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더 비기닝>은 버디무비로서의 장점이 강한 작품이다. 권상우와 성동일의 케미가 나쁘지 않다. 덕분에 웃음을 유발할만한 코미디로서의 장점이 발휘된다. 능력 없는 민폐 남편이자 구박덩어리로 전락한 권상우의 찌질한 연기를 보는 재미도 있다. 성동일 역시 사회와 가정에서의 이중적인 위세를 지닌 인물이란 점에서 코믹한 극적 장치가 된다. 물론 이게 남성편향적으로 설계된 코미디란 점은 좀 지적하고 싶어지지만.
문제는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추리물이란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탐정>이라는 제목을 지우고 싶을 정도로 형편 없는 만듦새를 전시한다. 전설적인 강력계 베테랑 형사와 아마추어 추리광이 함께 사건을 풀어나간다는 골자는 흥미롭지만 베테랑 형사는 그 경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능하고, 아마추어는 그야말로 민폐 덩어리다. 추리를 한다기 보단 완성된 시나리오를 토대로 추리를 끼워맞춘다는 인상이랄까. 추리물이란 장르 안에서 도무지 신뢰가 안 간다. 기이할 정도의 자신감이 묘할 정도.
의외로 이 영화에서 재미있게 여겨지는 건 사건현장이 아니라 각자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부부끼리의 사연이다. 밥벌이에 무능하든, 유능하든 아내보다 약한 남편들의 고충을 나누는 광경이나 밥벌이 제쳐두고 탐정질에 환장한 남편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아내 연기를 하는 서영희의 연기는 <탐정>에서 쓸만한 서브 플롯 노릇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최소한 납득이 가는 추리물로서의 구색을 맞췄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관람을 권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어설픈 슬랩스틱 따위로 범벅된 쌍팔년도 명절 코미디가 아니라 캐릭터의 특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코미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은 평가해주고 싶다. 그런 면에선 팝콘무비로서 가볍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관객들에겐 미덕이 없는 영화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개인적으로 추천하지 못하겠단 거지.
영화가 흥행한다면 누가 봐도 속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결말이다. 이미 제목부터 '더 비기닝'이란 부제를 품고 있으니 당연히 결말에 대한 야심이 팽배한 것 같은데, 과연 어떨지. 전통적인 관점에서 추석에 먹힐 영화처럼 보이긴 한다만.
하늘이를 보내주기 위해 김포로 가야 했다. 화장을 하기로 했다. 토요일에 떠난 하늘이를 보내주기 위한 일요일이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지막을 지켜줄 수 있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데 하늘이 너무 맑고 예뻤다. 하늘이 너무 맑고 예뻐서 마음이 미어졌다.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눈가를 불로 지져서 눈물샘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하늘이가 담긴 상자를 안고 탄 택시 앞좌석에서 바라보이는 하늘은 너무 맑고 예뻤다. 뒷좌석에 앉은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나는 어머니가 들을까 겁이나 소리를 죽이고 마음 속으로 흐느꼈다. 눈물을 닦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하늘은 계속 맑고 예뻤다.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하얀 털 같아서 하늘이 생각이 많이 났다. 그래서 조금 울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는 기적 같은 아이였다. 하늘이는 태어나고 3개월이 지나 어미의 젖을 뗀 후 우리집으로 왔다. 그리고 몇 개월 뒤, 하늘이가 심장에 기형 증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어떤 수의사도 같은 말을 했다. 이 아이는 언제든 죽어도 이상할리 없는 아이라고. 그 말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새까매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하늘이가 집에서 다다다 뛰어다닐 때면 뒤를 쫓아다녔다. 뛰지 못하게 잡기 위해서. 하늘이는 신나서 심장이 뛰었고, 나는 놀라서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하늘이는 생각보다 씩씩하게 잘 자랐고, 생각보다 건강했다. 지난해 혈액암 선고를 받을 때는 세상이 원망스러웠지만 하늘이가 죽을 거란 선고 앞에서도 나는 내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털이 빠지고, 지쳐가는 하늘이를 볼 땐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음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지만 그 이후로 건강하게 잘 견뎌내는 하늘이를 보면서 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하늘이는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지 않았다. 어머니께선 잠이 든 하늘이가 당최 일어나지 않아 깨우다가 비로소 하늘이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았다며, 하늘이가 너무 착한 아이라고 우셨다. 어머니는 하늘이를 키우기 전까진 집에서 동물을 키울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 분이셨다. 하늘이는 기적이었다. 언제든 죽어도 상관 없을 것이라 했던 하늘이가 9년 동안 우리 가족의 곁을 지켰고, 어머니도, 나도, 겪을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을 전하고 떠났다. 정말 기적 같은 아이였다.
화장장에 도착했다. 상자에 갇혀 있던 하늘이를 다시 꺼내 눕혔다. 몸이 차가웠다. 온기가 없었다. 나는 울었다. 이 몸이 다시 따뜻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서글퍼서 울었다. 어머니는 마치 자식을 보내듯이 오열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나도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저 하늘이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흐느끼는 것밖에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았다. 슬펐다. 이렇게 슬플 수가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너무 슬펐다. 하늘이를 화장하러 보내는 순간에 두 손을 쥐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가슴 한 구석이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내 마음 속에서도 하늘이를 태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하늘이의 몸을 어루만지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꼭 좋은 곳으로 가길 바란다고 비셨다. 처음엔 같이 화장터에 가는 것을 누나가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같이 가야겠다고 말했다. 누나는 아마 어머니를 걱정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도 어머니를 걱정했다. 어머니께선 하루라도 더 하늘이와 있고 싶어하시는 것 같았다. 하루라도 빨리 잊는 것보다도 하루라도 더 있고 싶다는 마음이 더 중요한 일 같았다. 아니, 간절했다. 내가 그랬기 때문에. 실제로 하늘이가 화장되는 걸 보며 마음이 미어졌다. 그렇게 마음이 문드러져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보지 못했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거라 생각했다. 하늘이 덕분에 나는 웃고, 이제는 운다. 그 기쁨과 슬픔을 함께한 하늘이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몸에 대한 기억을 마음으로 담았다.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너를 당장 볼 수 없게 됐다는 슬픔이 너무 짙어서 견딜 수 없지만 언젠가는 너는 다시 내게 기쁨으로 기억할 것이다. 나는 오늘 그걸 알았다.
어머니께선 하늘이의 유골이 이렇게 적다는 게 믿을 수 없다는 듯 속상해하셨다. 타고 남은 하늘이의 유골은 하얗고 작았다. 그 앙상해진 하늘이 앞에서 나는 강의 건너편에 선 하늘이를 생각했다. 화장장에선 추가 요금을 내면 유골을 돌로 만들어 준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받고 싶어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돌이 된 하늘이의 유골은 하얗고 투명했다. 어머니께선 하늘이가 착해서 이렇다고 하셨다. 평소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질색했을 테지만 오늘의 나는 그냥 그 말을 믿었다. 하늘이는 정말 착한 아이였으니까. 그랬다. 정말. 하늘이는 죽어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남겼다. 모든 유골을 돌로 만들진 않았다. 나는 하늘이의 유골을 우리 집 가까이에 있는 공원에 뿌려주고 싶었다. 나는 항상 그 공원을 보면서 하늘이가 여기서 산책을 하면 정말 좋아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 집에 있는 하늘이를 우리 집까지 데려오진 못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나는 하늘이의 유골을 일부나마 그 공원에 묻어주고 싶었다. 어머니께선 그러자고 하셨다. 우린 가루와 돌로 변한 하늘이를 안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하늘은 여전히 너무 맑고 예뻤다. 어머니는 어쩌면 이렇게 날씨도 좋을 수 있냐며 하늘이가 정말 착한 아이라고 하셨다. 나는 역시 그렇다고 믿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집 앞에서 어머니와 누나와 아내와 함께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우린 끊임없이 하늘이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모여서 식사를 한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하늘이가 죽어서 우리 가족을 한 식탁에 앉혔다. 하늘이가 죽어서도 우리 가족을 위해 애쓴다고 생각했다. 우린 하늘이의 유골을 서울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 좋은 곳에 뿌렸다. 어머니께선 유골이 너무 적다고 속상해하셨다. 그러면서도 하늘이에게 마음껏 뛰어 놀라고, 잘 가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하늘이에게 비로소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많이 생각날 것이다. 벌써 너무 그립다. 하지만 나는 하늘이를 생각하며 나의 행복했던 시절을 되뇔 수 있다는 걸 믿게 됐다. 네가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하늘아. 언젠가 너를 다시 보게 된다면 꼭 안아줄게. 하늘아. 안녕. 잘 지내. 하늘아. 건강하게.
세상은 손쉽게 뜨겁고, 차갑다. 그토록 뜨겁고 차가운 세상에서 누군가는 쉽게 떠오르고 진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제 자리를 지켜낸다. 전지현은 17년 동안 배우였다. 벗어난 적이 없었다.
촬영이 시작된 스튜디오에선 한 곡의 노래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비긴
어게인>의 OST에 수록된 ‘Lost stars’였다. 전지현은 항상 화보 촬영 현장에 직접 노래를
준비해온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그 한 곡을 반복적으로 듣는다고 했다. 수많은 화보 스태프들이 스튜디오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에서 전지현의 움직임은 그리 크지 않음에도 눈에
띄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시 그랬다. 스튜디오 안에 자리한
수많은 이들의 시선은 둘 중 하나였다. 스튜디오 안에 자리한 그녀를 보거나, 스튜디오 안에 자리한 그녀의 찰나가 연이어 전송되는 모니터를 보거나. 모두가
나름의 시선으로 전지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로지 전지현만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주목할 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사체가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세상의 수많은 관심에 둘러싸인 그녀의 입장과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전지현은 17년 동안 배우로서 제 자리에 서있었다. 수많은 눈과 입이 모이는 한가운데 서서 수많은 시선과 언어 속에서 모이고 흩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17년 사이 세상은
많이 변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을 견디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숙성시키며 함께 흘러왔을 뿐이다. 그 자리에 서있던 그녀를 세상이 다시 주목했을 뿐이다. 그녀는 거기 있었다. 그리고 거기 있을 것이다. 스튜디오에선 호세 제임스의 ‘Come to my door’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녀가 준비해온 두 번째 곡이었다. 세 번째 곡은
없었다.
스튜디오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여기 전지현 씨가 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어요.
사실 아까 창문 틈으로 밖에 있는 사람과 잠시 눈을 마주쳤어요. ‘저
사람이 나를 알아보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알아봤다면 놀라지 않았을까요?
그럴까요?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테니까요.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어렸을 땐 TV에 자주 나오는 편이 아니라서 그런 인식이 있었던 것 같지만 <별에서
온 그대>(이하: <별그대>) 이후로 사람들에게 많이 익숙해진 거 같고요.
영화에 비해 TV드라마 출연 횟수가 현저히 적었죠.
사실상 <별그대>가
제 입장에선 첫 드라마라 해도 좋을 거에요.
그렇다면 첫 드라마로 대단한 성공을 경험한
셈이네요. 그만큼 영화와는 다른 파급력을 느꼈을 것 같은데요.
<별그대> 시청률이 30% 가깝게 나왔는데 그게 영화 관객 수치와 비교하면 거의 천만 수준이래요.
그러니까 일주일에 이틀씩 천만 명 앞에 섰던 거니까 영화와 완전히 다른 시장이구나 싶더라고요. 게다가
영화는 극장에 가서 돈을 주고 봐야 하지만 TV는 원하는 시간에 켜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더욱 친근감을 느끼겠죠. 게다가 <별그대>는 아시아에서도 반응이 좋았잖아요. 예전과 달리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시간에 해외반응까지 전해 듣게 되니까 놀랍긴 했어요. 이렇게 말하니까 꼭 옛날 사람 같네요(웃음).
영화에 비해서 드라마 촬영 스케줄은 타이트하게
돌아가는 만큼 힘들진 않았나요?
정말 죽겠다 싶으니까 끝나던데요(웃음). 그런데 사람 몸이 신비한 게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도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인체의 신비를 느끼면서 견뎌냈죠(웃음).
어쨌든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엽기적인 그녀>를
찍고 나서 아시아 투어를 돌기도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대단히 큰 기회였고, 그만큼 제가 더 잘했어야
했죠. 우습지만 그때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거든요. 그래서 <별그대>로 다시 아시아적인 관심을 받게 돼서 정말 감사했어요.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안 오리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랑을 하나하나 다 느끼고 싶고,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내고 싶어요.
시간이 지나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더욱 절실한 것들도 생기고요
그만큼 제게 부족한 걸 채워나가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 같아요.
지난 2월에
최동훈 감독의 <암살> 촬영을 끝냈다고 들었어요. 최동훈 감독과는 <도둑들>에
이은 두 번째 작업이죠. <엽기적인 그녀>와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의 곽재용 감독 이후로 두 작품을
연이어 작업한 감독도 처음이었고요. 감회가 남다르진 않았나요?
본래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요. 그만큼 감회가
남달랐죠. 그리고 최동훈 감독님과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어요.
확실히.
<도둑들>, <베를린>, <암살>까지 모든 영화의 촬영지가 해외네요. 해외 복이 많네요(웃음).
그런가 봐요. 그 전에 찍은 작품 중에서도 해외 로케이션 작품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런 팔자가 따로 있대요(웃음).
당연히 국내에서 촬영을 할 때와 차이가
있겠죠.
아무래도 그렇죠. 사실 해외 촬영 중엔 압박감이 심하게 느껴져요. 몸으로 일하는데 몸이 편하지 않으면 힘들잖아요. 해외 나가면 그만큼
불편한 일이 많잖아요. 연기하는 것도 힘든데 스트레스까지 받으면 긴장감도 배로 오고. 그래서 저는 해외 촬영이 별로 반갑지 않아요. 그런데 계속 해외
로케이션 영화만 찍게 되니, 이게 무슨 일인지(웃음).
<암살>에선 암살단의 대장 역할을 맡았다고 들었어요.
안옥윤이라는 인물인데, 이름에서부터 뭔가 느껴지지 않나요? 군인다운 면이 있죠.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인물이지만
굉장히 순박한 면이 드러나기도 해요.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기도 하고,
다방면으로 매력적인 캐릭터였어요. 게다가 <암살>의 홍일점인데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둔 영화는 흔치 없잖아요.
그런 기회를 얻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죠.
그만큼 잘해내야겠다는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을
거 같아요.
그래서 최대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했어요. 그래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그럴 때마다 정말 안옥윤처럼 모두 다 나를 따라오라고 자신 있게 연기하려고 노력했죠.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면서.
혹시 리더십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사실 잘하는 게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주도하는 경우도
없죠. 확신이 있어야 주도할 수 있잖아요. 잘하는 게 없으니까
확신할 수가 없고, 결국 따라가는 입장이 되는 거죠. 그리고
사실 어릴 때부터 일만 해서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라 친구들과 모일 일도 별로 없어요(웃음). 그런 의미에서 직업 선택은 잘한 거 같아요. 해야 되는 건 잘해내려는
타입이거든요.
최근 영화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캐스팅하고 싶은 여배우 1순위로 꼽혔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드는 작품과 캐릭터를 만나기란 쉬운 일은 아닌가 봐요.
1년에 수많은 한국영화가 개봉하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는 많지 않을
거예요. 기억에 남는 여자 캐릭터는 더욱 드물고요. 그 와중에 <암살>을 만난 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좀 더 어렸다면 이 캐릭터를 맡을 수 있었을지, 좀 더 나이가
들고 나서 이런 캐릭터를 봤다면 얼마나 아쉬울지,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지금 만나서 다행인 거죠.
연기를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의심해본 적도
있나요?
많아요. 그런 생각을 떨쳐낸 건 얼마 안됐어요.
의외의 답변이네요. 그런 의심을 견뎌온 것일까요?
사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어렸을 땐 그냥 했던 거 같아요. 못해도 했고, 좋아하지 않아도 했고. 그래도 그렇게 해왔던 경험이 지금의 자산이죠. ‘어쨌든 해냈다’라는 자신감이 쌓이면 못하는 것도 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니까요. 게다가 시간이 지난 만큼 저도 어느 정도 성숙해졌고요.
10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처음부터 이목을 끄는 배우였어요. 이른
나이에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진 않았나요?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지 못해서 아쉽진 않았는지,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건 다 했어요. 그만큼 추억도 많고요. 대신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촬영장에서의 추억이 더 많죠. 그에
대한 아쉬움은 없어요. 지금도 배우로 잘 살고 있으니까. 물론
어렸을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 ‘나는 특별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가 특별하다고 여겨본 적은 없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외로워지기 마련이죠. 그래서 그런 생각에 갇히지 않으려 노력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전지현 씨가 스스로를
특별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겸손한 말처럼 들리기도 하네요(웃음).
’나는 여배우야. 너와
달라’ 이러고 싶진 않았어요. 그러면 정말 외로워져요. 남들이 봤을 땐 제 스스로 벽을 두르는 거니까요. 그렇게 외로워지고
싶지 않았죠. 나도 너와 똑 같은 사람이라고 알려줘야 해요.
무언가를 갖고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죠. 화보 촬영 중에 모니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저는 (김)수현 씨 같은
배우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한테도 그런 느낌이 드나요(웃음)?
일단 외모만 봐도 평범할 순 없잖아요? 외모 또한 타인의 주목을 끌어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선 배우에겐 타고난 재능이 될 수 있죠.
하지만 외모만으론 오래 갈 수 없어요. 그만큼 노력해야죠.
데뷔한지
17년이 됐다고 들었어요. 배우로서 살아온 긴 시간만으로도 그 노력이 증명되는 건 아닌가
싶네요. 그 긴 시간을 뒤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요?
지금이 시작 같아요(웃음). 어렸을
땐 ‘익숙해지는 게 두렵다’는 생각도 했어요. 나름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기계적으로 일하는 것 같아서 걱정됐죠. 하지만 지금은 걱정하지 않아요. 눈 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다 보니까
일도 즐겁고요. 저는 끝까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타입이 아니에요. 그만큼 시간이 걸려도 사람들이 그 노력을 알아줄 거라 믿고요.
<엘르> 2013년 5월호에서의 인터뷰에서 ‘<도둑들>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는 모르지만 좋은 평가를
받게 되면 그간의 오해가 조금은 사그라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어요.
여기서 오해란 무엇일까요?
<도둑들>이
개봉할 즈음에 <베를린> 촬영을 끝냈는데 일단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제가 제일 잘 알잖아요. 그래서 <도둑들>이나 <베를린>으로
그 동안 관객들이 느꼈을 실망을 해소시켜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던 거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한때 대중들이 실망감을
드러냈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아요. 작품들이 연이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 전지현 씨에 대한 기대감도
많이 줄어드는 인상이었죠.
배우들은 항상 작품을 통해 관객을 만나고 이야기하잖아요. 관객들은
성공한 작품을 기억해요. 캐릭터도 마찬가지죠. 의도치 않게
국내에서 공백이 생겼지만 <엽기적인 그녀> 이후로
제 영화가 줄줄이 흥행에서 참패했으니 제 작품도, 저도 없어진 셈이죠.
배우가 작품을 통해 관객들과 소통하지 못하니까 좋은 말을 듣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고요. 저도
제 작품이 재미없으면 보지 않는데 관객들이 그런 작품을 굳이 찾아볼 이유가 없잖아요. 당연히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죠.
반대로
<도둑들>과 <베를린>, <별그대>가 좋은 반응을 얻었고, ‘배우 전지현’에 대한 기대감도 그만큼 커진 거 같습니다. 당사자에게도 고무되는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일단 선입견이 없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편한 법이잖아요. 사실 그 전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죠.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은 알고 있으니까 나를 받아들여줄 수
있을지 조심스러웠어요. 그런 면에서 지금은 좀 편해진 거 같아요.
<도둑들>은 4년 만의 국내 개봉작이었죠. 그만큼 공식석상에 서면 긴장되지 않았을까요?
그렇진 않았어요. 한국에서 오랜만에 개봉하는 제 작품이긴 했지만 제가
오랜만에 작업한 작품인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긴장감은 없었지만 나름의 치열함이 있었죠. <도둑들>엔 캐릭터가 많고, 배우들이 많잖아요. 조금 웃기게 들리겠지만 ‘그 중에서 3등 안엔 들어가야 할 텐데’라고 걱정했어요(웃음).
<별그대>에서 천송이라는 배우를 연기했는데 배우가 배우를 연기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사실 그냥 천송이라는 캐릭터가 재미있었어요. 물론 어떨 땐 좋다고
해놓고, 어떨 땐 매몰차게 외면해버리는 대중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상황에 대해선 이해가 됐어요. 하지만 그 감정에 호소력이 생기고, 시청자들을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천송이가 기본적으로 사랑스러운 캐릭터였기 때문인 거 같아요. 그런 면에 있어선 같은 배우로서 송이한테
고마웠죠. 다만 제게 있어선 과장된 부분이 더 많게 느껴져서 배우라는 직업보단 캐릭터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됐어요.
<도둑들>과 <별그대>에서는
과장된 제스처를 통해서 캐릭터의 개성을 끌어올리는 느낌이었어요. 반대로 <베를린>은 캐릭터의 감정선을 차분하게 유지하면서 극적인
흐름에 철저히 녹아 드는 인상이었죠. 배우 입장에선 어떤 연기가 스스로에게 더 잘 맞는 옷처럼 느껴지는지
궁금하네요.
항상 나와 공통점이 있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 보다 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저와 닮은 <별그대>의
천송이보다 정반대인 <베를린>의 련정희를 연기하는
게 더 편하게 느껴졌거든요. <암살>의 안옥윤도
그랬고요. 내게 없는 면을 연기할 때 진짜 연기하는 기분이었어요. 물론
인위적으로 연기하는 인상이 느껴지면 안되겠지만 어쨌든 저에겐 그게 편했어요. 사실 <별그대> 천송이는 어려운 캐릭터였어요. 방방 뜨는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해내기가 생각보다 힘들거든요. 계속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느낌임에도 궁극적인 뭔가를 더 보여줘야 할 것 같다는 부담감이 든다고 할까요? 하지만
차분한 역할을 연기하는 건 제가 모르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같고, 그렇게 이해하면서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그리고 <별그대>를 할 땐 회당 한번씩은 웃겨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기도 했어요(웃음). 그래서 조금 피곤했죠.
<별그대>의 천송이와 닮은 점이 많다고 느끼시나요?
<별그대>를
보면서 남편이 그랬어요. 집에서 하는 걸 다 보여주면 어떡하냐고(웃음).
혹시 ‘치맥’도 즐기시는지?
원래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알코올이 당긴다’는 느낌을 이젠 점점 알 거 같아요. 내일 스케줄이 비었다는 걸 알면
가끔 술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도 느껴지고요. 그럴 때면 ‘어른이
된 건가?’라는 생각도 들고(웃음).
단순한 질문이지만, 외계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지구인도 많은데, 굳이 외계인까지(웃음)? 뭐, 운명적인 만남이라면, 수현이처럼
잘 생기고 인물이 좋다면 모르죠(웃음).
하루 정도 쉴 여유가 생기면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요?
요즘 좀 바쁘긴 하지만 하루도 못 쉴 정도로 바쁘게 사는 건 아니에요(웃음). 쉬는 날이면 보통 여자들처럼 관리를 받죠. 만약 이틀 정도 여유가
생기면 하루는 이렇게 제 몸을 관리하고, 다른 하루는 친구들을 만나서 밥을 먹거나 이런 식이죠. 왠지 죄송하네요. 뭔가 특별하게 답변할 게 없어서(웃음).
사실 이런 질문 많이 받을 거 같았어요. 그래서 그런 질문을 자주 받게 되면 ‘뭔가 특별한 답변을 준비해야
하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도 같아요.
맞아요! 그런 생각이 들죠. ‘쉬는
날 뭐하세요? 촬영하지 않는 날은 뭐하세요?’ 특별히 뭘
하겠어요(웃음). 사실 놀아본 사람이나 잘 놀죠. 맨날 촬영만 하면서 살다 보니 갑자기 놀아보려 해도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몰라요. 그러니까 쉬는 날엔 다음 촬영을 위해 쉬면서 제 몸을 가다듬는 거예요. 그거라도
해야죠(웃음).
그런 질문을 받다 보면 ‘뭔가 특별한 답변을 준비해야 하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도 같아요.
맞아요! 정말 그럴 때가 있죠. 사실
놀아본 사람이나 놀 줄 알죠. 맨날 촬영만 하면서 살다 보니 갑자기 놀아보려 해도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몰라요. 그러니까 쉬는 날엔 다음 촬영을 위해 쉬면서 제 몸을 가다듬는 거예요. 그거라도 해야죠(웃음).
<암살>에선 총을 많이 다룬다고 들었어요.
제가 맡은 안옥윤이 독립군 최고의 스나이퍼니까요.
액션연기는 많이 했지만 총을 다룬 경험은
드물지 않았나요?
몇 번 있긴 했지만 이번만큼 실컷 만져보진 못했죠. 정말 원 없이
쐈어요. 기관총 쏠 때는 스트레스가 풀렸죠(웃음).
액션 연기 경험이 많은 편이에요.
자칭 액션 배우니까요(웃음).
여배우로서 액션 연기를 소화해낸다는 게
정말 힘든 일 아닐까요?
당연히 힘들죠. 그런데 저는 몸으로 표현하는 데에 재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액션배우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어요. 몸으로
표현할 줄 아는 배우는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제게 그런 강점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재미도 있고요.
기본적으로 운동을 좋아하는 편인가요?
좋아해요. 운동을 하다 보면 몸이 예민해져요.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스스로 느껴야 하니까 몸이 예민해지는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몸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선 운동의 도움이 컸죠.
어떤 의미에선 근육을 단련하는 것도 연기를
위한 방편일 수 있겠네요. 사실 표정도 얼굴의 근육을 쓰는 연기이기도 하고요.
그럼요. 매달려 있을 때 발 끝까지 긴장하지 않으면 자세가 흐트러지게
돼있어요. 그만큼 운동이 많은 도움이 되죠. 하지만 표정은
얼굴 근육만으로 표현한다기 보단 감정으로 표현한다는 게 맞는 말인 거 같아요.
철야 촬영을 해도 다음날 오전엔 꼭 운동을
한다고 들었어요.
<블러드>를
준비하면서 스물세 살 무렵부터 운동을 시작했는데 그전까진 운동을 전혀 안 해서 몸이 뻣뻣했어요. 그런데 <블러드>의 사야 같은 여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일단
다리부터 일자로 찢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목표가 생기니까 운동을 하게 됐어요. 처음엔 러닝머신이나 크로스 트레이닝 같은 걸 10분 이상 못했는데
지금은 매일 해야 돼요. 하루라도 거르면 찌뿌둥하거든요. 지금은
완전히 습관이 됐죠.
아무래도 몸매를 유지하는 궁극적인 비결
또한 운동이겠군요.
그럼요. 나이가 들면 살이 많이 찌잖아요. 어렸을 땐 신진대사가 높으니까 걱정 없었는데 지금은 옛날처럼 먹으면 살로 가는 게 느껴져요. 그러니까 운동을 해야죠. 운동을 하면 살이 찌지 않으니까.
사실 전지현 씨는 살찔 걱정 따윈 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웃음).
그럴 리가요. 운동을 하면 피부도 달라져요. 어쨌든 세월은 흐르고 나이 들지 않을 수 없잖아요. 하지만 운동을
하면 젊어지는 기분이 드니까, 조금이나마 나이가 든다는 기분을 뒤로 미룰 수 있다면 좋지 않아요?
배우로서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의 연령대를
유지하는 것도 어떤 면에선 필요한 노력이겠죠. 그런 면에서 외모를 관리하는 것도 배우로서 필요한 일일
수 있겠네요.
만약 제 나이가 마흔 살인데, 10대 역할을 하려는 건 무리한 욕심이겠죠. 그리고 그저 젊은 역할을 맡기 위해 관리한다기 보단 제가 어떤 역할을 연기하건 일단 저부터 건강해야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관리가 필요한 거 같아요.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지만 사적으로
특별히 드러나는 바가 없었던 거 같아요. 스스로 말한 것처럼 정말 배우로서의 삶에 충실했기 때문일 수
있겠지만 그만큼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데요.
결코 완벽주의자는 아니에요(웃음).
수많은 관심 속에서 산다는 건 정말 좁은 세상에서 산다는 의미일 수 있겠죠. 그걸 아는
이상 거기서 제가 조심해야 할 건 제가 몰라서 생기는 실수들인 거 같아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몰라서 하는 실수란 어떤 것일까요?
가끔씩 내 선택이 나중에서야 실수였다고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런
거죠.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 의도와 무관하게 뒤늦게 느끼게
되는 실수가 있잖아요. 끊임없이 조심해야 하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사실 어릴 때부터 워낙 일만 해왔기 때문에 제 스스로 사는 법은 잘 아는 거죠.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고 할까?
어느덧 현장에서 선배보다 후배가 더 많아졌을
텐데 그런 부분에 대한 책임감이란 게 있을까요?
음, 없진 않은 거 같아요. 분명
어렸을 때와는 다르죠. 그런데 선배든, 후배든, 정말 열심히 하기만 하면 현장에선 인정받을 수 있어요. 무엇보다도
배우가 먼저 인정 받아야 할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스태프들이니까요. 그래서 지금 당장 선배이니까 어떻게
한다는 건 없어요. 그냥 열심히 할 뿐이죠. 저도 아직 부족한
면이 많으니까요.
2000년에
개봉했던 <시월애>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이정재
씨와 <도둑들>과 <암살>에서 다시 만났어요. 오랫동안 세월을 공유하는 동료배우가 있다는 건 반가운 일 아닌가요?
좋은 일이죠. 처음 호흡을 맞출 때보다 두 번째가 훨씬 좋아요. 그만큼 상대가 편하게 느껴지니까요. <암살>에서 정재 오빠와 제가 나이를 먹은 것처럼 분장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서로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는데 정재 오빠가 저를 보더니 “야, 너랑
나랑 이렇게 분장하고 쳐다 보니까 우리가 참 오래 본 거 같긴 하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기분이 묘하긴 했어요. 그래서 내가 아는 정재
오빠도 잘 살았으면 좋겠지만 배우 이정재로서 끝까지 배우 생활을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대에서
함께 연기해온 배우가 잘 사는 모습을 봐야 제 마음이 편안할 것 같거든요. 그게 어쩌면 제 모습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작품에서 계속 보고 싶어요.
30대가
막연했던 시절도 있었을 거예요.
그럼요. 어릴 땐 ‘30대
되면 죽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니까(웃음).
그렇다면 40대에 대한 기대감은 없을까요?
저는 목표를 세우지 않아요. 그냥 지금에 충실하고자 하죠. 어렸을 땐 되레 앞날에 대한 걱정만 해서 그 좋은 시절을 충분히 만끽하지 못했어요. 그때 할 수 있는 게 정말 많았을 텐데. 지금도 마찬가지겠죠. 앞으로 살아갈 날 중에서 오늘이 제일 젊고, 제일 예쁘고, 좋은 시절일 거예요. 그러니 지금에 충실해야죠. ‘오늘 정말 뭔가 했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기대 정도는
있지 않을까요? 여자로서도, 배우로서도.
예전에도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여배우로서 나이 들어가는 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 받을 수 있는 외모를 유지할 순 없겠죠. 하지만
감정의 폭은 자연스레 깊어질 테니까요. 그러니 나이 들어가고, 얼굴에
주름이 지는 게 두렵진 않아요. 지금처럼 많은 일을 할 순 없겠지만 그때에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르고, 정말 모르는 일이죠.
당장 올 한해 동안 이루고 싶은 건 없을까요?
일단 올해엔 <암살>이
개봉할 테니까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동안 연이어 작품을 해왔으니까 올해엔 좀 쉬어가는 타이밍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어요. 천천히 차기작도 검토해보고.
<순정에 반하다>는
제목 그대로 ‘김순정’에게 반한 두 남자의 특별한 삼각관계
로맨스물이다. 김소연 역시 순정에 반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1년을 기다린 그녀는 카메라 앞에 섰던 여느 때처럼 조심스럽지만 그 여느 때보다도 설레는 눈치다.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 3> 이후로 정체불명의 ‘앓이’를 겪고, <진짜
사나이>로 꾸미지 않은 편안함을 깨닫게 된 김소연은 처음으로 편안함을 깨달았다.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캐릭터의 일상적인 재미를 알게 됐다.
전작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3>(이하: <로필3>)에 이후로 다시 로맨스물이다.
작년에 <로필3>가 끝나고 ‘앓이’를 했다. 마시지 않던 맥주도 많이 마시고 얘기하다가 갑자기 눈물도 나고, 세 달 정도를 그렇게 보냈다. 어떤 작품이든 촬영이 끝나면 쉽게 털어냈는데 여러 모로 이상했다. 게다가 로맨틱 코미디를 끝낸 이후라니 더 이상했고.
특별한 이유라도?
내가 연기한 (신)주연이는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였고, 자기 감정을 잘 몰랐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해피엔딩이었음에도 이 바보 같은 여자를 버리고 혼자 빠져 나왔다는 죄책감이 들더라. 다시 버림 받을 거 같고, 별생각을 다했다. 그 탓인지 작품 선택도 어려웠고, 결국 쉼표 같은 한 해를 보냈다.
<순정에 반하다>에 반한 이유는?
지난 가을에 대본을 봤는데 읽자마자 결정했다. 회사에서 뭘 보고 그러는지 물어볼 정도였다. 그냥 마음이 움직였다. 왠지 좋을 거 같더라.
작품을 끝내봐야 알겠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작품이 끝나면 확실히 편해질 것 같긴 하다. 감독님을 만나서 더욱 확실하게 느꼈다.
김순정의 캐릭터 설명을 보니 ‘외유내강 철의 비서’라더라.
사실 그렇게 센 캐릭터는 아니다. 내가 보는 순정이는 그냥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이다. 평범하다고 해야 할진 몰라도, 사랑스러운 면도, 털털한 면도 있지만 일할 때만큼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거기엔 나의 예민함을 대입해보고 싶다.
그런 평범함에 끌린 건가?
어쩌면 내게도 이런 편안함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10년 동안 해왔던 고민이고, 눈, 코, 입이 이렇게 생긴 이상 앞으로도 이어질 고민이겠지만.
해소되지 않는 고민이 있나 보다.
내가 나를 가두는 것 같았다. 편하게 살아도 되는데 예민해지는 부분이 많아서. 일할 땐 유난히 그렇고. 작년엔 유독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편해졌다. 아마 <진짜 사나이> 덕분인 거 같다.
작품 선택을 못하니 군대라도 가야겠다 싶었을까?
뭔가가 부족하단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항상 고민했는데 친한 매니저들이 적극적으로 <진짜 사나이> 출연을 추천했다.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보자고. 처음엔 장난하나 싶었다. 출연을 결심한 뒤에도 ‘왜 그랬지?’ 싶었다. 욕만 먹지 말자고 생각했다.
어쨌든 만족스럽나 보다.
색다른 경험이었다. 항상 ‘스탠바이 큐’에서 ‘컷’ 사이의 모습만 봤는데 일상적인 내 모습을 보게 됐으니까. 웃기면서도 신기했다.
가장 신기했던 건?
화장을 지우고 방송에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들키면 안 되는 모습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들켜도 별 거 없더라. 숨겨야 될 모습도 아니더라. 20년 동안 뭘 그렇게 감추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별일이 아니었다. 나를 완전히 내려놓은 모습을 호의적으로 봐줘서 용기를 얻었다. <순정에 반하다>를 촬영하면서 종종 카메라 프레임 밖으로 나가버렸는데 그만큼 현장도 편하게 느껴지는 건가 싶더라.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을 알았다는 말은 조금 거창한 거 같고, ‘저래도 별 거 없네?’라는 걸 알았다는 게 수확이랄까(웃음)?
20여 년간 경험한 현장이 왜 그렇게 불편했을까?
배우들이 현장이 놀이터 같았다는 말을 하면 신기했다. 나는 항상 긴장감이 있어서 그럴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감독님도 아는 분이고, 배우들도 유쾌해서인지 몰라도 현장에 가면 유쾌해진다.
자신의 일상성을 처음으로 목격한 셈이다.
<순정을 반하다>에도 그런 일상적인 리얼리티를 적용하고 싶더라. 4부까지 순정이의 가방과 신발이 한번도 안 바뀔 거다. 평범한 여자가 매일 같이 가방을 바꿔 들고 다닌다는 건 좀 이상해 보였다. 코트도 처음부터 끝까지 단 두 벌로만 가자고 했는데 제작사에서 여자주인공이 좀 더 예쁘게 입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절충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순정이에게 호감을 느낀 이유는 그런 평범한 일상성을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아서였다.
두 남자와의 삼각관계 로맨스물인데, 처음 만난 정경호와 윤현민의 첫인상은 어땠나?
처음부터 말 놓고 친해지는 게 늘 어렵다. 그래서 항상 초반에 헤맨다. 그런데 두 사람은 나보다 어린데 내가 도움 받는 입장인 거 같다. 유머감각이 있고 스스럼없이 대해줘서 편하다. 다른 작품에 비해 사전 제작 기간이 충분해서 대본 연습도 많이 해본 덕분에 더 편해진 거 같다.
낯가림이 심한 편인가 보다.
그게 늘 속상했다. 예전보단 나아지고 있지만 낯을 가리는 게 연기에도 지장을 주니까. 드라마 초반엔 내가 봐도 어색한 게 느껴진다. 남은 속일 수 있지만 나는 아는 거다. 그래도 예전엔 작품을 시작할 때 부담백배였던 것과 달리 이젠 설렘도 생기고 기대도 된다.
<순정에 반하다>에 대한 특별한 기대감이라도 있는 걸까?
항상 작품을 시작할 땐 나름의 각오와 목표가 있었다. 그런데 이젠 그런 말이 조금 어색하다. 그냥 자연스러운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평범한 내 모습을 알게 된 이후의 연기이기 때문에 조금 다르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도 있고.
여성을 특정한 폭력적 범죄를 두고 페미니즘 논쟁을 벌인다는 건 예비군 훈련 사격장에서 3사로에 누워 있던 격발자가 4사로 과녁의 한 가운데를 보기 좋게 관통하는 것과 같다. 페미니즘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다. 다만 여성 범죄는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해석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예방을 요구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고 옳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이미 여자는 남자보다 약자다. 그리고 어떤 사회든 당연히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안전망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것이 옳다. 복지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하지만 여성 특정 범죄에 대한 해법에 페미니즘 논쟁으로 접근하면 너무나 당연한 공적 환기가 희한한 방식으로 붕괴된다. 여성과 남성의 대립 구도로서, 개인과 개인의 갈등으로 손쉽게 사유화시킴으로서 제도적 권태에 대한 지적을 자연스럽게 무마시켜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기엔 너무 심각한 일 아닌가. 심지어 세금도 더럽게 많이 내고 있는데.
동성애자에게 딱히 관심은 없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내가 옆집 아줌마의 삶에 관심이 없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내가 동성애자가 아니므로 나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물론 호기심을 느낄 수는 있겠다. 그 역시 내가 옆집 아줌마의 삶에 호기심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란 전제와 유사한 것이다.
어쨌든 예전에도 몇 번 말한 적 있지만 동성애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슈퍼에 가서 장을 보는 것에 대해서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묻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왜 내가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지지하고, 반대하고, 이런 의견을 내야 하느냐는 말이다. 정말 지겨운 일이다. 결국 이런 불필요한 질문이 던져지는 배경엔 그런 타인의 삶을 겁박하고, 제한하는 존재들의 사상이 주류로 자리잡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내가 동성애자들에게 관심이 없음에도 동성애자들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오랫동안 차별의 대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별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 나를 포함한 그 누군가 또한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모든 차별에 반대해야 하는 건 결국 내게 가해질 수 있는 차별에 대항하기 위함이고 그런 의식의 연대를 원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부조리에 관해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관심이다. 당연한 관심이어야 한다.
어제 시청과 그 부근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열렸다는데 정작 그 자리에서 더욱 주목을 받은 것은 퀴어 퍼레이드를 반대하는 종교 단체의 행사였다고 들었다. 퀴어 퍼레이드보다도 이를 반대한다고 시청에 나와서 북도 두들기고, 발레도 하고, 부채춤도 췄다는 이들의 보기 드문 꼴불견을 구경하지 못해서 뒤늦게 아쉽다. 어쨌든 나는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종교명에 대해서 적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그들이 흔히 말하는 이단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몸소 실천하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종교가 설득하고자 하는 사랑과 이타심의 교리를 잘 이행하는 이들에게 줄 불쾌감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그럴 자격도 없다.
어쨌든 수면 아래에 놓여 있던 차별의 증거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는 건 정말 건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행하던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북소리와 발레와 부채춤이 어우러진 꼴불견과도 같은 것이었다는 걸 그들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은 수면 위로 드러나야 그 형체가 보다 명확해지기 마련이다. 혹시라도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거나 그 세계관에 흥미를 느낀다면 모를까, 나는 앞으로도 동성애자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질 생각이 없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차별이 희미해진 세상이 된다면 그렇게 될 것이므로. 어쨌든 변화의 조짐은 보이고, 변할 것이다. 세계는, 우리는.
1. 나의 물리적 고향은 서울이다. 고3 말기에 민증을 받고 알았다. 사실 어린 시절엔 고향이 광주인 줄 알았다. 그냥 광주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 서울로 갔다가 다시 광주로 리턴한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민증이 처음 나왔을 때 친구들과 서로의 민증을 돌려보며 '너 얼굴 왜 이따구냐'란 식으로 낄낄대다가 사과를 맞고 중력을 알았다는 뉴턴식 깨달음을 얻었다. 다들 뒤에 일곱 자리 번호 두 번째 숫자가 5인데 나만 0인 거다. 이래저래 알아보니 그 자리가 출생지역에 대한 고유번호라고 했다. 5는 광주, 0은 서울. 출생의 비밀이 궁금해서 어머니께 여쭤봤더니 서울 출생이 맞다고 하셨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내 고향을 물어볼 때 고향이 서울이지만 광주에서 오래 살았다고 말했다. 한번은 누군가가 광주가 고향이라고 말하는 게 창피하냐고 했다. 병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너는 네가 병신인 줄 아냐'고 되묻는 대신 그 뒤로부터 그냥 고향이 광주라고 했다. 내 유년 시절의 기억도, 그때 만나서 지금까지 좋은 친구들도, 모두 광주의 자장 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광주가 그 어느 도시보다도 뜨거운 자부심을 가질만한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시대가 좆 같아서 그걸 몰라주니 그렇지.
2. 2년 만에 광주에 다녀왔다. 다음 주에 결혼할 친구가 있는데 다음 주엔 마감 때문에 바쁠 터이니 한 주 전에 보기 위해서였다. 마침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은 많이 변해있었다. 결혼한 친구도 많았고, 아이가 있는 친구들도 제법 생겼고, 살도 많이 쪘고. 어쨌든 시시껄렁한 농담도 하지만 서로에 대한 의미 있는 격려와 조언도 오가는 자리였다. 오랜만에 반갑게 회포를 풀면서도 어제 만난 듯이 편한 친구가 있다는 건 언제나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깨닫게 만든다. 항상 광주에 내려가면 친구들이 차를 몰고 와서 에스코트해주는 덕분에 정말 편하고 즐겁게 여행하게 된다. 이번에도 그랬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3. 어린 시절의 광주는 내게 좁고, 빤한 곳이었는데 지금의 광주는 내려갈 때마다 새롭다. 익숙한 곳들은 대부분 변한 곳이 됐고, 변한 곳들은 대부분 익숙한 곳에 있다. 그 와중에 변하지 않고 제 자리에 있는 것들을 보고 감회가 새로워질 때마다 내 삶의 물살을 느낀다. 어느덧 많이 밀려왔구나. 그렇다. 그래도 여전히 그 광주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부반장이었다는 이유로 아직도 나를 '우리반 부반장'이라 불러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나마 잘 살았다는 위안을 준다. 덕분에 나의 고향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그립다는 감정을 깨닫게 만든다. 그 감정을 안고 잘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다시 되새기게 만든다.
4. 나이가 들어서 광주에 내려가면 새삼스럽게 이 도시가 얼마나 좋은 도시였는지 깨닫게 된다. 번잡하고 변화가 빠른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리고 단순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아름답고 정겨운 구석이 많은 도시라는 걸 느끼고 돌아온다. 다행이다. 나의 고향이 아름답다는 것은,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친구들의 터전이 그렇다는 것은. 다행이다. 다시 내려가고 싶은 고향이 있다는 건. 그러니 잘 살 것이다. 나는 광주가 보다 좋아졌다.
잔혹동시의 문제는 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읽을 대상의 미성숙함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게재됐다는 것이 문제의 본체다. 성인이 읽었을 땐 괜찮다. 성인에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그건 폭력이다. 그것을 '아이가 쓴' 동시라고 이해할 순 있으나 '아이가 읽을' 동시라고 인정하는 건 곤란하다. 그렇다면 '19금'이란 기준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만인을 위해 공중파에서 포르노를 틀어도 되겠지. 어른이라면 아이가 어떠한 것도 감당해낼 수 있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나이가 되기까지 눈높이를 맞춰서 지혜를 전하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줘야 한다. 문제가 된 잔혹동시란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대로에서 벌거벗은 채 앞에 선 바바리맨을 만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글을 쓴 아이가 아니라 읽을 대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출판사의 태도를 지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동시를 쓴 아이를 손가락질하는 어른들이 있다면 스스로의 글러먹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이가 쓴' 동시엔 죄가 없다. 그 동시는 바로 그런 어른들의,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얕은 분노 같은 것으로부터 잉태된 것일 수 있으므로, 그 시의 모티프가 된 아이의 분노에 자궁 역할을 한 어른들의 반성이 절실하다. 그리고 '아이가 읽으라고' 그런 시를 출판한 출판사는 진짜 좆 잡고 반성할 필요가 있겠다. 정말 뭔 생각이었던 거냐.
코에 점이 있어서 점순이라 불렀던 어미랑 닮은 무늬를 지니고 있던 주먹만한 아이는 점점 어미에 가깝게 자랐다. 하지만 어미와 달리 언덕에서 올려다 보이는 좁은 난간으로 뛰어 오르지 못해 항상 난간 아래 조그마한 돌바닥에서 위를 올려다 보며 울곤 했다. 난간으로 올라와 밥을 먹지 못하는 새끼를 위해 생각해낸 것은 캔을 까서 포크로 잘라 투척하는 일이었다. 가끔씩 조준을 잘못해서 머리에 맞기도 하고 떼굴떼굴 굴러 떨어져서 새끼가 언덕 아래로 쫓아 내려갈 때마다 '아이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캔만 먹을 수 있는 이 아이를 보고 깐돌이라 불렀다.
깐돌이가 보이지 않은 건 이제 그 흔적이 겨우내 밀려간 지난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깐돌이에게 주기 위해 사놓은 캔이 겨울 내내 그 자리에 고스란히 쌓여 있는 것을 보며 종종 근심했다. 괜찮을까. 끊임 없이 찾아오는 깐돌이의 어미인 점순이를 보며 가끔 물었다. 네 아이 어디있니. 그 겨울이 지나는 동안 서서히 걱정도 묻혀 갔다. 가끔씩 더해가는 일상의 지층 어느 단면쯤에 있는 그 걱정을 더듬어 보기도 했지만 대부분 망각했고 떠올리지 않았지만 고양이밥을 줄 때마다 나는 아주 희미하게나마 그 아이를 생각했다. 잘 있으려나.
난간으로 뛰어올라온 아이를 보며 나는 별스럽지 않게 창가로 다가가 밥이 있나 확인했고 창을 열었다. 봄이네. 봄이 왔다. 그리고 점순이라 생각했던 그 아이를 빤히 보았다. 점순이가 아니었다. 미묘하게 다른 얼굴을 한참 보며 기억 아래 가라앉아 있던 이름 하나를 건져 올렸다. 너 깐돌이니? 나름 2년 정도 밥을 챙겨주다 보니 눈썰미가 생겼다. 그래도 실험을 하기로 했다. 점순이는 캔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캔을 까주기로 했다. 녀석은 주저하지 않고 캔을 먹었다. 창문 안으로 들어와 기웃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내가 어느 정도 안전한 거리를 보존해주는 한에서. 어쨌든 맞았다. 깐돌이였다.
녀석이 허겁지겁 밥을 먹는 사이 팔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쯤에 쪼그리고 앉아 이것저것을 물었다. 뭐했어? 더 줄까? 밥도 줄까? 그렇게 신이 났다가 난데 없이 눈물이 나서 흐느꼈다. 나는 어쩌다 보니 광장에 서있었다. 그 광장에서 자식을 잃은 채 돌아올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절규하는 어떤 어미 아비들을 떠올렸다. 눈물이 그치니 밑바닥에 쌓여 있던 화가 조금이나마 씻긴 기분이었다. 마치 나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아이였던 것마냥 고마웠다. 돌아와 줘서. 제법 잘 자라줘서.
깐돌이는 까준 캔을 잘 먹고 난간을 서성이다 창문 안을 잠시 기웃거린 뒤 사라졌다. 가끔은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위로를 자연으로부터 얻는다. 위로가 됐다. 4월의 봄은 다시 찾아왔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다시 하게 됐다. 살아갈 것이다. 고양이캔도 주문할 것이다.
1. 마감이 끝났다. 홀가분하다. 하지만 대단히 좋아서 죽을 거 같다거나, 그렇진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한 가지는 지금이 4월 17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해 이 맘 때엔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뒤집어졌고, 오늘 같은 날엔 광화문 광장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화가 나는 건 같은데 조금 다른 건 울적하다는 느낌 같다. 흐느낌 같은 것이 하루 종일 내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기분. 생각해 보니 어제, 비도 왔다. 눈물 같은 하루였다.
2. 집으로 오는 길에 필연적으로 광화문을 지난다. 광화문에서 경복궁 방면으로 들어가는 길이 경찰 차벽으로 인해 완벽하게 봉쇄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새벽 4시가 넘어서인지 통행이 가능했다. 하지만 여전히 세월호 유가족이 농성 중이라는 광화문 앞과 헌화를 위해 사람들이 모인 광화문 광장 주변엔 경찰차들이 촘촘하게 서있었다. 택시가 마치 섬 사이를 지나가는 배와 같았다. 저 너머에 사람이 있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오늘을 기다리며 철저하게 대비했음을 보여주듯 놀랍도록 철저하게 봉쇄된 광장 주변의 풍경이 암담했다. 그러니까 1년 동안 구상한 게 저것이란 말인가.
3. 광화문 인근에 사는 탓에 세월호 유가족이 머무르는 텐트를 필연적으로 자주 봤다. 봄이 끝나갈 무렵에 세워진 텐트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을 지나, 다시 봄까지 왔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동안 텐트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텐트도 정확히 지구와 함께 태양을 한 바퀴 돌았을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먼 거리를 움직일 수 있는데 몇 걸음 걸으면 다다를 수 있는 청와대 앞으로 유가족은 갈 수 없었다.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세월호 유가족이, 대통령을 만난다는 건. 내년에도 태양을 한 바퀴 돈 세월호 유가족의 텐트를 보게 될까. 어쩌면. 아니, 혹시라도. 혹은 제발.
4. 지난 1년 동안 세월호는 끊임 없이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도 끝끝내 떠오르는 단어였다. 서울에 있다가도, 부산에 있다가도 진도 앞바다를 생각했다. 나는 잊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내가 잊지 않아도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서 잊을 수 없었다. 그 두려움을 통해 그 날을 끊임 없이 떠올려야 할 것 같았다. 추모의 의미로 달았던 노란 리본은 강력한 상징이 돼서 떼낼 수 없는 것이 됐다. 평생을 바쳐 추모해야 하는 무언가가 됐다. 내가 어른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점점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게 죄를 짓는 것만 같다. 물려줄 죄만 늘어가는 세상이다. 우울하다.
5. 세월호 유가족이 한 말이 각인된다. “박근혜는 죽으면 자식이 없겠지만 나라에서 장례를 치러주겠지. 하지만 나나 부인은 거둬줄 사람이 없다. 내가 박근혜보다 나이가 적다. 죽을 때까지 두고 볼 것이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그러니 최선을 다할 것이다. 광장에 서서, 광장이 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