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의 단상

도화지 2011. 5. 1. 13:52

김연아에 대한 열풍은 우리나라의 척박한 피겨 환경에서 태어난 세계 최고의 자질에 대한 열광에 가깝다. 애초에 피겨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신 위에서 갑자기 툭 튀어 나온 1등 선수를 향한 무한 열광인 셈이었다. 해준 것 하나 없이 전국민이 '국민 여동생'이라는 칭호 아래 1등을 요구하는 상황, 정작 제 발로 1등을 거머쥔 김연아 사이에는 첨언하고 싶은 거대한 부조리의 간극이 있다. 김연아를 보는 9할은 김연아의 피겨보다도 김연아가 오르는 단상의 높이를 보고 있다. 언론이나 대중이나, 여전하다.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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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

도화지 2011. 4. 20. 01:50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이란 이룰 없는 꿈이라 단정짓지만 사실 이룰 없는 꿈이라 단정짓는 순간, 모든 꿈은 이상이 되어 비현실의 영역으로 떠올라 도저히 없는 무언가로 멀어져 간다. 모든 리얼리스트들이 리얼리즘에 갇혀서 자신의 삶을 재단했다고 생각하면 역시 오산이다. 대단한 삶을 개척했다는 이들의 인생지침서를 열심히 사서 열독하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추앙하는 사회가 쉽게 꿈꾸지 못하는 것이, 꿈꾸는 것을 쉽게 허하지 않는 것도 기이하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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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에 대해서 논할 수는 있으나, 그 삶의 바운더리에 깊게 침투하지 못하는 어떤 이가 그 삶의 전반을 두른 생을 진단하고 나설 수 있다는 건 분명 잘못된 인식이다. 동성애자들의 에로스를 정신병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건, 혹은 그것을 취향의 문제라 인식하고 새로운 취향의 개발을 종용할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어떤 이에게 삶의 근간이자 그것이 생의 뿌리인 것을 인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이의 합리란 이기적이거나 무심한 영역을 뛰어 넘은 심각한 폭력인 셈이다. 그 폭력성을 정상의 범주의 것이라 이해하는 정상인들의 행위가 실로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때때로 말을 섞는다는 것이 두려워진다. 정상적이라는 언어의 정의가 다수결의 원칙으로 판명될 수 있다는 신앙은 그 정상적이라는 합의로 잉태할 모든 부조리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무지를 반석으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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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보수와 입진보

도화지 2011. 4. 20. 01:03

조선일보를 보냐, 한겨레를 보냐, 오른팔을 쓰냐, 왼팔을 쓰냐, 따지려거든 차라리 뇌에 나침반을 장착하고 살아라. 옳고 그름에는 좌우가 없다. 대부분 나 보수요, 진보요, 입 방정 떠는 것들의 팔 할은 그 보수와 진보를 토대로 자신의 사회적 계급을 오바로크질 치고 싶어서 안달 난 이들이다. 꼴보수나 입진보나 구역질나는 건 거기서 거기다. 중요한 건 내가 어느 편에 섰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이냐, 라는 문제다. 보수냐, 진보냐, 라는 명제는 그 다음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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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도화지 2011. 3. 30. 18:58

4시 반 시사회를 보기 위해 회사 앞에서 왕십리로 가는 버스를 탔었다. 몇 정거장 즈음 지나니 중학생 정도 되는 애들이 선생님 인솔 하에 우르르 버스에 올랐다. 한 아이가 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가방에 밀렸다. 아이에게 한 마디가 넘어왔다.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마구 앉으면 어떡하니?" 무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무례하게 받아쳤다. "아, 이 인간 뭐야. 짜증나게."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더욱 깊숙한 뒷 빈 자리를 찾아갔다. 아이는 거듭 투덜대고 있었다. 버스를 꽉 채운 아이들은 마냥 시끄러웠다. 문득 <고백>의 오프닝 시퀀스가 떠올랐다. 통제하기 쉽지 않은 미성숙함의 아수라장. 요즘 어린 애들은 예의가 없다는 클리셰 같은 말이 떠오르는 꼰대스러움. 잠시 어지러운 생각이 뒤엉켜 버스 안을 뒹굴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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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극장에서 팝콘 먹는 소리가 거슬려서 화가 났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때마다 궁금한 건 어째서 팝콘 먹는 사람에게 신경질을 내느냐는 말이다. 물론 자신이 팝콘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상영관 내의 모두에게 알리고야 말겠다는 신념으로 격렬한 턱운동을 불사하는 이라면 자제 요망이겠지만, 그게 아니라 단지 그 소리 자체에 대한 불쾌함을 토로한다면 공격 대상을 바꿔야 할 게다. 정당하게 제 돈을 내고 상영관 안에서 팝콘을 먹는 이에게 팝콘을 먹을 때 데시벨 기준이라도 마련해줘야 한단 말일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팝콘을 비롯한, 먹을 거리를 상영관 내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면 모를까. 결국 그건 극장에게 따질 일이다. 버젓이 팝콘 팔아먹고 돈은 극장이 다 버는데, 정당하게 소비하는 소비자 개인이 욕을 먹는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불특정 다수의 관객들이 모여 앉은 상영관 내의 누군가가 팝콘 씹는 소리 정도를 참아낼 수 없는 이가 극장을 찾지 않는 게 맞는 논리 아닐까. 적당한 에티켓은 필수지만 지나친 결벽주의 역시 인정하기 어렵다. 영화를 마치 종교와 착각한 듯한, 그들의 결벽한 감상 논리가 난 팝콘 먹는 소리보다도 종종 더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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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다>는 실력의 오차범위가 불명확한 프로가수들의 무대에 우열의 가치를 도입한다는 것만으로도 불합리한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그 불합리함을 넘어서는 포맷의 시도가 이 프로그램에 대단한 합리를 부여하고, 이를 통해 정체성을 세워냈다. 신선해서가 아니다. 절박했기 때문이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던 베테랑 가수들의 공연을 매주마다 한 차례씩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예측불가능의 결과로 인해서 새로운 무대가 마련된다는 것, <나는 가수다>가 흥미를 자아낸 건 출중한 실력을 선보일 길이 없는 베테랑들의 절벽 위에 비합리적인 투표 제도를 빌미로 슈퍼쇼를 기획해냈다는 측면이었다. 구린 연출과 편집을 견디게 만든 건, 표면적으로 강호의 고수들이 등장하는 진짜 무대 덕분이었고, 궁극적으로 탈락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진검승부를 펼치는 그들의 긴장감이 날것처럼 전해져 오는 순간들이 존재했던 까닭이었다.

 

그 서스펜스가 증발됐다. 그 화려한 무대 이후의 긴장감은 이 리얼리티 쇼의 핵심이었다. 원칙이 무너졌다. 진짜 실력의 등위를 떠나서, 그 투표의 공정성과 기준의 오차범위를 떠나서, 오로지 수치로서 파악되는 불투명한 결과로 무대의 자격을 잇겠다는 야심은 일단 대단한 것이었고 그만큼 기대를 모았던 것이다. 그 야심을 스스로 박살냈다는 건, 이 프로그램의 존재 이유를 함께 지워내 버린 것과 같았다. 김건모가 7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그 무대에서 함께 노래했던 이들이나, 그 무대 밖 어느 브라운관 앞에서 이를 지켜봤을 수많은 시청자들에게나, 굉장한 파고이자 울림이었다. 그걸 단박에 깨는 프로그램의 태도는 실로 기네스북감이다. 김건모도, 프로그램도, 함께 공멸했다. 차후에 대단한 무대를 펼친다 해도, 그는, <나는 가수다>는 쉽게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들의 기준을 파기해버린, <나는 가수다> <나는 가수다>가 아니다. 이런 식이라면 <위대한 탄생>의 아마추어에게는 냉정한 프로의 논리를 어찌 설득할 수 있겠나. 아마추어에게는 가차없고, 프로는 우대하는, <나는 가수다><가요무대>. 모세가 또 한번 홍해를 가르길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나는 가수다>의 진정성을 인정할 날은 오지 못할 것 같다. 존폐의 기로에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쩔 것인가. 궁금하다. 3회 분량 만에 스스로 자해를 자행해버린 프로그램이라니, 이것도 대단한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노이즈 마케팅이 목표였다면, 욕먹을 때 떠나라다 떠나서 쌀집 아저씨는 진짜 쌀집을 차려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몰래 카메라> 찍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면 타임머신이라도 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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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꼰대

도화지 2011. 3. 13. 16:56

혹자가 이명박 욕을 했다. 나는 듣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치가 종종 이명박 같은 짓을 해대는 것을 떠올렸다. 가끔 정치적 진보를 표방하는 이들이 실생활에서 스스로 부조리하고, 권위적 억압을 불사하는 꼴을 보다 보면 구역질이 난다. 정치적인 진보가 일상에서 꼴보수처럼 구는 꼴을, 그리고 심지어 그것이 어쩔 수 없다란 식의 합리를 만들어나가며 본인의 일상을 강요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노릇이다. 사적인 대화 중에는 자신의 이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분신이라도 해낼 것 같은 진보적 투사가 공적인 일상 속에서 둘도 없는 꼴보수가 될 때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주둥이와 뇌의 지역자치제 정책이라도 펴고 있는 것인가 의심스럽다. 이런 진보적 꼰대들의 행위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쥐어주는, 경종을 울리는 이미지로 각인되곤 한다. 그 삶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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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의 결말은 마치 <이끼>의 이장이 던지는 협박 같은 물음에 대한 숭고한 답변과 같다. "네가 나를 감당할 수 있겠냐!"라는, 오만하지만 실로 살 떨릴 만한 물음 앞에 맞서고자 하는 어느 개인은 그 거대한 장벽 뒤에 가려진 더러운 실체를 드러내려 한다면 그 장벽을 깨부수고자 스스로의 생까지 내던질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  이는 이 사회의 수많은 이들의 각성을 이끌어낼 만한, 숭고한 돌팔매질의 전례가 될 것이다. 장자연 사건과 같이 분야를 막론하고 기득권층이 얼기설기 얽힌 이 추악한 사태의 진면목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좀 더 대담하고 거대한 한 방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 거대한 부조리를 조금씩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끼> 낀 세상에서 우리는 끝까지 <싸인>을 남기길 포기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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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위안

도화지 2011. 2. 27. 04:03

지구의 저편에서는 지금 자유를 외치다 총에 맞아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시체가 거리에 널려 있다고 한다. 또 저기 지구의 어느 저편에서는 지금 지진으로 땅이 흔들린 통에 조용한 마을 하나가 쑥대밭이 돼있다 한다. 나는 그저 이야기한다. 그들이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고.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조용히 읊조리며, 무력하게 입을 다물고, 결국 침묵할 것이다. 그리도 무력하지만 그건 그들로부터 머나먼 땅 위에 서서 관망할 수 밖에 없는 자가 수긍해야 할 몫이기에 그것이 내 무력함이라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마음을 추스른다. 당장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마음조차도 다스리지 못하는 인간에게 세계 평화란 너무나도 먼 단어이기도 하고. 지구는 하나, 따위의 슬로건을 내밀며 세계 평화를 기원할 필요까진 없다. 어차피 우린 지구라는 동네 속에서 사는 이웃이고, 들려오는 이웃의 사정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니까. 다만 이웃의 문지방 앞을 넘을 수 없다 하여 이웃에 무관심하거나 방관하진 말자고,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들의 피 묻은 손을 잡아줄 수는 없지만 내 마음이 그들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원기옥으로 쏘아 올려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유의 외침을 응원하며 파괴의 복구를 기원한다. 지금 그들과 무관한 글을 쓰고, 그들과 무관한 식사를 하거나, 그들과 무관한 잠을 자겠지만, 그들을 향한 시선을 통해 그 머나먼 땅에서 들려오는 소식들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자. 그것이 조금이나마 더 나를 인간답게 만들 지이니, 라고 나는 스스로 위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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