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타(Rotta)라는
가명으로 사진을 찍는 최원석은 보기 드문 팬덤을 지닌 포토그래퍼다. 그는 유명해지길 꿈꿨고, 유명해져서 좋다고 말했으면 더 유명해지고 싶다고 말했다.
<로타의
일본산책>은 출간 전에 이미 예약 판매로 1쇄가 매진됐다. 미소녀 포토그래퍼가 인기에 편승해서 여행사진집을 낸 거 아닌가? (웃음)
옛날부터 일본에 가서 찍은 사진들이 많아서 보여주고 싶은 욕심은
늘 있었다. 그런데 인지도가 생긴 상황에서 사진집을 내고 전시를 하면 확실히 어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다만 기대 이상의 반응이라 신기하다.
첫
사진집인 <Girls(소녀들)>를 내고 인지도가
수직상승했다.
아무래도 사진집과 전시가 이슈가 된 타이밍에 설리 화보 이슈까지
겹쳐서 시너지가 난 거 같다.
미소녀
컨셉트의 사진은 언제부터 찍었을까?
오래 전부터 진행한 작업이었다.
다만 페이스북엔 공개하는 걸 싸이월드에 공개하지 못했던 건 그 당시엔 반응을 가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이런 사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한국에선 어려울 거 같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참고했다. 그러다 한 5년 전부터 타이밍이
괜찮다 싶어 조금씩 노출했지.
공연사진을
찍으면서 포토그래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공연장에서 사진을 찍어 보니 현장감이 너무 좋았다. 지인이 공연장 스태프였던 덕에 무대 근처에서 촬영할 수 있어서 촬영하는 묘미도 있었고. 그러다 내 사진을 좋아하는 분들이 생겨서 적극적으로 찍게 됐고, 자연스럽게
일로 연결됐다. 페스티벌 촬영 의뢰를 받고, 뮤지션들의 앨범
재킷도 찍게 됐고.
과거
싸이월드에서 본 클럽 사진들의 현장감이 인상적이었다.
A 클럽 촬영을 통해 빛을 쓰는 법을 익혔다. 빛을 잘 쓸수록 춤추는 모습도 역동적으로 잡히고, 예쁘게 나오니까. 사실 클럽 사진 찍는 사람이 꽤 많다. 그들보다 더 잘 찍는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열심히 찍었지.
인정욕구가
강한가?
흔히 말하는 '따봉충'이지. (웃음) 옛날부터
꿈은 하나였다. '유명해지고 싶다.' 정말 소박하지 않나? 누군가는 세상을 위한 꿈을 꾸거나 대단한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떤 기준도 없이 그저 유명해지고 싶다니. (웃음)
유명해지니까
좋은가?
그만큼 재미있는 일이 들어오고,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니까. 사진을 찍는 덕분에 이와이 슌지 감독도 만났고. 물론 실력이 없었다면 그럴 기회가 없었겠지만.
설리에게선
직접 연락이 왔다던데.
사실 긴가민가했는데 만나보고 진짜라는 걸 알았다. 페이스북에 있는 내 사진이 다 마음에 든다고, 그런 느낌으로 찍어보고
싶다고 하더라.
서태지도
직접 연락을 하던가?
그건 아니고. 어쨌든
공연 사진을 잘 찍어줄 사람이 필요해서 연락을 했는데 결국 앨범사진도 찍고, 인터뷰 기사를 비롯한 공식
사진도 찍게 됐지.
무라카미
다카시가 SNS에서 로타의 사진집을 극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무라카미 다카시의 한국 전시를 촬영했는데 내가 자기 전시를
찍었는지도 모를 거다. 만약 일본으로 찾아가 포트폴리오를 보여주고 적극적으로 어필했다면 관계가 진전됐을
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그 당시에 내가 너무 바빴다. 아쉽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언젠가 기회는 있을 거다.
혹시
유명해져서 불편한 건 없나?
게임할 시간이 없어진 거? (웃음) 사람 만날 일이 많아지니까 개인시간이 너무 없어졌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니까 일일이 이름을 기억하기 힘들더라. 그래서 미안하다. 만나는 사람은 많아졌는데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지니까 오히려 친한 사람이 생길 기회가 더 없다. 아이러니하지.
유명세를
얻으면서 과거에 로타라는 이름이 '로리타'와 '오타쿠'를 더한 이름이라고 언급한 방송 영상이 뒤늦게 발굴돼서 여성
중심의 커뮤니티로부터 집단적인 공격을 받았다.
처음엔 괜히 그런 말을 했나 싶었는데 지금은 괜찮다. 사실 넓은 범위에서 보면 그렇게 이해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반박하는 것도 이상하지. 다만 로리타를 의식하고 작업한 건 아니니까 그런 부분은 확실히 짚고 싶다.
아무래도
말의 무게를 느꼈을 거 같다.
조심해야겠단 생각은 들었지. 솔직히
사진 컨셉트를 설명할 때조차 로리타를 언급해본 적도 없다. 그때 영상을 찍는 PD가 '로리타가 섞인 이름 아닌가요?'란 식으로 장난스럽게 물어봐서 나도 장난처럼 대답해버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PD도 조금 얄밉네. (웃음). 물론
그때 현장 분위기도 화기애애했고. 사실 당시만 해도 로리타를 공격적으로 해석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일종의 컨셉트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강했지. 그래서 걱정 자체를 안
했던 것도 같다.
그로
인한 여파가 있었을까?
사실 사진집이 나오기 전에
<프로듀스101> 쪽에서 촬영 제안이 왔다. 걸그룹 '여자친구'의 소속사에서도 왔고. 그런데
로리타 이슈가 터지고 다 무산됐지. 그런데 최근 '아이오아이(I.O.I)'와 광고 촬영을 진행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거 같다.
안티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두둔해주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나를 대신해 싸워주는 팬이 생겼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사실 논쟁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부정적인 의견도 존중하고, 억울한 건 전혀 없다. 그냥 이렇게 찍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주기만
하면 된다. 보고 말하는 건 좋다. 하지만 내 사진도 안보고
나를 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화가 날 것 같다. 모르고 욕하는 거니까.
내 사진을 알고 욕하는 건 상관 없다.
일본에선
이런 사진이 흔하다는 식으로 비하하는 이들도 있더라.
한때 우리나라 만화가들이 대부분 일본만화처럼 그릴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일본만화를 따라 한다는 비난도 많았는데 지금은 다 제 식대로 그린다.
나도 처음엔 일본 그라비아 톤을 따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영향을
받은 거지, 베낀 게 아니니까. 사실 요즘 우리나라 포토그래퍼들이
어떤 사진을 찍는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도 많이 듣는데 최소한 '이거 로타가 찍은 거네'라고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내 자신감이다. 내 느낌은 존재하는
거니까.
'로타'라는 이름은 본래 로봇 캐릭터를 구상하며 만든 이름이라고 들었다. 정확한
의미가?
특별히 의미는 없다.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로봇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로보트'가 연상되면서도
귀여운 이름을 짓고 싶었다. '로'로 시작되는 두 글자의
귀여운 이름을 짓고 싶었는데 '로타'하니까 괜찮게 들렸다.
그
캐릭터는 어떻게 됐나?
넥슨에서 개최한 공모를 위해 만든 건데 안됐지. (웃음) 그런데 최근 넥슨과 미팅이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좋아하더라. 그림으론 인연이 없었지만 사진으론 인연이 생겼다.
일러스트를
그리다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대학교 시절에 제대한 뒤 처음
'똑딱이'를 잡았는데 여자친구를 찍어주다 보니 더 예쁘게 찍어주고 싶더라. 그러다 더 좋은 장비로 찍어보니 사진이 더 예쁘게 나오는 걸 알게 돼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장비병'이 생겼다. 그런데
점점 잘 찍는단 소리를 듣게 되면서 피사체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실력이 늘면서 기회로 연결됐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그림을 그린 이유나 사진을 찍는 이유에 차이는 없었다.
차이가
없다는 의미가?
그림을 시작한 것도, 사진을
시작한 것도 내가 표현한 걸 남들이 좋아할 수 있도록 만들겠단 마음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그림을 열심히
그린 것도 좋은 반응을 얻는 게 좋아서였는데 카메라를 잡았을 때도 비슷한 욕구가 있었던 거지.
사진
찍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될 거라 확신한 건 언제였을까?
재미있게 하면 대가가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사진작가가 될 거란
생각을 해보진 않았다. 취미로 공연을 찍다 보니 일이 됐고, 서태지
사진까지 찍었다. 미소녀 컨셉트가 좋아서 촬영했는데 일로 이어지더니 설리한테 연락이 왔다. 재미있게 하다 보면 뭔가 되겠단 생각은 했지만 돈과 연결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다만 좋아하는 만큼 최선을 다했지.
한
인터뷰에서 '점잖아 보이지만 알고 보면 변태라서 이런 사진을 찍고 있는 거 아닐까'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스스로 변태라고 생각하나?
변태가 아닌 사람은 없다고 본다.
그리고 변태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만 유쾌하고 재미있는 단어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박찬욱 감독도 변태적인 성향이 있을 거다. 젠틀하고 고급스러운 언변을 구사하지만 머리 속엔 변태적인
상상력이 있으니까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지. 나도 사진을 통해 내 안의 변태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셈이고. 하지만 그걸 저질스럽게 표현하고 싶진 않다. 다만
다른 사람보다 상상력이 떨어질 수는 있어도 표현력은 좋다고 생각한다. .
혹시
새로운 미소녀 사진집을 출간할 계획은 없나?
6월말에 나온다. 소니
뮤직과 컬래버레이션 형태로 진행 중인데 사진집을 넣은 2CD 형태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발매된다.
특별한
목표는 없을까?
잠깐, 고민 좀 해보고. 음, 요즘 해외에서도 조금씩 인지도가 생기는 거 같은데 일본이나
동남아, 유럽 쪽에서도 알려지고 싶은 거?
신해철과 서태지는 90년대를 관통하는 뮤지션이자 메신저였다. 하지만 신해철이 언어로서
세상과 충돌하는 사이, 서태지는 언어의 미로 속에 자신을 숨겨왔다. 죽은
신해철은 말을 남겼고, 산 서태지는 말을 아낀다. 신해철의
말은 죽어서도 살고, 서태지의 말은 살아있는지 알 길이 없다.
신해철이 죽었다. 벼락처럼 떨어진 비보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름의 방식으로 죽은 이를 추모했다. 밀물처럼 추모의 말들이 달려와
바다를 이뤘다.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다음날 서태지도 말을 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녹화 현장이었다. 서태지는
“힘들지만,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해철은 내가 데뷔하기 전부터 ‘재즈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등의 명곡을 만들었고, 나도 듣고 자란 세대다. 누구 보다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노래 가사는 내 마음을 너무 흔들어놨다. 나도 그런 가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서태지가 신해철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서태지가 신해철처럼 가사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의외였다.
신해철의 가사는 직설적이다. 피해가지 않는다. 투수로 치자면 직구 일변도의 투수였다. 그래서 종종 홈런을 얻어맞기도 했지만 대부분 강속구를 구사하며 호쾌하게 미트를 때렸다. 수비수의 도움을 받을 일이 별로 없었다. 특별히 해석을 부르는 가사를
쓰거나 부르지 않았다. 가사가 가리키는 지향점이 명확하다. 반대로
서태지의 가사는 은유적이거나 지나치게 상징적이다. 투수로 치자면 맞춰 잡는 변화구 투수였다. 가끔씩 정면승부를 시도하며 삼진을 잡기도 했지만 대부분 유인구를 던져서 맞춰 잡았다. 그만큼 수비수의 도움이 절실하다. 쉽게 말하자면 팬덤의 지원사격이
중요하다. 단어를 나열한 형태만 봐도 의도라는 것이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언어인 만큼 애정을 바탕에 둔
의미부여가 중요해진다.
올해 신해철과 서태지는 모두 오랜만에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 신해철은 7년만이었고, 서태지는 5년만이었다. 신해철은
올해 말에 넥스트의 신보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라디오스타>에 출연했을 때 서태지에게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서태지의 활동 재개가 확정된 시점이었다. 서태지는 새 앨범 발매에 앞서서 방송 출연을 결정했다. 그가 결정한
건 유재석이 진행하는 <해피투게더>였다. 방송 전부터 서태지가 등장한다고 예고편을 떠들썩하게 틀었다. 22년
만에 못다한 말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누구나 다 아는 서태지의 지난 시절을 떠들썩하게 떠들 뿐이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서태지의 아들 이름이 ‘삑뽁이’라는 것 외엔 새로울 것도,
기억날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 이후에 출연한 <뉴스룸>에서 유효한 이야기가 나왔다. 앵커 손석희가 뼈 있는 질문을
던져준 덕분이었다. 손석희는 서태지의 ‘소격동’이 녹화사업을 비롯한 과거의 정치사를 건드리고 있다는 세간의 추측과 해석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서태지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노래를 만들 땐 정치는 고려하지 않는다. 예컨대 예쁜 한옥 마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마음만 다뤘다”고 했다. 다만 “80년대 서슬 퍼런 시대를 표현하지 않고는 ‘소격동’이란 곡을 설명하기 힘들다. 그래서 들어간 거다”라고 부연했다. 서태지의 언어가 시대를 겨냥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에겐
상당히 실망스러운 답변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다. 2009년에 발매된 서태지의 8집 앨범에 수록된 ‘T’ik T’ak’을 두고 세간에선 이것이 현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그 즈음에 코엑스에서 펼쳐진 서태지의 게릴라 콘서트에서
서태지는 시대적 흉흉함을 우회적으로 피력하며 ‘시대유감’을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특별히 그 노래가 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지 직접 말한 적이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서태지의 본의와 무관하게 서태지에게 무언가 명확하게 바라는 바가 있는 대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서태지의 언어가 시대적 부도덕과 불합리를 좀 더 명확하게 꿰뚫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서태지와 상관 없는 바람이었다. 손석희는 서태지의 신곡
중 하나인 ‘크리스말로윈’의 가사에 등장하는 ‘산타’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서태지는
그것이 ‘나쁜 권력자’라고 했다. ‘교활한 권력자, 교활한 직장 상사, 그런게 될 수 있을 거 같다’고 부연했다. 그러니까 동화 속에 등장하는 악마인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느
나쁜 권력자인지 알 길이 없는 ‘환상 속의 그대’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랄까.
신해철의 언어는 언제나 명확하고 확실했다. 서태지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신해철은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현정부를 향한 촌철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이명박대통령은박정희대통령의향수를가지고있는지모르겠지만국민들이지금보고있는모습은전두환의모습이다. 박정희의모습이아니다.”그런태도는지지자를만들어내는동시에적대자가등장하는이중적계기가되기도했다. <백분토론>에후드티에장갑을끼고나온것에대해서세간의비판여론이일자그는자신의미니홈피계정에"후드티에장갑을끼고나온것은분명일부에게 '익숙지않은모습'일수있다. 하지만 '익숙하지않은모습'이반드시 '옳지못한모습'은아니다"라고논평했다. 그에게는정해진편이없었다. 단지불합리한권력을내세우는다수와맞서는사람이었다. 하지만그의언어는불합리한권력을찌르기위한창으로서만존재하지않았다. 반대로그는약자에게관대한사람이었다. 신해철의생전마지막기록이라할수있는JTBC의 <속사정쌀롱>에서그는 "내가
다른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상태에서 비전을 세우는 것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흘리는 땀은 다르다. 운전하다가 기름이 떨어졌을 때 보험사에서 최소한 주유소까지 향하는 기름을 넣어주는, 최악의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복지. 환경적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백수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순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언어는 그의 노래 가사와도 일맥상통한다.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마(‘해에게서 소년에게’)”라고 용기를 주거나 “난 아직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곤 속에 묻어버릴 수는 없어(‘The
Dreamer’)”라고 다짐하거나 “어른이 될 때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 했었죠. 지금은 그게 습관이 됐어요 아무런 생각이 없어(‘매미의 꿈’)”라고 꼬집어 말한다.
서태지도 한때는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매나!”라고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허공에 대고 일갈하는
것처럼 공허하다. 제도를 바꾸라는 건지, 그런 교육제도 속에
머무르는 학생들의 태도를 바꾸라는 건지, 명확하지 않다. 통일을
염원하거나, 교육제도와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해도 명확한 비판의 대상이 부재한다. 서태지는 ‘시대유감’을
‘이 시대에 유감이 있다고 말하는 노래’라고 했다. 그런 노래의 가사가 “검게 물든 입술.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서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라고 겉핥기에 그치는 건 가사유감이다. 명확한
건 제목뿐이다. 서태지의 솔로 앨범 가사들은 대부분 자의적인 해석을 통한 의미 부여를 동반하지 않으면
언어의 가치가 불확실해진다. 최소한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 나이를 쳐먹도록 그게 뭔지 몰라”라는 언어를
구사하는 신해철과 비교하자면 더욱 그렇다. 시대 비판이라는 언어로 처세를 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리스너의 판단’이라는 말로 모호함만 증폭시킨다.
<해피투게더>에선
서태지의 90년대 활약상을 훑으며 찬사를 거듭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서태지는 90년대의 영광 이후로 보여준 것이
드물다. 현실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9년, 서태지가 모아이섬에서 신비를 노래할 때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현실과 싸우고 있었다. 서태지의 노래와 노래 밖 현실의 괴리가 선명했다. 신해철이 죽은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해철이 생전에 뱉었던 노래와 말을 유언처럼 주워들었다. 죽은 신해철의 언어로부터
위로를 느낀다. 멋대로 해석해도 좋을 말장난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언어가 존중 받는 건 당연하다. 흉흉한 세상에선 위로가 되는 말이 더욱 귀하다. 신해철의 죽음은
그래서 시대유감이다. 그 가운데서 서태지는 ‘소격동’의 추억을 노래한다. 소격동의 녹화사업은 단지 기억의 재현일 뿐이다. 개인적인 옛 기억이 예쁘게 추억될 뿐이다. 유감이다. 누가 죽고, 누가 살았는지 헷갈린다.
오늘 <해피 투게더>는 그야말로 서태지 팬들을 위한 '우리들만의 추억'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존의 프로그램 방청자들이 채널을 언제 돌렸을까 궁금할 만큼 재미가 없었다.
사실 이것이 서태지라는 인물의 심심함 때문인지 평소보다 배려심이 돋는 진행 방식 때문이었는진 모르겠지만 오늘 <해피 투게더>의 진행 방식이 유난히 조심스럽고 자제한다는 인상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서태지 정도의 인물을 모셔다 놓고 누구나 아는 과거의 이야기를 줄줄 읊는데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할애한다는 건 아무래도 낭비다. 게다가 지금 당장 대중이 가장 궁금해하는 이슈 앞에서 머뭇거리고 누구나 아는 그 화려했던 과거를 나열하는데 시간을 소모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낭비다. 역시 <해피 투게더>가 아니라 <라디오스타>였어야 했다. 그게 서태지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었을 것 같다.
요즘 대중들은 어떤 노래를 듣고 부르나. 동방신기의 앨범이 30만장 가까이 팔린다던데? 그럼 동방신기 노래 불러봐. 입이 우물거린다. 왕비호가 동방신기의 ‘오정반합’이 무슨 중국집 이름이냐고 놀려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가수들은 넘쳐나는데 대중가요가 없다. 고참은 없고 아이돌만 즐비하다. 귓가를 스치는 노래는 좀처럼 흥얼거리기 어렵다. 좀처럼 떠오르는 멜로디가 없다. 그나마 원더걸스의 ‘텔미’를 흥얼거렸지만 이걸론 부족해. 이효리가 ‘유고걸’로 엉덩이를 흔들어도, 엄정화가 ‘디스코’를 찔러도, 눈길은 가는데 흥얼거려지지 않아. 뮤지션은 홍대 인디펜던트로 죄다 숨어들었나. 대중가요가 사라졌다.
서태지가 돌아왔다. 언제나 서태지가 컴백하면 가요계가 활성화되길 기대한다는 기사가 클리셰처럼 작성된다. 지난 2004년에 발매된 7번째 정규 앨범은 48만여 장 정도가 판매됐다. 지난 7월 29일 발매된 8집 싱글 앨범은 대략 20만 장 정도의 판매량이 추산된다고 한다. 요즘 같은 불황에 대박이다. 하지만 서태지도 더 이상 밀리언셀러가 아니다. 서태지만한 바로미터가 따로 없다. 서태지를 통해 음반시장불황이 비로소 확인된다. 서태지가 돌아와도 판은 그대로다. 밀리언셀러의 시대는 무상하다.
Yo! Taiji!
서태지는 쇼를 했다. 코엑스 상공을 나는 UFO동영상이 인터넷에 돌았다. 충남 보령에서 미스터리 서클이 발견됐다는 뉴스가 검색됐다.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이 Made in 서태지다. 한방 먹었다. 역시 서태지야. 그런데 서태지 노래는 들어봤나? 심드렁하다. 앨범 안 샀어? 끄덕인다. UFO도 뜨고 미스터리 서클도 만들었는데 정작 노래를 들어봤다는 이나 음반을 샀다는 인간이 별로 없다. 서태지는 가수다. 뮤지션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서태지를 구경만 할 뿐 서태지의 노래를 듣는 사람은 예전만큼 많지 않다. 흥얼거리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서태지 컴백 스페셜이 전파를 탔고, 쇼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려 한다. 그 쇼를 즐기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 서태지는 대중가수다. 그럼 대중들이 서태지의 쇼를 즐기고 있나. 최근 ‘기괴한 태지 사람들의 축제(Eerie Taiji People Festival)’라는,서태지가 기획한 락 페스티벌인 ‘ETP페스티벌’이 열렸다. 페스티벌의 규모는 나름대로 근사했다. 무대도 화려했다. 가장 뜨거운 열기는 헤드라이너가 등장하기 전 공연을 펼친 서태지에게 모였다. 헤드라이너는 마릴린 맨슨이었다. 앰프에서 살짝 쇳소리가 들리기도 했건만 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함성을 질렀다. 그리곤 떠났다. 단지 서태지를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이들은 마릴린 맨슨을 등 뒤에 두고 미련 없이 공연장을 떠났다. 헤드라이너를 미련 없이 버리고 가는 태지 사람들의 기괴한 락 공연은 새벽 1시 20분 즈음에서야 끝났다.
Good-Bye
기성세대에게 서태지는 ‘난 알아요’란 첫마디 외에 알아먹기 힘든 가사를 지껄이며 방방 뛰던 78점짜리 신인에 불과했다. 반대로 젊은 세대는 그 알아먹기 힘든 가사를 따라 부를 줄 알았고, 음반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대형 신인이 탄생했다. 소포모어 징크스도 없었다. 잠깐의 공백 뒤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의 타이틀곡 ‘하여가’의 노랫말은 더욱 빨라졌지만 젊은이들은 그 또한 따라 불렀다. 그들만의 문화가 탄생했다. 그것은 변화였다. 기성 세대의 뽕짝이 득세하던 시절에 젊은 세대에게 랩은 적절한 대안이었다. 젊은이들은 서태지를 따라 했다. 어떤 기성세대는 그것이 불순하다고 눈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귀걸이 한 청년이 늘었고, 넓고 큰 힙합바지를 입고 걸어 다니는 아이들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힘이 생겼다. 서태지는 젊은 세대에게 놀이터를 선사했다. 종종 서태지의 방송출연을 불허했지만 그것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테이프를 분해해서 반대로 감으면 ‘피가 모자라’라는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했다. ‘백워드 매스킹(Back Word Masking)’이란 생소한 용어까지 동원됐다. 교회의 장로라는 사람이 TV에 나와서 서태지가 사탄에 들렸다는 촌평을 남겼다. 매스컴이 물기에 좋은 떡밥이었다. 하나같이 서태지의 루머를 전시했고 확산시켰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서태지는 세 번째 앨범을 발표하기 앞서 비범한 계획을 세웠었다. 앨범 발표 후 이뤄진 첫 콘서트는 이례적으로 공중파 방송국을 통해 녹화 방영됐다. 하지만 서태지가 3집 앨범으로 공중파 전파를 탄 건 단 10번 남짓에 불과했다. 그것조차도 무대가 아닌 뉴스를 통해서가 더 많았다. 그 와중에도 3집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서태지가 쇼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서태지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불렀다.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입시지옥에 갇힌 청춘을 저주하듯 그 시절의 아이들은 ‘교실이데아’를 연호했다. 그들에게 ‘교실이데아’는 현실의 언어였다.
확고한 고지가 점령됐다. 10대 문화의 총아를 이루던 서태지에게 투사의 낙인이 찍혔다. 젊은 세대의 기조가 서태지란 이름 아래 정립했다. 10대는 서태지를 통해 놀다가 비로소 저항을 배웠다. 서태지는 세대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에서 세대를 항변하는 전사가 됐다. 4집으로 돌아온 서태지는 미소년의 얼굴을 가렸다. 선그라스와 털모자, 그리고 단발머리가 시니컬했다. 미성 대신 일그러진 목소리로 이상한 랩을 구사했다. 갱스터랩이라고 했다. 알아듣기 힘든 발음을 젊은 세대는 잘만 따라 불렀다.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이르시니 행하노라. 가출했던 청소년들이 ‘컴백홈’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상이 나타났다. 그 해 음반을 가장 많이 판 가수는 김건모였지만 사람들은 김건모보다 서태지를 이야기했다. 서태지는 더 이상 히트곡을 만드는 인기가수도, 패셔니스타도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음반 사전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시대유감’은 가사가 삭제된 채 수록됐다. 극렬한 저항은 곧 전설이 됐다. 팬들은 서태지를 우러러봤다. 그러나 서태지는 돌연간 은퇴를 선언했다. 말들이 많았다. 팬들은 울었다. 그러나 진짜 떠났다. 사라졌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1996년 1월의 일이었다.
Come Back Home
서태지는 첫 앨범을 내기 위해 데모테이프를 들고 음반사를 직접 돌았다. 거듭되는 퇴짜 속에서 발품을 팔던 서태지를 받아준 곳은 2류 레이블에 불과한 반도음반이었다. 서태지는 앨범을 냈다. 대박이 났다. 결국 앨범 2장이 모두 삽시간에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반도음반은 메이저 음반사로 등극했다. 서태지가 만지면 대박이 났다. 마이다스의 손이 따로 없었다. 존재 자체로 하나의 패션이었다. 삼성연구원은 20세기 대한민국 최고의 히트 상품을 ‘서태지와 아이들’이라 발표했다. 서태지라는 원 소스 멀티 유즈를 연구하고 분석했다. 심지어 김대중 대통령까지 나서서 서태지를 문화대통령이라 칭송했다. 이는 서태지의 직책처럼 보였다. 서태지는 앨범을 내고 활동하다 사라지고 다시 돌아왔다. 가수들도 서태지를 따라 했다. 서태지처럼 앨범을 내고 활동하다 사라졌다. 그리곤 컴백했다. 가요프로에서 컴백 스페셜이 생겼다. 서태지를 오리지널로 둔 아류들이 생겨났다. 서태지가 사라지고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혈전이 벌어졌다. 서태지가 사라진 곳에서 서태지를 말하는 이들은 꾸준했다. 영원히 그리워할 것처럼 그랬다.
서태지가 없어도 가요계는 돌아갔다. 서태지에 관한 말의 횟수도 줄었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고 밀리언셀러는 유지됐다. 빈자리가 메워지는 듯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태지의 빈자리를 메운 건 아이돌이었다. 서태지에 대한 영향력을 언급하는 것도 아이돌이었다. 서태지를 선망하던 청소년들이 서태지의 뒤를 따랐다. HOT도, 젝스키스도, 서태지를 말했다. 하나같이 퍼포먼스가 뛰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서태지가 아니라 아이들에 불과했다. 혁신도 파격도 보이지 않았다. 무대는 흉내내기 경연장으로 돌변했다. 서태지로부터 양성된 수요를 착취하기 쉬운 아이템이 개발된 것뿐이었다. 엔터테인먼트가 득세했다. 발 빠른 기획자들은 아이돌 댄스그룹을 양산해 내다 팔았고 무대는 가판대가 됐다. 아이들이 모였다. 무대는 와글와글했지만 끓는 점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주 간혹 서태지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풍문이 발 없는 말처럼 천리를 걷곤 했다.
진짜 서태지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거짓이 아니었다. 은퇴를 선언한지 2년만의 일이었다. 어떤 이는 자기 약속을 지키지 않는 서태지가 불순하다 지적했지만 어떤 이의 얼굴은 이미 상기되고 있었다. 여하간 말들이 많아졌다. 무대 주변이 웅성거렸다. 거물의 귀환 앞에 대중들은 눈이 커졌고 귀를 세웠다.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서태지는 달랑 앨범 한 장만을 발표했을 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레코드점 앞에 줄이 생겼다. 하루 만에 90만장의 앨범이 팔렸다고 뉴스는 보도했다. 어떤 이는 알아먹기 힘든 가사를 담은 ‘Take Two’를 해석했다. 얼터너티브 락이었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댄스곡은 없었다. 서태지는 이 앨범에 퍼포먼스가 필요하지 않다고 전했다. 얼굴 한번 비추지 않은 서태지의 솔로 복귀작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쇼가 없어 조금 한산했지만 향수에 젖은 팬들은 기꺼이 서태지를 소비했다.
Rock’n Roll Dance
시나위 베이시스트 출신으로 잘 알려진 서태지는 기타 리프를 활용한 멜로디 라인을 만들어내곤 했다. 솔로 앨범을 통해 본격적인 락을 시작했다. 은퇴선언을 통해 서태지는 자신의 얼터에고를 버리듯 아이들과 헤어졌다. 아이들에게 베이스를 잡게 만들고 드럼 스틱을 쥐어줬지만 댄서를 밴드로 꾸미는 건 진짜 광대가 되는 짓이었다. 시나위 시절부터 흑인음악을 듣곤 했다지만 서태지는 궁극적으로 락을 연주하는 베이시스트였다. 하지만 대중이 선택한 건 서태지의 댄스음악이었지, 락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생소하다고 했다. 어떤 이는 그래도 역시 서태지라서 좋다고 했다. 서태지의 혁신을 즐기던 대중은 서태지의 얼터너티브를 들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보다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 서태지가 은퇴를 발표할 때 따라 울었던 고등학생 소녀는 20대의 문지방을 넘어서고 있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서태지의 파격도 점점 낡은 언어로 뒤쳐져가고 있었다.
뉴 밀레니엄과 함께 서태지가 진짜 돌아왔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서태지가 입국한다는 공항에 사람이 가득했다. 서태지의 얼굴이 공개되는 건 5년만의 일이었다. 팬들이 몰렸고, 취재진도 모였다. 그 날 공항은 시끄러웠다. 서태지의 새 얼굴이 화제가 됐지만 새 앨범도 함께 돌아왔다. 며칠 뒤, 빨간 레게머리를 한 서태지가 자신의 밴드와 함께 등장했다. 새 앨범은 조금 달랐다. 서태지는 목을 긁어내는 그로울링을 토해냈다. 미성을 긁어댔다. 어김없이 파격이란 말이 들렸지만 한쪽에선 심드렁한 소리를 냈다. 빨간 레게머리의 서태지는 스케이드 보더와 비보이를 동원해 무대를 꾸미고 헤드뱅잉을 했다. 열광하는 팬들 사이에서 식상한 눈빛이 감지됐다. 형태는 많이 변했으나 뭔가 빠져있었다. 그건 파격적 시도라기보단 일종의 흉내에 가까웠다. 레게머리가 유행하고, 하드코어 음악이 새롭게 인기를 얻고 있다는 보도가 차라리 낯설었다.
서태지가 만들어낸 음악이 혁신이라 평가 받았던 건 그것이 온전한 새것이라서가 아니라 대중음악의 최전선에서 그것들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혁신은 아니지만 시도로서의 긍정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서태지의 음악에 혁신이라는 네임밸류가 생겼다. 서태지가 하드코어 장르의 음악을 들고 나오자 반발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홍대클럽의 인디 밴드들이었다. 서태지의 은퇴 이후 가장 큰 수혜를 누린 건 엔터테인먼트였다. 춤추는 아이돌이 무대에서 주목 받는 사이 인디펜던트는 홍대 지하에서 음악을 꾸렸다. 그들이 반 서태지 전선을 형성했다. 반면 서태지의 수혜를 얻어 유명세를 치르는 인디 밴드들도 있었다. 하지만 음지에서 활동하던 인디밴드들은 서태지가 찾아낸 새로운 장르를 비웃었다. 그건 이미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이었다. 대중들은 서태지의 음악을 흥얼거리지 않았다. 단지 밀리언셀러의 대열에 참가한 이들 중 온전한 팬들만이 서태지의 무대를 찾았다. 그 반대편에서 안티진영이 독설을 풀었다. 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팬덤의 장벽이 발생했다.
울트라매니아
언제나 현상을 주도하는 건 서태지였다. 서태지가 나타나고 대중이 열광하면 언론이 적어냈다. 서태지가 제안한 변화가 먹히던 시절이 있었다. 대단한 충성심을 지닌 팬들부터 그저 서태지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이들까지, 서태지의 음악에 매료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양상이 변했다. 서태지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보다 서태지를 구경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순수한 ‘울트라매니아’만이 철옹성처럼 서태지를 감싸고 돌았다. 서태지는 100명의 팬보다 1명의 매니아를 원한다고 했지만 단 1명의 매니아를 상대로 장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태지는 음악적 영향력만으로 소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뮤지션이자 사업가였다. 그는 음악을 만드는 동시에 무대를 기획하고 컨셉을 구상했다. 오늘날 엔터테인먼트가 서태지로부터 얻은 힌트는 올 라운드 플레이어로 가수를 육성하는 시스템이다. 역설적이지만 창작을 상업적으로 연계했던 서태지의 노하우가 남긴 건 상업밖에 없었다. 그건 서태지의 의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원인 제공자로 지목된 건 서태지였고 화살이 향하는 곳도 서태지였다.
2001년부터 밀리언셀러가 사라졌다. 많은 가수들이 등장했지만 음반판매량 백만 장을 넘기는 가수는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징조들이 이야기됐다. 음반 시장이 점점 위축되고 있다. 볼멘소리들이 섞여 나왔다. 요즘은 들을만한 음악이 없어. 평범한 댄스곡 일색의 무대에 사람들이 질식했다. 집집마다 보급된 인터넷은 불법다운로드를 활성화시켰다. 길보드차트라고 불리던 리어카 테이프는 실체라도 있었다. 어떤 노래가 인기를 얻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오픈 마켓이라도 됐다. 하지만 클릭 한번으로 얻어지는 음악은 개인의 방을 맴돌 뿐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유통 구조도 변하고 있었다. 음반 대신 음원이 소비되고 있었다. CD플레이어 대신 MP3를 찾는 사람이 늘었다. 음반판매량의 저하는 새로운 시장 개척을 더욱 부채질했다. 덕분에 엉뚱한 이들이 수혜를 누렸다. 핸드폰 연결음이나 벨소리에 사용되는 음원들이 이동통신사에 헐값에 매도됐다. 음악은 핸드폰 신호음으로 몰락했다. 플레이어 대신 컴퓨터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에 익숙해졌다. 음반시장은 급격히 무너졌다. 거대한 음반매장들이 도산하거나 문을 닫았다. 동네의 자그마한 레코드점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길거리만 나가도 들을 수 있었던 대중가요들이 점점 듣기 힘들어졌다.
2007년, 5년 만에 서태지는 새앨범을 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감성코어라고 했다. 하지만 예전만큼 관심을 얻지 못했다. 전파력이 약해졌다. 그 해 최고 음반판매량으로 기록된 서태지의 7번째 앨범은 50만장이 채 안됐다. 서태지의 7번째 앨범은 서태지를 밀리언셀러에서 끌어내렸다. 충심이 강한 팬들은 여전히 서태지를 연호했다. 하지만 그 팬덤의 외벽에 놓인 이들은 점차 냉담해지고 있었다. 웹상에서 서태지 팬과 안티팬은 끊임없이 공방했다. 과거에도 서태지 팬들은 끊임없이 싸웠다. 하지만 그 대상이 달라졌다. 과거 서태지 팬들은 서태지가 제도적 권력에 맞설 때 힘을 보탰다. 하지만 오늘날 서태지 팬들은 제도가 아니라 서태지를 공격하는 대중들과 맞선다. 그 상황에서 서태지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서태지의 적은 대중이 아니다. 서태지는 그저 팬들의 보호 뒤에서 무력하게 존재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음악도 아류로 분류됐다. 감성코어라는 말이 이모코어(Emotion Core) 앞에서 무색해졌다.
환상 속의 그대
활동 후 잠적은 서태지에게 있어서 철저한 공식과도 같은 것이다. 자연인 정현철은 결코 드러날 수 없는 가상의 세계다. 팬들은 무대에 선 서태지만을 기억한다. 그건 그 무대 밖의 정현철을 본적이 없는 까닭이다. 때때로 방송을 통해 집을 공개하고 자유로운 일상을 노출한다지만 그것 역시 정현철이 아닌 서태지의 연출일 뿐이다. 정현철을 보여주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다. 서태지가 스스로 그 공식에 갇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창백하고 하얀 피부의 미소년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네버랜드의 피터팬과 같은 서태지와 달리 그의 팬들은 나날이 늙고 변하는 중이다. 과거 중, 고등학생 소녀 팬들은 애 엄마가 됐다. 17년이 지나는 사이 서태지는 변치 않았지만 팬들은 변했다. 10대였던 팬들은 20대를 거쳐 30대가 됐다. 더 이상 10대의 이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회로 나가 현실에 맞선다. 서태지의 8집 싱글 타이틀곡 ‘모아이’는 모아이의 대자연에서 느낀 신비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서태지가 대자연의 신비를 느낄 때, 그의 어떤 팬들은 현실의 추악함을 대면하고 있다. 예전에 자신들과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느꼈던 팬들이 더 이상 서태지와 같은 것을 볼 수 없게 됐다. 연대감이 사라졌다.
신비주의는 쉽게 깨진다. 서태지는 네버랜드의 피터팬이 아니다. 서태지도 늙는다. 언젠가 주름이 생기고 피부가 쳐질 때가 되면 신비주의도 함께 깨진다. 최근 서태지는 기자회견에서 스스로에게 덧씌워진 신비주의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신비주의는 서태지에게 양날의 검이다.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하다. 서태지와의 인터뷰를 허락 받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는 인터뷰 중 녹음과 촬영을 불허한다. 그의 인터뷰 사진엔 항상 서태지컴퍼니 제공이란 꼬리말이 따른다.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어떤 사람들은 서태지가 활동하지 않을 때, 그가 외국에 나가있는 줄로만 안다. 그가 자신의 집 안에서 꿈쩍도 안하고 사는 사람인 줄 모른다. 서태지의 사생활은 놀라울 정도로 일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서태지는 ‘환상 속의 그대’가 된다. 한때는 그것이 서태지의 매력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신비주의가 서태지를 잊게 만든다.
서태지는 항상 자신들의 팬을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상대라고 말한다. 팬들도 그런 서태지에게 감동한다. 서태지는 팬들에게 대장이라 불린다. 대장은 선두에 서서 그룹을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의 서태지는 예전만큼의 활력이 없다. MBC에서 방영된 서태지 컴백 스페셜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에서 서태지는 처음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시청률은 10%를 넘지 못했다. 같은 시간대에 방영됐던 ‘황금어장’의 평균시청율은 평균 15%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MBC는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 과거 서태지는 말을 낳는 대상이었지, 말을 만드는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서태지는 흉가영상을 내보내고, UFO를 띄우거나, 미스터리 서클을 만든다. 거대한 엔터테인먼트를 기획해 흘려 보내곤 짠하고 나타난다. 그럼에도 반응은 미비하다. 물론 팬들은 열광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무대에서 내려보니 생각보다 관중이 부족하다.
시대유감
서태지의 신곡 중 ‘T’ik T’ak’이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서태지의 노래엔 의미가 모호한 가사들이 많다. 그래서 때때로 해석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신곡에 얽힌 풍문엔 묘한 기대감이 얹혀있었다. 실제로 8월 3일 코엑스에서 펼쳐진 게릴라 콘서트 중에 서태지는 시국의 흉흉함을 코멘트했다. ‘시대유감’을 부르기 전이었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간 사람들은 때때로 TV를 보면 외롭다고 했다. 전쟁터 같은 종로 거리와 달리 TV는 백치미 같은 쇼가 가득했다. 서태지는 락을 지향한다. 락은 항상 시대에 저항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모인 밴드들은 미국의 베트남 참전을 반대했고, 7~80년대 한국의 포크락은 유신에 저항하다 탄압당했다. 유희는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저항이자 강력한 언어다. 사람들은 들을만한 노래가 없다고 한다. 흉흉한 세상에서 자신들을 위로해줄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시대유감이다.
서태지의 팬들은 실로 대장을 따른다. 서태지는 점점 풍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에겐 진심 어린 팬들이 많다. 그들은 서태지가 어느 쪽으로 가길 요구하기 보단 서태지가 가는 쪽으로 따라간다. 서태지가 고립될수록 서태지의 팬들도 고립되고 나가떨어진다. 서태지가 열려야 팬들도 편해진다. 아군이 늘어야 힘도 난다. 우연이건 필연이건 신비주의의 탈은 서태지를 키운 팔 할이었지만 지금은 서태지를 좀먹는 팔 할이다. 더 이상 젊은 세대는 서태지와 함께 저항하지 않는다. 서태지가 쇼를 해도 보는 사람만 본다. 사전음반심의제 폐지를 요구하던 과거는 이슈가 됐지만 저작권협회와 싸우는 오늘은 크게 부각되지 못한다.
밀리언셀러의 시대는 갔다. 대중가요가 사라지고 있다. 노래를 듣지 않는다. 서태지가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해도 서태지와 팬이 나누는 그들만의 추억에 불과하다. 세상의 언어와 괴리되는 추억 속에 그들이 있다. ‘북공고 1학년 1반 25번’서태지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있나. 서태지의 쇼는 더 이상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 노래가 사라진 마당에 쇼는 무력할 뿐이다. ‘난 알아요’를 외쳐봤자 요즘 아이들은 서태지를 모른다. 피아노를 치며 열정을 논하기에 서태지는 생경한 사람이 됐다. 세상의 언어를 노래해야 세상과 멀어지지 않는다. 서태지의 쇼도 그래야 팔린다.
1.개인적인 신변에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 불과 2년 전 그랬던 것처럼 변화의 조짐은 우연히도 찾아온다. 물론 계기를 만든 건 내 자신이지만. 그 변화가 찾아온다 하더라도 무턱대고 반길 일은 아니다. 기회와 고난의 경계가 선명하다.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쉽다. 일종의 모험이다. 하지만 난 그 모험에 도전하고 싶다. 한 단계 성장하고 싶다. 시야가 넓어지길 갈망한다. 시험대에 올랐다.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비록 무산된다 해도 개인적으로 좋은 자극이 되는 사건이리라.
2.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고시원의 묻지마 살인. 세상을 비관한 남자가 자신이 살던 고시원에 불을 지르고 대피해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흉기를 휘둘렀고 결국 6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했다. 이런 쳐 죽일 놈, 하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고민해볼 일이다. 그 사내는 대체 왜 자신의 불행과 무관한 이들에게 칼을 휘둘렀나? 단지 어느 한 놈 목매달고 끝날 일이 아니다. 세상은 점차 흉악해지고 있다. 그건 사람 탓인가? 세상 탓인가? 인간은 대체 왜 스스로를 상실하고 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 아니다. 이젠 알아야겠다. 무엇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3.플레이오프가 뜨겁다. 내가 응원하는 기아는 일찌감치 떨어져나갔음에도 난 야구에 관심이 많다. 차라리 응원하는 팀이 없다는 게 더 재미있다. 물론 한편으로 두산이 올라가길 바라는 마음이 적잖다. 한국시리즈가 끝나기 전에 잠실 구장에 한번쯤 들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다. 두산이 올라가면 기회는 느는 법이고. 하여간 오늘로 플레이오프 현재 스코어가2:2가 됐다. 절대강자 SK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이런 시나리오라면 누가 올라가도 왠지 보나마나가 아닐까. ㅎㄷㄷ
4.간만에 휴가를 얻었다. 사무실보다도 자주 가는 극장에 가지 않는 한 주다. 하지만 쉴 팔자는 아닌가 보다. 갑자기 수요일까지 끝내야 할 예기치 않은 외고 2개가 생겼고, 조만간 지방에서 처리해야 할 일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의대졸업을 앞둔 친구의 제안으로 레크레이션 1시간을 맡게 됐는데 아무래도 너무 생각 없이 덜컥 수락해버렸나 보다. 그 때만해도 1달 이상의 여유가 있었는데 부산영화제 끝나고 어쩌고 하니 불과 2주도 안 남았다. 이러다 망신살 뻗치는 거 아닐까 몰라. 근데 무슨 소리로 1시간을 버틸까? 친구 왈, 대중적인 내용으로 재미있게 해줘. 그게 사실 제일 어려운 법이지.
5.외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서태지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 아니, 쓰기로 했다. 난 한 때 서태지에 관련한 모든 것을 수집할 정도로 열렬한 팬이었다. 작년이었던가. 옷장 천장 구석에서 수북하게 먼지 쌓인 채 방치됐던 서태지 스크랩북을 비롯해 브로마이드까지, 죄다 버렸다. 미련도 없었다. 마음이 변했다. 내 마음은 왜 이리 냉랭해졌나. ‘모아이’도 큰 감흥이 없다. 예전 같으면 서태지 심포니 공연에 가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굴렸을 것이다. 별 감흥이 없다. 난 왜 이렇게 냉랭해졌나. 모든 물음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일단 저지르고 봐야겠다.
6.요즘 개콘에 열중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왕비호를 보기 위해서 시청하는 편인데 대부분의 프로를 좋아한다. 생각해보면 꽤나 장수하고 있는 프로다. 종종 매너리즘에 빠지는 듯싶다가도 꽤나 웃겨준다. 요즘 새로운 코너 몇 개가 생겼는데 역시나 빵 터졌다. 무엇보다도 요즘 최고는, 난…..그저 개콘 보고 싶을 뿐이고! 안어벙의 귀환.
관심은 있다. 다만 엄정화가 컴백한다더라, 그래? 이효리가 컴백한다더라, 그래? 서인영이 컴백한다더라. 그래서? .....응? 서태지가 컴백한다더라, 아, 그래? 나 설레지 않는 거 맞지?
언제부터인지 명확히 기억은 안 난다. 그저 서태지란 존재에 대한 관심의 열기가 식어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나마 지난 앨범은 그저 의무적인 관심으로 집어들었지만 이번 앨범을 내가 구매하게 될진 잘 모르겠다. 난 나이가 들었고, 그의 피터팬 놀이에 자극받을 나이는 지났다. 아...그냥 무덤덤해졌다. 요즘은 고급차 CF까지 찍더라. 그도 돈에 초연하지 않다. 어쩌겠나. 사람이라는 게 티나는 것을. 예전만큼 매력이 없다. 무엇보다도 음악이 자극을 주지 못한다.
2. 써야 할 리뷰가 4개나 남았다. 같은 영화를 다른 방식으로 2번 반복해서 써야 한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일 수도 있다. 네오이마주 세미나가 코앞인데 토론문을 작성하지도, 아니, 그 전에 정해진 영화 한 편조차 못 봤다. x됐다. 근데 이상하게 맘이 편하다. 미쳤나 보다. 오늘도 날을 샐 거 같다.
3. 그 놈의 돈돈돈돈돈. 세상이 미친 것 같다. 물론 난 돈 없이 살 수 있는 초현실적 종자야, 라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은 없다. 나도 밥먹고 똥싸는 사람이라서 쌀과 화장실 있는 집이 필요하다. 하지만 모르겠다. 지겹다. 사람은 어디가고 경제만 남았는지 모를 일이다. 정약용 선생이라도 모셔놓고 실용주의의 의미에 대해서 담론을 나누고 싶다.
4. 펜타포트 페스티벌이 시작됐다. 난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물론 가보고 싶단 생각도 안 든다. 올해, 트래비스가 온다지만 뮤즈가 왔을 때 동하는 마음조차도 억누른 나에게 트래비스는 떡밥이 약하다. 다들 언더월드에 뽕맞은 듯 설렌다지만 난 일렉트로니카나 DJ계열에 약하다. 게다가 비가 줄창 왔다. 이런 날은 집에 짱박혀 있는 게 최고다. 게다가 티켓값이 엄청 비싸다. 시밤.
5. 요즘 생활 패턴이 개판 오분전이다. 밤중에 잠을 자면 3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눈이 말똥말똥 떠진다. 한여름에 늘어진 개처럼 피곤에 못 이겨 잠든 것치고는 기이한 현상이다. 최근에 날을 새는 게 일상처럼 정착했다. 큰일이다. 아직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진 않았지만 신경이 예민해지는 게 확 느껴진다. 정상적인 생활을 찾고 싶다. 아침형 인간은 과연 나와 무관한 삶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