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inter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민선 인터뷰  (0) 2008.11.19
이완 인터뷰  (0) 2008.11.18
김혜수 인터뷰  (2) 2008.10.01
전도연 인터뷰  (0) 2008.09.24
장훈 감독 인터뷰  (0) 2008.09.20
Posted by 민용준
,

전도연 인터뷰

interview 2008. 9. 24. 12:51
사용자 삽입 이미지

'inter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윤기 감독 인터뷰  (0) 2008.10.10
김혜수 인터뷰  (2) 2008.10.01
장훈 감독 인터뷰  (0) 2008.09.20
류승완 감독 인터뷰  (4) 2008.09.08
이상은 인터뷰  (0) 2008.09.01
Posted by 민용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 ‘멋진 하루’를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멋진 하루>는 우연과 필연이 겹친 두 남녀의 만남이 이뤄내는 하루 동안의 서사극이다. 오래 전 자신의 연인이었던 병운(하정우)에게 역시 오래 전 빌려줬던 350만원을 돌려받기 위해 희수(전도연)가 찾아간다는 사연은 단순하지만 평범하지 않다. 역시나 사연의 진행도 번거롭다. 350만원은 고사하고 자신의 거처조차 없는 변변찮은 신세인 병운은 자신에게서 빚을 받으려면 자신과 동행해서 빚을 융통하러 다녀야 한다고 희수에게 제안한다. 두 사람의 동행과 함께 본격적인 <멋진 하루>가 시작된다. <멋진 하루>는 전사와 후일담이 궁금한 쌍방향의 호기심을 추적하는 로드무비이자 경계가 희미한 로맨스 영화다.


 

Posted by 민용준
,

김윤석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6:48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추격자>에 대한 감상이 궁금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리얼하게 나왔다는 걸 알겠더라. 특히 바짝바짝 붙여 찍은 클로즈업이 많은데 그런 것들이 우리 영화의 색깔을 잘 보여준다. 큰 화면에서 보니까 굉장히 세고 라이브한 날것의 느낌이 잘나와서 좋았다.

시사회 후 반응이 좋다. 평단은 물론이고 시사회를 본 일반 관객들도 호평이 많더라. 고무되지 않나?
아직은 그런 걸 편안하게 못 본다. 왜냐면 개봉을 하지 않았으니까 아직까진 긴장상태가 남아있기 때문에. 물론 이제 처음으로 약간 긴장이 풀리고 짜릿한 느낌이 왔던 건 기자시사 때였다. 기자간담회를 하면 기자분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떤 기운들이 느껴진다. 근데 그때 이 양반들이 제법 뿌듯한 걸 본 것 같아하는 느낌이 들어서,(웃음) 일단 합격이 됐구나. 일단 기분 좋구나. 관심들을 갖네, 싶었지. 그리고 VIP시사 때 동료들이 너무 좋아해주고.

최근 4편의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로 호평을 얻었다.
내가 작품 복이 좋은가 보다. 배우 한 명이 온전히 연기를 잘한다 해서 연기 잘한다는 말이 안 나오거든. <천하장사 마돈나>나 <타짜>나 <즐거운 인생>이나, 영화적인 퀄리티가 있고 분명한 내용이 있는 영화고 거기서 내가 맡은 캐릭터의 몫을 다했을 때, 온전히 연기력에 대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난 굉장히 운이 좋았지. 앞으로의 길이 부담스럽다거나, 사실 뭐, 난 이런 건 별로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나이가 30대도 아니고, 이미 40인데 생각해봤자 별 수도 없고.(웃음) 그냥 계속 주어지는 대로, 나에게 다가오는 좋은 배역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이 다시 생긴다면 좋을 것 같다.

부상이 있진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과감한 액션이 많았다. 특히 지금까지의 출연작 중 가장 격렬한 작품이기도 했고.
우리가 사실 실제로 다친 건 한번인데, (하)정우가 뛰다가 미끄러진 씬 있지. 그 씬은 실제로 미끄러진 거다. 그래서 정우가 찰과상 입은 거 외에는 한번도 다친 적 없다. 그래서 우리가 환상의 호흡이라고 사람들이 그러더라. 찍는 사람들도 보면서 놀라는 게, 우리가 싸우는 장면 봤겠지만 쉽게 말해서 사실 막싸움이잖아. 이건 완벽한 합을 짜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대충 30%정도의 큰 너비만 짜놓고 나머지는 즉흥이었거든. 거기서 이제 감독의 주문은, 정말 리얼하게 싸워달라. 근데 한군데도 안 다친 건 두 배우가 초긴장상태에서도 상대방을 배려하고 신뢰했다는 거지. 목을 조를 때도 보는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조르는 것처럼 보여도 항상 여지를 남겨서 이 친구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숨통을 튀어주고. 계속 그걸 반복했는데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신뢰감만으로 게임 끝냈지. 일사천리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캐릭터는 상극이지만 배우들끼리는 호흡이 상당히 중요했다. 특히 서로 상대 캐릭터의 비중을 잘 보좌해주는 것도 중요했을 것 같은데 그런 면에 있어서는 하정우의 연기가 상당한 도움이 됐을 법하다.
하정우는 진짜 120% 이상 잘해줬다. 후배지만 정말 뛰어난 감수성의 소유자 아닌가. 이 친구는 매 순간 가식적인 연기를 정말 한 순간도 하지 않았다. 그 힘은 하정우라는 인간이 가진 어떤 정서의 힘일 것 같은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대단하지. 사실 난 옛날부터 하정우란 배우를 정말 좋아했다. 하정우가 찍었던 <용서받지 못한 자>와 <시간>도 보면서 한국남자배우 중에 저렇게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누군가 싶었거든. 그런데 지영민으로 캐스팅됐다는 얘길 듣고 속으로, 잘됐다! 만나고 싶었는데, 했지.(웃음) 그런데 하정우도 역시나 윤종빈 감독하고 사석에서 김윤석 선배님과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하더라. 서로 잘 됐지.

신인 감독과의 작업이 부담스럽진 않았나?
일단 우린 감독을 만나기 전에 시나리오를 먼저 만난다. 난 일단 시나리오에 합격점을 줬다. 스토리가 굉장히 특이하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지문도 별로 없고 대사도 간결한데 그 사이의 여백에서 굉장한 게 보이더라. 그건 이 시나리오가 하루 아침에 완성된 게 아니라 정말 썼다 지웠다를 수십 번 반복한 정성스러운 시나리오라는 거, 이건 휴양지에 앉아서 쓴 게 아니라 정말 발로 뛰면서 오랜 기간을 통해서 만들어진 숙성된 시나리오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감독할 사람을, 이 시나리오를 쓴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만나봤더니 역시나 한 작품을 임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의 모습이 느껴졌다. 신인감독답지 않은 소신과 직관력, 밀고 나갈 수 있는 힘, 그게 다 느껴졌다. 이 사람, 이 친구한테. 진짜 해보고 싶었지. 그래서 같이 해보자고 결심했고. 사실 <추격자>를 결정한 건 조금 일찍이었다. <즐거운 인생>을 하기 전에, 2006년도 12월 달에 이미 만나서 출연하기로 했으니까. 내가 잠깐 갖다 올 테니까 기다려라,(웃음) 그랬더니, 가능하다. 어차피 우리는 8월 달부터 들어가니까, 이러더라. 그래서 3월 달부터 5월 달까지 <즐거운 인생>을 찍고 돌아와서 <추격자>를 찍었지.

촬영에 난관이 많았을 거 같다. 대부분 밤 촬영이었고, 비 내리는 장면도 많았고. 게다가 대부분 인적이 있는 실제 공간을 이용했고.
로케이션 촬영이 많았지. 그래서 거의 야전이었다, 야전.(웃음) 사람들은 아마 밤마다 나타나서 저렇게 우리를 괴롭히는 저들은 누구인가, 싶었겠지.(웃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지만 고마운 에피소드도 많다. 어떤 분들은 밤에 추우니까 따뜻한 차를 보온병에 끓여와서 나눠먹으라고 주시기도 했다. 물론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친 점도 있었고. 하지만 재미있었다.

영화에 대한 신뢰감이 돈독했기 때문에 수많은 고난을 감수한 것이 아닐까.
당연하지. 그렇게 피곤하게 달리기를 하고 나서도 그걸 붙여놓은 현장 편집본을 보면서, 잘 나오고 있다. 이 느낌이야, 이렇게 되니까. 고생했는데 막상 나오는 게 이상하면 그 때부터 바로 브레이크가 들어가는데,(웃음) 찍을수록 더 신뢰감이 생기고 나중엔 안돼, 한번 더 가야 돼, 서로 이렇게 되고, 이렇게 해서 만든 영화다. 이 영화가.

아까 말했던 하정우의 미끄러지는 장면은 <추격자>에서 명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우리도 보면서 놀랐으니까.(웃음)

특히 본인은 뒤에서 전력을 다해 쫓아가는 중이었을 텐데, 많이 놀랐겠다.(웃음)
움찔하고 놀라서 뛰다가 섰다. 어떡하지, NG인가, 생각하는데 벌떡 일어나길래 다시 뛰었지.

그런데 액션에서도 애드립이 있었나?
항상 120%준비해놓고 허물어서 그 허문데다가 즉흥을 집어넣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허설이 굉장히 남았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배우들의 본능이 상당히 중요시됐을 것 같다.
그걸 요구했지. 그래야지만 처음에 이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본 생날것의 느낌을 담아낼 수 있다고 느껴서 우리도 동의했다. 즉흥이 주는 순간적인 부딪힘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파장을 안 놓치려고 노력했었다. 두 배우 모두다.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집중력 뿐만 아니라 끈기와 인내, 체력.(웃음)

매일같이 에너지를 쏟아내고 집으로 돌아갔겠다.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있지.

그렇게 지쳐서 들어오면 부인께서 걱정하시지 않나.
밤새도록 작업하고 아침에 들어가면 일단 내방에 잠자리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낮에 진공청소기를 못 돌린다.(웃음) 그 소리 때문에 깰까봐.

갑자기 <즐거운 인생>의 성욱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고단함이야말로 김윤석이란 배우에겐 ‘즐거운 인생’이겠다.
그럼. 그리고 뭐 나만 고생했나.(웃음) 우리가 뛰는 걸 보고 사람들은 정말 저 배우들 고생했다고만 하지만 그걸 담아내는 사람들은 세배로 더 고생한다. 조명이야 뭐야 그 무거운 걸 들고, 그러니 우리가 힘들다는 말을 못하지. 정말 걔들 뛰는 거 보면 미치겠는데, <추격자>는 스텝의 승리다.

기교보단 뚝심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화려한 기교 이런 건,(손을 휘저으며) 결국 이 영화를 버티게 하는 건 아날로그적인 센 날것의 힘, 끈기, 믿음, 이런 거였다.

일단 김윤석이라는 배우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그 이유가 <타짜>가 될 가능성이 많다.
<타짜>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덕분이기도 하지.

덕분에 악역 이미지로 많이 어필됐는데, 본인이 매력을 느끼는 악인의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인간은 다층적인 동물이잖아. 악역이라고 해서 골빈 짓만 하는 건 매력이 없지.(웃음) 나름대로의 자기 기준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정면으로 부딪혀서 자신만의 노하우로 이겨나가는 방법, 그러나 사람들이 봤을 땐 그것이 결국 좋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정도. 그 정도의 다양한 비하인드가 깔릴 수 있는 정도가 돼야 매력 있는 악역이지.

한편으로 악역을 선호하는 연기자가 아닌가라는 오해를 형성시킬 수도 있을 거 같다.
우리나라 시나리오 작가들이 악인은 굉장히 잘 묘사한다. 반대로 선인은 희한하게도 어정쩡하다. 그러니 아무래도 악인에 더 눈길이 가지. 디테일한 묘사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싫어하는 인물은 그렇게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 봐. 그 이유가 뭔가 분석해본 결과, 소위 악인의 요건이 치사하고 이기적이고 야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본데 난 그게 넌센스라고 본다. 현대사회에서 안 그런 사람들이 어디 있나? 그런 건 악인이란 기준에서 빼야 된다. 모든 사람이 졸렬하고 치사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이걸 악인이라 적용했기 때문에 반대로 선인의 기준은 이런 게 없어야 되는 거다. 야비하고 치사하고 졸렬한 게 없어야 된다. 그걸 빼니 재미가 하나도 없어지는 거다. 난 현실성 있는, 땅바닥에 발을 딛고 사는 이 시대의 인물에 더 매력이 간다. 그러다 보니 선택하는 게 자연스럽게 소위 악역이라 지칭하는 과를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지.

확실히 선한 캐릭터보단 악한 캐릭터들이 매력을 주는 경우가 참 많다.
리얼리티가 있잖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추격자>의 대립구도는 선과 악이 아니라 악과 악이다. 최악과 차악의 싸움이다.
우리식대로 쉽게 얘기하면 선을 넘지 않은 자와 선을 넘은 자의 대결이지. 시나리오를 보고 엄중호가 후반에 가서 도덕적인 성찰을 나타내거나 정의로운 인물로 변화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찍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단지 선을 넘지 않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양심과 인간의 생명이란 존엄성에 대해서만큼은 포기하지 않은 놈이다. 그리고 지영민은 뛰어넘은 놈이고. 일단 이렇게만 놓고 가자, 그 대신에 2시간 동안 길을 가며 만나는 순간순간마다 발생하는 최소한의 코드를 모아보자, 거기서 이놈이 만나서 어떻게 변하는가,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가, 이렇게 열어놓고 갔다.

결국 엄중호의 심리적 변화가 상당히 중요한 관건이었다.
그 부분은 관객이 <추격자>와 의사 소통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부분이 억지스럽다거나 감동을 날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엄중호가 개과천선의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감정선을 유지하면서 미묘하게 변하는 심리를 표출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그냥 그것도 순서 없이 찍었잖아. 여건상 그렇게 될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5개월 동안 정말 끊임없이 대화했다. 대화를 안 할 수가 없다. 내 첫 촬영분량이 십자가 바라보는 부분이었다니까, 첫 테이크를 가는 게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이잖아. 아무 일도 겪지 않고 그걸 찍으라면서 눈빛으로 담아내라고 하니,(웃음) 그걸 하기 위해서 계속 대화하는 거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만약에 이해가 안 가면 두 번, 세 번 찍어보자. 그럼 마지막에 편집하면서 퍼즐을 붙일 때 맞는 조각을 선택하면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시간이 안 걸릴 수가 없지. 5개월 동안, 85회 차 찍었다. 블록버스터야.(웃음) 제작비가 블록버스터는 아니고.

엄중호는 특정한 악인의 표상이라기보단 사회에 만연된 전형적인 악인이다. 하지만 지영민과 같은 최악의 존재가 그런 차악에 기생해서 은둔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악의 본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악의 존재는 궁금하지 않았다. 물론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인간의 역사에 수많은 연쇄살인범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얘들이 왜 이랬는지 누구 한 명도 나서서 밝혀본 적이 없고 늘 실패한다. 싸이코패스라는 게 원래 유전자가 이렇다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게 없잖아. 보통 이론 같은 건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는 거지. 문제는 이런 본능을 행동으로 옮겨서 실제로 해내는, 살인을 저지르는 걸 100%방치했던 이 시스템에 대한 문제에 <추격자>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엄중호가 사냥개라면 지영민은 하이에나다. 숙련된 사냥개의 욕망과 방치된 하이에나의 욕망은 본능적이지만 근원적인 기질이 다르다.
두 사람 중 사회적인 때가 누가 더 많이 묻었냐고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엄중호를 찍겠지. 지영민은 때가 안 묻어서 더 무서운 거다.

마치 나쁘다는 걸 모르는 어린아이의 잔인함처럼.
내 칼은 좀 무뎌졌다. 오래 써서. 하지만 얘는 너무나 신선한 칼인 거야.(웃음) 무섭지, 그래서.

혹시 본인이 지영민을 연기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처음에 내가 그랬다. 둘 중 아무거나 해도 괜찮다고. 난 내 식대로 표현했겠지. 정우와는 다르게.

만약 본인이 연기했다면 지금과 무엇이 달랐을까.
글쎄, 일단 하정우란 사람이 연기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긴 못 할 거 같다. 만약에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역시 이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래 버리면 그건 실례잖아, 실례.(웃음)

오래 전에 연기를 한번 접으려 했다가 동료들의 권유로 다시 재개했다고 들었다. 그 뒤로 혹시 다시 연기를 그만 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나?
없다. 한번 갔다 왔기 때문에. 막차다. 막차. 막차를 탔기 때문에 하차를 못해.(웃음) 배운 도둑질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젠.

지금은 영화에 주력하지만 사실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했고 거기서 오랜 경험을 축적했다. 영화의 중심에 선다는 것과 연극의 중심에 선다는 것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연극과 영화의 공통점은 종합예술이라는 거, 그 속에서 연기자라는 건 부품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뭔가의 중심에 서본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굳이 그 역할을 해나가면서 연극과 영화의 장르적인 어떤 흑백을 마땅히 얘기해야 한다면 연극은 정말 하고자 하는 얘기가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만의 즉흥적인 무대 위 상황에서 벌어지고 난 그 무대 위에 서 있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한 연습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영화에는 연습이 없지만 연극에는 연습이란 것이 있고 그걸 통해 계속 본인의 연구를 거듭해야 한다. 왜냐면 희곡이 내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캐릭터도 캐릭터지만 개인이 작품전체의 메시지 안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이 연극에서는 굉장히 크다. 영화도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보다 훨씬 크지. 연극은 소위 슈퍼아줌마, 길가는 사람1 이런 게 없으니까. 반드시 필요한 몇몇의 인물들이 적확한 역할을 가지고 등장하고 거기서 다른 뭔가를 해버리면 균형이 흐트러지지. 그래서 연극이 잘 통제된 예술이라면 영화는 그런 면에서 더 열려있는 예술이고, 그런 부분에서 연기자가 임하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렇다면 영화보다 연기자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건 연극 쪽일까?
난 둘 다 똑 같은 비중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영화는 뼈 속까지 그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게 있다. 눈빛 하나로 이 인물이 인생에서 느끼는 허탈함을, 슬픔을, 공허함을 표현해야 할 때 클로즈업이 들어오잖아. 연극은 그런 게 없지. 연극은 말로서 표현하지. 표현하는 방식에서 확연하게 구분이 가지만 그 나름대로 둘 다 굉장한 집중을 요구하는 거다.

연극 연출을 몇 번 했고, 대학시절에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했었다. 차후 연출에 대한 계획은 없나.
연출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쉬고 있으면 안 된다. 이렇게 쉬고 있으면 못 따라간다. 끊임없이 연출을 하고 준비를 해야 된다. 굉장히 많은 지식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이 연출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연출을 놓은 게 몇 년이 되니까 다시 하려면 공백의 한 다섯 배 시간을 할애해야 된다. 연출은 세상에 대한 비전을 얘기해야 되고 세상에 대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여야 하니까 공부할 게 너무 많다. 책 다 읽어야 돼.(웃음)

배우가 좋은 연출자를 만나는 것도 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나도 운이 좋은 편이고.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배우에게 기회도 따를 리가 만무하다. 나름대로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는 요즘은 과거의 오랜 경험들이 좋은 자산이 됐음을 스스로 실감할 것 같다.
연극을 하면서 작품 분석에 매달렸다. 어떤 연극은 3시간 40분 공연하기 위해서 한 6개월 동안 연습한 적도 있었는데 그 6개월 중에 2개월을 내내 작품 분석에 바쳤다. 훈련극의 번역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원본을 가져와 아예 다시 번역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작품 분석을 통해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각이 나한테 굉장한 도움이 됐다는 걸 느꼈지. 다른 건 몰라도 연기를 연극으로 시작했다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탄탄하게 나를 받쳐주는 좋은 계기가 됐으니까.

무대에서 활동할 당시 송강호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들었다. 송강호가 실력을 인정받고 주목 받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본인에게 좋은 자극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중에 가는 자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돌다리를 두드려볼 수 있는 여유가 좀 있다는 거지.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지만 정말 그래. 저랬을 때는 저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라는 걸 (송)강호를 보고 느끼는 거지. (웃음)

함께 고생한 만큼 동료애가 돈독하겠다.
같이 고생했던 내무반 사람들과 말이 필요 없는 것처럼 그런 경험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는 일단 가까워질 수 밖에 없다. 알고 있으니까. 힘들었을 때의 느낌도 알고 있으니까 서로의 심리상태도 잘 이해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근 연기했던 캐릭터의 골격이 마초였다면 정서는 아버지에 가까웠다고 본다. 그건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내면적인 정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도 추측된다.
맞다. 아버지라는 정서가 난 강하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거다. 남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 나이가 40이니까, 아버지의 모습이 언제나 남아있게 되지.

그건 실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미진이 딸과 밥을 먹는 장면이 있잖아. 아무것도 안 했다. 그저 딱 앉아있었고, 갑시다, 하더니 컷을 하는 거다. 그러더니 (나홍진 감독이) 저기, 선배님. (그래서 내가) 왜요? (그러니까) 아버지 같아요. (그래서) 나 아무것도 안 했잖아, 지금. (그러자) 그런데 아버지 같아요. (이래서) 아니, 내가 딸아이 아빠라는 걸 아니까 그런 거 아냐? (그러니까) 그래서 그런가? 하지만 그런 게 결코 보여선 안됩니다. 그랬던 에피소드가 있다. 그래서 (내가) 알았어. 야박하게 할게. 야박하게, 이랬지. (웃음) 그런데 이 나이 되는 남자와 그 나이 되는 여자애를 함께 세워두면 누가 봐도 피해갈수 없다.

그 장면은 딸에게 밥을 먹이는 아버지처럼 보일 수 밖에 없는 구도였다.
제3자의 시각에서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봐도 아버지가 데리고 온 딸처럼 보이겠지. 남의 딸이라고 상상 못한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 술도 참 많이 마실 것 같다.
당연하지. 우리는 모든 자리가 다 술이다. (웃음) VIP시사회 끝나고 뒤풀이를 커피숍 가서 하겠어? 술 한잔 하면서 얘기해야지.(웃음) 그리고 술 못하면 손해지. 그런 데서 캐스팅 제의가 들어오는데. (웃음)

술을 한번 마시면 어느 정도로 마시는 편인가. 끝을 보나?
우리는 노련하다. 노련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 선에서 딱 정리하지. 왜냐면 과하게 되면 내일은 먹을 수 없잖아. 그러면. (웃음) 이게 생활화되려면 그런 무모한 짓을 하면 안되지. 절제가 있어야지 말이야.(웃음)

최동훈 감독이 <타짜>에서 아귀를 맡긴 건 본인도 의외라고 했었다. 실제로 <범죄의 재구성>에서 이형사 역을 생각해본다면 차라리 유해진이 맡았던 고광렬 역이 더 적합했을 것 같기도 하다.
의외였다. 나는 사실 나한테 그저 짝귀 정도를 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귀를 하라는 거다. 그건 이 사람이 나에게서 뭘 봤다는 이야기거든. 아마 감독들 중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최동훈 감독일 거다. 물론 지금까지는. 나홍진 감독하고 5개월을 그렇게 보냈으니 이제 나홍진 감독도 알지 모르겠지만.(웃음) 어쨌든 이 친구가 그렇게 얘기했다면 뭔가 있다, 나한테 뭔가를 봤다, 이렇게 생각했고 그럼 오케이지. 사실 감독이 배역을 줬을 때 배우가 못해내면 둘 다 슬프잖아. 근데 해냈을 때는 캐스팅한 감독이나 출연한 배우나 둘 다 서로 탄탄해질 수 있는 판단이 되는 거지. 결국 빛나는 만남이 됐다.

<즐거운 인생>은 마치 놀면서 연기하는 느낌이었다.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도 오랜 친구처럼 보였고 여러 가지로 즐거운 추억이었을 것 같다.
난 성욱이란 역할을 굉장히 좋아한다. 힘이 쫙 빠져있는 그런 느낌, 실제 내가 성욱의 그런 상태를 즐기는 편이라서. 성욱이 나보단 더 우울한 편이지만 약간 나른한 듯한, 그런 몸 상태나 정신상태가 나랑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이준익 감독님하고 맨날 놀면서 장난치고.(웃음) 재미있는 작업이었지. 아쉬운 게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인 스스로도 상당히 편안해 보였다.
동료 배우들 중에 어떤 사람은 성욱이가 제일 좋다더라. 자기는 성욱이의 그런 모습이 내가 한 연기 중에서 가장 백미라고 생각한다고. 대중들에게 강렬한 캐릭터로 인식되다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던 계기이기도 했지.

거의 한달 반 만에 베이스를 연마했다고 들었다. 어쩌면 연기보다도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우리 자랑이 아니라, 일단 세 배우가 다들 음감이 있더라. 나 같은 경우도 라이브 연주를 하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란 작품을 계속 해봤기 때문에 악기와 친숙했고. 물론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그 당시 우린 정말 죽었었다.(웃음) 달리기는 그냥 뛰면 되지만 이건 머리를 써야 하기 때문에 사실 진짜 괴로웠지. 솔직히 웃으면서 손가락 다 부러뜨리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진짜 때려부수고 싶더라. 그런 좁은 곳에서 악보를 보면서 베이스를 뎅뎅거리는데 그것도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발전속도가 체감적으로 느껴지는 작업이라 더욱 절실했을 것도 같다. 진전이 안되면 그만큼 답답한 거니까.
딱 보면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고, 누가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 다 드러나는데 빼도 박도 못하지.(웃음)

아무래도 아귀 역할 이후로 인상이 강한 캐릭터 제의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성욱을 선택한 건 사실 의외였다.
그 때 들어왔던 시나리오 중 <즐거운 인생>이 제일 좋았다. 내 맘에 들었지. 물론 그전에 <추격자>를 먼저 선택하긴 했지만.

결국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시나리오인가보다.
일단 시나리오 없이 감독을 먼저 만날 수는 없다. 사실 감독도 나한테 시나리오를 통해서 연애편지를 쓴 거 아닌가. 그 연애편지를 보고 이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한번 해봐도 되겠구나를 생각하지. 결국 시나리오지.

강렬함 속에서도 종종 드러나는 넉살이 유머스럽게 느껴진다. 코미디 연기도 해보고 싶지 않나?
<즐거운 인생>에서 성욱이란 애가 우울하고 어깨에 뭔가 얹혀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성욱이도 사실 말하는 거 보면 웃긴 놈이거든. 난 그 정도만큼의 코미디를 좋아한다. 드라마를 뛰어넘는 코미디는 체질적으로 그렇게 와 닿지가 않는다. 물론 개인적으로 코미디는 좋아한다. 우디 알렌의 영화를 보면 얼마나 웃겨. <브로드웨이를 쏴라>보면 ‘햄릿이 누구야?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인가?’ 이런 대사들이.

위트 있는 코미디를 좋아하나 보다.
그러니까 어떤 만남과 만남이 주는 코미디. 둘 다 옳은 사람이다. 어느 한 사람이 이상한 건 아닌데 여기서 만났기 때문에 웃기는 거, 이런 것들이 재미있지.

상황의 아이러니 같은?
상황이 주는 코미디가 그렇지. 캐릭터가 주는 코미디보단.

지금까지 나름대로 강한 캐릭터를 많이 어필했고 이제 관객들도 점차 이를 인지하게 됐다. 그런데 본인이 지향하는 캐릭터는 뭘까?
난 아까도 얘기했지만 현실감 있는, 발바닥을 땅바닥에, 지금 여기 땅 위에 붙이고 사는 모습이면 된다. 그게 캐릭터를 육화시키는데 있어서 제일 기본적인 첫 번째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현재 연기를 인정받고 있는 영화배우들 중 본인을 포함해서 연극무대 출신이 많다. 무대가 영화의 산실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런데 현재 연극 무대의 환경은 상당히 열악하다. 근본적인 문제가 뭘까?
세계 어디에서도 연극이 혼자 올곧게 클 수 있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다. 그러니까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연극에 국가적인 지원이 어마어마하지. 그 반면에 연극을 그렇게 많이 하면서도 지원이 어마어마하게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어떤 것보다도 연극은 종합예술의 제일 밑바닥, 초석이기 때문에 사회나 국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지원이 받쳐주지 않는 한, 일시적이고 단발적인 금액적 지원은 아무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

장기적인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그건 교육화와도 관계가 있는 거다. 교육적으로 초등학교부터 연극시간을 할애하면서 그런 인구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끊임없이 국가적으로 지원을 해줘야 되는 거다.

과거 열악한 환경에서 연극을 했던 선배로서 지금도 그런 환경에서 연기를 하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정말 본인이 원했던 기회라는 것이 정면으로 왔다고 성급하게 나서버릴 수 있다. 기회가 정말 올 때까지 차근차근 준비하고 매 순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즐겨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걸 했다는 자부심을 잃지 마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비스트)

'inter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인권 인터뷰  (0) 2008.05.31
유지태 감독 인터뷰  (0) 2008.05.31
류승범 인터뷰  (0) 2008.05.31
김성령 인터뷰  (0) 2008.05.31
김강우 인터뷰  (0) 2008.05.31
Posted by 민용준
,

박지아 인터뷰

interview 2008. 5. 30. 15:56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생소하더라.
영화 자체가?

아니, 박지아란 사람이. 내가 연극을 잘 보는 편이 아니기도 하고. <숨> 이전에 김기덕 감독의 영화 두 편에 출연했다는 사실 말곤 확실한 게 없더라.
그래. 내가 생소했겠지. (웃음)

일단 <숨>의 연은 평범한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캐릭터를 이해하는 게 쉽진 않았을 것 같다. 물론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다 그렇지만. 예전에 출연한 <해안선>이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도 그랬듯이.
쉽지가 않았다. 항상 그렇듯이. <숨>은 표면적으로 남편의 바람으로 인해 사건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가 캐릭터를 이해하는 관점은 그보다 깊어질 필요가 있었다. 남편의 바람 때문에 발생한 치정문제로는 납득이 안 되더라. 그래서 과거를 스스로 설정하고 거슬러가야 했다.

캐릭터의 과거를 스스로 가정한 건가?
그런 셈이지. 이 여자에게 분명 결혼 전, 연애기간이나 중매 기간이 있었을 테고 결혼해서 애를 낳는 어느 정도의 세월을 짐작해가는 가정 하에서부터 시작을 했다. 이 여자가 이렇게 된 데에는 남편하고의 결혼 생활, 혹은 그 이전에 남편과는 상관없었을 수도 있는 과거의 기억들, 즉 유년 시절이나 가정사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 같은 것들. 아예 캐릭터의 처음을 설정하고 상상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런 이해를 지니고 있어야 드라마가 엉성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짧은 기간이지만 촬영하는 내내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 캐릭터의 내면까지 다 받아들이고 생각하려고 한 거지. 물론 표현되는 게 쉽진 않으니까 그런 것들이 영화에선 단순히 그저 그렇게 표현됐을 수도 있겠지만, 난 <숨>을 위해서 캐릭터의 이전 상황들을 좀 많이 갖고 가는 것으로 시작해서 촬영에 들어갔던 거다.

<숨>을 보고 나니, 만약 ‘<시간>의 연인이 <숨>의 부부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란 생각을 했다. 그 지독한 사랑이 이런 애증으로 발전했다 생각하면 그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아까 말씀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 같은데 내 상대역인 하정우 씨와 촬영하며 의견을 많이 교환했었다. 하정우 씨 같은 경우는 나보다 시나리오를 먼저 받았었고 시나리오가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봤던 상황이기도 했고.

하정우 씨보다 캐스팅이 늦었나보다.
하정우 씨가 이미 되어있었고 내가 나중에 된 거지. 어쨌든 정우 씨한테 내가 ‘이게 단순히 남편의 바람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여러 가지 추론도 해봤다’고 하면서 의견을 내놓는데 내 생각하고 많이 다르지 않더라. 그런 식으로 그 이전 상황들을 추측했지만 그 부분이 아까 말처럼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어떤 한 사람의 작품이 지난 작품들과 연관을 가지면서 맥락이 이어질 수 있는 것처럼 김기덕 감독님의 영화도 그런 것 같다. <숨>의 부부관계를 놓고 생각해보면 <시간>과 연관 지을 수도 있고, 또 4계절을 묘사하는 걸 보면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그려볼 수도 있고, 또 여자가 추후에 남편의 아내로 복귀하는 양상을 보면 <해안선>이 떠오르는 부분이 없지도 않다. 작품 간에 일부일지라도 연관 지을 수 있는 코드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숨>에서 찰흙 공예 하는 장면 있잖나. 설마 직접 만든 것?
아, 그건 작가분이 만들어 주신 거다.

그래도 나름대로 작품에 손질하는 모습이 나오던데, 원래 취미가 있던 건 아닌가?
촬영 전, 그런 부분에 대한 대비가 필요할 것 같아서 조금 준비를 했다. 다행히 아는 분 중 공방하는 분이 계셔서 어설프지 않으려고 며칠 공방을 다니면서 연습을 하고 간단한 기술을 익혔다. 물론 쉽지가 않더라. 그냥 간단하게 감독님이 써준 시나리오 내에서 내가 따라할 수 있는 걸 배워서 흉내 낸 것뿐이지. 그리고 그런 걸 하려면 손톱을 기르면 안 된다 그래서 손톱도 다 잘랐었다.

일단 김기덕 감독 영화에 세편이나 나왔다. 그리고 세편의 영화에서 비중이 크건 작건 어두운 이미지의 역할을 소화했고. 그런데 이번 <숨>에선..
무슨 말 할지 알겠는데? (웃음)

짐작했겠지만 노래 부른 것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어이없진 않았을까? (웃음)

당황스럽긴 했지. (웃음) 일단 배우한테도 놀랐지만 김기덕 감독 영화에서 이리 발랄한 장면을 본 적이 있었던가 싶어서 놀랍기도 했다. 어쨌든 일단 <숨>을 포함해 이 배우가 기존에 보여주던 이미지와 너무 상반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좀 깬다는 기분? (웃음)
내가 처음에 시나리오 받고 생각한 건 사실 근사한 그림의 4계절을 불러내는 멋진 여배우였다. 봄의 사랑, 여름의 사랑, 가을의 사랑들을 내가 멋지게 장첸에게 선물하는 모습들을 상상하고 준비했었다. 그러니까 시나리오를 봤을 땐 근사하게 4계절을 노래하는 프랑스 여배우 같은 그런 근사한 이미지를 생각하고 자뻑했던 거지. (웃음)

그런데 영화에서는 지독하게 발랄하지 않나? (웃음) 어쩌다가?
감독님 생각에는 그럴 수 있는 여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충분히 따뜻하고 밝은 면이 있고 어설프더라도 누군가에게 애교도 떨 수 있는 여자인데 상황이 그 여자를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그래서 그 상황에서 그 여자가 보여주지 못하는 속내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고. 사실 난 노래만 할 거라 생각하고 노래만 그냥 외워서 와서 감독님한테 ‘노래만 하면 되죠?’하고 물었더니 ‘율동도 해야지’하시더라. (웃음)

율동도 직접 짠 건가?
직접 짠 거다. 점심시간에, 잠시 시간 줘서. 사실 내가 ‘노래도 못하고 율동도 어설픈데 지금 이렇게 급조하듯 하게 되면 굉장히 어색하고 화면에 이상하게 보일 텐데, 그냥 내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처럼 근사하게 분위기 잡고 노래하는 걸로 가면 안 되겠냐’고 제안했었다. 그랬더니 ‘노래 못해도 되고 율동이 어설퍼도 된다. 그냥 그런 마음이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 노래도, 율동도 더 신나게 해라. 네가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따듯한 마음을, 사랑을 보여주면 된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그걸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런 선물을 주고 싶은 사람인데 줄 사람도 표현할 수도 없는 여자의 상황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거지.

준비했던 이미지와 달라서 당황이 많이 됐을 것 같은데.
그것보다 그 장면 찍을 때 장첸이 심각하게 문을 열고 막 들어와서 내가 노래를 시작하니까 못 견디고 막 웃더라. 그래서 애먹었다. (웃음) 어쨌든 감독님 말씀처럼 굳이 근사하게 해야 될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내가 원래 생각했던 부분을 버리는 건 상관없었는데 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초반 작업할 때쯤엔 내가 노래도 잘 못하고 괜히 엉성하게 어설픈 코메디같은 장면이 될 것 같아서 부담이 많이 됐었는데 시사회에서 보니 그냥 애교스러운 정도와 비스무리하게 느껴져서 약간 안심이 됐다. 또 어떤 분들은 김기덕 감독님 영화에 이런 밝은 장면이 거의 없어서 그 점을 좀 예쁘게 봐주신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다행히도 잘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웃음)

어쨌든 그 장면이 개인적으로 꽤 재미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노래는 잘 못하더라. (웃음) 어쨌든 이야기 듣고 보니 노래를 잘 했으면 의도와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 돼 버렸을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든다.
난 잘 한 거 같은데. (웃음) 영화가 그렇게 나와서 어쨌든 다행스럽기도 하고. 감독님께서도 노래를 잘 하는가 못하는가가 보단 노래를 통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부분으로 표현해주길 원하셨던 것 같고. 사실 그 때 일단 나부터 감기까지 걸렸고 현장이 막 급박하게 돌아가서 정신이 없었다.

하긴 서대문 형무소를 가봐서 알지만 바람도 잘 통하는 곳일 텐데. 겨울에 봄옷입고, 여름 옷 입고. 꽤 추웠을 것 같다. 감기를 달고 살았을 것 같은데.
정말 감기에 너무 많이 걸렸다. 콧물이 막 질질 흐를 정도로 심하게. 장첸이 보다 못해서 알약을 주더라. ‘이거 진짜 잘 듣는 거니까 먹으라’구. 그리고 난방기를 떼놔도 열이 오질 않더라. 그냥 닿는 부분만 잠깐 뜨겁고 그것마저도 촬영 들어가면 켤 수도 없었지. 그리고 조명기도 몇 대 없었고. 그래도 촬영 전에는 벌벌 떨고 있다가 슛 들어가면 아무렇지 않게 얼른 하고, 계속 그랬다.

길에는 눈이 버젓이 쌓여있는데 여름옷입고 걸어가는 장면은 보는 내가 다 춥더라. (웃음)
지금도 생각만으로 살 떨리는 것 같다. (웃음)

그런데 중간에 아이가, 속된 말로 오두방정 떨면서 (웃음)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도 뜬금없었다, 한 편으로 웃기기도 했고.
사실은 그 씬이 그냥 엄마가 들어와서 애가 잠든 모습을 보는 그런 장면이었는데 그렇게 바뀐 거다. 근데 내 생각엔 아마 감독님은 엄마가 없을 때는 그렇게 까불 정도로 밝은 어린 애가 엄마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멈추는 아이의 행동과 표정을 보여주면서 이 여자의 삶도 같이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애가 느끼는 엄마가 그런 거지. 엄마가 들어와서 반갑게 엄마한테 달려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했던 걸 멈춰야 될 것 같은. 함께 그림을 그리던 좋은 시절도 있었지만 그 시간이 지난 그 때, 아이에게 엄마가 조금 이상하다 느낄 수밖에 없는 직감적인 것. 애기 입장에선 엄마가 뭔가 이상하고 본능적으로 부담스러움이 느껴지는 불안감의 심리 같은 게 표현된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번 <숨>에 출연해서 김기덕 감독 영화만 세편 나왔는데 김기덕 감독과 인연이 된 계기는 뭔가? 처음 <해안선> 때 오디션이 있었단 말은 들었는데.
그 당시 오디션이 있었고 오디션을 봤었다. 그때가 김기덕 감독님께서 <나쁜 남자> 끝내고 <해안선> 준비할 때였고 난 공연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내가 하던 공연에 <나쁜 남자>에 출연했던 배우가 출연하던 중이었고 감독님은 <나쁜 남자> 개봉 후, 격려차 공연 보러 오셨다가 나를 본거다. 그런데 그 이전에 한번 뵌 적이 있었다. 감독님께서 그 때를 기억하셔서 ‘아, 그때 만났던 사람이네.’ 하시더라. 그런데 <해안선> 오디션 있다는 말을 내가 듣게 되었고, 그래서 원서를 내고 오디션을 참가하게 됐다.

아. 우연찮게 눈에 띈 게 도움이 된 셈?
그런데 감독님이 날 염두에 둬서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내가 예전부터 김기덕 감독님의 작품들을 워낙 좋아해서 오디션이 있단 말을 듣고 스스로 찾아간 거지. 운이 좋았다고 할까.

어쨌든 <해안선>은 오디션을 통했었지만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때는 감독님의 부름이 있었을 것 같은데?
<해안선> 촬영 후,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 감독님과 우연찮게 만나서 같이 밥을 먹게 됐는데 감독님께서 말씀하시더라. ‘지금 준비하는 영화에서 얼굴을 다 가리고 나오는 여자가 있는데 역할이 그래서 캐스팅하기가 쉽지가 않네. 그냥 지아가 하면 되지 않으려나?’ 라고 농담같이. 그래서 내가 하겠다고 해서 하게 된 거다.

<숨>도 마찬가지인가?
감독님 말씀으론 <숨>의 시나리오를 써놓고 여러 배우들을 생각했다가 내가 해도 괜찮겠단 생각을 갖고 계셨다더라. 그러다가 내게 전화를 하셔서 스케줄이 어떻게 되냐고 한번 물으신 적이 있었다. 그렇게 통화 끝내고 한참 지나서 다시 전화가 왔다. 그 때 내가 공연 할 때였는데 공연 전에 시간 잠깐 낼 수 있겠냐고 해서 그렇게 만났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썼는데 한번 지금 읽어봐라’고 하셔서 감독님과 만난 카페 그 자리에서 한 한 시간 동안 다 읽었다. 읽고 나니 감독님께서 ‘어떠냐, 해보고 싶은 생각 있으면 같이 하고 싶다’고 하셔서 하게 된 거다.

솔직히 <숨>도 쉬운 영화는 아니잖나. 일단 이야기의 맥락은 짚어지지만 세부적으로 상징과 은유로 채워져 있어서 그걸 읽어내는 건 쉽지 않다.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만만치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법한데. 캐릭터 자체만 봐도 그렇고.
그러니까 욕심이 너무 나는데 사실 그 반대편에선 쉽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걱정이 들더라. 근데 너무 욕심이 나서 내가 하겠다고 덥썩했지. (웃음) 걱정은 일단 그 다음으로 미루고. 내가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사람의 만남을 절박하게 갈구하는 상황이라는 게 와 닿더라. 물론 영화에 표현되는 현상을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내가 처음 시나리오를 읽은 느낌은 그랬다. 그러니까 그냥 남편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자기 삶에서 숨 쉴 수 없어서 어디선가 호흡하고 싶기에 편안한 숨을 필요로 하는 여자가 숨이 필요하지 않은 남자를 찾아간다는, 그게 너무 절박하게 와 닿아서 그걸 잘 표현해내지 못할까봐 일단 걱정이 많이 됐지. 그러니까 너무 안 됐더라고. 느낌이.

한편으론 연이 팜므 파탈스럽게 느껴졌다. 되게 악역 같다는 생각. 지독하게 고독한 장진의 낙을 끌어내어 이 남자의 밑바닥에 남겨진 생기를 죄다 빨아들인다는 느낌이랄까? 알고 보면 지독하게 나쁜 년인 거다. (웃음)
아, 그렇게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일단 감독님 영화가 말이 별로 없잖나. 그래서 생기는 일 인거 같기도 한데. 물론 모든 영화가 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해석이 많이 틀려지기도 하지만 특히 김기덕 감독님 영화가 그런 면이 좀 큰 거 같더라. 영화의 코드를 자기의 생각들과 맞추는 거지. 결국은 영화를 보고 나면 정말 상상도 못했던 얘기들을 할 때가 있으니까. 그런데 방금 전의 이야기도 그렇게 이해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쉽게 보면 장진을 위로하러 간 거지만, 사실 결과적으론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면 될 사람을 일 년이란 시간을 주면서 괴롭힌 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고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괜히 내가 그를 구해줄 수도 없으면서 꼭 구해주는 양, 봄을 주고 여름을 주고 가을을 주고, 결국 자신은 아이가 있고 남편도 있어서 결국은 가정으로 돌아가 버리는 여자니까. 어떻게 보면 나쁜 여자인 셈이지.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것 같지만 자기 욕심만 채우는 나쁜 여자인 셈이지.

한편으론 노골적이진 않아도 연이 남편에게 은근히 복수를 꾀하는 것 같았다. 남편의 외도를 자신이 답습하면서 그것을 남편 앞에 고의적으로 전시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남편에 대한 일방적인 증오를 보이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남편 되게 사랑했나봐. 그래서 그런가. 그게 일방적인 시선에서 보면 연이 장진이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 이전에 너무 사랑했었던 남편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니까 다른 누군가에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사랑이 다른 어디로 보내지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사랑했던 거 같아. 남편을. 그니까 미워서. 바람피워서 미운 게 아니라 너무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외면하니까.

그래서인지 장진이 불쌍하고 연이 사악해보이더라. 장진에겐 껍데기 같은 사랑을 전하니까.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김기덕 감독님하곤 세 번째인데 현장에선 어떤가. 이젠 나름대로 익숙해졌을 법한데.
음, 질문하면 답해주는 편이다. 굳이 여기선 이렇게 해야 된다는 답을 갖고 계시진 않고. 본인이 쓰려고 생각한 그림들은 있겠지만 배우에게 그 그림처럼 해줘야 된다는 요구보단 이미 이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맡긴 배우의 감정이 흘러가는 걸 기다려주고, 본인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배우는 저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배려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야겠다는 정답에 배우를 맞추고 캐스팅한단 느낌은 안 든다. 그냥 같이 하자고 할 땐, 그 배우가 다르게 표현해도 진실 되게 표현할만한 애니까 같이 하자고 하는 것 같다. 이미 캐스팅할 때부터 그냥 그 배우를 믿는 느낌이랄까.

그다지 많은 걸 요구하기 보단 배우들의 본능적인 감각을 끌어내고, 요구할 것만 같은데.
일단 말이 없으시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하고 여기선 어떻게 하고 그냥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그렇게 따라가면 되는데 그걸 안하시니까 나름대로 더 생각을 많이 해야 된다. 반대가 되는 거지. 자신을 최대한 스스로 끌어내게 되는. 그러니까 지금 이 씬에선 내가 뭘 해야 맞는지를 본인 스스로 체크하지 않으면 뭘 할 수가 없다. 말씀을 잘 안 해주시니까. 한편으론 그런 게 감독님의 방법일 수 있는 거고.

오히려 무언의 압박이 되겠다.
그럴지도. 일단 그래도 자연스럽게 내가 뭘 하면 되겠단 생각이 드니까 큰 부담까진 아니고.

김기덕 감독은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에도 단기간에 영화를 완성했다. 쉽지 않은 내용과 어려운 캐릭터를 단기간에 이해하고 설정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뭐, 어렵지. 그냥 연기를 하는 것도 난 아직 어려운데 짧은 시간에 촬영이 끝나가니까. 촬영 전에 시나리오를 볼 땐, 이 씬에서 내가 취해야 될 반경이나 영화상에서 해줘야 될 부분들이 이런 느낌이란 걸 미리 파악하고, 오늘 이 씬은 이렇게 해야겠단 생각으로 현장에 간다. 그런데 막상 촬영이 끝나고 집에 와서 생각해보면 오늘은 이것도 못했고, 이 씬도 망쳤고, 이 씬도 망쳤고, 찍는 내내 그랬다. 그래서 촬영이 다 끝나고 걱정을 많이 했고, 시사회 한다는 말 듣고 긴장되더라. 내가 내 눈으로 봐야 되니까, 내가 망친 것들을. 그런데 영화란 건 나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다보니 내가 망쳐버린 것들을 이렇게 저렇게 편집하고, 음악도 들어가고, 많은 것이 더 첨가되면서 혼자 막연히 걱정했던 것보단 무난하게 넘어가게 된 것 같다. 그 짧은 시간동안 찍으면서 인물에 몰입하기 위해 걱정했던 것들이 내 능력과 무관하게 결과적으론 나왔으니까.

대부분 배우들이 겸손하게 그렇게 말하더라. 난 연기 못했는데 편집을 잘했더라고. (웃음)
난 진짜 못 했다. 그런데 촬영기간도 짧아서 걱정을 많이 했고.

영화에서 대사가 별로 없다. 처음 대본을 받아보고 ‘왜 내 대사는 별로 없어.’하고 투덜거렸을 법도 한데. (웃음)
처음 <해안선>때도 대사가 없었지. 그래서 이건 뭐, 막막했지. 가령 ‘화를 낸다’를 어떻게 화를 내라는 건지, 손을 올리라는 건지 아니면 인상을 쓰라는 건지.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이번엔 그런 걱정은 안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최근 이런 질문들에 답하다보니 스스로 생각하게 된 건데, ‘아, 큰 걱정은 안하고 찍었네!’ 싶더라. 그러니까 <해안선> 땐, 대사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고민스러웠는데 이번엔 걱정을 별로 안하고 찍었더라. <해안선>때와 달리 요령이 생겼다고 할까. 말을 하고 안하고에 따라 방법이 달라지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 예를 들면 배고프다는 걸 내가 ‘배가 고파’라고 말을 하는 것과 ‘아~’(배고픈 시늉)라고 하는 것과 같이 방법이 틀려지는 거라 생각하는 것처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앞에서 김기덕 감독 영화 두 편에 나온 게 연습이 됐을 법도 한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있더라.

그런데 평범하지 않은 연기를 하다가 평범한 연기를 하면 되레 더 힘들지 않을까?
그런데 내가 사실 평범한 것도 많이 한다.

아, 연극 말인가?
맞다. 내가 영화를 통해 노출된 건 조금 세고 비정상적인 인물들이었기에 나 자신조차 많이 어둡게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연극에선 그렇지 않았다. 물론 연극도 무난하지 않은 연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영화보단 훨씬 평범한 역할을 한 적이 많다. 어쨌든 나 자신은 내가 표현해내는 것들에 애정을 지니는 편이다. 그리고 사실 난 코미디영화도 너무 좋아하고, 재미있고 웃기는 걸 많이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숨>은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하더라. 특히 연이 장진을 면회할 때, 연이 벽지를 바꾸는 장면들은 마치 무대에서 배경을 전환하는 작업처럼도 느껴졌다. 연극을 한다는 기분도 느껴졌을 것 같은데?
물론 들었지. 그게 왜냐면 봐서 알겠지만 보안과장이 모니터로 보는 씬들 있잖나. 그게 결국엔 누군가의 관점에서 나를 보는 행위가 되니까. 마치 내가 창문을 통해서 누군가를 관찰하면 창문 너머의 광경이 무대가 되는 것처럼. 또 지금 이렇게 인터뷰하는 모습을 기자님이 카메라로 찍어주면 이게 무대가 되는 거고. <숨>에서도 보안과장의 모니터가 보는 공간은 무대가 됐던 거지.

그럼 영화와 연극을 겸한 입장에서 영화와 연극의 차이가 많이 느껴지겠다.
음. 물론 큰 차이가 있겠죠? 연극과 영화는 일단 크기부터 굉장히 차이가 나니까. 그런데 난 그 차이를 알겠지만 그냥 모른 척 하고 싶다. 배우는 누구인척 하거나 어떤 인물인척 하는 게 아니라 그 인물의 진심을 말하거나 대신 이야기해주면 되는 거다. 근데 그건 무대에서나 영화에서나 마찬가지다. 물론 카메라 앞에선 고갤 어떻게 돌려주면 예쁘게 나오겠단 생각을 할 수 있고, 무대에선 내가 어떻게 걸어야 그 인물답겠다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사실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일 뿐이지. 그 인물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건 영화든 연극이든 마찬가지니까. 다른 부분이 많지만 난 크게 다르지가 않다. 결국은 연기를 하는 거니까.

그럼 혹시 무대나 카메라 중 어디가 더 편하다는 생각은 없나?
다 불편한데! (웃음) 무대는 무대대로 매일 매일이 너무 고통이고, 또 영화는 영화대로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마다 그렇다. 그런데 그냥 아닌 척 할 뿐이지. 내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의 과정이 아니라 관객은 결국 결과를 보게 되니까.

그런데 연극은 극이 끝나면 바로 청중의 박수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그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을 기다려야 된다. 두 장르를 끝낸 뒤의 감흥의 차이는 있을 것 같은데?
조금 시간이 좀 달라지는 거지. 공연은 커튼콜이 끝나는 순간, 오늘 공연이 어땠는지 바로 듣게 되는 거고, 영화는 촬영이 끝나고 작품이 완성된 후에 영화를 본 관객의 평이 따르는 거고. <숨>도 개봉하면 관객 평이 막 올라오겠죠. 누군가는 인터넷에 ‘거지같았다!’ 이럴 수도 있는 거고. (웃음) 결국 공연보고 공연평 올라오는 거나 마찬가지지. 단지 연기 후 평가가 따르는 유예기간이 있는 거랄까.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예전부터 원래 좋아했다는데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사실 여성에게 불쾌하게 여겨질 부분이 있다. 물론 함의는 그게 아니라 해도 단순히 현상을 받아들이면 여성으로서 불쾌해질 수 있는 거다. 여자로서 그런 부분이 의식되진 않던가?
<해안선> 끝나고 몇몇 글에서 여자를 폄하하는 거 아니냐는 글을 봤다. 그 때 또 한참 페미니즘이니 하면서 여성인권에 대한 시선이 부각되는 때였고. 그런데 영화라는 건 그런 이야기들을 해야 되는 것 같다. 감독님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그 이야길 하면 되고, 거기 반대하는 의견이 있는 이는 글을 올리는 거고, 또 이 사람들의 말에 다른 의견이 있으면 그건 아닌 거 같다고 말하면 되고. 그런데 뭐가 옳다거나 나쁘다는 이야기를 할 건 아닌 거 같다. 현실적인 문제제기는 그런 부분을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이 하면 되는 거지. 저널리스트든 사회운동가든. 그리고 영화에서는 극단적일지라도 창조적인 허구를 통해 현실을 짚어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해안선>이 여성을 폄하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동시에 그런 상황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잖아.

<해안선>과 <사마리아>는 비슷한 국면이 있었다. 여성이 피해자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남성들의 비루한 욕망을 구원하는 출구 같다는. 오히려 난 남자란 게 저 정도밖에 못 되는 존재인가 싶더라. 그런데 <해안선> 찍을 땐 힘들었을 거 같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처음이기도 했고.
처음이어서 좀 힘들었지. 그런데 사실 내가 <숨>보단 <해안선>때가 나았다. (웃음) 그때는 멋모르기도 했고, 촬영하던 섬도 너무 좋았었다. 힘든 걸 되게 즐거워했었던 것 같고. 지금은 그때보단 나이도 좀 들었고, 그때와 다르게 책임감이 더 많아지기도 했고. <숨>이 더 힘들긴 힘들었던 거 같아. 심리적으로.

영화 찍다보면 시나리오도 많이 변하잖나. 그런데 듣는 바에 의하면 김기덕 감독님은 전환이 굉장히 빠르다더라. 그래서 영화도 단기간에 완성되는 거고. 그런데 기존 이야기의 포맷이 금방 금방 바뀌는 순간들을 박지아 씨는 적응하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면 즉흥적인 연기가 필요한 연극을 많이 경험했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박지아란 배우가 참 어울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바뀌는 부분들이 내가 관통하고 있는 연이라는 인물 안에서 정해지지 바깥에서 뜬금없이 변화가 요구되진 않는다. 그러니까 배우가 그냥 그 인물만 잘 취하고 있으면 이렇게 저렇게 상황이 바뀌어도 이렇게 저렇게 취하면 되니까. 사실 감독님이 특별하게 요구를 하는 부분도 별로 없고. 그런데 그게 나여서가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아마 비슷할 거다. 그 인물에 대한 것만 갖고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첸과 호흡을 맞췄는데 장첸이 한국말을 못하니까 애로사항이 없지 않았겠다.
그런데 알아듣는다. 내가 뭘 하려는지. 예를 들어서 뭘 살며시 들어서 ‘당신을 때리려고 해’를 표시 안 해도 알고 대응하는 식이다. 일단 시나리오 자체를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 정보 안에서 내 말의 뉘앙스와 감정의 표현을 받을 줄을 알더라. 사실 촬영 전에 만나기가 힘들어서 연기에 대한 의견 교환이 전무한 상태였다. 근데 촬영 때 의견을 교환한다면 통역을 통해서 이야기해야 되는데 굉장히 빨리 진행되는 상황 안에서 이런 과정은 어렵겠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많이 됐다. 하지만 첫 촬영해보니까 경험이 많고 워낙 연기 잘하는 배우니까 알더라. 예를 들어 탁구 치는 것처럼 쳐서 보내면 받아쳐온다. 그러면 내가 그걸 또 받아치면 되는 거고. 그러니까 장첸도 진이란 인물을 품고 있고 나도 연이란 여자를 품고 있으니까. 서로의 입장이 이렇더란 걸 잘 알고 있으니 말이 통하지 않아도 금방 할 수 있게 되더라. 그래서 처음 걱정했던 것보단 훨씬 수월하게 찍었지. 사실 많이 배웠다. 내가. 정말 영화를 이렇게 하는 거라는 걸. 워낙에 많은 경험을 했고 노력도 함께 하는 배우더라. 괜히 그냥 장첸이 유명한 배우가 아니구나 싶더라.

상대적으로 하정우 씨는 언어가 통해서 호흡 맞추는데 안정적이었을 것 같다.
처음 볼 때 예전에 내 공연을 봤다고 하더라. 나보다 나이가 어려서 누나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런데 나나 정우 씨나 그다지 성격이 쾌활한 편이 아니라 낯을 많이 가렸었다. 그래도 촬영 중간에 서로의 캐릭터와 연기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지. 직접 의사소통을 하니 편한 점이 많긴 했다.

<시간>에서도 그랬지만 <숨>에서 나온 집도 꽤 인상적이더라. 인테리어도 그렇고. 구조도 그렇고.
거기가 그 조각 만들어주신 분집이다. 그 분이 작업실도 빌려주시고, 댁도 빌려주시고, 결국 그렇게 그 근처에서 다 촬영했다. 집이 너무 예쁜데 영화현장이 되면서 막 긁히고 그래서 결국엔 감독님이 촬영보다 바닥 긁히는 걸 더 조심하라고 그럴 정도였다. 진짜. (웃음)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를 다시 쓰는 경우가 많다.
아니지 않나? (웃음)

조재현 씨는 다섯 번이나 출연했는데.
아~맞다.

하정우 씨도 두 편이었고. 일단 본인부터가 세 편째네!! (웃음) 그런데 평범한 여자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없나?
많지~! (웃음)

특별히 영화를 통해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
또 <숨>의 연 같은 역할을 준다 해도 또 해보고 싶고, 반대의 역할을 준다고 해도 또 해보고 싶다. 역할의 성향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재미를 느끼면서 연기할 수 있는 지가 중요하다. 내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작업 현장인가라는 것도 그래서 중요하고. 물론 하고 싶지 않은 캐릭터도 분명 있겠지만 그런 건 별개다. 그냥 <숨>보다 과해져도 상관없고 훨씬 무난해져도 상관없다. 그냥 조근 조근한 아줌마도 해보고 싶고, 옆집 언니 같은 거도 좋다. 있는 듯 없는 듯 저 여자가 나왔었나 싶은 것도 해보고 싶고.

옛날에 <버스 정류장>에서처럼? 그리고 그 전에도 출연작이라고 나온 건 많던데.
프로필에 경력 상으로 나온 건 많다. 사실 <마리아와 여인숙>처럼 엑스트라가 대부분이지. 어쨌든 그래도 경력은 경력이니까. (웃음) <버스 정류장>같은 일상적인 역할도 사실 재미있었다. 무난한 수학선생님이었는데 튀지 않는 그런 역할이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다.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뭔가를 해야 되는데 튀어서는 안 되니까 그게 더 어려운거 같아요.

사실 <버스 정류장>은 개인적으로 기억에 뚜렷이 남는 영화다. 왜냐면 내가 극장에서 영화볼 때 정확히 7명 있었으니. (웃음)
정말? 요즘 케이블 채널에서 종종 하더라.

한번 기회 되면 확인해봐야겠는데. (웃음) 이제 다시 연극도 하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려 한다. 지금 영화를 찍고 있으니까 연극은 안하겠다거나 이런 건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건 배우지, 영화배우도 연극배우도 아니니까. 내가 하고 싶은 역할이 영화에 있으면 영화배우가 되는 거고 연극에 있으면 연극배우가 되는 거고.

가장 최근에 했던 연극은 뭐였나?
<장군 슈퍼>라고, 극단 청국장이라는 곳에서 만든 거다. 요즘 새로 만들어진 극단인데 거기서 <춘천, 거기>라는 작품도 했었다. 그리고 <장군, 슈퍼>공연 중에 김기덕 감독님이 캐스팅 제의를 했었다. 사실 감독님이 그 공연 중에 촬영하시겠다고 박박 우기시는 걸, 공연과 영화를 절대 같이 할 수는 없고, 하고 싶긴 한데 그렇게 진행하시면 할 수가 없다고 했더니 감독님이 공연 끝나기를 기다려주셨다. 그래서 공연 끝나자마자 촬영을 시작하게 됐지.

혹시 그냥 뭔가 막연하게라도 자신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냥 뭐, 연기 인생에서 대단한 배우가 되겠다는 이야기할 나이는 이제 지난 것 같네. (웃음) 내가 재미있는 건 꾸준히 쥐고 계속 하고 싶다. 그러다보면 내 그림이 점점 선명해지겠지. 그런 거지, 뭐. ‘뭐가 되겠습니다.’ 이런 건 이젠 아무래도 내겐 아니다. (웃음)

(무비스트)

'inter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펑 샤오강 감독 인터뷰  (0) 2008.05.30
조은지 인터뷰  (0) 2008.05.30
양진우 인터뷰  (0) 2008.05.30
오정해 인터뷰  (0) 2008.05.30
민지혜 인터뷰  (0) 2008.05.30
Posted by 민용준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둠을 잃어버린 서울의 밤거리. 유흥의 자본으로 세워진 네온사인들은 어두운 밤거리를 밝히고 그 아래엔 밤을 잊은 호스티스들이 향흥의 환락가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살아간다. <비스티 보이즈>는 도시의 밤이 만들어낸 빛의 허상을 좇아 거리로 내몰린 불나방 같은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다.

전작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군대라는 남성적 특이집단을 들춘 윤종빈 감독은 <비스티 보이즈>를 통해 남성 호스티스라는 또 다른 특이집단을 들춘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비스티 보이즈>는 남성성에서 뻗어나간 양극단의 환경을 배경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대척점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은 진배없다는 점에서 동일한 속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체제적 복종을 완수하기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군대와 수익적 복종을 위해 개인을 억누르는 남성 호스티스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닮았다. 다만 그것이 남성성이란 지점의 양극단이란 점에서 명확한 거리감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호스트가 자신의 손님을 물주로 삼는다는 ‘공사’, 자신이 일하는 업소에 돈을 끌어서 쓴다는 의미의 ‘마이킹’, 실적에 따른 성과급수당을 지칭하는 ‘티씨(T/C)’ 등, 그 세계만의 전문용어가 소통되는 <비스티 보이즈>의 세계는 분명 특화된 구역이다. <비스티 보이즈>는 호스트바라고 불리는 특수한 세계를 스크린에 호기롭게 재현하며 리얼리티의 흥미를 유발한다. 하지만 <비스티 보이즈>가 작동시키는 리얼리티는 단순히 영화가 두른 병풍에 불과하지 않다. 강남 일대의 풍경을 담아낸 네거티브 질감의 영상은 그 거리에 팽만한 욕망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들춘다. 때때로 페이크 다큐나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같은 현실감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철저한 현장조사를 거쳐 만들어낸 영화의 리얼리티가 탁월한 까닭이며 동시에 연기라는 장막을 걷어내고 실제 자신을 캐릭터에 이입시켰다고 생각될 정도로 캐릭터에 잘 스며든 배우들의 연기가 누구 하나 손색없는 덕분일 것이다.

몰락한 강남 2세인 승우(윤계상)는 잠시 호스트의 삶에 기대고 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면서도 자신의 현실에서 발생하는 괴리감을 때론 감당하지 못한다. 업소의 에이스로 추대될 만큼 호스트로서의 자질이 충분하지만 그 위장된 얼굴로 가린 내면의 자격지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 삶에 저항하듯 다혈질의 성격을 토해내곤 한다. 그 와중에 지원(윤진서)을 만나 그녀를 통해 삶의 통로를 찾아나가지만 진심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닥에 내몰린 승우는 끝없이 의심을 헤매다 결국 치정의 미궁으로 스스로 빠져든다. 도박의 늪에 빠져 큰 빚에 억눌린 재현(하정우) 역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으로부터 도피하려다 극단에 내몰린 경우다. 하지만 재현은 현실에 타협하며 끝없이 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비굴하게 내몰리면서도 눈치를 살피는 약삭빠른 근성은 천덕꾸러기처럼 그를 괄시하게 만드는 반면, 그가 호스트로서 천연덕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생존력의 기반이 된다.

강남의 밤거리에 불을 밝힌 호스트바는 물질적 욕망이 넘실거리는 향락의 무대와 같다. 청춘을 볼모로 한 청년들은 그곳에서 몸바쳐 주머니를 채운다. 청년들은 저마다 가지각색의 표정으로 손님의 시중을 들지만 꿈은 결코 그 자리에 있지 않다. 그곳으로 흘러 들게 된 사정이야 어찌됐건 재현이나 승우에게 호스트바는 자신의 삶을 꿈꾸게 할 기회의 땅임과 동시에 언젠간 박차고 나가야 할 바닥이자 나락의 비상구로 통하는 길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어 희망도 없는 청년들은 암담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강남의 네온사인 아래 모여든다. 꿈을 쫓기 보단 돈을 쫓는 법을 먼저 배운 청춘들은 어떤 가치도 깨닫지 못한 채 돈을 향해 뛰어간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란 말처럼 승우나 재현이 소비하는 호화로운 삶은 그들의 현실에서 껍데기로 소화되는 것에 불과하다. 고급 차를 몰고 명품 옷을 입고 비싼 임대료를 내고 강남에서 살아도 그들은 결코 부유한 강남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자본이 꾸며놓은 진풍경 아래 살아가지만 그들의 호사는 그 거리의 주인의 모습이 아니라 향락을 서비스하는 거리의 노예에 불과하다. 에이스가 되고, 텐프로(10%)가 된다 한들, 수입의 주체가 아닌 소비의 주체로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자본의 저변에 불과하다. 그건 어머니의 가게에서 이름은 같으나 얼굴이 다른 지원(윤진서)에게 목걸이를 사주지 못하는 승우의 꿈과 같다. 마치 자신의 것처럼 모든 것을 누리지만 결코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는 변두리의 주체. 끝없이 물욕이 샘솟는 그 거리에서 그들은 자본의 주인이 되길 원하지만 소모품으로 전락할 따름이다.

이는 88만원 세대의 절망감과 무관하지 않다. 원대한 꿈보다 자본의 속박을 먼저 체감하는 청춘은 그 수하로 무기력하게 편입되어 덧없는 물욕을 꿈꾸지만 쳇바퀴 도는 제자리의 삶은 꿈을 아득하게 밀어내고 현실의 무게는 더더욱 삶을 짓누른다. 끝없는 경쟁을 고수하는 교육과정을 체득하고 사회로 나와 취업난에 허덕이며 자본에 의한 패배주의를 체감한 젊은 세대의 무기력함은 막연한 미래를 꿈꾸며 현실을 소모하는 호스트의 삶과 진배없다. 경쟁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고달픈 삶을 자연스럽게 익힌 청년들은 자본의 첨탑에 기어오르기 위해 스스로를 탕진할 따름이다. 손님들과 잔을 주고받으며 진심을 연기하는 호스트들이 메말라가는 자신의 영혼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은 자신이 내몰린 구석에서 처량함조차 잊으며 피폐한 삶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결국 반짝거리는 조명처럼 환락이 넘실거리는 서울의 밤을 뜨겁게 누비던 승우는 갈 곳을 잃고 나서야 스스로가 어두운 곳에 내몰렸음을 깨닫고 좌절한다. 한편, 현실로부터 달아나듯 사라진 재현은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에서조차 진심을 가장한 호스트의 얼굴로 살아간다. 그건 압구정의 밤처럼, 신주쿠의 밤도 자본으로 세워진 네온사인 불빛에 불나방들이 몰려드는 덕분이다. 그리고 지금도 영혼을 저당 잡은 청춘들은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공사상대를 찾아 술을 따른다. 어지러운 세상, 파이팅 하면서. 그렇게 밤조차 밀어낸 도시의 허영심에 미혹된 불나방 같은 청춘들은 그것을 희망이라 믿고 그쪽으로 날개를 퍼덕이다 제 몸을 태우고 스스로 소진되거나 끝없이 몸을 부딪히며 살아간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