고 여쭤보니까, 그건 ‘네가 노력하기 나름이고, 지금 이 시점에서 이명세 감독님처럼 대단한 분과 작업을 한다는 것조차 만으로도 너한테 많은 플러스가 될 거다’라고 얘기해 주셔서 편안한 마음으로 하게 됐죠.

이명세 감독님 처음 만났을 때 기분은 어땠어요?
성격 면에서 대하기 어렵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명성 때문에 부담되진 않았나요?
그런데 사실 저는 감독님에 대해 잘 몰랐었어요. (웃음) 그냥 <형사>란 영화만 봤지, 오래된 옛날 영화들은 잘 못 봐서 잘 몰랐거든요. 그런데 제가 조용해서 말이 없었는데 오히려 괜히 죄송스러울 정도로 감독님께서 말씀도 많이 해주시고, 잘 챙겨주셨어요. 어렵다고 한다면 단지 그런 거 같아요. 감독님께서 워낙 말씀들을 어렵게 하시거든요. 영화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워낙 많이 가지고 계시니까 제가 그분의 그런 기질을 따라가기에는 힘들어서 어려웠죠. 영화에 대해서 얘기하신다고 하면 제가 조금 어려워하진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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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께서 영화 외에도 회화나 문학적으로도 상당히 해박하시죠.
예.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나세요.

그런 면에 대해서도 어떤 영감을 받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전 워낙 예술적 감각이 떨어져서요. (웃음) 그림이나 미술 같은 건 잘 못해요. 감독님 만나면서 굳이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사진이나 그림 같은 걸 보고 어느 정도의 느낌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조금 얻었던 거 같아요. 그런 것들과 관련된 자료를 되게 많이 보여주셨거든요.

미술은 별로지만 운동은 잘 한다고 들었어요.
예. 운동 좋아해요. (웃음)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참 반대네요. (웃음) <M>에서는 넘어지는 슬랩스틱 연기도 많았어요.
뛰다가 다칠 때가 많았어요. 뛰다가 워낙 저를 쫓아오시는 분이 다리가 길어서 거리 차이를 느껴야 되는데 저를 자꾸 따라잡으시니까, 제가 전력 질주하면서 진짜 뛰어야 했거든요. (웃음) 그러다가 커브 돌다가 넘어져서 다친 적이 많았죠.

유일하게 <M>에서 액션 연기를 한 셈이네요. (웃음) 그런데 사실 <M>은 화면을 통해 완성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상황만을 인지하며 연기한 배우로서는 완성된 영화를 짐작하기 어려웠을 거에요. 그래서 완성된 영화는 낯설면서도 놀라웠을 것 같아요.
저한테는 거의 모든 장면이 그렇다고 볼 수가 있어요. 어떤 관객은 이상하게 편집된 것 같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전 전혀 그런 게 없었죠. 오히려 편집을 정말 잘 하신 거 같다고 생각해요, 정말 한 장면마다 너무 잘 나와서.

<백만장자>같은 경우는 야외 촬영이 대부분이었지만 <M>은 세트 촬영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 차이점도 컸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그런 점도 많이 느껴졌어요. <백만장자>때는 거의 로케이션 촬영이었거든요. 세트라고 해도 거의 밖에 세트를 지어놓은 채 촬영하고 그랬는데 근데 이번 작품은 거의 80%가 세트라서 조금 답답할 때가 있었어요. 세트장 안에 계속 갇혀만 있으니까 나가고 싶다고만 생각했죠.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틈만 나면 나가고 그랬거든요. 어떻게 보면 스텝들이랑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들을 밖에서 보낸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네요. <백만장자>같은 경우는 지방에서 촬영하다 보니까 자연을 느낄 수 있었고 예쁜 것도 많았거든요. 근데 <M>은 어둡기도 해서 답답한 게 없지 않았죠. 그래도 그 어둠 속에서도 빛과 조명만으로 비쥬얼을 너무 잘 잡아내서 신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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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지 모르지만 두 편의 영화에서 상대역이 다 알아주는 꽃미남 스타네요. (웃음) 남자배우 복이 많은 편일지도 모르겠네요. 주변의 또래 친구들도 많을 텐데 부러워하지 않나요?
부러워하기도 하는데, 제 친구들은 오히려 덤덤해요. 그냥 저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물어보죠. ‘촬영 어땠어?’ 이런 얘기 하지, ‘그 사람은 어때?’ 그런 얘기들은 별로 안 하는 거 같아요.

<백만장자> 때, 현빈 씨는 현장에서 어떤 편이었나요?
빈이 오빠도 처음에는 되게 내성적이었는데, 촬영하면서 별로 오랫동안 얘기 못하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정말 급격하게 친해졌어요. 그렇게 친해지고 나니까 장난도 많고 즐겁게 대화도 나눌 수 있었어요.

그에 반해서 강동원 씨는 끝까지 무뚝뚝한 편이었다고 들었어요. (웃음)
네. 워낙 낯을 가리시는 거 같아요.

사실 강동원 씨 같은 잘 생긴 배우는 외모 때문에 진지함이 많이 가려지는 면이 있어요. 어쩌면 그건 장치 본인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강동원 씨는 <M>을 통해 자신을 한 꺼풀 벗겨내는 연기를 보여준 셈인데 옆에서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강동원 선배님은 <M>에서 그런 걸 많이 얻어간 것 같아요. 저도 이제 계속 이미지적으로 많은 걸 보여드렸기 때문에 다음 작품에서는 이미지보다는 좀 더 연기나 성격 같은 걸 많이 보여드리려고 노력해서 촬영을 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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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작품이라면 얼마 전 촬영이 끝난 <내사랑>말이죠? 일단 <M>과는 상반되게 밝은 분위기의 영화네요. 어땠어요? <M>을 찍고 난 후, <내사랑>을 찍게 되니까.
이제 <M>의 다음 작품임을 고려해서 고른 게 <내사랑>인데 우선 <내사랑>의 캐릭터는 미미보단 조금 밝은 아이에요. 그런데 사실 <M>이 분위기 자체가 어두울 뿐이지, 미미라는 캐릭터가 어두운 편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번엔 배경도 밝은 작품을 선택했어요. 캐릭터도 워낙 밝고, 되게 수다스럽다고 해야 될까요? 워낙 캐릭터도 좋고 시나리오도 좋아서 작품을 골랐어요. 이미지적인 면은 많이 보여드렸으니까 이번엔 조금 연기적인 면을 보여드리고 싶기도 했고요.

작품의 분위기와 상관없이 그 동안 연기한 캐릭터는 항상 밝은 면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게 실제 성격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막상 대화해보니 꼭 그렇진 않네요. (웃음)
인터뷰같이 일적으로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조금 조심스러운 게 있어요. 잘못 보여서는 안될 것 같고, 행동 같은 것도 조심스러워야 할 것 같아서 좀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친한 친구들하고 만나면 되게 수다스럽게 되요.

<백만장자>나 <M>이나 같은 소녀지만 <백만장자>의 은환은 나이에 비해 성숙한 느낌의 캐릭터였지만 <M>의 미미는 연령대에 맞는 풋풋한 이미지가 두드러졌던 것 같아요.
계절에 따라서 마음이 조용할 때도 있고, 활발할 때도 있고, 기분적인 차이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백만장자>찍을 때는 분위기가 차분하고 뭐랄까, 가을의 분위기 같은 게 느껴져서 마음이 좀 더 성숙했던 거 같아요. <M>은 그냥 편하게 촬영했는데, 물론 두 개 다 편하게 촬영했어요.

작년부터 활동이 활발했어요. 열 아홉에서 스무 살 오늘이 되기까지 드라마 세편에 영화 두 편을 마쳤네요. 참 바빴을 것 같은데 개인적인 평범한 생활을 많이 포기해야 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제 인생에 있어서 제일 바빴던 거 같아요. 그 전에 고등학교 생활을 많이 못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지 못해서 아쉬운 게 있죠. 그래도 초등학교, 중학교 때 친구들이 워낙 많았고 지금도 아직까지 친구들은 많이 있으니까. 그래도 촬영할 때는 그게 워낙 좋아서 아쉬운 거 없이 촬영했어요.

올 해 대학에 진학했어요. 연기와 병행하긴 쉽지 않을 텐데.
처음 한 학기 동안은 영화 촬영이 끝나고 조금 한가해서 학교 생활에 대해서 별로 조급할 필요 없이 그냥 잘 다녔어요.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영화 두 개가 개봉하니까 휴학해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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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의 낭만은 느껴봤어요?
아뇨, 별로 없던데요. (웃음) 저도 친구들이나 동기들과 잔디밭에 앉아서 책을 본다거나 도시락을 먹을 줄 알았는데 그런 분위기는 없더라고요.

미미라는 캐릭터엔 어떻게 접근했어요?
초반에는 미미라는 캐릭터가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설명이 안돼있어서 저 혼자 준비하기가 좀 힘들었어요. 그래서 감독님과 같이 영화사에서 얘기하고 자료도 보면서 미미의 캐릭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죠. 근데 감독님께서 그때까지만 해도 저한테 계속 숙제를 내주셨어요. 미미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라고 숙제를 내주기만 하셨지, 미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촬영이 들어가기 전까지도 계속 혼자 생각했는데 생각을 해도, 해도 잘 모르겠더라 구요. 그냥 끝까지 계속 생각하면서 촬영하니까 확답이 나오진 않았지만 답에 근접한 것들을 계속 찾아가게 됐죠. 이것도 미미의 캐릭터에 어울리고, 저것도 어울리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만들어진 거 같아요. 결국 그렇게 하면서 캐릭터가 나오게 된 거였죠. 그리고 감독님께서도 설명을 좀 어렵게 해주시지만 생각해보면 그게 다 관련된 것들이었거든요. 나중에는 다 그런 말씀들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어렵게 설명해도.

<백만장자>의 은환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보여주는 연기가 필요했다면 <M>의 미미는 자신을 과장하고 없는 모습을 만들어야 했던 것 같아요. 연극적이랄까, 어쩌면 그런 점에서 더욱 연기라는 궁극적인 지점에 근접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그전엔 그냥 차분하고 조용한 연기만 해서 그렇게 하고 싶어도 어색할까 봐 못하고 그랬는데 감독님이 오히려 먼저 괜찮다고 해주시고, 제 연기를 열어주셨어요. 감독님께서 그런 걸 많이 끌어올려주신 덕분이죠.

결국 미미는 처음으로 거짓말 같은 연기를 해봤다고 할 수 있겠네요. 배우로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연기를 소화하는 것도 하나의 도전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건 연기자가 연기할 때 생각하기 나름인 거 같아요.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걸 끄집어내려고 하다 보니까 그게 어색하게 보일 수가 있고, 끄집어내고 보니 ‘나한테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이렇게 연기를 할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돼서 연기가 어색하지 않게 또 하나의 캐릭터가 될 수 있는 거 같거든요. 저는 연기를 할 때만큼은 이게 너무 과장이 돼서 어색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만약 그게 캐릭터에 어울리고 감독님께서 오케이 하신 거라면 그걸 믿고 따라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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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때도 그랬지만 <M>에서도 카메라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어요.
영화는 왠지 모르게 편해요. 드라마는 조금 부담되기도 하는데, 그러니까 대사의 양이 너무 많아서 대사를 틀리지 않게 잘 전달하려다 보니까 조금 부담을 갖게 되요. 그러다 보니까 연기가 조금 딱딱해지거든요. 그런데 영화는 분위기를 너무나 편하게 만들어주시는 것 같아요. 스텝들도 그렇고, 감독님께서도 그렇게 만들어주셔서, 그리고 어색하면 계속 다시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보니까 드라마보다 영화에서 편하게 연기할 수 있는 거 같아요.

그럼 드라마와 영화 현장이 왜 그런 차이가 난다고 생각해요?
우선 시간의 차이인 거 같아요. 드라마는 빨리 찍어서 방송에 내보내야 되니까 그런 촉박함과 부담감이 다 전해져 와서 몇 번을 틀리게 되면, 예를 들어 한번, 두 번, 그리고 세 번까지 다시 가게 되면 분위기가 달라져요.

아무래도 분위기가 싸늘하겠죠?
예. 보는 모습도 달라지고. 근데 영화는 한번 오케이가 됐어도 다시 하고 싶으면 또 해도 되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내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럼 <M>의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감독님 중심으로 해서 많이 움직였었어요. 영화 자체가 감독님의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감독님의 지시 없이는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죠. 저희도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질지를 모르다 보니까, 내일은 이 씬을 찍을 거란 얘기가 나오면 그에 대해서 감독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주세요. 모든 것을 다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해주셨거든요. 소품 팀은 소품 팀대로 숙제를 내주시고, 배우들은 배우들대로, 그 모든 걸 다 하나하나 신경 쓰셨기 때문에 감독님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된 거 같아요.

결국 감독님을 믿고 따라가야 했었다는 건데 그건 신뢰가 있어야 가능해요. 한편으론 마냥 믿고 따라가기만 해도 되는 걸까라는 의심이 생길 법도 했을 텐데요.
물론 그런 부분들이 있긴 했죠. 감독님을 완전 믿기도 어려웠지만 이게 스크린에서 어떻게 나오는 건지도 의문이었어요. 촬영을 할 때 ‘과연 이게 정말 스크린 안에서 잘 나올까?’, 그런 의심이 들었죠. 그런데 감독님께서 그럴 때마다 스크린 속의 진실을 믿으라고 얘기하셨어요. 하지만 결국 나중에 완성된 작품을 보고 나니까 촬영할 때 내가 왜 의심하고 믿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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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명세 감독님께서 왜 본인을 캐스팅 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들지 않았나요?
사실 처음 미팅할 때, 감독님께서 저에 대해서 워낙 잘 모르셨어요. 주위 분들을 통해서 저를 캐스팅하신 거였거든요. 그런데 미팅 첫날, 감독님께서 맘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 때부터 자연스럽게 촬영하게 됐죠.

사실 <M>에서 이명세 감독님이 가장 공들인 캐릭터는 미미라고 생각해요. 첫사랑의 대상임과 동시에 <M>의 미로 같은 이야기가 만나려 했던 간절한 대상이니까요. 결국 <M>의 이야기적 궁극지점은 Muse, 바로 미미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본인이 이명세 감독님의 애정이 가장 많이 녹아 들어간 캐릭터를 연기했을 수도 있겠군요.
메시지를 전달해줘야 되는, 왜라는 것에 대한 대답을 위해선 미미가 필요했기 때문에 감독님께서도 이제 저에 대한 캐릭터에 많이 집중해 주셨던 거 같아요. 그리고 감독님께서 저랑 처음 작업을 하시니까 저한테 많이 가르쳐주려고 하셨고, 강동원 선배님은 그전에 한번 작품을 했으니까 믿고 맡기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강동원 선배님보단 저한테 숙제도 많이 내주시고 저랑 얘기도 많이 하셨던 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 <M>은 배우에게 참을성을 요구하는 영화였을 것 같아요. 형태를 가늠할 수 없는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완성된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억누르면서 연기를 해야 하니까요.
영화보기 전까지 계속 기대하고 그 전에 본 스텝들한테 어떻게 나왔는지 묻기도 했어요. 부산국제영화제에 가기 전까지도 계속 감독님께서 후시 녹음도 한번 더 하실 정도로 너무나도 완벽을 추구하셨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전혀 몰랐었거든요. 기대도 너무 크고, 궁금증도 많았고, 빨리 보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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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당시엔 또래 연기자도 많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촬영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M>은 아무래도 혼자 떨어진 시간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워낙 출연하는 배우들이 별로 없다 보니까, 그리고 미미 같은 경우에는 마주치는 사람이 민우 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촬영할 때는 감독님께서 그만큼 허전함을 채워주셨던 거 같아요. 어차피 감독님과 같이 생각하고 연기에 대해서 얘기했으니까.

그러다가 다시 또 사람이 많은 영화로 왔네요.
예. (웃음) 근데 거기서도 많이 부딪히진 않아요. 정작 부딪히는 건 파트너들끼리만.

하긴 옴니버스 형식이니까요. 이번에도 정일우 씨가 파트너라고 들었는데, 역시 남자배우 복이 많네요. (웃음) 그런데 서로 또래 아닌가요?
예. 저랑 동갑이에요.

그런 점에서 앞의 두 배우보단 접근하긴 편했을 것 같아요.
또래이다 보니까 정말 항상 노는 분위기였죠. (웃음) 처음부터 편하게 촬영했던 거 같아요. ‘먼저 다가가서 얘길 해야 될까?’ 이런 고민 없이, 예전에는 이제 ‘선배님한테 먼저 가서 얘기할까?’ 이랬는데, 저희는 처음부터 편하게, ‘잘 촬영해보자!’ 이렇게 잘 통했었죠.

스크린을 통해서 본인의 얼굴을 봤을 때 기분은 어때요?
되게 좋아요. 이명세 감독님도 ‘실물보다 무척 더 잘 나오지 않았냐?’ (웃음) 라고 얘기하시기도 하셨어요. 그런데 정말 실물보다 잘 찍어주시는 것 같아서 좋아요.

사실 영화는 드라마에 비해 흥행 부담이 큰 편이죠. 그런 부담감이 느껴지나요?
아직 영화가 두 번째니까, 전 한번밖에 느끼지 못했죠. 근데 그 한번이 조금, (웃음) 상처까진 아니고, 약간 실망? 사실 기대가 컸었는데……저희 스텝들끼리도 영화가 잘될 것 같다고 했었는데 그 당시에 다른 영화들이 많이 개봉하다 보니까 잘 되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이번엔 부담도 되요. 하지만 영화라는 게 흥행을 전혀 모르겠어요. 관객들의 마음이 정말 갈대 같아서 <M>은 과연 흥행될지.

영화는 많이 보는 편이에요?
예. 영화 좋아해요. 저는 로맨틱 코미디보다는 멜로를 조금 더 좋아해요. 근데 그 멜로가 너무나도 슬픈 멜로보다 기쁨이 있는 멜로를 좋아하죠. 또 할리우드 액션 영화도 되게 좋아하고, 중국 무술 영화도 좋아하고, 다만 호러같이 귀신이 나오거나 <쏘우>같은 잔인한 영화는 전혀 안 봐요. 그래도 미스테리 같은 건 좋아해요. 스릴러!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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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다 영화는 싫어하나 봐요. <M>은 좋아하겠네요. 미스터리 멜로잖아요. (웃음) 그런데 사실 <M>은 난해한 영화라고 느낄 수도 있어요.
영화를 끝까지 봐야죠. 처음부터 긴장감이 흐르는데, 그 긴장감을 쭉 이어가다가 나중에 스스로 풀려지면서 결과가 드러나는 거니까 그때까지 관객 분들이 잘 참고 보셨으면 좋겠어요.

작년에 첫 영화를 찍은 지 일 년이 지났고 어느 새 올 한해도 지나고 있어요.
내년은 정말 궁금해요. 12월 말에 <내사랑>이 개봉되면 이제 바로 내년이 되는데 그 다음 작품은 정말 고민하고, 고려해서 작품 선정을 해야 될 것 같기도 하고, 또 학교 문제도 있으니까 학교는 어떻게 다닐지 생각해 보기도 해야 하고, 내년은 참 힘들 것 같네요.

조금 막연하지만 스무 살에 그려보는 서른의 청사진을 물어도 될까요?
좀 더 성숙되고 좋은 연기자? 물론 그때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웃음) 연기도 많이 성숙해져야 되고 지금의 부족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게 커버가 되는 상태이어야 될 것 같아요. 지금부터 많이 노력해야겠죠.

일단 두 번에 걸쳐 누군가의 첫사랑이 됐지만 그게 그 분들의 짝사랑만은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본인도 두 번에 걸쳐 상처를 받은 셈이네요. (웃음) 좀 제대로 사랑해보고 싶을 것 같아요.
이젠 다음부터는 서로가 좋아하고, 아니면 그 좋아하는 상태에서 엇갈릴 수도 있는, 그런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너무 한 사람만 바라보거나 서로 좋아했지만 이뤄질 수 없었던 사랑보단 그런 역할을 한번 해보고 싶죠.

혹시 첫사랑이 기억나요? (웃음)
아직까지는 첫사랑에 대해서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지나고 나서야 그 사람이 내 첫사랑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아직까지 이 사람이 내 첫사랑이라는 걸 기억하지 못한 것이겠죠.

사실 저도 기억난 지 얼마 안됐어요. (웃음) 어쩌면 민우처럼 나중에 기억날 수도 있겠죠?
네. 하지만 악몽처럼 떠올리긴 싫어요. (웃음)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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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윤세아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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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혈의 누>로 데뷔 후, 2년 만에 영화로 돌아왔다.
드라마도 매력이 있지만 영화 작업이 너무 그리웠었다. 때마침 작품을 만나게 됐고 시나리오를 보고나니 너무나 하고 싶어졌다. 너무 반갑고 즐겁게 촬영했다.

그런데 그 두 편의 영화가 참 묘하게도, 무슨 말할지 이미 아는 표정이다.
내 운명이다. (웃음)

<혈의 누>와 <궁녀>는 국내에서 드문 장르 영화다. 그런데 그 두 편의 영화에 본인의 이름을 올린 것도 묘한 인연이다.
요즘 사람들이 사극에 매력을 느끼나 보더라. 그렇기 때문에 제작하시는 분들도 그 쪽에 관심을 많이 두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그런 시대에 태어난 거 같다. 팔자려니. (웃음)

<혈의 누> 당시 오디션이 치열했다던데, 200:1정도? 그 난관을 헤치고 영화에 출연했다.
그래서 많이 기뻤고, 많이 울었다. 가족들과 같이 파티도 했었다. (웃음)

그런데 막상 영화에서 출연 비중이 너무 작아서 실망하진 않았나?
그때는 함께 할 수 있다는 것과 현장을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이 컸다. 김대승 감독님을 비롯해서 차승원, 박용우, 지성, 이런 굉장한 선배님들과 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한텐 배움의 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그 때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신 감독님한테 감사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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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에서는 출연 비중이 많이 늘었다. 게다가 <궁녀>는 비중의 차이를 떠나서 각각의 캐릭터를 확실히 드러낸다.
<궁녀>를 통해 감독님께서 의도하신 건 폐쇄된 공간 안에서 그녀들이 살아가는 삶을 조명하는 거였다. 역사적인 베일에 싸인 그녀들의 비밀스러운 삶을. 그래서 굉장히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오는데도 그 캐릭터들마다 갖고 있는 임팩트를 다 살리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제목도 <궁녀>다. 그런 의도를 잘 계산하고 펼쳐낸 것 같아서, 그런 결과를 들었을 땐 참 기분이 좋다.

사실 <혈의 누>가 남성 중심의 영화였다면 <궁녀>는 여성 중심의 영화다. 그런 점에서 전작보다 촬영이 더 편했을 법하다.
되게 즐거웠다. 근데 굳이 여자들의 영화라고 생각 못했던 게 스텝들이 다 남자라서. (웃음) 그리고 사실 난 주로 희빈 처소 안에서 연기했기 때문에 여배우들과 부딪힐 일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굳이 여자들만의 영화라는 의미보다 내겐 여배우들과 이렇게 대거 출연해서 한 작품을 했다는 의미가 컸다. 회식 자리나 서로 현장에서 스쳐갈 때, 그분들과 얘기하고 사담을 나눌 때 스스럼없이 얘기 나누는 게 그냥 편하고 좋더라. 남자 배우들 같은 경우에는 행여나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고, 보이는 시선이 두려울 수도 있어서 조금 껄끄러웠을 것 같다. 너무나 편하게 얘기하고, 같은 복장으로 같은 공간에서 연기하니까 너무나 좋더라. 편안해서.

동선이 겹치지 않는 몇몇 배우들과는 촬영장에서 거의 못 만났겠다.
맞다. (임)정은 씨랑 (전)혜진 씨는 거의 못 봤다.

그렇게 보기 힘들어서야 경쟁 심리 같은 것도 느끼기 힘들었겠다.
난 정말 경쟁심 같은 건 없었다. 근데 난 누구랑 경쟁을 해야 했지? 중전인가? (웃음)

그런데 <혈의 누>는 적은 출연 분량에 비해서 고생스러운 씬이 많았다.
막 산을 달리면서 도망 다니고, 물에도 빠지고.

그에 반해서 <궁녀>는 촬영 분량은 늘었지만 오히려 편했겠다.
세트 안에서 찍었으니까 숨차거나 그럴 일은 별로 없었지. 그런데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내 주위의 상황들이 급변하는 게 많아서 내가 갖고 있어야 할 생각들이 굉장히 많았어야 했고, 그런 것들을 생각하기에 좀 버거웠다. 그래서 내게 계산력이 많이 필요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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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의 주인공은 궁녀일 것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궁녀가 아니었다.
궁녀 출신인데?

그래도 결과적으로 영화상에서는 궁녀가 아니니까.
궁 안의 여인들을 다 궁녀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웃음)

그렇게 따지면 맞겠다. (웃음) 사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후궁은 요염하거나 색기 있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희빈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약하고 심성이 여리고.

그런 점에서는 전형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희빈이 더 하고 싶었다. 희빈은 표독스럽게 알려져 있는 전형적인 후궁이 아니었고, 극 안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난 그동안 너무 악역을 많이 해서 그런 역할에 굶주려 있기도 했다.

방금 말한 바대로 악역을 많이 했는데 사실 그 캐릭터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는 인물이다.
나름대로 정당성이 좀 있는 거 같다. 내가 많이 고생했을 것 같은 얼굴인가 보지. (웃음) 한도 많고, 사연이 있을 것 같아 보이나 보다. 아마도 <프라하의 연인>에서 그런 걸 많이 부각시켜줘서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시는 건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론 깊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싶다. 단순히 독해 보인다는 것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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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을 것 같다.
좀 힘들었다. 생활하고 연기는 별개인데, 그때는 그걸 함께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걸 극복하고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뭐, 시간이 약이라고 지나고 나니까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더라. 이젠 연기적인 부분은 동떨어지게 보면서 지금은 나를 막 꾸짖으면서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프라하의 연인>이나 <궁녀>에서 보면 나약하거나 신경질적인 느낌이 많이 든다.
히스테리컬 하고.

그런데 실제 성격은 좀 반대적인 거 같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발랄하다. 많이 털털한 편이다.

그럼 본래 성격과 반대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은 없었나?
사람은 모두 다양한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난 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이니까 평소에도 그런 걸 직간접적으로 많이 경험하고 느끼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다. 어쩌면 나한테 그런 면이 있으니까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지. 갑자기 좀 두려운데, 진짜 내가 그럴까 봐. 혹시 나도 모르는 내가 있나? (웃음)

희빈은 궁녀들보다 권력에 가까운 여자다. 그런 면에서 가장 권력에 욕심을 낼만한 인물인데 오히려 궁녀들의 권력욕에 휘말리는 느낌이 든다.
희빈은 욕심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 그냥 살아남으려는 인물이다. 그런데 주위에서 심상궁이 많이 찔러댔다.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궁 밖으로 나가면 넌 비구니 돼서 살아야 된다느니, 희빈은 그래서 그저 살아가기 위한 방법인 줄 알고 따랐는데 그게 어느 순간 너무 과하게 되고 틀어지면서 주위에서 그런 음모가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충격이 너무 컸던 거다. 그렇기 때문에 희빈이 더 강해질 수 있었던 거 같다.

희빈을 비롯한 <궁녀>의 여자들이 갈구한 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허락되지 않아서 억압된 심리가 공포로 폭발한 것이 아닐까.
주상 하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궁녀들의 삶이 사랑이라면 모자간의 모성애도 사랑이고, 대비마마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희빈도 사랑이 부족한 것이고,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여성들에 대한 애환 같은 게 느껴지던가?
근데 애환이라기보다, 굉장히 치열함을 느꼈다. 내게 그곳은 전쟁터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경쟁 아닌 경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의 생과 직결되는 까닭이니까. 중전이 잘되기 시작하면 희빈은 멀어지고 그렇게 잊혀지기 시작하면 그건 곧 죽음이니까. 그렇게 생존과 연결돼있기 때문에 굉장히 치열한 싸움터 같은 느낌으로 내게 와 닿았다. 그 당시에 그런 사랑을 갈구한다거나 그런 것에 대해서 목말라 한다는 건 그냥 본능적으로 느낄지언정 지금의 시대를 바라봤을 때 느껴지는 그런 느낌은 아니겠지. 그게 너무나 당연시되고 그렇게 살아왔던 그녀들이기 때문에 지금의 잣대로 그때를 바라본다는 건 조금 괴리감이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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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남성의 권력욕을 대리적으로 누리고자 하는 욕망일수도 있다. 하지만 희빈은 소극적이었다.
결국은 조정을 당하는 입장이었지 주체적인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거짓말을 하다 보니까 계속 쌓여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이었는데 희빈은 그걸 바로잡으려고 노력을 했던 거지. 하지만 난 잘 모르겠다. 난 사랑과 욕구 같은 것들이 딱히 처음으로 떠오르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자신이 느끼기에 <궁녀>는 어떤 영화인가?
<궁녀>는 새로운 역사다. 한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궁녀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 <궁녀>는 정말 궁녀가 전부인 거 같다. 치열한 그녀들의 삶을 그린 영화다.

한편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 여성영화란 점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 항상 사극에서 권력자 얘기만 하다 보니 주체가 왕일 수 밖에 없는데 우리 역사에서 여왕은 거의 없으니까 이야기가 남성 중심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궁녀>는 그 주위에서 그들을 수족처럼 보좌했던 궁녀들에 관한 이야기니까 정말 새로운 거지. 그래서 여성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힘이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거 같다.

비주류를 주류로 끌어올리는 느낌이라 반갑기도 했다.
앞으로 이런 작품이 있을까? 이렇게 여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데. 아, 있구나, 핸드볼!

맞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도 여성을 주로 한 이야기다.
그럼 우린 이제 축구나 농구 같은 걸로. (웃음)

그 동안 악역을 많이 맡았는데 외모적인 탓도 있을 것 같다. 도시적이고 이지적인 느낌이랄까.
주변에서 날 예쁘게 꾸며주는 덕분이다. 맨날 머리도 해주시고, 예쁜 옷만 입혀주신 덕분인가보다. (웃음) 근데 난 안 그렇다. 털털하고, 편하게 입는 거 좋아한다. 내가 원래 구두를 많이 신다가 사극하다 보니까 구두를 신을 일이 없어서 운동화만 맨날 신고 다녔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구두를 신으니까 걸을 수가 없더라. (웃음) 편한 걸 좋아한다. 심플한 멋이 나는 스타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쉬폰 드레스나 실크 블라우스 같은 건 나한텐 솔직히 불편하다. 그런데 예쁘니까 자꾸 입게 되는 거 같다. 집에서 입을 일이 없으니까.

그런 외모 때문에 궁녀가 아닌 희빈이 된 것 아닐까?
솔직히 나이 때문인가 보다. (웃음) 궁녀는 좀 파릇파릇한 느낌의 캐스팅을 위주로 했다면 희빈은 좀 산전수전을 겪은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를 찾았나 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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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이에 비해 데뷔가 늦은 편이다.
늦었다고 얘기들을 좀 하시더라. 아쉬운 점도 있다. 젊었을 때 할 수 있는 고등학교 시절 연기 같은 걸 할 수 없다는 건 참 아쉽다. 내가 만약 교복 입는다면 아마 친구들이 뜯어말리겠지. 감금시킬지도 모른다. (웃음) 그냥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흘러온 대로 그냥 하다 보니까 난 흘러왔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무대에도 설 거다

무대라면 연극?
맞다. 무대는 나이를 두루두루 섭렵할 수 있어서 매력 있다. 노년기 연기도 무난하게 할 수 있다. 약속에 의해서 가기 때문에. 방송은 되게 리얼리티하게 가야 되니까 정말 늙어야 되고 그만큼 분장해야 되고. 근데 무대에서는 서른 중반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뭐 별로 후회는 없다.

연극 무대에 대한 계획이 있나 보다.
구체적으로 잡힌 건 없지만 막연히 해야겠다는 생각은 계속 하고 있다. 좋은 작품이 있으면 꼭 하고 싶고,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고 싶다.

연극에 대해서 많이 매력을 느끼나 보다.
학교 다닐 때도 했었고, 졸업하고 한 2년간 했었다. 연극 무대 때문에 연기를 시작하게 됐고 그랬기 때문에 하고 싶다.

연극 경력이 있는지는 사실 잘 몰랐다.
나중에 하면 꼭 보러 와라.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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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에서 회초리 맞는 연기도 실제로 몸으로 때웠다고 들었다. 정말 줄이 쫙쫙 가던데. (웃음)
정말 맞았다, 아파서 죽는 줄 알았지. 진짜 뼈가 시리더라. (웃음) 메이크업으로 어떻게 커버해보려 했더니 감독님께서 그냥 가자고 하시더라. 그런데 차라리 그 때 찍길 다행이었지, 이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금방 변색이 되더라. 정말 상한 고기처럼, 종아리가. (웃음)

듣는 바로는 감독님이 대신 하려고도 했는데 직접 연기했다고 들었다.
감독님한테 못 맡기겠더라. 나중에 평생 얘기를 들을 거 같아서. (웃음) 그냥 내가 맞고 깔끔하게 끝내야겠다 싶었지. 감독님 보시면 알겠지만 조근조근 말씀하셔도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거. (웃음) 안 하면 안되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궁녀>에 캐스팅된 게 <혈의 누>의 경력이 어필된 덕분이기도 할 것 같다.
그 때 모습이 좀 강하게 남았다고 그러나, 물에 빠지면서 시작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보셨던 거 같다. 후에 그 말씀도 하시더라.

<혈의 누>에서 시체 연기를 하기도 했는데, <궁녀>에서 월령을 연기한 서영희의 시체연기를 봤을 때 감회가 새롭지 않던가? 한편으로 <혈의 누>의 강소연 역할과도 유사하다. 극적인 비밀의 키가 되는 역할이니까.
그게 참 어렵다. 배우로서 죽어있는 연기 자체를 한다는 게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웃음) 그 때 생각이 많이 났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을 거란 생각도 하면서 대단하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유사하다고 느끼는 건 단편적인 느낌 같다. 단지 시체의 모습으로 많이 나오니까 전체적인 느낌이 그럴 수도 있지만 (서)영희의 월령은 캐릭터적으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희빈을 도와주려고 자신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를 선뜻 언니의 아이로 줄 수 없는 거다. 자기 뱃속으로 낳았기 때문에 모성애를 느끼게 되면서 그녀의 변화가 시작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난 충분히 월령이란 캐릭터가 이번 영화에서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월령과 소연은 비교할 캐릭터는 아니라고 본다. 소연이는 진짜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의지하며 쫓겨 다니는 게 전부였다면 영희는 그 두 가지 모습(살아있는 모습과 죽어있는 모습) 중 살아 생전의 모습이 더 많이 보이는 캐릭터다. 그렇게 스토리를 장악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많이 다르다.

많은 여배우들과 연기하면서 개인적으로 얻은 점도 많지 않았을까 싶다.
난 두 번째 작품이다. 다른 분들은 굉장히 많은 작품들을 했다. 난 그냥 배울 것 투성이였지. (웃음) 연기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어떻게 자기를 컨트롤하고,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지, 심지어 난 그 분들의 인간성까지도 배울 점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들부터 동료 연기자들까지,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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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를 보면서 여자들도 참 무섭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거 다 왕이 시켜서 그런 거다. 왕은 남자잖아. (웃음) 정말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다. 실제로 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우리 영화에서 몇 개 추렸다고 하는데,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은 다 그런 거 같다. 물론 난 여자만 입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안에서 사람이 딱 뭉쳐서만 살 수 없잖아. 출패 얻어서 궁궐을 나갔다 오거나 왔다갔다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선 그런 과정들이 충분히 필요했다는 거지. 그리고 그런 거 없이 왕조를 지켜내고, 나라를 건국하고, 역사를 만드는 일은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경의로울 것까진 없지만 그런 노력은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막 잔인하다고만 볼 일은 아닌 거 같다.

그럼 여자로서 여자가 무섭다고 느껴본 적은 없나?
난 산 사람 별로 안 무서워 한다. (웃음)

그럼 죽은 사람은 무서워하나 보다. 귀신영화 같은 건 잘 못 보나?
못 본다. 근데 참 이상하게 공포물을 하게 된다.

<궁녀>는 어떻게 봤나?
막 이러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봤다. 기쁨 2배, 공포 2배. (웃음)

스크린에서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어떤가? 이제 두 번째 관람인데.
생소하지. 나한테는. 내가 내 모습을 봤을 때 느낌은 마치 내 목소리 녹음해서 들은 거랑 똑같이 어색하다. 아직까지는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어쩌겠어. 익숙해져야지. (웃음) 그런데 한번보고 두 번 보니까 더 괜찮더라. 세 번 보고 네 번 보면 더 나아지려나? (웃음)

이젠 좀 다른 장르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을 것 같다.
좀 밝고 명랑하고. 수더분하고 그런 여성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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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에 출연한 <얼마나 좋길래>에서는 심한 건 아니지만 좀 망가지기도 했다.
아니다. 좀 심했다. (웃음) 그때 된장녀란 타이틀을 얻었다. 난 된장녀가 싫다. 잠깐, 이 기사 ‘윤세아, 된장녀 싫다’ 이렇게 나오는 거 아냐? (웃음) 어쨌든 그런 껍데기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시대가 요구하는 별명 같은 걸 덮어쓰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사람들, 바로 옆집에 살 것 같고 같이 생활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으면 좋겠다. 편안하게.

아직은 조연을 맡고 있지만 주연 배우로서의 욕심은 없나?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나? 물론 비중이란 걸 따지지 않을 수는 없는 거 같다. 좀 더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서, 좀 더 배포를 넓히기 위해서, 연기자에겐 자신감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활개칠 수 있는 장소가 충분히 마련되어야 하고 그런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게 나와 맞아떨어져야 된다. 정말 내가 수련이 많이 쌓이고 정말 내가 자신 있게 해낼 수 있는, 그런 버거움이 없을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그런데 지금 억지로 욕심을 내면 오히려 평생 연기를 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웃음) 물론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차근차근 한걸음씩 밟아나가는 게 나에게는 순리라고 생각한다. 워낙 또 데뷔가 늦었기 때문에 그런 욕심보단 꾸준히 연기 활동하면서 좀 더 다르게 표현하면서 다가가고 싶다.

강한 이미지의 장르 작품에 출연하거나 독한 내면의 캐릭터를 연기한 덕분에 캐스팅 제의도 편중될 것 같다.
내 캐릭터들은 남자를 이용하고,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다가, 거기에 대해서 스스로 힘들어하고, 나중엔 반성하다가 끝났다. 그래서 그런 게 겹쳐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많았다. 그래서 <스마일 어게인>할 때는 좀 더 색기를 내보려고도 했다. 다른 면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한계에 부딪히고 한정이 되다 보니까 어려운 거 같더라. 정말 특별한 이유가 다르지 않고 어떤 드라마마다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의 구조적 짜임새가 똑같았기 때문에 그게 나에게는 연기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게 어렵다. 배역이 싫다기보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폭이 너무 작아지니까. 그런 게 참 어렵더라.

그렇다면 뭔가 달리 해보고 싶은 역이 있나?
옛날부터 가슴 아픈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웃음) 남자친구랑 아니면 남편이라도. 근데 일일드라마에서 내 상대역이었던 도이성 씨가 나를 많이 예뻐해주는 역할이었다. 그래서 그때 많이 풀렸다. 그런데 그런 발랄하고 귀여운 사랑 말고 가슴 아픈 사랑도 해보고 싶다. 헌신적인 남자를 만나보고 싶다. 또 한번. (웃음)

가슴 시린 멜로는 여배우들에게 일종의 로망같기도 하다. 여자라면 한번쯤은 해보고 싶은.
평소에 이룰 수가 없으니까. (웃음)

내년이면 이십 대의 마지막 해인데 뭔가 특별히 이루고 싶은 건 없나?
연애하고 싶다. (웃음) 솔직히 난 서른이나 서른하나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십 대의 마지막이나 삼십 대의 마지막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난 이십 대 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다 했다. 연애도 해봤고 지금 연기도 하고 있고, 그래서 특별한 소망 같은 건 없고 그냥 또 한편의 영화로 이렇게 홍보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웃음) 항상 하루하루 똑같이 이렇게 연기하고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그게 나한테는 전부인 거 같다. 너무 재미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에 보탠다면 내 옆에 남자친구가 든든하게 있었으면 좋겠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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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알아보는 사람도 종종 있지 않나?
아무래도 좀 조심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못 알아본다. 난 워낙에 산책을 좋아해서 평소에 모자 푹 눌러쓰고 잘 걸어 다닌다. 그런데 잘 섞여서 다니면 잘 못 알아본다. 오히려 멋 부리고 선글라스 끼고 일부로 가리려고 하면 더 유심히 보더라. 심지어 모자를 벗겨보려 한 적도 있었다. (웃음) 오히려 그냥 안경 끼고 모자 쓰고 머리 하나로 둘둘 말아서 묶고 편하게 강아지 끌고 다니면 오히려 옆집 사는 사람처럼 그냥 지나가는 행인이 되는 거다. 그런 노하우를 배웠다. 가리지 말자. 나는 지극히 평범하니까. (웃음)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건 그전에 이미 연기자로서의 삶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연기를 맘먹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연극을 보고 연기라는 게 너무 하고 싶어졌다. 내가 예체능 쪽에 관심이 많긴 했다. 미술이나 음악이나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긴 했는데, 딱히 내가 정말 그렇게 가슴을 설렐 수 있는 일을 만나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공연 보고 나서 그런 가슴 떨림과 여운이 너무 짙게 남아서 마음을 먹고 부모님께 부탁을 드렸지. 이 길을 걷게 해달라고. 쉽게 허락해주시지는 않았는데 결국엔 나한테 양보하셨다. 처음에는 아는 척도 안 하시더니 지금은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시고 코치까지 해주신다. (웃음)

처음 <혈의 누>를 통해 카메라 앞에 섰을 때와 지금은 뭔가 달라진 걸 느끼나?
근데 그때나 지금이나 난 카메라를 그렇게 의식하지 않았던 거 같다. 안 한 게 아니라 그때는 못했지. (웃음)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어느 사이즈로 찍는지를 몰랐으니까. 근데 이젠 그건 파악이 되는데 그냥 공간만 의식이 되지, 카메라가 의식이 되거나 이런 건 없었던 거 같다. <혈의 누>할 때는 풀사이즈를 따던지, 뭘 하던지 전혀 상관없이 똑같이 연기했다. (웃음) 너무 멋몰랐었고 그땐 내가 시력이 안 좋아서 중간에 렌즈를 뺐다가 꼈다 이러느라 내 눈 찾기도 바빴다. (웃음)

존경할만한 배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선생님들께서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누구나 노력해서 연기가 발전할 수 있고 잘 될 수 있지만 정말 자신한테 적역인 배역이 있다고. 그니까 어떤 작품의 어떤 분, 그게 다 틀린 거 같다. 그래서 누구 하나를 딱 찍어서 말할 순 없고 대부분의 선생님들께 배울 게 많은 거 같다. 물론 고두심 선생님이나 한혜숙 선생님 같은 분들이 정말 비슷해 보이는 드라마에서 그렇게 자신만의 연기를 쏟아내시는 거보면 참 존경스럽다. 다른 선생님들도 이루 말할 게 없다. 평생 연기하고 싶어서 그런지 그런 선생님들이 더 친근하고 좋게 느껴지나 보다. 꾸준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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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박진희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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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바쁘겠네요.
조금 바쁘게 지낼 때도 있었던 거 같긴 한데, 뭐, 촬영할 때보다야 바쁘겠어요.

드디어 내일 <궁녀>가 개봉하는데 기분은 어때요?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긴장돼서 되게 떨리고 걱정도 컸던 거 같아요. 이상하게도 막상 오늘, 개봉 하루 전날이 되니까 극히 평온하네요. 내 자식이 내 손을 떠나서 완전히 독립을 했으니까 이제 와서 좌지우지 할 게 없기도 하고, 일단 열심히 만들었으니 이젠 편하게 그냥 관객들한테 맡겨야 되는 거지, 내가 불안해하거나 혹은 어떤 감정을 갖는다고 해서 그다지 제 신상에 도움이 되진 않더라고요. 딱 오늘이 되니까 평온해진 거 같아요.

오늘 몇 시간 뒤에 일반시사회 무대 인사도 있다고 들었는데, 바로 옆에 있는 극장에서.
예. 그런데 오늘 여기 와서 저렇게 걸려있는 걸 보니까요. (극장에 걸린 <궁녀> 대형 포스터를 가리키며) ‘나 참 많이 컸구나’란 생각이 들어요. 진짜 너 사람 됐다, 그런 느낌?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니에요? 그래도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잖아요?
아니요. 낯설어요.

그래요?
음, 어쩌면 낯선 느낌이라기보단, 약간……, (고심하다가) 아! 그런 거 같아! 너도 이제 이렇게 대단한 배우들과 같이 나란히 있을 때가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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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잘 웃는 편인 거 같아요. 씩씩해 보이는 느낌이랄까.
예. 그런 게 있나 봐요. 많이들 그렇게 말씀해주세요. 씩씩하고 건강해 보이는, 그런 이미지가 있다고. 너무 다행이에요. 사실 제가 추구하는 인간형도 그렇고, 이렇게 건강하고 씩씩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나약하고, 그러니까 외모적으로 왜소한 게 아니라 성격 자체가 그런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뭐든지 도전하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닌 긍정적인 마인드를 좋아하지, 아, 나 못할 것 같아, 이런, 해보지도 않고! 그런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하여튼 건강하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라는 건 적극적이고 뭔가 씩씩하게 해내려는 그런 의지가 있다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제 개인적으론 굉장히 듣기 좋아하는 말이에요.

그래서인지 천령이,
되게 씩씩해요?

너무 어울렸던 거 같아요.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잖아요. 천령의 적극적인 모습이 그냥 박진희 그 자체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가끔씩 ‘이 영화를 선택하신 이유가 뭐에요?’라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어요. 사실 그 질문의 의도는 ‘천령이 굉장히 진희씨랑 닮은 데가 많다. 바르고 정의로운 면이라든지 여러가지로 굉장히 박진희랑 비슷하다. 그런데 혹시 그런 천령의 캐릭터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점이 시나리오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느냐’는 분들의 질문과 비슷한 건데요. 사실 천령은 이성적이긴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는 감정에 치우쳐서 앞만 보고 달리는 스타일이잖아요. 사실 전 그렇지 않거든요. 그리고 한편으로 이제는 틀이 생긴 거 같아요. 박진희한테. 박진희라는, 사각의 액자 틀이 만들어진 거죠. 이제 박진희, 하면 좀 바르고 정직한 애라는 틀이 만들어져서 제가 그런 연기를 하면 사람들이 그런 이미지로 더 봐주고 그런 모습들이 이제 더 많이 부각된다고 할까요? 그래서 천령도 사실 그런 건 아닌데 굉장히 착하고 정의롭다는 이미지가 더 부각된 게 아닌가 싶어요.

올 해 들어서 예전보다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여요. 물론 <만남의 광장>은 개봉일이 미뤄진 케이스지만 결국 올해만 드라마 한편과 영화 두 편으로 관객 앞에 섰네요. 하지만 올해는 분명 박진희란 배우를 각인시키는 해가 되고 있는 것만 같아요. 좀 더 이미지가 구체화된 것 같다고 할까요?
<돌아와요 순애씨>가 잘되고, <쩐의 전쟁>이 잘 되면서 잘 돼서 참 좋다, 다행이다, 즐겁다는 것도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론 잘 되는 게 이런 거구나란 생각을 했어요. 그 이유가 그런 거였어요. 나는 늘 내가 원하는 연기를 했었고, 난 변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내 다른 모습들을 봐주고 관심 있어하고, 그래서 어느 순간엔 이것저것도 아니었던 내 이미지를 찾아주기도 하고, 나한테 없었던 이미지를 찾아주기도 하고. 그래서, ‘아, 주목 받는다는 게 이런 거겠구나’, 그런 느낌이었어요, 사실은. 지금까지 제가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온 것이 아니라 이젠 나의 이미지를 대중들께서 많이 봐주시는 거 같아요. 그런 게 비단 연기를 잘해서였다면 배우로서 행복하고 뿌듯했을 텐데 사실은 그건 조금 아닌 것 같아요. 그 동안 작품을 안 해왔던 건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그런 말씀들을 해주시는 건 아마도 제가 최근에 출연한 작품들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뭐랄까, 좋은 운을 탔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보니 이제 관심들을 가져주시는 일부분에 속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심지어 난 옛날과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 모습이 새롭다고 느낀다거나, 아니면 이제야 박진희의 진정한 모습을 찾았다라고 느끼는 게 아닐까요?

사실 데뷔 초의 이미지는 여성스럽고 가녀린 이미지가 부각됐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점점 억척스러운 내면을 드러내는 듯 했어요. 그런 변화가 어쩌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자연스럽게 진행된 것처럼 보였어요.
당연하죠. 질문의 의도를 제가 제대로 받아들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제가 어렸을 땐 여성적이고, 가녀리고, 조금 얇은 이미지였다면 지금은 굵고 억척스런 이미지가 됐죠. 그런데 제가 아직까지도 소녀처럼 가녀리게 나오면, 그건 보기 힘들거든요. (웃음) 저도 나이를 먹었고 저보다 가녀린 분들이 가녀린 연기 많이 하고 계시는데 이젠 가녀리지도 않은 제가, 난 아직도 가녀리고 싶다고 가녀린 연기를 한다면 보시는 분들이 그다지 즐거울 것 같진 않아요. 그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이미지를 변화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제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변하고, 그러니까 캐릭터도 변하고, 이렇게 된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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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예전의 모습들을 다시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참 연기적으로 순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요즘은요, 감정이 때묻었나 봐요, 옛날에 비해서. 그래서 웬만큼 슬픈 영화를 봐도 그렇게 눈물이 안나요. 근데 옛날에는 조금만 슬퍼도 어떻게 그렇게 울었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낙엽이 떼구르르 굴러가도 눈물이 났다는 것처럼, (웃음) 진짜 조금만 슬퍼도 너무 와 닿았다면 요즘엔 웬만큼 슬퍼도 눈물이 안 나는 거에요. 사실 제가 얼마 전에 부산영화제 개막작을 보면서 정말 엉엉 울었었거든요.

아, <집결호> 끝까지 보셨군요?
예. 근데 그게 사실 슬픈 영화는 아니잖아요. 근데 거기서 느꼈던 건 인간의 참혹함이란 거죠. 생과 사에 대한. 멜로, 사랑으로 슬픈 건 거기에 비하면 고급스러운 감정이죠. 이별해서 아프고, 그거에 비하면 너무나 고급스러운 감정이잖아요.

마치 밥을 먹는 것과 커피를 마시는 것의 차이처럼요.
그러니까요! 그건 진짜 먹고 살아야 되고 그런, 오늘 죽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니까.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처참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저렇게 언제 죽을지 모를 그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달래도 보고, 다그쳐도 보고, 안심시켜도 보고, 그랬던 거잖아요. 그런 극적인 상황을 맞닥뜨리니까 너무 슬픈 거에요. 근데 그걸 보면서 엉엉 울고 나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배우로서 때묻었구나, 짜증난다, 박진희, 너. 이런 생각을 했어요.

예? 왜요?
옛날 작품에서 연기하는 걸 보면, 별 것도 아닌 대사를 할 때도 막 울어요. 물론 연기적인 테크닉은 굉장히 부족했을지 모르겠지만 되게 감성적으로 마음껏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참 많이 틀려진 것 같고.

어쩌면 그게 때묻었다기보다 성숙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죠. 사실 옛날에는 삼각 관계 같은 걸 잘 이해 못했었어요. 물론 성격상도 그렇지만, ‘삼각 관계를 왜 만드는 거야? 왜?’ 그랬어요. 만약에 기자님과 어떤 여자분이 좋아해서 만나고 있는데, 제가 기자님을 좋아하게 됐다고 쳐봐요. 그럼 그걸 왜 고백하는 거야? 그러니까 노출된 삼각관계 말이에요. 예를 들어 내가 짝사랑이라면 그건 거기서 그만 두면 되는데, 품고 있지 않고 ‘왜 말해! 말해서 어쩌자는 거야!’ (웃음) 이런 식으로 그런 감정을 이해 못했었어요. 근데 요즘에는 달라졌죠. 그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암흑 속에 살고 있었을 그녀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만의 이유가 왜 없었겠어요. 그녀도 왜 고민을 안 했겠어요. 이거 말하면 저렇게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몹쓸 짓 하는 건데, 왜 생각을 안 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만의 뭔가를 고민한다는 거죠, 지금은. 옛날엔 그건 너무 이기적이고 나쁜 거라고 치부했다면 지금은 그건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고 그냥 그녀의 감정에 충실했던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걸 우리가 옳거나 그르다고 말할 순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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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시선에 변화가 생긴 것 같네요.
맞아요. 옛날에는 순수해서 직선적으로 감정을 받아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슬픈 건 슬프게, 행복한 건 행복하게, 이런 순수한 마음으로 감정을 받아들였다면 지금은 행복하지만 슬픈 거, 슬프지만 행복한 거, 이런 걸 굉장히 찾게 되는 거 같아요. 외모적으로도 지금은 참 많이 사람이 됐어요. (웃음)

아니, 그럼 그전엔 사람이 아니었나요? (웃음)
예전에는 볼 살도 너무 통통했고.

에이~, 옛날에도 충분히 예뻤어요.
아이구~! 그냥 뭐 칭찬이시겠죠. (웃음)

아니에요. 알고 보면 박진희 씨 좋아하는 남자 팬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솔직히 전 박진희 씨가 낯설지 않은 이유가 하나 있어요.
뭔데요?

고등학교 때 1년 동안 같이 앉게 된 친한 친구 녀석이 항상 옆에서 박진희 씨 노래를 불렀거든요.
(웃음) 아, 정말이요?

그래서 오늘 그 친구한테 박진희 씨 인터뷰한다고 문자도 보냈었죠. 그랬더니 그 친구가 난 직접 손잡아 볼일도 없을 테니 싸인 이라도 받아주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나 챙겨왔죠.
당연히 해드려야죠! (웃음) 사실 그런 게 있는 거 같아요. 저도 저랑 특별한 인연은 없지만 저랑 제일 절친한 친구가 너무나 좋아해서 맨날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어요. 걔가 성시경 씨를 좋아해요. 그런데 성시경 씨가 라디오 DJ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일만 있으면 거기 나갈 일 없는지 물어봐요. 꼭 자기를 위해서 한번만 나가달라고. 이번에 <궁녀>할 때도 그랬어요. (웃음) 그런데 얼마 전에 TV를 보는데 야심만만에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저랑 별 관계도 없고 한번도 만난 적도 없는데 관심 있게 보게 돼요. 그러니까 그런 게 있나 봐요. 내 친구가 너무 좋아하면 난 관심이 없어도 그냥 유심히 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괜히 좀 나랑 마치 인연이 있는 듯한 느낌 있죠? (웃음) 그런 거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왠지 만나야 될 사람을 만난 것 같아요. (웃음)
그러게. (웃음) 나도 어제 야심만만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성시경 씨가 무슨 말을 하면 유심히 듣고,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보는 거에요. 그리고 그에 대한 토론을 해요. 남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자들끼린 그래요. (웃음) 야심만만 끝나고 그 친구랑 통화하는 거에요. 약간 선수 아냐? 이러면서. (웃음) 아무튼 그러면 남 같지 않은 그런 게 있는 거 같아요.

그래요. 참 남 같지가 않아요. (웃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죠. (웃음) 전 <궁녀>가 여성영화라고 생각해요. 시대극이면서 전문 장르지만 그전에 눈에 들어오는 건 여자들이었거든요. 그렇게 스크린의 전면을 여자들이 뒤덮어버리는 자체만으로 뭔가 이색적이었어요.
제가 예전에 류승완 감독님이 전도연 씨와 이혜영 씨와 했던 <피도 눈물도 없이>를 보면서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여자들이 만든 액션영화인 거잖아요. 너무 멋있다고, 완전 브라보를 외쳤었거든요. 그러니까 그건 관객의 입장으로도 보겠지만 제가 여자고, 여배우이기도 하니까. 사실 제가 항상 아이러니 하다고 느끼는 게 한국 관객들 중 여자도 많지 않나요? 20대 초반, 20대 후반, 30대 초반까지. 그런데 참 여자영화가 없어요. 그래서 여자영화가 나오면 반가워요. 왜 관객들은 여자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여자 영화가 잘 안 나오고, 여자 영화가 잘되는 경우도 별로 없죠? 전 왜일까가 아직도 굉장히 궁금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린 여자끼리 만든 영화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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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까지 여자분이셨으니까.
우리가 처음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였을 때 여자들이 쫙 모였죠! ‘우리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으면 좋겠어?’ 서로 질문하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입을 모아 했던 말이 있었죠. 궁녀는 베일에 가려져 있고 중심이 아닌 겉도는 이미지니까 우리가 그것을 중심으로 끌어왔을 때, 기존 관객들이 가질 수 있는, 혹은 궁녀에 대한 어떤 조그만 정보라도 가진 사람들에게 그 고정관념을 깰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자. 그렇다면 그게 뭘까? 그래서 여자 영화지만 남자 영화만큼 힘있는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저희의 의지가 결론으로 내려졌죠. 너무나 다행히도, 물론 감독님께서 연출을 너무나 잘 해주셨기 때문이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까 정말 힘있는 영화가 나온 것 같았어요. 남자 영화 못지 않게, 아주 강렬한 힘이 있는 영화가 나온 것 같아서 기분 좋더라고요.

최근 여성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은 단순히 여성을 섹스어필의 소재로 소비하는 방식에 편중됐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궁녀>는 한복과 공포로 치장했음에도 여성의 날카로운 내면을 잘 묘사했단 생각이 들어서 흥미로웠어요.
사실 저희가 의도한 부분들이 굉장히 많죠. 배우들은 연기하면서 그런 부분들을 염두에 두지 못하면 연기할 수 없어요. 그래서 그런 내면들에 대한 고민도 굉장히 많이 했지만, 장르가 장르이다 보니까 관객들이 그것까진 알아주긴 굉장히 힘들 것 같고, 그건 어쩌면 배우의 욕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마 관객 분들은 천령의 내면, 혹은 여자들의 내면까지 생각 못하고 그저 ‘저 영화 잔인해, 저 영화 무서워’ 이런 것만 보지 않으실까 싶어요. 물론 아무래도 기자님이시니까 그런 내면까지 봐주신 게 아닐까…(웃음) 사실 배우의 욕심으로는 일반 관객도 그런 내면을 바라봐주셨으면 좋겠죠, 그런 욕심이 있어요. 음……만약 제 욕심만큼 관객들이 저희 영화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봐준다면 뭐, 천만만 보겠어요? 4천만 국민께서 다 보시겠죠. (웃음)

또 흥미로웠던 건 공포가 돌출되는 근원 지점이 사랑이란 감정이 억압된 여자의 내면에서 발생한 히스테리란 점이였어요. 그래서 전 궁녀가 결국 여자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잠깐, 아니, 저희 연출부셨나요. 혹시? (웃음) 저희 시나리오를 읽었어요?

시나리오는 아쉽지만 못 봤습니다. (웃음)
너무 영화에 대해서 꿰차고 계시는 것 같은데……(웃음) 예. 맞아요. 사실은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여자들의 얘기죠. 저희 영화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전)혜진이가 맡았던, 마지막에 거의 미쳐가는 정열이. 그리고 그나마 가장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여자는 희빈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이유는 희빈은 어찌됐건 왕의 성은을 입고 왕의 사랑을 받은 셈이니까요. 물론 자신의 어떤 욕망을 채우지 못하고 결국 월령의 원혼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지만, 천령도 자신의 사랑에 있어서 아이까지 낳고 그 사랑을 이루지 못했단 말이에요. 월령도 마찬가지죠. 대리인으로 사랑을 받았을 뿐이지, 자신의 사랑을 이룬 건 아니죠. 옥진이마저도 결국은 자기가 너무나 사랑하던 남자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생을 마감하잖아요. 점 에로틱하게. (웃음) 근데 정열이 같은 경우는 남자인 누군가에게 사랑 받아보지도 못하고, 그걸 상상하고 질투만하다가 그냥 사그라진 여인이란 말이에요. 그니까 사실 누구 하나 완벽한 사랑을 충족 받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인 셈이죠. 그런 것들의 시발(始發)은 궁녀라는 것 자체, 즉 그 당시 궁녀가 갇혀 지내고 외로워 하면서 남자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단 점이죠. 물론 <궁녀>에서는 어떻게 보면 남자들이 마치 여자들을 농락하고 버린 것처럼만 표현했지만 그건 영화적인 요소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요. 기본적으로 옛날의 궁녀들이 농락당했는지, 안 당했는지를 떠나서 늘 남자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지닌, 굉장히 외로웠을 거란 말이죠. 거기서 시작된 실마리가 저희 영화에선 더욱 확대되고 그렇게 표현이 된 거죠. 그래서 궁녀라는 여성 자체가 굉장히 외롭고, 늘 이성에 관한, 사랑에 대해서 동경하고 열망하는 부분이 있는 사람들이지 않았을까라는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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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천령이 고문을 당하고 나와서 모든 상황을 깨닫게 됐을 때 그냥 이젠 다 묻어두겠다는 뉘앙스가 느껴졌어요. 그건 어쩌면 자신은 이루지 못했지만 사랑을 이룬 다른 여성에 대한 동병상련이거나 대리만족이 아닐까 싶었죠.
음, 연출부를 하셨어야 했어. (웃음) 그렇죠.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사회 초년생으로 열정만 가지고 부딪히고 깨지면서 일을 열심히 하다가 어느 순간, 어떤 타이밍이 되면 지금까지 어렵게 적응하던 사회에 잘 적응하게 되고, 순응하고, 합류하게 되는 지점이 있잖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천령이 굉장히 큰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이루지 못했지만 더 큰 무언가를 이루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거기에 순응하게 되는 그런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아니,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제가 활동할 때 고등학생이었던 거네요?

아, 네. 그렇죠. (웃음)
(윤)세아가 저랑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처음 만나서 밥 먹는 자리에서, ‘진희 선배, 진희 선배’ 이러면서 존댓말 하는 거에요. 그래서 나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니까 말 편하게 하라고 그랬더니, 세아는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TV에서 봐온 사람이라서 나이가 훨씬 더 많은 줄 알았대요. 그래서 굉장히 선배라고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런데 자기랑 나랑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무슨 어렸을 때부터 TV에서 봐, 그러니까 열아홉 살 때 내가 스무 살이었던 건데, 자기가 어렸을 때 나를 얼마나 봤겠어요. 심지어 전 스무 살 때 데뷔했으니까 최소한 세아가 날 TV에서 보기 시작한 건 그녀가 열아홉, 내가 스무 살 때란 말이에요. 그녀가 어린 나이도 아니었고. 근데 이미지가 그런 게 있나 봐요.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활동한 거 같고, 봐온 것 같은 이미지. 전 그래서 아까 그렇게 말씀하실 때 그런 느낌으로 생각했던 거에요. 진정한 고등학생이 아니라 그냥 그런 느낌으로 말한 거라고, 그런데 진짜 고등학생 때였네요.

진정한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웃음)
(힘빠진 목소리로)이럴 때는요. 굉장히 세월이 빠르다라는 걸 느껴요. (웃음) 아니, 왜냐면 그런 거 있잖아요. 옛날에는 촬영장에 가도, 다 오빠들이었어요. 진짜, 인터뷰할 때도 저보다 나이 많으신 분들이었고.

기자 분들도 다.
예! 그래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내가 얘기하는 게 맞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고. 근데 요즘은 거의 동년배들이 많아요. 촬영장에 나가도 뭐 이렇게, 스물 여덟, 아홉, 서른, 서른 하나, 서른 둘, 이 나이대가 딱 많은 거 같아요. 아니면 아예 그보다 어린, 이제 막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거나.

막내라고 부르는.
예. 그래서 촬영장에 나가면 이제 다 같이 늙어간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나이대라서 너무 편한 거에요. (웃음) 얘기하기도 편하고, 삐쳐도 옛날처럼 소심하게 고민하는 게 아니라 ‘소주 한잔 먹고 풀죠’ 해버리던지, ‘너 왜 그래~’ 이러면서 풀고. 옛날보단 굉장히 편안한 상황이 됐죠.

어쩐지 <궁녀>를 찍으면서 장녀 역할을 했을 것 같았어요. 어느 새 후배들을 아래 두고 있는 선배가 됐네요.
(짧은 한숨을 쉬면서)사실은 그런 생각을 잘 안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선배로서 권위 의식을 가지면 정말 안되겠다라는 생각. 제가 후배일 때 굉장히 권위 있는 선배님들을 보며 느꼈던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게 권위로 느껴지면 단점이고, 그게 그분의 아우라로 느껴지면 장점인 거죠. 근데 전 단점을 훨씬 더 많이 느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저도 선배라는 이름 하에 권위를 누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건 굉장히 위험한 거 같아요. 권위를 부리기 시작하면 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명명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나보다 어린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으면 나는 내 시대의 것밖에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랑 동료가 되고 친구가 돼야 어린 사람들의 문화나 생각을 흡수할 수 있죠. 문화적인 일을 한다는 내가 어린 사람들의 생각을 흡수하지 못하면 그냥 나는 내가 태어난 78년생의 사람으로만 살고 있는 거니까. 그래서 선배라는 생각을 잘 안 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만약 선배라고 생각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는 정말 좋은 선배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그러니까 모범이 되는 선배가 됐으면 좋겠어요. 뭐가 됐던지 간에. 저 선배는 연기를 잘 하는 배우라서 현장에서도 굉장히 놀면서 하나 보다는 말보단, 저 선배는 내가 보기엔 재능보다는 노력을 더 많이 하는 스타일 같다는 말을 후배들한테 듣고 싶어요. 현장에서 내 연기가 늘 부족하다고 느껴서 항상 뭔가 연구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그들도 그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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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다는 인상이 느껴지네요. 그런데 그게 박진희 씨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평범함은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데 박진희란 배우에겐 장점으로 작용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평범하지 않은 외모덕분인지도 모르지만.
아니에요. 외모도 굉장히 평범해요. (웃음) 요즘은 모든 게, 모든 상황에 양면이 있다는 생각을 해요. 정말 그 한 면만 가지고 있는 건 없는 거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어떤 마인드를 갖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거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평범하다는 건 사실 배우로서는 자랑거리는 아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단점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관객들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같이 호응할 수 있고, 호흡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배우라고 느낄 수 있으니까. 아니면 제가 다른 여배우처럼 완전히 예쁘게 생겼다거나 정말 특별한 이미지를 지녀서 어떤 역할은 정말 박진희가 해야 된다는 말을 듣지는 못해도, 캐릭터 자체가 무난하다 보니 어떤 역할을 해도 어울리지 않냐는 말씀을 해주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다 장단점이 있어서 어떤 장점을 좀 더 부각시키느냐가 중요한 거 같아요. 너무 예쁘게 생긴 여배우들은 사실 외모로는 지적할 게 없으니까 연기를 못 한다는 둥, 성격이 이상하다는 둥, 이런 지적을 받는다면, 우리같이 평범하게 생긴 사람들은 평범하게 생겼으니까 사실 그다지 지적 받을 게 없는 거 같아요. (웃음) 뭐, 이렇게 노멀(normal)하니까.

개인적인 생각에 평범한 외모는 아닌 거 같은데요. 서구적인 외모라고 생각하는데.
얼마 전에 저한테 도시적인 이미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깜짝 놀랬어요. 저는 도시형 인간이 아니거든요~! (웃음) 저는 도시가 너무 싫고, 커리어 우먼 이런 말 듣는 건 싫어요. 반짝반짝 거리는 게 싫고, 직선적인 것도 싫어요. 도시는 약간 그런 느낌이잖아요. 전 그냥 꾸불꾸불한 게 좋고, 나무가 좋고요, 그냥 설렁설렁 사는 게 좋아요. 깝깝하고 각박하고, 빠른 거! 전 빠른 도시가 너무 싫어요. 근데 저보고 도시적이라고 해서 저는 깜짝 놀랬죠. 그리고 저는 심지어 생긴 것도 이렇잖아요, 눈이 정말 큰 것도 아니고, 코도 이렇게 (손가락을 코 주변에 세우면서) 오똑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진짜 서구적, 아니면 도시적으로 생긴 분들은 고소영 씨나 한가인 씨 같은 분들 아닌가요? 그런 분들은 코도 정말이지, 와아~,(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렇잖아요. 저는 그렇지 않죠. (웃음)

이런 말 조심해야 되요. ‘박진희, 난 솔직히 못생겼다, 파문!’ 이럴지도 몰라요. (웃음)
그 누구시더라, 저기 <M>에 나오시는 저분이, (극장에 있는 강동원 사진을 가리키며) ‘제가 뭐가 잘 생겼어요.’ 이 말해서 굉장히 욕 먹었던 거처럼요? 에이~, (손사래 치며) 제가 무슨. (웃음)

<궁녀>에서 처음으로 극의 흐름에 중심이 되는 꼭지점, 즉 원톱의 위치에서 연기를 했잖아요. 이런 점도 본인에게 어떤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요?
예. (잠시 생각하다가) 촬영 전에 시나리오 작업하고, 연습할 때는 그런 게 사실 부담으로 왔어요. 잘 해야겠다, 관객들을 2시간 동안 빨아들일 수 있는 에너지를 갖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라고 스스로 조심하려고 했고 실제로 그랬던 게 있었죠. 근데 촬영을 들어가면서 그런 부담감에 휩싸이면 배가 산으로 가기 마련인 거 같아요. 내 자신에게 집중해도 모자란 연기를 가지고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영화는 어떻게 나올까라는 생각을 하면 정말 배가 산으로 가거든요. 촬영할 때는 그런 생각들을 굉장히 배제했었고, 거의 하지 않았어요. 솔직히 이젠 결과물이 나왔으니까 요즘에서야 정말 내 연기의 장점과 단점이 어떤 부분인지, 또 어떤 느낌으로 연기를 했는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건 촬영할 때보단 촬영하기 전이나 촬영이 끝난 후, 지금에서야 훨씬 더 크게 와 닿죠. 시작지점에선 내가 원톱으로 한 이 영화가 과연 어떻게 시작될까라는 생각을 했다면, 끝나고 나선 이제 결과물이 나왔고, 그 결과물이 평가 받아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책임감이나 부담감, 의무감이 훨씬 더 커진 거 같아요.

한편으로 박진희라는 배우가 동적인 에너지를 지닌 배우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저런 활동적인 배우가 뭔가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많았을 텐데 너무 늦게 기회를 찾은 게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제가 사실 보여주고 싶은 건 많은데 보여줄 게 없어요. (웃음) 보여줄 게 많은 배우였으면 좋겠는데 그다지 보여줄 게 많지 않아서 참 고민이죠. 그래서 제 스스로 아직 박진희란 배우는 참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보여줄 것이 없기 때문에 이걸 한꺼번에 보여주면 사람들이 질려 할 것이다라고. 그러니까 계속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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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요? 활동시기마다 약간씩 텀(term)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학업에 열심이라고 듣기도 했지만, 어떤 연기적인 재충전의 시기를 스스로 유지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그런 거 같아요. 작품을 끊임없이 하면서 연기에 대한 감을 늘 잃지 않으려는 배우들이 있는가 하면, 한 작품을 하고 나서 재충전을 가졌다가 다시 한 작품을 하는 배우들이 있는 거 같아요. 전 사실 후자 쪽이거든요. 그러니까 썼던 에너지를 다시 충전해서 쓰고, 작품을 하면 좀 쉬면서 뭔가 다시 정돈하고 시작하는 스타일인 거 같아요.

그러면 올 해는 일단 에너지를 쓰는 해네요.
굉장히 많이 썼죠. 사실 <만남의 광장>은 작년에 찍었는데 개봉이 늦어졌던 영화니까 괜찮지만, <쩐의 전쟁>이랑 <궁녀>를 하면서 사실 에너지를 굉장히 많이 소진했었죠. 당분간은 조금 쉬게 될 것 같아요.

만약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궁녀>를 보면서 감정이입이 될 것도 같아요. 동성끼리 폐쇄적인 집단을 형성하니까 그 안에서도 계급적인 알력이 생기고, 그런 어떤 미묘한 집단적 동질감이 많이 느껴졌거든요. 그걸 여성의 입장에서 보니까 재미있었어요.
혹시 굉장히 여성적인 성향이 많다는 말 듣지 않으세요?

저요? 일단 세심하다는 이야긴 종종 듣긴 하는데, 남자를 사랑하는 정도까진 아니에요. (웃음)
사실 저는 지금까지 <궁녀>를 본 남자분들 중에 이렇게 여성적인 시각을 잘 이해하시는 분들이 되게 드물다고 느꼈거든요. 맞아요. 그런 게 있죠. 그러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그 작은 공간 속에 있는 여자들끼리 서로 암투를 벌이고 그러잖아요. 권력싸움을 하면서. 그래서 우리 배우들끼리 <궁녀>는 사극판 여성 느와르다, 막 이런 얘기도 하고 그랬었거든요. 사실은 우리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 중 한가지가 그건데요. 어떤 사회도 다르지 않다는 거죠. 궁궐 안에서 궁녀들이 작은 소단위의 집단으로 모이니까 마찬가지로 계급이 생기고,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는 모습들이 보이잖아요. 그건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죠? 넓게 보면 이 사회도 마찬가지잖아요. 결국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우리가 속해 있는 어느 공동체나 다르지 않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어요. <궁녀>를 통해서.

그래서 사실은 귀신보다 여자가 더 무섭다고 생각했었어요. (웃음)
(박수 치면서)그렇죠! (웃음)

확실히 남자의 무서움과 여자의 무서움은 다른 거 같아요. 남자의 무기는 주먹이지만 여자의 무기는 손톱이니까. 눈에 띠지 않는 날카로움이나 사나움 같은 게 많이 느껴졌어요.
그렇죠.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데~!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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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는 사극으로서도 처음이었잖아요. 어땠어요?
사실 사극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있었어요. 말투도 사극 톤으로 써야 되고, 그래서 드라마 같은 경우도 사극이 싫었던 건 아닌데, 굉장히 두려움을 느껴서 선택하는데 있어 조심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궁녀>는 워낙 독특한 소재고, 또 제가 너무 좋아하는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님께서 저를 추천해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감독님을 만나 뵙고 확신했어요. 정말 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보여주자고 하시는 게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에 <궁녀>를 확신하고 정할 수가 있었죠.

그런 면에서 보면 10년 차 배우의 영화로서 <궁녀>는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도요. 그래서 참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를 10년 하면서 10번째 영화에서 원톱을 했고, 또 지금 시기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지금 극장에 걸리는 영화들이 장르가 다 틀리잖아요. 그래서 정말로 나쁘지 않다, 그리고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죠.

그럼 10년 뒤의 자신을 생각해본다면 어떨까요?
모르겠어요. 솔직히 그때까지 아직 연기를 하고 있을지는, 제 바람으로는 하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어쨌든 연기를 하고 있을지 안하고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그때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제 기본적인 삶의 모토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거든요? 그런 생각들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그걸 지키려고 스스로도 굉장히 노력해야 하지만 그에 큰 상처를 주는 어떤 일이 없어야겠죠.

그렇다면 여배우로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굉장히 고단한 일인 거 같아요. 하지만 고단한 일이면서 행복한 일이죠. 근데 저는 긍정적인 사람이니까 아주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아주 행복하고, 굉장히 많이 만족하고 있어요. 물론 힘들 때도 있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안 힘들겠어요. 다 힘들죠. 물론 정말 못 먹고 못 입는 사람과 좀 잘입고 잘 먹는 사람과의 행복을 단순히 비교할 순 없겠지만, 아주 월등하게 차이가 있지 않은 이상, 기본적으로 사는 사람을 비교하면 힘든 것 자체는 다 마찬가지죠. 행복이란 건 자기만의 기준에서 정해지는 거잖아요. 근데 힘든 건 늘 내가 제일 힘들게 느껴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건 수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힘든 걸 느끼는 내 자신이 제일 힘든 거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여배우도 힘들지만, 여대생도 힘들고, 아주머니도 힘들고, 우리가 다 힘들다는 거죠. 누구나 쉬운 삶을 살겠어요? 그래서 누구나 다 힘들지만 저는 사랑 받는 직업을 하며 사니까 나는 굉장히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그렇게 씩씩하게.
그럼요! (웃음) 아! 그거 해드려야죠! 친구분 싸인!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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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손병호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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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 오면 감회가 새롭겠다.
그렇지. 사실 내 텃밭이야. 텃밭. (웃음)

그런데 한참 연극하던 예전에 비해서 대학로의 경관이 많이 달라졌다. 낯설진 않나?
많이 달라졌지. 건물들이 점점 고급화되는 것 같고. 물론 이렇게 되는 건 좋은데 연극무대는 이제 옮겨져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제 연극공간이 점점 없어지고 있거든. 왜냐면 연극 극장이란 게 건물에 속해 있는데 이렇게 건물들이 주점화되고 상업화되다 보니까 건물주들이 건물 임대료를 점점 올려. 임대료가 올라간다는 건 연극의 제작비가 올라간다는 거고, 제작의 여건이 힘들어진다는 거고, 그만큼 연극을 하기가 더 힘들어진다는 거지. 그니까 지원금을 못 받으면 아무 것도 못하게 되는 거야. 4~5년 전만 해도 소극장이 한 달 공연하기 위한 예산이 한 3~4천(만원) 정도였는데 요즘은 억 단위까지 가더라고. 그만큼 배로 뛰었지. 옛날엔 그래도 오백(만원)에서 천만(원)이면 했거든. 요즘은 꿈도 못 꿔. 지원금 없이 절대 안되지. 쉽게 말해서 요즘에 영화 한편을 단 돈 1억만으로 찍기 힘든 것과 똑같아.

그런데 대학로 같은 공간적 대안이 없다는 것도 문제 아닐까?
여기는 이동 인구는 많은데, 그 사람들이 다 극장에 오는 건 아니라고. 어쩌다 극장에 왔다가도 술집 보고 ‘야, 여기 분위기 좋네’, 하고 이쪽으로 다시 오는 거지. 난 문화적 공간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면 한곳에 딱 포진된 예술의 전당 같은 곳처럼, 거길 갈 땐 아예 문화라는 체험 그 자체를 마음먹고 가는 거잖아. 난 그래서 용산 같은 곳으로 옮겨지면 어떨까란 생각을 자주해. 물론 거기에 극장 용도 있고 국립박물관도 있지만, 거기에 중소극장들이 옮겨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 공원도 가까우니까 어느 극장 갈까 둘러보다가 자연도 보고, 그런 공간으로 좀 이동했으면 좋겠어. 음주문화와 거리를 둔 순수한 예술적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게.

그런 의견을 주변의 지인과 나눠본 적은 없나?
지금 대학로에서 연극하는 집단들이 ‘우리 떠나야 된다’는 마음을 많이 갖고 있어. 그래서 실제로 대학로에서 공연 안 하겠다는 친구도 많고. 사실 대학로의 처음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문화 공간이 많이 생겨야지. 갤러리가 생기든, 극장이 들어서든, 그래서 하나의 문화 공간으로서 대학로를 느낄 수 있어야 되는데 요즘은 그저 술집 많고, 먹거리 많고, 그저 그런 공간으로만 변질되어가니까 아쉽지.

대학로가 지닌 문화적 정체성이 상실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체성이 많이 없어지고 있다고 보지. 사실 극장이 좋아야 공연을 좋아하게끔 끌어들일 수도 있는데 어렵게 저런 지하에 극장을 만들었다 이거야. 얼마나 옹색하겠어. 물론 소극장이 나쁘다는 건 아니야. 그런 소극장도 필요하지. 하지만 그것이 소극장이 지향하는 하나의 컨셉에 걸맞은 필요성에 따른 크기와 규모인가란 것이지. 질적으로 향상돼야지, 그게 아니라 단지 열악한 이유 때문에라면 힘든 거잖아. 작고 아담해서 단순히 귀엽고 예쁘다 할 수도 있지만 막상 의자 불편하고 그러면 다시 오고 싶지 않지. 솔직히 영화도 의자가 편한 극장에서 보고 싶어하잖아. 물론 진실되게 땀 흘리는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되겠어. 그런 면에서 우리도 좀 더 좋은 소극장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좀 찾아야겠다 싶은 거지. 그래서 어딘가로 이동해서 다시 한번 포진을 잡던지 해야 되는데 아직까지 그러기엔 우리 여건이 열악하지. 사실 문화에 대한 인식이 열악한 탓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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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젠 연극 배우보단 영화 배우란 타이틀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필모그래피를 보니까 작품 수가 어마어마하던데.
이젠 그렇게 돼버리네. 연극을 하도 못하니까. 이제. 그렇다고 어마어마하진 않을 텐데. (웃음)

물론 단역으로 출연한 작품도 있지만 어쨌든 출연 편수가 상당하더라. 그리고 인상적인 작품들도 눈에 띠고. <야수>는 정말이지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야수>가 잘됐어야 했는데. 아~! (웃음)

흥행은 실패했지만 손병호란 배우 개인에겐 상당히 많은 것을 남긴 작품일 법 한데.
진짜 영화 배우라는 각인을 시켜줬으니까, 그래서 난 개인적으로 고마운 작품이지. (권)상우와 (유)지태가 들으면 미안하지만, 솔직히 자기들도 잘 알아! (웃음) 지태는 특히. 지태는 욕심이 많은 친구야. 그래서 지태가 내 역을 너무나 하고 싶어했지. 지태가 정말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는 게 마인드가 참 좋아. 젊은 시절의 청춘 스타보단 진짜 배우가 되고 싶어하는 거야. 배우로서 막 이기고 싶은 거야. 그래서 유강진을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거고. 자기가 조금만 더 늙었다면 그 역을 했을 거라면서 ‘선배님, 전 정말 빨리 늙고 싶었어요’ 그러더라고. (웃음) 며칠 전에도 전화 왔었어. 대학로에서 술 먹다가 전화해서, ‘형님, 형님 최고야!’ 이러더라고. 그래서 대답했지. ‘미안한데, 그래도 나 못나가.’ (웃음)

그런 이야기 들으면 그래도 뿌듯하겠다.
그런 말만 해줘도 고맙지. 사람이 만나면 서로의 장단점이나 모자란 점도 다 보이는 건데 서로가 그걸 다 이해하고, 격려해주고, 보완해주면 그게 다 좋은 거잖아. 미운 사람보단 예쁜 사람을 더 챙겨주고 싶은 것처럼, 그런 인간적인 면에서.

가끔 연기를 통해서 사람의 선과 악은 백지장 차이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말인데, 사람은 본래 선하다고 생각하나, 악하다고 생각하나?
난 항상 성선설을 주장하지.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올 거야. 선천적으로 인간이 나쁘다고 보지 않아.

그렇다면 왜 사람이 악해진다고 생각하나?
환경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거지, 특히 어릴 땐 부모와 환경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 가정 교육도 그래서 필요한 거고. 지금 문제아라고 불리는 청소년들 보면 그 친구들 가정의 절반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야. 부모가 이혼했거나 자식에게 어떤 애정이 없어서 방관했거나, 어릴 때 다독거려줘야지. 스킨쉽이 부족한 거야. 인간은 체온을 느끼면서 마음의 정서가 열린다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그렇게 교감이 트이면 내 마음도 훈훈해져. 이런 교감이 차단되고, 마음이 차가워지고, ‘너 뭐하는 거야! 저런 자식을 내가 왜 나아가지고.’ 이런 말 한마디에 그 사람의 마음은 이미 비뚤어지기 시작하는 거지. 그럼 그 사람이 사회를 보는 눈이 어떻겠어. ‘그래, 나 비뚤어진 놈이야. 누가 날 낳았어. 사회가, 너희들이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그래서 사회에 반항하고, 뭔가 불만만 터뜨리게 되고, 보는 사람마다, ‘왜, 나한테 뭐 불만 있어?’ 이렇게 되는 거지.

후천적이란 말인데, 그럼 다시 선한 사람으로 교화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그 사람과 다시 한번 정서적인 교환을 하거나, 조금씩 좋은 생각을 하게 만들면 교화시킬 수 있어. 결국 난 충분히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단지 그런 환경 자체가 그 사람을 몰아세우는 것이니까. 민기자가 한 달간 배가 고팠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저 안에 먹을 거리가 있어. 그럼 결국 장발장이랑 똑같을걸. 장발장이 무슨 나쁜 사람이라 빵을 훔쳤나, 정말 배고파서 빵 하나 먹었을 뿐인데. 물론 훔친다는 게 죄겠지만 순순히 부탁하면 안 주는걸. 배고픈 사람에게 뭔가 줄 수 있어야 될 거 아닌가, 사회가, 아니면 인간이. 그러면 그 사람 감동받을 거야. 은혜를 입어서. 그렇지 못한 사회니까 훔쳐야 된다고. 사람을 자꾸 그렇게 만드는 거야. 환경이. 옛날엔 시골에서 잔치 있으면 거지도 불러서 먹였다고 하잖아. 그게 정이거든. 없는 사람, 있는 사람 같이 나눠먹는 정. 근데 점점 각박해지는 거지. 더군다나 요즘 사회는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점점 빈부차가 심해지고, 또 일류끼리만 놀고, 거기에 못 끼면 완전 무시하고.

사회가 점점 몰인정해지는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이 연기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도 있을 것 같다.
영화마다 이 친구가 왜 이 지경으로 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요인을 찾는다. 그게 시나리오에 직접 나와 있기도 하지만, 숨어있기도 하고, 그걸 내가 찾아서 내 마음 속의 적절한 지점에 담는 거지. 어떤 것에 의해 내가 이렇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런 불만이 생기고, 그것 때문에 어떤 욕망이 생긴다는 것을, ‘그래, 네가 날 이렇게 했어?’라는 생각을.

결국 환경에 따라서 악함도 정의된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떤 똑같은 환경인데도 사람에 따라 ‘내가 어떻게 할까’란 생각은 다 다르겠지. 그리고 행동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래도 악한 사람은 없어. 단지 생각이나 마인드가 부여하는 가치의 차이지.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어. 내가 <무방비도시>에서 형사를 연기해서 이번에 강력반 형사를 만났는데 형사님한테 똑같은 질문을 했거든. ‘형사님은 인간이 악한 거 같나요, 선한 거 같나요?’ 그럼 나하고 반대야. 형사가 되기 전엔 인간이 선하다고 생각했는데, 강력반 형사가 되니까 인간은 악하다고 생각이 변했대, 자기는. 내가 만약 형사여서 수많은 범죄자를 대하고 악한자만 상대하면 ‘정말 인간은 악한 놈이구나. 정말 태어날 때부터 악마가 있는 게 아닐까?’ 란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감히 말하기가 두렵긴 하지만 그래도 내 스스로는 난 선한 쪽이라고 생각해. 난 선해, 아직까지. 결국 그런 생각도 환경에 따라서 이렇게 틀릴 수가 있겠단 생각이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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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솔직히 <야수>의 유강진은 선천적으로 악하다고 느껴졌다. (웃음) 물론 그 완벽한 악함이 한 순간 무너지던 순간이 있었지. 자식 앞에 있을 때만큼은 어쩔 수 없더라.
자기 가족 앞에서는 누구도 악인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런 아버지들은 있겠지. 가족을 버리고, 책임지지 않고. 대신 그런 아버지라면 보스가 될 수 없겠지. <대부>를 보면 패밀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잖아. 그리고 유강진이 그렇지. <야수>에서 ‘나는 이 사람이 날 배신해도 이 사람을 버리지 않아.’라는 유강진의 대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만큼 유강진은 힘이 있었고, 그 힘이 보스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버리지 않고 날 배신한 이조차 내가 감싸 안는 것. 얼마나 노력했겠냐고, 뭐든지 어떤 식으로도 노력하지 않으면 이루어낼 수가 없어. 리더라는 건, 내가 먼저 보여주고 내가 먼저 베풀지 않으면 날 안 따라와. 안 그렇겠어? 친구들한테도 내가 먼저 베풀고 내가 먼저 전화해야지, 날 더 기억해주지. 그렇지도 않으면서 이 친구들이 날 사랑해 줄거라 믿으면 그건 천만의 말이지. 그런데 유강진은 그런 인물이라고. 그럼 가족은 당연히 지키지. 가족이 생명인 걸, 가족 때문에 그러는 걸. <가족>을 지키고자 하니까 욕망이 생기는 걸. 만약 가족이 없었다면, 유강진은 국회의원 될 필요도 없었을 거야, 아마. 그냥 군림하다가, 흥청망청 살다가 망가졌겠지. 마약이나 하고. 하지만 가정이란 게 있으니까 욕망이 꿈틀거리지. 아버지로서 사회적 신분을 얻고 싶은, 자기가 국회의원이 된다면 어떤 이들도 깡패라고 함부로 말하지 못하거든. 그게 다 자식을, 가족을 위한 거죠. 그러니까 국회로 가는 거야. 난 그게 자식을 위해서라고 생각해.

가족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서?
그렇지. 난 아직까지 어린애가 다섯 살 밖에 안돼서 잘 모르는데, 우리 선배 중 한 분이 애들을 다 유학 보내고 기러기 아빠야. 왜 보냈냐고 하니까, 그것 참 신기하대. 그냥 TV에서 악역을 좀 많이 하다 보니까 아이가 학교에서 그렇게 놀림 당한다는 거야. ‘네 아빠 나쁜 놈이지’ 이러니까 얘는 충격이지. 몰랐어. 나도 그 정도까지 심할 줄은. 그런데 애들은 그렇게 놀린다고 하더라고. ‘너 나쁜 놈이지, 너희 아빠 나쁜 놈이니까 너도 나쁜 놈이야.’ 이런다는 거야. 그래서 그 애가 아버지랑 말도 안 했대. 그래서 ‘너 왜 그러냐?’ 물어보니까 ‘아빠, 그런 역 좀 하지 마요. 나 학교 가기 싫어.’ 이랬다는 거야. 거기에 충격을 받아서, 이거 안되겠다 싶어서 떠나 보낸 거지, 캐나다로, 가족 다. 그만큼의 환경이 중요하더라니까.

그런데 본인도 악역을 많이 하지 않나? 걱정 좀 안되나? (웃음)
그래도 내 딸은 아직 어리니까. (웃음) 다섯 살 유치원 짜리니까. 그리고 난 영화 하니까! TV는 잘 안 하잖아! (웃음)

부인께서는 악역을 자주 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던가?
내 와이프가 송일곤 감독의 첫 영화 <소풍>에 같이 나왔잖아. 그전에 자기도 무용 공연하고. 물론 이제 내 와이프는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거 알잖아. 그런데 뭐 영화적인 면에서 강인한 연기 코드를 지녔을 뿐이니까 괜찮아. 대신 마음속엔 조금 있겠지. 조금 더 좋은 역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겠지.

그럼 요즘엔 더 뿌듯하시겠다.
그런데도 사람의 욕심이란 게 참 끝이 없어. 성이 안 차는 거야. 물론 내가 원해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도 생활인이잖아. 경제란 게 필요하고, 가정이 있으니까. 필요해서 할 수 밖에 없는 배역이 있고, 하기 싫어도 해야 될 때가 있고. 다만 고마운 건 날 이제 만났던 감독이나 모든 사람들이 욕하지 않는다는 거. 조연출들이 만날 때마다, ‘저희 조연출들의 첫 상대가 선배님이신 거 아시죠. 입 봉하면 선배님 꼭 잡고 싶은 배우 선배님이 1위입니다.’ 라고 하면, ‘꼭 입봉하쇼.’ (웃음) 그런 말들이 고맙더라고. 그런 말이 내 힘이 되지. 하지만 배우는 항상 염려스러운 게 있어. 수많은 배우들이 그렇지만 어느 날 주목 받다가 어느 날 사라질 수 있거든. 진짜 두렵잖아. 내가 지금은 이렇게 인터뷰하고 그래도 어느 순간 날 아무도 안 찾아주면 난 두렵다니까. 그런 강박 관념이 있어, 배우들은. 그건 어쩔 수 없어. 그런 것들과 계속 싸워야 되는 거지. 생각보다 힘들어. 그게.

아무래도 인상이 강한 것이 그런 캐릭터를 자주 맡게 되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데, 혹시 그로 인해서 손해 본 건 없나?
조금 괴로웠다. 어릴 때부터 눈매가 좀 강해서. 흰자위가 너무 많으니까. 조금만 눈을 부릅떠도 사람을 잡아먹을 듯 해 보인다는데. 어쩌겠어. 생긴 게 이런 걸. (웃음)

반면 우직한 신뢰감도 느껴진다.
고집스러워 보이니까. 자기 신념을 지킬 것 같고. 그런 점에서 보면 또 나쁜 건 아닌 것 같아. 어쨌든 배우로서 강렬하게 보인다니까.

<바르게 살자>의 경찰서장 이승우 역할은 좀 애매모호한 역할이다. 얄팍한 듯 하면서도 강직해 보이고, 얼핏 보면 악역인 척하는 인물처럼도 보인다.
악역인 척한다기 보단 얘가 좀 명석하고 두뇌가 빨랐던 거지. 정치를 너무 잘 한다는 거야. 매스컴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놈이고, 이걸 어떻게 이용해야 대중들의 심리를 잘 구슬려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그러니까 그걸 감행하는 건 매스컴을 통해서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던 거지. 그래도 정직한 놈이야. 아무래도 이승우가 내가 연기한 캐릭터들 중에서 저하고 좀 비슷한 거 같아. 그니까 본질에 대해서 어떤 것이 옳다는 걸 분명히 알지만 내가 이걸 옳다고 주장만 한다고 해서 되진 않는다는 거지, 이 사회가. 그래서 어떤 이슈를 벌려야 돼, 매스컴을 통해서 한마디 했을 때, 이게 더 천파만파란 거지. 내가 백날 혼자 떠들어봤자 미친 놈 취급만 당하고 앉아있어야 하는 거야. (웃음) 그런데 똑똑한 놈이라면 어떤 걸 통했을 때 진실이, 아니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명확성이 더 정확히 꽂힐 수 있는가를 아는 거야. 그런 면에서 이승우는 명쾌한 놈이고 똑똑한 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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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위기에 직면한다.
일단 이승우는 나쁜 놈은 아니라는 거지. 너무나 똑똑하고, 사회의 구조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 시스템을 끌어들였는데 그게 잘못이었어. 한 인간의 진짜 정직성에 이승우의 명석한 수가 반대로 당한 꼴이니까. 왜냐면 이승우는 정도만이 정직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선택한 거잖아요. 어수룩하게 선택한 게 아니라 그런 고집 있는 애가 필요하고,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거죠. 물론 한 켠엔 얘가 제대로 해낼 까란 의심도 있었겠지만 그 안에선 정도만 밖에 없었던 거지. 그런데 얘가 예상 밖으로 앞서갈 때, 화는 나지만 그를 통해서 깨닫게 된 거죠. 그래서 놔두지. ‘끝내라면 끝내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아니야. 어차피 이제 다 포기했고, 어디 한번 가보자. 내가 굴복하든 나도 한번 너하고 싸우고 싶다. 진정으로 싸움하자. 너 같은 애가 없어서 내가 못 싸워 본거다.’라고 마음먹은 거야. 그래서 그냥 적당히 보여주고 풀려고 했는데 정말 정직한 놈을 만나서 진짜로 가는 거지.

어쩌면 정도만을 통해서 이승우란 인물의 본질이 복원되는 것 아닐까?
도지사와 대화하는 씬에서 도지사가 내가 와서 어쩌고 하는데, ‘도지사님, 방해하고 계시거든요. 가시죠.’ 냉정하잖아, 이승우가 나쁜 놈이라면 벌써, ‘아 오셨어요~.’ 이러면서 아부 떨었겠지. 그건 아니라고. 일에 대해 철저한 놈이야. 너무 철저하다 보니까 그 철저성에 대한 자신의 가오, 무너뜨리기 쉽지 않은, 자존심이 많은 사람이지. 대신 자존심을 건드리니까 거기서 이제 끝까지 가는데 결론적으로 옳은 건 옳다고 인정하고, 대신에 자신의 임무가 있으니까 잡아들이자고 애쓰는 거지. 그리고 다시 복권시키고, 복직시키잖아. 그러니까 참 메리트 있는 인물이야, 이승우가. 그래서 난 처음에 시나리오 보고 너무 좋았어. 철저하게 필요한 사람이야, 현실적으로. 현실적인 처세에 능하지만 마음속에는 바르게 살자고 하는 정도만 같은 색깔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 단지 그렇게 살아봤자 이 세상 날 그렇게 봐주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 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리던 정도만 같은 인물을 봤을 때, 끝까지 한번 가고 싶은 거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서 그걸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멋있잖아. 크으~! (웃음)

그런데 항상 리더역할을 많이 하는 듯싶다.
그게 아무래도 성향 같아. 실제로 내가 회장직을 세 개 맡고 있거든. (웃음)

아니, 어떤 회장직을 세 개씩이나.
그러니까 <먼 길>팀의 회장직을 맡고 있고, 산악회 회장직하고 스쿼시 동호회 회장직을 맡고 있지. 그게 성격 때문 같아. 리더라는 건 좀 나서고 싶어하고, 어떤 일을 할 때 결속적으로 책임감 있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잖아. 리더는 말보다 행동이 제일 중요한 거 같아. 그런 면에서 내가 제일 신뢰하는 건 말보다는 행동이거든. 말은 누구도 다해, 사실. 말로만 아프냐고 묻는 사람보단 캔 하나 사가지고 말없이 먹으라고 하는 사람이 더 따뜻한 사람이잖아. 말없이 그런 사람이 정말 리더거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큰지도 모르겠지. 또 하나는 이제 모임을 갖다 보면 내가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하게 되더라고. 연기자를 한 10년 하다 보면 무당 된다고 그래. 그래서 어떤 사람과 한 시간 동안 얘기하다 보면 ‘저 친구는 어떤 성격이구나, 저 친구는 어떻게 치고 들어가야 편하겠구나, 이렇게 하면 이 친구가 되게 불안해하겠구나’ 이런 걸 내가 빨리 아는 거 같아. 그러니까 빨리 친숙해지는 거지. 빨리 끌어오는 편이야. 내가.

그래서인지 나도 처음 만났는데도 참 편하다. (웃음)
그러니까 이게 편하게 사람을 끌어오는 거야. 끌어오다 보면 모이게 되고, 그런 다음엔 계속 모이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모든 사람들이 회장을 맡아라, 그러는 것 같아. 그리고 난 정말 내 말에 책임을 지려고 하거든. <먼 길>팀도 신년회 때 내가 건방진 말을 했었는데 결국 했어. 내가 제작해서 우리가 단편도 만들었거든. 어차피 우린 영화 만남이니까, 우리 <먼 길> 영화팀 거기 다 있거든. 다들 프로페셔널이야. 우리 <먼 길>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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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이라면 <엄마>말인가?
그렇지. <엄마>팀이 다 모인다. 지금도 한 달에 한번씩 만나는데, 그게 벌써 2년 넘었잖아. 그 모임을 갖고 오다 보니 내가 한가지 깨달은 건 우리가 다 프로들인데 가격으로만 따져도 이게 지금 몇 백억의 자산 아닌가, 근데 우리가 술만 마시면 무슨 재미가 있겠냐, 영화로 만났는데 뭔가 좀 영화적으로 후배들한테 본보기가 되려면 우리도 영화작업을 하는 게 좋지 않겠냐. 해보자, 우리끼리. 우리가 배우 다 있고, 촬영감독, 조명, CG 감독, 녹음실 대표 다 있으니까 못하는 게 없지 않나.

모임 자체가 거의 프로덕션 급이다. (웃음)
프로덕션이지. 그래서 그런 꿈이 생기더라고. 왜 우리가 투자에 목숨을 걸고 우리가 끌려가야만 하나, 난 영화는 아직도 감독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감독이 다 죽었잖아. 자기 색깔 내는 감독이 별로 없어. 이창동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 같은 성공한 몇 명을 제외하면 없지. 하지만 그 분들도 투자자들한테 동의를 얻어야 되거든. 난 구성주 감독이 갖고 있는 힘이나 재치, 상상력이나 인간적인 마인드가 너무 좋아. 그래서 그 사람과 친숙해지고 용기 주고, 같이 어울려서 다음 작품 기약하고, 담에 또 만나면 해보자, 이렇게 되다가 이제 다음 작품을 단편으로 만들어보자 까지 온 거지. 그래서 이제 일이 추진되고, 단편을 만들었잖아. 그건 너무너무 행복한 거야. 그런 행동이란 게 난 중요하다고 생각해.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은데, 본인의 말에 대한 어떤 책임감을 많이 느끼나 보다.
내가 말을 뱉은 이상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게 중요하지. 물론 다 지킬 수 없을지도 몰라. 나도 인간이라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10가지 중엔 한 8가지 정도는 지켜야지. 그니까 말이 중요하다니까. 그러니까 말을 함부로 뱉지 못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이 그걸 보고 있을 거 아냐, 또 내 얘기를 들을 거 아냐, 또 글을 읽을 거 아냐, 그럼 정말 저렇게 하는지 볼 꺼 아냐, 물론 내가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건 아닌데 하여튼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거지. 정말 옛말이 그른 게 없어,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고, 사람을 울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고. 하여튼 말을 뱉은 이상 그 책임을 분명히 져야 된다라는 거.

그런 면에서는 이승우란 캐릭터가 상당히 와 닿는다.
그렇지. 이승우는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해서 책임을 졌으니까!

물론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긴 했지만 끝까지 지켜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안 그런 놈이라면 다른 수습을 했겠지. 머리가 빠른 놈이니까. ‘넌 정리하고 뒤로 돌아가’라고 명령했겠지만 정작 내 가슴은 쓰라리겠지. ‘난 이런 적 없었는데’라고 생각했을 테니. 한편으로 이승우는 저런 친구를 만난 적이 없었는데 ‘아직 시대가 살아있구나’라고 생각했겠지. (웃음) 기분 좋았을 거야. 그 친구가 드러내진 않았지만.

<바르게 살자>는 장진 감독 특유의 연극적 코드가 강한 작품이다. 그런데 <바르게 살자>가 하나의 연극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은행은 하나의 무대라고 볼 수 있고, 이승우란 역할은 그 연극의 연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 그럴 수도 있지. 맞네. 밖에서 다 연출하는 거지. 그런데 연출이 잘못된 거지! (웃음) 가끔 그럴 때 있거든. 연기자는 무대에 생활화되려 하고 그 인물이 돼버려, 완전. 사실 그 인물이 되면 안되거든.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의 인물을 만들어내야 되는데 그에 몰입해버리면 그 인물이 된다고 생각해버리는 사람도 있거든. 그건 연기가 아니야. 그건 나쁜 연기지. 연기를 그럴 듯하게 만드는 것이지, 내가 그 사람이 될 순 없어. 그건 잘못된 상상이고, 연기 안에서 저 사람은 저 사람이야. 손병호도 아니고 이승우도 아닌 걸 합쳐서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는 게 연기자지, 그게 좋은 연기고. 어떻게 내가 이승우가 돼. 손병호가 어떻게 완전히 없어져. 안 없어지지. 내 눈이, 내 코가 있고, 버릇이 있고, 목소리 톤이 있는데 어떻게 변해. 단지 이승우의 마인드 자체가 내가 갖고 있던 마인드에서 내가 그 사람을 닮아가려고 각자 분량의 소스를 바꾸는 거지, 비율을. 여럿 비율을 바꿔서 이 사람화되려고 노력하지만 내 비율의 반은 내가 갖고 있어. 이 사람 반의 비율을. 생각의, 마인드에 대한, 철학에 대한 비율도. 그래서 그게 교차돼서 새로운 생각과 사고가 생기고, 그 때문에 행동하게 되고 보게 되는 거지.

그래도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캐릭터에 동화되기도 힘들지 않나? 그런 경지에 오르면 그게 진짜 엄청난 연기가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물론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그런 경우에 연출만 잘 하면 될 것 같은데, 흔한 말로 ‘이거 또라이 아냐’란 말 하잖아. 왜 군대에서도 뭐라 하잖아, 고문관이라고, 고문관. 그런 사람 있다니까. 연극하는 후배들 중에도 어느 날 같이하다 보면 완전 몰입해서 앞뒤 계산 없어지는 녀석들도 있거든. 연극은 연극다워야 좋지만 또 하나의 약속이 있는데 그걸 넘어서는 사람이 있는 거지. 영화 촬영 중에도 카메라가 여기 있는데 혼자 저기 쳐다보면서 몰입하면 좋겠어? 안 되잖아. 연기자는 그걸 지켜줘야지. 그런데 지나치게 몰입해서, 평상시에도 그 역에 빠져가지고 정신 못 차리고 있으면 그냥 때려주고 싶지! (웃음) 정도만이 그런 거야. 연출을 해야 하는데 너무 빠져버린 거지. 근데 어쩔 수도 없는 거야. 연극은 시작됐어. 무대는, 관객 앞에서 시작했다고. 연습도 안 했지만, ‘너 괜찮지. 할 수 있지. 자, 너 믿고 간다. 진짜 네 맘대로 해봐.’ 그런데 거기까지 갈 줄은 몰랐지. (웃음) 무대에서 약속대로 안 하는 거지. ‘야! 너 왜 그래! 임마!’ 이러는데 관객이 그걸 또 봤잖아. 미치는 거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야. 계속 ‘야, 네가 들어가서 쟤 끌고 와.’ 그런데 그것도 안 되니까 미치는 거지. 무대에서. 그거랑 똑 같은 거 같아. 어쨌든 딱 맞는 비유네. 연극과 연출이라, 하나 건졌어.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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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도만이란 인물이 연출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혼자 즉흥적인 연기를 펼친 셈인데 궁극적으로 연극 자체는 성공한 것 아닐까?
살았지! 연극은 살았어! 그 예측할 수 없는 파장이 재미있지! 그것도 내가 어쩔 수 없는 거야. 관심이 없으면 모르는데 관객들이 재미있어하거든. 처음엔 별 반응을 안 보이던 관객도 너무 재미있어한단 말이야. 그럼 여기서 끌어낼 수도 없고, 막을 내릴 수도 없어. 그럼 관객들 미쳐. 막 내리면 이거 우리가 다 환불해줘야 돼. 그럼 안 되잖아, 그건. 어떻게든 가보는 거지. 그래서 가잖아. 관객들 눈치보고. ‘야, 끝까지 조심해. 일단 못나가게 막고 보자. 그리고 쟤도 그 이상은 못하게 해. 이 정도 선만 지키게 만들어. 자기가 결정짓게 해봐. 일단 잘 가고 있어. 그냥 끝까지 가.’ 그래서 끝까지 지켜보는 거지. 그리고 끝나고 나서 엄청 박수가 쏟아지는 거고. 하지만 연극으로 따지면 롱런 했지만 결국 대박은 안 나는 거지. 연극이 일관성이 없잖아. 다시 만들 수 없는 무대야. (웃음)

하지만 배우로서는 인정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난 끝나고 나서 배우로서 자격을 인정해주는 거지. ‘인정한다. 너 정말 배우로서 아주 뛰어난 놈이고, 넌 배우 자격 있어. 하지만 이제 너하고 다시 작품할진 모르겠다.’ (웃음) 그렇게 되겠지. 무서워서 다시 하겠어? (웃음)

<바르게 살자>엔 연극 무대 출신 배우들이 많이 등장한다. 비슷한 계보를 걷고 있는 배우들과 함께 촬영한다는 게 반가웠을 것 같은데.
장진 사단만의 영화들이 그런 독특한 형태나 구조를 낼 수 있는 건 이유가 있어. 한 달간 연습을 하거든. 무대에서 씬 하나를 놓고 계속 만들어보는 거야. 연극 연습이랑 똑같지. 장진 감독하고 라(희찬) 감독도 보면서, ‘뭐, 불편한 거 있어요?’라고 묻고, 그럼 ‘이 구조가 좀 뭔가 그렇지 않나?’ ‘아, 그런가?’ 이런 식으로 배우와 감독이 의견 교환하면서 새롭게 고치고, 쓰고. 이렇게 연습하니까 뭐 그냥 영화 찍는 거지. 연극 연습한 걸 그대로 찍는 거 같은 거야.

하지만 무대와 현장과의 괴리감도 발생할 법한데, 그런 건 어떻게 극복하나?
물론 현장에 오면 카메라 구도에 신경을 써야 하지면 동선이나 연기적인 약속이 다 되어있으니까 훨씬 더 편하고 연극적일 수 밖에 없지. 상호 다 아니까. 단지 그걸 어떻게 영화적인 표현으로 카메라에 담을 것인가는 우리가 고심을 못 했겠지. 그건 이제 스텝 쪽에서 할 일이고, 라 감독이나 촬영 감독이 할 일이니까. 그러면서 이제 그 쪽은 우릴 믿으면 되는 거고. 그쪽도 리허설 보면서 어떻게 찍을까, 어떤 표정이 나을 것인가, 어떻게 가야 한다는 걸 아니까. 그니까 하나의 소재가 연극적으로 다 나오는 거지.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연습해보니까. 하나하나 아이디어들까지 검토해보고. 결국 감독만의 영화도 아니고 배우들이 감독의 생각만 따라가는 것도 아니지. 배우와 감독이 함께 연습하며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색깔들이 나오니까 독특한 거야. 일반적으로 영화는 그냥 콘티 짜 온대로 맞춰가면 되는데, 우린 그 전에 이미 어떤 게 좋을지,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직접 고민해보고, 함께 만들어보니까.

단단한 팀워크를 구축시키는 과정이라 볼 수 있겠다.
일단 우리끼리는 재미있겠단 믿음이 생기지. 다만 이게 실제로 관객에게 재미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건 한번 해보자는 믿음이 생기지. 그래서 장진 사단의 매력은 충분한 연습을 한다는 것, 씬 분석부터 시작해서 연극처럼 모여서 한 달간 연습해. 그게 너무 신나더라고. 그리고 나중에 실제로 촬영할 땐 편안하지. 그러니까 안정된 연기가 나오고.

그런데 요즘 스크린에서 맹활약하는 배우들 중 연극 출신 배우들이 많이 눈에 띈다.
좋은 현상이라고 봐. 나는 연극 무대가 영화나 TV, 그 밖에 모든 매체에서 활동하는 연기자를 위한 기본적인 보고라고 생각하거든. 배우는 연극 무대를 통해 연기를 다져야 되고, 그를 통해 다져지는 거라고 생각하지. 그리고 그렇게 성숙하게 자라난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 가서 자리를 잡아야지, 좋은 영화가 나오고 좋은 드라마가 나온다고 생각해. 우리가 신성일 시대의 영화와 지금 영화를 단순히 비교하면 배우들의 연기가 많이 향상됐지. 그게 다 연극 배우들이 향상시켜놓은 거라고 생각해. 물론 분야적으로 접근하는 생각이 많이 변해서 전문적인 공부도 많이 한 덕분에 작품의 질이나 감독들의 기량도 많이 발전했지. 하지만 제반적 조건으로 봤을 땐, 연기자들이 중심이 되는 거지. 결국 배우의 힘이 제일 중요한 거잖아. 결국 그 영화를 만든 배우들이 다 연극했던 사람들이야. 드라마도 마찬가지지. 다 연극에 있다가 TV로 가고, 영화로 가고. 물론 옛날부터 잘 생긴 사람들이 기회를 얻기 쉬웠지. 옛날에도 외모가 주가 된 건 사실이니까. 근데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적인 면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 순간부터 그게 어느 정도 무너진 거 아냐. 진짜 연기자가 필요하게 된 거지. 그럼 연극 무대만큼 풍부한 연기자가 어디 있겠어, 없지. 그러니까 그만큼 풍부한 영화를 만들어내고 보여줄 수 있는 거지.

하지만 그런 배우들을 쉽게 찾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난 영화 투자자나 프로듀서나 감독이나, 무조건 연극 무대는 지켜봐야 된다고 생각해. 찾아야 된다고, 좋은 배우를. 그래서 (설)경구도 찾고, (송)강호도 찾았고, 다 찾은 거 아냐. 처음부터 누가 스스로 나왔겠어. 찾아 다녔다고. 근데 왜 지금은 그 몇몇만 가지고 투자하려고 하느냔 거지. 지금도 찾아 다녀야 한다는 얘기야. (박)해일이도 그렇고, 다 연극에서 찾아낸 거 아니야. 지금도 강호 같은 인물, (최)민식이 같은 인물, 해일이 같은 인물을 또 찾아야지. 물론 지금도 누군가는 찾고 있겠지만 계속 찾아내야 하는 거지. 뭔가 투자가 있어야 돼. 그래야 젊은 후배들이 연극을 통해서 열심히 자기 모습을 다듬어야겠단 생각을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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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대를 거치지 않고 데뷔하는 연기자들이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 내가 선배로서 후배들을 보면 안타까운 건, 대학만 졸업하면 모든 것이 다 됐다고 생각하는 모습들, 그냥 무대에 잠깐 서면서 영화나 갈 수 있을까 생각하고. 난 그게 좀 안타까운 거야. 난 아직까지 대학이란 건 그냥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고 이제 사회에서의 시간이 그걸 제대로 공부해야 시기라고 생각해.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연출가나, 좋아하는 극단이나, 아니면 좋아하는 작품이 있거나, 아니면 자기들만의 마인드가 맞는 사람이 있는가를 찾으면 일단 5년에서 10년간은 그 안에서 실력을 쌓고 있어야지. 내 풍성함을 위해서.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연기가 지향할 수 있는 정점은 어디라고 생각하나.
나도 연기의 규정은 모르겠어. 연기가 잘 됐다 생각하는 어느 순간 딜레마에 빠지고, 그런 딜레마가 3~4년 가다가 다시 또 깨달음이 올 때가 있지. ‘아, 이런 거였구나!’ 그걸 믿었다가도 다른 순간되면 또 그냥 빠져. ‘어,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이게 아니라 다른 거 같은데, 뭘까? 모르겠어.’ 또 그러면서 바꿔. 그렇게 끝없이 바뀌는 게 연기라고. 그런데 고작 대학교 연극영화과 나왔다고 자기가 무슨 다 아는 양 구니. 물론 빠른 친구도 있어. 끼가 많은 친구들. 기본적인 연기를 위해서 우리가 노력도 하고 수행도 해야 되지만 선천적인 끼로 그걸 넘겨버리는 애들도 있어. 선천적인 재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친구들도 재질만 가지곤 안돼. 재질을 통해서도 노력이 있어야 되고 자신만의 후천적인 경험이 있어야 그 재질도 꽃이 피는 것이지. 재질만 가지고 믿으면 안돼. 오래 못 가, 그건. 깊이가 없거든.

오랜 경험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젊었을 때 신구 선생님이 오셔서 그러시더라. ‘그냥 10년 동안 옆도 보지 말고, 뒤도 보지 말고, 널 믿고 그냥 가. 열심히 무대에서만 해. 그 뒤에 널 돌아보면 널 지켜보는 사람들, 네가 가야 할 길들, 다 보일 거야.’ 그때 그게 정말 딱 옳으신 말씀이셨어. 그 시기엔 내가 몰라. 아직 철학도 없었고, 날 다그칠 시간도 없었으니까. 진짜 서른이 넘어야 돼. 서른이 넘어야, 산도 보이고, 사회도 보이고, 인간도 보이지. 성숙한 만큼 내 가치관도 생기고, 어떤 철학도 생기고. 철학이 없는 사람은 예술가 못 해. 자기 철학은 뚜렷해야 돼. 연극 연출가든, 연기자든 자기 철학이 뚜렷해야지, 정확한 내 마인드를 가지고 어떤 코드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못해. 자신이 생각해본 인간적인 철학들이 분명히 무르익었을 때, 그 때 정말 또 하나의 연기적인 경험이나 풍부한 눈빛이 나올 수 있는 거라 생각하지. 그런 면에선 후배들이 좀 급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 그런데 하도 초스피드한 빠른 시대라서. (웃음) 예를 들어보자고. 젊은 가수들만 봐도 금방 나왔다가 사라지고. 노래는 안 하고 그저 춤이나 외모만 신경 쓰니까 금방 질려서 그러는 거 아냐. 솔직히 그런 애들 홍대 앞이나 클럽만 가도 수두룩한데 오래 가겠어?

최근에 부산영화제에 대한 말도 많다. 개막식 날 과열된 열기부터. 어떻게 생각하나?
부산영화제 얘기가 잘 나왔는데, 이대로 가면 부산영화제 정말 위험하다. 이번에 유명한 감독들도 많이 왔잖아. 유명한 해외영화제 위원장들도 왔고. 그런 분들 정도는 알아서 잘 모셨어야지. 솔직히 우리 대중이 해외의 유명한 감독은 잘 모르잖아. 그러니까 솔직히 기자들도 그냥 아는 사람만 포토 하지. 수많은 배우들 중에서도 모르는 배우는 안 찍는 판에 그 사람들을 챙기겠어? 그거 무시당하면 얼마나 아픈지 알아? 그래서 안가는 배우들도 많을걸. 위원장을 비롯해 영화제 관계자들이 철저하게 교육을 시켜야 돼. 경호업체부터 시작해서 자원봉사자들까지. 이번에 누가 온다는 걸, 사진부터, 경력부터, 필모그래피까지 다 교육시켜야지. 왜? 문화를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모르는데 그 사람 예술에 대해서 누가 알겠어. 엔니오 모리꼬네? 잘 모르지, 대중은. 연예인보고 소리지르는 20대 애들이 뭘 알겠어, 그 분을. 외국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그 감독이 어떻게 생겼는지, 몇 살인지, 깊게 관심이 없으면 모르는 거야. 근데 그런 유명인사들을 다 데려다 놓기만 하고 무식하게 수행을 한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거지. 그럼 그 사람은 뭐가 돼. 사실 영화제가 제일 인정해줘야 할 사람인데, 얼마나 정말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겠냐고. 진짜 영화인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영화제라고 할 수 있어. 제대로 교육을 시켰어야지. 경호업체부터 자원봉사자까지. 최소한 엔니오 모리꼬네 같은 감독이나 선댄스 영화제 위원장 왔을 땐 기본적으로 동시 통역사까지 2명 정도 붙이고 수행했어야지.

내실을 다지기도 전에 규모가 너무 커져버린 건 아닐까란 인상이 들었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있었고.
실속은 없고 뻥튀기만 됐지. 과장만 하고 실제로 뒤에 보면 아무것도 없어. 옷만 화려하게 입으면 뭐하냐고, 안에 때가 잔뜩 있는데. 올 해 부산영화제 정말 문제가 많다니까. 반성 많이 해야 돼, 정말. 사실 어제도 부산영화제 갔다 오신 이명세 감독님과 만나서 우리끼리 토로를 했어. 토로를.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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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일선에 계시는 분들의 느낌이 그렇다면 정말 심각한 거라고 생각된다. 이젠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상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하는 중년 배우들이 단순한 희화화의 역할을 하거나 혹은 단순한 보조 역할로 소비되는 쪽에 치우쳤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래도 한편으론 옛날보단 참 좋아졌다. 그것이 방금 말한 대로 하나의 피상적인 볼거리, 아니면 끼워 맞추기라 치더라도. 다만 그 중간이 없어서 안타까운 거지. 그래도 남자 배우들은 좀 괜찮아. 근데 우리 여배우들의 아픔이 뭐냐, 한 이십 대에서 삼십대로 올라오면 막 없어지는 거야. 한때만 해도 강수연 씨도 있었고, 심혜진 씨도 있었고, 옛날엔 배우들이 다 있었다고, 여배우들이. 그런데 젊은 애들이 오지, 그럼 갑자기 사라지는 거야. 이건 감독,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이 문제라니까. 그 깊이나 삶을 쉽게 생각 안 하려고 해. 영화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자체가 질서가 없는 거야. 위계질서도 없고, 모든 게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거야. 위계질서를 지켜줘야 되고, 존중해줘야 되고, 전통을 이어가야 되는데 우리는 전부 다 어느 순간 무너져 버렸잖아. 그래서 이번에 오현경 선생님께서 영화 들고 부산영화제에 가셨다가 후배들한테 쓴 소리 많이 하셨잖아.

나도 그 소식은 들었다.
그 말씀이 맞아. 나도 요즘 배우들이 왜 그렇게 폼 잡고 다니고, 자기 맘대로 스케줄 조정해서 배우들에 맞춰서 영화들이 찍히고, 이게 뭐야. 정말 잘못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어. 그건 우리 영화뿐만 아니라 한국 자체의 문제이기도 해. 한국의 모든 체계가, 위계 질서가, 질서가, 전통이 하나도 지켜지는 게 없어. 기성 세대가 그렇게 만들어 놨으니까 다 그런 거지. 매니지먼트가 커지고, 매니저들의 힘이 점점 생기고, 그러면서 배우를 지들이 그렇게 만들어. 왜, 그것이 자본주의의 논리니까. 물론 이해는 해. 자본주의에 대해서. 하지만 일본이나 미국 같은 곳에서도 분명히 전통은 존재한다고. 그걸 인정하는 가운데 새로운 게 또 나오는 거지. 이렇게 다들 전후가 공존해 가는데, 우리는 그게 없어. 수요가 사라지면 그에 맞춰서 이상한 것들이 나오는 거지.

오래 지속되기가 힘든 것 같다. 전반적으로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말이다.
내가 연극할 때부터 일간지 기자들한테 이야기하는 게, 단순히 문화부 기자를 잠깐 컨택해서 넘어가는 시기라고 생각하지 말고 정말 문화부일 때 고작 5년만이라 해도 문화부 공부 좀 해라. 연극이 뭔지, 책도 보고, 인물도 누가 있는지 옛날 자료도 좀 찾아보고. 예를 들어서 인터뷰 올 때 그 사람의 모든 연극은 못 봤더라도 그 사람의 기본적인 색깔이나 사진, 예전에 인터뷰한 거라도 읽어서 그 사람을 다 이해하고 와서 이야길 해야지. 대뜸 이름 뭐냐, 나이는 몇이냐, 이런다니까. 게다가 예전에 나의 스승인 오태석 선생한테 그렇게 해서 정말 그 사람 때려 죽이고 싶었던 적도 있어! (웃음) 정말 그건 기본 예의가 없는 거 아냐? 그렇게 이게 만들어져 온 거야. 이런 판에 우리가 다시 질서를 지킨다는 건, 물론 좋은 마인드지. 그렇지만 너무 아픈 거야. 힘들거든.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이렇게 되는 거지, 부산영화제처럼.

그렇다면 전통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나?
선별이 있어야지, 선별의 기준도 있어야 하고. 그게 바로 전통을 이해하는 모습이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전통이 없는 문화에서 살다 보니까, 모든 현실이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일본만 해도 잘 지켜지는데. 우리가 일본 무시하면 안돼. 우리도 배울 건 배워야 되니까. 일본만 해도 위계질서가 있거든. 커리어에 따라 틀려, 매니지먼트라도. 예를 들어서 내가 20대에 스타가 됐다 이거야. 그럼 다 필요 없어, 그냥 올인해! 이게 현실이야. 물론 배우는 자기한테 올인하니 좋지. 그러다가 결국은 이용당해. 배우로서 그 사람이 인간이고, 깊이를 만들어줘야 되잖아. 매니저란 게 작품 선택을 잘 해주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훈련시켜 줘야 그게 진정한 매니지먼트지. 잘 나갈 때 어떻게든 팔아먹으려고. 그러니까 권상우가 아프잖아. 상우가 나쁜 친구 아니거든. 남이 그렇게 만드는 거야. 그러다가 나중에 이용당한 거지. 돈만 벌어먹고. 배우로는 안 키워주고. 그래서 고소하고 고발하고.

결국 시스템의 문제다?
배우들도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겠지만 배우들도 어쩌겠어, 매니지먼트가 없으면 안 되는걸. 매니지먼트가 다량으로, 이 배우면 끼워주기 세네 명. 다 그런 식으로 팔아먹어, 지금, 매니지먼트에서. ‘우리 배우 누구? 그럼 두세 명 더’ 그럼 다 해줘야 돼. 그럼 감독도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러면 투자를 안 해주니까. 그니까 투자자의 문제지, 이거 문제가 많아. 어디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근데 확실한 건 자본이 들어오면서부터 잘못된 거야. 자본이 들어오면서 자본에 대한 권력들이 좌지우지하다 보니까 감독들이 힘을 잃고, 감독이 원하는 색깔대로 시나리오도 못 쓰고. 흔한 말로 어떤 영화감독이 시나리오를 써서 갔더니 잘 고쳐오라고 해서 입봉을 해야 하니까 계속 조건대로 한 세네 번 걸쳐 그 짓을 하고 막상 뚜껑을 딱 열어보니 제 작품은 하나도 없고 이상한 영화가 됐다잖아. 그래서 못하겠습니다 하고 나왔대. 지금 그게 현실이라니까. 입봉하려면 어쩔 수 없이 웃기는 코미디나 해야 되고, 어떻게든 투자 받아야 되고, 일류 배우를 잡아야 되고. 자기가 아는 좋은 배우가 연극에 있어서 그 배우를 좀 데려가고 싶은데, 힘이 없으면 안 되는 거야. ‘쟤는 누구야, 모르는 애잖아, 투자 안돼!’ 이러니까. 그러니까 좋은 배우를 찾기 힘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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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가수들조차도 다들 연기로 전향하는 상황이다.
그걸 난 이해 못하겠어. 도대체 가수 애들을 왜 데려와서 연기하는지. 그런 게 다 매니지먼트 힘이라니까. 가수가 돈이 얼마 안되니까 연기로 다 튀는 거야, 요즘 가수 다 죽었잖아. 음반 시장 죽으니까 다 연기하잖아. 우스운 거지. 연기자가 수두룩 한데, 정말 잘 하는 애들 있는데 다 놔두고. 그 자체가 잘못된 거야. 벌써 영화 판에 전통이 무너진 거지. 배우란 개념도 무너진 거고, 이미, 이 판에서. 거기에 뭘 어떻게 하겠어. 그럼 결론은 생존게임이야. 어떻게든 먹고 살려면 인맥을 건지든지, 좋은 매니지먼트에 적을 두던지, 감독을 막 구슬려보던지, 뭐, 그것도 아니면 인터넷에서 옷을 벗던 사고라도 쳐서 이름을 내던지. (웃음)

연기자가 되겠다는 의식보다 스타성에 집착하는 게 문제 아닐까. 그러니까 젊은 배우들한테 지나치게 스포트라이트가 몰리는 것 같다.
그저 스타가 되면 된다는 생각이지, 검색 1위면 떴다 이거야. 이런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고. 특히 인터넷도 문제야. 사람을 가볍게 만들어버려. 이게 어디서 잘못 된 거냐고 물으면 답답하지. 나도 메릴 스트립 같은 여배우들이 우리나라에도 나왔으면 좋겠어. 근데 지금 선생님들 다 웃기는 캐릭터밖에 못하잖아. 김수미 선생님조차도. 하지만 그나마 그거나마 다행인 거야.

다행이다? 어째서?
그 분들이 그나마 그 나이에 영화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거지. 왜? 그래도 영화적으로 다양해진 거니까. 좋은 쪽으로 해석한다면 정말 다양성의 측면에서 좋은 배우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뭔가 역할을 맡을 수가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지. 또 이렇게라도 보여져야 관객들도, 저 어른들도 대단하구나, 연기 잘 하시는 분들이구나, 애들만이 연기하는 게 아니구나, 라고 느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중년연기자들한테 익숙해지면 40대, 50대, 60대까지 점점 연령의 폭을 늘려도 관객들이 편하게 볼 수 있겠지. 익숙해져야 되니까. 개인적으로 난 좋은 청사진을 보기 위해서 이런 시기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것이 아까 말한 대로 어떤 매개체가 될지언정 그래도 다양성의 면에서 배우들이 어떤 가능성을 염두에 둘 테니까. 나도 배우로서 열심히 생활하다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나 긍정적인 마인드가 생길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는 참 좋은 거 같다.

<바르게 살자>에서 이승우의 본질적인 의도는 쇼맨십이었다. 그런데 그런 의도가 전복되면서 오히려 훈련의 본질을 회복한다. 지금까지 말한 어떤 지적들이 어쩌면 본질을 훼손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안들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에서 수상이었던 처칠을 교통경찰이 교통위반으로 잡고 벌금 부과했다고 통보한 예가 있다더라. 우리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야. 근데 정도만은 했잖아. 경찰서장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이 돼야지. 그걸 또 인정해줘야 되고. 그런데 자기의 어떤 일말에 대한 양심이 없고, 자기가 맡은 바에 책임을 다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모든 구조에 있기 때문에 그게 힘든 거야.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야.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진 마시고. 다만 너무 만연해있기 때문에 그렇단 거지. <바르게 살자>는 우리가 잃었던 본질성에 대한 이야기지. 내가 맡은 바 책임을 다할 수 있게 그 책임을 인정해주는 사회 구조에 대한, 정확한 정직성을 바탕으로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책임을 다했을 때, 거기에 대한 배려, 그리고 인정, 그런 체제가 되야 된다. 그래서 이 사회가 따뜻해져야 된다라는 것. 그니까 결론은 바르게 되야 된다는 거지. 그런 구조에서 전통도 지켜지고, 내가 어떤 걸 해도 올바르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그렇게 하고 싶단 욕망도 생기고. ‘나도 정직하게 하면 돼. 저 사람도 됐잖아. 나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을 거야.’ 이런 꿈이 생길 수 있는. 그게 없으면 안돼. 정의가 없으면 그런 꿈을 못 그려. 정도만이 정말 인정받는 사회가 돼야지. 나도 저렇게 바르게 살면 복을 받는구나. 내가 저렇게 바르고 옳은 행동을 하거나 내 신념을 굽히지 않고 가면 언젠가 내게 돌아올 몫은 있겠구나 라는 믿음, 그런 믿음을 주는 꿈 있는 사회. 그래서 <바르게 살자>는 정말 따뜻한 영화인 거 같아. 그리고 난 아까 말했던 복원의 힘이 난 분명히 있으리라고 생각해. 게다가 상업적인 재미도 있잖아. 본인이 보기엔 어땠어? 복원의 힘이 느껴지던가? (웃음)

개인적으론 사회적인 불신감이 크기 때문에 <바르게 살자>같은 영화에 감정이입이 되는 게 아닌가 싶더라. 그런데 김지훈 감독과 마찬가지로 경상도 출신으로 알고 있다. <화려한 휴가>에 출연했는데 개인적으로 그 시대에 광주의 외부에서 그 사실을 직접 접한 이들 중 하나 아닌가? 어떤 감회가 있을 법하다.
나도 죄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80년대는 나도 방관자 입장이었으니까. 그 당시엔 알려진 대로 진짜 적색분자들, 빨갱이들이 데모하는 줄만 알았었다. 진상이 밝혀지면서 나도 뒤늦게 알게 된 거지. 아마 김지훈 감독님도 방관자적인 아픔이 있었거나 아니면 그에 대해서 학창 시절에 선배들하고 많이 접하다 보니 언젠가 그 얘기를 해봐야겠단 생각을 했나보더라.

지금 <무방비도시>에도 출연하는 걸로 알고 있다.
지금 한 60% 정도 찍었다. 부산 내려가서 찍었고, 서울 올라와서 찍으면 끝난다. 11월 초쯤 크랭크업될 듯 하네.

거기서도 경찰 역을 맡았다고 하던데.
형사반장! 나 이제 악역 안 하려고. (웃음)

하긴 따님도 학교 가실 때가 다가오는 것 같다. 근데 아무래도 대화를 나눠보니 국회로 보내드려야만 할 것 같다. (웃음)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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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장근석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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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좋아해요?
굉장히 좋아하죠.

어떤 부류의 음악을?
특별히 가리는 건 없는데, 일렉트로니카나 디제잉 음악을 주로 좋아해요. <즐거운 인생> 찍으면서 밴드 음악을 한창 미친 듯이 들었고.

사실 전자 음악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면 <즐거운 인생>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지글거리는듯한 일렉기타음을 견디기 힘들었을 테니. 물론 나이를 생각하면 애초에 그렇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기도 했지만 취향은 각기 다르니까.
사실 음악에 대한 선입견은 크게 없으니 만약 락이 아닌 다른 음악이었다고 해도 상관없었을 거라 생각해요. 일단 밴드라는 틀 안에서 각자의 캐릭터가 같이 호흡할 수 있는 기회가 굉장히 많았죠. 밴드란 게 혼자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너무나 좋았던 건 선배님들과 감독님 간의 신뢰가 굉장히 크게 키워진 상태에서 작품에 참여했기 때문에 전혀 부담감을 느끼지 못했던 거 같아요.

마치 밴드가 하나의 식구처럼 느껴지던데요. 그런데 다른 세분 배우와 홀로 세대 차가 많이 나는 편인라 그런 차이를 극복하는 게 마냥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극복했나요?
일단 그런 계기들은 선배님들과 감독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 같아요. 감히 올려다보지 못할 것 같은 선배님들과 같이 있게 된 신인의 입장이다 보니 수용적인 자세와 방어적인 자세가 같이 나타났다고 생각해요. 선배이기 때문에 당연히 수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점도 있지만 반대로 방어적이란 건 나와 너무나 차이가 많은, 갭이 많은 선배이기 때문에 내가 깍듯해야만 하는 관계, 다시 말해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관계니까.

어느 정도 거리감을 좁히기 힘든?
예. 사실 저도 처음엔 그런 것들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었죠. 그걸 깨주신 게 선배님들과 감독님이세요. 같이 악기 연주하고, 같이 술 마시고, 같이 밤새고, 그런 관계가 단지 촬영이란 목적 때문만이 아니라 촬영이 끝난 후에도 계속 이어졌죠. 아침부터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 신고 같이 만나서 밥 먹으러 가고, 마치 정말로 옆집에 사는 이웃친구처럼, 한 멤버가 됐어요. 그 정도로 팀워크가 굉장히 높았던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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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 연주도 연주지만 보컬도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미성이 나올 것 같은 외모에서 그런지(grunge) 풍의 보컬이 나와서 놀라웠거든요.
일단 노래는 그 전부터 계속 배우고 연습하고 있었어요. 굳이 내가 음반을 내야겠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배우가 가지고 있어야 할 여러 가지 테크닉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죠. 그것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들도 배우고 있었고, 그런 것들이 <즐거운 인생>을 통해서 많이 도움이 됐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목을 긁는 창법 같은 경우, 음악 감독님과 연구를 좀 했었죠. 원래 내가 노래 부를 때 중저음인데 그것을 좀 더 거친, 굉장히 러프한 음악과 매치시키기 위해선 뭔가 변형이 있어야 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목을 좀 긁어서 노래를 부르는 연습을 했어요.

그럼 그 보컬은 일부로 만든 것?
맞아요. 일부로. 물론 원래 노래 부를 땐 그렇게까진 아니지만 영화에선 좀 더 터프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촬영하면서 설정을 위해서 계속 계발을 했던 것뿐이죠.

솔직히 배우로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마치 밴드를 차리는 느낌이었을 것 같기도 해요. 음악을 좋아하는 이로서 음악 영화라니 반가웠을 법도 했을 테고.
솔직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배우고 싶었던 욕심이 컸어요. 종종 어떤 기자 분들은 제2의 이준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평들도 많이 해주시고 그런 기대감에 대해서 묻기도 하시는데 그런 것보다 난 그냥 무언가를 배우고 싶단 계기가 가장 컸던 거 같아요. 덕분에 악기를 또 하나 배울 수 있게 됐고, 그 외에도 굉장히 많은 것들을 얻었던 작품이었죠.

사실 기타를 잡고 무대에 선 모습을 스크린으로 볼 수 있었던 기회는 더 먼저 있었을 텐데,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예정보다 밀리지 않았다면. 아직 개봉일을 못 잡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것 같아요.
굉장히 아쉬웠죠. 굉장히 치열하게 준비했었고 치열하게 촬영을 했었는데 갑자기 스톱이 돼서 굉장히 안타까운 상황이었어요. 사실 저에게 <도레미파솔라시도>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제대로 작업할 수 있었던 계기였거든요.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깜짝 놀랬죠. 그 때 스텝이나 배우들하곤 아직까지 만나요. 물론 영화가 올해 크랭크업됐고, 지금 일단 진행되고 있으니까 잘 되면 좋겠어요. 다들 열심히 힘들게 만들었으니까.

원래 기타는 문외한이었나요?
물론 그전에도 조금씩은 만질 수 있었는데, 이 정도로 능숙한 실력으로 오게 된 건 <즐거운 인생>하면서 배운 덕분이죠.

손가락에 물집도 많이 잡혔겠네요.
처음엔 많이 잡혔지만 나중엔 굳은 살로 변형됐죠. 그래서 나중엔 아무 느낌도 없게 되는데 그런 과정이 몇 번에 걸쳐 반복돼요. 나중엔 굳은 살 볼 때마다 흐믓해지곤 했어요.

그런데 아직 젊은 나이라서 그런 기타를 배우는 과정이 즐겁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다른 세 배우 분들은 나이도 있는 편이라 애먹었을 것 같은데, 옆에서 지켜본 바는 어땠나요?
일단 힘든 건 사실이었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선배님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고. 각각 악기란 것에 대해서 익숙한 분도 있는 반면, 익숙하지 못한 분도 있었고 익숙하다를 떠나서 그걸 제대로 연주할 정도의 실력은 저를 포함해 전부 다 없었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촬영 전부터 팀워크를 다질 수 있었던 계기가 악기 연습실에서 하루 7시간에서 8시간씩 하루 종일 갇혀서 연습한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연습을 1시간씩 더하면 그만큼 더 잘되겠지 싶은데 이게 또 계속 하다 보면 더 안돼요. 그런 스트레스가 쌓여서 도중에 연습실에서 나와서 담배피고 쭈그려 앉아서 한숨 내쉬고 있을 때, 선배님들도 옆에서 같이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거죠. 공동체를 느꼈다고 해야 되나요? 물론 제가 보기엔 굉장히 어려운 선배들이었지만 같이 이렇게 0이라는 숫자에서 출발해서 뭔가를 창작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운 작업이었어요. 그리고 연습 끝나면 같이 밥 먹으러 가서 술도 마시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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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명성이 자자한 감독과 실력을 인정받는 선배 배우 분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부담감은 물론 있었죠. 배우고 싶어서 시작을 했지만 그 계획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비유를 하자면 물과 기름 같은 성격을 가진 배우 분들이 그렇게 하나가 된 과정이 너무 궁금했어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선배님들께 좀 더 다가갈까?’ 이런 고민을 한창 할 때, 먼저 선배님들께서 마음을 열어주셨어요. 사실 촬영 전에 나온 시나리오 초판본과 스크린에 나오는 완성된 필름의 50%가 틀려요. 그런데 그 50%를 비틀고 새롭게 설계해나가는 작업을 저희가 같이 해나가서 재미있었어요. 감독님들, 시나리오 작가, 연출부 스텝끼리만 참여한 게 아니라 배우들까지 직접 참여해서 각자의 아이디어가 어떤 씬에 반영되기도 하고, 없었던 씬이 생겨나기도 하고, 그런 설계 과정을 거치며 서로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가 굉장히 많이 커졌던 거 같아요. 그게 결국엔 팀워크를 다지거나 세대 차이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큰 요소가 됐죠. 물론 악기도 굉장히 중요했지만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연습이 잘 안되면 밖에 나와서 같이 투덜거리다가 친해져서 같이 술 한잔 마시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술과 함께 하는 얘기들이 오갔죠. 인생이든지, 영화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었던 시간들이 많았던 거 같아요.

영화가 어쩌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을 것 같아요.
사실 전 아직 인생은 잘 모르겠어요. 단지 이제 <즐거운 인생>을 하면서 한가지의 꿈이 생겼죠. 내가 20년 후에, 30년 후에도 저렇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래도 한가지 깨달은 건, 난 굉장히 행복한 놈이다라는 것. 실제로 전 어디에서든 ‘전 굉장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물론 그 전까진 너무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서 그런 것들을 좀 모르게 살았던 것 같은데, <즐거운 인생>을 계기로 다시 저를 되돌아보고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거 같아요.

사실 <즐거운 인생> 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성숙했단 느낌이 들었어요.
사실 외적인 모습은 잘 모르겠어요. 물론 어느 새 내 모습이 바뀌었단 걸 느끼긴 했거든요. 어렸을 땐 굉장히 밝고 귀여운 이미지나 해맑은 모습이 많았었는데 커가면서 어느 순간 그런 모습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요. <즐거운 인생>의 촬영 후, 현준의 감성을 봤을 때 나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가장 중요한 건 이제 <즐거운 인생>을 하면서 배우로서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굉장히 컸다는 사실이죠. 사실 제가 배우라는 의식을 갖게 된 건 얼마 안됐었거든요. 그 전까지 그냥 <논스톱>같은 거 할 때까지만 해도 그냥 난 연예인이고 그저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그래서 난 굉장히 좋다, 행복하다, 이런 막연한 생각 정도였죠. 그러다 슬럼프가 한 번 있었고, 그런 후에 <황진이>를 하게 된 건데 그 때부터 아마 처음으로 배우라는 개념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아이돌의 이미지가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황진이>와 <즐거운 인생>을 거치며 불쑥 커버린 느낌이었어요. 지금 스스로에게 나름대로 중요한 터닝 포인트라고 느껴지나요?
전 이제 시작되는 부분이죠. 제가 뭔가 내 업적을 남길만한 굉장한 걸 보여준 건 아니니까. 다만 <즐거운 인생>이 제가 배우란 걸 알게 해 준, 그런 사실을 끌어낸 작품인 거 같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작품이란 점에서 지금이 성숙한 배우가 되기 위한 초반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나름대로 이제 데뷔한지 거의 10년째가 되가요. 그래서 이젠 베테랑이란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건 MC나 라디오DJ같은 방송을 오래한 덕분에 듣는 말이지, 실제로 배우로서 연기할 땐 이제 막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기인 거 같아요. (손가락을 발가락처럼 꼼지락거리며) 전 아직도 더 많이 배워야 하고, <즐거운 인생>을 통해서는 굉장히 많은 걸 얻었고, 앞으로가 중요한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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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의 (<즐거운 인생> 포스터 속) 세 배우는 그런 걸음마에 많은 도움을 줬을 법한데 각각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일단 정진영 선배님은 뭐랄까. 굉장히 큰, 그러니까 광범위한 부분에서 저에게 굉장히 좋은 말씀을 해주셨던 거 같아요. 연기나 영화, 배우 같은 전문적인 조언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추구해야 할 것들을 많이 알려주셨어요. 굉장히 좋았던 건 제가 아직까진 인생을 말하기엔 굉장히 어린애지만 제가 추구한 것을 말씀 드리면 ‘그건 아닌 거다, 잘못된 거야’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걸 받아주시고 또 거기에 대해서 덧붙여서 말씀해주시곤 했죠. 김윤석 선배님은 말씀이 많진 않아요. 스스로가 후배에게 특별한 조언을 잘 하지 않는데 저한테 처음으로 많이 해줬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배우가 가지고 있어야 할 테크닉이나 그것을 분석하면서 해야 될 것들, 배우로서 틀을 잡아주는 가장 기초적인 것들을 조언해주셨어요. 김상호 선배님은 제가 좀 더 솔직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그 안에서 전혀 기죽지 않게끔 ‘너하고 싶은 대로 해. 형은 널 믿는다.’라면서 저를 굉장히 솔직한 인간으로 믿고 바라봐 주셨고, 작품 내에서도 실제로 그렇게 도와주셨죠.

혹시 저 세 배우 중 배우로서 자신의 이상형이라 꼽을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요? 근데 워낙 세분이 출중한 분들이라 꼭 찍어 말하긴 힘들겠지만.
아니, 틀려요! 다! 각각 매력이 다 틀리거든요. 정진영 선배님 같은 경우는 굉장히 지식도 많으시고 솔직하신데 지식을 탁 내뱉는 스타일은 아니고, 제가 말하는 걸 굉장히 감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분이세요. 지적이면서도 굉장히 감성적인 인간인 거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솔직한 모습도 많이 뵐 수 있었고, 저한테 좋은 말씀들도 많이 주셨고. 윤석 선배님은 굉장히 섹시해요.

그래요?
예. 은근히 섹시하세요. 목소리도 멋지시고, 키도 굉장히 크고 매력 있으세요. 촬영할 땐 한창 정승혜 대표님(영화사 아침)이 장근석과 김윤석 중 누가 더 섹시하냐고 투표하기도 했었어요. (웃음) 김상호 선배님께서는 워낙 유머가 많아서, 항상 편하게 해주셨어요. 이렇게 각자의 매력이 다 틀리죠. 그런 것들을 조합한 모습이 얘였으면 좋겠어요. (포스터의 자신을 가리키며) 나중에 2~30년 후에.

그런데 이준익 감독님께서 캐스팅 제의를 했을 때, 그리고 그 전에 이미 캐스팅됐다는 선배 배우들을 보았을 때, 자신을 왜 이 사이에 끼어 넣으려 하는 것일까란 의문이 들지 않았나요?
지금도 들어요. (웃음) 사실 제 나이 대에서 훌륭한 비쥬얼을 가지고 있는 배우 분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그래서 왜 날 뽑았을까, 아까도 감독님께 물어봤었어요. 그러니까 그냥 ‘너 눈이 예뻐서’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물어봤었어요. 감독님 그럼 만약 다른 기자 분들이 ‘왜 이준익 감독님 영화에 뽑힌 거 같은지, 자신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감독님이 시나리오 들고 저희 집 앞에서 기다렸어요.’ 라고 하면 안될까요? 라고 물었다가 맞을 뻔 했어요. (웃음)

혹시 이준익 감독님의 전작 영화들을 봤나요?
다 봤죠. <키드캅>까지.

그 중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영화가 있다면?
아무래도 영화를 보는 관객 입장에서 중요한 건 대리만족 이라던지, 공감인 거 같아요. 제 입장에서 봤을 때 제일 공감되는 건 <라디오 스타>였어요. 그 때, <라디오 스타>를 심야영화로 보고 나서 새벽에 바로 <황진이> 촬영을 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가는데 계속 30년 후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사람의 감정까지 침투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시는 순수한 감독님이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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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스타>가 공감된 건 아무래도 본인이 종사하는 업종 까닭일 것 같은데.
정말 내 얘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그게 전 슬럼프라고 했는데, 다들 그러더라고요. 나이도 어린 놈이 무슨 네가 슬럼프냐, 이러는데. (웃음) 열 아홉 살 때, 제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었거든요. <논스톱>을 끝내고 나서 소위 말하는 것처럼 확 떴다가 확 졌죠. 그런데 같이 하던 사람들은 굉장히 잘 돼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데 난 어디론가 이렇게 사이드로 물러나서 그걸 지켜보는 입장이고. 그 때 굉장히 방황을 했었죠.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게 올바른 것인지, 앞으로도 이렇게 해나가야 하는 것인지. 사실 그 당시에 <라디오 스타>처럼 그렇게 가까운 매니저나 친형 같은 형을 못 만나봤어요. 물론 그게 매니지먼트의 문제가 아니라, 제가 또 외동인 탓이죠. 외로움을 굉장히 많이 타는 성격이라서 누구에게 고민을 말하지도 못하고. 그래서 이제 혼자 고개 숙이면서 다니다가 그 당시에 어느 순간 뮤지컬 한 편을 하게 됐다.

혹시 <헤라클레스>?
예. 물론 그게 가족뮤지컬이긴 하지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란 되게 큰 무대에였거든요. 거기서 공연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배우가 돼야겠단 생각이 번뜩 들더라고요. 사람들 앞에서 내 감정을 동화시킬 수 있는 그런 배우의 모습을 꿈꿨어요. 그때부터 이제 다시 치열하게 살았죠. 물론 어떤 실패에 의해서 내가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던 게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나를 위해서 굉장히 치열하게 살았죠. 그때도 라디오 진행을 하고 있었는데 밤 11시까지 라디오하고, 12시까지 대학로 와서 새벽 2시까지 수업 받고 아침에 학교 가고, 이런 식의 생활을 한 5~6개월 가까이 하다가 이제 지금의 꿈꾸던 대학교에 들어가서 영화를 공부하고, 무대를 공부하고, 그러던 와중에 처음으로 들어온 작품이 <황진이>였어요.

아무래도 <황진이> 이후 사람들이 장근석을 배우로서 새롭게 인식했단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드라마 <홍길동>에 캐스팅 됐단 소식 들었어요. 유난히 사극과 인연이 깊네요.
제 겉모습이 고전적인가 보죠. (웃음) 사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황진이>때 많이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있었나 봐요. 사실 <홍길동>이란 작품에 섭외된 것도 <황진이>의 인연 덕분이기도 해요. <황진이>를 연출하셨던 김철규 감독님께서 추천을 해주셨거든요.

결국 사극의 인연이 다시 사극을 맺어준 셈이네요.
사실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처음 대본 들어왔을 때, 사극이기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기도 했고요. <황진이>의 사극 이미지가 지금도 워낙 강하게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에 좀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한 탓도 있었어요. 그런데 <홍길동>은 <황진이>와 성격이 워낙 틀린 사극이더라고요. 연출자와 작가분들이 전형적인 대하드라마와 무관한 스캔들 드라마로 유명한 분들이시고, 무엇보다 캐릭터 자체가 굉장히 맘에 들었어요. 굉장히 칼날이 바짝 든 악역이에요. 날카로운 캐릭터라서 하고 싶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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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진행 중 악역으로 변모하는 캐릭터 같던데.
약간의 사이코적인 면모를 지닌 캐릭터죠. 후에 왕위에 오르면서 밑에 있는 신하들을 숙청하려 들면서 그런 성향이 짙어지죠.

그런데 의외로 대화를 나눠보니 애늙은이네요! (웃음) 그런 말 종종 듣지 않아요?
감독님도 저한테 그래요! (웃음) 아까도 같이 인터뷰하는데, ‘얘는 말하는 게 애늙은이야, 말하는 거 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웃음) 물론 저는 제가 애늙은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어느 기자 분께서 인터뷰 후에 그러시더라고요. ‘장근석과 얘기를 하다 보면 그가 열 살이 많아지던지, 혹은 내가 열 살이 어려진다’고. 같은 주제에 같은 감성과 같은 공통점을 갖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그런 게 제 장점이지 않을까 싶어요.

영화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사실 현준을 좀 더 꺼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니까 촬영하면서도 사실 감독님과 계속 의견을 나눈 건데, 전 현준이를 더 보이고 싶었거든요. 현준이를 더 보이고 싶었는데, 감독님께서는 ‘넌 보이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배치상 너 하나밖에 없어서 보이게 되는 역할이다. 나중에 관객들이 널 찾아서 봐야지, 네가 그걸 일부로 나타내려고 하면 더 역효과다. 앞으로 작품 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고.’라고 말씀해주셨죠. 그 땐 잘 이해를 못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영화를 보고 나니까 그 말씀이 대충 이해가 됐어요. 촬영 초반엔 더 나타내고 싶었지만 이젠 감독님 말씀이 맞았던 거 같아요. 가장 만족스러웠던 부분은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는 모습이 저도 만족스러웠던 거 같고 흡족했어요. 사실 악기 연주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촬영할 때도 긴가 민가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크게 어색한 거 같지 않아서 다행이었죠.

<즐거운 인생>이 자신에게 어떤 계기가 될 수 있을까요?
아직까진 제가 뭔가를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 쉽게 말할 순 없지만 그런 과정은 있었어요. 감독님을 처음 뵀을 때가 제가 이제 배우라는 꿈을 막 안고 이제 제가 갈 길을 정해야 하는, 마치 사춘기처럼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는 방황의 시기였어요.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이분은 내가 그런 걸 말했을 때 굉장히 진실적으로 받아주실 수 있는 분이다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처음 (인터뷰가 진행된) 이 자리에서 만났거든요. 이 자리에서 만나서 이야기했죠. ‘저는 배우가 너무 되고 싶습니다. 지금 제가 지닌 엔터테인먼트의 기질을 버리고 대학로 연극 무대에서 맨손으로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러기까진 용기가 너무 부족합니다.’라고 시작했죠. 그렇게 제 맘속에 있는 진실된 말들을 많이 꺼내드렸더니, 감독님께서도 그만큼 저를 새롭게 보셨나 봐요. 단지 얼굴만 잘생긴 꽃미남 아이돌 정도로 생각하셨는데 그 내면에 대한 교감이 생겼던 거 같아요. 작품을 하면서도 얘기할 시간이 굉장히 많았고, 작품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제 인생에 대해서도 감독님께서 말씀을 많이 해주셨고, 그랬던 만큼 어떤 방향들에 대한 자신감을 얻기도 했죠.

연극 무대에 대한 동경이 있었나 보죠?
굳이 연극과 영화를 나누자는 것보단 그 당시엔 배우로서 가장 순수해진 제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요. 내가 화면에 어떻게 나올지, 머리를 이렇게 하는 게 나을지, 그런 비주얼적인 장면들을 기준 삼아 평가를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들을 벗어 던지고 싶더라고요. 정말 0에서부터 맨손으로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어요. 실제로 그때 저희 학교 동기들이 대학로 무대로 나가면서 굉장히 발전한 모습을 보았고, 그랬기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였거든요. 그랬었죠. 굉장히 좀 어지러운 시기였는데, 전 <즐거운 인생>을 통해서 그만한 가치에 달하는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연극 무대에 잔뼈가 굵은 세 배우를 만난 것도 하나의 복이라고 생각되네요.
천운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저랑 나이대가 비슷한, 혹은 좀 더 나이가 많은 다른 배우분들도 부러워해요. 정말 넌 돈 주고도 배우지 못하는 것들을 배웠다고, 오히려 전 돈 받고 배웠잖아요. (웃음) 어쨌든 다들 부럽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그런 분들과 같이 작업을 한다는 건 엄청난 소득이 될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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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인생>은 배우로서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좋은 계기가 생긴 만큼 스스로가 앞으로의 청사진을 그려봄직도 한데.
일단 계획은 경험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아직은 어리고 배워야 할 것도 굉장히 많지만 제가 너무도 존경하는 선배님들이나, 저희 학교에 계시는 교수님이나 공통적으로 배우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기초적인 경험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리고 그런 경험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나름대로 배운 지식들이나 경험을 쌓는 훈련법도 알려주셨죠.

학업과 연기를 병행하기 쉽진 않을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중고등학교는 많이 못나갔지만 대학교는 악착같이, 정말 거의 매일매일 나갔어요. 그런데 한번은 주변의 동기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너무 부러워졌고 그들의 심정이 궁금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모든 것들이 느끼고 싶어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거의 생떼를 쓴 적이 있어요. 저희 매니저한테. (웃음)

아르바이트?
사실 작년에 너무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저와 동갑인 동기들은 방학에 아르바이트 하면서 한 시간 동안 번 몇 천원을 꿀맛처럼 여기고, 그렇게 번 돈으로 자랑스럽게 친구들한테 소주 한잔씩 사는 모습이 전 너무나 멋져 보였어요. 물론 저도 지금 돈을 벌고 있긴 하지만 전 그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순수함이 부러웠어요. 내 또래 친구들이 돈을 어떻게 버는지에 대해서 되게 궁금했었고. 그래서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커피전문점 같은 데서 파트타임으로 하루 몇 시간만이라도 아르바이트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죠. 결국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땐 정말 그런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직접 경험해보고자 하는 의지를 많이 중요시해야 할 것 같아요.

만약 아르바이트를 했다면 좋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 영업방해가 되지 않았을까요? (웃음)
그렇죠. 그래서 안됐던 것 같고. 사실은 제가 유명한 커피전문점 본사에 연락해서 돈 안 받겠으니까 2시간만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었는데 실질적으로 하진 못했죠. 지금도 하고 싶은 맘은 있어요. (웃음)

그래도 배우들은 연기를 통해서 간접경험들을 하잖아요. 그런 부분에 대한 재미를 찾아가는 것도 괜찮겠어요.
네. 배우로서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우리는 다른 인물들의 인생을 간접적으로 작품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물론 그런 것들을 작품 안에서 경험할 수 있지만 결국엔 연기로 보여주는 것들은 진실인가, 거짓인가의 문제 같아요. 기초적인 연극무대에서도 그렇고. 그런 것들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훈련이 필요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그들의 감정을 느껴야만 될 것 같고. 누군가가 그런 말 했었는데 ‘배우는 계속 배워야 하기 때문에 배우다’란 말을 들었던 적이 있어요. 그 말이 저에겐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기다리다 미쳐>라는 영화도 찍은 것으로 아는데, 군입대를 소재로 했다고 들었어요. 고무신이라고 하나? (웃음) 군대에 대한 간접경험이 됐나요?
군복 입고 훈련 같은 걸 몇 번 연출했던 그게 뭐, 어디 경험이겠어요. 돌 맞을 거 같아요. (웃음) 경험했다고 하면. 군대 갔다 오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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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촬영한다는 건 지극히 간접적인 거라서, 사실 간접적이라고 말하기에도 무례할 수 있는 비주얼만 제가 입어본 거죠.

솔직히 난 20대 초반에 당장은 군대에 대해 깊이 생각 못 하다가 1,2년 지나니까 갑자기 피부로 와 닿는 고민이 되더라고요. 확실히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를 가기 전까진 군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지금 본인의 나이가 딱 그 시기라고 생각되는데, 주변의 친구들도 지금 한창 갈 때니까.
대학 동기들은 하나 둘씩 가는 타이밍인 거 같아요.

그 때가 가장 번뇌가 밀려올 때에요. (웃음)
동기들이 한창 고민하다 하나 둘씩 가더라고요. 그리고 이번 학기 2학년을 마친 후가 피크인 거 같아요. 보통 다들 지금쯤 군대를 가는데 전 모르겠어요. 전 이제 막 배우가 되겠다는 제 도화선에 불을 붙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실제로 지금의 결과물들도 많은 분들이 성원해주셨고, 그런 것들이 계속 이어져오는 거 같아요. 처음으로 이제 배우로서 나가야 할 길을 찾아서 가고 있는데 이 길을 아직 더 가보고 싶어요. 더 확고하게 밀고 가다가 정말 배우다, 쟤는 정말 배우다, 란 소리를 들었을 때, 아마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일단 자신의 나이 대에 맞는 연기를 하고 있지만 본인의 의지대로 배우의 길 안에 머물러서 나이를 먹는다면 성인 연기를 보여줄 때가 오겠죠. 스스로 본인이 후에 어떤 연기자로 성장해 있었으면 하나요?
주변에서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너, 음반 언제 내냐’고. 계속 들어왔어요. <즐거운 인생> 하기 전부터. 구체적인 제의도 들어오고 그랬었는데 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건 배우의 모습이거든요. 만약 나중에 제가 20년, 30년이 지나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기할 수 있는 배우의 모습이라면, 아주 솔직한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그 배우의 모습이, 그러니까 장근석이란 배우가 2~30년 후에 연기를 굉장히 잘 한다는 배우로 인식됐으면 좋겠고, 연기를 잘 하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하는 배우였으면 좋겠고, 그만큼 연기나 배우에 대한 직업에 매진할 수 있는 순수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가장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 때도 오만함을 가지지 않고 순수한 열정으로 노력할 수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어요.

사실 이준익 감독님 영화가 항상 노는 영화였는데 그 중, <즐거운 인생>이 제일 대놓고 노는 것 같았어요. (웃음) 어쨌든 배우로서 놀듯이 연기할 수 있다는 것도 즐거운 인생을 사는 방법 아닐까요. 배우로서 앞으로 어떻게 놀아보길 바라나요?
아직까지는 배우가 되기 위해서 배우고 있는 배우가 제 위치인 거 같아요. 그런데 배울 때는 겸손하고 성실하게 배우되, 그것을 캐릭터로 표출할 때는 과감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렇게 과감하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기죽거나 눌려서 내 자신을 표출하지 못하면 배우로서 굉장히 안타까운 일일 테니까. <즐거운 인생>같은 경우는 워낙 선배님들이나 감독님이 저에게 편한 자리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제가 거침없이 카메라 앞에서 까불 수 있었고, 싸울 수 있었죠. 그런 모습, 그 기분을 앞으로도 이어가고 싶어요. 점점 하나씩을 내 거로 만들면서, 하나씩 배우면서, 카메라 앞에서도 자신감 있게 놀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즐거운 인생>이란 어떤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자신감. 자신감이 좋아요. 저는 누군가가 저한테 ‘넌 지금 행복하니?’ 라고 물어본다면 ‘네, 저는 너무 행복해요.’ 라고 말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저는 ‘너무 행복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그 자신감이 결국엔 저를 계속 밀어주고 있는 힘이고, 물론 이제 막 젊음을 누리는 이십 대 초반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앞으로도 이십 년, 삼십 년 그런 모습을 제가 갖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이 육십이 돼서 어깨에 힘주는 모습보다는 자연스럽고 밝게 웃으면서 나는 너무 행복하단 자신감을 갖고 있는 그런 할아버지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럼 일단 지금의 장근석은 <즐거운 인생> 중이군요.
저는 너무 즐겁죠. 그리고 굉장히 만족해요. 주어진 제 삶에 너무나 만족하니까, 물론 목표는 아직 저 멀리에 있어요. 지금의 내 인생에 만족하는데 목표는 저기 있으니까, 이제 목표를 향해서 만족할 수 있게 나아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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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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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이기우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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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드라마 <키드갱>이 종영됐다고 들었다. 최근 <두사람이다>를 비롯해서 자신이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를 각각 한 편씩 끝냈는데 소감이 어떤가?
<키드갱>과 <두사람이다>의 촬영시기가 비슷했는데 그 때 우정 출연으로 <기다리다 미쳐>란 영화까지 3개를 같이 했었다. 그래서 너무 힘들었는데 끝나고 나니 후련하기도 하다. 그 뒤로 조금 쉴 시간이 있어서 가까운데 여행도 다니면서 쉬다가 지금은 홍보에 총력을 다하느라 다시 바빠졌다. (웃음)

여행을 좋아하나 보다.
집에서 쉬는 것도 좋지만 한번씩 여행 갔다 오는 것도 좋아한다.

처음 짝사랑으로 시작했다. 처음 출연한 <클래식>부터.
그렇지.

그런데 <키드갱>에선 결혼도 했다. (웃음)
내가 듣기론 원래 결혼 예정이 없었다더라. 원래는 아마 도희(빈우)랑 다른 사람이 연결될 예정이었는데, 빠듯한 일정 속에서 촬영되다 보니까 스토리가 바뀐 것 같다. 아마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개 좋아하나? 아까부터 눈이 자연스럽게 (인터뷰 장소에 있는 개한테) 가더라.
좋아한다.

덕분에 <해변의 여인> 생각이 났다. (웃음) 사실 그 때 개 끌고 다니는 청년은 예상밖이라 인상적이었다. <극장전> 생각도 났고, 그런 출연의 배경도 <극장전>과 무관할 것 같은데?
감독님은 <극장전>의 상원이가 감독을 지망하는 대학생 역할로 성장한 거라고 개인적으로 말씀해주셨다. 큰 의미는 없지만 전작과 연결되는 의미랄까.

올해 들어 본인의 이미지에 역행되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 <두사람이다>에선 과감한 어필이었던 것 같고, <좋지 아니한가>는 좀 깼다. (웃음)
약간의 반전이랄까. (웃음)

아주머니한테 접근하는 다단계 청년이라니. (웃음) 항상 건실한 청년으로만 생각했는데, 그래서인지 나름대로 신선했다.
방금 말한 것처럼 날 건실한 청년 이미지로 생각했던 분들이 <좋지 아니한가>나 <두사람이다>를 통해 다른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워 하고 그로 인해 재미있다고 느낀다면 내게 그런 모습은 고소할 것 같다. 그 분들은 영화 속의 내 모습을 보고 재미있어 한다면 난 그런 날 보는 분들의 반응을 보고 재미있어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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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람이다>가 <새드무비>이후로 두 번째다. 자신의 얼굴을 포스터에 내 건 영화는. 그런데 <새드무비>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웃음) 여덟에서 하나보단 셋 중 하나가 더 낫지 않나? 확실히 비중이 커진 셈이니까.
내가 출연한 작품인데 불구하고 영화포스터에 내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에 그 동안은 무심결에 영화를 보다가 나를 발견해 준 분들이 반가웠다. 그 대신 이젠 내 얼굴을 간판으로 걸고 영화를 보게 될 분들이 생겼기 때문에 부담감도 조금 생기는 것 같다.

<두사람이다>는 기존의 작품들에 비해 출연량도 많았을 텐데.
드라마처럼 지속적으로 소화할 분량들은 일정한 에너지로 쭉 끌고 가야 한다면 <두사람이다>같은 경우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에서 뭔가 확실히 실어줄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했었던 것 같다. 사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부담됐다. 그 동안 해왔던 것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니까. 내가 그걸 한다면 과연 잘 어울릴까, 나랑 잘 매치가 될까, 그런 걱정을 되게 많이 했었다. 만약 안 어울린다면 배우로서 이건 정말 큰 타격이니까. 저 배우는 그냥 착한 동네 청년 같은 역할밖에 못한다고 낙인 찍힐까 봐. 그래서 시나리오 보면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스스로가 봤을 때 어떻게 생각하나. 본인에게도 색다른 모습이었을 텐데.
나도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을 통해서 내 모습을 쭉 봐왔지만 지금 같은 모습은 처음이다. 극적인 분위기 자체가 음산한 공포영화도 처음이고, 피를 묻힌 것도 처음이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어느 정도 만족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내 눈에 계속 보이는 허점들을 보완해야겠단 생각도 든다. 그래도 한번 도전해봤기 때문에 잃은 것보단 얻은 게 더 많았던 역할이었던 것 같다.

새로운 모습을 통한 모종의 만족감도 있었겠다.
나에 대한 또 다른 자그마한 가능성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지.

그런데 <두사람이다> 현장에서 연장자 역할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이런 경험도 거의 처음일 법한데.
그만큼 시간이 흘렀구나 싶더라. 데뷔한지 5~6년 정도 됐는데, <클래식> 때는 완전 막내였다. 스텝 분들도 다 형이었으니까. 그래서 막 형, 형, 그러면서 쫓아다니며 소주 한잔 받아먹고 그랬다. (웃음) 사실 그런 경우가 익숙했는데 지금은 어느덧, 나보다 어린 스텝들도 있고 심지어 <두사람이다>는 같이 하는 두 배우들조차 나보다 어렸으니까 묘하더라. 그렇다고 내가 그 두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난 건 아닌데, 시간이 좀 흐른 탓에 은근히 맏형으로서의 부담감이 생기더라. 사실 난 현장 분위기가 재미있어야 촬영할 맛이 나는 편이다. 현장 분위기가 좀 삭막하고, 동료들 간에 불협화음이 있다던가, 사이가 안 좋으면 난 정말 못 하거든. 근데 <두사람이다>현장은 공포 영화지만 스텝들이 워낙 좋았다. 감독님도 밝은 성격이고, 촬영감독님, 조명감독님은 완전 밝은 분이셨고. 그에 잘 편승해서 스텝들과 촬영 중간중간 나머지 시간엔 잘 웃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고, 그래서 부담감이 많이 줄었던 거 같다.

<두사람이다>가 첫 공포인데, 아이러니하지 않았나? 영화는 어두워도 현장은 밝으니까.
그렇지. 그런데 <두사람이다>의 스텝들이 모두 프로답다고 느꼈던 적이 많았다. 밥 먹거나 그런 쉬는 시간엔 다들 재주껏 놀다가 촬영이 들어가면 그 순간만큼은 정말 진지하게 영화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영화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란 것도 깨달았지.

그런데 <클래식>에 캐스팅이 안 됐다면 군대 갔을 거란 이야긴 들었다.
인생이 바뀌었지. (웃음) 그 당시 내 친구들은 다 군대 갈 시기였고, 나도 날짜를 받아놓은 상태였고. 정말 우연히 <클래식>이란 시나리오가 내 손에 들어와서, 태어나 처음 오디션이란 걸 보고 <클래식>으로 얼굴을 알리면서 연기자의 길을 걷게 됐으니까.

그럼 그때 본격적인 연기자 준비를 했던 건 아니었나 보다?
모델 활동 하면서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모델 활동을 좀 하다가 군대를 갖다 와서 일단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뭔가 더 겪어본 다음에 배우를 해야겠단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군대를 빨리 가려고 했었던 거고.

처음 카메라 대면할 때 어땠나?
진짜 완전 쫄았다. (웃음) 일단 내가 연극영화과 출신도 아닌 경영학과 출신이니 카메라를 경험한 적도 없었고, 그 당시엔 DVD같은 것도 없어서 영화 촬영 현장을 미리 접해볼 기회도 없었고, 일단 영화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전혀 몰랐다. 카메라가 어떻게, 무슨 렌즈가 어디를 얼마나 찍는지도 몰랐고. 그래서 난 무조건 전신이 다 나온다고 생각했다. 클로즈업이든 바스트건 상관없이. 그래서 전신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긴장한 상태에서 촬영했다. 종종 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감독님한테 혼나는 경우 있잖아. 그래서 난 혹시나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더욱 노심초사 긴장했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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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함께 출연했던 조승우 씨가 많은 조언을 해주지 않던가?
그때 승우 형이 사소한 것들이지만 누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지금도 굉장히 헷갈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팁을 많이 줬다. 예를 들면 이렇게 대면하고 있는 씬에서 카메라가 날 찍고 있을 때의 시선 처리 같은 거, 그 사람이 카메라 오른쪽에 있으면 그 사람의 오른쪽 눈을 보고 이야기하는 게 좋다라는. 그리고 내가 감정이 심어져 있는 대사를 할 땐 승우형이 눈을 감아줬다. 자신의 눈빛을 보고 연기하는 배우가 혼선을 갖거나 시선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물론 대사는 제대로 쳐주지만 눈은 감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상대배우를 배려하는 어떤 방법도 배웠다. 그때그때마다 조금씩 팁을 주고 가는 거지.

별 거 아닌 듯 하지만 실속 있는 조언들이다. 그런데 배우이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꿈은 없었나?
아마 배우가 아니었다면 회계사나 세무사 쪽을 공부하고 있었겠지. 전공이 그 쪽이니까. 아니면 내가 약간 미술 쪽에 관심이 있어서 인테리어를 공부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원래는 미대를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내가 머리 속에서 구상한 걸 꺼내서 실물화하는 작업인데 왜 정물화 시험을 봐야 하는지 그 당시엔 전혀 이해를 못했다. (웃음) 물론 기본적인 미술 감각을 테스트하는 것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 땐 공감이 안 갔던 거지. 왜 데생을 하고, 왜 아그리파상을 그려야 하는지. 그래서 사업가의 꿈을 안고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렇다면 배우라는 길에 들어선 계기는 어디서 시작됐다고 생각하나?
중학교 때부터 학예회나 체육대회, 성당 발표회 같은 데 나가서 가수들 흉내 내면서 춤추고 노래하고, 그런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평소엔 얌전하다가 그럴 때만 그렇게 되더라. 그런 잠재된 끼가 있었나 보다.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막연하게 연예인이 되겠다는, 말 그대로 연기자가 아니라 연예인이 되고 싶단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연극영화과가 있는 예고에 시험을 봤다가 떨어졌다. 결국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 땐 아직 어리니까 대학교가서 해봐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서 친구들과 적당히 운동하면서 놀고, 적당히 공부해서 지금 대학에 입학했지. 한편으론 대학교 가면 나 스스로도 무언가 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집에서도 약간 관대해질 것이라 생각했고.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이창동 감독님의 <초록물고기>를 우연히 집에서 혼자 봤는데 너무 재미있게 봤다. 특히 한석규 선배님 연기에 감탄해서 마지막엔 펑펑 울 정도였지. 막연하게 연예인이 되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진지하게 바뀌는 계기였던 것 같다. 진짜 저렇게 한번 되보고 싶다는 생각을 지닐 수 있었던 계기. 그때부터 연기자라는 직업을 새롭게 인식했고 그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집에서 관대해 질 것이란 기대감은 그 당시 그런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요즘은 내가 활동하니까 부모님께서 종종 웃으면서 농담도 하시는데 ‘우리 집안에 그런 애가 한 명 나올 때가 되긴 했다.’란 말씀도 하셨다. (웃음) 사실 아버지께서도 키가 크시고 얼굴은 나보다 더 작다. 우리 집안 체형들이 다 길쭉길쭉한 편이라, 옛날부터 할아버지도 배우 하란 말을 들으셨단다. 그런데 그 당시는 ‘딴따라’라고 부르면서 사회적인 인식이 별로 안 좋았던 시절이라 생각도 못했었다고 한다. 또 우리 집안이 대대로 공무원 집안이다. 아버지께서도 공무원이시고. 그렇다고 집안에서 내가 이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땐 반대는 안 했다. 일단 부모님께서 내가 어렸을 때부터 터치는 잘 안 하시는 편이었다. 오히려 그 역할은 우리 집에서 다니던 성당에서 정신적으로 맡아준 거 같다. 지금 형이나 나나 부모님께서 맞벌이하실 때도 비뚤어지지 않고 자기 할일 잘 했던 게 성당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님께서는 우리한테 무언가를 던져서 맡겨주시면 그냥 지켜보신다. 그냥 지켜보시다가 크게 엇나갈 것 같으면 한마디 해주시는 정도. 그런데 정말 내가 나중에 가정을 갖게 되면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버지의 교육 철학은 굉장히 좋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지금은 완전한 내 서포터시지. 아주 훌륭한 홍보 대사다. (웃음)

유전자의 영향인가.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곱게 자란 느낌이다. (웃음) 반듯한 느낌이기도 하고. 그런 이야기 평소에 듣지 않나?
반듯해 보이는 건 우리 형이 좀 더 그렇다. 난 좀 모자람 없이 넉넉하게, 부유하게 자랐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종종 있다. 사실 겉보기만 그렇고 부모님들께서 키우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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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오해가 캐릭터에도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그걸 올 해 들어서 2번에 걸쳐서 깬 셈이고. 그리고 아닐 것 같은 사람이 그럴 때 충격은 2배가 된다는 점에서 그 2번의 연기는 효과적이었다. 동시에 이는 본인에게 연기의 영역을 더욱 넓혀준 계기가 됐을 법하다. 그런데 평소에 그런 연기적 변신에 대한 욕구가 없었나?
<야수>의 권상우 씨처럼 남자답게 멋있고 강인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역할이 굉장히 하고 싶고 부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하면 관객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서 늘 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지. 그런데 지금도 그런 강인한 역할을 연기하기엔 내가 좀 어리단 생각이 든다. 아직은 겉으로 풍기는 이미지도 남자다움보단 소년스러움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걸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도전을 못 했던 것 같다.

어쩌면 <두사람이다>이 그런 의미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충족시켜주지 않았을까? 사실 <두사람이다>의 반전은 이야기보단 배우의 이미지가 깨진다는 점에서의 충격이 더 와닿았다.
내가 이 역할을 선택한 이유는 도전과제가 있는 역할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초, 중반부와 후반부에 달라지는 2가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그것도 하나의 이유였던 것 같다. 한 작품 안에서 2가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강인한 역할을 했다면 너무 부담스러웠을 거다. 그런데 중간에 늘 하던 역할이 섞여있어서 조금은 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예전에 <혼자가 아니야>란 시트콤에서도 은근히 웃겼던 기억이 난다. <두사람이다>를 통해서 처음으로 공포 연기를 보여줬는데 그런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준 만큼 새롭게 뭔가 해보고 싶다는 목표가 생길 법도 하다.
남을 웃겨도 보고, 울려도 봤는데 이젠 <두사람이다>를 통해서 공포감까지 줬다. 그게 배우가 해야 할 일인 거 같다. 근데 내가 남들을 진짜 제대로 울려 본 적은 없었다. 물론 우는 것도 마냥 슬픈 게 있고, 혹은 연민의 정으로 울 수 있는 거지만. 그래서 나중엔 좀 제대로 울려줄 수 있는 그런 역할도 해보고 싶다.

울리고 싶다고 하니 여자 많이 울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나 보다.
물론 아니지! (웃음)

농담이고, 그런데 혹시 싫어하는 사람과 잘 만날 수 있는 편인가?
난 싫어하는 사람과 안면 씻고 정색하는 성격은 못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언행이나 태도가 맘에 안 들어도 같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옆에서 계속 말해도 난 그냥 ‘그래. 넌 그래라.’란 식으로 그냥 신경 끄고, 그 사람을 위해서 뭘 해 주거나, 정을 주진 않는 거지. 그러니까 다 받아주긴 하는데 선을 정확히 그어놓는다. 친해지려고 안 하는 편이랄까. 그래도 좀 친해진 사람하고는 장난 아니게 친해지는 편이고.

아무래도 <두사람이다>에서 연기한 캐릭터가 증오를 숨긴 인물이기 때문에 본인은 어떤 사람일까 싶었다.
내가 AB형이라서 그런지, (웃음) 내 감정을 숨기는 건 잘한다. 많이 싫어도 싫은 내색 잘 안하고, 많이 기뻐도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내 사람들 사이에선 많이 표현하지만, 정말 아닌 사람들 앞에선 적당히 하고. 근데 정말 키까지 큰데 그래 버리니까 싱겁다고들 하지. 그런 모습을 본 사람들이. 싱거운 놈이라고.

외모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아까 말한 반듯한 청년 이미지 때문에. (웃음) 그런데 얼마 전, 모 TV프로에서 스스로 텔레마케터를 했다고 고백했다던데.
그게 모델 활동 시작할 무렵, 그러니까 2001년도 쯤에 스키를 장만하고 싶어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텔레마케터도 해보고, 아파트 공사 현장에 보일러 설치하는 것도 해보고, 아르바이트 많이 했다. 커피숍에서 알바도 했고, 이것저것 많이 했다.

커피숍 다닐 때 고정 팬 확보 좀 되지 않았을까? (웃음)
사실 그 때부터 조짐이 보였던 거 같다. (웃음) 나이 많은 누나들 있잖아, 그 당시에 내가 대학교 1~2학년 때였는데, 3~4학년 정도 되는 그런 누나들이 종종 쪽지도 주고. (웃음)

갑자기 <좋지 아니한가>가 떠오르는데. (웃음) 어쨌든 올 해 예년에 비해 많은 활동 중이다. 나름대로 얻은 것도 많을 것 같은데.
가장 좋았던 건 사람들을 많이 얻었다는 것. <키드갱>을 통해 손창민 선배님이란 대배우와 어울리면서 함께 웃고, 힘들 게 촬영했던 것만으로도 고맙고 그런 기억들이 아마 평생 남을 것 같다. 물론 건달이 좋은 이미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그전에 연기한 지극히 착해고 로맨틱한 남자들보단 훨씬 인간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칼날이란 역할에 굉장히 많이 동화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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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도 직접 돌보고.
아기도 좋아하는 편인데, 예준이가 너무 예뻤다.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다들 너무 예뻐했지. 아기가 울어야 할 때 울고, 웃어야 할 때 웃고 심지어 심각한 표정까지 지어버리니까 다들 감탄했지. 나도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

약간 이른 질문일지 모르지만 미래의 가족 계획 같은 건 없나?
난 결혼을 일찍 하고 싶었다. 사실 내 목표는 28살에 결혼 하는 거였다. 사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가장 왕성할 때가 이십 대 후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아이를 가져서 그런 가정 안에서 내 생각들을 정리하고 뭔가 안정된 자세로 매진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지. 우리 아버지께서 스물 여덟에 장가를 가셨다. 공무원 임용고시 붙자마자 장가를 가셨는데 장가를 일찍 가셔서 형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 아니다. 근데 그게 너무 보기 좋았다. 한편으론 아버지를 닮고 싶단 생각이 많아서 그러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젠 늦었지.

<두사람이다>에서 ‘찌르는 사람이 있으면 찔리는 사람이 있다’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본인은 누굴 찌르는 편인가, 누군가에게 찔리는 편인가?
사람들이 보통 이기적인 거 같다. 그래서 찔리는 건 아는데 찌르는 걸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자기도 모르게 누구를 찌르긴 찌른 것 같은데, 자기 자신은 남으로부터 찔린 것만 기억하고자 하는 심리가 있지 않을까. 나도 그 대사를 보면서 살아가면서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찌른 경우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싶더라. 친구들과 어울리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말실수를 해서 나도 모르게 상처를 주는 순간이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들을 하니까 좀 더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공인이기도 하니까.

관계에 대한 생각을 한번쯤은 하게 되는 영화인 것 같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소중한 두 사람은 누구인가? 혹은 자신이 배우가 되는데 가장 기여한 두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 그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마 부지부동이었을 거다. 배우가 된 것도 모두 그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집안에 대한 걱정이나 고민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할 수 있게 환경을 잘 만들어준 것도 부모님 덕분이니까. 언젠가 아니, 언젠가 라기 보단 이건 계속 갚아나가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작게든, 크게든.

이제 첫 영화로부터 5년이 지났다. 그 동안에 출연한 영화들이 쌓였는데, 그 중 자신이 배우가 됐음을 실감한 작품이 뭔가?
내가 처음으로 배우를 하고 있긴 있나 보다 했던 게 <극장전>이었다. 그 전까진 연예인이란 타이틀이 어울렸다면, <극장전>덕분에 홍상수 감독님과 작업하고 나니 영화계에 계시는 분들이 배우라는 타이틀을 걸어주는 것 같더라. 감독님께서 날 믿고 캐스팅해주신 덕분이고 그 덕에 생애 첫 영화제가 칸 영화제가 되기도 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배우라는 타이틀을 걸어준 건, <극장전> 그리고 홍상수 감독님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엄청난 인연이자 행운이다. 그렇다면 홍상수 감독님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을 법도 한데.
나도 그게 의아했다. 왜 나일까? 그리고 홍상수 감독님은 예쁘거나 잘 생긴 배우조차 일상적으로 만들어서 표현하고, 그로부터 어떤 독특한 향을 느끼게 하는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키만 멀대 같이 크고 어린 날 뭘 보고 캐스팅하시나 생각했다. 촬영을 하는 중간중간에도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촬영은 정말 재미있었고 그러다 보니까 결과물에 대해서 궁금증도 생기고 기대감을 갖게 됐다. 그리고 후에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 이래서 날 캐스팅 하셨구나 싶더라. 키 크고 트렌디한 느낌의 이기우를 옆집 수험생 같은 느낌으로 완전히 탈바꿈 시켜 주셨다.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차근차근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느낌이다.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영역을 개척하는 듯한데, 앞으로 자신의 타이틀을 걸고 싶은 욕심은 없나?
시기라는 게 있는 것 같다. 내가 10편 가량의 영화를 하면서 현장에서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나 인간관계를 맺는 이런 것들도 다 시기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처음은 호기심에서 출발하고, 중간은 알아가는 재미였지만 이젠 배우로서 너무 당연하고, 반드시 해야 되는 과정이 된 것 같다. 그리고 그걸 깨닫게 된 순간부터 난 한 영화의 주인공이 될 자격도 갖추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쯤 그걸 하면 참 좋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다. 시기적으로 볼 때 10편 정도가 적은 편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한두 편의 영화로 확 뜨는 스타가 되기보단 작게나마 조금씩 덧댄 이미지를 보여주는 게 내 계획이었거든. 조금씩은 계획대로 되가는 거 같다. 그래서 이젠 주연에 대한 욕심도 조금 생긴다.

혹시 정말 해보고 싶은 역할이나 함께 작업하고 싶은 감독이 있나?
예전에 <극장전>할 때, 이십 대 중반에도 종종 이야기했었지만, 군대 갔다 오고 서른 넘어서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 한 번 더 출연해보고 싶단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리고 지금 원래 내가 촬영에 들어갈 영화가 있는데, 차승원 선배님과 한석규 선배님이 출연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작품이다. <키드갱>의 칼날이 좀 진중한 역할이었다면, 거기선 좀 껄렁껄렁한 역할이다. 그런 역할을 지금 내 나이일 때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처음 데뷔했을 때가 23살이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서른 되기까지 3년 남았다. 서른 되기 전까지 이루고 싶은 목표 같은 건 없나?
벌써 그렇게 됐다. 생각도 못했는데. (웃음) 배우로서 영화를 만드는 분들이나 관객들한테 영화인이라는 것을 각인시켰으면 좋겠다. 이기우는 영화를 계속 할 사람이란 확신을 주거나 영화를 계속 해줬으면 좋겠단 바람이 남을 수 있는 배우. 사실 그건 서른 살이 아니라 마흔 살, 쉰 살까지 가지고 가야 할 목표인 거 같다. 끊임없이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거니까, 이기우에 대한 수요를 느끼게 할 그런 작품들을 많이 하고 싶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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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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