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더 비기닝>은 버디무비로서의 장점이 강한 작품이다. 권상우와 성동일의 케미가 나쁘지 않다. 덕분에 웃음을 유발할만한 코미디로서의 장점이 발휘된다. 능력 없는 민폐 남편이자 구박덩어리로 전락한 권상우의 찌질한 연기를 보는 재미도 있다. 성동일 역시 사회와 가정에서의 이중적인 위세를 지닌 인물이란 점에서 코믹한 극적 장치가 된다. 물론 이게 남성편향적으로 설계된 코미디란 점은 좀 지적하고 싶어지지만.

문제는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추리물이란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탐정>이라는 제목을 지우고 싶을 정도로 형편 없는 만듦새를 전시한다. 전설적인 강력계 베테랑 형사와 아마추어 추리광이 함께 사건을 풀어나간다는 골자는 흥미롭지만 베테랑 형사는 그 경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능하고, 아마추어는 그야말로 민폐 덩어리다. 추리를 한다기 보단 완성된 시나리오를 토대로 추리를 끼워맞춘다는 인상이랄까. 추리물이란 장르 안에서 도무지 신뢰가 안 간다. 기이할 정도의 자신감이 묘할 정도.

의외로 이 영화에서 재미있게 여겨지는 건 사건현장이 아니라 각자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부부끼리의 사연이다. 밥벌이에 무능하든, 유능하든 아내보다 약한 남편들의 고충을 나누는 광경이나 밥벌이 제쳐두고 탐정질에 환장한 남편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아내 연기를 하는 서영희의 연기는 <탐정>에서 쓸만한 서브 플롯 노릇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최소한 납득이 가는 추리물로서의 구색을 맞췄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관람을 권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어설픈 슬랩스틱 따위로 범벅된 쌍팔년도 명절 코미디가 아니라 캐릭터의 특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코미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은 평가해주고 싶다. 그런 면에선 팝콘무비로서 가볍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관객들에겐 미덕이 없는 영화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개인적으로 추천하지 못하겠단 거지.

영화가 흥행한다면 누가 봐도 속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결말이다. 이미 제목부터 '더 비기닝'이란 부제를 품고 있으니 당연히 결말에 대한 야심이 팽배한 것 같은데, 과연 어떨지. 전통적인 관점에서 추석에 먹힐 영화처럼 보이긴 한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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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를 보내며

도화지 2015. 9. 9. 00:34

하늘이를 보내주기 위해 김포로 가야 했다. 화장을 하기로 했다. 토요일에 떠난 하늘이를 보내주기 위한 일요일이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지막을 지켜줄 수 있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데 하늘이 너무 맑고 예뻤다. 하늘이 너무 맑고 예뻐서 마음이 미어졌다.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눈가를 불로 지져서 눈물샘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하늘이가 담긴 상자를 안고 탄 택시 앞좌석에서 바라보이는 하늘은 너무 맑고 예뻤다. 뒷좌석에 앉은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나는 어머니가 들을까 겁이나 소리를 죽이고 마음 속으로 흐느꼈다. 눈물을 닦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하늘은 계속 맑고 예뻤다.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하얀 털 같아서 하늘이 생각이 많이 났다. 그래서 조금 울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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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인터뷰

interview 2015. 7. 21. 01:04

There she was. There she will be.

세상은 손쉽게 뜨겁고, 차갑다. 그토록 뜨겁고 차가운 세상에서 누군가는 쉽게 떠오르고 진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제 자리를 지켜낸다. 전지현은 17년 동안 배우였다. 벗어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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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인터뷰

interview 2015. 7. 21. 00:39

<순정에 반하다>는 제목 그대로 김순정에게 반한 두 남자의 특별한 삼각관계 로맨스물이다. 김소연 역시 순정에 반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1년을 기다린 그녀는 카메라 앞에 섰던 여느 때처럼 조심스럽지만 그 여느 때보다도 설레는 눈치다.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 3> 이후로 정체불명의 앓이를 겪고, <진짜 사나이>로 꾸미지 않은 편안함을 깨닫게 된 김소연은 처음으로 편안함을 깨달았다.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캐릭터의 일상적인 재미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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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특정한 폭력적 범죄를 두고 페미니즘 논쟁을 벌인다는 건 예비군 훈련 사격장에서 3사로에 누워 있던 격발자가 4사로 과녁의 한 가운데를 보기 좋게 관통하는 것과 같다. 페미니즘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다. 다만 여성 범죄는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해석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제도적 예방을 요구하는 것이 보다 현명하고 옳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이미 여자는 남자보다 약자다. 그리고 어떤 사회든 당연히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적 안전망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것이 옳다. 복지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하지만 여성 특정 범죄에 대한 해법에 페미니즘 논쟁으로 접근하면 너무나 당연한 공적 환기가 희한한 방식으로 붕괴된다. 여성과 남성의 대립 구도로서, 개인과 개인의 갈등으로 손쉽게 사유화시킴으로서 제도적 권태에 대한 지적을 자연스럽게 무마시켜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기엔 너무 심각한 일 아닌가. 심지어 세금도 더럽게 많이 내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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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에게 딱히 관심은 없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내가 옆집 아줌마의 삶에 관심이 없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내가 동성애자가 아니므로 나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물론 호기심을 느낄 수는 있겠다. 그 역시 내가 옆집 아줌마의 삶에 호기심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란 전제와 유사한 것이다.

어쨌든 예전에도 몇 번 말한 적 있지만 동성애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슈퍼에 가서 장을 보는 것에 대해서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묻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왜 내가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지지하고, 반대하고, 이런 의견을 내야 하느냐는 말이다. 정말 지겨운 일이다. 결국 이런 불필요한 질문이 던져지는 배경엔 그런 타인의 삶을 겁박하고, 제한하는 존재들의 사상이 주류로 자리잡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내가 동성애자들에게 관심이 없음에도 동성애자들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오랫동안 차별의 대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별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 나를 포함한 그 누군가 또한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모든 차별에 반대해야 하는 건 결국 내게 가해질 수 있는 차별에 대항하기 위함이고 그런 의식의 연대를 원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부조리에 관해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관심이다. 당연한 관심이어야 한다.

어제 시청과 그 부근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열렸다는데 정작 그 자리에서 더욱 주목을 받은 것은 퀴어 퍼레이드를 반대하는 종교 단체의 행사였다고 들었다. 퀴어 퍼레이드보다도 이를 반대한다고 시청에 나와서 북도 두들기고, 발레도 하고, 부채춤도 췄다는 이들의 보기 드문 꼴불견을 구경하지 못해서 뒤늦게 아쉽다. 어쨌든 나는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종교명에 대해서 적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그들이 흔히 말하는 이단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몸소 실천하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종교가 설득하고자 하는 사랑과 이타심의 교리를 잘 이행하는 이들에게 줄 불쾌감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그럴 자격도 없다.

어쨌든 수면 아래에 놓여 있던 차별의 증거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는 건 정말 건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행하던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북소리와 발레와 부채춤이 어우러진 꼴불견과도 같은 것이었다는 걸 그들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은 수면 위로 드러나야 그 형체가 보다 명확해지기 마련이다. 혹시라도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거나 그 세계관에 흥미를 느낀다면 모를까, 나는 앞으로도 동성애자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질 생각이 없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차별이 희미해진 세상이 된다면 그렇게 될 것이므로. 어쨌든 변화의 조짐은 보이고, 변할 것이다. 세계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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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다녀왔다

time loop 2015. 5. 8. 13:09

1. 나의 물리적 고향은 서울이다. 고3 말기에 민증을 받고 알았다. 사실 어린 시절엔 고향이 광주인 줄 알았다. 그냥 광주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 서울로 갔다가 다시 광주로 리턴한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민증이 처음 나왔을 때 친구들과 서로의 민증을 돌려보며 '너 얼굴 왜 이따구냐'란 식으로 낄낄대다가 사과를 맞고 중력을 알았다는 뉴턴식 깨달음을 얻었다. 다들 뒤에 일곱 자리 번호 두 번째 숫자가 5인데 나만 0인 거다. 이래저래 알아보니 그 자리가 출생지역에 대한 고유번호라고 했다. 5는 광주, 0은 서울. 출생의 비밀이 궁금해서 어머니께 여쭤봤더니 서울 출생이 맞다고 하셨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내 고향을 물어볼 때 고향이 서울이지만 광주에서 오래 살았다고 말했다. 한번은 누군가가 광주가 고향이라고 말하는 게 창피하냐고 했다. 병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너는 네가 병신인 줄 아냐'고 되묻는 대신 그 뒤로부터 그냥 고향이 광주라고 했다. 내 유년 시절의 기억도, 그때 만나서 지금까지 좋은 친구들도, 모두 광주의 자장 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광주가 그 어느 도시보다도 뜨거운 자부심을 가질만한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시대가 좆 같아서 그걸 몰라주니 그렇지.


2. 2년 만에 광주에 다녀왔다. 다음 주에 결혼할 친구가 있는데 다음 주엔 마감 때문에 바쁠 터이니 한 주 전에 보기 위해서였다. 마침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은 많이 변해있었다. 결혼한 친구도 많았고, 아이가 있는 친구들도 제법 생겼고, 살도 많이 쪘고. 어쨌든 시시껄렁한 농담도 하지만 서로에 대한 의미 있는 격려와 조언도 오가는 자리였다. 오랜만에 반갑게 회포를 풀면서도 어제 만난 듯이 편한 친구가 있다는 건 언제나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깨닫게 만든다. 항상 광주에 내려가면 친구들이 차를 몰고 와서 에스코트해주는 덕분에 정말 편하고 즐겁게 여행하게 된다. 이번에도 그랬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3. 어린 시절의 광주는 내게 좁고, 빤한 곳이었는데 지금의 광주는 내려갈 때마다 새롭다. 익숙한 곳들은 대부분 변한 곳이 됐고, 변한 곳들은 대부분 익숙한 곳에 있다. 그 와중에 변하지 않고 제 자리에 있는 것들을 보고 감회가 새로워질 때마다 내 삶의 물살을 느낀다. 어느덧 많이 밀려왔구나. 그렇다. 그래도 여전히 그 광주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부반장이었다는 이유로 아직도 나를 '우리반 부반장'이라 불러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나마 잘 살았다는 위안을 준다. 덕분에 나의 고향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그립다는 감정을 깨닫게 만든다. 그 감정을 안고 잘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다시 되새기게 만든다.


4. 나이가 들어서 광주에 내려가면 새삼스럽게 이 도시가 얼마나 좋은 도시였는지 깨닫게 된다. 번잡하고 변화가 빠른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리고 단순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아름답고 정겨운 구석이 많은 도시라는 걸 느끼고 돌아온다. 다행이다. 나의 고향이 아름답다는 것은,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친구들의 터전이 그렇다는 것은. 다행이다. 다시 내려가고 싶은 고향이 있다는 건. 그러니 잘 살 것이다. 나는 광주가 보다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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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동시의 문제

도화지 2015. 5. 8. 13:07

잔혹동시의 문제는 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읽을 대상의 미성숙함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게재됐다는 것이 문제의 본체다. 성인이 읽었을 땐 괜찮다. 성인에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그건 폭력이다. 그것을 '아이가 쓴' 동시라고 이해할 순 있으나 '아이가 읽을' 동시라고 인정하는 건 곤란하다. 그렇다면 '19금'이란 기준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만인을 위해 공중파에서 포르노를 틀어도 되겠지. 어른이라면 아이가 어떠한 것도 감당해낼 수 있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나이가 되기까지 눈높이를 맞춰서 지혜를 전하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줘야 한다. 문제가 된 잔혹동시란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대로에서 벌거벗은 채 앞에 선 바바리맨을 만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글을 쓴 아이가 아니라 읽을 대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출판사의 태도를 지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동시를 쓴 아이를 손가락질하는 어른들이 있다면 스스로의 글러먹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이가 쓴' 동시엔 죄가 없다. 그 동시는 바로 그런 어른들의,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얕은 분노 같은 것으로부터 잉태된 것일 수 있으므로, 그 시의 모티프가 된 아이의 분노에 자궁 역할을 한 어른들의 반성이 절실하다. 그리고 '아이가 읽으라고' 그런 시를 출판한 출판사는 진짜 좆 잡고 반성할 필요가 있겠다. 정말 뭔 생각이었던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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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가 돌아왔다

도화지 2015. 4. 19. 23:37

새끼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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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감이 끝났다. 홀가분하다. 하지만 대단히 좋아서 죽을 거 같다거나, 그렇진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한 가지는 지금이 4월 17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해 이 맘 때엔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뒤집어졌고, 오늘 같은 날엔 광화문 광장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화가 나는 건 같은데 조금 다른 건 울적하다는 느낌 같다. 흐느낌 같은 것이 하루 종일 내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기분. 생각해 보니 어제, 비도 왔다. 눈물 같은 하루였다.

2. 집으로 오는 길에 필연적으로 광화문을 지난다. 광화문에서 경복궁 방면으로 들어가는 길이 경찰 차벽으로 인해 완벽하게 봉쇄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새벽 4시가 넘어서인지 통행이 가능했다. 하지만 여전히 세월호 유가족이 농성 중이라는 광화문 앞과 헌화를 위해 사람들이 모인 광화문 광장 주변엔 경찰차들이 촘촘하게 서있었다. 택시가 마치 섬 사이를 지나가는 배와 같았다. 저 너머에 사람이 있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오늘을 기다리며 철저하게 대비했음을 보여주듯 놀랍도록 철저하게 봉쇄된 광장 주변의 풍경이 암담했다. 그러니까 1년 동안 구상한 게 저것이란 말인가.

3. 광화문 인근에 사는 탓에 세월호 유가족이 머무르는 텐트를 필연적으로 자주 봤다. 봄이 끝나갈 무렵에 세워진 텐트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을 지나, 다시 봄까지 왔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동안 텐트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텐트도 정확히 지구와 함께 태양을 한 바퀴 돌았을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먼 거리를 움직일 수 있는데 몇 걸음 걸으면 다다를 수 있는 청와대 앞으로 유가족은 갈 수 없었다.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세월호 유가족이, 대통령을 만난다는 건. 내년에도 태양을 한 바퀴 돈 세월호 유가족의 텐트를 보게 될까. 어쩌면. 아니, 혹시라도. 혹은 제발.

4. 지난 1년 동안 세월호는 끊임 없이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도 끝끝내 떠오르는 단어였다. 서울에 있다가도, 부산에 있다가도 진도 앞바다를 생각했다. 나는 잊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내가 잊지 않아도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서 잊을 수 없었다. 그 두려움을 통해 그 날을 끊임 없이 떠올려야 할 것 같았다. 추모의 의미로 달았던 노란 리본은 강력한 상징이 돼서 떼낼 수 없는 것이 됐다. 평생을 바쳐 추모해야 하는 무언가가 됐다. 내가 어른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점점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게 죄를 짓는 것만 같다. 물려줄 죄만 늘어가는 세상이다. 우울하다.

5. 세월호 유가족이 한 말이 각인된다. “박근혜는 죽으면 자식이 없겠지만 나라에서 장례를 치러주겠지. 하지만 나나 부인은 거둬줄 사람이 없다. 내가 박근혜보다 나이가 적다. 죽을 때까지 두고 볼 것이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그러니 최선을 다할 것이다. 광장에 서서, 광장이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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