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승패로 기록된다. 하지만 거기 사람이 있었다. 전쟁은 승패보다도 생사의 문제로 기억돼야 한다. 전쟁이라는 명분에 휘말리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너야 하는 인간들의 존재는 승패로서 기록되는 역사적 명제 아래 손쉽게 지워진다. 전쟁은 영문도 모른 채 생사의 기로로 떠밀린 인간들의 지옥도다. <고지전>은 이를 대사로서 명확하게 전달한다. “빨갱이가 아니라 전쟁과 싸우는 거다. 그러니 살아남는 게 전쟁으로부터 진짜 이기는 길이다.” 전쟁이 승패가 아닌, 생존의 문제임을 강력하고 확실하게 피력하고 환기시킨다. 물론 이는 숱한 전쟁영화들이 다루고 언급해온 이야기다. 하지만 <고지전>은 사람 죽이는 전장의 비극을 전시하고 눈물을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 지옥도 속에서 이유도 알 길 없이 서로를 죽이고 죽어나가는 이들의 참혹한 비극에 주목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1년 7월 10일 휴전 협정의 시작과 함께 형성된 휴전선 부근에서 2년여 동안 교착상태의 국지전을 거듭한 후,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러서야 휴전을 맞이했다. <고지전>은 남북의 대표가 만나 군사분계선과 포로교환 문제로 탁상공론을 거듭하던 2년 여간의 휴전 협정 기간 속에서 고지 점령을 위해 소모적인 전투를 벌이던 휴전선 부근의 숱한 전투를 펼치던 치열한 전선 가운데 하나로 시선을 돌린다. 후방에 근무하던 방첩대 중위 은표(신하균)는 애록고지에서 전선을 지키는 악어중대 중대장의 죽음을 비롯해서 일부 부대원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혹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애록고지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참전했다가 북한군에게 끌려가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 수혁(고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은표는 애록고지를 둘러싼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는 동시에 참혹한 전장의 진실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매일 같이 약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고지 전투 속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서도 전장의 일상은 흐른다. 그렇게 흐른 일상이 어느새 2년여 시간에 다다라서 어제 봤던 그 놈이 살아있었는지, 죽었었는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돼버린 고지의 병사들은 어제 올랐던 그 고지에 또 오르고 내리며 매일 같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든다. <고지전>은 치열한 고지 쟁탈전에 나서는 병사들의 일상을 그리며 숙연하게 내리쬐는 전쟁의 비장함 대신 그 아래 드리워진 부조리한 전쟁의 단면들을 채집해 나간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해야 하기에 전장에 끌려 나온 젊은이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전선에서 한 뼘의 땅을 넓히기 위한 하루살이로 소모된다. 땅따먹기에 열중하는 윗대가리들이 탁상공론 속에서 시간을 허비할 때, 생존의 본능마저 찢겨 나뒹구는 고지를 기어올라가며 죽어나가거나 죽어나가는 전우의 시체를 밟고 넘는다.
<고지전>은 전쟁이 숙연하거나 엄숙하게 기념될만한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비극임을 명백하게 전시한다. 그리고 이런 비극을 방관한 채 한 뼘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권력, 더 나아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비호되는 결정권자들의 부조리한 행실을 폭로한다. <고지전>은 아비규환 같은 전장의 풍경을 통해서 이 땅의 부조리한 역사를 환기시키는 진보적인 전쟁영화다. 생생하게 묘사되는 전투 시퀀스의 프레임이 인간적인 윤리에 대한 고찰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고지전>은 한국전쟁을 다룬 지난 영화들에서 한 발 나아간다. 이념의 대립이라는 빤한 수식어 대신 그저 생사의 기로 속에 내몰린 인간과 인간의 덧없는 사투가 낳은 명목 없는 비극의 온도를 서서히 가열시킨다.
<영화는 영화다>와 <의형제>를 통해서 갈등 노선에 놓인 사내들의 멜로를 그려낸 장훈의 장기는 <고지전>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대립과 연대를 거듭하는 두 인물의 긴밀한 감정선을 그리던 전작들과 달리 전쟁영화라는 스케일 안에서 다양한 인물의 관계도를 그리는 <고지전>은 너르고 보편적인 공감의 영역으로서 인물들의 감정선을 펼쳐 보인다. 은표와 수혁의 대립적 구도와 함께 북과 남의 경계에서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적으로 대치한 이들이 똑 같은 바람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이는 1대1의 관계로 그려지던 장훈의 전작들 속에서 발견되던 등을 맞댄 남자들의 미묘한 연대적 감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박상연은 <고지전>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이념이라는 거대한 명분에 짓눌린 개개인의 비극을 환기시켜낸다. 그리고 이제 연출전문 감독이라 불려도 좋을 장훈은 주목할만한 신예 연출가의 수준을 넘어서 진짜 물건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들의 열연 속에서도 신예 이제훈은 비범하게 돋보인다.
치열한 전투와 전투 사이에서 소소한 일상을 영위하는 이들의 생이 일거에 타 들어가는 클라이맥스는 <고지전>의 본체나 다름없다.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일시적인 희망으로 부풀어오르다 이내 꺼져버린 광경은 전쟁기념비 속에 기록된 이들에 대한 감사보다도 분노해야 할 대상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젊은이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기득권들의 행태는 그 시절의 전장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사회에서도 만연한 부조리와 다를 바 없다. 시대는 변했고, 상황도 달라졌지만 몰염치와 몰상식으로 시대를 지배하는 이들의 세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경계심을 부추기는 어떤 이들의 자극적인 멘트처럼 이 땅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그 주적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그 전쟁의 명분을 부추기는 우리 안의 어떤 입이다.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며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강요하는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입으로 세상을 움직인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전쟁이란 승패의 기록이 아닌 생사로 기억돼야 하는 것임을, 승자와 패자가 아닌, 산 자와 죽은 자의 비극임을,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마치 내친 김에 달린다는 말처럼 박훈정은 시나리오 작가에서 연출자로 성큼 올라섰다. 김지운이 연출한 문제작 <악마를 보았다>와 현재 제작 중인 류승완의 차기작 <부당거래>의 원작자로서 유명세를 탄 박훈정의 <혈투>는 단순히 그 유명세의 상승곡선에 올라탄 기획이 아니다.
원래부터 제목이 <혈투>였나? 가제는 없었나?
원래 <북극의 변>이라는 가제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어렵다는 의견이 있어서 직관적인 제목으로 바꿔보자고 하더라. 결국 제작사에서 <혈투>가 어떠냐 하길래 나쁘지 않아서 그렇게 갔다.
시대극이지만 시대적 재현이 많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시대극으로서 고증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텐데.
글을 쓸 때는 필연적으로 자료조사를 많이 할 수 밖에 없지만 촬영에서 고증이 요구되는 건 비주얼 때문이다. 복장부터 시작해서 객잔의 건축양식도 확인했다. 엄밀히 따지면 역사적인 고증과 틀린 부분들이 없진 않다. 의도한 부분도 있지만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부분도 있다.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면서도 우리 미술팀에게 강조한 건 의상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딱히 고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혈투>에서 나오는 객잔이란 공간의 위치가 만주로 설정됐지만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 무시하고 영화적 느낌을 살리기 위한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해준다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광활한 곳에 놓인 버려진 공간처럼 느껴지길 원했다. 결론적으로 객잔이 세 인물의 무덤처럼 보였으면 좋겠더라. 역사적인 배경에 기대서 갈 뿐, 보이는 것까지 다 정확해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광해군 11년이라는 시대상이 명시되지만 병자호란 이후 북벌론이 대두되던 시대상을 반영한 팩션영화라고 해도 상관이 없겠더라. <혈투>에서의 시대적 배경은 세 인물의 갈등을 야기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처럼 보였다.
의도했던 바다. 역사적인 사실을 상기시키는 게 아니라 단지 영화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정확하게 광해군 11년을 적시한 건 이야기의 설정과 가장 가까운 배경이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다. 광해군 7년 즈음에 대북과 소북의 대립으로 옥사사건도 일어났고, 이로 인해 집권층이 바뀌지 않았나. 광해군 11년에 명의 강압으로 인한 출병 사실도 있었으니 이 이야기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으로서 적합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런 배경 안에 놓인 세 인물의 사연이었다.
도입부와 결말부를 제외하면 객잔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영화의 8할이다. 한정된 공간이란 점에서 묘사의 한계가 발생하는 셈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저예산 사극을 생각했다. 아무래도 저예산으로 가려면 한정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적합하다. 문제는 이게 상업영화로 기획되니까 방금 지적한 것처럼 공간의 한계가 약점이 될 수 있겠더라. 한 공간만 비춰지면 관객들이 지루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공간을 바꿀 수는 없지 않나. 그건 <혈투>가 아닌 다른 영화겠지. (웃음) 결국 공간활용에 있어서 고민이 많아졌다.
대안은 어디서 찾았나?
다양한 해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비주얼을 구상했다. 어떻게든 그 한정된 공간에서 긴장감과 재미를 뽑아내고자 했다. 영화적으로 얼마나 잘 표현이 됐을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는 조선도 있고, 명도 있고, 청도 있고, 심지어 벌판도 있다. 세 사람의 관계도 그 공간 안에 표현돼 있다. 세 사람의 자리를 보면 도영은 객잔 안쪽의 객실을 등진 채 앉아있고 헌명은 문과 창문 쪽에 앉아 있다. 그리고 두수가 앉아 있는 곳은 깊은 안쪽이다. 헌명은 어떻게든 객잔에서 나가서 돌아가야 하는 인물이라 문과 가깝게 자리하면서 자주 밖에 나가본다. 하지만 도영은 어차피 갈 곳도 없고 객잔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 두수는 어느 쪽이나 붙을 수 있는 인물이다. 이렇게 장치적인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만들어놓고 보니까 사람들이 거기까진 신경 쓰지 않겠구나 싶더라. (웃음)
액션도 하나의 주요한 볼거리다. 하지만 어둡고 한정된 공간에서 액션이 촬영된다는 점도 하나의 과제였을 것 같다.
시나리오를 봤으니 알겠지만 <혈투>에서 필요한 건 화려한 액션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럴싸했던 액션이 점점 찌질해진다. 머리 잡아당기고, 귀나 손 물어뜯고, 그런 싸움에서 비주얼은 필요가 없지. (웃음) 막판에 어두운 아래층에서 싸울 즈음에는 인물들의 감정이 극까지 치닫지 않나. 나는 거기서 액션보단 사람의 감정이 주는 느낌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관객들이 화면을 통해서가 아닌 눈 앞에서 보는 느낌의 싸움을 묘사해야 한다고 느꼈다. 덕분에 촬영팀이 고생했지. 배우들이 연기하는 바로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찍었으니까. (웃음) 조명의 조절도 중요했다. 처음에서 마지막 싸움으로 갈수록 어두워지는데 이는 공간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객잔에서, 객잔 지하로 들어가니까. 어차피 세 인물은 만주에 죽으라고 보내졌고, 만주 벌판은 거대한 관이다. 그 관에서 살겠다고 도망쳐서 객잔을 발견했지만 그 객잔에서 셋이 맞닥뜨렸을 때 그곳은 다시 보다 작은 관이 된다. 결국 지하에서 남은 두 사람이 부딪힐 때 그곳은 더 작은 관이 된다. 액션은 그런 공간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동선의 수단과도 같았다.
갈등의 축은 헌명과 도영이고, 두수는 그 갈등에 끼어드는 중간자다. 그런 의미에서 두수는 정말 중요한 인물이면서도 소모적으로 그려질 가능성도 있는 인물이다.
<혈투>는 세 인물의 밸런스가 깨지면 끝나는 영화다. 두수는 도영과 헌명의 확실한 대립 구도에 끼어드는 만큼 잘못하면 불필요한 인물처럼 보이거나 헌명과 도영의 균형을 무너뜨릴 가능성도 있었다. 반면 도영과 헌명의 방향추 역할을 하거나 관계의 돌발변수로 작용하기도 한다. 두수는 엄밀히 말하면 헌명과 도영이 속한 지배층 집단의 피해자다. 두수가 직접 말하는 것처럼 여기서 이 꼬락서니로 죽어가야 하는 이유는 결국 얘네 탓인 거다. 두수는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는 인물이므로 가장 중요한 건 생존과 귀향이다. 그런 부분에 집중하고자 했다. 동시에 두 사람의 긴장감으로 채워진 이야기에 약간의 위트를 가미하며 조금 숨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할 수 있게 해주는 인물이다.
두수가 관객으로부터 가장 큰 연민을 얻을 것 같다.
덕분에 제작할 때도 그런 소리 많이 들었다. “(결말을) 바꾸면 안될까요?” (웃음) 사실 두수가 최고의 피해자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는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적인 설정이기 전에 진짜 그런 상황 속에서 그것이 바로 두수의 현실인 셈이다. 그걸 뒤집으면 판타지가 되는 거고.
결국 계급적 갈등이 <혈투>의 본체인 것 같다.
계급투쟁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헌명, 도영이 지배층이라면 두수는 피지배층이다. 그리고 지배층 가운데서도 권력을 쥐고 있는 쪽과 권력을 쥐지 못한 쪽을 주류와 비주류로 나눌 때, 헌명은 비주류다. 결국 주류였던 친구의 가문을 팔아서 새롭게 주류가 되는 쪽에 붙어보려 하는데 그쪽에서도 사실상 얘를 자기 식구라고 생각해준 적이 한번도 없는 거다. 사실 헌명은 자신에게 파병 가라고 할 때부터 인지했을 거다. 다녀 오면 자신에게 예조 자리를 봐주겠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예조 자리란 굉장한 노른자 자리인 탓에 예조정랑 자리를 놓고 권력을 쥔 자들이 치열하게 다투던 판인데 그 자리에 넣어주겠다는 말 자체가 이미 꾀는 말인 거지. 헌명 정도 머리를 지닌 애라면 분명 자신이 팽 당한다고 느낄만한 사안이었을 거고. 다만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후에 도영의 입을 통해서 정확하게 확인을 받게 되니 폭주하게 되는 셈이다.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친구도 팔았는데 결국 다시 그 지경이니까. <혈투>를 보고 나서 이런 부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길 바라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런 갈등을 직접 연기하는 배우들이 중요했을 것 같다. 배우들이 의도대로 그런 갈등들을 잘 연기해준 것 같나.
결과적으로 배우들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솔직히 첫 촬영 때는 조금 당황했다. 왜냐면 지금까지 내가 써오고 그려왔던 게 있으니까. 하지만 연기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잡아온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
그 첫 촬영에서 낯설었던 그 배우는 누구였을까. (웃음)
진구였다. (웃음) 크랭크인 이후 첫 신이라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점점 그 모습에 적응해가니까 되레 그것이 진구라는 배우에 어울리는 도영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촬영이 진행되면서 도영이라는 캐릭터를 수시로 손보게 됐다. 고창석 선배도 초반에는 너무 연극적이다 싶어서 고민을 했었는데 금방 도영이나 헌명의 분위기에 맞춰나가더라. 덕분에 지금도 어쩌면 이렇게 캐스팅이 잘 됐을까 생각한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진구가 도영 역에도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처음에 진구 씨를 만날 때 배역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도영 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도영은 영화상에서 감정을 절제하고 내뱉는 진폭이 가장 큰 역할이기에 젊어 보이는 친구지만 기본적으로 연기가 되는 배우이길 바랬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걸 염두에 두고 만났지만 배역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하지 않았는데 미팅이 끝나고 나가면서 진구 씨가 이런 말을 하더라. “저는 두수 역할도 좋습니다.” 그 순간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졌다. 물론 결과는 예정대로 갔지만.
헌명은 가장 입체적인 감정을 품은 인물이다. 그 감정을 잘 살리는 것이 <혈투>라는 영화의 성패나 다름없었을 거다.
이야기의 단초 자체가 헌명으로부터 출발하니까 중요할 수 밖에 없었지. 사실 헌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깊은 인물로 그려졌다. 덕분에 영화도 깊어진 것 같고. 사실 헌명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걱정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봐도 알겠지만 헌명은 이미 다 드러난 인물이다. 그래서 전형적이고 단순하게 보여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희순 선배가 역시 잘하더라. (웃음) 헌명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중요했고, 이게 표현이 안되면 영화 자체가 애매해지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의문을 남기게 될 거라 걱정했다. 하지만 희순 선배가 연기하면서 되레 누가 봐도 헌명이 짠하게 느껴지도록 완성됐다. 사실 헌명을 하고 싶어하는 배우가 좀 있었는데 나는 희순 선배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잘 해주시더라. 하지만 희순 선배는 고생이 많았지.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 안되니까 자꾸 누르고, 누르고, 그러니까 너무 힘들었을 거다. 그렇게 감정 잡기도 힘든데 액션은 개싸움이고, 또 눈에 피를 떡칠하고 다니니까 눈도 아프고, 나중에 그러더라. “이 영화는 액션도 힘들고! 액션 안 해도 힘들어!” (웃음) 내가 봐도 고생이 많았다.
이 영화의 일등공신이다. (웃음)
늘 우리 스태프들이나 배우들과 함께 있으면 하는 얘기지만 시나리오보다 콘티가 잘 나왔고, 콘티보다 영화가 훨씬 잘 나왔다. 배우들이 굉장히 큰 몫을 해준 덕분이다. 물론 촬영을 비롯한 나머지 부분도 다 좋았지만 기본적으로 배우들이 연기를 잘 해준 만큼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포기해야 하거나 반대로 살을 붙인 부분은 없나.
애초에 약간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생각했었지만 조금 저예산영화 같은 느낌이 강해져서 그 요소를 걷어냈다. 그리고 걷어낸 부분에 살을 붙였지. 원래 서현이라는 캐릭터는 없었다. 원안에서는 철저하게 남자들만 나왔지. 제작사에서 디벨롭(develop)하면서 헌명이 지닌 신분상승과 출세의 욕망에 그 나이대 남자들의 욕망 중 하나인 여자에 대한 소유욕을 포함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부분이 포함되면서 헌명이라는 인물의 갈망이 더 살아났다고 본다.
촬영과정 중에는 그런 부분이 없었나?
현장에서 고친 건 없다. 거의 시나리오와 콘티대로 찍었다. 배우들이 직접 대사를 해보니까 입에 안 붙거나 씹혀서, 혹은 어떤 상황에서 맞지 않는 톤이란 판단이 들었을 때 즉석에서 대사를 고친 건 있지만 그 외에는 고쳐진 부분이 없다. 이건 우리 스태프들에게 고마운 바인데 스태프들이 대본과 콘티를 보고 많은 준비를 해줬다. 적어도 준비가 안됐거나 뭔가 좋지 않아서 뜻하지 않게 고쳐야 했던 부분은 없었으니까. 물론 연출을 하다가 ‘이걸로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지만 만약 그렇게 갔다가 나중에 톤이 튀어버린다거나 그러면 뒷감당이 안될 것 같아서 그냥 제대로 갔다. 촬영 전에 이 날 이 신을 찍겠다고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약속했는데 그걸 현장에서 필이 왔다고 바꿔버리는 건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짓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연출에 대한 감이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약속은 어지간하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입봉작이다 보니까 그런 바도 없진 않겠지. (웃음)
원래 연출을 희망했었나?
영화를 꿈꾸는 누구나 그렇듯 연출을 희망했다. 하지만 감독이 된다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지 않나. 나는 심지어 전공이 그쪽도 아니었고. 우리 때만 해도 전문적으로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도 드물었다. 동숭아트센터 지하에 있는 ‘키노’라는 서점에서 시나리오 전집을 팔았는데 그걸 사서 보기도 했지. 결국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막연하게 언젠가 연출을 하자는 뜻을 품고 일단 시나리오 작가로 자리잡은 뒤 돈이나 많이 벌자 생각했다. 어이없는 생각이지. 돈 벌려면 다른 걸 했어야지. (웃음)
영화를 전공해볼 생각은 없었나?
중학교 때까지는 만화가가 꿈이었다. 만화를 곧잘 그렸지. 그런데 고등학교 때부터 그림이 늘지 않아서 만화는 아닌가 보다 싶었고 다른 걸 생각했다. 내가 영화나 소설을 보고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말을 고쳐 쓰길 좋아했다. 그리고 사진이나 음악도 좋아했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할까 생각하다 보니까 내가 좋아하는 걸 다 할 수 있는 게 영화더라. 하지만 좀 막연했지. 연극영화과 시험도 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어머니께서……. (웃음) 아무래도 어른들의 편견이 강한 시기이기도 했고, 내가 공부를 못하는 편이 아닌 덕에 부모님의 꿈이 크셨던 것 같다. (웃음)
최근 개봉된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와 제작 중인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의 원작자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데 왜 <혈투>를 연출작으로 선택한 건가.
사실 <혈투>는 2006년에 쓴 시나리오다. 오래 전에 썼지만 넘기지 않은 이유는 개인적인 애착이 많았던 작품이었던 탓이다. 이 작품을 원했던 제작사나 감독님들이 있었지만 그 분들이 만들고자 하는 방향이 나와 맞지 않더라. 그래서 이건 내가 갖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직접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기회가 온 거다. ‘비단길’에서 시나리오를 몇 개 보여달라고 해서 <북극의 변>을 별생각 없이 보여줬는데 대표님이 다음날 보자고 하더라. 그리고 보자마자 그랬다. “연출 안 해볼래? 이거?” 이건 작가로서 쓴 시나리오가 아니라 감독으로서 쓴 시나리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사실 그렇다고, 언젠가 직접 해보고 싶어서 쓴 거라고 답했다. 결국 그렇게 하게 된 거다. 물론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스러워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했지. 만류하는 사람도 좀 있었다. <악마를 보았다>나 <부당거래>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주가가 더 높아질 텐데 기다렸다가 나중에 해도 되지 않겠냐는 거였지.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일단 좋은 기회이기도 했고, 제작사에 대한 신뢰도 생겼다. 결국 하루도 안돼서 하겠다고 전화했지.
어떤 점에서 신뢰가 생긴 건가.
내가 작가로서 10년 동안 활동하며 여러 제작사를 겪어 보고 각색도 많이 해봤지만 정확하게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 알고 제안하는 회사는 드물다. 올라가볼 수 있는 산이 10개면 10개를 다 올라가봐야 된다. 그러다 결국 다 아니면 다시 첫 번째 산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여긴 그게 아니었다. 너무 명확하게 제시하더라. 나는 제작자가 가장 정확해야 한다고 본다. “이건 재미있지만 작품으로 만들 때 이 부분만 손보면 좋겠는데?” 이래서 내가 괜찮겠다고 하면 가는 거다. 반대로 내 생각이 다르면 그 간극을 좁히던지,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과 해야겠지. 그런데 내가 겪어본 제작사가 열이라면 그 중 일곱은 그게 흐리다. “이게 재미있긴 한데……이렇게 한번 해볼까요?” 이런 식이랄까. (웃음)
<악마를 보았다>는 김지운 감독이 처음으로 자신이 쓰지 않은 시나리오를 연출한 작품이면서도 굉장히 센 작품이다. 영화를 봤을 텐데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내가 쓴 시나리오였지만 이게 만들어지면 조용히 넘어갈 영화는 아닐 거라 생각은 했다. 어쨌든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는 만족한다. 다 떠나서 작가로서 내 시나리오가 내 손을 떠나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시나리오 작가는 주재료를 공급해주는 사람이다. 그 재료를 가지고 구워서 스테이크를 만들던, 회를 뜨던, 삶아먹던, 어떻게 만드는 건 순전히 요리사인 감독 몫이다. <악마를 보았다>는 김지운 감독님 영화고, <부당거래>는 류승완 감독님 영화인 거다.
예전에는 재료만 공급했지만 직접 요리까지 하게 됐다. 자신의 요리에 대한 만족감은 묻지 않겠다. (웃음) 다만 이 경험이 당신에게 남긴 소회 정도는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재료로 내가 하고자 하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그리고 그 요리를 기다리는 분들에게 직접 맛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그게 맛이 있던지 없던지, 내가 책임질 수 있고, 그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은 것 같다. 다만 작가로서 스토리만 만들고 글만 쓸 대는 머리 속으로 상상만 하면 되니까 안 되는 게 없다. 하지만 직접 연출을 하고 촬영을 하면 안 되는 게 있다.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 실제로 이렇게밖에 안 나온다면 결국 타협해야 한다. 게다가 내가 내 돈으로 내 영화를 찍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릴 수 있겠지만 남의 돈으로 영화를 찍었으니 최소한 손해는 끼치면 안 되겠지. 이런 상업영화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기본적인 뼈대는 건드리지 않는 한에서 관객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살을 붙이고자 노력했다. 직접 요리를 하다 보니 이런 스트레스를 받더라. 그리고 내가 단순한 편이라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한다. <혈투>에 1년 정도 매달려 있다 보니까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쓸 수가 없어서 생기는 스트레스도 있었다.
당장 글부터 쓰고 싶겠지만 감독으로서의 욕심도 생겼을 것 같다.
일단 욕심은 난다. 그런데 내가 쓴 시나리오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라서 쓴 것이겠지만 그걸 잘 찍을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 같다. 정말 자신 있다면 내가 직접 만들겠지만 내가 잘할 수 없는데 괜히 욕심 부리기 보단 다른 감독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마다 성향이나 취향이 있으니까. 분명 나는 또 연출하고 싶고, 그렇게 하려 하겠지만 욕심을 부리지는 않으려 한다.
<악마를 보았다>나 <부당거래>, 그리고 <혈투>를 보면 공통적으로 복합적인 인물의 심리가 그려지고 이에서 비롯된 갈등이나 충돌이 복잡한 플롯의 사건을 만든다.
내가 원래 사건 중심 영화보다 캐릭터 중심 영화를 더 좋아하긴 한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벌어지더라고 결국 그 사건을 벌이는 건 사람이다.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왜, 우리가 재미있어하는 이야기도 눈으로 보이는 사건의 뒤에 있는 이야기지 않나. 원래 사람 관찰하는 게 우리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면 결국 사건이 보인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고 싶다. 한두 시간 즐겁게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영화도 좋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나와 어울리는 재주가 아닌 거 같다. 영화를 보고 상영관을 나가서 아무 말없이 집에 가서 씻고 누웠더니 자꾸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잔상을 남겨주고 싶다. 적어도 뭐든 하나 던져주고 싶다. 그런 걸 좋아하니까.
그 사내는 절박하다.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걸어온 뒷길에는 좌절의 발자국들이 길게 늘어섰고, 온 몸은 실패로 얼룩졌으며, 인생은 누더기처럼 해진 지 오래다. 한때 축구선수로서 기대를 얻던 몸이었지만 지금은 수많은 실패의 꼬리를 달고 다니는 인생에 불과하다. 발 딛고 선 땅에서조차 밀려나듯 길을 떠나다 보니 다다른 곳은 끔찍한 내전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가난한 영혼들의 땅, 동티모르. 인저리 타임밖에 남지 않은 듯한 인생의 끝자락에서, 여전히 절망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그라운드 복판에서, 회심의 만회골을 노린다.
5년 전, 김태균 감독은 어느 TV프로그램에서 동티모르를 봤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맨발로 공을 차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친다는 한국인 김신환 코치를 만났다. “이상했지만 마음이 끌렸다”는 김태균 감독은 주변의 지인을 모아 후원회를 조직하려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자라났다. 동티모르 축구소년들의 히로시마 국제유소년축구대회 우승은 “제대로 된 운동장도 없이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 울퉁불퉁한 땅에서 공을 차던”아이들이 직접 일군 ‘레알’드라마였다. 결성 1년 만에 6전 전승으로 우승한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팀의 내막을 아는 김태균 감독은 이를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말한다. <맨발의 꿈>은 그 기적에서 시작됐다.
영화 제작 여건에 있어서 불모지나 다름없는 동티모르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부터 컨테이너 5박스 분량의 장비를 공수했다. 한국과 일본 대사관의 전폭적인 지원을 믿고 대사관 주소로 장비들을 실어 날랐다. 대사관에서 무대포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현지 소통도 문제였다. 제대로 된 통역사도 없이, 현지 스태프를 섭외하고, 배우 오디션까지 치러야 했다. 덕분에 김태균 감독은 현지 UN경찰로부터 아동 납치 의심까지 얻으며 조사를 당했다. 불안한 치안 상황과 열악한 제반 시설 문제도 만만찮았다. 제일 큰 난관은 현지인과의 정서적 괴리였다. “일을 하지 않는”현지인들의 느릿한 행동과 일처리는 급박한 촬영스케줄의 발목을 잡았다. 현지 한국인이나 대사관에서는 하나같이 “스케줄 안에 영화를 찍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돈을 더 줘서라도 한국식으로 일하게 만든”결과, 현지 스탭들도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는 한국인”이 다 됐고, 촬영 일정을 예정대로 마칠 수 있었다.
북한의 가학적인 체제로부터 달아나고자 했던 부자의 파국적 상봉을 그린 <크로싱>에 이어 또 다시 열악한 동티모르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과 한국인 코치의 꿈을 다룬 <맨발의 꿈>은 실화가 바탕이 된 작품들이다. 다만 절망적인 실화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크로싱>과 달리 <맨발의 꿈>은 희망적인 사연을 품었다. “가난하면 꿈도 가난해야 돼?”영화 속 대사처럼 가난은 꿈을 움츠리게 만든다. 가난 아래 목 졸린 꿈 옆으로 용기와 믿음, 의지가 밟혀 눌린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목격한다. 모든 어려움을 딛고 꿈을 이룬 이들의 현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건 엄연한 현실이다. <맨발의 꿈>은 그 현실을 드라마로 옮긴 작품이다. 꿈이 이뤄낸 현실의 드라마, 그리고 꿈은 여전히 희망을 향해 달리고 있다.
피와 눈물의 땅, 동티모르
1999년 10월 20일, 동티모르의 독립은 5세기 만에 이뤄졌다. 16세기 포르투갈의 긴 점령과 철수 직후인 1975년 인도네시아의 무력 침입으로 식민지 지배는 계속됐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인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앞세운 끔찍한 학살로서 동티모르에 심각한 민족분열을 야기시켰다. 결국 인도네시아 정권교체와 함께 동티모르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고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이 결정됐다. 피와 눈물의 땅은 비로소 새 역사를 살고 있다.
김태균 감독 인터뷰
<맨발의 꿈>도 <크로싱>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둔 영화다.
그 사연들이 내게 감동을 주는 바가 있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좀 더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다.
전작과 반대로 해피엔딩이다. 개인적으로 위안이 되지 않았나?
<크로싱>은 작은 부분이라도 해피엔딩을 해주고 싶은 유혹이 강했다. 그래야 흥행될 것도 같고. (웃음) 하지만 양심상 못하겠더라. 힘들어도 그렇게 가야 했지. 그래서 이번엔 다행이고.
영화는 히로시마 대회에서 끝났지만 현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마 그 아이들이 히로시마에서 우승하지 못했다면 아직도 축구를 하고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을 거다. 김신환 감독도 좌절했겠지. 하지만 우승 이후로 그 꿈이 계속 가고 있다. 그때 우승 주역들이 작년 17세 이하 월드컵에서 아시아 16강에 올랐다. 대단한 성적이지.
<맨발의 꿈>이란 제목은 아이들의 꿈이기도 하지만 김신환 감독의 것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꿈꾸지 못했던 아이들과 꿈이 완전히 꺾인 사람이 만나서 같은 꿈을 향해 뛰어가는 이야기다. 꿈이 이뤄졌다기 보단 꿈을 진짜 꿀수 있게 된 거지.
김신환 감독이란 사람이 궁금하다.
언뜻 보면 사기꾼처럼 보인다. 원래 꿈꾸는 사람은 사기꾼이잖아.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세워질 거라던 축구학교를 아직도 못 세웠거든. 동티모르 정부로부터 3만 평의 땅을 받았지만 도내이션을 받지 못했다. 10억이 넘게 필요하다는데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인생의 좌절을 거듭했지만 이제 남을 일으켜 세워주는데 기쁨을 느낀 거다. 그리고 사실 아이들이 그 사람을 살게 해준 거지.
<맨발의 꿈>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뭔가?
진부하고 보편적일지 몰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좌절하지 않는 용기를 주고 싶다. 이 세상에 꿈꿀 수 있는 게 너무도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특히 우리나라 40대 아버지랑 아들이, 가족이 같이 봤으면 좋겠다. 요즘 다들 인생에 지쳐있잖아. 못 먹고 못 살아도 하루 종일 노는 애들을 보면 우리 애들이 너무 불쌍해.
(PREMIERE Seasonbook 'KOREAN MOVIE PREVIEW' 4월호 No.66)
좁은 방안에서 자신의 부인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청년의 눈에 수심이 서려 있다. 하지만 메일을 검색하던 청년의 눈이 곧 진지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톨스토이의 ‘부활’을 집어 든다. 메일을 빼곡하게 채운 텍스트의 행간 사이에 놓인 단어들을 유심히 살피던 청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책과 대조한 뒤 관계가 모호한 단어들을 끄집어내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에 나열한다. 청년은 저마다 독립적인 의미의 단어들을 나열하지만 그 단어의 나열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읽어내고 있다. 그와 동떨어진 또 다른 장소, 국정원에서는 어떤 이들의 동행을 주시하는 요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국정원의 요원들은 북에서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전문암살자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선상으로 연결된 두 개의 공간에서 움직이는 서로 다른 인물들이 하나의 사건을 향해 수렴된다.
<의형제>는 마치 낡은 시대의 영화처럼 보인다. 사실 이념의 대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현대에서 남북의 대립적 구도 자체가 낡고 낡은 것이다. 하지만 <의형제>는 남북이라는 지정학적 대치 구조를 본질처럼 끌어들이는 대신, 수단으로서 활용하는 영화다. 북에서 내려온 남파간첩 지원(강동원)과 그의 뒤를 좇는 국정원 요원 한규(송강호)는 낡고 낡았지만 여전히 유효한 남북관계의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요구에 의해 대치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관계에 놓여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의형제>가 다루는 건 그 두 사람의 대립 구도적 운명이 아니다. 그 대립 구도적 운명이 불가분하게 뒤섞이게 되는 기묘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영화의 목적지에 가깝다.
남북이라는 이념적 대립에 얽힌 인간들의 연민을 이끌어내며 비극적인 지정학적 운명을 상기시키던 작품들과 달리 <의형제>는 그 지정학적 속성을 다른 의미의 감정적 치환에 활용한다. 북에서 내려온 남파간첩 지원과 간첩을 수사하는 국정원 요원 한규는 극단적인 대립구도로서 서로를 배척하거나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명확하게 다른 자신들의 상황 속에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오해로 인해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거나 지나친 과욕으로 오랜 수고는 허사로 끝난다. 자신이 소속된 조직으로부터 내쳐지게 된 두 남자는 조직을 위해 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뒤늦게 마주하게 되고 그로부터 시작되는 두 남자의 우연한 동거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오해를 낳고 긴장의 국면을 이어나간다. 단순히 오해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긴장 관계는 부조리한 유머를 빚어내는 동시에 사연의 귀추를 주목하게 만드는 흥미의 유발지점과 같다. 버디무비의 유머와 홍콩 느와르의 비장미가 함께 엿보이는 동시에 지정학적 특수성이 더해져 독자적인 특성을 빚어낸다.
극의 밖에서 모든 정보를 수집해낸 관객들이 극 안의 인물들이 펼쳐나가는 오해의 여정을 지켜보게 만든다는 건 영화가 그 결과를 주목하게 만들 때 가능한 방식이다. <의형제>는 그런 자신의 의도를 영리하게 관철시키는 영화다. 상황의 아이러니가 만들어내는 유머와 긴장의 속성이 러닝타임에 적절한 가변성과 안정성을 부여한다. 안정적인 걸음을 유지하면서도 보폭을 적절히 조절한다. 무엇보다도 <의형제>는 오프닝과 피날레의 묘미를 잘 알고 있는 영화다. 초반 도입부를 통해 흥미를 자아내던 영화는 초반부 총격전의 긴박감 넘치는 묘사를 통해 관객의 시야를 스크린에 고정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결말부에 다다른 또 한 번의 총격신은 초반 총격신의 수미쌍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성공적인 긴장감을 조성한다. 입구와 출구가 정확하게 제 자리를 잡고 있다.
해피엔딩을 연출하는 결말부가 일종의 강박처럼 보인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의형제>는 꽤나 흥미로운 버디무비로서 평할만한 영화다. 특히 동물적인 순발력으로 신의 공기를 장악하는 동시에 적절한 여백을 만들어내는 송강호의 연기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성공적이며 이에 적절한 리액션과 피드백을 이루며 자신의 캐릭터를 일궈내는 강동원의 연기도 안정적이다. 그 밖에도 많은 배우들이 적절한 위치를 잡고 제 역할을 해내는 가운데, 북파간첩 전문암살자로 등장하는 그림자 역할의 전국환은 강력한 카리스마로서 극의 깅장감을 한층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얼굴이다.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 성공적인 데뷔를 이룬 장훈 감독은 <의형제>를 통해 소포모어 징크스를 탁월하게 날려버렸다. 무엇보다도 장훈 감독은 <의형제>를 통해 전작의 성공이 운 좋은 캐스팅의 수준에 기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에서 기인한 것임을 뚜렷하게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보다 성공적이다.
단순 명확한 제목처럼 <이태원 살인사건>은 1997년 이태원에서 벌어졌던 햄버거 가게 살인사건에 대한 기록에 의거한 영화다. 이 사건의 첫 번째 문제는 진범을 밝히지 못한 미제라는 것이며 두 번째 문제는 그것이 한국과 미국이라는 지정학적 영향력을 근거에 둔 음모론적 해석의 개입이 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마치 잘 빠진 장르물 제목처럼 보이는 <이태원 살인사건>의 핵심도 그 지점에 놓여있다. 영리한 서사 구조나 빠른 속도감 따위는 철저히 배제된 영화는 묵묵하게 그 사건이 한국 사회의 무엇을 건드리고 관통하는가에 치중한다. 문제의식은 좋다. 하지만 영화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지점이 애매하다. 기록적 사건을 재현하는데 있어서 <이태원 살인사건>이 동원하는 건 진실을 둘러싼 윤리적 공방이다. 스릴러적 오해를 부를만한 제목이지만 그것보단 법정드라마에 가까운 현장성을 지닌 <이태원 살인사건>은 정작 재현의 수준 이상의 무언가를 증명하지 못한다. 사건 자체가 지닌 충격이 전달될 뿐, 영화의 의도는 정작 흐릿하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수직적인 한미 관계를 어필하고, 윤리적 문제에 천착하면서 이성적 판단이 필요한 지점에선 느슨해지고 만다. 팽팽해야 할 법정신엔 두서가 없고, 좀처럼 긴박감을 얻기가 어렵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법제도의 맹점을 파고 들어야 하는 영화다. 하지만 자꾸 지루한 도덕 선생님의 훈계처럼 스스로를 치장한다. 결국 남는 건 현실에 대한 찝찝한 단상뿐이다. 그런 감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겠나.
오랜 세월을 견딘 예술품은 보존적 가치를 발생시키고 개인의 소유욕을 자극한다. 예술품에 물질적 단위의 가격을 매기게 된 건 그 소유욕 때문이다. 희귀성이 인정될수록 책정되는 화폐 단위가 올라간다. 본질적인 아름다움보다도 금전적인 저울질을 통한 소유욕이 예술을 장악한다. 예술이 금전적 가치로 규정될 때 예술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굴절된 욕망이 파생된다. 진품을 베낀 위작들이 눈먼 소유욕을 등에 업고 시장에 유통되고 진가를 해독할 수 있는 감정가의 판단이 예술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 변수는 그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의 속내가 투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술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붓도, 예술적 가치를 판명하는 혀도, 예술적 가치를 구입하는 돈도,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 결국 사람이 변수가 된다.
<인사동 스캔들>은 예술을 거래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붓을, 혀를, 돈을 재능처럼 부리는 자들이 각축전을 펼치는 판이다. 그 재능은 누군가를 찌르는 칼이거나 반대로 스스로를 찌르는 칼이 된다. 이는 도박처럼 위험하다. 그 재능을 걸고 ‘몰빵’하면 그 판 안에서 영생을 누리기도 하지만 무덤처럼 갇히기도 하는 탓이다. 그 성패는 자신의 재능이 상대를 압도할만한 그릇이 되는가에 달려있다. 자신이 들고 있는 패를 어떻게 던질 수 있는가의 배짱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패를 들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사동 스캔들>은 붓과, 혀와, 돈을 자신의 패로 들거나 감춘 이들이 벌이는 판세의 경과를 지켜보는 영화다.
미술품 경매 현장에서 위작 논란에 빠진 작품을 감정하는 이강준(김래원)은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미술복원가다. 좋은 실력과 두둑한 배짱을 지니고 있지만 과거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린 이후로 복원가로 활동하지 않은 그는 도벽으로 인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신세다. 미술계의 큰 손인 중개업자 배태진(엄정화)은 이강준의 특별한 처지를 이용해 안견의 ‘벽안도’복원작업에 끌어들이려 한다. 이강준은 ‘벽안도’에 흥미를 보이고 제안을 수락하지만 그에겐 다른 구상이 있다. <인사동 스캔들>은 ‘벽안도’복원이라는 사건의 기능적 관찰보다도 그 사안을 둘러싼 인물들의 각축전에 주력하는 영화다. ‘벽안도’복원에 착수하는 배태진과 이강준의 심리적 대립구도가 영화의 밑그림이 된다면 그 주변부에 산재한 다양한 캐릭터들은 채색을 돕는 다양한 염료와 같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대사와 이미지에 담긴 대용량의 정보들이 출력된다. ‘매치컷(match cut)’을 비롯한 다양한 장면전환 방식을 활용하며 극의 속도감을 높이고 사연의 줄기를 이루는 사건에 관련된 정보들을 끊임없이 출력하며 정보적 포만감을 발생시킨다. 복원과 복제가 의미를 달리하는 것처럼 합법적인 미술경매와 암거래 경매장이 교차하는 대비적 풍경은 <인사동 스캔들>의 장기에 가깝다. 미술품을 둘러싼 담합과 밀거래 등, 예술품이 유통되는 암투적 과정을 묘사하는 <인사동 스캔들>은 일련의 과정에 대한 사실성을 따지기 힘들 정도로 생소한 덕분에 특별한 풍경으로서 값어치가 있다. 특히 오래된 종이에 먹일 풀을 구하는 ‘세초’작업, ‘원접’과 ‘배접’을 나누는 ‘상박’, 선명한 색감을 재현하기 위한 ‘회음수’등, 동양미술을 복원하는 과정은 <타짜>의 ‘밑장빼기’만큼 이색적인 구경거리가 된다.
사실 <인사동 스캔들>은 <타짜>와 비교하기 좋은 영화다. 도박과 미술이란 소재는 세계관 자체만으로도 너비가 벌어지는 느낌이지만 복원가를 ‘떼쟁이’로, 중개업자를 ‘장물쟁이’로 지칭하는 은어가 소통되는 미술계의 뒷면은 도박판만큼이나 거칠고 험한 세계처럼 연출되며 이런 노선이 <타짜>의 기시감을 부른다. 타짜의 손기술은 복제가와 복원가의 그림 재현 솜씨와 대응한다. 복제와 암시장거래가 만연하는 미술품 거래장면은 치열한 기싸움과 암수가 오가는 도박판과 유사한 단상을 부른다. 현란한 전환 기술이 적극 활용되는 이미지와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입체적 구조를 이루는 이야기 형태도 낯이 익다. 캐릭터의 물량 공세가 대단하지만 인물관계의 기본적인 골격만으로 놓고 보자면 비슷한 선이 발견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타짜>가 활용하기 좋은 규격을 선점한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조건은 <인사동 스캔들>에 위작의 감정가를 매기고 싶게 만든다.
<인사동 스캔들>은 여러모로 공을 많이 들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욕적이다. 저마다 개성을 뽐내는 다양한 캐릭터들은 영화를 풍요롭게 장식하나 종종 자신의 그릇을 지키기 위해 과한 경쟁을 벌이는 캐릭터들이 발견되고, 현란하게 펼쳐지는 이미지와 대량적으로 생산되는 정보는 포만감을 넘어 폭식에 가까운 부담을 안긴다. 빠르게 돌아가는 이야기 구조 속에서 중요하게 요구되는 건 이해력에 가깝다. 이야기의 총합을 이루는 태도는 물리적인 기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끝내 결과를 이루는 모든 과정이 계산적인 계획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때때로 예언을 가장한 우연을 방치하고 묵인한다. 모든 것이 계획적인 필연 같지만 그것을 보좌하는 우연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방대한 대사량과 이미지로 이뤄진 스토리를 다 따라잡는다 해도 의식 속에 침전된 의문을 느낀다면 이런 까닭과 무관하지 않다.
동시에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 결말부에 다다라 얻어질 정서적 감흥이 기본적인 기대치의 수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느낌이다. 이는 캐릭터의 대립항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강준과 배태진의 대립구도는 기세로서 동등하다. 배우가 고민할만한 캐릭터의 디테일은 충분히 완성된 느낌이다. 그러나 기능적인 역할을 묘사하는 데서 균등한 배분이 이뤄지지 않는다. 이는 역할의 보조자, 즉 감독의 배려가 부족하다 탓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강준이 기능적인 능력을 전시해나가는 동안, 배태진을 수식할만한 역할의 기능성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캐릭터의 외모와 대사를 통해 예측되는 잠재력만 발견될 뿐이다. 말미에 다다라서 두 인물은 단순한 선악으로 구분된다. 선의를 바탕으로 복수에 성공하는 자와 악의를 품고 몰락하는 자로 나뉜다. 캐릭터에 접근하는 설정 자체가 상대적인 편애를 발생시키기 좋은 조건이다. 캐릭터의 경쟁을 부추기는 구조 안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건 선의의 승리라기 보단 불합리한 성취를 요구하는 굴절된 욕망의 파괴가 아니었을까. 그런 측면에서 그릇된 욕망을 대변하는 배태진의 배경은 어딘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는 결국 결말부에서 목적을 이룬 인물로부터 전해질 공감대가 깊게 자리잡을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인사동 스캔들>은 분명 어떤 성과를 드러내는 영화다. <타짜>와 골격이 유사하지만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의 물량공세는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를 벤치마킹한 느낌이고 문화적 국수주의를 어필하는 말미 즈음엔 <식객>보다 세련된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종종 우연까지 계산된 계획처럼 모든 과정을 합리화한다는 게 걸리지만 스토리 자체의 전후관계는 맥락 자체로선 앞뒤가 맞는 형태라 말할 수 있다. 분명 단점만큼이나 장점도 눈에 띄는 영화다. 하지만 역시나 과욕이 문제다. 다양한 색을 입혔지만 저마다 색이 번지는 느낌이다. “서양화는 베끼는 게 어렵고, 동양화는 살리는 게 어렵다.”는 대사처럼, ‘자질은 살리는 게 어렵고, 과욕은 죽이는 게 어렵다’.
<영화는 영화다>의 원작이 김기덕 감독의 시나리오라고 들었다. 그 시나리오를 선택하기 이전에 본인이 구상했던 시나리오는 없었나? 개인적으로 쓰던 시나리오가 몇 개 있었지만 작업을 하다 보니 잘 안 풀리기도 하고,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감독님께서 이 시나리오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살펴보고 결국 하게 됐다. 내가 만든 이야기보단 원작이 있는 이야기로 첫 연출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나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됐고, 더 많이 배운 거 같다. 그래서 나에겐 더 좋은 선택이었던 거 같고.
김기덕 감독의 원작 시나리오로부터 가장 크게 각색됐다 할만한 바가 궁금하다. 전체적인 뼈대는 원작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 그래서 원작의 느낌들은 그대로지만 일단 이야기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화법을 각색함에 있어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화법을 선택했다는 게 가장 큰 변화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수타는 강패와 대등한 관계였던 게 아니라 지금보다 좀 더 비중이 적었다. 원래 7:3(강패:수타)에서 6:4정도였던 걸 반반 정도로 각색했다. 물론 두 남자의 이야기란 점에서 영화와 시나리오가 같은 이야기란 건 맞지만 원작에선 강패 이야기의 비중이 더 컸다. 그리고 봉 감독에게 코믹한 요소를 많이 가미한 점도 있고.
아무래도 원작의 영향력이 완전히 배제되진 않았나 보다. 영화상에서 캐릭터 무게중심이 수타보단 강패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느낌이 없진 않았다. 그런데 두 남자의 비중을 대등하게 변화시킨 의도는 뭔가? 김기덕 감독님의 원작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도 서로 다른 삶을 동경하는 두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난 처음부터 비중이 비슷하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비슷해지면 두 남자를 모두 각자 돋보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영화와 현실의 비중도 비슷하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기덕 감독과 연이 닿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대학교 때 학생회위원을 했는데 학교 축제에 저명하신 분들을 초청해서 특별강의 같은 걸 하는 명사 초청강연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내가 김기덕 감독님께 와서 해주십사 연락 드렸고 그 인연으로 가끔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 졸업하면서 영화가 너무 하고 싶어서 감독님께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메일을 드렸다. 감독님께 답장이 왔는데 지금 들어가는 영화가 있으니 여기서 연출부로 일하면서 영화가 자신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일단 해보라고 하시더라. 경험을 해보면 알 수 있다고. 그래서 처음으로 영화를 하게 됐고 그 후로 여기까지 온 거다.
김기덕 감독의 촬영현장에서만 경험을 쌓은 건가? 일단 <사마리아>연출부로 영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사마리아>가 끝나고 한번 <신부수업> 연출부로 참여했다가 다시 <빈집>연출부로 참여하고, <활>과 <시간>의 조감독을 맡았다.
김기덕 감독의 현장과 일반적인 영화 현장엔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차이가 많다. 내가 다른 영화현장을 많이 경험해본 건 아니지만 일단 김기덕 감독님의 현장은 굉장히 빠르다. 현장에서 순발력 있는 상황대처를 보이시니까 촬영진행속도가 빠른 것 같다. 날씨나 외부적 환경요인으로 인해서 촬영이 어려운 날이 생겨도 그런 여건에 맞게 현장상황을 즉각 바꿔서 결국 본인이 원하는 내용을 담아내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는 배우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안 하신다. 뭔가 얘길 해보면서 배우들이 못하겠다고 하면 그걸 강요하진 않는다. 나 같은 경우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게 약간 있나 보더라.
<영화는 영화다>는 한 편의 영화가 완성돼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감독의 입장에서 자신의 영화 속에서 영화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한 감정 같은 게 생기진 않던가.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관객들에겐 두 캐릭터의 삶이 먼저 보였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 이후에 영화와 현실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의도도 있었고. 물론 아이러니는 많았지. (웃음) 촬영하는 스태프들이 실제로 연기를 했는데 카메라 뒤에선 그렇게 활발하던 스태프들이 카메라만 보면 자꾸 도망가는 거다. 그래서 스태프 연기시키기가 너무 힘들더라. (웃음) 스태프 연기시키는 날엔 촬영도 오래 걸리고.
낙원상가 옆에서 촬영한 씬에서 촬영장의 스태프들과 그 사이로 걸어 들어오는 강지환 씨의 모습이 대비적이라 재미있었다. 전문연기자와 비 전문연기자들이 카메라를 대하는 방식의 대비가 발견되는 느낌이랄까. 차이가 크다. 사실 영화에서 스태프를 찍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영화에서 좀 더 리얼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서 찍었는데, 막상 찍어보니까…..안 찍는 게 좋겠더라. (웃음) 물론 스태프들이 고생을 많이 했고 사실 갈수록 스태프들의 연기가 늘었다. 스태프들도 모니터하면서 자신들의 연기가 느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 면에서 행복한 촬영현장이었던 거 같다.
아무래도 영화적 리얼리티와 현실적 리얼리티의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감독이라면 현실적 리얼리티를 고려하면서도 영화적 리얼리티를 고민해야 한다. 게다가 영화란 진실을 보여주기 보단 진심을 담아내는 작업에 가깝다. 진짜가 있고, 정말 진짜 같은 게 있다면 사람들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건 진짜가 아니라 오히려 같은 쪽이 아닐까 생각한다. 진심으로 얘기하는 경우가 있고, 진심처럼 느껴지게 잘 전달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런데 사람들이 진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후자다. 그게 정말 리얼해서가 아니라 리얼한 느낌을 주면 그걸 보는 사람들은 리얼하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때론 그게 약간 슬프기도 하다. 물론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 정직하게 찍으려 했던 부분이나 배우들과 그렇게 작업했던 분위기는 영화에 담긴 거 같아 다행이다.
수타와 강패란 이름은 상당히 직설적이다. 명쾌한 은유지만 반대로 노골적이다. 한편으론 희화화된 뉘앙스로 받아들여질 위험도 있어 보인다. 고민이 좀 있었겠다. 위험할 수도 있었지. 그래서 고민도 좀 했는데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어서 그대로 갔다. 제목도 사실 원작 그대로인 만큼 수타와 강패란 이름도 그대로 가보고 싶은 느낌이 있었다. 물론 그게 좀 코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봉 감독은 상당히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감독이다. 아무래도 감독 캐릭터란 점에서 감독인 당신과 비교하고 싶어진다. 당신과 봉 감독의 거리감은 어느 정도일까? 차이가 좀 있지. 봉 감독은 결국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영화적 설정을 진짜로 찍는다. 그런데 나라면 봉 감독처럼 그렇게 못한다. 영화는 순서대로 찍는 게 아니지 않나. 만약 싸우는 씬을 찍고 난 다음날 싸우기 전 씬을 찍어야 한다면 실제로 싸움을 한다고 했을 때, 배우 얼굴에 상처가 나면 사소하게 나마 맥락적 연결상의 문제도 생기니까.
실제적인 공간의 형태를 과감히 드러내는 느낌이다. 그 공간의 기시감이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는 느낌도 얻었다. 실제로 찍을 때와 전체적으로 컷들이 붙었을 때, 공간의 느낌이 달라졌다. 총체적으로 오는 느낌이 찍을 때보다 좀 더 리얼한 느낌을 주더라. 더 자연스러운 느낌도 있고. 인사동도 그렇고, 갯벌도 그렇고, 그 공간의 느낌들이 완성된 상태에서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더라.
인사동이나 낙원상가처럼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장소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인파를 통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종로는 어차피 골목 앞을 막으면 사람들이 들어올 수가 없으니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인사동은 완전히 열려있으니까 거의 전쟁이었지.
게다가 소지섭에 강지환이라, 그 심각한 엔딩 장면을 찍으면서 다들 집중하고 있는데 그 옆에서, 소지섭이다! 강지환이다! 다 이러고 있으니, (웃음) 전쟁이었지. 우린 사람이 죽어가는 심각한 장면을 찍고 있는데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소지섭이다, 강지환이다, 이러면서 웃으며 사진 찍고, 우리는 통제하느라 정신 없고. 사실 그걸 찍으면 진짜 리얼한 건데 말 그대로 그건 영화가 아니니까. (웃음)
상황 자체가 현실과 영화가 공존하는 아이러니처럼 들린다. 인사동에서 옆으로 빠지는 골목 안에 폐지 수집하는 곳이 있다. 몇 차례 헌팅을 갔을 땐 조용하다 싶어서 한적한 골목을 헌팅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촬영날은 폐지 수거하는 날이라 끊임없이 폐지를 실어 나르고 자동차도 오가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도 왔다 갔다 하시고, 개도 있고. (웃음) 그런데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소지섭, 강지환이 누군지도 모르는 분들이라 그런 점에선 무리가 없었다. 한편으론 그런 점이 노인분들의 생활고가 느껴지는 측면이라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영화라는 결과물을 위해서 작업한 것이지만 그 현장 자체가 나에겐 현실이었고, 그런 부분들이 소중한 경험처럼 느껴졌다.
액션도 꽤나 중요한 관건이었을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현장에서 액션연출을 경험해봤을 리는 없을 것 같고, 그에 대한 노하우가 전무했을 텐데. 마지막 갯벌 장면 같은 경우엔 두 배우가 지칠 때까지 싸우는 느낌을 담고 싶었고, 결국 싸움 자체에 의미가 없어지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이건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생각했던 부분이다. 그런 바가 화면에서 드러나는 거 같아서 다행이다. 그걸 담아내기 위해서 배우들이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지섭 씨는 촬영 끝나고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도 귀에서 갯벌 흙이 계속 조금씩 묻어나올 정도라니까, 고생 많이 했지.
사실 갯벌은 계획된 로케이션 장소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원래는 그게 뻘에서 하는 액션은 아니었다. 내가 각색하면서 조금 수정된 부분인데 두 배우가 뭔가에 흠뻑 젖어서 같은 색깔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 컨셉에서 강패는 블랙이었으면 좋겠고, 수타는 화이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옥상씬을 보면 강패는 블랙을 입고 있고, 수타는 화이트를 입고 있지 않나. 그리고 봉 감독의 영화 안에서도 강패는 계속 정장 안에 검은 셔츠를 입고, 수타는 흰 셔츠를 입고 있고. 나중에 둘 다 뻘이 묻어서 같은 색깔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똑같아졌다는 느낌. 그래서 갯벌을 생각하게 됐다.
그 갯벌씬에서 강패는 결국 수타와의 싸움에서 진다. 결국 주인공이 이긴다. 그건 어쩌면 검은 돌을 지워나가던 강패가 스스로 흰 돌에 둘러싸인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 갯벌씬은 온전히 영화적인 현실에 대한 자조처럼 보인다. 수타가 이겨야만 하는 어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까. 사실 영화 한편이 만들어진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의 느낌이랄까. 관객들이 보는 영화는 스크린에 걸린, 완성된 영화다. 스크린에 걸리기 위해 촬영됐지만 극장에 안 걸려서 상영이 안 되는 영화들도 있고, 촬영이 다 끝났지만 개봉을 못하는 영화들도 있다. 그래서 극장에 걸리는 건 사실 행복한 경우인데 관객들은 그런 영화들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보기 때문에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느낌이나 스태프들이 얻는 그 순간의 느낌을 전달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에선 해피엔딩이 가능하다. 목적했던 결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목적대로, 시나리오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 하지만 영화는 시나리오대로 완성되고, 그래야만 한다.
그 라스트 씬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건가? 원래 원작의 엔딩이다. 원작에서 온전히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던 부분이기도 했고.
사실 갯벌씬은 엄밀히 말해서 영화적 영역의 성취인 셈이다. 영화만의 쾌감이지. 영화적인 만족감이고.
그에 반해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엔딩은 대비적이다. 영화적 결말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려는 현실적 거부감처럼 느껴진다. 현실이란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것이니까. 캐릭터로 얘기한다면 수타는 성장하고 변모한다. 그런데 강패는 변하지 않는 캐릭터다. 변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똑같은 캐릭터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옷을 입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게 변하지 않는 모습이 굉장히 슬픈 거 같다. 현실의 사람들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 마지막은 그런 현실적인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다. 결국은 그것도 영화라는 느낌을. 마지막 장면에서 스크린이 뒤로 빠지고 크레딧 올라가기 전에 프레임이 하나 더 생기지 않나. 그런데 그게 극장에서 상영할 때 많이 잘리더라. 그 극장의 이미지가 객석의 한 세줄 정도는 보이고 더 넓어야 하는데 객석은 안 보이게 잘리는 경우가 있더라.
스크린의 비율 문제 때문에? 맞다. 그래서 혹시 관객들이 그 부분을 놓치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 결국 그것도 영화였다는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극의 말미에 피칠갑을 한 강패가 수타를 노려보는 장면은 마치 객석을 노려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사실 소지섭 씨가 연기한 강패가 강지환 씨가 연기한 수타에 비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그건 종종 영화 속의 악인을 동경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인데 강패의 눈빛은 그 영화적 환상에 빠진 관객에 대한 경계심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과 악이라는 경계에 대한 사유도 가능할 것 같다. 난 사람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기 보단 모든 사람에겐 두 가지 면이 다 있어서 선한 행동을 하거나 악한 행동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강패는 악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마지막에도 선하지 않은 행동을 한 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단 그것이 선이냐 악이냐를 따지지 않고 더 매력적인 부분에 끌린다. 사실 그것도 좀 슬픈 거다. 재미없는 선보단 재미있는 악에 더 끌리니까. 물론 강패가 악한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각자 직업이 다르고, 사회적인 입장이 다른 건 스스로 선택한 어떤 초기의 결정 때문이다. 그 사람 자체가 매번 그런 판단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스스로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 좋겠다. 사람들이 안 좋은 일은 직업으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음)
갯벌 장면은 정말 처절했다. 얼굴이 갯벌에 반쯤 잠긴 강지환의 얼굴이 열의를 대변하더라. 이런 장면을 주문하는 감독은 얼마나 악랄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웃음) 악랄하겐 안 했다. (웃음) 그냥 두 배우들이 스스로 열심히 했다.
강패와 수타를 바라보며 봉 감독은 아무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에서 캐릭터로 완성되는 배우들을 지켜보는 과정은 여러모로 즐거운 일일 거다. 굉장히 즐겁겠지.
똑같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본인에게도 비슷한 즐거움이 있었을 것 같다. 강한 열의를 갖고 연기에 임하는 배우들을 지켜볼 수 있는 감독의 입장이라면 봉 감독 못지 않게 즐거웠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런 얘기 아무한테도 안 했는데 배우들은 무지하게 고생했지만 솔직히 난 속으로 즐거웠다. (웃음) 배우들한테는 고생해서 마음이 아파요, 이렇게 얘기했지만. 영화에 그런 강렬한 느낌들을 주니까 그런 광경을 찍을 수 있어서 즐겁지.
그 장면을 촬영하기 직전에 봉 감독과 강미나가 주고 받는 대사가 생각난다. 두 배우를 격려하고 돌아온 봉 감독에게 미나가 괜찮겠냐고 묻자 봉 감독은 ‘감독이라고 뭐, 다 아나?’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미나가 그럼 감독님은 뭘 아느냐고 되묻자, ‘내 배우 끝까지 믿어야 된다는 거’라고 답한다. 그 대사가 어쩌면 감독 본인이 하고 싶은 대사였을지 모르겠더라.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봉 감독이 대신하는 대사가 조금 있다. 물론 그 이전에 봉 감독 캐릭터를 위한 대사다. 코믹하긴 하지만 결국 감독이니까 감독다운 모습을 마지막에 보여주고 싶었다.
감독으로서 배우를 믿고 가야 하는 순간이 있을 것 같다. 때론 갈등이 될 수 있지만 결국 감독이 배우를 신뢰할 수 있을 때 결과물의 가능성도 더 높아지는 게 아닐까 싶다. 배우들과의 소통은 어땠나? 두 배우가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하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각자 캐릭터에 대한 애정들이 느껴졌다. 두 배우가 스스로 생각하는 강패, 수타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고민해온 부분이 있지 않나. 내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생각했던 캐릭터가 있고. 근데 두 배우가 많이 고민한 부분을 내가 일방적으로 여기선 어떻게 해야 된다고 지도하진 않았다. 일단 배우들이 만들어온 캐릭터를 최대한 담고 싶었고, 그게 전체적으로 큰 톤에서 벗어날 때만 얘길하는 편이었지. 어찌됐든 소지섭의 강패, 강지환의 수타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 오히려 편했다. 배우들과는.
사실 첫 영화부터 캐스팅이 화려하다. 일단 두 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촬영 내내 흐뭇했지. 어떻게 잡아도 그림이 나오니까 편한 것도 있고. (웃음) 두 배우가 굉장히 길지 않나. 만약 어느 한 쪽의 다리가 짧거나 머리가 컸다면 투샷을 잡기 보단 상대적인 표정 위주로 잡아야 되고 이런 걸 신경 썼을 텐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서 카메라도 편하게 잡았다.
감독으로서 두 배우를 컨트롤해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나? 두 배우와 작업하게 된 게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지섭 씨나 지환 씨가 각자의 캐릭터를 너무 잘했기 때문이다. 만약 컨트롤한다고 생각했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거 같다. 그런데 컨트롤한다기 보단 같이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편하고 즐거울 수 있었던 거 같다.
감독으로서 자신의 배우를 처음으로 경험해본 셈이기도 했다. 감독과 배우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본 바는 없나? 아직 정의를 내릴 정도로 경험을 해본 것 같진 않다. 다만 누구나 자신과 결혼할 아내가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상형이 있다. 그런데 결국 만나는 사람에 맞춰서 달라지지 않나. 실제로 만나게 된 사람을 그 이상형으로 맞출 순 없으니까, 서로 같이 변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같이 잘 살아야 된다. 감독과 배우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강패와 수타가 달리기를 하면서 테이크가 반복되는 장면은 마치 강패의 현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영화적 현실을 안착시키는 작업처럼 느껴졌다. 그건 봉 감독이 강패를 길들이는 광경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감독의 입장에서 배우를 다스려보고 싶었던 바는 없었나? 의견의 차이가 발생한 적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크게 마찰하거나 충돌했던 점은 없었다. 의견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그냥 배우들이 원하는 걸 선택했다. 대부분 내가 특별한 주문을 안 한 상태에서 기본적인 동선만 정해주고 배우들이 잡아온 캐릭터로 테이크를 갔다. 물론 만약 내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더 표현돼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원하는 바를 배우들한테 얘기해서 한번 더 테이크를 갔다. 의견 충돌의 느낌은 없었고 그 테이크 중 좋은 걸 쓰면 됐다. 그래서 오히려 작업이 빨랐던 거 같다.
사실 고창석 씨가 연기한 봉 감독이란 캐릭터가 없었다면 이 영화가 꽤나 삭막해졌을지 모른다. 봉 감독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두 캐릭터가 같이 영화를 찍는다는 설정이 가능해지기도 하고,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각색하면서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캐릭터였다.
남자로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꽤 귀여운 캐릭터였다. (웃음) 무대인사 다닐 때마다 관객 분들이 귀엽다고 하더라. 봉 감독님이 인사하면, 귀여워요! 이러니 매번 봉 감독님께서도 당황하셨지. (웃음)
여성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을 것 같다. 그래서 이 나이에 내가 이런 소릴 듣게 될 줄 몰랐다고 얼굴이 많이 빨개지시더라. (웃음)
말미에 강미나의 말처럼 끝까지 없어 보이지만 그만큼 인간미가 느껴진다. 인간적인 매력을 주고 싶었다. 사실 감독님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나도 김기덕 감독님을 많이 봤지만 현장에서 있어 보이게 폼 잡고 있기 보단 대부분 편하고 후줄근한 차림으로 작품 자체에만 몰두해서 계신다. 현장에서 본인이 어떻게 보일까를 고민하는 것보단 그런 게 오히려 멋있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평소 김기덕 감독의 현장 분위기는 어떨지 궁금하다. 보편적으로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김기덕 감독님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있지 않나. 김기덕 감독님과 작업해보거나 개인적으로 만나오신 분들과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만나보면 재미있고 귀여운 부분도 있다.
귀엽다? 약간 개구장이 같은 부분이 있다. 음, 여하간 그렇다. (웃음)
혹시 김기덕 감독에게 원작 시나리오의 모티브나 소재를 얻게 된 경로에 대해서 한번쯤 물어본 적 없나? 원작은 오랜 예전부터 김기덕 감독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시나리오라고 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기 위해서는 많은 요소들이 작용돼야만 하는 것 같다. 감독님께서 보시는 배우들에 대한 느낌,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조폭들에 대한 느낌, 그런 부분들에서 아마 시작되지 않았나 싶더라.
사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대중적으로 많은 지지를 얻는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대중과의 충돌이라 할만한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나. 아무래도 그런 일련의 상황을 김기덕 감독의 옆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김기덕 감독이 얻은 몇몇 어려움에 대한 감정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일단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던 부분은 감독님이 많이 외로워 보였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감독님을 생각하는 오해적 이미지들 때문에 더 그런 것 같고, 무엇보다도 감독들이 대체로 좀 외롭지 않나. 현장에서 얘기할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일적인 얘기를 해도 그 전체를 보는 사람은 감독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다 이해해 줄만한 사람도 없고. 그런 부분들이 많이 외롭게 보이더라. 다른 감독들도 그렇겠지만 작품을 깊게 들어가다 보면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누구나 아는 얘길 하면 공감을 많이 할 수 있듯이. 그런 부분들이 어려운 거 같다. 내가 한번 김기덕 감독님께 유치하게 여쭤본 적이 있다. 감독님, 영화가 더 힘든가요? 현실이 더 힘든가요? 그렇게 여쭤봤더니, 당연히 현실이 더 힘들지, 그러시더라. 그러면서 영화 찍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얘기하시더라. 영화를 찍을 때 제일 행복하고 시간도 잘 간다고, 거기서 행복을 느끼시는 거 같다. 나도 이번에 처음 찍으면서 들었던 느낌은, 배우들 고생시키고, (웃음) 고생시키면서 나도 고생하고, 그렇게 몸은 힘들어도 정말 행복하더라.
<영화는 영화다>라는 제목 자체가 애증을 동반한 느낌이다. 영화 자체에 대한 애증이랄까. 현실을 넘을 수 없는 영화적 한계에 대한 인정 같기도 하고, 현실은 결코 이룰 수 없는 영화적 성취에 대한 선언 같기도 하다. 영화에선 현실에서 하기 어려운 얘기들도 가능하다. 거기엔 어떤 차이가 있는 거 같다. 다만 굳이 그 차이에 얽매여서 영화와 현실을 대비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물론 영화는 끊임없이 현실적 리얼리티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는 반면, 영화를 보는 현실의 사람들은 영화를 모방하려고 한다. 각자가 지닌 장점들을 따로 봤을 때 오히려 그게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정말 리얼한 걸 보고 싶다면 현실을 일상적으로 스치듯이 지나치지 말고 차분하고 주의 깊게 뭔가 본인이 원하는 걸 찾아보면 된다. 그럼 좀 더 리얼한 걸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영화와 현실 사이엔 그런 차이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현실과 영화의 우열관계를 나누기 보단 평행우주라는 대등한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 같다. 하지만 결말부의 뉘앙스는 아무래도 영화보단 현실에 비중을 준 느낌이다. 영화도 현실을 위해서 있는 부분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은 현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강패와 수타라는 두 캐릭터가 대립적인 관계로 보이지만 은연 중에 서로에 대한 묘한 애정이 오가는 것 같다. 약간 가볍게 말하자면 싸우면서 친해지는 관계 같기도 하고. 그런 게 느껴졌으면 했다. 사실 더 친하게 보이는 테이크들이 더 있었다. 그런데 너무 그런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찍으면서도 배우들과 얘길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느낌은 있지만 너무 친하게 보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두 사람의 경계가 희미해지기 보단 느슨해졌을 것 같다. 둘이 너무 친해지면 그것도 너무 영화적인 거니까. 사람이 또 그렇게 쉽게 친해지지도 않지 않나.
사실 <영화는 영화다>에서 강패를 비롯한 조폭들이 현실적인 조폭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영화에서나 등장할만한 느낌이랄까. 일단 조폭 영화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조폭에 관심이 많진 않았다. 솔직히 강패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 조폭들을 만나서 취재하거나 그러지도 않았고. 한국 조폭이라기 보단 한국 영화 안의 조폭이랄까. 기존 영화들에서 묘사된 느낌들만을 통해서 설명하고 싶었던 부분들이 있었다. 룸싸롱이나 공사현장처럼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상황들이 있지 않나. 그리고 누군가를 죽여야 되는 부분도 실상 영화적으로 가져온 부분들이다. 스타 영화배우와 조폭의 부두목이란 직업을 지닌 두 사람이 서로의 삶을 동경한다는 부분이 중요했다. 개인적으론 꼭 깡패일 필요가 있고 스타일 필요가 있는지가 중요하기 보단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동경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물론 일단 영화에서 그렇게 설정을 한 이상 캐릭터 자체의 삶은 리얼하게 보여야 되는 부분이 있다. 그걸 개인적 의도에 의해서 소모시키거나 조금 사소하게 다룰 수 있는 부분은 또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설정 안에서 최대한 캐릭터의 삶을 살리려 노력했다.
그렇다면 현실보단 영화적 참고 사례를 물어야 할 것 같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태양은 가득히>와 <무간도>가 떠올랐다. 두 남자가 각자 살아보지 못한 서로의 삶을 동경하는 느낌이나 정서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그 부분을 굉장히 중시했고 영화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어차피 이건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적인 부분들을 의도적으로 차용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서 강패가 영화를 촬영하면서 겪는 일은 영화적인 부분들이 많다. 연애만 해도 수타의 연애는 현실적인 연애고, 강패의 연애는 영화적인 연애다. 바닷가에서 키스하거나 그런 전형적인 영화적 느낌들이 강패의 연애에 있다.
아무래도 두 남자가 겹쳐지는 국면의 세기가 상대적으로 그 주변부에 배치된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보다 눈에 띄기 때문에 어떤 주변 캐릭터는 간과되게 느껴질 공산도 있을 것 같다. 아까 말했던 그 연애적 형태의 대비도 본인의 의도에 비해 가볍게 여겨질 가능성도 있을 것 같고. 둘의 이야기에서 중심축을 이뤄야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데 다른 주변부의 비중이 커지면 둘의 에피소드가 전반적으로 산만해질 것 같았다. 둘에 집중시켜야 하기 때문에 일부로 키우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리고 두 남자가 서로를 통해 변화를 느끼는 지점도 있지만 각자 서로 사랑하는 여자를 통한 변화의 느낌은 부수적으로 주고 싶어서 그렇게 설정했다.
사실 결말을 배제한다면 강패는 배우로서 더 좋은 미래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엔딩은 감독으로서 캐릭터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린 셈인데 좀 가혹한 면이 있는 것 같다. 현실이 가혹한 거 같다. 현실은 잘 안 바뀌지 않나. 사람도 쉽게 안 바뀌고. 그런데 역으로 난 정말 사람들이 보다 좋은 자신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는 결정들을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런 희망사항을 영화적인 만족감으로 적용한 채 끝내고 싶었던 건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영화는 그렇게 끝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관객들은 자신의 현실에서 가능한 변화의 지점들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적인 대리만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엔딩에서 드러내는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은 현실과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안전거리처럼 보인다. 안전거리라는 표현을 해서 그런데 영화 자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 그게 때로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을 결국 한발 떨어져서 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면서 감성적으로 즐거운 느낌을 얻는 것도 좋겠지만 결국 마지막엔 이것도 영화라는 느낌을 이성적으로 감안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바람이 있었다.
드라마틱하게 흐르던 영화가 가장 노골적인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며 엔딩을 맞이하는 셈인데 한편으론 도발적이면서 그만큼 위험한 시도처럼 보인다. 허무함을 느끼는 관객도 적지 않을 것 같단 점에선 위험을 무릅쓴 선택 같기도 하고. 위험하지. 후반 작업 하면서 그런 의견들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 처음에 이야기가 출발된 지점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그 부분이 표현돼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관객들이 허무하게 느낄 수 있다는 걱정도 했다. 자칫 잘못하면 관객을 영화에 계속 참여시키다가 마지막에 가서 만든 사람만의 영화로 바뀌어버릴 수도 있는 거니까. 창작자의 화법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정서적으로 적절하게 살짝 거리를 두고 빠져 나온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수정을 많이 했다. 화면이 빠지는 타이밍이나 음악적인 부분을 고민했다. 결국 영화가 하려던 얘길 변질시킬 순 없는 거니까 강하지 않으면서도 조심스럽게 했던 거지. 그런데 결국은 객석이 좀 잘려서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안타깝다. (웃음) 그리고 사실 지섭 씨는 이 엔딩 때문에 이 영화를 결정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남는 장면은 어딘가? 개인적으론 뻘 씬도 애착이 가고 다 애착이 가지만 지환 씨와 지섭 씨가 많이 얘기했던 부분이 있다. 지환 씨는 강패를 보는 수타 입장에서 강패가 부하랑 공사장에서 가짜 액션하는 장면을 많이 좋아한다고 했고, 지섭 씨는 수타를 보는 강패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까페에서 은선이랑 둘이 차 마시는 장면이라고 하더라.
그 두 장면은 각자 캐릭터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나도 개인적으론 강패의 가짜 액션 장면이 가장 좋았다. 사실 영화를 두 번 봤는데 두 번째 볼 땐 결과를 알고 봐서인지 그 장면에선 꽤나 슬픈 느낌이 나더라. 그 시점에선 유쾌한 느낌을 주지만 그게 결과적으론 좀 슬픈 장면이다.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강패가 느끼는 영화에 대한 안타까움이 상대적으로 더해지니까.
수타는 결국 성장했고, 강패는 모든 것을 잃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지막 순간에 웃고 있는 건 수타가 아니라 강패다. 하지만 그게 이겼다는 승리의 느낌이라거나 정말 기분 좋은 만족감에서 나오는 웃음은 아니다. 되려 웃음 자체가 역설적으로 슬픈 느낌을 대변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언젠가 본인의 이야기로 연출을 하게 될 기회가 있을 거다. 본인이 주로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이 뭔가? 사람에 대한 부분이다. 인생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누구나 다 하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사람에 대해서 생각한다. 사람이 중요한 거 같고. 아마 내가 글을 쓰게 되면 그런 부분들이 영화에 반영되지 않을까. 그리고 선악에 대한 이야기도 매력이 있는 거 같다.
확실히 구분할 수 없는 경계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경계가 그렇지. 어느 상황에서는 그게 선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어느 상황에선 그게 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 미묘한 경계에선 분명한 긴장감이 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선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스릴러를 많이 좋아하기도 했었고. 물론 공포 빼곤 대부분 좋아하지만. 공포영화는 무서워서 잘 못 본다. (웃음)
첫 영화였던 만큼 지나고 나서 느끼는 아쉬움도 있을 것 같다. 많지. (웃음) 지금은 무대인사 다니느라 바쁘지만 무대인사 끝나고 이제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기다리고 있다. 사실 빨리 혼자 있고 싶다. 물론 그 전에 무대인사를 열심히 다니고 싶고. 그 이후로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되면 내가 찍은 영화에 대해서 내 스스로 다시 한번 공부해봐야 될 거 같다. 어떻게 찍었으면 더 좋았을까라는 부분, 아쉬운 부분들은 왜 아쉬운지, 그런 부분들을 공부해야 개인적으로 영화가 마무리될 거 같다.
영화는 개봉했고 첫 번째 작품은 본인의 손을 떠났다. 기분이 어떤가? 홀가분한 느낌도 있고, 일단 배우들과 함께 무대 인사 열심히 다니면서 잘 되길 빌어야지. 그리고 빨리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 (웃음)
강패(소지섭)와 수타(강지환)라는 이름은 깡패와 스타에 대한 노골적인 직유지만 동시에 현실과 영화에 대한 은밀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는 영화다>는 그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리얼리티를 구사하려 하지만 카메라의 슛이 들어가고, 슬레이트를 내려치는 순간 현실의 탈을 쓴 프레임의 파편으로 변질된다. <영화는 영화다>는 제목 그대로 현실을 넘어설 수 없는 영화적 한계에 대한 인정, 혹은 현실이 이룰 수 없는 영화적 선언처럼 보인다.
강패는 공갈과 납치, 심지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깡패다. 그는 종종 홀로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는다. 그가 보는 영화 속에는 칼부림하는 깡패들의 액션이 멋있기만 하고, 심지어 칼에 맞아 죽어가는 주인공의 모습마저도 어딘가 숭고하다. 어느 날, 강패가 관리하는 단란주점에 신작 영화를 찍는 감독과 배우들이 찾아온다. 그 중 유명 영화배우인 수타의 팬이라는 강패는 우여곡절 끝에 수타에게 싸인을 받지만 수타는 강패에게 쓰레기처럼 산다며 빈정거린다. 하지만 곧 수타는 강패를 통해 자신의 연기적 허세와 다른 진짜 기세를 느끼게 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인연이 얽혀 들어가는 그 지점에서 영화는 고조된다.
영화 속에서 깡패를 연기하는 수타는 강패를 한낱 쓰레기 취급하지만 현실에서 진짜 깡패인 강패는 수타에게 흉내조차 잘 못내는 주제에 주인공 행세하는 건 운이 좋은 것일 뿐이라며 받아친다. 서로의 반대편에서 상대에게 조소를 보내는 두 남자는 아이러니하게 점차 상대의 영역을 동경한다. 수타와 강패의 동선이 교차를 거듭할수록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지고 종종 상대의 경계를 침범하기 시작한다. 수타에게 강패의 언어는 실제로 도달하고 싶은 실존의 대화고, 강패에게 수타의 언어는 언젠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대사다. 강패가 현실에서 내뱉은 문장을 대사처럼 따라 하는 수타와 수타가 읊은 대사를 현실의 대화에 삽입하는 강패는 서로를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불분명한 진창으로 끌어들인다. 강패와 수타의 비극은 각각 그 경계를 넘으려는 찰나에서 발생한다.
‘진짜 싸우는 거라면 하겠다’는 강패와 ‘영화란 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수타는 엄연히 다른 세계의 구성원이지만 두 사람은 거울의 구도로 서로를 비추는 닮음의 형태와 같다. 가짜와 진짜로서 영화와 현실에서 빛과 어둠처럼 존재하던 두 사람의 육체가 하나의 영역에서 뒤엉킬 때 <영화는 영화다>는 강렬하게 진동한다. 상대방에게 품은 애증을 격발하듯 상대에게 내뻗는 주먹과 발길질은 반대편의 영역을 향해 옮겨진 한발처럼 서로를 잡아당긴다. 반복되는 테이크 안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는 강패는 현실을 지워나가기 시작하고, 강패를 비아냥거리던 수타는 현실적 주먹에 얻어맞으며 영화적 한계를 체감한다. 점차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서로를 마주보고 빙글빙글 돌던 두 남자가 자리를 맞바꾸듯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고 서로에게 동화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영화다>는 철없던 어른아이의 거친 성장기이자 고독한 아웃사이더의 덧없는 호접몽이다. 영화 속 가상에 도취돼 세상을 만만히 내려보던 수타는 현실의 주먹에 얻어맞은 뒤에야 자신의 현실을 둘러보기 시작하고 카메라 앞에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던 강패는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을 더욱 절감한다. 결국 영화와 현실은 서로를 침범하지만 그 경계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종래에 뻘밭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두 남자의 얼굴은 진흙이 잔뜩 묻어 누가 누군지 분간이 안될 지경이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건 수타나 강패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결국 그건 결국 영화고, 주인공은 끝내 일어선다. 현실에 짓눌려서는 안 되는 것이 영화라면 영화의 망상을 경계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결말에 다다라 피칠갑을 하고 수타를 바라보는 강패의 날카로운 눈은 궁극적으로 어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마치 객석을 응시하듯 교묘하다. 만약 어떤 관객이라도 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강패로부터 매력을 느낀다면 결국 엔딩이 밀어내는 객석과 스크린의 거리감을 외면해선 안 된다. <영화는 영화다>는 결국 자신의 영화적 육체를 통해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 마주본 관객을 도발한다. 네 눈이 카메라야, 잘 찍어. 극 말미에 강패가 수타를 향해 던지는 이 ‘대사’는 수타를 매개로 영화 그 자체에 던지는 선언이다. 현실과 영화는 대립적이면서도 상호적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현실이고, 영화는 영화다. <영화는 영화다>는 결코 일치할 수 없는 현실과 영화의 경계에 대한 애증 어린 시선을 도발적으로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