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PINA, FOR PINA
춤으로 묻고 답하다
<피나>는 피나 바우쉬의 유산에 관한 영화이자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다. 피나 바우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김나영, 그녀가 말하는 피나와 나.
피나 바우쉬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우리 엄마를 제일 좋아해요. 제겐 독일의 엄마였죠. 인자하고 겸손하셨어요. 어느 위치에 있다는 생각보단 그저 자신의 것을 하시는 분이셨죠. 절대 자신의 것을 강요하지 않으셨고요. 오히려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고 수용했어요. 그래서 새 시대로 나아가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바닥에 깔린 물을 흡수하는 스폰지 같은 분이셨죠.
피나가 급작스럽게 타계한 3년 전 기억이 궁금합니다.
당시 피나가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했어요. 공연 후 관객 인사에서 보통 가운데 서계시는데 옆으로 빠져 계시더니 무대에서 내려오셔선 자꾸 앉아계셨죠. 피나는 모든 해외 투어에 동행하셨는데 예정된 투어를 앞두고 무용수들을 불러모아서 말씀하셨어요. 사실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휴식을 취해야 하니 함께 갈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요. 저흰 오히려 이 기회에 좀 쉬시라며 투어를 떠났죠. 폴란드 투어 중 어느 점심 시간 즈음이었어요. 무대 디자이너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죠. 1시까지 모여달라고요. 다들 피나가 너무 힘들어했던 걸 아니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긴장하며 모였는데 돌아가셨다더군요.
단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무용수마다 리액션은 달랐지만 굉장한 충격이었죠. 하지만 당일 저녁에도 공연이 있었어요. 무대 디자이너는 말했죠. 주어진 공연을 끝까지 하는 게 우리 책임이고, 피나도 그걸 원할 거라고. 프로답게 공연을 마쳤고 피나를 추모하는 의미로 공연 후 관객 인사는 생략했어요. 무대 뒤는 울음바다였죠. 폴란드와 이탈리아 투어가 있었던 그 2주 동안이 장례식 같았어요. 피나가 기다리는 독일로 돌아와서 진짜 장례식을 했죠.
피나가 이끌던 ‘부퍼탈 탄츠테아터(Wuppertal Tanztheater)’가 지속될 수 있는 힘은 뭘까요?
피나는 각각의 무용수들을 제 자식처럼 사랑했어요. 자기 식으로 사랑하는 대신 그 사람의 방식으로 사랑했죠. 그 사랑으로 무용단은 여전히 지속되는 거에요. 피나 혼자 모든 걸 했다면 무용단은 사라졌겠죠. 피나가 무용수들에게 원했던 건 본인들만 알아요. 그래서 공연은 이어질 수 있죠. 그 사랑으로 무용단은 여전히 지속되는 거에요. 40년이 되어가는 무용단이 하루 아침에 확 무너질 리 없잖아요. 모든 무용수들은 여전히 간직한 피나와의 사랑을 공연으로 보여주고 싶어해요. 피나가 무엇을 하고자 했을지 의논하면서 공연하고 있죠.
피나는 <피나>의 촬영 테스트를 이틀 앞두고 눈을 감았습니다. 영화 작업은 어떻게 이어졌나요?
피나는 항상 함께 해야 될 일들은 단원들과 의논했어요. 피나가 빔 벤더스 감독과 작업을 결정했을 때도 빔에게 저희와 논의하라 말씀하셨죠. 빔은 영화를 어떻게 진행하고 싶은지 저희와도 의논해왔어요. 피나가 돌아가신 뒤 영화를 그만둬야 되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저희는 계속 하길 바란다고 빔에게 전했어요. 빔도 좋아했죠. 그리고 무용수들을 모아서 여러분들이 피나와 맺었던 인연과 인상적인 기억을 이야기하고 보여달라 하시더니 그걸 토대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완성된 <피나>를 본 감상은 어땠나요?
하나의 메모리 같았죠. 일단 피나도 나오고 저희가 피나와 맺었던 결실 그리고 형제 같은 저희 무용수들과 함께 겪은 과정들을 보면서 빔에게 영화를 찍자고 요청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피나>에서 본인의 솔로 신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무용수들은 피나에게 드리고 싶었던 것을 표현했어요. 제 독무는 무용단에 입단해서 처음으로 피나와 작업했던 도시 시리즈작 가운데 홍콩 작품에서 췄던 솔로였죠. 피나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는 드문데 예전에 한국에 오셨을 때, 지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 춤을 말씀하셨어요. 자신은 그 춤이 너무 아름답고 좋다 하셨죠. 그걸 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얼굴을 칠하는 장면은 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해준 피나에게 드리는 마음이었어요. 브라질 작품에서 했던 건데 브라질의 한 원주민 부족 여자들은 우리가 연지 곤지 찍듯이 온몸을 빨갛게 칠해요. 그게 그들에겐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법이래요. 몸 전체를 빨갛게 칠한 남자의 몸에 입과 눈과 얼굴을 갖다 대면서 제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건 결국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감사의 표현이었죠.
피나 바우쉬는 어떤 스승이었나요?
피나를 만나기 전에는 춤추기 위해 사는 것 같았어요. 피나랑 작업한 뒤로 춤은 나를 알아가는 도구가 됐죠. 피나 스스로의 물음을 저희한테 주면 저흰 답해나갔죠. 내 안의 것을 보게 하시고 스스로 찾게 만드셨죠. 자신을 표현하려면 진심이 필요해요. 보이지 않는 것을 전달하려면 간절함이 있어야 되니까요. 피나도 자신을 알아가는 중이었지만 생각하는 방법을 알았죠. 그걸 제게 일깨워주셨어요.
피나의 사진에는 항상 손에 담배가 들려있어요.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라 담배가 하나의 돌출 수단이었던 거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피나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정작 당신은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하셨죠. 카멜이란 담배를 피우셨는데 작업할 때 담배만 준비하는 어시스턴트도 있었어요. 가끔 불 붙인 담배를 재떨이에 올려놓고 또 다른 담배에 불을 붙이기도 했죠. 그리곤 ‘어? 담배가 여기도 있었네?’ 하시면서 마저 피셨죠. 처음에는 많은 무용수들이 무용실에서 담배를 함께 피웠대요. 다들 나이가 들면서 담배를 끊고 그런 분위기가 제한됐는데 피나 한 분에게만은 허락됐죠. 물론 공연보실 때는 안 피시죠.
빔 벤더스의 아내이자 사진작가인 도나타 벤더스의 사진전이 서울에서 열립니다. 그 중 본인의 컷도 하나 있더군요.
피나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찍은 사진이에요. 저희 무용단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촬영한 사진가는 거의 없어요. 도나타는 피나의 허락 하에 저희 무대 공연까지 촬영했죠. 피나 무용수들과 함께 한 사진 작업을 책으로 내려는 계획이 있대요. 그 컷은 포트레이트가 필요하다 해서 저희 집에서 촬영했어요.
빔 벤더스와 도나타 벤더스는 피나와의 인연 덕분에 자연히 가까워진 건가요?
빔은 그렇죠. 도나타는 일본에서 빔과 도나타의 사진전을 진행한 일본인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 원래 친분이 있었지만 <피나> 작업을 통해서 가까워졌죠. 애기를 많이 나눠보니 공통점도 있었고, 그 계기로 더욱 친해졌어요. 빔에게 한국에 와서 <피나>의 홍보를 돕게 됐으니 전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으니 영화를 찍으면서 경험했던 것을 얘기하면 된다고 하시더군요. 도나타는 전시 때문에 방문하려 했는데 무산돼서 안타깝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말했어요.
50세가 다 되셨는데, 육체적인 한계가 느껴지진 않나요?
젊은 시절에는 과격한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피나는 제게 항상 정적인 것들을 요구했어요. 처음엔 불만이었죠. 이런 열정이 있는데 왜 항상 저를 정적으로만 표현하려 하는 것일까, 그래서 작업할 때마다 피나 선생님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했었죠.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제 영혼과 육체의 밸런스가 이렇게 맞아 떨어질 수 없는 거에요. 피나는 각각의 사람이 지닌 에센스를 끌어내셨어요. 제가 지닌 정적인 에센스를 보신 거죠.
만약 독일을 가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전 독일에서 그냥 무용을 배운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의 인생을 보고 많이 배웠어요. 독일인들은 세련되고 예쁜 멋은 없지만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겸손하거든요. 그리고 자기가 해야 할 일에 투자할 줄 아는 사람들이에요. 가졌다 해서 드러내며 살지 않고, 도울 줄 알고 노력해서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처음에는 언어도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르니 고생했죠. 철학자가 많이 나올 정도로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나라가 조용해요. 이 바쁜 나라에서 갔으니 처음엔 외로울 정도였죠. 비도 많이 오고. 그 모든 게 결국 저를 보게 만드는 생각과 계기를 만들어줬어요. 독일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제가 없었겠죠.
Who’s Pina Bausch?
독일 출신의 현대 표현주의 무용의 대가. 4개 대륙의 28개국 105개 도시에서 공연.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허문 ‘탄츠테아터’ 장르의 선구자. 전세계 도시들에서 영감을 얻은 <세계 도시 시리즈>로 각광받았다. 2009년 6월 30일 암투병 중 향년 68세로 타계했다.
(ELLE KOREA 9월호 NO.239 'ELLE inter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