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거짓말을 많이 하지. 내가 몇 년 전에 다신 연기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처럼.” 4년 전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랜 토리노>가 배우로서 출연하는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 말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선언을 거짓말로 둔갑시킨 작품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 메가폰을 잡은 건 로버트 로렌즈다. 그의 첫 연출작이다. 로버트 로렌즈는 긴 시간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했다. <블러드 워크>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등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을 제작하고 기획하며 파트너로서 긴 시간을 공유해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다시 카메라 앞으로 불러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덕분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평범한 드라마다. 늙어가는 한 남자와 그 주변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비범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만으로 유사하게 읽히는 작품이 있다. <그랜 토리노> 말이다. <그랜 토리노>와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늙어감에 관한 영화다. 노인에 관한 영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을 빌린 두 노인은 완고하다. 자기 고집을 좀처럼 꺾지 않는다. 물론 <그랜 토리노> 쪽의 노인이 보다 그렇다. 어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최근 배우로서 남긴 인상이란 그런 것이다. 두 영화 속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캐릭터와 밀착하는 건, 마치 그의 전기적인 캐릭터처럼 보이는 건 당연하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처럼 어차피 그 역시 늙어가는 처지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결국 어떤 퇴물에 관한 영화다. 오랫동안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로 일해온 거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점차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구단주의 주변엔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망주를 발굴하는 스카우트 일을 이어나가기엔 그가 너무 늙었다고 말하는 이가 생겼다. 무엇보다도 그의 방식이 낡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그 일에 매진한다. 노구를 끌고 먼 길을 운전해간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낡아가고 있다.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치명적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딸 미키(에이미 아담스)는 자신의 중요한 커리어를 뒤로 밀어내고 아버지의 길을 따라 나선다. 오랫동안 반목하고 지냈던 부녀는 그 길을 함께 하며 갈등과 화해를 경험한다.
빤한 이야기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늙어가고, 퇴물이 된다. 빠른 구속을 자랑하며 자신만만하게 직구를 뿌리던 영건도 어느 순간 정교한 제구와 볼컨트롤에 기대어 맞춰 잡는 노장이 돼야 한다. 새까만 후배가 자신의 마운드에 올라와서 자신을 불펜으로 밀어내는 과정을 언젠가 감내해야 한다. 사람들은 젊다는 것에 투자하길 꺼리지 않는다. 반대로 늙었다는 것에 포기하는 것도 당연하다 믿는다. 관록이나 지혜라는 말은 다 풀려버린 두루마리 휴지의 중심을 지키고 있던 봉처럼 유용하게 느끼질 않는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노인의 지혜와 관록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빤한 선악 구조를 내세운다. 패기만만한 젊은 야심가의 빤한 수를 장외로 날려버린다. 역전타가 선명하게 예상되는 구조다. 그럼에도 이 빤한 경기를 종종 비범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건 타석에 들어선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이글거리는 눈빛과 타 들어가는 듯한 음성, 80세가 넘은 나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박력은 대단하다. 주름 하나마다 박력이 새겨진 기분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우리가 아는 병약한 노인들과 조금 다른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분야에서 퇴물로 내몰리는 상황을 본다는 건 그래서 더욱 슬픈 일이기도 하다. 육체의 노쇠와 함께 반비례하게 축적되는 경험 속에서 익어가는 지혜를 팔 곳이 없다. 퇴물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퇴장한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여겨진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의 거스 또한 그런 전철을 밟고 있다. 하지만 그런 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증명해낼 뿐이다. 아직 자신의 지혜는 쓸만한 것이라고. 거스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공을 쳐내는 배트 소리로서 구질과 배트 스피드를 파악해낸다. 거짓말같다.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결국 오랜 세월을 그 현장에서 자리하고 지켜본 전문가의 관록이 만들어낸 유산이다. 거짓말 같은 그 연륜은 결국 세월을 소모하지 않고선 얻을 수 없는 어떤 노인만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 노인은 결국 이를 증명한다. 영화 속에서만큼은.
모든 노인이 깊은 지혜와 연륜을 품고 살지 않는다. 중요한 건 결국 자신의 경험 안에서 인생이 무르익어간다는 사실일 거다. 결국 퇴물이 되어 세상의 뒷방으로 밀려날 때 그런 가치나마 손에 쥐고 있지 못하면 다시 세상으로 떠밀려나올 기회마저 상실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나 <그랜 토리노>는 결국 노인들에 대한 영화라기 보단 어떤 노인에 관한 영화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온 이에 관한 이야기다. 단지 늙어간다는 것을 노스탤지어로 치환하지 않는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그는 결코 초라한 노인의 얼굴로 관객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박력이 넘치는 인상으로 노인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에 마주선다. 퇴물이 되어가는 과정 또한 묵묵하게 살아간다. 마치 원래 알았다는 듯이, 그리고 끝내 퇴물로서 멋지게 살아가는 과정을 제시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와 같이 빤한 드라마에 비범한 인상을 새겨 넣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엔 노인을 위한 변명은 없다. 그것이 그 지혜와 연륜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여생을 지켜보고 싶게 만든다. 마치 이 빤한 드라마를 신중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것처럼.
내 감각에 포커스를 맞추려 했다. 내가 느끼는 공간과 냄새, 시야, 용의자를 바라보는 심정까지, 나로서 캐릭터 안에 들어가는 거다. 한번은 컷을 하고 모니터를 확인하는데 내 입장에서 도저히 쓸 수 없어서 다시 한번 가자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내가 공감해야 움직일 수 있었다.
본인의 연기를 쉽게 만족하지 못하나?
평생 그럴걸.
이제 오디션이 필요 없는 배우 아닌가?
오디션이 필요 없는 배우는 없다. 최소한 리딩이라도 하면서 현재의 컨디션을 알려야 된다. 당락의 의미를 떠나서 진짜 내가 해도 되는지 질문해야지. 지난 작품에서 이 정도 했으니까 이번에도 그 정도 할 거란 기대만으로 작품에 들어갔다가 무너지면 서로 낭패다. 서울보증보험에서 내 연기를 공증해주는 것도 아니고.
처음 카메라 앞에 설 때는 어땠나?
연기 자체는 동일하지만 영화적 기법에 적응하긴 쉽지 않았다. 각 장면에 어울리는 에너지를 안배하면서 작품 전체의 호흡을 유지해야 한다. <용의자 X>에서도 그 호흡을 놓쳐서 한 컷을 버렸다. 한 장면 찍을 때마다 시나리오를 여러 번 읽어야 했다.
롯데 자이언츠 팬이라고 들었다. 부산 토박이?
나고 자랐지. ‘구도 부산’의 핏줄이 어디 가겠나?
언제 서울로 올라왔나?
초등학교 1학년 때 가족 모두 올라왔다.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다.
서울에서 제일 멀어서 부모님한테 안 걸릴 줄 알았다.
연극영화과를 영문학과로 속인 거?
속인 건 아니다. “아버지, ‘경성대 영흐여하과(발음을 뭉개면서)’입니다.” 그랬더니, “뭐? 영어? 그래? 괜찮네! 알았다!” 그리 된 거지(웃음). 딱히 반대하신 건 아니고, 한 2~3년 하다 관둘 줄 알았다 하시더라.
지금은?
영화에 입문할 때,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로 아버지 성함 좀 빌려 쓰면 안되겠나 여쭸더니, “집에서 가져갈 게 없으니 별 걸 다 가져간다. 맘대로 해라, 마!” 하셨다. 요즘은 항상 로열티 얘기하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공식석상에서 내 이름을 되찾아야지(웃음).
본명이?
원준이다. 조원준.
야구 영화를 두 편이나 했다.
<글러브>에선 야구선수로 나온 게 아니니까. 어느 연말 파티 중에 최동원과 선동렬이 나오는 <퍼펙트 게임>이 제작된다고 들었는데 그 자리에 박희곤 감독님이 있었다. 무작정 가서 “나 야구 잘 안다!” 그랬지. 대뜸 해태 타이거즈 역할을 말하길래 유니폼만 입어도 좋으니 롯데 단역을 하겠다 했다(웃음). 촬영할 때 야구 못하니까 화내더라. “너 야구 잘한다며?” 그래서 말했지. “잘 안다고 했지, 잘 한다고 안 했는데(웃음).”
광주에서 군생활을 했더라.
그래서 서울말만 썼다(웃음). 어차피 롯데가 맨날 꼴찌하던 때라 군생활에 집중했다.
<솔약국집 아들들>에서 브루터스 리, <글러브>에서 찰스, <맨발의 꿈>에서는 제임스, 외국인 이름의 캐릭터를 자주 맡았다.
그렇네. <솔약국집 아들들> 할 때 영어를 못해서 작가님께 맨날 빌었다. 2형식 이상 쓰면 안 된다고(웃음).
예전에 비하면 정말 샤프해졌다.
살을 빼고 있을 땐 괴롭다. 조절해야 하니까. 작품이 없으면 살이 찐다. 그냥 놓고 지내니까. 스스로 어떻게 변해야지, 라는 건 없다. 뚱뚱해지거나 샤프해지는 건 그 작품에 존재하는 이유가 그렇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당위성을 쫓아가는 거지.
배우들이 체중을 조절하는 건 항상 경이롭다.
솔직히 다이어트는 징글징글하다. 처음 한 달은 배가 고파서 자다가도 욕 나온다. 한 달이 지나면 새벽에 <식신로드>를 봐도 괜찮다(웃음). 어느 정도 목표량을 달성하면 스스로에게 상을 줘야 된다. 그 상을 먹겠다고 달리는 거지.
배우에게 다이어트란 캐릭터의 갑옷을 입는 과정이다.
즐기지 못하면 불가능하지. DNA 구조를 바꾼 게 아닌 이상 몸으로 거짓말하는 거잖아. 연기란 빙의도 접신도 아니다. 이성과 감정을 평행하게 두고 항상 외줄을 탄다. 주목 받는 게 부담스러운 건 그래서다. 잘될 수도 있고, 잘 안될 수도 있는데 일정한 기대가 있다는 건 부담스럽지.
<뿌리 깊은 나무>의 무휼이나 <범죄와의 전쟁>의 김판호는 천차만별의 캐릭터인데, 연기 범위가 넓더라.
사실 무휼의 준비 기간은 짧았다. 시놉시스를 보고 딱 꽂혀서 뭐라도 하고 싶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섰다가 칼도 많이 써야 된다 하니, 아차, 싶었지. 결국 중요한 건 무휼이 왜 거기 존재하느냐는 물음이었다. 왕의 호위무사라는데 겉치레로 경호원 노릇만 하는 인물은 아니니까. 무휼에게 이도, 세종이란 사람은 대체 무어냔 말이다. 작가님과 얘기하면서 무휼에게 세종은 곧 조선이란 결론에 닿았다. 그런 마인드로 현장에 가니 무휼이 될 수 있었다. 다양한 의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이성과 정서를 넓히는 게 중요했다. 현장엔 연기를 돕는 스태프들도 많으니 그들을 믿어야 된다. 정답은 작품에 있다.
경험하지 않곤 모를 것 같다.
운 좋게도 트레이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부산엔 배우 인프라가 적다. 서울말을 할 줄 아는 배우도 없으니 번역극을 하면 무조건 무대에 섰다. 덩치 큰 배우도 없고, 자연히 공연을 많이 했지. 많이 한 놈한테 당할 놈 없지 않나. 그래서 20대엔 나이 마흔 다섯이 되는 게 꿈이었다.
마흔 다섯?
그 나이가 된 선배님들의 호흡은 아무리 훈련해도 나오지 않거든. 늙고 싶어서 환장하는 줄 알았다. 막상 나이 서른 되니 30대라 우울해하고(웃음).
나이 서른은 어땠나?
사람들 이야기가 들렸다. 뭔가를 흉내 내기 보단 물 흘러가듯 스스로를 받아들여야 된다는 걸 알았지. 거대한 강의 흐름에도 부딪히는 바윗돌 하나 즈음은 있으니까. 욕심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막연히 자연스럽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내 마음이 무엇으로부터든 자유로울 수 있어야 했다.
의외로 수다쟁이 같다. 무휼처럼 과묵한 캐릭터는 어떻게 참았나?
뭐, 컷하고 떠들면 되니까(웃음). 사실 연기하는 게 어려웠지. 존경하는 선배님들도 많이 계셨고.
술도 많이 먹었나?
어디 가서 술로 안 밀리는데, 선배님들 뵈니까 사람 아닌 사람 많더라. “내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으니 조금만 먹자.” 그런데 회 한 접시 나오기도 전에 소주 네 병을 까(웃음).
개구진 성격 같다.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악하니까 상대가 먼저 거부감을 느끼기 전에 먼저 분위기를 풀어보려 노력하게 된다. 사실 대중교통 이용하는 것도 불편했다. 여름에는 땀도 많아서 버스 옆자리에 누가 앉으면 괜히 일어났다. 겨울에 만원 지하철 타도 내 탓인 거 같고. 어쩔 수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상황이 아니면 걸어 다녔다. 소심했지.
극단에서 무대 연출도 했다던데.
연기를 위한 기능적 역할로서였다. 배우가 자유롭게 노는데 방해되는 요소들을 해체시키는 작업이 연출이라 생각했지. 배우가 되기 위한 워크샵이랄까? 연출할 생각은 죽어도 없다. 하면 안 되는 직업 같다(웃음).
무대에 다시 서고 싶은 생각은?
항상 한다. 태생과도 같은 곳이니까. 잠시 쉬고 있는 것뿐이지.
놓쳤으면 후회했을 것 같은 영화는?
첫 영화였던 <말죽거리 잔혹사>. 길가다가 우연히 만난 군대 고참이 연출부에 있어서 단역을 주더라. 한 장면만 세게 등장했다 사라지는 역할이 있고, 지리하게 병풍처럼 출연하는 역할이 있었다. 이 일을 길게 해야 될 거 같으니 현장에 오래 있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항상 어깨에 걸리거나 저 뒤에 서있는 식이더라(웃음). 부산에서 연극할 땐 너무 열악해서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했다. 조명도 만지고, 분장도 하고, 의상도 맞추고, 글도 써야 된다. 영화 현장의 파트 포지셔닝은 경이로웠다. 현장 스태프들한테 이거 저거 묻고 다니면서 많이 배웠다. 연극적 본질이나 영화적 본질은 달라도 연기적 본질은 똑같다 이거야. 그렇다면 갈 수 있겠다 생각했지.
첫 수업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돈 받으면서 했지.
아직도 그때 생각나나?
요즘엔 ‘이 정도 뛰고 힘들어? 이 정도도 못 따라가?’ 생각한다. 그렇게 되짚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 같다. 결국 내가 계속 할 일이니까.
초심이 중요하다?
작품에 대한 고민이 부담으로 변하지 않길 바란다. ‘이런 걸 또 해야 돼?’가 아니라, ‘이거 재미있을 거 같은데!’ 할 수 있어야지. 작품 속 캐릭터를 흥미롭게 생각하고 꾸준히 도전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준비라는 게 그런 거 같다.
그녀는 야구가 어렵다고 말했다. 어려워서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날, 그녀가 야구장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거짓말처럼 그랬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 쿠바와 맞붙은 대한민국 대표팀은 한 점 차 스코어로 승기를 잡은 채 9회말 마지막 수비에 들어갔다. 차세대 국보급 투수로 꼽히는 류현진이 마운드에 올랐다. 승리를 예감했다. 첫 타자로부터 좌전안타를 맞았다. 동점주자가 나간 상황, 두 번째 타자의 희생번트로 주자는 2루까지 진루했다. 안타 하나로도 동점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두 타자 연속 볼넷으로 1사 만루 상황까지 맞이한 뒤 류현진은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의 마지막 투구는 스트라이크에 가까웠지만 볼 판정을 내린 히스패닉계 주심은 담담했다. 포수 강민호는 격렬한 항의 끝에 퇴장 명령을 받고 덕아웃에 포수 미트를 내던졌다. 마운드를 이어받은 건 마무리 투수로 정평이 난 정대현이었다. 투수와 포수 즉 배터리가 모두 교체된 채 맞이한 9회말 1사 만루 상황, 정대현의 손 끝에서 볼이 뿌려졌다. 유격수 앞 땅볼! 유격수 고영민이 이를 잡아서 2루를 밟은 뒤, 1루로 송구했다. 대한민국 야구팀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이었다.
스피드건에 150km는 찍혔을 거라던 강민호의 터프한 미트 던지기 덕분인지, 무심하고 시크한 정대현의 ‘차도남’ 투구 덕분인지 몰라도 52%의 시청률을 기록한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의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야구장에 모여들었다. 2009년 프로야구 관중은 520만 명을 넘겼다. 전년 대비 100만 명 이상이 늘어난 수치다. 그게 다가 아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예년보다 눈에 띄게 여성관중이 늘었다. 두산 베어스 홍보팀에 따르면 2008년 이후로 경기당 여성 관객 비율이 30% 수준이라고 밝혔다. 2008년 이전까지는 15% 안팎에 머무르던 수준이었다. 680만 명이 넘는 관중을 동원하며 역대 최다 관중수를 기록한 지난해에는 40%에 육박했다. 롯데 자이언츠 홍보팀의 임채무 씨가 전한 부산 사직구장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
환기되는 사례가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축구의 ‘축’ 자도 몰랐던 대부분의 여성들이 레드카펫처럼 넘실대는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길거리 응원을 즐겼고, 축구를 알게 됐다. 문제는 월드컵이 끝난 뒤, 그 열기를 이어갈 공간을 찾지 못했다는 것. 프로축구에는 그녀들이 기대했던 월드컵의 열기가 없었다. 쉽게 말해서 프로축구는 인기가 없었다. 프로축구 구장의 텅 빈 관중석에서 월드컵 당시의 열기란 겨울 한파 속에서 떠올리는 한여름 무더위 같았다. 월드컵 무대에서 반짝거리던 태극전사들도 프로축구 안에서는 존재감을 잃었다. 프로야구는 달랐다. 출범 30주년을 맞이한 프로야구는 일찌감치 한국의 국민스포츠 자리를 꿰찼다. 팬덤의 스케일과 문화적 저변이 달랐다. 야구장은 만원이었고, 응원의 열기는 대단했다. 야구장에서 한번 놀아봤다는 여성들은 그 매력에 마구마구 빠져들었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그라운드를 생전 처음 본 그녀들은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파도타기에 합류하기도 하고 입에 붙는 선수들의 응원가에 목청을 높여보다가 야구장에서 먹는 ‘치맥’ 맛을 잊을 수 없어서 야구장의 단골손님이 됐다. 뒤늦게 발견한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았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베이징올림픽 야구경기를 지켜본 여성들은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러했듯이 다부진 선수들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에 열광했다. 스포츠 스타의 탄생은 곧 그 분야의 관심으로 이어진다. 1994년도 농구대잔치 당시, 연세대와 고려대 농구부는 실업팀들을 꺾으며 파란을 일으켰다. 장동건과 손지창 등 당대 청춘스타들이 대학농구선수로 출연했던 <마지막 승부>에 열광했던 소녀팬들은 농구장을 찾아 젊은 농구스타들에게 드라마의 팬덤을 이입할 수 있었다. 스타성은 곧 상품성이다. 베이징올림픽 결승전에서 태극기를 달고 활약했던 선수들은 스포츠 스타는 스포츠 마케팅의 최전선에 배치된다. 두산 베어스 홍보팀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1년 사이에 여성의 신체사이즈에 맞춰서 출시된 유니폼 판매율이 4배까지 뛰었다. 야구중계 화면에서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여성팬의 이미지가 심심찮게 포착됐다. 야구장에 놀러 갔던 그녀들은 야구팬이 돼서 돌아왔다. 프로야구 신에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 그녀들에게 각 구단들의 구애가 시작됐다. 여성팬을 겨냥한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하고 활발히 진행한다. 두산 베어스의 ‘퀸즈 데이’가 대표적이다. 한 달에 한번 핑크색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하는 두산 베어스 선수들은 그날만큼은 팬들을 위해서 뛴다. 스킨십 전략을 통해서 친밀감을 높여나간다. 야구장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사실 야구는 즐기기 위해서 학습이 필요한 스포츠다. 즉각적인 액티비티가 뚜렷하게 체감되는 축구와 농구 등과 달리 룰을 먼저 숙지해야 비로소 액티비티가 보인다. 그만큼 확고한 흥미가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일찍부터 야구에 흥미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이 견고한 야구팬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그래서 흥미로운 변화다. 본래 한국에서 야구장은 수컷들의 놀이터였다. 1982년, 독재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가 출범을 했건 말건, 고교야구의 인기를 이어받은 프로야구는 출범 초기부터 대단한 팬덤을 구축했다. 지역 감정이 팽배하던 1980년대의 정서를 확실하게 긁어댄 덕분이기도 했다. 광주 무등경기장에서는 ‘목포의 눈물’을, 부산 사직구장에서는 ‘부산 갈매기’를 불렀다. 응원하는 팀의 패배로 격분한 어떤 홈관중들은 그라운드로 물병을 던지고, 상대팀 선수 차량을 불태우기도 했다. 야구장은 분리와 단절의 정서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병리적 심리가 체감되는 바로미터의 현장이었다. 그만큼 과격했다. 정치적 부조리로 인한 갈등이 스포츠의 팬덤으로 위장한 듯한 불편한 진실.
야구장을 찾는 젊은 여성팬들이 늘어난다는 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낡은 시대성을 극복해나가고 있음을 대변하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젊은 남녀 커플이 각자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나란히 앉아있는 야구장의 풍경은 이 사회의 취향과 여유가 한 뼘 늘었음을 증명한다. 서로 다른 취향을 인정하고 승부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점차 가능해지고 있다. 각자 다른 방향을 응원하면서도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그녀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태생적 의무감을 얹지 않는다. 그저 잘생긴 선수의 플레이가 좋아서 응원하는 팀을 결정했다니, 얼마나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인가. 지역갈등 따위는 그녀들에게 중요치 않다. 여자는 야구의 미래다.
$114,457,768 vs. $39,722,689. 메이저리그의 최고팀과 그 아래에 있는 팀보다도 더 밑바닥에 있는 팀의 간극은 저 수치로 정리된다. 선수 몸값의 총액이 곧 팀의 실력을 대변한다. 수치만으로도 명백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실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프로스포츠의 세계에서 이는 흔한 일이다. 이는 메이저리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세계 모든 종목의 프로스포츠 대부분은 구단의 빈부격차를 통해서 순위의 계층화가 손쉽게 이뤄진다. 뉴욕 양키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통점은 실력 있는 부자 구단이라는 것. 부자 구단들은 한 시즌이 마감되면 자본을 투여해서 스타들을 영입하고, 새로운 유망주를 발굴하거나 스타를 길러낸 가난한 구단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부자 구단의 선수 수집을 넋 놓고 지켜볼 수 밖에 없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지금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고 있는 중이다. 2001년, 뉴욕 양키스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디비전시리즈. 3점 차로 앞서고 있던 오클랜드가 양키스에게 역전당하자 남자의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그리고 끝내 패배. 그해 오클랜드는 양키스에게 리버스 스윕, 즉 시리즈 역전패를 당했다. 남자의 손에 쥐어졌던 라디오가 멀리 날아간다. 그의 이름은 빌리 빈(브래드 피트), 오클랜드의 단장이다. <머니볼>은 빌리 빈에 관한, 그 빌리 빈이 이뤄낸 메이저리그의 개혁에 관한 이야기다. 세이버매트릭스라는 야구기록 통계 시스템에 빠삭한, 야구 경력이 없는 경제학 전공의 직원을 고용하고 기성 야구계의 편견과 한계에 맞서서 자신의 시스템으로 팀의 성공을 이끌어낸 단장 빌리 빈에 관한 전기적 실화가 담긴 경제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마이클 루이스의 <머니볼>은 아론 소킨의 각본으로 옮겨졌고, 베넷 밀러의 지휘 아래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다.
<머니볼>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몇몇 인물의 형태가 영화를 통해서 변형됐고, 연출적 감각으로 채워 넣은 영화적 찰나들이 예감되지만, <머니볼>은 드라마틱한 현실에서 길어낸 현실적인 드라마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영화, 그것도 현실과의 불협화음을 이겨내고 자신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남자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 도식적인 예감을 부른다. 주목할 것은 일찍이 <카포티>로 할리우드 감독상을 거머쥔 베넷 밀러 이전에 <소셜 네트워크>의 각본가인 아론 소킨이다. 그는 마크 주커버그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또 하나의 화신을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그리고 <머니볼>은 <소셜 네트워크>가 마크 주커버그에 관한 전기가 아니었듯이, 오클랜드의 단장 빌리 빈에 관한 전기로 완성되지 않았다. <머니볼>에서 빌리 빈이라는 인물보다도 흥미로운 건 그의 행위적 근간이 되는 경험과 심리의 탐색, 그리고 그 주변을 이루는 풍경의 관찰에 있다.
상실의 에너지를 페이스북의 동력으로 끌어올린 마크 주커버그처럼, 빌리 빈 또한 실패의 에너지를 파격적인 구단 운영의 동력으로 끌어올린다. <머니볼>은 야구 영화라기 보단, 야구가 등장하는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이는 과거의 경험에 기인해서 직접 경기를 관람하지 않는 빌리 빈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관객이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효과를 낳기도 하는데 이처럼 <머니볼>은 빌리 빈이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서사 속에 내재된 심리를 관객의 감상에 투영해내는데 여념이 없는 작품이다. 탁월한 임기응변과 제스처로 자신의 공기를 만들어내는데 능한 빌리 빈이 텅빈 그라운드가 바라보이는 객석에 홀로 앉아 고독한 상념에 잠겨있을 때, 그 단적인 풍경 만으로도 인물의 심리적 간극과 고충이 오롯이 와닿는다. <머니볼>은 리드미컬한 서사적 운용과 탁월한 공간감의 활용을 통해서 인물의 심리를 역동적으로 추적하고, 광활하게 펼쳐놓는다. 아론 소킨의 스토리텔링을 베넷 밀러가 유연하게 세우고 맞춘다.
배우들의 공헌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머니볼>에서 브래드 피트는 지휘자와 같다. 마치 더 이상 근사한 외모로서 언급되길 거부하듯이 유려한 연기력과 압도적인 장악력을 드러낸다. 또한 빌리 빈을 보좌하는 경제학도 세이버메트릭스 전문가 피터 브랜드 역의 요나 힐과 오클랜드의 감독 아트 하우 역을 맡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극적인 흐름에 긴장과 흥분을 불어넣는 스페셜리스트의 위치를 점한다. 또한 모든 배우들은 훌륭한 화음을 자랑하는 관현악단과 같이 자신의 파트를 군더더기 없이 연주해낸다. <머니볼>은 팀워크가 뛰어난 영화다. 그랜드슬램 한방보다도 팀 배팅을 통해서 끊임없이 진루타를 치고 나가며 출루율을 높여나간다.
<머니볼>은 개혁과 진보에 관한 영화지만 결국 그 과정을 이겨내는 한 인간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실패를 경험적 밑천으로 삼아서 새로운 사고를 실행으로 작동시킨 남자는 결국 그 신의 변화를 주도해내고 갈등과 불화를 견디며 새로운 답안을 정착시킨다. 물론 그 방안이 완벽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다. 빌리 빈의 정책에 따라서 오클랜드는 5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결국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또한 빌리 빈의 방식을 응용한 다른 팀이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빌리 빈의 방식에 대해서 마냥 우호적이지 않은 듯한 영화적 시선은 어쩌면 공정한 것이다. 의외성의 플레이를 인정하지 않고 통계에 기대는 기계적인 운영을 통해서 시즌 운영의 성공을 거둘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의 승리를 얻어낼 수 없다는 건 결국 아이러니다. <머니볼>은 결국 그 거대한 아이러니에 관한 영화다. 자신의 성취로 환호했던 그라운드의 적막을 홀로 차지한 채 드러누운 빌리 빈의 모습이, 독보적인 스카우팅으로 게임을 지배한 덕분에 거액의 스카우팅 제의를 받게 된 빌리 빈의 선택은, 어떤 통계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의외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국 이 영화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요즘이야 인터넷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프로야구 경기 스코어를 체크해볼 수도 있고 인터넷이나 케이블 스포츠 채널을 통해서 모든 경기를 관람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지. 아버지가 끌고 가 주지 않는다면 야구장을 직접 찾아가기가 쉬운 나이도 아니었고, 주말 즈음에나 종종 중계해주던 몇 안 되는 공중파 채널의 일정도 내가 응원하는 팀을 비켜가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그나마 가장 활발하던 라디오 중계도 신통치 않아. 매일 같이 9시 40분에서 50분 사이에 브라운관 앞에 앉아있어야 했던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지. 9시 뉴스에서 이어지는 스포츠뉴스는 당일 야구 결과를 알려주는 가장 빠른 통로였으니까.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야구 보기 좋아진 세상인가. 하지만 늦은 밤 스포츠뉴스 시간을 기다리며 이종범의 도루 소식을 기대하던 그 시절에도 그 나름의 낭만이 있었다. 그때가 참 좋았지, 라고 말하기에는 요즘이 참 편리하고 좋다. 하지만 지금보다 불편했던 그 시절에 뒤늦게 귀엽고 아련하게 환기되는 순간들이 존재했다는 것.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래서 종종 돌아보게 되는, 그땐 그랬지.
이종범 같은 노땅은 은퇴나 해, ㅋㅋ, 라고 씨부리는 개념에 털도 돋지 않은 신생아 야빠들은 알 수 없는 그런 게 있어.
한때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 꼽혔던 김상남(정재영)은 이제 구단 내에서도 손사래를 치는 사고뭉치 퇴물투수에 불과하다. 음주에 폭행시비까지 휘말린 그는 선수생명에 제동이 걸린 위기에 몰린 가운데, 학창시절 절친이자 매니저인 철수(조진웅)에게 떠밀려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충주 성심학교의 야구부 감독직을 맡게 된다. 야생마처럼 길들이기 어려운 퇴물 투수가 소리가 없는 세상 속에서 배트를 휘두르고 글러브를 쥔 소년들과 함께 다시 한번 그라운드에 나선다.
아마도 <글러브>에서 가장 뚜렷하게 주목되는 대상은 어느 배우들도 아닌 강우석 감독일 것이다. <글러브>는 전작 <이끼>와 함께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발견되는 변화적 흐름을 감지하게 만드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시사적인 이슈들에 밀착한 상업 영화들을 만들어내던 강우석 감독은 본격적인 장르물에 도전한 <이끼>로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글러브>는 ‘착한’ 휴먼드라마로서의 감정에 무게를 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가장 무딘 날을 세우고 있다 평할만한 작품이며 강우석이라는 이름 안에서 또 한번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하게 만드는 결과물로서 이목을 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반박의 여지는 있다. <글러브>는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 학생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둔 각색물이란 점에서 역시 현실적인 이슈를 스크린 속에 녹인 강우석 감독의 전례들과 이어진 일관성이 유지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글러브>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시사적인 이슈들을 적절한 시기에 스크린에 수용해내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 특유의 태도와는 분명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글러브>는 실화를 모티프로 삼고 있으나 그것이 정치적인 가치평가를 염두에 두게 만드는 소재가 아닌, 드라마틱한 보편적 감동에 무게를 얹는 소재로서 수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강우석이라는 이름을 건 전례들과 차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뒤집어서 ‘강우석 감독의’ 라는 부연을 제하면 사실 <글러브>는 굉장히 빤하게 수가 읽히는 영화다. 청각장애를 지닌 소년들과 한때 프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망나니 투수가 만나 세상의 편견에 맞서고 함께 성장해나가는 눈물 겨운 감동스토리가 빤히 읽히는 <글러브>는 그런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진짜 빤한 영화다.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지점이 있다면 140분이 넘는 러닝타임이라고 할까. 스스로 감동을 웅변하는 대사들이 숱하게 등장하는 이 영화는 ‘감동’드라마임을 스스로 주창하는 올드한 휴먼드라마다. 단도직입적으로 촌스럽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글러브>는 직구다. 포수의 미트 안으로 정직하게 뻗어 들어오는, 치기 쉬운 직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 투구되는 영화다. 장애를 극복하는 아이들과 덜 자란 어른의 뒤늦은 깨달음이 성장드라마라는 그라운드 안에서 차례대로 진루하다 어렵지 않게 홈까지 걸어 들어오는 양상이다. 치기 쉬운 볼을 받게 되는 타자의 입장과 같이 관객은 손쉽게 감동을 얻어내겠지만 동시에 큰 감흥에 다다르기 어려울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사들은 거창하고, 표정들은 비범하나, 감정이 얕다. 목청은 크지만 울림이 없다.
적당한 진루타는 쳐내지만 홈런 한 방이 부족한 휴먼드라마라는 점에서 <글러브>는 인상적인 결과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동시에 야구 영화치고 경기 장면이 재미없다는 건 어쩌면 이 영화가 지닌 최대의 에러일 것이다. 그나마 정재영의 살아 있는 표정이 영화의 빤한 승부수 속에서 흥미진진한 역투 노릇을 한다.
난 때때로 TV를 보면서 CF를 즐겨보는 편인데, 개인적으로 이런 CF가 참 좋다. 유명스타 이미지를 대뜸 들이대며 상품과 무관한 현혹을 팔아먹지도 않고, 그만큼 저렴하지만 세련되게 기발하다. 유명하지 않은 출연자들 얼굴로 더더욱 실제적인 리얼리티가 구사된다. 게다가 플레이오프 시즌의 야구와 연동되는 시기적절함, 스포츠 산업과 기업 이미지를 동시에 끌어올리는 윈-윈 전략이 실로 탁월하다. 각설하고, 가장 중요한 건 재미있다. 야구팬이라면 정말 좋아할만한, 야구팬이 아니더라도 이 시리즈가 브라운관에 펼쳐지면 호기심있게 지켜보게 될만한 좋은 기획이고, 발상이다. 외국 유명 CF나 뮤직비디오를 무분별하게 끌어다 베끼곤 하는 국내 영상업계의 묻지마 표절식 몰염치를 생각해보면 이런 기획력은 더욱 빛이 난다.
1.올림픽이 끝났다. 무심하듯 시크하게 보내지 못하고 많은 관심 던져주는 종족으로서 하나의 이벤트가 끝난 셈이다. 다음 올림픽이 열릴 2012년에 난 30대다. 이번 올림픽이 내 20대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셈이다. 허허. 어쨌든 어제 야구는 참 기막히는 게임이었다. 신인이었던 이종범의 어마어마한 플레이가 연이어진 93년도 한국시리즈와 작년 WBC를 포함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야구를 본 기분이다. 한작가도 없는 마당에 심판이 작가를 맡았다. 9회 1아웃 만루 상황에서 등판한 정대현의 3구가 극적인 더블 플레이로 이어지는 순간, 대부분의 인간들은 동공이 확 열리는 체험을 했으리라. 수고했다. 금메달을 떠나서, 덕분에 즐거웠어. 여튼 말도 많은 올림픽은 끝났다. 그리고 내 20대도 이제 또 다른 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2.핸드폰을 바꿀 때가 됐다. 난 지금까지 단 3개의 핸드폰을 썼는데 처음 썼던 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모토로라 스타텍이었다. 그 이후로 애니콜로 갈아타서 지금까지 2개의 애니콜을 사용했다. 단 한번도 내 손으로 핸드폰을 고장낸 적은 없었는데 지금 쓰는 폰이 수신자에게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한다. 아무래도 고장난 거 같다. 물론 외형은 말끔하다. 지금 눈여겨 보고 있는 건 모토로라 페블이다. 아무래도 폰을 오래쓰는 내 입장에서는 질리지 않는 디자인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애니콜 사각턱은 아무래도 질린다. 게다가 난 기능이 그리 많은 걸 선호하지도 않는다. DMB도 그닥 필요 없다. 아무래도 조만간 페블을 내 손에 쥐게 될 확률이 클 것 같다.
3.돌아오는 화요일 2박 3일 간의 동원훈련을 위해 원주로 간다. 동원 3년 차라 내년에 한차례 더 받아야 한다. 이런 쓸모없는 짓에 시간을 투자해야한다는 게 그저 원통할 따름이지만 빽 없고 힘없으니 견디는 수밖에. ㅎㅎ 군대도 다녀온 마당에 까이꺼 2박3일, 하지만 짜증나고 재미없는 건 재미없는 거다. 게다가 이건 진정 뻘짓이다. 노트북이라도 가져가서 영화라도 볼까 싶지만 좀 과하다 싶다. 걍 2박3일간의 규칙적인 생활체험이라도 하다 와야지.
4.언제나 그렇지만 기이하게 일이 밀린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잠도 부족하다. 이 뭥미? 여튼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요즘은 체력이 많이 떨어졌는지 별로 움직이지 않아도 체력에 금방 빨간불이 켜진다. 아무래도 운동 부족이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투자해서 기본적인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할만한 필요성을 느낀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30대 배 나온 아저씨 모드로 돌입하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