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드는 연쇄아동살해사건이 발생한다. 대통령이 직접 경찰청을 방문해서 범인 검거를 독려할 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지대하다. 덕분에 경찰 조직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총력을 기울이던 중, 유력한 용의자가 검거 현장에서 경찰의 오발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게 전전긍긍하던 수뇌부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한다. 진범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범이라 위장시킬 만한 대체자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의 연출자로 낙점된 건 광역수사대 에이스로 꼽히는 최철기 반장(황정민)이다.
제목 그대로 경찰과 검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부당거래와 정경유착을 소재로 둔 범죄영화 <부당거래>는 먹이사슬처럼 얽힌 캐릭터들이 벌이는 첨탑 쟁탈전과 같은 영화다. 광역수사대의 에이스로 꼽힐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침에도 경찰대 출신의 동기에게 밀려 번번이 승진 심사에서 탈락하는 최철기를 축으로 진전되는 <부당거래>의 서사는 최철기에게 빌붙어서 불법을 자행하면서도 처벌을 면하는 사업가 장석구(유해진), 뇌물공여를 비롯한 정치적 공작까지 서슴지 않는 비리검사 주양(류승범)을 통해 극적 개연성의 너비를 넓혀나간다. 공생과 적대를 오가는, 겉과 속이 다른 제각각의 인물들은 저마다 몸담고 있는 조직의 직업윤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공적인 상징성을 환기시킨다.
<부당거래>는 기초적으로 시나리오 자체의 완성도가 예상되는 작품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원작자인 동시에 자신의 원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완성한 <혈투>의 연출자인 박훈정의 시나리오에 기초한 <부당거래>는 류승완의 연출력에 앞서서 주목해야 할 <부당거래>의 초석이었을 것이다. <부당거래>는 다층적인 캐릭터 구조와 다단한 플롯을 품고 있음에도 내러티브의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매듭을 묶고 풀어내듯 감정의 결자해지가 확실한 작품이다. 검찰과 경찰, 그리고 기업 스폰서와 언론의 공생관계를 엮어내는 <부당거래>는 그 불미스러운 관계의 이면을 탁월하게 살피며 이야기로서의 흥미를 높이는 동시에 사실적 폭로로서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한다.
액션 연출의 대가로 분류되던 류승완이 탄탄한 시나리오가 예상되는 <부당거래>를 통해 기승전결의 완곡을 조율해내는 연출력을 선보이고 있다는 건 발견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한 사안일 것이다. <부당거래>는 액션이라는 장기에 묶여있는 것처럼 보이던 류승완의 입지를 새롭게 인식시켜줄 대전환과 같은 작품이다. 류승완 특유의 호쾌한 액션 시퀀스를 대체하는 건 우위를 점하려는 캐릭터들의 치열한 공방전이다. 또한 그 치열한 공방을 통해 각축을 거듭하는 관계의 우위는 대회전을 이루는 상황을 연속으로 이어지며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내는 동시에 스토리텔링에 활기를 주입한다. 물론 주연과 조연을 막론한 배우들의 열연은 이 모든 결과물의 배후이자 근본적인 자질로서 유효하다.
무엇보다도 <부당거래>가 흥미로운 건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든 상황이 풍자로서의 기능성을 발휘하는 우화처럼 보이는 동시에 극대화된 리얼리즘의 산물처럼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흉악한 범죄가 벌어지는 사회 속에서 권력의 종용을 이기지 못한 채 진실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고 수사의 종결을 위해 사건을 위조하는 경찰, 사회적 정의를 위해 법을 집행하기 보단 법적 해석을 자신의 권력으로 삼아 자본에 결탁한 채 범법을 자행하는 검사, 그리고 이들과 결합해서 사회적 정의를 짓밟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는 기업가, 그리고 이 일그러진 구조에 기생해서 진실을 왜곡하고 사건을 조장하는 언론까지, <부당거래>는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고 의심될 만)한 거대한 부조리를 통렬하게 겨냥한 폭로극과 같은 작품이다. 만약 <부당거래>를 보고 대한민국 사회 현실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데자뷰를 발견한다면 그건 착시일까. 하지만 당신의 데자뷰에는 죄가 없다. 단지 영화가 현실을 못 따라갈 뿐.
“대통령은 일개 개인이 아니라서 (개인적인 처신까지도) 국민적 동의와 수반적 회의를 거쳐야 하거든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등장하는 대사는 일면 의미심장하다. “국민의 손과 발이 되겠다”던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대통령은 국민을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자 전국민적 동의를 등에 업고 대표성의 권위를 등에 업은 권력자다. 그만큼 대통령은 어느 개인으로서의 삶을 전면에 내걸 수 없는 대의적 존재로서 의무를 지닐 때 그만큼의 권력을 함께 보장받는다. 그리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국민적 동의를 통해 절대적 권력을 얻었다는, 그 대통령에 관한 드라마다.
사실 대통령이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단순히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닌, 대통령을 중심에 둔 영화라는 점에서 전례들과 차별화 될만한 작품이다. 또한 대통령이라는 직책으로부터 행사되는 업무적 고뇌를 벗어나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아우라에 감춰진 개인적 인간미를 조명한다는 것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궁극적 방점이다. 어쩌면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근래 두 전임대통령의 부고를 겪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특별한 감상을 부를 만한 시의성을 두른 작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대통령의 임기 교체 과정을 이어나가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세 대통령을 둘러싼 세 가지 사건을 형식적 단절을 생략한 상태로 접붙인 옴니버스적 장편이다.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로또 1등에 당첨된 김정호(이순재), 젊고 잘 생긴 최연소 대통령 자리에 올라 국책을 수행하던 중, 한 청년의 개인적 바람 앞에서 갈등하게 되는 차지욱(장동건), 그리고 건국이래 최초로 여성대통령이 됐지만 남편 최창면(임하룡)의 돌발적 행동으로 곤혹을 치르게 되는 한경자(고두심)까지, 세 번의 정권교체 속에서 세 대통령이 겪게 되는 큰 사건들을 서사적으로 나열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그 주요한 사건을 통해 대통령이라는 틀에 감춰진 인간을 발췌하려 한다.
사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대통령으로서의 공무적 현실성을 추적하는 작업이 아닌, 대외적 바람이 투영된 이상적 이미지즘에 가깝다. 공무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통령의 사소한 에피소드는 직책에 가려진 개인을 환기시킨다. 대통령이라는 공적 범위와 충돌을 일으키는 개인적 범위의 사연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대한 뿌리깊은 관성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 위한 도발과도 같다. 독재의 역사와 더불어 제왕적 이미지를 뿌리깊게 내린 기존의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현실적 권위를 한 꺼풀 벗겨내기 위한 허구적 작업과도 같다. 소박하고 진솔한 대통령들을 연이어 묘사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인간적이란 언어와 괴리감을 이루는 대한민국 대통령들과 차별화된 대리적 만족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고의적 판타지다.
현실에서 사실상 좀처럼, 어쩌면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대통령들이 등장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일종의 희망사항이거나 허구적 대리만족에 가까운 작품이다. 대통령의 비현실적인 미담을 연이어가는 건 현실적 가치관을 역설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에 가깝다. 현실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이상을 영화적으로 대리 만족시킨다는 미덕이 발생한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지나치게 강박적인 영화다.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들뜬 기분을 죽이지 못한 채, 매 사연을 안이하고 평이한 해피엔딩으로 그려내기 위해 작위적인 미소를 짓는 느낌이다. “굴욕의 역사는 있어도 굴욕의 정치는 하지 않소.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마쇼.”극중 2번째로 등장하는 최연소 대통령 차지욱의 혈기왕성한 발언처럼, 때때로 과도하게 격양된 국가적 자부심을 웅변하거나, 매 에피소드마다 내재된 개별적 클라이맥스에서 과장된 음악을 삽입하며 감정적 고양을 조장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은 마치 ‘인간적’이란 용어를 대변하는 이상적 롤모델로서 묘사되기 위해 동원된 이미지로서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이란 친서민적이거나 자기헌신적인, 혹은 일탈적인 일상을 꿈꾸는 대통령을 나열하기 위한 수단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마치 소재에 대한 강박에 눌려 창작적 태도를 발전시켜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마냥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미지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한 발 나아가지 못한 인상이 느껴진다는 건 분명 아쉬운 지점이다. 동시에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재기발랄함과 치기어림이라는 취향적 호불호로서 명확한 팬덤을 두르던 장진의 영화란 점을 염두에 두자면 그 특이성을 거세한듯한 코미디와 평이한 이야기 전개를 연출한다는 건 작가적으로 일면 아쉬운 지점이다.
물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나름대로 대중적 호응을 얻을만한 코미디적 감각을 품고 있는 동시에 시대적 위무를 가능케 할만한 기능적 역할이 뚜렷한 작품이다. 예술이 현실 안에서 누릴 수 없는 꿈을 대변하는 기능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이상적 태도는 인정할만한 구석이 있다. 장진이라는 개인적 범위의 퇴보적 결과물이란 평을 떠나 <굿모닝 프레지던트>라는 영화가 지닌 대중적 고려는 시대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구석이 있다. 다만 그 판타지가 현실을 대변한다고 파악한다면 곤란하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대통령에 대한 현실적 이면이 아니다. 말 그대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공익적인 우화일 뿐이다. 타인을 짓밟고 권위를 누리는 현실의 뻔뻔한 누군가들과 결코 무관한 이상적 대통령들이 사는 그곳은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아니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어쩌면 볼 수 없는 세 명의 대통령이 등장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명백한 판타지다. 장동건과 같은 오로라적 외모를 지닌 대통령이 존재한다는 가설만으로도 이미 명백한 판타지지만 전임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을 격려하는 그 세상은 이미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아닌 거다. 그렇다고 그것을 손가락질할 필요는 없다. 때로 영화란, 혹은 예술은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혹은 보고 싶어하는 것을 묘사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렇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우리가 꿈꿀만한 거짓을 현실처럼 위장한 영화다. 특히 올 한 해 두 명의 전임 대통령을 잃은 우리에게 뼈에 사무칠만한 감상을 부를 정도로 ‘인간적’인 대통령을 그리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분명 우리가 보고자 하는, 혹은 봤으면 싶은 이상적인 지도자들을 나열한다. 그 판타지가 때때로 과잉적인 감정을 유발하고 지나치게 전형적인 타입의 이상을 그려나감에도 감히 그것이 잘못 됐다 말하기 힘든 건 그 때문이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분명 어느 정도 위안이 될만한 손길로서 기능하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다만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장동건의 코믹 연기를 볼 수 있는 영화이기 이전에 장진이라는 네임밸류를 걸고 나온 작품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일면 아쉬움이 남는다. 전형적인 예상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수순으로 나아가는 소동극의 양상은 장진 영화라고 부르기에 지나치게 평범하다. 물론 현실정치에 던지는 발언이 미묘하게 감지되는 가운데 대중적 공감대를 이룰만한 코미디 연출은 무난한 웃음을 부를만한 것이다. 그러나 재기발랄함이건, 치기어림이건, 취향적인 호불호를 감안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감각적으로 낡은 영화다. 세 대통령의 임기 중 굵직한 세 사건을 각각 나열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마치 인터미션이 없는 연극 세 막을 연달아보는 것과 같은 옴니버스적 장편영화다. 매 에피소드마다 나름의 클라이막스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나름의 특이성을 확보하지만 그 순간마다 과잉된 음악으로 감정적 공감대를 자극하려는 영화의 태도는 오히려 소재로부터 발생하는 기본적 흥미를 반감시킨다. ‘인간적인 대통령’이라 제시되는 세 인물의 성격 또한 지나치게 보편적이다. 주제나 소재의 압박에 작가적 취향을 양보한 인상이다. 때때로 절묘한 소동극을 자아내긴 하지만 해피엔딩을 직조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 경직된 스토리는 대통령 훈화를 듣는 것만큼이나 식상하다. 지나치게 공익적 의무에서 자유롭지 못한 느낌이랄까. 무엇보다도 대중적 평준화를 지향하는 장진 영화는 호불호의 기준을 떠나 분명 심심한 일이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정말 그것이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찌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말이기도 하다. 다수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때때로 전체적인 관습처럼 오용되어 개인의 특수한 취향을 제한하고 보편적 권리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강압으로 작동한다. <날아라 펭귄>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폭력들을 드라마투르기로 엮어낸 작품이다. 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4번째 영화 <날아라 펭귄>은 다양한 감독들의 옴니버스로 구성된 시선 시리즈들과 달리 임순례 감독에게 전권을 위임한 첫 번째 장편 인권위 영화이기도 하다.
교육열이 대단한 엄마(문소리)덕분에 과도한 스케줄에 시달리는 아들 승윤이(안도규)는 자상한 아빠(박원상)를 통해 종종 출구를 찾는다. 구청에서 일하는 엄마의 직장에선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못 마시는 신입사원 이주훈(최규환)이 들어와 상사들의 공분을 산다. 그런 부하직원들을 아래에 둔 권과장(손병호)은 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난 자식들과 이를 돌보기 위해 함께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기러기 아빠다. 그리고 황혼에 접어든 권과장의 아버지 권선생(박인환)은 뒤늦게 제 삶을 찾겠다는 아내 송여사(정혜선)의 선언에 분개한다.
<날아라 펭귄>은 가정에서 사회까지,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 내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가치관의 불협화음을 전시하는 동시에 개인적 범위의 삶을 옥죄면서도 무분별하게 방치된 부조리를 들춘다. 영어교육열풍 속에서 지나친 학습량을 요구당하는 초등학생 아이와 이를 강요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고단함, 자녀의 교육 때문에 아내마저 외국에 보내고 홀로 국내에 남아 뒷바라지를 하는 아빠의 고독은 이 땅에서 무분별하게 방치되는 개인들의 비극이나 다름없다. 삼겹살과 소주 회식에 어울리지 못하는 신입사원의 식성을 다수의 취향에 반한다며 비정상적 존재라 치부하거나 반평생을 순종하는 아내로서 살아오길 강요했던 남편이 뒤늦게 제 삶을 즐기겠다는 아내의 변화에 발끈하는 풍경 역시 부조리한 관습 안에서 주도권을 차지했던 이들의 폭력적 관성이다.
<날아라 펭귄>은 에피소드로 분절된 시선 시리즈와 달리 장편으로 제작됐지만 사실상 4개의 단편 에피소드를 유기적으로 이어 붙이듯 구성됐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유사한 형태를 감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일관된 관점을 유지시키며 에피소드를 나열함으로써 주제의식을 진전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적인 조직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관행들을 열거하고 문제의식을 축적해나간다. 하지만 <날아라 펭귄>은 날을 세운 주장보단 유연한 드라마로서 문제의식을 아우른다.
가정과 직장의 형태를 그대로 반영한 영화의 풍경은 일차원적인 실생활의 단면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분히 현실적이다. 동시에 그 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사건들은 평면적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문제의식을 관통하되 유연한 드라마로 극적 흥미를 돋운다. 다만 지나치게 현실성을 반영한 플롯을 나열하는 <날아라 펭귄>이 기존의 시선 시리즈에 비해 창의성이 떨어지는 평면적 기획이라 이해된다는 점은 아쉬움을 부르는 측면이다. 하지만 보다 선명한 현실적 문제의식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날아라 펭귄>의 성과는 분명하다.
사실 <날아라 펭귄>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문제들은 사회가 개인들의 불행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엄마가 아들의 영어교육에 고단할 정도로 관심을 쏟아야 하고 자식들과 아내를 외국으로 보내며 홀로 고독한 생활을 감당하는 아빠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개인들에게 그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영어교육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입장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빠의 반목은 개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적 불행이라기 보단 사회적 시스템이 이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해주지 않고 개인의 몫으로 방치하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다.
암묵적인 규율처럼 굳어진 집단적 논리는 개인의 권리와 취향을 손쉽게 무시하고 억압한다. 이런 부조리한 조직적 풍토는 사회 전반적인 조직 문화를 장악하고 개개인의 스트레스를 축적한다. 전체라는 이름으로 의무화된 조직적 강압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발언권을 축소시킨다. 소주 한잔 못하거나 2차 회식에 동참하지 않는 이를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몰락시킨다. 개인의 선택권을 전체라는 이름 아래 무시하는 풍토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하위 일방적인 명령체계로 위계질서를 강화하고 업무적인 창의성마저 떨어뜨린다. 결국 이는 잠재적인 충돌과 갈등 자체를 무마시키고 조직의 부조리를 더욱 강권하게 다져나간다는 점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인 스트레스를 심화시키면서 개개인의 행복을 억압한다.
비극으로부터 개개인을 구출하는 방법이란 개개인들의 성찰과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개별적인 숙성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작은 변화들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적 풍토의 변화를 통해 큰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날아라 펭귄>은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불행이 무엇에서 야기되는가를 드러내는 영화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의 형태들은 문제의식을 떨어뜨리지 않는 동시에 그 현상들을 목격할 수 있는 끈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날아라 펭귄>은 분명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개개인을 불행한 일상에 방치하는 사회적 부조리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포자기한 채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보다 나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아주 작은 변화를 통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날아라 펭귄>은 그 작은 행복을 위해 가능한 변화들을 말하는 영화다. 지금 우리가 꼭 인지해야 할 가능한 변화들을 말한다.
활강, 도약, 비행, 착지로 이뤄지는 스키점프의 과정은 기승전결의 과정이다. 높은 스키점프 대를 신속하게 미끄러져 내려온 뒤, 하늘로 붕 떠올라 멀리까지 날아가서 사뿐히 내려앉는 스키점프는 그 짧은 과정만으로 드라마틱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국가대표>는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의 실화로부터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추출하는 영화다. 동계올림픽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서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이 일궈낸 현실을 발판으로 삼아 허구를 도약시킨다.
유년 시절 미국으로 입양된 밥(하정우)은 ‘알파인 스키’미국국가대표 자격을 버리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온다. 방송을 통해서까지 어머니를 수소문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 밥에게 그의 전력을 아는 방 코치(성동일)가 찾아와 국가대표 스키점프 선수 자리를 제안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나를 미국에 삼천만 원에 팔아 넘겼다”고 말하는 밥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방 코치의 답변이 정곡을 찌른다. “너도 이용하라고, 대한민국.”밥의 마음이 움직인다. 비로소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단이 위용(?)을 갖추기 시작한다.
밥과 함께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를 구성하게 되는 나머지 4명의 청년들은 저마다 굴곡이 깊은 사연을 품고 있다. 학창시절, 도 대표 알파인 스키 선수로 활약하며 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지만 약물복용사실이 발각되어 수상 자격을 박탈당한 흥철(김동욱)과고깃집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권위에서억눌리듯 살아가지만흥철의 팀 동료로서그와 함께 메달을 박탈당했던 알파인 스키 선수 출신재복(최재환)이 선수단에 참여한다. 그리고나이든 할머니와 정신지체 증상이 있는 동생 봉구(이재응)를 돌보며 힘겹게 살아가지만 입영 날짜를받아들고 고민하는청년 가장 칠구(김지석)가 선수단에합류한다. 청년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두고 방 코치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군대를 면제받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기 위해서,심지어 한 눈에 반한 여자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국가대표를 허락(?)한다.
스키점프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에서 스키점프 국가대표로 발탁된 5명의 선수들은 세계와 맞서기 전에 열악한 국내 실정 안에서 고군분투한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노리는 무주의 스키점프 시설 공사장 주변에서 먼지를 마시며 러닝을 하거나 폐쇄된 놀이공원 후룸라이드를 스키점프대로 직접 개조하면서 연습을 거듭하는 모습은 그 이미지 자체만으로 고생스럽다.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멤버들의팀워크를 다져나가는 과정에서 개개인 간의 갈등이 도출되고 내분이 발생하며, 심지어외부에서 돌출된 알력으로 선수단이 와해될 위기를 연출하기까지 하는 국가대표단의 상황은 오리무중의 연속이라 구차하기 짝이 없다.
지나치게 쉽게 진전된다는 인상을 부여하는서사 속에서 헐거운 이음새를 종종 노출하곤 하는 <국가대표>가 뛰어난 이야기적 자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선수들의 개별적인 사연들은 지극히 상투적인 드라마의 개연성 위에 각자 자리를 잡은 채 계산적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저마다 착지하고자 하는 감정적 목표가 확실한 영화 속 사연들은 때때로 개연성을 보장할만한 경사각을 구축하지 못한 채 무리수를 두고 단독질주를 감행하며 각기 미끄러져 내려가는 탓에 전체적인 호흡을 어지럽힌다.결국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연들이 각자 내달리는 탓에 각자의 사연이 저마다의 지점에서 선전하지만 궁극적으로 총합적인 이야기의 스코어를 깎아먹는다. 그럼에도 그 스토리를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건 상투적인 예감에 미묘한 오차범위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유머의 순발력과 실화라는 원천적 동력이다. 지극히 계산적인 진지함을 연출하곤 하는 사연을 유연하게 중화시키는 입담이 구사되고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여유를 끼워 넣는 배반적 설정이 상투성을 둘러싼 사건을 순발력 있게 대체한다.
가장 확실한 밑천은 실화다. 실화를 밑그림으로 허구를 덧칠함으로써 가산점을 획득하고 감점을 얻었지만 사실상 현실이라는 원색이 환기되는 결말부에 다다라 그 모든 스코어는 무의미해진다. 비인기종목의 서러움과 지정학적 편견, 열악한 제반 조건을 이겨내고 올림픽 무대에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낸 선수들의 땀과 눈물을 압축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절대적 질량이 현실적 기반 위로 부피를 확보한 드라마의 허구보다도 효과적인 페이소스를 발생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열악한 현실 자체가 품고 있는 페이소스의 자질이 스포츠 영화로서의 쾌감에 정당한 상승을 부여하며 허구에 가속력을 부여한다. 특히 <국가대표>는 스포츠 영화로서 앞선 어떤 전례보다도 탁월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스키점프 신은 앞서 덜컹거리던 드라마의 단점을 잊게 만들 만큼 압권의 쾌감을 선사하고 성기게 진전되는 허구 속에서도 서서히 숙성되던 마이너리티적 감수성을 일거에 폭발시킨다. 마치 스크린을 통해 스키점프 경기를 단체관람하고 있다는 착각을 부를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는 스키점프 신은 직선으로 내리 뻗은 스키점프 대를 타고 내리는 활강의 속도감과 도약의 쾌감, 그리고 비행의 체공감과 착지의 성취감을 고스란히 이미지로 구현한다. 스키점프 신의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 감정적 오르내림을 선사하는 기승전결의 압축적 이미지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캐릭터들의 고군분투를 정당하게 보상하는 신이란 점에서도 매끄러운 인과 관계가 발견된다. 서사와 묘사의 연동이 매끄럽다.
실화라는 질량을 유지한 채 허구의 부피를 늘려나가고 그 가운데 느슨해지는 드라마의 밀도가 발견되지만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질량을 보존하는 실화의 묵직함이 영화적 감수성을 보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그랬듯, <킹콩을 들다>가 그것을 복기했듯, <국가대표> 역시 실화에 밑진 영화다. 유머가 적절히 곁들어진 신파를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 나열해도 궁극적으로 현실을 대변하는 자막 한 줄의 위력에 닿지 못한다. 여전히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5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환기시키는 엔딩의 한 줄 자막이 <국가대표>가 부지한 2시간 여의 러닝타임보다도 위력적인 울림을 전한다. 헝그리 복서에 대한 기억이 낡았을 뿐, 대한민국은 여전히 촌스러운 마이너리티의 신파가 산재하는 세상이다. 경제적 지표를 자랑스럽게 전시하면서도 먹고 사는 문제에 촌스럽게 매달리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스포츠 루저들을 양산하고 영화는 이를 착취한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 루저들을 ‘자랑스럽고 무궁한 영광’에 도매금처럼 팔아먹지 않는 <국가대표>는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공정한 스포츠 신파라 인정할만하다.
해마다 올림픽에서 10개 이상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순위권을 자랑하는 스포츠 강국 대한민국의 현실은 실상 생존 레이스 위에서 착취당하는 열악한 비인기종목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킹콩을 들다>는 대한민국이라는 좀스러운 현실을 담보로 둔 신파 기획물이다. 주연은 스포츠, 조연은 대한민국. 소박한 시골 소녀들의 표정을 통해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로서의 구색이 명확하기도 하지만 촌스러운 한국적 배경을 활용하는 능력이 그만큼 효과적이라 말할 수 밖에 없다.
88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 사냥에 실패한 역도 동메달리스트 이지봉(이범수)에게 동메달은 애증에 가깝다. 결과가 과정을 무색하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 이지봉은 역기를 잡을 수 없는 몸으로 방황하다 보성의 역도부 선생으로 정착하곤 영자(조안)를 비롯한 소녀들을 만나 역도를 가르친다. 타인에게 멸시당하거나 자신감을 상실해버린 존재들이 만나 이루는 신파의 앙상블은 그것이 지독하게 닳고 닳은 스토리건 플롯이건 따져 묻는 입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효율적인 웃음과 눈물의 재료가 된다. <킹콩을 들다>는 눈물과 웃음을 다져 넣고 팔팔 끓인 뒤 비극을 첨가하고 희망이란 그릇에 담아 관객 앞에 내놓는, 먹히는 신파다. 신파는 나쁜 게 아니다. 다만 신파를 불순하게 만드는 환경이 나쁘다. 시대착오적인 건 영화가 아니라 여전한 세상이다. <킹콩을 들다>는 그 열악한 환경을 영화적 감정으로 치환했을 뿐이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한, 그 현실을 담보로 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팔리고 또 팔릴 만한 신파의 재료로서 유효할 따름이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이 길을 선택하는 순간, 너희는 많은 것을 잃게 돼.”각오와 경고가 한 몸에 담긴 언어가 필사적인 절박함을 드러낸다. 영광보단 고난을 명확히 관통하는 스승의 언질 앞에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피땀 흘린 노력의 과정이란 성공이란 방파제를 쌓지 않고서야 쉽게 허물어질 모래성 같은 영예나 다름없다. <킹콩을 들다>는 역도선수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과 금메달에 도전했다 동메달에 머무르고 부상까지 얻은 비운의 역도선수의 삶을 사제라는 관계에 뒤엉켜 넣은 신파다.
금메달에 도전했다 실패한 동메달리스트 이지봉(이범수)은 심각한 부상과 잠재적 질병까지 진단받은 후, 역기를 놓고 은퇴한다. 그에게 동메달이란 애증의 영광이며 무관의 짐이나 다름없다. 1등을 놓친 3등은 예선탈락보다도 더욱 비참한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런 어느 날, 매일 노역을 통해 밥벌이를 하던 그에게 전직 국가대표 감독이자 옛 스승(기주봉)이 찾아와 제안을 던진다. 보성의 여자중학교에서 역도를 교육시킬 것을 권한다. 마지 못해 보성으로 내려간 이지봉은 한적하게 낚시나 하며 시간을 죽이려던 중 역도에 관심을 보이는 모종의 소녀들을 만나고 점차 그네들에게 마음을 연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제 때 밥을 챙겨먹지 못하는 영자(조안)가 눈에 밟힌다. 점차 새로운 결심이 생긴다.
<킹콩을 들다>는 스포츠 영화의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한없이 여리디 여린 신파의 마음을 품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킹콩을 들다>는 단지 스포츠 도전기라는 페어플레이 정신만으로 몸통을 이룰 수 없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다시 한번 들추는 스포츠 신파다. 가난하거나 촌스러운 시골의 고학생들이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채 구타와 욕지거리를 견디며 세워 올린 스포츠 강국의 ‘7전8기’적인 전설적 외피의 속살에 담긴 피와 땀의 잔인한 내면이 공분을 부르고 그 안에서 학대 받는 학생들의 눈물과 신음을 페이소스로 건져 올리는 공식적인 신파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처우가 열악한 대한민국의 속성을 극복한 여성들의 연대기란 점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상시키는 바도 없지 않다. 최고가 되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는 현실이 금메달에 대한 집착과 영광에 대한 속박으로 드라마를 이끈다.
열악한 환경을 무시하듯 엘리트 체육의 금메달 지상주의가 득세하는 국내 체육계의 현실은 스포츠 신파를 위한 좋은 먹잇감이나 다름없다. 연금을 보장하는 금메달에 목숨 걸지 않고선 버틸 재간이 없는 비인기종목 스포츠 선수들의 현실은 스포츠강국 대한민국의 얄팍한 신화를 지탱하는 열악한 기자재다. 아이러니하지만 21세기가 지나도 이런 기자재가 꽤나 쓸만한 소품이 된다. 먹히는 신파를 만드는 도구가 된다. 이건 시대착오적인 영화가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영화의 현실이다. <킹콩을 들다>는 이 열악한 시대에 담긴 근본적 자질이 노골적으로 활용된 현실적 신파다. 가녀린 소녀들의 몸에 구타의 이미지를 새겨넣고 가난한 루저의 슬픔을 묘사하면서도 중간중간 소박한 웃음을 매복하는 <킹콩을 들다>는 정직하다기 보단 적확한 기획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허구를 채워 넣은 드라마의 완성도가 빼어난 건 아니지만 분노가 자각되고 슬픔이 인정되는 수순을 거칠 때 <킹콩을 들다>는 효과적인 신파의 탈을 쓰고 객석을 공략한다. 배우들의 열연도 볼만하지만 가장 큰 볼거리는 여전히 촌스러운 대한민국이다. <킹콩을 들다>는 그 촌스러운 현실의 열악함을 영화적 감정으로 치환하는, 얄팍하지만 효과적인 신파인 셈이다.
불법체류자 신분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동네 주민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적 단면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의 무능력한 마초이즘은 때때로 자신의 영토를 침입한 이방인들에 대한 공격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로니를 찾아서>는 어느 치졸한 마초의 체험을 통해 적나라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극적 재미를 진전시키는 영화다. 인호(유준상)가 뚜힌(로빈 쉐이크)과 함께 로니(마붑 알엄 펄럽)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그린 영화는 버디무비와 로드무비의 조합을 이룬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사회적 시선을 견지한 극적 연출이 인상적이다. 다만 문제의식을 발견할 뿐 어떤 결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남자의 변화를 관찰할 뿐이다. 인호의 변화는 결국 한국남자들, 더 넓게는 한국사람들의 가능한 변화를 설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정치적 주장보다도 설득력 있는 사연이 귀엽고 즐겁게 전달된다. 물론 인호가 로니를 찾아가는 여정은 일면 무모한 희망처럼 보이고 목적성도 흐릿하다. 하지만 그 여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 무모한 희망에 동참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로니를 찾아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동시에 한국어에 유창한 불법체류자 외국인들의 모습은 기이한 구경거리처럼 보인다.
유승준은 훈련소가 아니라 공항으로 향했다. 미국 시민권을 방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설마 했지. 더 이상 대한민국이 돌아올 수 없는 땅이 될 줄이야. 건강한 청년 유승준이 하루아침에 대국민 사기꾼 스티붕 유로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20대 문턱을 갓 넘은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입대영장은 피할 수 없는 무덤이다. 군대 면제자를 신의 아들이라 부르는 거 보면 대략 사이즈 나오지. 그렇게 군대에 끌려간 청년들이 이등병 개갈굼을 거쳐 짬밥 먹고 침상에 누워 말년병장까지 렙업된 후, 사회로 탈출하면 무덤은 성역이 된다. 영장이 지옥의 문이라면 제대는 훈장이다. 군대 안 나온 남자는 술자리에서 제물이 된다. 그런 마당에 유승준은 1등급 제물이다. 최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는 유승준이 여전히 뜨거운 감자임을 재인식시켰다. 유승준은 용서받고 싶다고 통곡했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가운데손가락을 날렸다. 싸이도 두 번 입대했는데 훈련소 정문도 구경하지 못한 유승준은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을 수밖에. 대한민국 청년들의 보상심리가 집중포화를 이루고 여론은 금새 초토화된다. 사실 군대 가기 싫은 건 다들 매한가지, 단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 끌려가 버틸 뿐. 근데 그건 아나. 강남 부잣집 도련님 중에도 미국 시민권자는 많다던데. 근데 왜 걔들은 한국 땅 잘만 밟고 사냐고? 자, 페어플레이를 믿으십니까? 당신에게 진정 군대가 명예였답니까? 진짜? Really? You know what I am saying? 유남생?
피겨스케이팅은 대한민국에서 미지의 영토다.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에게 동계올림픽이란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이 몇 개 확보되는가가 중요한 관심사였다. 김연아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 생각이 아니다. 취재경력만 21년째이신 미국 체육기자계의 달인, ‘시카고 트리뷴’의 필립 허쉬 선생의 말씀이다. 2010년 동계올림픽이 한국인에게 관심을 끌 만한 이유가 하나 늘었다.
연아 서곡
피겨스케이팅은 얼음 위에서 하는 발레다. 손끝 하나까지도 우아하게 나빌레라. 그러나 청중의 박수로 보답되는 낭만적인 공연예술이 아니다.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매기고 합산해서 평균을 내고 발표한다. 살얼음판이다. 넘어질 때마다 감점이 따른다. 완벽한 연기를 펼쳐야 다시 무대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난 10월 23일부터 27일까지, 미국 워싱턴주 에버렛에서 열린 2008~2009 1차 그랑프리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김연아는 우승을 차지했다. 2위와의 점수차는 무려 20점이 넘었다. 그럼에도 김연아는 경기가 끝나고 말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플레이가 완벽한 건 아니었다.”우승을 차지해도 실수는 마음에 걸린다. 완벽한 연기야말로 궁극의 목표다.
대부분의 점프는 점프 직전, 전진방향에서 등(Backward)을 돌리고 이뤄진다. 점프와 회전을 마친 후, 착지할 때도 같은 상태에서 착지한다. 악셀(Axel)점프만이 전진하는 정면(Forward)을 향한 상태에서 곧바로 이뤄진다. 착지는 다른 점프와 마찬가지다. 등 방향으로 뒤돌아 착지한다. 덕분에 일반적인 점프보다 0.5회전이 많다. 트리플 악셀(Triple Axel)은 3.5회전이다. 가장 많은 회전이 이뤄지는 점프다. 성공하면 8.2점을 얻는다. 트리플 악셀이 궁극의 기술이라 불리는 건 이 때문이다. 김연아와 동갑내기인 아사다 마오는 트리플 악셀을 구사한다. 반면 김연아는 트리플 악셀을 구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김연아는 아사다 마오에게 뒤지지 않는다. 궁극의 기술은 없지만 김연아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김연아의 비상
최근 몇 년 사이 아사다 마오는 고민을 얻었다. 점프 후 넘어지거나 휘청거리지 않아도 감점을 얻었다. 그녀의 버릇 때문이다. 어느 발을 사용하는가, 어느 방향으로 뛰는가, 스케이트 날의 양 엣지(edge)가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지는가에 따라 점프는 구분된다. 점프는 총 여섯 가지로 나뉜다. 그 중, 아사다 마오를 괴롭히는 건 플립(Flip)점프와 럿츠(Lutz)점프다. 그녀를 괴롭히는 건 세 번째 항목이다. 엣지의 방향이 매번 지적 대상이다.
플립 점프와 럿츠 점프는 유사하다. 점프 직전 등을 돌아 왼발을 축으로 후진하며 밀고 나가는 동시에 오른발의 스케이트 앞날, 토(Toe)를 디딤돌로 튕기며 도약한다. 두 점프를 구별하는 건 점프 직전 축이 되는 왼발 스케이트 날의 엣지 방향이다. 점프 직전 왼발 스케이트 날이 안쪽(인사이드 엣지, Inside edge)으로 기울었느냐, 바깥쪽(아웃사이드 엣지, Outside edge)으로 기울었느냐에 따라 점프가 구분된다. 플립 점프는 인사이드 엣지다. 럿츠 점프는 아웃사이드 엣지다. 아사다 마오는 인사이드 엣지로 두 점프를 모두 소화한다. 그래서 아사다 마오의 럿츠는 ‘플럿츠(Flutz)’라고 불린다. 럿츠 같은 플립 점프인 셈이다. 일종의 눈속임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국제빙상연맹(ISU)는 점프의 채점기준을 강화했다. 플립 점프와 럿츠 점프에 있어서 엣지 사용을 엄격하게 채점한다. 아사다 마오의 채점표엔 ‘e(Wrong edge)’라는 표시가 발견된다. 표시가 쌓일수록 상위권도 멀어진다.
김연아의 또 다른 라이벌 일본의 안도 미키 역시 점프로 고역을 겪고 있다. 그녀의 경우는 반대다. 아웃사이드 엣지로 플립 점프를 뛰어버린다. 아사다 마오처럼 그녀 역시 감점대상이다. 그래서 그녀는 플립 점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거듭했다. 세 살 버릇은 여든 간다. 유년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 단기간에 고쳐질 리 만무하다. 되려 양화가 악화를 구축했다. 플립 점프 성공률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럿츠 점프까지 불안해졌다. 점프를 할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경기 운영이 그만큼 어려워졌다. 2007~2008 6차 그랑프리에서 안도 미키는 세 번이나 빙판 위에서 미끄러졌다. 안도 미키는 최종 결승전이라 할 수 있는 파이널 그랑프리에 진출하지 못했다. 무대 뒤에서 눈물을 흘렸다.
아사다 마오는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경기 운영력을 높이기로 했다. 아사다 마오가 럿츠 점프를 시도할 때마다 1점이 감해진다. 반대로 김연아는 1점이 가산된다. 점프할 때마다 2점 차가 벌어진다. 하지만 아사다 마오에겐 트리플 악셀이 있다. 정확히 세 바퀴 반을 회전하고 깔끔하게 착지하면 8.2점의 고득점을 올릴 수 있다. 아사다 마오의 트리플 악셀이 100%의 성공률을 자랑하는 건 아니다. 실패하면 되려 감점을 얻는다. 정확히 3.5회전을 돌지 못한다면 시도하지 않는 게 낫다. 성공하지 못하면 오히려 낭패다. 트리플 악셀은 0.5회전만큼의 하중과 탄력도 요구된다. 신체적 무리가 따른다. 완벽한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궁극의 기술이 악재로 돌변할 수 있다.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개최된 2007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아사다 마오는 트리플 악셀을 시도하지 않았다. 아사다 마오는 2위에 머물렀다. 1위는 김연아였다. 김연아는 아사다 마오를 5.24점차로 따돌렸다. 아사다 마오가 트리플 악셀에 성공해 8.2점을 얻었다면 그녀가 1위를 차지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성공했다면 말이다. 5.24점은 현재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숙명적인 차이다.
미스 뷰티풀
김연아의 점프는 명품점프라고 불린다. 국제빙상연맹(ISU)이 플립 점프와 럿츠 점프를 엄격히 구분해 채점하기 시작한 건 불과 지난 시즌부터였다. 이 엄격한 채점의 덫을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는 선수는 교과서적인 점프를 뛴다는 김연아뿐이다. 게다가 김연아의 점프는 높고 멀리 나아간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점프 직전 주행 속도를 줄이지만 김연아는 가속을 유지한 채 점프한다. 다른 선수보다 체공시간이 긴 만큼 회전이 선명하고 시원하게 비행한다. 트리플 컴비네이션 점프(트리플 플립+트리플 토룹)가 정확한 트리플 럿츠와 함께 김연아의 전매특허로 손꼽힌다. 우아하게 미끄러지는 이나바우어(Ina Bauer)와 연결되는 더블 악셀 역시 높게 평가된다. 최근 심사경향이 대부분의 기술요소들을 세부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은 모든 기술을 고급으로 구사하는 김연아를 유리하게 이끈다. 최근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 스케이팅 모두 컴비네이션 점프에서 가산점을 얻었다. 고득점의 기반이 됐다.
엄격한 채점 경향에 따라 김연아의 탄탄한 기본기가 빛을 보는 만큼 전체적인 경기 운영도 수월해졌다. 최근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우승한 김연아는 보다 성숙한 연기를 선보였다. 집중력이 높아졌다. 스파이럴 시퀀스(Spiral Squence)와 스텝에서 예년보다 발전된 기량을 선보였다. 스파이럴 시퀀스는 한쪽 발을 빙판에 대고 반대편 발을 엉덩이보다 높게 든 상태로 3초 이상을 유지하며 미끄러져 나가는 자세다. 김연아는 종종 자신의 스파이럴 시퀀스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했다. 단점을 극복해나가고 있다. 표현력이 한층 성숙해진 것도 관건이다. 일본방송사의 피겨스케이팅 중계진은 종종 김연아를 요염하다고 말한다. 천진난만하다고 표현되는 아사다 마오에 비해 김연아의 연기는 매혹적이다. 움직임과 시선에 격정이 나타난다. 기술적 완성도와 함께 연기적 표현력이 함께 성장하고 있다. 아사다 마오도 김연아의 연기가 자신보다 한 수위라고 인정했다.
피겨스케이팅의 심사결과는 기술점수(TES)와 구성점수(PCS)의 합산으로 이뤄진다. 기술점수란 말 그대로 점프와 스핀, 스텝과 같은 기술요소들을 평가한 결과다. 구성점수란 그 외의 요소들, 풋워크와 무브먼트를 통한 동작의 연결이나 안무의 구성, 음악적 표현력, 퍼포먼스와 스케이팅 능력 등을 평가한 결과다. 구성점수는 예술적 자질을 평가하는 점수라고 봐도 무방하다. 음악에 맞춰 안무가 구성되고 화장과 의상의 컨셉이 정해진다. 피겨스케이팅은 예술적 감상을 부르는 스포츠다. 기술의 구사만큼이나 연기적 몰입도 중요하다. 다양한 기술은 안무와 자연스럽게 어울려야 한다. 스핀을 잘 돌고, 점프를 잘 뛰는 것만이 관건이 아니다. 피겨스케이팅은 종합예술의 요소를 차용한 스포츠다. 음악이 흐르고, 그에 어울리는 안무가 펼쳐진다. 박자에 어울리는 스텝과 스케이팅이 이어지고 규정에 따른 점프와 스핀이 구사된다. 기술적 자질만큼이나 예술적 감각이 중시된다.
시련의 무도
김연아는 7살에 처음 스케이트를 신었다. 그 뒤로 어머니는 차츰 딸의 재능을 눈여겨보게 됐다. 김연아가 스케이트를 처음 탄 7살 시절부터 세계적인 피겨 선수가 된 지금까지 그녀의 곁엔 항상 어머니가 있었다. 김연아가 가는 곳엔 언제나 그녀의 어머니가 대동한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해 치맛바람을 불사한다지만 김연아의 어머니는 맥락이 다르다. 한국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은 자식을 안정된 길에 안착시키기 위한 노스텔지어다. 입시지옥의 첨탑에서 자식이 우뚝 서길 기원한다. 한국은 피겨스케이트 불모지나 다름없다. 딸을 피겨 선수로 키우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재능을 능력으로 정착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좋은 환경 속에서도 장담하기 힘든 일이다. 엄밀히 말해서 피겨스케이트는 한국에서 비인기종목이다. 가시밭길로 나서는 길이다.
김연아의 재능은 유년시절부터 빛을 발했다. 온갖 국내대회에서 곧잘 우승을 차지하곤 했다. 13살 주니어 자격을 얻기 전부터 그녀는 이미 준비돼 있었다. 잘못된 장비는 선수의 부상을 야기시킨다. 전문적인 장비를 요하는 스포츠엔 그만큼의 지출이 따른다. 김연아를 괴롭히는 고질적인 고관절 부상과 발목 부상은 한때 제대로 된 스케이트화를 신지 못한 과거에서 비롯된 사안이다. 특히 열악한 국내환경에서 세계적인 선수를 키우기란 어려운 미션이다. 해외 전지훈련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지출만큼 수입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김연아는 한때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움에 직면해 피겨 선수의 꿈을 접을 뻔했다. 세계 정상급 선수가 된 지금, 비로소 기업의 후원을 얻었다. 김연아는 내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0여 개 대학에서 김연아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훈련 중인 김연아와의 화상면접을 위해 학칙까지 개정한 고려대에 영광이 돌아갔다. 김연아는 체육특기생 자격으로 고려대 진학을 결정했다. 고려대 아이스링크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도 미키와 아사다 마오의 모교인 츄코대엔 그녀들의 전용 링크가 있다. 이들은 하루 5시간씩 홀로 링크를 사용하며 세계대회를 준비한다. 아사다 마오와 안도 미키의 훈련 시간이 겹치는 것을 고려해 3억 엔을 들여 새로운 서브 링크를 공사하기도 했다.
일본은 전통적인 피겨 강국이다. 그에 반해 세계대회에서 입상한 한국 피겨 선수는 김연아가 유일하다. 피겨스케이트 불모지 한국에서 김연아는 이례적이다. 그만큼 전무한 관심을 누린다. 김연아는 신체조건이 탁월하다. 유연성이 뛰어나고 기술을 익히는 속도가 빠르다. 길고 가는 팔다리가 섬세하다. 김연아가 국내 피겨스케이트 씬의 척박함을 딛고 세계적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온전히 김연아 개인의 자질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김연아는 홀로 유일하다. 한국 피겨스케이트의 입지가 큰 도약을 이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국 피겨스케이트 씬은 아직 이룬 것이 없다. 김연아의 활약은 한국에서 피겨스케이트 선수를 꿈꾸는 이들에게 일종의 희망과도 같다. 넉넉하게 연습할 아이스 링크가 없는 국내 피겨 선수들은 일반인들이 없는 밤늦은 시간에 링크를 대관해 잠을 아껴서 연습하곤 한다. 환경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피겨스케이트가 주목 받는 건 오로지 김연아가 무대에 있을 때에 국한된다. 세계 최고의 자리에 스스로 오른 이에게 일말의 혜택이 주어진다. 맨손으로 절벽을 기어올라야 한다. 피겨스케이팅 전용 아이스 링크가 넉넉한 토론토에서 전지훈련을 하던 김연아는 밤늦은 시간에 훈련을 하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김연아의 탱고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스타가 등장할 때 씬은 활기를 띤다. 만약 국제무대에서 선전하게 되면 가치는 천정부지로 솟아오른다.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박지성에겐 보이지 않는 태극마크가 새겨져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한국인이 소속된 해외 프로팀에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 그들의 활약에 대한민국의 자긍심을 느낀다. 2000년도에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18승을 올린 박찬호는 구국의 영웅이 됐다. 하지만 2001년 허리 부상 이후 부진을 거듭하자 먹튀기 퇴물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심지어 CF찍고 연습 게을리 한 탓이다라는 질책이 쏟아졌다. 2002년 한국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온 국민의 열렬한 사랑을 얻었다. 하지만 올해 베이징올림픽 축구예선에서 탈락한 올림픽대표님은 축구장에 물이나 채우라는 비아냥을 얻었다. 스포츠에서 팬들의 애정은 좌불안석이다. 인기 종목일수록 실력이 반비례하면 쓰나미와 같은 비난이 밀려온다. 꾸준한 실력발휘만이 팬들의 사랑을 독점할 수 있다.
올림픽에서 선전한 핸드볼은 올림픽이 끝나면 다시 잊혀진다. 기억에 남는 건 올림픽 경기 중 핸드볼 대표팀의 선전뿐이다. 기억에 각인되는 선수보단 팀이 남는다. 핸드볼 스타가 없다. 대중들은 핸드볼 대표팀의 경기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어도 실업팀 경기에 관심이 없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며 눈물을 글썽여도 상황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서기 가장 쉬운 법은 스타를 육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타를 탄생시키기란 쉽지 않다.
이미지 마케팅의 시대다. 세계정상급 실력을 지닌 박태환과 김연아에게 관심이 모이는 건 운동선수로서 보기 드문 외모를 지녔기 때문이다. 안정환이 화장품 모델로 기용된 건 단순히 축구선수로서의 실력과 연동된 문제가 아니다. 박태환과 김연아는 수영과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개척자다. 그들에겐 비인기종목의 열악함을 딛고 일어선 감동의 시나리오가 자연적으로 연상된다. 하지만 열악함을 극복한 이의 고단함보단 열악한 씬의 구세주라는 스팽글한 이미지가 아른거린다. 머리를 염색하거나 경기 전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듣는 박태환은 젊고 패기만만한 왕자님이다. 김연아는 쇼맨십에 능하다. 방송카메라 앞에서 크게 긴장하지 않는다. 자기어필에 능하다. 단순히 무대경험이 많은 까닭일지도 모른다. 스타성이 발견된다. 쥬얼리의 ‘One more time’에 맞춰 ET춤을 춘 아이스 쇼 공연이나 원더걸스의 ‘텔미’춤을 선보인 CF 동영상을 검색하던 팬들은 기꺼이 ‘김연아 빵’을 소비했다. 김연아의 미니홈피엔 그녀의 셀프카메라로 가득하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어필한다.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다. 페이지마다 공주님을 알현하는 댓글이 주렁주렁 달린다. 왕자님과 공주님의 시대다. 하루 세끼 라면 끓여먹고 챔피언 벨트 차던 헝그리 복서는 옛 노래처럼 잊혀졌다.
김연아는 IB스포츠라는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박태환도 소속된 회사다. 이제 잘 나가는 운동선수들은 연예인처럼 매니지먼트 관리를 받는다. 이미지에 걸맞게 실속 있는 마케팅이 연동된다. 스포츠는 엔터테인먼트로 육성된다. 최근 SBS는 국제빙상연맹과 국내 스트리밍판권 독점계약을 맺었다. 국제빙상연맹이 주관하는 경기를 합법적으로 보려면 SBS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실상 김연아의 경기를 독점하고자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SBS는 온라인 상에서 김연아의 갈라쇼 영상에 대한 저작권을 행사했다. 온라인 상에 유포된 2008 1차 그랑프리 김연아 동영상을 색출해 제거했다. SBS는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로 중계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팬들은 김연아를 놓고 트래픽 장사를 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정당한 계약을 통해 저작권을 행사한다고 했지만 뻔한 상술이다. 성화가 빗발쳤다.
세헤라자데
김연아는 각광받는 블루칩이다. 떠오르는 컨텐츠다. 스포츠 스타로서의 기능성을 넘어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논의되는 아이템이다. 형태가 고정된 매물이 아니다. 파급력의 가능성은 짐작하기 힘들다. 다양한 소유의 개념이 형성된다. 분야마다 최대한 김연아를 독점하려 한다. 소비의 행태에 따라 김연아를 활용하고자 하는 목표지점이 다르지만 분야마다 최대한 김연아를 독점하려 한다. 시장에서 마찰이 발생했다. 기업은 김연아를 CF에 기용해 이미지를 확보하려 한다. 미디어는 김연아에 관한 말을 생산하며 관심을 끈다. 대다수의 군중은 김연아를 프리미엄급 이미지로 인식한다. 어떤 팬들은 다양한 형식으로 생산된 김연아를 소비하면서도 그 상업적 태도에 반발한다. 김연아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는 승냥이는 김연아의 열혈 팬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단지 김연아를 승냥이처럼 쫓아다니는 뿐만 아니라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전문적 지식에 해박하다. 승냥이가 있다면 이리떼도 있다. 이승엽이나 박지성과 같이 큰 인기를 얻은 운동선수들에 관련한 기사들이 포털사이트 전면에 오르면 여지없이 댓글 전쟁이 이뤄진다. 김연아도 예외는 아니다. 인파가 모이는 곳엔 언제나 잡음이 나기 마련이다.
김연아는 좋은 피겨스케이팅 선수다. 김연아가 이룬 성과는 이미 차고 넘친다. 김연아를 칭찬하는데 어떤 이의는 필요치 않다. 김연아가 무대에 오르면 대한민국이 환호한다. 연예인들도 김연아에게 친근감을 표한다. 먼저 친해지고 싶다. 슈퍼주니어의 이특은 김연아가 자신의 일촌신청을 거부했다고 라디오에서 밝혔다. 슈퍼주니어의 팬들이 김연아의 미니홈피를 폭격했다. 뻥이었다. 이특은 뭇매를 맞고 고개를 숙였다. 앙드레김도 김연아를 마중 나갔다. 곧바로 앙드레김을 바라보는 김연아의 표정을 편집해 앙드레김에게 굴욕을 선사한다. 손이 가요. 손이 가. 너도 나도 김연아에게 손이 간다. 무한도전에 출연하기도 하고, 더 스타쇼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다. 초심을 잃었다. 힐난이 생겼다. 소비하는 대상이 존재해야 컨텐츠는 유통되기 마련이다. 대중들은 김연아를 보길 바란다. 성공한 선수의 경기도, 사생활도 하나의 소비재일뿐이다. 소비자들이 시끄럽다.
최근 1차 그랑프리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죽음의 무도’와 ‘세헤라자데’를 연기하며 김연아는 검은 마스카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내년이면 대학에 진학하는 김연아도 성인의 문턱에 다다랐다. 김연아의 미니홈피에선 슈퍼주니어와 동방신기의 음악이 흐른다. 보아를 좋아한다고 했다. 19살 소녀다운 취향이다. 하지만 국민여동생의 유효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피겨 선수는 25세에 이르면 노장으로 분류된다. 김연아는 내년이면 20세가 된다. 김연아의 전성기도 5년 남짓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정점을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중들은 스타의 이미지를 추적한다. 김연아에 열광하는 이도, 악플을 다는 이도, 하나같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김연아를 소비한다. 김연아의 무대는 오로지 김연아의 것이다. 김연아는 은퇴해도 연예인이 되진 않을 것이라 못박았다. 피겨인으로 남을 것이라 선언했다.
쇼는 관객을 확보해야 이뤄진다. 김연아의 무대도 대중의 관심을 통해 이뤄지는 일종의 쇼다. 하지만 간절함의 주체가 역전된다. 김연아를 원하는 건 대중이다. 오늘날 김연아를 이끌어온 건 빙상연맹도, 팬덤도 아닌 김연아다. 김연아의 상대는 아사다 마오도, 태극마크도, 악플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김연아가 있는 곳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링이 아니라 스스로를 세워야 하는 링크다. 김연아는 연기가 끝나면 스스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다음에 관객을 향해 손을 흔든다. 관객은 김연아로부터 발산된 스펙트럼을 관찰하고 제 나름대로 소비한다.
천일야화의 결말을 아는 건 오로지 세헤라자데 밖에 없다. 아무도 모른다. 그 무대에 오르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가 아닌 그냥 김연아라는 것을. 오로지 김연아만이 온전하게 김연아를 안다. 적어도 김연아는 그 무대를 즐기고 있다. 우린 그저 김연아만 바라보고 있다. 그 소중한 우리 연아도 이 시대가 가면 그냥 그렇게 끝날 뿐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빙상의 새로운 역사는 없다. 그저 새로운 김연아만이 그 무대에 있다. 또 다시 굶주린 희망을 쥔 맨손으로 절벽을 올라야 할 뿐이다. 스타가 소멸하면 열악한 씬도 잊혀진다. 언젠가 꿈은 다시 이루어질까. 그건 김연아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