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흐트러진 머리와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커다란 눈에 가득한 애수. 고독한 한 마리 늑대처럼 나타나 전세계적인 팬심을 자극한 세바스찬 스탠은
우직하면서도 유연한 남자다.
마블 유니버스는 21세기 배경의 신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유럽의 신마저 뉴욕을 밟게 만든 이 맹랑한 세계관은 실제 도시를 배경에 두고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감상에 활력을 더한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로 확실하게 착륙한 세바스찬 스탠 역시 이런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코믹북에 기반을 둔 영화는 신화이지만 어떤 면에선 사람들이 논의하길 바라는 지점보다 더
많은 부분이 현실적으로 반영돼 있다.” 그렇다. 그에게 있어서 마블 유니버스는 진짜는 아니되 진짜를 겨냥하는 세계다. “많은 재향군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사회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른다. 사회는 더 이상 기존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이번 작품에서 이
캐릭터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다. 그는 그 사회에서 어떻게 적응해나갈까?” 여기서 ‘이번 작품’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를
의미하고 ‘이 캐릭터’는 당연히 스탠이 연기한 버키다. 그리고 그가 남긴 물음표에 대한 답은 마블 유니버스의 차기 라인업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겸손함이 느껴지지만 스탠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알게 된다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버키는 루마니아를 배경으로 처음 등장한다. 사실 세바스찬 스탠은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 콘스탄차에서
태어난 루마니아 출신 배우다. 하지만 그는 여덟 살의 나이에 루마니아를 떠나 오스가십트리아의 빈으로 건너갔고, 열두 살이 되던 해엔 미국으로 건너갔다. 어린 시절의 스탠에겐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스탠의 내면을 강인하게 다듬어주는 계기가 됐다. “우리 가족이 세 나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고, 어디로
다다를 수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내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지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여겼다. 믿음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스탠이 처음으로
연기에 발을 들인 건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당도한 빈에서였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오디션장에서
첫 역할을 얻었다. 루마니아의 노숙자 아이들 중 하나였다. 이
경험을 통해 어린 스탠은 배우라는 길에 흥미를 느꼈다고 말한다면 근사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전철 안에서 촬영한 단편이었는데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세트장
안에서 긴시간 동안 기다린다는 건너무
지루했다.”그리고 두 번째로 국경을 넘어 정착한 미국 뉴욕에서 그가 배우를
꿈꾸게 됐다는 말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근사한 계기가 찾아온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첫 해에서야
연기를 좋아하게 됐다. 청력 장애가 있었음에도 학교 연극을 모두 책임지던 친구가 있었다. 장애에도 좌절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사실상 나를 도전하게 만들었다.”그렇게 고등학생 시절부터 배우라는 꿈을 품고 오디션에 참가하며
청사진을 그려온 스탠은 뉴저지의 예술학교에 진학하고, 1년간 영국에 있는 극단을 찾아가 연기를 수학하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선 긴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스탠은 수많은 오디션장을
전전하면서 수없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오디션장에서 마셔왔던 숱한 고배 끝에 맛본
성취가 자신을 키운 자양분이 됐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일들을
돌아보면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럽고, 마음 상하는 일이었지만
거기엔 놀라운 것도 있었다.” 그는 2년 동안 한 캐스팅 감독 앞에서 10번이 넘는 오디션을 치렀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비로소 그 캐스팅 감독에게서 합격 통보를 받아냈다.
“한 번도 붙지 못했지만, 그 캐스팅 감독님과 연결될 수 있을 때마다 오디션을 봤다. 그랬더니 다음 번엔 나를 기억하더라." 어쩌면 이런 근성이야말로 스탠이 지닌 진짜 재능일지도 모른다.
스탠은 TV시리즈 <가십걸>과 <킹스>에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조금씩 얻어나갔고
조나단 드미가 연출한 <레이첼, 결혼하다>(2008)나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2010)과 같은 준수한 영화에도 이름을 올리며 경력을 확장했으며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통해 대중적인 얼굴로 거듭났다. 그런데 전작인 <퍼스트 어벤져>(2011)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의 궤도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되레 뒤늦게 주목을 얻었다. 당연한 일이다. 캡틴 아메리카가 되기 전 연약한 청년이었던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를 돕는 버키 반즈는 캡틴의 전우이자
스티브의 절친으로 거듭나지만 영화의 결말부에 다다라 죽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채 등장하는 윈터 솔져의 정체는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진 철저히 봉인된 상태였다. 물론
원작을 충실히 따라잡은 코믹북의 팬이라면 그의 전사를 명확히 짚고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관객 입장에선 윈터 솔져가 버키일 것이란 예감을 쥐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속편에서 테러 집단의 세뇌를 받고 캡틴 아메리카를 공격하는 빌런 ‘윈터 솔져’로 부활한 버키는 캡틴 아메리카가 던진 비브라늄 방패를
맨 손으로 잡아내는 장면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는 새로운 동력을 확보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대립을 그린다는 점에서
강력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그 이벤트를 폭발시키는 버튼은 바로 버키다.
세계적인 기대감을 모으는 볼거리에서 가장 강력한 갈등을 유발하는, 그야말로 시리즈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존재감을 과시한 덕분에 세바스찬 스탠의 인지도는 만월처럼 차 올랐다.
그러나 스탠은 대학시절의 은사이자 멘토로 꼽는 래리 모스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배역을 얻고 인물에 공들이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데서 시작해라'라고
말했다. 결과보다 경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경험을 점차 늘려나가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마션>(2015)에 출연했던 스탠은 <더 브론즈>(2016)라는 코미디 영화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다. 또한 J.K.시몬스와 맨디 무어가 출연하는
또 다른 코미디물 <아임 낫 히어>(2017)의
출연 계약을 마쳤고, 평소 흠모하는 배우로 꼽던 짐 캐리가 제작하는
TV시리즈에서도 등장할 예정이다. 버키의 여정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세바스찬 스탠 역시 현재진행형의 배우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좌우명을 따라 걸어왔다. "만약 이 일이 잘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보겠다.” 다행히도
이 좌우명은 스탠에게 잘못된 길을 가리키진 않은 것 같다. 그러니 멈추지 않을 것이다. 보다 즐겁게, 더욱 사랑하면서.
무명 배우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변신했다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할리우드에선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가장 최근에도 그런 사례가 탄생했다. 크리스 프랫은 지금 완전히 다른 궤도로 진입했다.
사실 크리스 프랫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에 승선하기 전까지 완전한 무명 배우에 불과했던 건 아니었다.
올해로 6시즌까지 진행된 TV시리즈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에서 연기한 앤디 역으로 적지 않은
인지도를 얻었고, 크리틱스 초이스 TV어워즈에선 코미디 남우조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사실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의 앤디는 유쾌한 유머 감각을 지닌 캐릭터란 점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로드와 유사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외모만을 놓고 본다면 마치 지구의 남반구와 북반구처럼, 믿을 수 없도록 동떨어진 존재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근육질의 육체미를 자랑하는 스타로드와 달리 앤디는 테디베어처럼 둥글둥글한 곡선미가 눈에 선명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크리스 프랫은 한 TV쇼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자신이 아내에게 소리쳤던 일화를 밝혔다. “여보! 75파운드나 몸무게를 빼야 되니 빵은 그만 구워!” 반쯤은 농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에겐 일종의 절실함이 있었다. 마블
코믹스의 팬이기도 했던 그에게 마블 유니버스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제안은 그야말로 꿈 같은 일이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의 경력 안에서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감초 역할에 특화된 편이었는데 그런 역할을 통해서 경력을
쌓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다른 오디션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로 다크 서티>(2012)에 출연한 뒤부턴 연기하고
싶은 배역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고, 매니저를 통해서 새로운 오디션을 찾아갔다.” 바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말이다.
사실 <제로 다크 서티>에서
크리스 프랫이 특별히 인상적인 역할을 맡았던 건 아니다. 그 이전에 출연했던 <원티드>(2008), <신부들의 전쟁>(2009)이나 <머니볼>(2011),
<5년째 약혼 중>(2012) 등의 작품에서 어떤 배우가 맡았다 해도 상관 없을
만한 역할을 전전해왔다. 그나마 지난해에 제작된 <딜리버리
맨>과 <그녀>에선
각각 극의 중심인물이 지닌 정서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인물로 등장하거나 중심인물의 정서적 결핍을 긍정적인 태도로 수긍하고 이해하는 인물로서
자리하며 나름의 존재감을 어필할 만한 인물로 등장한 바 있다. 다만 편차가 심해 보이는 체중으로 인상이
자주 변화하는 탓에 크리스 프랫이란 배우에 대한 일관성 있는 인상을 꿰어내기가 쉽진 않았을 거다. 어쩌면
앞서 나열한 출연작들보다도 주연 캐릭터의 내레이션을 맡은 <레고 무비>(2014)에서의 존재감이 보다 확실하게 느껴질 정도랄까.
무엇보다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로드를 보며 앞서 열거한 그의 출연작들을 짐작하는 이란 드물 것이다. 단언컨대 그럴 수밖에 없다. 식스팩과 수백 광년쯤은 동떨어진 듯한
체형의 무명배우였던 그의 과거를 연상했을 때 스타로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사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어떤 면에서 크리스 프랫과 처지가
유사한 작품이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또한
마블 코믹스의 역사를 차지하는 작품이지만 <어벤져스>의
세계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세계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크리스 프랫에겐 좋은 기회였다. “시나리오와 감독의 디렉팅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뭘 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배우로선 도움이 된다.” 대중에게도 낯선 역할인 만큼 자신의 관점이 새로운 기준이 된다 해도 상관없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낯설지 않은 작품이었다. 유년시절 친구를 통해서 우연히 원작 코믹스를 접한 적이 있었고 자신도 그 중
몇 권을 소장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으론 운명적이란 의미를 붙일 수도 있을 거다. 게다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그의 기대를 넘어서는, 일종의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출연을 결정하기 전에 시나리오를 보지 못했다. 막상 시나리오를
읽었을 땐 내 생각보다 훨씬 좋은 역이라서 안도했지. 시나리오가 아주 웃긴데, 그게 딱 제임스 건 감독 스타일이다. 그는 실제로도 아주 재미있는
친구다.”
사실 크리스 프랫은 자신과 함께한 동료들의 칭찬을 곧잘 하는 편인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도 주변 동료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히
입바른 말을 잘해서라기 보단 그가 실제로 사려 깊고 친절한 동료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다분해 보인다. 그는 <당신은 몇번째인가요?>(2011)라는 영화로 크리스 에반스와
함께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는 주연을 맡은 크리스 에반스의 역할에 오디션을 봤지만 작은 역할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크리스 에반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크리스
에반스 또한 SNS를 통해 공개적으로 크리스 프랫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었는데 두 배우가 모두 마블
유니버스의 히어로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치곤 기묘한 일이다. 언젠가 <어벤져스>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중첩될 가능성도 다분한 만큼 두 배우가 한 스크린에 자리할
가능성도 존재할 것이다.
한편 그는 자상하고 세심한 가장이기도 한데 한번은 동료배우이기도 한 아내 안나 패리스의 머리를 땋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화제가 됐고, 한 영상 인터뷰에서 머리 땋기 실력을 직접 시연해 보이기도 했다. 천연덕스럽게 내년 개봉작으로 예정된 <쥬라기 공원>의 새로운 속편을 홍보하며 1분만에 완벽한 머리 땋기를 선보인
그는 “(머리를 묶을 땐) 고무밴드보단 스크런치라고 불리는
걸 쓰는 게 낫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촬영으로 오랫동안 집을 비운 탓에
아내로부터 생후 13개월이 된 아들이 아빠를 못 알아볼 수도 있으니 낙심하지 말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자신을 보고 ‘아빠’라고 불러주는 어린 아들로 인해 눈물을
흘리면서 이 날을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크리스 프랫은 우주를 지키는 영웅을 연기하는 배우이기
전에 자신의 가정에 충실한 남자인 것이다.
크리스 프랫에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로 마블 유니버스의 주인공이 됐다는 건 배우로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는 최근 LA에 있는 한 아동병원을 방문했다. 자신이 영화에서 입었던 의상들을 입고 스타로드로서 아이들을 찾았다. 그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관련된 인터뷰 중 자신의 촬영
의상을 챙겨놨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만약
영화가 개봉하고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아이들을 찾아갈 거다. 영화가 크게 성공해서 아픈 아이들에게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피터 퀼이나 스타로드가 찾아오는 게 큰 의미가 된다면 그럴 거다. 그럼 이 영화가 내게 진정한 의미가 될 거다. 가장 멋진 건 내
아들이 언젠가 이 영화를 볼 것이고, 어쩌면 내가 어떤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거란
사실이다. 그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는 거다.” 생각해보면 크리스 프랫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선한 인물로서 자리했다. 때때로
우스꽝스러울지언정 그랬다. 그는 본래 따뜻한 심성을 지닌 배우다. 진정한
영웅의 자격을 지닌 사람이다. 그의 식스팩보다 그 착한 마음이 진정한 매력이자 재능일 것이다. 그 마음이 그의 경력에 좋은 영감이 될 것이다. 물론 그의 식스팩을
볼 기회는 유효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속편이 2017년에 공개될 예정이니 말이다. 물론 식스팩보다도
따뜻한 마음이 더욱 매력적인 남자, 크리스 프랫의 유쾌한 행보를 계속 목격하고 싶다.
비범한 시작과 달리, 벤 애플렉은 소모적이고 낭비적인 경력 속을 겉돌았다. 하지만 재능은 그가 망가지는 것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진정한 삶의 궤도에 오르고 있다.
두 살 차이가 났음에도 벤 애플렉은 맷 데이먼과 유년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증을 지켜보던 어린 애플렉이 데이먼을 만난 건 다행이었다. 보스턴에서 레드삭스 팀의 저지를 입으며 우정을 쌓아온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배우로서의 꿈을 고무시키는 대상으로 자리하며 성장해왔다. PBS의 미니시리즈에 출연한 애플렉이 아역배우로서 이른 경력을 쌓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데이먼과 같은 고등학교를 진학하며 배우로서의 담금질에 동행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스쿨타이>(1992)로 동시에 영화계에 진입한다.
애플렉과 데이먼의 공동각본작이자 공동출연작인 구스 반 산트의 연출작 <굿 윌 헌팅>(1997)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보다 남다른 작품일 수 밖에 없다. 타고난 천재였으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을 수 없었던 청년 윌과 그의 자기 방어적 오만과 결핍적인 심리를 치유하는 심리학 교수 션의 관계가 두드러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는 애플렉의 몫이었다. “내 생애 최고의 날이 언제인지 알아? 내가 너희 집 골목에 들어서서 네 집 문을 두들겨도 네가 없을 때야. 안녕이란 말도 없이, 작별의 인사도 없이, 단지 떠났을 때.” 공사장에서 맥주를 홀짝이던 척키가 자신의 재능이 놓일 자리를 명확하게 분간하지 못하는 윌에게 던지는 이 대사들은 거친 만큼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작품은 큰 성공을 거뒀고, 두 사람의 손에는 오스카 각본상이 쥐어졌다.
<굿 윌 헌팅>은 두 사람의 경력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준 작품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비로소 홀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나갈 출발점을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굿 윌 헌팅>이후로 애플렉은 마이클 베이의 SF블록버스터 <아마겟돈>(1998)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이클 베이의 작품답게 평단으로부터 융단폭격에 가까운 비아냥을 들었지만 역시 전세계적인 흥행성적을 기록한 이 작품은 애플렉에게 할리우드 흥행배우라는 수식어를 안겼다. 다소 심심하게 들리는 이 훈장은 그의 입지가 가파르게 변하고 있음을 알리는 바로미터였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도 말이다.
<포스 오브 네이처>(1999)부터 <서바이빙 크리스마스>(2004)까지, 애플렉이 출연한 수많은 작품 가운데 애플렉에게 배우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부여한 작품은 현저히 드물다. 일찍이 애플렉과 두 번의 작업 경험이 있는 인디영화 감독 케빈 스미스의 <도그마>(1999)에서 맷 데이먼과 의기투합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은 범작 혹은 그 이하의 수준에 머물렀다. 마이클 베이의 전쟁 블록버스터 <진주만>(2001)이나 한때 연인이었던 기네스 펠트로우와 함께 한 로맨스물 <바운스>(2001)는 끔찍한 평가에 시달렸고, 마블 코믹스 원작의 안티히어로물 <데어데블>(2003)이나 필립 K. 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둔 오우삼의 SF액션물 <페이첵>(2003)은 그의 경력에 새롭게 찍힌 얼룩과 같았다. 역시 과거 애인 사이였던 제니퍼 로페즈와 함께 한 로맨틱 코미디 <갱스터 러버>(2003)나 <서바이빙 크리스마스>(2004)와 같은 가족코미디는 웃음거리나 다름 없는 대우를 얻었다. 2003년 골든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애플렉은 <페이첵>과 <갱스터 러버>, <데어데블>까지 무려 세 편의 영화로 최악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뒤, 그 멍에를 뒤집어쓰는데 성공했다.
사실 2002년도 작품인 <썸 오브 올피어스>와 <체인징 레인스>는 애플렉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그 수많은 범작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쓸만한 경력이었다. 현실적인 정치적 스릴러였던 두 작품 속에서 공통적으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등장했다. 애플렉의 이력을 새롭게 반전시킨 <할리우드랜드>(2006)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실화를 통해 할리우드의 추악한 이면을 그린 이 작품에서 애플렉은 클라크 켄트에 이은 2대 슈퍼맨을 연기했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조지 리브스로 등장한다. 이는 할리우드 스타로서 화려한 인지도를 쌓아가면서도 경력과 연기적 비난에 직면했던 애플렉의 과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했다. 제63회 베니스영화제 경쟁작으로 출품된 이 작품으로 애플렉은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다. 자신의 본심을 감춘 정치인으로 출연한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2009)에서의 연기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이런 사례와 무관하지 않다.
일찍이 짧은 단편물을 만든 경험이 있다지만 애플렉의 연출 선언은 파격적이었다. 그가 선택한 첫 연출작은 오늘날 미국 스릴러 문단을 대표하는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곤 베이비 곤>(2007)이었다. 의심 어린 시선 속에서 친동생 케이시 애플렉과 모건 프리먼 등을 캐스팅해서 완성한 이 작품은 완연한 극찬을 얻어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보스턴 출신인 애플렉이 지니고 있는 지역적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매력적이다. 이는 척 호건의 범죄소설을 각색한 두 번째 연출작 <타운>(2010) 역시 관통하는 특성이다. 뉴욕을 터전으로 둔 범죄물의 장인 마틴 스콜세지의 시선을 비롯해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와 휴머니티의 감수성을 품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철학을 연상시키는 그의 연출작들은 작품 보는 눈이 없는 배우로 취급 당하던 애플렉의 과거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사라진 소녀의 행방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 끝에서 놀라운 질문을 던지는 <곤 베이비 곤>은 제도적 정의와 배치되는 인간적인 선택의 딜레마를 그리는 가운데,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유려한 시선으로 조망하는 서정적인 스릴러다. 반대로 <타운>은 늪과 같이 개개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지역 사회 내의 범죄적인 전통 속에서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한 인물의 고뇌를 불안하게 응시하면서도 그 갈망을 끝내 응원하고 구원하는 하이스트 무비다. 근작인 <타운>은 장르적인 클리셰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한 애플렉의 자기실험에 가깝다. 이 두 작품만으로 애플렉은 거장으로서의 가능성까지 넘보는, 비범한 면모를 새롭게 덧씌우는데 성공했다.
물론 애플렉은 여전히 연기적 가능성을 인정 받는 배우다. 토미 리 존스와 케빈 코스트너, 크리스 쿠퍼 등 관록 있는 노장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컴퍼니 맨>(2010)에서 애플렉은 하루 아침에 고액연봉자에서 실업자로 내려 앉은 가장을 연기한다. 이 영화로 그는 그 동안 얼마나 소모적인 작품 속에서 낭비적으로 활용됐는가를 스스로 증명한다. 자신만만한 샐러리맨이 실업의 고통과 가장으로서의 위기를 겪다가 다시 재기해나가는 과정은 마치 애플렉의 과거와 현재의 대비만큼이나 실감나는 것이었다. 슈퍼히어로의 고뇌나 영웅적인 면모를 흉내내기 보단 실존적인 고민을 연기할 때, 애플렉은 더욱 돋보이는 배우다. 과거 그는 자신의 경력을 돌아보며 이와 같이 말했다. “내 재능들은 때때로 과용됐고 또한 오용됐다. 나로 산다는 건 쉽지 않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애플렉은 다시 진정한 궤도에 오르고 있다.
‘저 배우를 어디서 봤더라?’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비단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기시감을 부르는 대부분의 배우들은 언젠가 다시 당신의 눈에 들게 돼 있다. 샘 록웰이 바로 그런 배우다.
70년대 TV게임쇼의 유명 제작자이자 진행자였던 척 베리스가 CIA요원으로서의 살인 경력을 고백한 자서전을 영화화한 <컨페션>(2002)은 조지 클루니의 첫 연출작으로 화제를 모았다. 클루니를 비롯해서 드류 배리모어, 줄리아 로버츠와 같은 할리우드 톱배우가 등장하는 이 작품의 주연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샘 록웰의 것이었다. “영화가 완성된 건 샘 록웰이 처음부터 매우 용감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비열한 짓을 많이 한 캐릭터지만 보는 이들은 그를 지지해야만 한다. 적임자를 찾기란 어려웠고, 새미가 바로 그였다.” 클루니의 말처럼, <컨페션>은 록웰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했다. 그 신뢰란 전적으로 그의 경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1968년 11월 5일, 캘리포니아 댈리시티에서 배우를 지망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록웰은 두 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한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그는 여름 동안 뉴욕에서 사는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고 그녀가 일하는 뉴욕 시내 극장가의 문화를 일찍 경험할 수 있었다. 심지어 10살의 록웰은 이스트 빌리지의 한 극장 관계자의 제안으로 오디션을 치른 뒤, 곧바로 험프리 보가트가 출연하기도 했던 즉흥 코미디 촌극 무대에 어머니와 함께 오른다.
“나는 열 살부터 극장에서 이상한 짓을 했지만 내 시간 대부분을 보통의 10대가 하는 것을 하며 보냈지. 당신도 알다시피, 나를 흑인이라 생각하며 브레이크 댄스를 연습하거나 대마초를 빨아댔으니까.” 농담 섞인 스스로의 말처럼 록웰의 십대는 파란만장했다. 어머니 덕분에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일찍 발견했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생활양식은 록웰의 학업을 방해하고 십대를 잠식했다. 습관적으로 약물을 복용하고, 여자를 찾아 파티를 전전하던 록웰의 방탕한 10대는 결국 부모님의 노력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배우로서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제작사가 만든 TV호러영화 <클라운하우스>(1989)로 데뷔한 록웰은 배우로서 미래를 걸고자 다짐했다. 뉴욕의 연기스쿨 ‘윌리엄 에스퍼 스튜디오’에서 트레이닝을 받던 록웰은 틈나는 대로 영화 오디션에 참여했고, <브룩클린으로 가는 비상구>(1989)나 <인 더 수프>(1992) 등과 같은 독립영화의 출연기회를 얻어냈으며 몇 편의 TV시리즈에 단역으로 출연하거나 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한편 생계 유지를 위해 레스토랑 서버나 사립탐정 조수와 같은 일을 전전하기도 한 록웰은 1994년, 맥주회사 밀러와 광고 계약을 맺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그 영화는 확실한 터닝 포인트였다.”여기서 록웰이 말하는 ‘그 영화’란 바로 톰 디칠로의 <달빛 상자>(1996)다. 존 터투로가 연기하는 이성적인 엔지니어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괴팍한 히피 역할이란 록웰의 지난 경험을 비춰봤을 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중적인 흥행을 얻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평가를 얻은 록웰은 미샤 바튼의 데뷔작 <론 독스>(1997)로 다시 한번 더 큰 주목을 얻는다. 선댄스에서 호평을 얻은 이 작품으로 록웰은 다양한 영화제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저예산의 독립영화를 통해 록웰은 경험과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우디 알렌의 <셀러브리티>(1998)에 참여한 록웰은 이듬해 톰 행크스가 출연한 <그린 마일>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쇼생크 탈출>(1994)에 이어 다시 한번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한 프랭크 다라본트의 <그린 마일>에서 그는 비열한 사형수 와일드 빌을 연기한다. “나는 그를 사탄을 만난 허클베리 핀처럼 보았다”고 밝힌 록웰은 게리 올드만이나 존 말코비치를 참고하며 “구역질 나는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성아소애 변태라고 생각하는 와일드 빌”을 연기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미국 영화배우조합 시상식의 연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록웰은 이를 통해 할리우드에 한 발을 걸치게 된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TV시리즈를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갤럭시 퀘스트>(1999)와 <미녀 삼총사>(2000)에서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샘 록웰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 <달빛 상자>였다면 그의 전환점이 된 인물은 조지 클루니일 것이다. <오션스 일레븐>(2001)의 얼간이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웰컴 투 콜린우드>(2002)에 출연한 록웰은 스티븐 소더버그와 공동기획자로 이름을 올리고 단역으로 등장하기도 한 클루니로부터 클리블랜드에 있는 어느 바에서 그의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록웰은 말했다. “그래, 좋아, 무엇이든, 어떤 것이라도 해주지. 하루라도 배우가 된다면.” 그리고 한 달 뒤, 소더버그의 ‘섹션 8’에 있는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지가 혹시 당신이 10월에 시간이 있는지 알고 싶다더군.”록웰의 첫 단독주연 이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배역에 너무 유명한 누군가를 원치 않았다”는 클루니의 바람대로 <컨페션>의 적임자였던 록웰은 “무엇보다도 그는 그 역할에 대한 권리가 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그리고 <컨페션>은 록웰의 권리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결과물이 됐다. <컨페션>의 트레일러를 본 리들리 스콧은 <매치스틱 맨>(2003)에 니콜라스 케이지의 상대역으로 록웰을 캐스팅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2006)에 출연한 것도 조지 클루니를 통해 얻은 브래드 피트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렇게 록웰은 흔히 비주류와 주류의 진영으로 구분되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건넜다.
“나는 항상 조금 이상해지거나 약간 삐뚤어지는 것을 느낀다. 나만큼 괴짜인 사람도 없을 거다.”정형화되지 않는 그의 성향은 어떤 캐릭터나 장르에도 곧잘 어울리는 능력으로 승화됐다. 2007년작인 <조슈아>와 <스노우 엔젤>과 같은 스릴러에 출연한 바 있는 록웰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나 <더 문>(2009)과 같은 SF장르에도 익숙한 배우다. <컨페션>이나 <매치스틱 맨>과 같이 범죄물을 바탕으로 둔 코미디는 물론 <에브리바디스 파인>(2009)과 같은 가족드라마에서도 썩 어울리는 연기를 선보인다. 또한 “나는 끊임없이 우울한 연기적 접근을 꾀함으로써 나를 채우는 유형의 배우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고독하고 우울한 감수성이 짙게 드리운 록웰의 인상은 독설적인 언변으로 유머를 이끌어 내는 그의 태도와 어울리며 작품 전반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한다. 특히 근작인 <더 문>에서 광활한 우주의 달기지 속에서 홀로 생활하는 샘 벨을 연기하는 록웰의 존재감은 단 한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확실한 건 이제 록웰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연기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는 사실이다. <아이언맨 2>(2010)와 같은 대작 블록버스터로 할리우드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는 여전히 <위닝 시즌>(2009)과 같은 독립영화로 선댄스나 시체스에서도 존재감을 자랑하는 전방위적인 배우로 거듭났다. “나는 내 스스로를 캐릭터로서 인식하는 배우다”라고 말하는 그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가늠할 수 없기에 더욱 흥미로운, 지울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배우. 그가 바로 샘 록웰이다.
제각각의 층위를 이루며 퇴적된 지층처럼 인생 또한 찰나의 경험이 켜켜이 쌓인 세월로 축적된다. 저마다의 인생 안에서도 선택과 도전을 거친 삶은 귀감이 되어 빛나기 마련이다. 바로 리암 니슨이 그렇다.
아일랜드 밸리미나 출신의 리암 니슨은 어려서부터 큰 체격을 지닌 탓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가 권투에 입문한 계기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9살의 나이에 올 세인츠 유소년 클럽에서 권투를 수련하기 시작한 니슨은 킬러 본능이 없다는 지적을 듣는 가운데서도 뛰어난 체격 조건을 기반으로 6년 뒤, 북아일랜드 헤비급 유소년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올림픽 출전을 희망할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던 소년이 17세가 되던 해에 링을 등져야 했던 건 펀치드렁크 때문이었다. 꿈을 상실을 견디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결과적으로 니슨은 링에서 내려옴으로써 새로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배우로서 처음 무대에 오른 니슨의 나이는 11살이었다. 영어 선생님의 제안으로 교내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던 니슨은 점차 연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17세 당시, 자신에게 주연을 맡겼던 그 영어 선생님이 조직한 슬레미쉬 극단에 입단한다. 아마추어 배우 지망생들로 이뤄진 이 극단은 전지역의 수많은 드라마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공연을 펼쳤다. 니슨은 <Philadelphia, Here I Come>을 공연한 Larne Drama Festival에서 호평을 얻었고 결국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니슨은 배우로서의 삶에 완전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19살이 되던 1971년, 벨파스트의 퀸즈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려 했지만 1년도 안되어 다시 벨리메나로 돌아와 기네스 공장에서 지게차를 몰았다. 당시 샘 하나라는 이름을 지닌 노인과 함께 일했던 니슨은 말 한마디 걸지 않는 그를 두려워했으나 어느 날, 그는 니슨에게 충고를 던졌다. “애송이, 여기 오래 머물러 있지마. 네 삶을 찾아가.” 당시 니슨은 업무가 끝나면 틈틈이 벨파스트의 극단을 찾아가 연기를 리허설하곤 했으며 슬레미쉬 극단에서의 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심지어 그 해에 <Pilgrim's Progress>(1979)에 출연하며 생애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는 기회도 얻었다. 하지만 니슨은 연기를 사랑함에도 여전히 배우로서의 삶을 확신하지 못했다. 뉴캐슬에 있는 세인트 마리스 사범 대학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니슨에게 자신의 운명을 깨닫게 만드는 또 한번의 계기였을 뿐이다. 다시 벨파스트로 돌아온 니슨은 배우로서 본격적인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한다. 두 번의 타협에 실패한 뒤에서야 비로소 배우로서의 삶을 받아들인 것이다.
리릭 극단의 오디션에 통과한 니슨은2년에 걸쳐 극단과 함께 투어를 돌았다. 다양한 연기적 경험을 쌓아나가던 니슨은 투어 기간 동안 곳곳에서 영국군과 아일랜드 무장단체의 대치를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북아일랜드에서 자랐다. 덕분에 폭력과 그 폭력의 결과들을 직접 목격하며 사건들 속에서 살아왔다. 그건 언제나 내게 끔찍하고도 매혹적인 일이었다. 그건 정말 어떻게 분노가 삶을 잡아먹을 수 있는지에 관한 직감이었으니까.”
무대에 오른 니슨을 눈여겨 본 존 부어맨은 자신이 연출하는 <엑스칼리버>(1981)에 그를 캐스팅했다. 니슨은 <엑스칼리버>에서 동료배우로 출연한 헬렌 미렌과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이는 니슨에게 새로운 구심점이 된다. 당시 인상적인 경력을 쌓아나가던 여배우 헬렌 미렌의 인맥이란 당시 초짜 신인에 불과했던 니슨에게 금광과도 같았다. 미렌과의 5년에 걸친 연애는 니슨의 세계관을 푸아그라처럼 부풀어오르게 만들었다. 롤랑 조페의 <미션>(1986)에서 만난 로버트 드니로도 니슨에게는 남다른 인연이었다. 드니로는 니슨을 자신이 사는 LA로 초대한 뒤, 친분이 있는 캐스팅 디렉터에게 니슨을 소개시킨다. 결국 니슨은 당시에 기획된 TV시리즈 1회 분량에 출연하게 된다. 하지만 드니로의 권유에 호기롭게 LA로 이주한 니슨은 인상적인 필모그래피 대신 단조로운 연애 경력만 권태롭게 이어나갈 뿐이었다.
1992년, 비로소 전성기가 찾아왔다. 유진 오닐의 작품을 뮤지컬로 옮긴 <안나 크리스티>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뮤지컬에 출연한 니슨은 그 해 토니상을 수상한다. 또한 대배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딸인 나타샤 리차드슨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가장 빛나는 이력을 마련해준 스티븐 스필버그를 만나게 된다. 무대에서의 연기를 본 스필버그는 낯선 신인을 기용한다는 제작사의 반발을 무릅쓰고 <쉰들러 리스트>(1993)에 그를 캐스팅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는 니슨에게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쉰들러 리스트> 이전까지 나는 영화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다고 믿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 영화와 함께 전세계를 돌면서 이미지의 영향력을 온 몸으로 체감했기 때문이다.”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마이클 콜린스>(1996)로 연기력을 인정받지만 니슨은 딱히 주연을 고집하지 않았다. 영화사이트 IMDB의 그의 트레이드마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의 캐릭터는 종종 일찍 죽거나 영화에서 사라지지만 소년들은 니슨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가르침에 의지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간다.” 예년에 비해 근래에 가벼운 영화들을 선택하고 있다는 말도 있지만 최근 <테이큰>(2008)에서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나 <클로이>(2009)에서 위태로운 듯 끝내 흔들리지 않은 남편의 모습은 니슨의 진중함을 반영하는 작품이란 점에서 남다르지 않다. 단지 그가 지금 보다 여유로운 가치관 속에서 영화적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즐길 준비가 된 것은 아닐까. 그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이다.
(Box) 이언 페이슬리, 영감의 원천
“그는 6피트보다 큰 남자가 그저 열변을 토하며 전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실로 아름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연기였다는 게 아니라 그것 또한 대단한 연기이고 마음을 뒤흔든다는 것이다.” 리암 니슨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 기이하게도 개신교 지도자인 이언 페이슬리다. 니슨은 자신만큼이나 체격이 큰 페이슬리가 자신과 대조적일 만큼 공격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 자신을 비추며 연기적 영감을 얻었다.
콜린 파렐은 어려서부터 길들이기 어려운 야생마와 같았다. 지나치게 자유분방하던 삶은 배우라는 단어 앞에서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방탕한 문제아에게 꿈을 제시한 건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선택, 즉 배우로서의 야망이었다.
콜린 파렐은 정제되지 않은 듯한 혈기와 출렁이는 불안을 품었다. 살짝 찡그린 미간과 살짝 숙여내린 얼굴로 상대를 응시하는 눈은 외로움과 나약함으로 흔들리다가도 과감한 반항기를 거칠게 들고 일어선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활발한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한 파렐은 그 이전에 가십을 제공하는데에도 바쁜 셀레브리티였다. 최근에도 런던의 술집에서 폭행사건에 연루되어 구설수에 오른 바 있지만 이는 파렐로부터 불거져 나온 과거의 대단한 사건들에 비하면 파파라치들에게 딱히 매력적인 먹잇감도 아니었을 게다. 수많은 여성들과의 염문과 섹스 비디오 유출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상은 호사꾼들을 위한 안주거리처럼 떠돌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파렐을 주목받게 하는 건 분명 그가 선택한 배우로서의 성공적인 행보 덕분이다.
1976년, 콜린 파렐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더블린 교외의 캐슬낙에서 자란 파렐에게 배우로서의 현재를 제시하고 연기적 재능의 반석을 닦은 건 그의 누나 캐서린이다. 캐서린은 언제나 늦은 시간까지 고전영화들을 즐겨 봤고, 파렐은 그때마다 그녀의 옆에서 같은 곳을 응시했다. 파렐의 시선에서는 말론 브란도나 폴 뉴먼, 마릴린 몬로와 같은 배우들의 명연기가 펼쳐지고 있었고, 그는 그들의 연기에 매혹당했다. 또한 12세에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을 공연하는 누나를 보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찾은 공연장에서 파렐의 꿈은 더욱 부풀었다.
그러나 파렐의 십대는 거칠고 성겼다. 클럽과 슬램가를 전전하며 주먹질을 하거나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데 바빴던 파렐은 지독한 음주와 약물에 찌들었다. 심지어 그는 18세 때를 회상하며 “단지 6개월간 술독에 빠져지냈다”고 말하기도 했다. 덕분에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치료를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당시 그를 진료한 의사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왜 당신의 우울증을 이상하게 여기는 거죠? 당신의 쇼핑 리스트를 읽어봤나요?”
하지만 파렐의 방탕한 생활은 그가 품었던 배우로서의 꿈마저 망가뜨리지 못했다. 그리고 1995년, 그에게 운명적인 기회가 찾아온다. 친구들과 함께 1년여 동안 호주에 머물던 파렐은 시드니의 교외에 있는 본디에서 유명 사진작가 스튜어트 캠벨을 만난다. 캠벨은 파렐의 재능을 알아봤다. 그래서 그를 자신의 아일랜드 친구이자 호주국립예술학교(NIDA)의 연기팀장인 토니 나이트에게 소개한다. 나이트는 파렐에게 연기에 매진할 것을 권하며 시드니의 클리브랜드 거리에 있는 아마추어 공개 공연장을 추천했다. 결국 그곳에서 처음으로 스티브 하트의 <Kelly’s reign>으로 무대에 오른 파렐은 후에 이를 회상하며 말했다. “카우보이나 인디언을 연기하며 빵빵거리다 죽는 시늉이나 할 줄 알았던 누군가에게는 완벽해 질 수 있는 기회였지.”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간 파렐은 1996년, 캐서린을 따라 가이어티 드라마 스쿨에 입학한다. 그리고 같은 해, 파렐은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한다. 조나단 라이 메이어스가 출연한 <핀바를 찾아서>(1996)에 단역으로 출연한다. 크레딧에조차 포함되지 못했던 이 작품 이후로 또 한번의 단역 경력을 거친 그에게 진정한 의미로서의 영화 경력은 팀 로스의 <전쟁지역>(1999)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2000년, 파렐의 첫 주연작아저 조엘 슈마허가 연출한 <타이거랜드>가 개봉됐다. 1971년, 베트남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던 미군 병사들이 전장에 가길 꺼리며 탈영을 시도한다는 내용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어낸 이 작품에서 파렐은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두각을 드러낸다. 그 후로 악명을 자랑했던 무법자 제시 제임스를 연기한 서부극 <파이브 건스>(2001)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하트의 전쟁>(2002)에서 브루스 윌리스의 상대역으로 출연했지만 두 작품은 비평과 흥행면에서 온전히 참패했다. 그 사이에 파렐은 개인적으로도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당시 할리우드의 신성으로 떠오르던 여배우 아멜리아 워너와 만나 2001년 7월에 결혼을 올렸지만 불과 4개월 만에 이혼하게 된 것.
하지만 2003년 다시 한번 재기의 시간이 찾아온다. 파렐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잡고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았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작품은 대단한 흥행을 얻었지만 파렐은 되레 작품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곤 했다. “당신은 범죄 예방하는 방법는이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확실히 이해했는가?” 조엘 슈마허와 다시 한번 작업한 <폰부스>(2002)는 온전히 파렐의 역량을 세상에 드러내는 창과 같은 영화였다.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주연 배우로 짐 캐리와 윌 스미스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원신 형식의 연출 방식에 부담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단 12일 간의 촬영으로 완성된 이 작품에서 공중전화박스에 갇힌 주인공은 파렐의 몫이 됐다. 하지만 영화는 쉽게 개봉되지 못했다. 2002년 11월 개봉 예정이었던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버지니아 주와 메릴랜드 주에서 무차별 저격 사건이 벌어졌으며 유사한 소재를 지닌 영화의 상영이 무기한 연기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영화는 다음 해 4월에 개봉됐고, 파렐의 열연은 보답받았다. 저명한 비평가 로저 에버트는 파렐의 연기에 대해서 이와 같이 평했다. “상영시간의 대부분에서 등장하는 파렐은 에너지와 강렬함을 보여준다.”파렐은 자신이 놓인 공간의 너비와 대조될 만큼 대단한 긴장감을 구사하며 열연을 펼쳤다.
알 파치노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스파이물 <리크루트>(2003)는 인상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음에도 파렐의 연기만큼은 상대적으로 좋은 평을 얻었다. 벤 애플렉이 출연한 안티 히어로물 <데어데블>(2003)에서 악당 불스아이를 연기한 파렐은 자신의 아이리쉬 악센트를 극속 캐릭터에 적용시키며 캐릭터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가미하기도 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범죄 액션물 <S.W.A.T. 특수기동대>(2003)를 시작으로 점차 할리우드의 주연배우로 거듭난 파렐은 점차 높아지는 명성과 부만큼이나 유명한 여성 셀레브리티와의 스캔들로 인한 구설수도 빠르게 전파됐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함께 한 자리에서 그는 말했다. “우린 그저 동료일 뿐, 데이트하는 사이는 아니다.”하지만 파파라치의 사진 앞에서 이는 비겁한 변명 정도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렐은 그 가십에 묻히지 않고 자신의 본격적인 연기 경력을 넓혀 나갔다. 올리버 스톤의 롤타이틀 전기영화 <알렉산더>(2004)에서 파렐이 연기한 알렉산더는 논쟁의 중심에 섰다. 대제국을 건설한 고대의 정복자를 양성애자로 묘사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파렐은 정복자의 근엄한 초상 위에 불안한 심리를 드리우며 자신의 성격을 캐릭터에 반영한다.
마이클 만의 범죄영화 <마이애미 바이스>(2006)에서 그의 진가는 확실히 드러난다. 제이미 폭스와 함께 투톱을 맡은 파렐은 마초적인 강인함과 함께 섬세한 멜로적 감수성을 드러내며 굵고 예민한 자신만의 성향을 캐릭터로 승화시킨다. 같은 해에 우디 알렌의 <카산드라 드림>에서 이완 맥그리거와 함께 형제로 등장하는 파렐은 방탕하지만 나약한 이중적인 면모를 지닌 캐릭터를 연기한다. 뉴욕 타임즈는 파렐의 연기에 대해서 “얌전한 파렐의 연기는 보기 드물게 효과적으로 힘과 느낌을 전달한다.”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마틴 맥도나가 직접 연출하고 브렌단 글리스, 랄프 파인즈와 함께 출연한 <킬러들의 도시>(2008)에서 파렐의 이런 특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결국 파렐은 생애 처음으로 노미네이트된 골든글로브에서 트로피를 거머쥔다.
<크레이지 하트>(2009)에서 기습적으로 등장하며 빼어난 노래 실력까지 뽐내는 파렐은 보다 성숙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닐 조단이 연출한 <온딘>(2009)에서 알코올중독을 극복하며 신체적 장애를 지닌 딸을 돌보는 아버지를 연기하는 파렐의 모습은 마치 그의 방탕한 과거와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파렐의 악명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배우로서의 명성은 아직도 미지수의 영역에 놓여있다. 그런 의미에서 파렐은 흥미로운 문제아다. 유일하게 연기를 통해 길들일 수 있는, 여전히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악동이랄까.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혜성처럼 등장했다. ‘맘마미아!’를 외칠 만큼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이프리드는 ‘깜짝 스타’가 아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이프리드의 현재는 스스로를 갈고 닦은 노력의 보답이다.
1985년 생인 사이프리드는 1995년, 9살의 나이에 연기에 입문했다. 자신이 거주하던 펜실베니아주 앨렌타운에 있는 시빅 극장에서 연기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1살 때 즈음, 몇몇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아역 모델로서 활동을 해나갔다. 그리고 17살까지, 모델로 활동하면서 5년에 걸쳐 꾸준하게 브로드웨이 보이스 트레이닝에게 발성 훈련을 받았다. 이는 훗날 사이프리드가 “어린 나이에 배우로서의 삶을 꿈꾸긴 했지만, 그 꿈이 실현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사이프리드는 일찍이 다양한 TV시리즈를 통해서 경력을 수집해 나갔다. 아역 시절 크레디트에 오르지 못했던 작품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공식적인 경력이라고 할만한 작품은 2000년부터 2001년까지 고정 출연했던 TV쇼 <As the world turns>였다. 2002년부터 2003년 사이에는 ABC의 <All my children>에 고정으로 출연했다. 사이프리드의 스크린 데뷔작은 그 다음 해 선보인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다. 이 작품에선 ‘플라스틱’이라 불리는 백치스러운 소녀 카렌을 연기한다. 애초에 사이프리드는 카렌의 퀸카 친구 역할로 오디션에 참여했지만 레이첼 맥아담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하지만 사이프리드를 눈 여겨본 프로듀서는 그녀에게 카렌 역을 제안했다. 데뷔작은 흥행했고,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이후 그녀에게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 작품은 바로 <나인 라이브즈>(2005)였다.
<나인 라이브즈>를 연출한 로드리고 가르시아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콜롬비아의 대문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들이다. <나인 라이브즈>는 서로 다른 아홉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옴니버스 영화다. 아홉 여성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는 로빈 라이트 펜, 글렌 클로즈, 홀리 헌터와 같은 ‘진짜’ 여배우들의 리스트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킨다. 특히 사이프리드에게 시시 스페이섹(<케리>의 여주인공)과의 만남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처음엔 겁을 먹었지만 더 이상 그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너무 환상적이었다. 그녀와 함께 작업할 수 있어 기쁘다.” 사실 <나인 라이브즈>에서 사이프리드는 단 일곱 테이크만에 촬영을 끝냈지만 분명 그녀에겐 남다른 작품이다. 로드리고는 사이프리드를 생각하며 사만다를 구상했고, 로드리고의 제안은 그녀에게 선물과도 같은 영광이었다. 로드리고는 이미 사이프리드의 재능을 직관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 앞서 2004년, 사이프리드는 UPN의 TV시리즈 <베로니카 마스>의 타이틀롤 캐릭터 오디션에 참가한다. 하지만 역할은 크리스틴 벨의 차지였다. 사이프리드는 베로니카의 ‘절친’으로 기억되는 릴리 케인을 연기한다. 일찍이 살해당한 릴리는 베로니카의 기억을 통한 플래시백 시퀀스에서만 등장했지만 첫 시즌에서 미스터리의 핵심적인 단서나 다름없는 역할이었기에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게 된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베로니카 마스>에 출연하는 사이, 사이프리드는 <하우스 M.D>나 <로 앤 오더: 성범죄 전담반> <CSI 라스베가스> 등과 같은 TV시리즈에서 게스트로 등장해 얼굴을 알렸다.
2006년은 사이프리드에게 특별한 해였다. 그 해 사이프리드는 HBO가 새롭게 기획한 TV시리즈 <빅 러브>에 출연하기로 결정한다. 일부다처제를 신봉하는 몰몬교 집안의 가풍에 저항하는 장녀 사라 역할을 맡은 사이프리드의 연기는 2006년 3월 12일 첫 방송 이후로 3시즌에 걸쳐 2009년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2009년 12월, 사이프리드는 HBO와 새롭게 거듭될 시즌에서의 출연 의사를 약속했지만 계획은 2011년까지 미뤄졌다. 당시 그녀는 <맘마미아!>(2008)의 성공 이후, 수많은 영화 제작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는 상태였고 스케줄의 조율이 쉽지 않았다. 지난 해 사이프리드는 <300>(2006)과 <왓치맨>(2009)을 연출한 잭 스나이더의 신작 <서커 펀치>(2011)의 히로인 역할을 맡기로 결정했지만 결국 스케줄 문제로 하차해야 했다.
대작 뮤지컬 <맘마미아!>의 영화화 관건은 두 가지였다. 무대 위의 정교한 세트를 대신할 진짜 장관과 ‘아바’의 명곡과 안무를 온 몸으로 소화할 배우들. 무엇보다도 <맘마미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모녀, 도나와 소피를 책임질 배우로 누가 지목될 것인가는 희대의 관심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도나 역의 메릴 스트립이 기대를 부추기는 ‘느낌표’였다면 소피 역의 사이프리드는 의심을 낳는 ‘물음표’였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I Have a Dream’을 완벽하게 소화한 사이프리드를 본 제작진은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스포라데스 제도를 병풍 삼아 펼쳐진 배우들의 가무는 전 세계적인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오래 전부터 갈고 닦은 목소리로 아바의 명곡을 재현한 사이프리드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은 셈이다.
<맘마미아!> 이후 최근 2년 사이, 사이프리드는 무려 네 편의 작품에 이름을 올렸다. 근작 <디어 존>(2010)을 비롯해, 지난 해에는 세 편의 작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내가 한 순간에 등장했다고 말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모든 작품이 동시에 공개됐기 때문일 뿐이다.” 이 모든 작업은 2~3개월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진행됐지만 대중에겐 순서를 다투듯 등장했다. 현재 사이프리드가 얼마나 ‘핫’한 배우인가를 증명하는 사례다.
아톰 에고이안의 <클로이>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그녀는 매혹적인 페로몬을 발산한다. 순수하고 발랄한 소녀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 던진다. 심지어 옷조차 벗어버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숨막히는 뒤태를 드러낸 그녀는 단호하게 결심했다. “단지 옷을 벗는 건 어렵지 않지만 베드 신만큼은 대단한 도전이었다.” 그녀는 그 도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클로이>가 리암 니슨과 줄리안 무어라는 걸출한 배우들을 출연시킨 영화임에도 온전히 사이프리드를 위한 영화처럼 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클로이>는 사이프리드를 감싸고 있던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걷어내고 그녀에게 잠재된 성숙한 매력을 과감하게 끌어냈다.
사이프리드는 <디어 존>에서 직접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며 자신이 작사한 노래로 또 한번 가창력을 뽐낸다. 사실 그 연주는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사실 그 연주는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그는 내가 무언가를 연주하길 원했고, 나는 그저 내가 아는 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가사가 평소보다 더 잘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곡을 스튜디오 녹음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부른 ‘Little House’는 사실 아일랜드의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데미안 라이스의 미완성곡이다. “나는 실제 데미안 라이스가 사는 곳에서 지난 가을과 이번 4월에 함께 작업했다. 우리는 <디어 존>을 위한 노래를 결코 끝내지 못했지만 나는 데미안 라이스와의 작업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차기작 <레터 투 줄리엣>(2010)의 개봉을 기다리는 사이프리드는 현재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원작을 영화화 하는 <A Woman of No Importance>(2011)와 글렌 클로즈와 올랜도 블룸이 출연한 브로드웨이 연극 <The Singular Life of Albert Nobbs>를 영화화 한 로드리고의 신작 <Albert Nobbs>(2011)를 비롯해 이미 세 작품의 출연을 결정지었다. 내년부터 시작될 <빅 러브>의 새로운 시즌에도 출연을 재개한다. “지난 해에 내가 볼 수 있었던 대본의 대부분은 나쁜 것이었지만 그 중에 몇몇 괜찮은 것이 있었다면 올해에는 정말 훌륭한 몇몇 대본들 사이에 수많은 나쁜 대본들이 들어왔었다. 만약 당신이 정말 훌륭한 대본을 받았거나 그런 제의가 들어오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제법 괜찮은 위치에 서 있는 셈이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녀는 지금 제법 좋은 위치에 서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자신의 가능성을 만끽하고 있다.
네버랜드의 피터팬이 아니라면 깨달아야 한다. 젊음은 영원하지 않음을. 제임스 딘이나 리버 피닉스처럼, 죽음만이 젊음을 보존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죽지 않았다. 그의 젊음도 저물어간다. 하지만그는 성장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남자로서 중후한 삶을 피워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신중하게 말했다. “올해는 내 스스로에게도 정말 조심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난 35살이 됐고 많은 것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가끔은 너무 심각하다 싶을 정도지. 내가 다음으로 하게 될 무엇이라도 확인해보고, 나를 위해 진짜 옳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다다른 곳을 보게 될 것이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어느 덧 30대 중반의 남자가 됐다. 디카프리오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젊은 관객들에게 그의 현재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디카프리오의 현재란 분명 놀랄만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1974년생인 디카프리오는 1990년대의 출발과 함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아역배우들의 그것처럼 디카프리오의 경력의 시작도 두드러진 편은 아니었다. 몇 편의 TV시리즈나 시트콤 등에 출연한 디카프리오는 번번히 영화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있었다. 당시 비슷한 경험을 반복해 나가던 토비 맥과이어와의 인연을 맺게 됐다는 것 정도가 뒤늦게 의미있는 일이었다고 할까. 게다가 첫 스크린 출연작이었던 B급 호러영화 <크리터스3>(1991)는 주목을 얻지 못한 채, 비디오 시장으로 직행했다.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경력은 1993년에 찾아왔다. 수많은 경쟁자들이 참여한 오디션을 통과한 디카프리오는 <디스 보이스 라이프>에서 로버트 드니로와 알란 버킨과 같은 대배우들과 한 공간에서 연기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같은 해, <길버트 그레이프>에 출연했다. <디스 보이스 라이프>가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자양분과 같은 작품이라면 <길버트 그레이프>는 디카프리오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만든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니 뎁과 형제로 출연한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디카프리오는 정신질환이 있는 동생을 연기하며 인상적인 평가를 얻어냈고,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불과 열 아홉 살의 나이였다.
진 해크만을 비롯해 샤론 스톤, 러셀 크로우가 출연한 서부극 <퀵 앤 데드>(1995)는 디카프리오에게 하이틴 스타로서의 운명을 제시한 작품이다. <퀵 앤 데드>에서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소년은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맞서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반쪽 짜리 오이디푸스나 다름없었다. 소년의 여린 얼굴 위로 우수에 찬 눈동자가 덧씌워질 때, 캐릭터의 비극적인 운명은 보다 낭만이란 수식어를 얻는다. 그 뒤로 디카프리오는 혈기왕성한 청년의 비극적인 무용담과 로맨스를 본격적으로 활보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출연했던 <토탈 이클립스>에서 아더 랭보 역할에 내정된 건 리버 피닉스였다. 하지만 리버 피닉스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그 빈자리는 디카프리오의 것이 됐다. 이는 리버 피닉스의 적자로서 디카프리오가 선택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바스켓볼 다이어리>(1995)는 하이틴 스타로서 디카프리오의 운명을 온전히 다지는 작품이었다. 뉴욕 출신의 뮤지션이자 시인이기도 한 짐 캐롤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바스켓볼 다이어리>는 가난과 폭력에 갇힌 10대 소년들의 비극적인 무용담을 담아낸 수기다. 이 작품에서 디카프리오는 특유의 반항아적인 기질과 예민한 감수성을 마음껏 분출시킨다.
하이틴 스타로서 디카프리오의 절정을 이룬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1996)과 <타이타닉>(1997)이었다. 특히 21세기까지도 유효한 <타이타닉>의 기록적인 흥행은 곧 ‘레오 매니아(Leo-mania)’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킬 정도로 전세계적인 신드롬을 불렀다. “<타이타닉>은 완전히 내 인생을 바꿔놨다.” 디카프리오의 말처럼 <타이타닉>은 그의 인생을 풍랑으로 밀어넣었다. “운전하거나 걸어다니는 모든 일상의 공간에서 갑자기 너댓명의 파파라치들에게 뒤쫓기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됐다. 내가 갔던 어떤 공간에서, 누군가는 나에 관한 이야기가 새어내보내고 있었다.” 인기는 기회라는 백지수표와 같다. 한없이 누릴 수 있지만 그 끝을 예감하기란 어렵다. 디카프리오는 그 순간에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20대 중반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무엇이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삶에서 다른 경험을 얻을 것이다. 나는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에게 확실히 배울만한 경험이었다. 그 경험은 내가 배우가 되는 결정에 보다 집중하게 만들었다.”
<타이타닉> 이후, 알렉상드로 뒤마의 고전 <삼총사>에 바탕을 둔 <아이언 마스크>(1998)에서 출연했던 디카프리오는 뉴 밀레니엄을 맞아 모험을 감행한다. 대니 보일의 <비치>(2000)를 선택한 것. 심지어 디카프리오의 자발적인 지원으로 당초 캐스팅에 내정됐던 이완 맥그리거가 밀려났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2000년의 시작과 함께 디카프리오는 엄청난 혹평을 감당해야 했다. 심지어 태국의 환경단체로부터 생태계 파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영화사는 막대한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떠나 디카프리오의 선택은 그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어떤 욕망을 짐작하게 했다. 그 욕망을 해소해줄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조력자가 등장했다. 마틴 스콜세지였다.
“그는 강요당하는 것처럼 매우 이상한 통과의례를 관통해냈다.” 디카프리오와 함께 <갱스 오브 뉴욕>(2002)에 출연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말처럼 디카프리오에게 <갱스 오브 뉴욕>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나는 대단한 너비와 디테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경험이었지.” 디카프리오의 말처럼 <갱스 오브 뉴욕>은 디카프리오의 욕망을 발현시키는 관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갱스 오브 뉴욕>은 디카프리오에게 스릴러의 거장이자 세계 영화사의 산증인 마틴 스콜세지와의 만남을 주선한 작품이란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낳았다. “그와 함께 일한다면 이걸 알아야 한다. 그저 모든 시간 동안 끝장을 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하지만 하루의 끝에 다다르면 그의 언어는 금처럼 귀중해진다. 그가 당신의 캐릭터를 위해 지켜본다는 것이 영화를 보다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것임을 신뢰해야 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는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온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소년의 고독을 벗어나 진짜 생존을 위한 혈투로 내던져진, 일종의 피비린내나는 성인식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디카프리오가 로버트 드니로를 잇는 스콜세지의 적자가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비에이터>(2004)와 <디파티드>(2006), 그리고 최근작인 <셔터 아일랜드>(2010)까지, 디카프리오는 스콜세지의 남자에서 스콜세지의 조력자로 성장해 나갔다.
스콜세지는 디카프리오에게 배우로서의 삶에 거대한 이정표가 된 인물이나 다름없다. <갱스 오브 뉴욕> 이후, 디카프리오의 행보는 심상찮은 것이었다. 스콜세지의 네 작품을 비롯해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2002)과 에드워드 즈웍의 <블러드 다이아몬드>(2006), 리들리 스콧의 <바디 오브 라이즈>(2007), 그리고 샘 멘데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2009), 그리고 현재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인셉션>(2010)까지, 그는 지금 할리우드의 감독들이 선망하는 최전선에 선 배우다. 동시에 최근 그의 행보는 과거 하이틴 스타로서의 경력을 온전히 지워버리는 과정에 가깝다. 특히 현재의 디카프리오를 보여주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그는 스콜세지의 세계를 채우는 구성원이 아닌, 그 세계를 장악하는 표정을 구축해내고 있다. 폐쇄적인 인간의 내면을 심도 깊은 서스펜스와 너른 페이소스로 버무리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디카프리오는 스콜세지가 창조한 혼돈의 세계관을 융용시키는 발화점이자 최고의 연기적 화력을 구사한다. 또한 스콜세지의 새로운 신작으로 예정된 루스벨트에 관한 영화에서도 디카프리오를 보게 될 가능성은 적지 않다고 한다. 스콜세지 역시 디카프리오를 통해 새로운 영화적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곳은 어디나 가난하고 깨끗한 물이 충분하지 않지만 그들은 믿을 수 없을만큼 놀랍게도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 서구세계가 가능한 한 원조를 계속해 나가는 건 값어치 있는 일이다.그것이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2004년부터 영화 제작에 참여해온 디카프리오는 2007년, 다큐멘터리 <11번째 시간>을 제작하고 직접 나레이션까지 도맡았다. 지구의 파괴와 환경의 오염에 관한 진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그의 관심사가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해 있음을 알렸다. 시에라리온에서 벌어지는 서구 회사의 착취적인 다이아몬드 채굴 횡포를 고발하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출연한 이후, “다이아몬드에 얽힌 갈등과 그 사건들에 관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의 진심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는 최근 아이티섬의 구호를 위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2002년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디카프리오는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이 지나도 나는 내가 영화에서 연기한 다양한 캐릭터들을 돌아보며 여전히 이에 관해 말할 수 있길 바란다.” 2년을 더 기다릴 것도 없다. 그는 이미 그 꿈에 도달했다. 우수에 젖은 눈빛과 맨주먹을 쥐고 세상에 부딪혀 쓰러지던 소년의 사춘기는 지난지 오래다. 세월을 지나 소년을 벗고 남자를 입은 디카프리오는 지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현명한 배우로서 삶을 전진시키며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로 간다.
제프 브리지스는 캐릭터를 갈아입으며 배우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분명 실력에 비해서 주목받지 못한 배우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통해 이미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세상의 인정 따위는 그저 그럴 수밖에.
저명한 비평가 폴린 카엘은 <위대한 레보스키>(1998)가 개봉할 당시 제프 브리지스의 연기를 이같이 논했다. "아마도 살아있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게 연기하며,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배우일 것이다.“ 그에 앞서 1992년, 뉴욕 타임즈는 <어게인>의 리뷰에서 브리지스를 "그의 동세대 배우 중 가장 저평가된 훌륭한 배우”라고 평했다. 후에 브리지스는 스스로 말했다. "내가 저평가됐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변화에 순응하는 것인 만큼 열린 마음으로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는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하나같이 제프 브리지스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가 아카데미 수상 후보로 지목된 건 벌써 다섯 번째다. 그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데뷔작 <마지막 영화관>(1971)을 통해서 남우조연상 후보로 이름을 올린 브리지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대도적>(1974)으로 또 한 번 남우조연상 후보로 지명됐다. 그 후로 <스타맨>(1984)과 <컨텐더>(2000)를 통해 각각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크레이지 하트>(2009)를 통해 수상자로서 단상에 올랐다. 트로피를 움켜쥔 브리지스는 유쾌하게 웃으며 자신의 부모님과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특별한 의미를 더했다. “무엇보다도 기쁜 건 내가 받은 이 상이훌륭한영화한편을다시주목받게만들수있다는점이다.”
1949년 12월 4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제프 브리지스는 태생부터 연기자의 운명이었다. 아버지 로이드 브리지스와 어머니 도로시 브리지스 모두 배우였다. 특히 TV를 통해 활발히 활동한 로이드는 CBS에서 <더 로이드 브리지스 쇼>라는 롤타이틀 앤솔로지 쇼를 진행할 만큼 유명한 인사였다. 브리지스는 10살이 되던 해, 역시나 배우로서 활동하는 자신의 형 보 브리지스와 함께 이 쇼에 출연했다. 사실 브리지스의 첫 번째 스크린에 데뷔한 것은 스스로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일찍 이뤄졌다. 그는 생후 6개월 만에 출연한 <The Company She Keeps>(1951)에서 제인 그리어의 팔에 안긴 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기자로서 진로는 내가 앙앙거리던 생후 6개월에 시작됐다. 그러니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가 없지. 요컨대, 족벌주의의 산물이랄까.”
사실 브리지스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자각한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후에 고백했다.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건 <라스트아메리칸히어로>(1973)를 끝낸 후였을 거다.” 당시 <라스트 아메리칸 히어로>의 촬영을 마친 브리지스는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에이전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존 프랑켄하이머가 <아이스맨 코메스>(1973)에 그를 캐스팅하기 원한다는 소식이었다. 로버트 라이언, 리 마빈, 프레드릭 마치와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이미 섭외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브리지스는 거절했다. 그러자 2시간 후, <라스트 아메리칸 히어로>를 감독한 라몽 존슨이 찾아와 그를 꾸짖었다. “자네가 그러고도 배우인가? 진정 스스로 배우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영화계의 이런 거물들과 일할 기회를 차버릴 수 있지?” 결국 브리지스는 <아이스맨 코메스>에 참여했고, 이를 통해 자신이 배우를 직업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결정하기로 결심했다. 여전히 배우로 살고 있는 브리지스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어쨌든 그는 말했다. “그들과 함께 한 작업은 정말 대단했다. 내가 이 일을 원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줄 만큼.”
사실 제프 브리지스는 배우보단 뮤지션을 꿈꿨다. “나는 스스로 배우로서 활동하길 진지하게 결정하기 전에 이미 열 편의 영화를 해버렸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아카데미에 두 번째 노미네이트 되고 나서도 여전히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음악을 하게 될 거야.’” 일찍이 <사랑의 행로>(1989)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했던 브리지스는 <컨텐더>(2000)에서 본격적으로 노래 실력을 뽐냈다. 킴 칸스와 함께 녹음한 쟈니 캐쉬의 명곡 ‘Ring of Fire’이 오프닝 타이틀곡으로 수록된 것이다. 같은 해 제프 브리지스는 유명한 아티스트 마이클 맥도날드와 크리스 페노니스가 공동으로 설립한 ‘램프 레코드’에서 자신의 이름이 찍힌 앨범, <Be Here Soon>을 발매했다. “대단한 작곡가이자 내 오랜 친구인 존 굿윈이 써준 세 곡이 앨범이 수록됐다. 우린 함께 자랐지. 심지어 마이클 맥도날드와 데이비드 크로스비가 내 백업 싱어였다고!”
<크레이지 하트>에서 퇴물 컨트리 가수 배드 블레이크를 연기한 브리지스의 선택도 그의 음악적 갈망과 무관하지 않았다. “<크레이지 하트>의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이야기는 더없이 훌륭했다. 다만 그 안에 담겨야 할 음악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음악을 찾고자 했다.” 곧 브리지스는 대안을 찾았다. 그에 의하면 <크레이지 하트>는 이미 30년 전부터 준비된 영화였다. <크레이지 하트>에서 음악을 담당한 티 본 버넷과 브리지스가 처음으로 만난 게 30년 전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문>(1980)에 출연할 당시, 함께 연기했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티 본을 소개시켜줬고, 두 사람은 절친한 관계로 발전한다. 브리지스는 말한다. “<크레이지 하트>의 대본 중 어디선가 티 본이 보였고, 그도 나에게 대본에 관해 물었다.”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설적인 컨트리 가수 조니 캐시의 생애를 다룬 <앙코르>(2005)에서 음악을 만들었던 티 본은 <크레이지 하트>를 위해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브리지스는 티 본을 찾아가 물었다. “어때? 관심 있어?”티 본이 답했다. “그래, 만약 네가 하겠다면 나도 하지.” 티 본의 참여로 <크레이지 하트>는 비로소 심장을 얻었다. 브리지스는 말한다. “티 본의 가세로 모든 것이 변했다.” 브리지스가 <크레이지 하트>에서 신경 쓴 건 단지 음악만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주인공 배드의 디테일까지 꼼꼼하게 놓치려 하지 않았다. <크레이지 하트>를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연기하는 배우’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았다.
제프 브리지스는 오랫동안 배우로서 자리를 지키며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하지만 그는 여느 할리우드 배우들과 달리 셀레브리티로서 가십의 표적이 되지 않았다. 그는 골든글로브 수상 소감에서 아내에게 감사를 표했다. 결혼한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금실 좋은 부부로서 사랑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의 정직한 삶은 배우들의 방탕한 삶을 즐기는 대중에게 심심한 사안이었다. 덕분에 제프 브리지스는 철저하게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로서 각인될 수 있었다. “어떤 배우들은 마치 캐릭터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좋아하지 않기에 너무 깊게 몰두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식을 고수해왔고 큰 성공을 거뒀다.” 브리지스는 자신의 연기 철학을 통해서 긴 세월을 살아왔다. 항상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 그것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내겐 어떤 것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내 인생을 즐길 수 있다.”
브리지스가 애초 배우에 전념하지 못한 건, 어쩌면 즐거운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흥미에 흥미가 많았다. 음악과 미술, 그 외에도 내가 진짜 원하던 다른 것들까지.” <스타맨>에서 함께 출연한 카렌 앨렌의 제안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브리지스는 2003년 <Pictures: Photographs by Jeff Bridges>라는 사진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뛰어난 그림 실력을 자랑한다. 브리지스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그가 그린 삽화와 낙서로 가득하다.
현재 브리지스는 존 웨인의 <진정한 용기>(1969)를 리메이크하는 코엔 형제의 신작에 참여를 결정했고, 자신의 대표작이었던 SF영화 <트론>(1982)의 리메이크에 참여한다. 다양한 재능을 지닌 덕분에 다양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이젠 배우로서도 행복하게 사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시상식 트로피를 얻는 것 역시 그에게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단지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보장할 유일한 목표 따위가 아니라는 걸, 브리지스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브리지스는 자신이 터득한 행복의 비결을 당신에게 조언한다. “스스로를 너무 몰아 부치지 말아라. 거창한 인생의 과제를 정하지도 마라.” 이보다 확실한 경험담은 없다.
오스카가 제이미 폭스를 호명했을 때, 장내를 두른 박수는 제이미 폭스 개인의 명예 이상의 것이었다. 흑인배우를 그림자 취급하던 할리우드의 편견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실력을 통해 할리우드의 중심에 선 것이다.
2005년,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는 LA 할리우드 코닥극장의 열기는 달아올랐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와 마틴 스콜세지의 <에비에이터>(2004)가 뜨거운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남우주연상만큼은 이미 두 영화와 무관한 일이었다. 아마 그 해 오스카 심사위원들은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누구의 손에 쥐어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레이>(2004)의 제이미 폭스를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분명 다른 후보에 대한 흥미 따위는 접었을 것이다. 이변에 대한 예상조차 불순한 일이었다. 만약 제이미 폭스가 <레이>로 오스카 트로피를 손에 쥐지 못했다면 그 해 아카데미는 두고두고 비웃음을 샀을 거다.
물론 ‘오스카가 선택한 세 번째 흑인남자배우’라는 수식어로 제이미 폭스를 치장해버린다는 건 탐탁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제이미 폭스의 수상에 주목해야 하는 건 그 수상이 새로운 흑인배우들의 전성시대를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이미 폭스가 감격을 맞본 지 채 2년 만에 <라스트 킹>(2006)으로 아카데미에 호명된 포레스트 휘태커의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덴젤 워싱턴과 할리 베리의 동반 수상을 통해 세차게 밀어 올린 블랙 파워의 박동이 비로소 좁은 혈관의 숨통을 텄고, 그로부터 불과 3년 만에 제이미 폭스라는 뉴웨이브가 수혈된 것이다. 제이미 폭스는 새로운 시대의 포문을 열기 위한 적자였다. 번거롭게 잽을 날리고 풋워크를 밟으며 전진하는 것이 아닌 확실한 한 방으로 왕좌를 차지한 진정한 블랙아웃(blackout)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할리우드는 아카데미의 입을 빌려 커밍아웃했다. 흑인배우들에 대한 할리우드의 낡은 관습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음을 자각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에릭 말론 비숍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제이미 폭스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한 건 코미디 클럽에서 공연을 하던 1989년도였다. 당시 여자 코미디언이 공연 초반에 불린다는 것을 안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제이미 폭스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공연 중 장난처럼 자신을 이름을 불렀다. 그는 이 이름이 “어떤 선입견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믿었다. 그 후로 TV코미디 시트콤 등을 통해 입지를 다져나가던 제이미 폭스는 올리버 스톤의 <애니 기븐 선데이>(1999)를 통해 잠재력을 펼쳐 보인다. 혈기왕성한 쿼터백 윌리 비멘으로서 알 파치노와 맞선 제이미 폭스는 무엇보다도 쿼터백으로서 역동적인 움직임을 선사하며 인상적인 평을 얻어냈다. 그건 사실상 이미 준비된 연기였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제이미 폭스는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유니폼을 꿈꿨다. 교내 역사상 1000야드를 돌파해 터치다운을 찍어낸 쿼터백은 제이미 폭스가 유일했다. 결국 <애니 기븐 선데이>는 연기자로서 제이미 폭스의 삶에 도화선이 됐다.
그의 삶의 전환점을 만든 건 마이클 만과의 만남이었다. 혹자들은 제이미 폭스가 윌 스미스에 밀려서 알리 역을 얻지 못했다고 수군거렸지만 정작 제이미 폭스는 말한다. “처음 만났을 때, 그(마이클 만)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제이미 폭스가 <알리>(2001)에 출연할 수 있도록 힘을 쓴 건 윌 스미스였다. 그는 마이클 만에게 말했다. “이 친구가 그 역할(알리의 코치 드루 번디니 브라운)을 할 수 있다.” 마이클 만은 심드렁했다. 그러자 윌 스미스가 훅을 날렸다. “나는 제이미 폭스 없이 하지 않을 거야.” 결국 제이미 폭스는 <알리>에 출연했고, 마이클 만과의 인연은 <콜래트럴>(2004)과 <마이애미 바이스>(2006)를 거쳐, 심지어 그가 제작자로 나선 <킹덤>(2007)까지 이어졌다. 제이미 폭스는 마이클 만과의 작업을 이렇게 소회했다. “마이클 만과 작업할 때, 나는 상업적 성공은 염두에 둘 수도 없었다. 우선 그 영화의 예술성에 관해서만 생각했다. 당신이 알 파치노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영화를 볼 때, 상업적인 성공이 아닌 다른 걸 기억하는 것처럼.”
제이미 폭스란 이름을 각인시킨 결정타가 된 <레이>에서 그는 단순히 레이 찰스를 재현하는 배우로서 기능하지 않았다. 사실 제이미 폭스는 연기자가 되기 이전부터 가수를 꿈꾸고 있었다. 할머니의 영향으로 5살 무렵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은 제이미 폭스는 유년시절엔 교회 성가대를 이끌기도 했다.?그에게 음악은 종교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레이 찰스는 살아있는 현신이었다. 레이 찰스에게 직접 레슨을 받고 가르침을 전해들을 수 있다는 감격에 비하면 하룻동안 12시간을 넘게 눈을 뜨지 못하는 고통은 감내할만한 것이었다. “만약 네가 그걸 느끼고 나서야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야.” 이런 레이 찰스의 가르침은 그에게 일용할 양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내게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가르쳐줬다.” 결국 <레이>는 제이미 폭스를 오스카의 영예로 쏘아올렸다. 그건 그가 고대하던 첫 번째 정규앨범 발매를 위한 도움닫기로서 효과적이었다. 최근 두 번째 정규앨범을 발매했던 제이미 폭스는 지금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더블 플래티넘의 흥행기록을 지닌 R&B가수로서 위치를 구축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레이>에서 제이미 폭스가 보여준 뛰어난 표현력은 근작인 <솔로이스트>(2009)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레이>와 마찬가지로 실존인물인 길거리 음악가 나다니엘 안소니 에이어스를 연기한 제이미 폭스는 이를 위해 갖은 고생을 치러내야 했다. 레이 찰스를 연기하기 위해 약 14kg 감량을 시도했던 제이미 폭스는 나다니엘을 연기하기 위해 다시 한번 8kg정도를 감량했다. 또한 노숙자처럼 보이기 위해 치과를 찾아가 정상적인 앞니를 긁어냈으며 주변의 걱정을 살 정도로 역할에 몰입해나갔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떨쳐낼 수 없었다. 매니저조차도 내가 배역에 빠져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전혀 몰랐다. 이 작품을 통해서야 내가 그런 스타일이란 것을 알았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제법 오랫동안 ‘이제부터는 나다니엘처럼 생각하지 말자’라고 다짐해야 했다. 몇 달이 지난 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이미 폭스는 단지 배역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을 진심으로 이해한다. “노숙자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과 직접 노숙자가 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냥 노숙자들을 보면 ‘저런’이라 말하게 되지만, 내가 저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보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모든 면에서 굉장히 어려웠다”는 <솔로이스트>의 작업이 LA에서 끝난 직후 제이미 폭스는 곧장 필라델피아로 날아가 <모범시민>(2009)을 촬영했다. <모범시민>에서 지적인 검사 닉 라이스를 연기하는 그는 <드림걸즈>(2007)의 커티스 테일러 주니어를 연상시키는 냉정함을 드러내는 가운데 인간적인 체온을 유지해낸다. 그 인간적 체온은 어쩌면 본래 제이미 폭스의 것일지도 모른다. <킹덤>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제니퍼 가너는 “제이미가 나타나면 세상에 더 즐거운 것이란 없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에도 할리우드 주연배우로 활동하는 가운데 코미디 클럽에서 즉흥적인 연기를 펼친다. 그럴 수 없을 때는 세트장에서 동료들을 웃기곤 한다. <킹덤>의 피터 버그 감독은 제이미 폭스를 ‘특별한 재능’이라 일컬었다. “그는 정말 재미있는 사람인 반면 한편으론 매우 진실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복잡한 남자지.”
현재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로맨틱 코미디 <발렌타이 데이>(2010)의 개봉을 기다리는 제이미 폭스는 또 다른 코미디물 <듀 데이트>(2010)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다시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진중하고 비범한 역할을 돌아 명성을 얻어낸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사랑하는 코미디로 돌아서는 중이다. “거만해지는 걸 배우지 않은 것, 그것이 내 전부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잘 알고 있다. 다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부단히 꿈꾸고 노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