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에게 딱히 관심은 없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내가 옆집 아줌마의 삶에 관심이 없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내가 동성애자가 아니므로 나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물론 호기심을 느낄 수는 있겠다. 그 역시 내가 옆집 아줌마의 삶에 호기심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란 전제와 유사한 것이다.

어쨌든 예전에도 몇 번 말한 적 있지만 동성애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슈퍼에 가서 장을 보는 것에 대해서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묻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왜 내가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지지하고, 반대하고, 이런 의견을 내야 하느냐는 말이다. 정말 지겨운 일이다. 결국 이런 불필요한 질문이 던져지는 배경엔 그런 타인의 삶을 겁박하고, 제한하는 존재들의 사상이 주류로 자리잡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내가 동성애자들에게 관심이 없음에도 동성애자들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오랫동안 차별의 대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별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통해 나를 포함한 그 누군가 또한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모든 차별에 반대해야 하는 건 결국 내게 가해질 수 있는 차별에 대항하기 위함이고 그런 의식의 연대를 원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부조리에 관해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관심이다. 당연한 관심이어야 한다.

어제 시청과 그 부근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열렸다는데 정작 그 자리에서 더욱 주목을 받은 것은 퀴어 퍼레이드를 반대하는 종교 단체의 행사였다고 들었다. 퀴어 퍼레이드보다도 이를 반대한다고 시청에 나와서 북도 두들기고, 발레도 하고, 부채춤도 췄다는 이들의 보기 드문 꼴불견을 구경하지 못해서 뒤늦게 아쉽다. 어쨌든 나는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종교명에 대해서 적고 싶지 않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그들이 흔히 말하는 이단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몸소 실천하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종교가 설득하고자 하는 사랑과 이타심의 교리를 잘 이행하는 이들에게 줄 불쾌감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그럴 자격도 없다.

어쨌든 수면 아래에 놓여 있던 차별의 증거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는 건 정말 건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행하던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북소리와 발레와 부채춤이 어우러진 꼴불견과도 같은 것이었다는 걸 그들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은 수면 위로 드러나야 그 형체가 보다 명확해지기 마련이다. 혹시라도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거나 그 세계관에 흥미를 느낀다면 모를까, 나는 앞으로도 동성애자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질 생각이 없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차별이 희미해진 세상이 된다면 그렇게 될 것이므로. 어쨌든 변화의 조짐은 보이고, 변할 것이다. 세계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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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동시의 문제

도화지 2015. 5. 8. 13:07

잔혹동시의 문제는 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읽을 대상의 미성숙함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게재됐다는 것이 문제의 본체다. 성인이 읽었을 땐 괜찮다. 성인에겐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그건 폭력이다. 그것을 '아이가 쓴' 동시라고 이해할 순 있으나 '아이가 읽을' 동시라고 인정하는 건 곤란하다. 그렇다면 '19금'이란 기준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홍익인간의 정신으로 만인을 위해 공중파에서 포르노를 틀어도 되겠지. 어른이라면 아이가 어떠한 것도 감당해낼 수 있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나이가 되기까지 눈높이를 맞춰서 지혜를 전하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줘야 한다. 문제가 된 잔혹동시란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대로에서 벌거벗은 채 앞에 선 바바리맨을 만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글을 쓴 아이가 아니라 읽을 대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출판사의 태도를 지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동시를 쓴 아이를 손가락질하는 어른들이 있다면 스스로의 글러먹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이가 쓴' 동시엔 죄가 없다. 그 동시는 바로 그런 어른들의,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얕은 분노 같은 것으로부터 잉태된 것일 수 있으므로, 그 시의 모티프가 된 아이의 분노에 자궁 역할을 한 어른들의 반성이 절실하다. 그리고 '아이가 읽으라고' 그런 시를 출판한 출판사는 진짜 좆 잡고 반성할 필요가 있겠다. 정말 뭔 생각이었던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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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가 돌아왔다

도화지 2015. 4. 19. 23:37

새끼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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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언론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을 때 이를 둘러싼 총체적인 매커니즘에 관해 취재해서 긴 기사를 썼던 적이 있다. 그때 당시 뒤늦게 마지막으로 강호순의 얼굴 공개에 탑승한 MBC 보도국 관계자로부터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언론 입장에서는 위법성보다도 기사로서의 의미가 관건이 될 수 있다. 불법적인 보도가 면책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법률적 판단과 무관하게 언론 입장에서 기사적 가치를 판단하고 보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JTBC <뉴스룸>이 성완종 회장의 발언이 담긴 녹음 파일을 공개한 것도 이런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결국 방송의 보도윤리란 일반적인 사회적 윤리와 완벽하게 동일한 궤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정보원의 엠바고를 무시할 수 있는 완벽한 논리일 순 없겠지만 알 권리를 바탕에 둔 보도윤리를 중점에 두고 보도방침을 해석하고, 결정하는 뉴스 관계자의 기류를 판단할 때 참고할만한 사항은 되겠다.


이번 사안이 향후 <뉴스룸>의 행보에 어떤 타격을 입힐지는 모르겠으나 <뉴스룸>이, 본질적으로 손석희가 십자가를 짊어질 수밖에 없는 국면이 된 건 확실해 보인다. 아마도 이런 판단을 내린 손석희도 잘 알고 결정한 사항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정말 멍청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렇다. 그럴 리는 없지 않은가. 그만큼 손석희는 녹음 파일 공개가 언론으로서의 직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건 손석희의 직업정신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향하는 활시위가 될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건 <뉴스룸> 보도국이, 손석희가, 사회적 윤리를 배반했다고 논할 이들을 정서적으로 얼마나 설득시킬 수 있느냐의 싸움이 될 것인데 그 국면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없겠다. 그리고 그만큼 막중한 사안이라 판단했을 손석희의 믿음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는 결국 아무도 모를 것이다. 손석희의 판단에 온전히 동의할 순 없지만 나는 언론인으로서 그가 내린 판단은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선으로 그의 자리를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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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훈 다운로드 사태를 보면서 생각한 건 사실 그런 잘못을 하는 사람이 지천에 널렀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손쉽게 자신이 다운로드 받아서 본 영화가 어쩌고 저쩌고 쉽게 얘기한다. 불법 다운로드를 받은 주제에 정말 아무런 죄의식 없이 말하고, 언급한다. 불법으로 받은 게 아니라는 위장조차 하지 않는다.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응당 그래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일 게다. 사실 살다 보면 불법 다운로드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된다는 게 아니다. 다들 매사 일거수 일투족을 칼 같이 공정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지 않고서야 타인의 잘못된 선택을  일분일초 단위로 가르치고 훈계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정도는 깨닫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잘못한 게 자랑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지 잘 알지도 못한 다고 자랑해선 안된단 말이다. 김장훈 다운로드 사태에서 배울 건 바로 그 점이다.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잘못된 행위를 저지르지 않고 사는 건 아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잘못해도 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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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작가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를 안다. 나는 그를 격하게 아낀다. 그의 작품을 아낀다. 그가 이 세상에 빛과 소금 같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만들어낼 사람이라고 장담하고 확신한다. 그가 트위터에서 올린 글은 실망스러웠다. 본질적으로 그가 구사한 언어가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언어에는 정확히 구사돼야 할 자리가 있고, 상황이 있다. 그게 아니었다. 실수였다. 하지만 나는 실수라는 말로 그런 상황을 온전히 덮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실수는 최규석 작가가 앞으로도 쭉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일 수밖에 없다. 사과를 했건, 그 사과가 명문이건 간에 그렇다.

최규석 작가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냐, 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 왜냐면 나는 그 사과를 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규석 작가가 왜 나한테 사과를 하냐. 그는 내게 잘못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너는 왜 화를 내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내가 그를 아꼈기 때문이다. 누가 너더러 그를 아끼라고 하였더냐, 라고 묻는다면 그의 작품이 나로 하여금 그를 아끼게 만들었다고 답하련다. 그렇다. 나는 그의 작품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수도 있는 실수를 그가 스스로 저질렀다는 게 화가 났다. 그의 실수 혹은 오류를 빌미로 그를 땅에 묻고 이 세상으로부터 꺼지게끔 하려는 게 아니다. 그의 사과는 적절했고, 인정할만하다. 하지만 나에겐 그를 용서할 자격이 없다. 그가 구사한 언어의 피해자는 K 대학교에 다닌다는 32마리의 싸가지 없는 어린 수컷놈들이 싸질러 놓은 거지 발싸개 같은 음담패셜의 대상인 여자들일 것이다. 직접적인 대상이 누구였건 간에 그런 패악질을 잔뜩 퍼질러놓은 단톡방을 두고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을 내포한 두둔을 한 건 정말 어리석은 패착이었다. 그건 오만이었다. 내가 뱉은 말은 공정하고 확고하다는 자아의 믿음에서 비롯된 오만한 발언이었다. 폭투에 가까운 실언이었다. 다행인 건 스스로가 그걸 빨리 깨달았고, 빨리 사과했으며 빨리 반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사과를 높이 산다. 그러니 나는 당분간 그의 사과 이후의 태도를 지켜볼 것이다. 물론 내가 아는 최규석의 작품들은 그가 결코 어리석고 패악적인 인물이 아닐 것임을 여전히 믿게 만든다. 최소한 나에겐 그 정도 믿음이 있고, 여전히 그의 작품을 지지하며 앞으로도 그의 작품이 계속되길 염원할 것이다. 고로 그의 사과에 열광하는 무리들의 멱살을 잡고 밀어내고 싶다. 지금은 최규석작가의 사과에 열광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그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나가는 것을 뒤따라가주는 것이 예의다. 그럼으로써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버리려는 무리들로부터 그를 지키고, 그가 스스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끝까지 걸어나갈 수 있도록 지켜줘야 한다. 부디 이번 일이 최규석 작가의 경력을 보다 단단하게 매만질 수 있는 경험이 되길 기원한다. 나는 그의 잘못을 잊지 않고 그의 작품을 계속 지켜볼 것이다. 그것이 진짜 그를 지지하는 독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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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형이 조심스럽게 카톡을 보냈다. ‘페북으로 쌍용차 후원 릴레이를 하는데 다음 타자로 널 지목해서 태그해도 되겠니?’ 그러라고 했다. 1만원을 쌍용차 후원 계좌에 입금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남긴 후 관심 있는 지인 두 사람 이상을 추천하면 된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대략 한 달 가까이 시간이 지나서야 기억이 났다. 기억난 김에 입금하고자 했다.

하지만 1만원이 아니라 10만원을 입금하고, 다음 타자는 지목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내가 10명의 후원을 대신했다고 생각하련다. 괜히 누군가를 추천해서 부담을 안겨줄 수도 있고, 이미 다른 방식으로 후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만약 당신이 쌍용차 해고자들에 대한 후원에 관심이 있다면 동참해줬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추천하지 않았지만 이 글이 누군가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계기의 창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 분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내가 혹은 나와 가까운 누군가의 처지가 될 수 있음을 공감하고 기꺼이 저 투쟁을 응원해줬으면 좋겠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농협 3510598588683 김정우] 계좌에 1만원을 후원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남겨주면 된다. 응원의 메시지가 주는 힘도 대단할 것이다. 

우리에겐 지금 거대한 정치적 패악을 뒤바꿀 동력도 필요하겠지만 당장 벼랑으로 내몰린 일상을 구제할 수 있는 온기 또한 절실하다. 그러니 그 온기를 전하고 누군가에게 폼 나게 자랑하시라. 이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전파하고 그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간지 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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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만족하지 못할수록 과거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했다. 21세기의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보단 과거에 대한 낭만을 논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그만큼 현실이 팍팍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90년대엔 새로운 시대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미래의 청사진에 대해서 그리곤 했다. 그만큼 풍요로운 꿈을 꾸던 시대였던 것이다. 1997년 IMF사태 발발 이후로도 그나마 뉴 밀레니엄이라는 허수 같은 단어에 열광했다. 하지만 2000년대를 넘어오며 점차 미래에 대한 꿈은 저물기 시작했고 팍팍해지는 현실이 가속화되면서 이젠 그나마 90년대에 경험했던 풍요로운 시대에 대한 낭만을 향해 틈나는 대로 응답하라 외친다. 팍팍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과거의 유산을 마약처럼 삼킨다. 9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마냥 즐길 수 없는 건 그래서다. 곰팡이 핀 낭만에 열광한 뒤에 씹히는 현실이란 여전히 퍼석퍼석하다. 나아갈 길이 없다. 갈 길은 먼데 갈 곳이 어딘지 모르겠으니, 그저 그리움만 쌓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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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정의롭다는 말은 언제나 부도수표 같고, 보수가 정의롭지 않다는 말은 그저 편안한 도피일 뿐이다. 어느 쪽인가는 늘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맞는 얘기를 하느냐가 관건이지. 나는 진보이기 때문에, 나는 보수이기 때문에라는 행동강령 따위는 개똥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그건 그저 정치가들이 자기 편을 손쉽게 끌어모으기 위해 동원하는 말장난일 뿐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일상에서 진보라고 말하면서도 보수적으로 군다.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자신만 모를 뿐이다. 그저 '진보' 혹은 '보수'라는 신앙을 통해서 그 자리에 안주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러니 언제라도 그 프레임을 벗어던지고 최선을 다해서 옳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정의는 대부분 지고, 아주 가끔씩 이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그 확률을 높일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중요한 건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오른손도, 왼손도, 두뇌의 명령을 따르고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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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리는 이렇다.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함.' 그런 의미에서 재벌가의 딸이 기백만원, 기천만원짜리 옷을 입고 다니는 건 물질적인 개념에서 사치가 아닐 수 있다. 돈이 이마에서 튀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뭔들 못하겠어. 세상을 멸망시키는데 돈지랄하는 게 아니라면야 있는 이들의 소비수준을 사치라고 말하는 입은 결국 무색해지기 마련이다. 쓸 수 있어서 쓰는 건 죄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재벌 2세가 누리는 화려한 생활이 마땅한 소비이고 정당한 권리인가라는 물음에 닿았을 때 문제의식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상그룹이라는 재벌가의 딸인 임세령이 몸에 걸친 의류의 가격대를 듣고 혀를 찰 것이다. 관련 기사를 써대는 찌라시들이 즐비한 것도 그런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임세령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이길래, 저런 자격을 갖추고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은 '그의 아버지가 그룹 회장이기 때문에'라는 '은수저 물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임세령의 소비는 정당하다. 하지만 그 소비를 손가락질하는 손의 심정도 이해한다. 돈이 있는 사람의 정당한 소비를 옹호하면서 그에 대한 질시의 여론을 무작정 비판하는 건 그저 손쉬운 일이다. 빈부 격차가 극대화되고, 부의 재분배가 가로막힌 사회에서 '재벌가의 손녀가 몇천만원 짜리 코트를 입는 게 잘못이야?'라고 일갈하는 건 그저 속편한 비판이다. 문제의 본질은 정당한 소비가 아니라 정당한 소비 이면에 자리한 부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에 있기 때문이다.

 

조현아의 땅콩 회항 사태가 생각 이상의 파장을 몰고 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평범한 사회 구성원이 돈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생각 이상으로 공격적이다. 재벌가라는 호화로운 장벽이 위태롭게 흔들리자 필사적으로 성문을 두들기고 고함을 지른다. 한국의 부자들은 대부분 부의 축재에 있어서 윤리적 의심을 피해갈 수 없다.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와 원자재의 독점 매입을 통한 이윤 창출을 통해서 지금의 부를 축적했고, 독재 정권의 슬하에서 노동의 착취를 보장 받으며 더욱 비대해졌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는 건 일찌감치 짓눌렸고,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게다가 나날이 상승하는 사회적 비용을 방관하는 정치적 세력들은 빈부 격차에 계급성을 부여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임세령을 향한 손가락의 저변엔 비윤리적 축재의 역사가 존재한다. 부자가 의심 받는 사회라니, 얼마나 불행한가.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열광하는 사회의 저변엔 가난한 다수의 불만이 도화선처럼 깔려 있다. 게다가 임세령과 같은 재벌가의 후예들을 손가락질하는 대상들은 가진 것 없이 증오까지 끌어안고 있다. 결국 그 손가락들은 정작 자신들이 손가락질하는 대상보다 가까운 주변의 손가락들과 부딪혀 싸우거나 기형적인 집단 논리로 번져나갈 것이다.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시키는 건 결국 부의 대물림을 손쉽게 허하고, 빈부 격차의 확대를 방관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억울해지는 사회란 얼마나 불행한가. 그 불행이 개개인의 무지 탓이라고 몰아가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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