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 지방 중학교에 부임한 국어 교사 미카코(아야세 하루카)는 남자배구부 고문을 맡게 된다. 나름의 열의를 갖고 훈련을 지도하려는 그녀와 달리 배구의 경험조차 없는 다섯 명의 부원들은 그저 새로운 여자 선생님이 고문으로 왔다는 사실에 그저 희희낙락이다. 이에 배구 연습에 대한 열의를 심어주고자 미카코는 지역 대회에서 1승을 하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아이들은 이에 가슴을 보여달라는 발칙한 제안으로 응수한다. 수락도 거절도 하지 못하고 어물쩡 넘어가게 된 그녀와 달리 아이들의 열의는 나날이 불타오르고, 이를 지켜보는 미카코는 보람을 느끼면서도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야동’ 제목이나 됨직한 <가슴 배구단>은 <몽정기>와 <워터 보이즈>를 적절히 배합시킨 듯한 청춘 스포츠 코미디물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 속도를 내며 공기 중에서 가슴의 감촉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 성적인 호기심이 팽배한 10대 중학생들의 미워할 수 없는 덜 떨어진 행태를 지켜보는 재미와 그런 아이들을 나름의 열정과 애정으로 돌보며 한층 성숙시켜나가는 여교사의 화학 작용이 바로 이 영화의 본체인 것. 예측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스토리텔링을 진전시켜나간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빤하지만 의도대로 기승전결을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는 정직하다.
<가슴 배구단>은 가슴을 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불타오르는 소년들과 이를 지도하는 선생의 딜레마가 그 자체로 코믹한 소동극이기도 하지만 그들 모두의 성장과 성숙을 다룬 성장극이기도 하다. 가슴을 보겠다는 열의로 배구에 매진하던 소년들은 점차 향상되는 자신들의 기량을 통해서 성취감을 얻어가고 단순한 수단으로 여기던 배구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또한 자신의 과오에 대한 강박을 떨치지 못했던 미카코 역시 아이들을 지도하던 중 불거진 오해로 인해서 다시 한번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지만 결국 이를 이겨내고 진정한 삶의 의지를 얻게 된다.
순진한 소년들의 정서만큼이나 순수한 영화의 정서는 마냥 선하다기 보단 선한 이들로 이뤄진 정서적 합리를 제시한다. 강스파이크를 노리며 크게 휘두르는 절정을 연출하는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고 기분 좋은 웃음으로 리시브를 받아 올린다. 물론 그만큼 결정타가 없다는 인상도 들지만 결코 경기를 내주지 않는 안정적인 운영력이 돋보이기도 한다. 일본 청춘 코미디 특유의 낙관이 지배하는 인상도 들지만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고 깜찍해서 외면할 수 없다. 이 영화로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아야세 하루카의 귀여운 매력도 영화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다. 특히 가슴에 배구공을 넣고 유쾌하게 손을 흔드는 소년들의 안녕은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풋풋한 아이들로 가득한 어느 교실의 풍경, 하나 같이 손에 우유를 들고 마시는 아이들에게서 활기가 넘친다. 하지만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한 교실의 풍경은 어딘가 비정상적인 기질로 가득하다. 교탁 앞에서, 그리고 교실을 한 바퀴 도는, 아마도 담임선생님처럼 보이는 한 여인의 말이 학생들을 향하고 있음에도 마치 독백처럼 들리는,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교실 속 아이들의 무관심한 소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충격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그녀의 한 마디가 아이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 반에 있습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추리소설 <고백>은 아이를 잃게 된 미혼모 선생 유코가 자신의 반 학생들의 종업식 자리에서 밝히는 충격적 고백을 통해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 되는 유코의 일인칭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녀의 고백 속 사건과 관련된 세 명의 학생과 한 명의 학부모의 일인칭 시점을 갈아탄 뒤, 다시 유코의 시점으로 갈무리된다. 소설은 다소 충격의 강도가 높은 내용에 비해 비교적 담담한 일인칭 화법의 구어체 서술로 진전되며 이런 특유의 분위기는 사건 자체의 놀라움을 감정적인 감상으로 전달하기보단 이성적인 이해로서 응시하고 해부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또한 단순히 충격적인 사건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이를 통해 교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플롯 자체에 충실한 냉소적인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를 영화화한 나카시마 테츠야의 <고백>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다섯 명의 시점을 통해 사건을 중계한다. 하지만 텍스트로 읽히는 소설과 달리 이미지와 사운드가 동원되는 영화는 두 매체의 형식적 차이가 관점의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물론 소설과 영화의 내러티브는 동일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건조한 화법을 유지해나가며 감정의 온도차를 발생시키지 않는 소설의 결말과 달리 영화가 좀 더 격양된 톤의 분위기를 지닌 결말을 연출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두 작품은 분명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그 차이란 기본적인 스토리의 태도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매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감상적인 접근 방식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유려한 이미지와 이펙트가 강한 락 넘버로 치장된 영화 <고백>은 건조한 소설과 달리 인위적인 연출 기법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이는 역설적으로 소설의 냉소적인 분위기를 영화적으로 반영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담담한 문체의 저변에 놓인 충격적인 사건과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소설은 활기찬 교실의 풍경을 비추는 유려한 영상의 밑바닥에 끔찍한 진실이 잠재돼 있음을 전해 듣는 과정으로 대체된다. 표면적인 영상의 느낌과 영상 속에 잠재된 분위기가 뒤틀려 있다는 감상은 고백의 시작과 함께 그것이 일종의 위장과 같은 전술적 의도임을 깨닫게 만든다.
<고백>은 이는 개인주의를 넘어선 폐쇄적 관계 회로 속에 매몰된 이들의 출현으로 병리적인 사회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현대 일본 사회의 문제에 관한 의식을 전달한다. 개인주의의 확산과 극심한 세대차, 극단적인 무관심, 공격적인 보호 본능과 충동적인 살해 등, 다양한 병리 현상이 세대의 밑바닥까지 내려오고 있음을 지적하는 충격적인 진단에 가깝다. 관심의 결여가 만들어낸 거대한 괴물이 타인의 영역까지 침범해서 삶을 파괴하고 사회 전체에 거대한 해악을 형성해 나간다는 진리, <고백>은 이 모든 과정을 단지 단 하나의 학급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 속에 온전히 담아내고 그 끔찍한 충격의 강도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다만 종종 인위적으로 조장된 위악적인 플롯과 영상이 자연스러운 감상을 방해하는 단점도 발견된다. 하지만 이마저도 어쩌면 의도적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이 냉소적인 영화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온전히 구현해내는데 충실하다. 무엇보다도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부조리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옳고 그름을 판별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 <고백>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어느 누구라도 쉽게 지나치지 못할, 소름 끼치는 충격에 가깝다. 당신의 사회는 안전한가?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가?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그 고백은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괴물은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좁은 열도에서 세계로 눈을 돌렸다. 일본영화계의 이단아라 불렸지만 결국 세계영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한계와 편견을 베어내고 세계로 나아간, 그는 전설이다.
<라쇼몽>은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감독 개인에게 세계적인 거장으로서의 이력을 부여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일본영화의 황금기를 개척한 작품으로서도 의의를 지닌다. 당시 일본영화계를 이끄는 건 유미주의 형식을 중시하던 미조구치 겐지와 오스 야스지로였다. <라쇼몽>의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은 동시대 일본영화계에도 큰 충격이었다. 심지어 미조구치는 12살이나 어린 새까만 후배가 자신이 얻지 못한 대단한 영광을 일찍 차지했다는 사실에 울분을 삼켰다. 결국 술도 끊고 작품에 전력한 미조구치는 이듬해 <오하루의 일생>을 통해 베니스영화제 본상을 수상한다. 이는 미조구치의 뛰어난 재능에서 기인한 사례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구로사와의 <라쇼몽>이 일본영화에 대한 관심을 활짝 열어놓은 덕분이었다. 실로 ‘라쇼몽 효과’라 불릴 만한 사건이었다.
친문학적인, 반시대적인
구로사와의 <라쇼몽>은 아쿠타가와의 <라쇼몽>으로 이야기의 입구와 출구를 세우고 <덤불 속>으로 통로를 확보해내듯 각색된 영화다. 세찬 폭우가 내리는 ‘라쇼몽(羅生門)’을 다각도로 비추는 몽타주 컷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아래 앉아 있던 나무꾼과 승려가 비를 피하는 행인을 만나 자신들이 겪은 어떤 사연을 고백하는 이야기다. 그 사연인즉슨 이렇다. 백주대낮의 깊은 숲 속에서 어떤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리고 용의자로 붙잡힌 도적과 현장에 있었던 남자의 부인, 그리고 죽은 남자를 몸 안에 빙의한 무녀, 그리고 이를 목격한 나무꾼은 차례로 자신이 체험하거나 목격한 사건에 대해 진술해 나간다.
아쿠타가와의 소설에 기반한 <라쇼몽>과 같이 구로사와는 다양한 고전문학 위로 자신의 창작적 뿌리를 내렸다. 사실 구로사와는 화가를 꿈꾸던 미술학도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슈샤 서양화학교에 입학한 뒤,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마르크시즘 대신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러시아 문학에 심취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이나 <맥베스>를 일본의 정서로 해석한 <란>과 <거미집의 성>을 비롯해 막심 고리키의 <밑바닥>을 영화화하는 등 다양한 고전문학 작가들의 작품에서 얻은 영감을 고스란히 자신의 작품에 투영해내곤 했지만 그 중에서도 “나를 그렇게 부드러운 방식으로 매혹시킨 작가는 없었다”고 밝힌 도스토예프스키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실제로 <라쇼몽>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영화화하기 위한 준비였음을 고백한 바 있는 구로사와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인물들의 고통에 천착하듯 기술해나가는 것처럼 인물들의 고통을 면밀히 살피는데 주력한다.
이런 경향은 구로사와의 현대극 안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데루스 우잘라>, <산다는 것>과 같은 구로사와의 현대극 속 인물들을 두고 일본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이처럼 말했다. “그들은 누구와도 연대하지 않고 자신이 사는 방식을 스스로 정한 뒤 자신만의 고뇌 속에서 혼자 고통 받는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는 인간들이다. 그 극단적인 폐쇄적 태도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대세순응적이라 불리는 일본인들의 태도에 대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주장이 담긴 것 같다.” 일본 최고의 문호로 꼽히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가운데 <라쇼몽>과 <덤불 속>을 각색해 영화화한 <라쇼몽>에서도 이런 태도는 깊게 드러난다.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진술을 펼치는 네 인물은 저마다 설득력 있는 개연성을 획득함으로써 되레 진실을 미궁으로 밀어 넣어버린다. 결국 ‘진범은 누구인가’라는 후더닛 구조의 의문에서 출발하는 <라쇼몽>은 진술의 나열과 함께 시작점의 의문을 희석시키고 같은 사건을 진술하는 인물들의 입장 차이에 대한 심리적 의문에 초점을 맞추게 만든다. 사실 각자의 진술 과정은 저마다의 죄의식을 무화 시키기 위한 변명이자 합리다. 이는 곧 당시 전후 일본 사회에 만연된 가치판단의 부재를 직시하는 것이었으며 대세순응적인 태도에 반발한 구로사와의 반시대적 심리와 깊게 연관돼 있다. 이런 인물들의 태도는 ‘라쇼몽 효과’라 일컫는 진리의 상대성에 대한 예시로서 자리잡았다.
동서양을 녹인 세계적 경지
구로사와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무성영화 변사로 일하는 셋째 형 헤이고의 영향이었다. 헤이고는 구로사와를 곧잘 극장에 데려갔고 그곳에서 구로사와는 다양한 영화적 형식을 체험했다. 무성영화가 자신의 영화적 기초임을 종종 밝혀온 구로사와는 말년에 쓴 자서전에서 “<라쇼몽>은 내가 무성영화를 연구하면서 얻은 생각과 의도를 적용시킬 시험장이 될 것이다”라며 제작 당시의 태도를 소회한 바 있다. 절제된 대사 속에서 인물의 표정이나 행위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은 무성영화에 대한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아쿠타가와의 <라쇼몽>은 어떠한 결말이나 결론을 내리지 않으며 부조리한 형태의 현재적 현상을 냉소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를 영화화한 구로사와는 원작의 태도에서 벗어나 부조리한 상황의 나열을 통해 유머를 발생시키고 끝내 휴머니즘을 각성시키는 작품으로 완결된다. 이는 시대와 풍경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한가운데서 인물의 위선을 고발하고 이를 통해 설득력 있는 웃음을 연출하며 끝내 희망적인 가치를 주장하던 오손 웰즈나 존 포드와 같은 대가들의 방식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면 <라쇼몽>에서 나무꾼의 마지막 진술을 통해 재현되는 도적과 사무라이의 우스꽝스러운 결투는 이에 앞서서 세 인물들의 진술이 각기 다른 양상을 재현하면서도 스스로를 비범하게 치장하던 태도와 대치되는 것이다. 이 차이가 역설적인 코미디를 발생시킨다. 실제적이고 진지한 상황에 놓여 있던 인물의 태도가 위선적인 과장으로 드러날 때, 그 역설적인 찰나가 희극적인 활기로 발전된다. 또한 윤리적인 몰락에 대해 개탄하던 인물들이 라쇼몽 아래서 발견한 어린 아이의 생을 거두게 만듦으로써 새로운 시대적 희망을 거머쥐게 만들고 이를 통해 휴머니즘을 각인시킨다. 이는 시대를 관통하는 원작의 염세적인 시선을 수용하는 동시에 보다 따뜻한 시대적 체온을 갈망한 구로사와의 입김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서구 고전영화들이 발전시킨 다양한 스타일이야말로 <라쇼몽>을 수놓은 영감의 보고다. 구로사와는 이를 통해 노와 가부키 같은 전통적인 일본연행의 형식을 고집한 당대 일본영화계의 풍토와 대척점에 섰다. 당시 일본영화에서 좀처럼 활용되지 않던 클로즈업을 비롯해서 깊은 숲 속까지 파고드는 과감한 트래킹 샷,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향력이 감지되는 숙련된 몽타주 기법, 일정한 간격을 지닌 플래쉬백의 반복적인 변주 등은 그 영향력을 대변한다. 또한 이를 정중동의 인물 배치, 명상적인 리듬감이라는 일본 연극의 전통적 형식으로 포장하며 동서양의 요소를 절충해낸다. 영화학자 노엘 뷔르시는 “내용에 봉사하는 서구 주류의 형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간 미학”이라며 구로사와를 예찬했다. 그의 영화가 단순히 서구 영화에 대한 모방을 넘어서 동서양의 특성을 융화시키는 새로운 경지로서의 발전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특성은 구로사와가 동서양에서 각기 상대적인 평을 얻게 만들었다. 이는 자신의 관점에 따라 상황을 합리화시키는 <라쇼몽>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나는 일본을 향해서가 아니라 전세계를 향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구로사와의 말처럼 그의 영화는 세계적이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1990년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 수상자로 연단에 오른 구로사와는 말했다. “영화는 진정 놀라운 표현 수단이지만 본질을 꿰뚫어 핵심에 도달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영화를 만들어 왔지만 나는 아직도 영화를 잘 모르겠다.” 그러나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콜세지 등 할리우드의 후세대 거장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통해 그의 가치를 지지하고 대변해 왔다. 그렇게 구로사와의 이름은 그가 태어난 지 한 세기에 이른 지금까지도 선명한 빛을 밝히고 있다. 열도의 한계를 이겨내고 서양의 편견을 베어내며 세계로 나아간 구로사와 아키라, 그는 전설이다.
결혼을 하루 앞둔 신부가 예기치 않은 죽음에 터진다. 우발적인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 예비신부 히로코(우에노 주리)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시체를 유기하기로 결심한다. 히로코는 평생 꼴찌로 살아왔다는 열등감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이상형과의 결혼식을 포기할 수 없다. 결국 시체를 트렁크에 담아 집을 나선 히로코는 그 와중에 길에서 빠친코 전단지를 돌리던 코미네(코이데 케이스케)의 차를 탈취해 산에 오르지만 자살을 희망하는 여자 고바야시(키무라 요시노)의 엉뚱한 동행을 받아들인다.
산으로 가는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시종일관 엉뚱한 인물들의 등장을 통해 이야기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범위로 틀어댄다. 뮤지컬적 특성이 강하게 반영된 도입부 시퀀스를 비롯해 때때로 스릴러나 호러적인 연출이 가미되는 등 다양한 장르적 형태가 순열적으로 전시되는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기본적으로 코미디를 목적으로 둔 산만한 소동극이다. 새로운 삶을 꿈꾸던 여자가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많은 사건을 겪은 뒤 비로소 성장을 맞이한다는 성장담이기도 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는 두 여자의 버디무비이자 캐릭터 무비이기도 하다.
두서없이 진전되는 산만한 전개와 과장된 감정을 표출하고 상황을 연출하는 캐릭터들은 고의적으로 의도된 코미디의 양식에 가깝다. 시종일관 비현실적인 태도로 일관되는 상황은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이 현실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품었다는 사실로부터 멀리 달아나기 위한 방편처럼 보일 정도다. 무엇보다도 백치미스러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우에노 주리의 캐릭터 소화능력은 영화적 과장마저 자연스러운 설정으로 이해시키는 윤활유에 가깝다. 사실상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우에노 주리의 매력에 기대고 있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낙관에 대한 강박이 지나친 영화다. 소재적으로 <달콤, 살벌한 여인>을, 캐릭터적으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떠올리게 만드는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앞선 두 영화와 마찬가지로 허구적 사연에 현실적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형식적 열거에 치우친 나머지 본질적인 감정의 밀도를 채우는데 실패한 영화처럼 보인다. 감정이 탈색된 백치미적 사연의 끝에 자리한 성찰적 태도마저도 또 하나의 형식적 나열처럼 보일 뿐, 그에 앞서 전개된 사연의 총합이 이루는 결과적 에너지로서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엉뚱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매 시퀀스마다 순간적인 에너지를 발생시키지만 저마다 파편화된 형태로 굴러가는 시퀀스들은 결과적으로 응집된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하고 곧장 휘발되듯 소모된다. 결국 여정의 나열 끝에 걸리는 캐릭터의 성찰은 딱히 인상적인 감상을 남기지 못하고 어색하게 자리할 뿐이다. 좀처럼 와 닿지 못하는 낙관의 비현실성이 마음에 걸린다. 우에노 주리를 비롯해 과장된 상황에 몰입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결국 그 과장된 상황의 연속적 나열이 부여하는 소동극이 나름의 재미를 부여하지만 전반적인 흐름을 통해 농익어야 할 성찰은 헐겁다. 백치미적인 웃음을 나열하는 것도 좋지만 낙관적 성찰마저 백치미적이라 너무 가볍다.
인간이 된 인형이 바라보는 세상을 그리는 <공기인형>은 배두나의 ‘돌 플레잉’ 덕분에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작품이다. 그러나 <공기인형>에서 인형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관점을 대변하는 대리적 존재란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만큼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겐 자신의 관점을 잘 이해하면서도 인간이 된 인형으로서의 기이한 매력을 잘 살려줄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원래 배두나의 팬이었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배두나는 “기회가 되면 꼭 한번 일해보고 싶은 배우”였다. 하지만 배두나를 <공기인형>의 주인공으로 떠올리고 낙점할 수 있었던 건 “인형이 마음을 갖고 살아 움직이는 만큼 언어가 어눌해도 상관없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공기인형>을 완성한 이후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확신은 보다 굳건해졌다. “배두나가 아니었다면 이 역할은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중 GV가 있던 날, 딸의 작품을 보러 온 “배두나 어머니의 반응이 너무나 궁금해서 객석 반응에 신경 쓰지 못해” 아쉬움도 남았단다.
사실 <공기인형>은 “20페이지 분량의 원작만화”로부터 출발한 기획이었다. “찢어져서 구멍이 난 채 버려진 인형에게 인형이 좋아했던 사람의 숨을 불어넣어주는 순간을 그린” 동화적 세계관의 원작으로부터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건져 올린 건 “인형의 눈에 자신의 시선을 오버랩시켜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발상”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보다 적나라하게 현실을 관통하길 원했다. <공기인형>은 ‘에어돌(air doll)’, 일명 ‘섹스돌’이라 불리는 성인용 섹스 인형을 의미하는 제목이다. 현실을 직설적으로 바라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무덤덤한 감성이 시니컬하게 표면 위로 떠오른 셈이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바라보는 건 “일상의 빛나는 순간”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의 시간이나 공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보여주고 싶다.” 비극과 회의로 치장되기 쉬운 현실을 고스란히 발췌해 살필 뿐, 결코 비관하지 않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정적인 분위기로 영화를 지배하는 가운데 크고 작은 소란을 배치하며 묘한 활기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오는 한 순간의 출렁임을 통해 객석을 진동시켜 울림을 연출한다. 지극히 일본적인 사건과 배경을 담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들이 전세계적으로 호평을 얻어온 것도 그런 보편적 감성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도쿄에서 일어난 사건을 세밀하게 그린 <아무도 모른다>를 본 미국 관객은 우리 동네에서도 그런 사건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을 표했고, 감독 자신의 어머니를 영화화한 것이라 생각한 “<걸어도 걸어도>는 스페인에서도, 토론토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라 이야기하는 관객들”을 마주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를 “참 신기한 일”이라며 멋쩍게 웃어넘기지만 이런 일련의 경험이 깨닫게 한 분명한 진리를 단호한 목소리로 전한다. “철저하게 국내적인 걸 파고드는 것이 결국 그 끝에 놓인 보편성과 통하는 게 아닐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의 작품이 일본을 벗어나 전세계인의 일상 속에 내재된 빛나는 순간과 소통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널뛰기하듯 껑충거리는 서사가 제각각 진행되는 <피쉬 스토리>는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인정받지 못하는 선구적 펑크밴드, 세상을 구할 거란 예언을 듣게 된 청년, 수학여행 도중 잠에서 깨지 못해 북해도 항 페리호에 남겨진 소녀, 그리고 지구 멸망을 앞둔 한산한 도쿄의 레코드점. 어떠한 연관성을 짐작할 수 없는 네 덩이의 서사가 지속적으로 나열된다. 하지만 서사를 쫓아가거나 추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필요는 없다. 두 눈만 멀쩡히 뜰 수 있다면 결말에 다다라 모든 의문은 명쾌하게 해결된다. <피쉬 스토리>는 ‘허풍’이라는 본래의 단어적 의미에 가까운 영화다. 아니면 오해가 부른 거대한 행운이랄까. 엉뚱하지만 기발한 스토리텔링이 때때로 지나친 낙관적 태도로부터 영화를 구한다. 뛰어난 이야기꾼들은 사실 대단한 허풍쟁이다. <피쉬 스토리>는 대단히 재미있는 허풍이다. 그러니까 <피쉬 스토리>는 믿을 수 있는 이야기와 믿고 싶은 이야기 가운데 후자 쪽인 셈이다. 명랑한 허풍이 지구를 구한다. 그리고 관객마저 구할 것이다.
신속하게 치고 빠지는 움직임이 구사되지 않는, 타격감이 없는 성룡영화라니 생소하다. 액션 장면은 있다. 하지만 그 액션 장면에서 성룡은 우리가 아는 성룡이 아니다. 그냥 마구 휘두르고 얻어 맞기도 한다. 액션 활극이 아닌 사실적인 느와르 안에서 성룡의 위트는 전혀 구사되지 않는다. 그 진지함만큼이나 진중함도 대단하다. <신주쿠 사건>은 살벌한 긴장감으로 가득한 도쿄의 비정한 정서를 온전히 체감하는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의 도쿄 생존기다.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한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이 넘치던 90년대 도쿄 신주쿠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희망과 절망을 가로지르는 불법이민자들의 저항과 애환을 핏빛으로 투영한다. 성룡과 판빙빙을 비롯한 중화권 배우들과 타케나카 나오토를 비롯한 일어권 배우들은 제 역량을 다함과 동시에 그 조화가 자연스럽다. 사실적인 신체훼손 장면이 연출되는 등 폭력의 수위가 높지만 그 무거운 정서가 캐릭터의 공포와 분노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무엇보다도 활극적 액션을 연출하지 않고 온전히 표정만으로 승부하는 성룡의 연기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연륜과 관록이 넘치는 성룡의 표정은 비정한 느와르의 내면을 탁월하게 대변하는 창이나 다름없다.
헤비메탈의 하위장르 중 하나인 데쓰메탈은 죽음과 악마 숭상의 뉘앙스를 연출하는 가사와 퍼포먼스라는 외부적 형태가 특성으로 정착된 장르다. 흉악한 가사와 극악한 무대 매너를 통해 광적인 팬덤을 형성한 세기말적인 장르는 그 폭력성을 방출하는 의식적 행위를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발생시킨다. 메탈 음악이 메인스트림을 석권한 핀란드나 동유럽의 국가 중 실질적으로 죽음을 추앙하는 데쓰메탈 그룹이 존재한다고 하나 실질적으로 뮤지션 대부분은 무대와 일상이 분리된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디트로이트 메탈시티>(이하, <DMC>)는 그런 현실성에 착안한 설정을 허구적 캐릭터와 스토리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특히 장르적 구별 없이 음악산업의 인프라가 전방위적으로 구축된 일본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일본에서 이를 소재로 둔 만화가 등장했다는 것도 딱히 놀랍지 않다.
스웨디쉬 팝(Swedish pop)과 같은, 자칭 스위트 팝 가수를 꿈꾸는 네기시 소이치(마츠야마 켄이치)는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한 도쿄에서 가수가 되기 위해 기획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스위트 팝이 아닌 데쓰메탈 밴드 ‘디트로이트 메탈시티(DMC)’에서 극렬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악명을 떨치는 ‘크라우저 2세’로 활동하며 신분을 속이며 살아간다. 지극히 소심하고 내성적인 네기시 소이치가 짙은 분장으로 제 얼굴을 감추고 무대에 올라 크라우저 2세로서 과감한 퍼포먼스를 펼쳐낸다는 설정은 욕망과 현실이 괴리된 캐릭터의 부조리를 유머로 치환한다. 특히 와카스키 키미노리의 동명 원작만화의 에피소드를 충실히 영화적 상황으로 반영한 <DMC>는 유치하듯 쾌활하고 황당하듯 기발하다. 물론 때때로 지나치게 진지한 척을 하며 간지러운 페이소스를 주입하는 광경이 발견되기도 하나 전반적으로 엉뚱하게 전개되는 상황의 위트가 독창적인 매력분포도를 이룬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마츠야마 켄이치다. <데스노트>영화판에서도 L을 연기했던 전력이 있는 마츠야마 켄이치는 <DMC>에서도 소심한 네기시 소이치와 과격한 크라우저 2세를 오가며 만화캐릭터 전문배우라 불려도 좋을 정도로 탁월하게 캐릭터를 소화했다. 만화적인 독창성을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영화적 사실감을 만족시킨다. 자칫 잘못하면 코스프레 수준의 유치함으로 몰락하기 좋은 캐릭터를 영화적 형태로 구현한다. 결국 <DMC>의 특이성을 보장하는 캐릭터가 성공적인 표현력을 갖춘 덕분에 영화적 설정 역시 힘을 얻는다. 또한 영화는 원작의 주요한 에피소드를 영화화에 고스란히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서사의 변주를 통해 영화적 가능성을 그려나간다.
물론 <DMC>는 유치한 슬랩스틱 개그처럼 가볍고 산만한 웃음을 주는 영화다. 여기서 가볍고 산만한 웃음은 깊이에 대한 지적이라기 보단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수사다. 대단한 교훈에 도달하거나 걸출한 각본으로 승부하는 영화라기보단 재기발랄한 캐릭터와 황당한 소동극으로 무장한 개그콘서트나 다름없다. 원작과 달리 과하게 변주된 드라마가 종종 간지럽지만. 흉폭한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과격한 퍼포먼스를 구사하는 크라우저 2세와 순진하지만 소심한 우엉남 네기시 소이치 사이를 오가는 에피소드는 효과적인 웃음을 제공한다. 단편적인 에피소드로 나열되는 원작과 달리 서사적 형태의 드라마로 변주된 영화는 매니악한 소재를 보편적인 드라마로 엮어낸 원작만큼이나 즐겁다. 취향의 제한이 엄격하지 않다면 음악영화로서의 묘미도 만끽할 가능성이 크다.
언제나 그렇듯, 다소 황당하지만 귀여운 그녀와 덜 떨어진 듯 순수한 그가 만나 에피소드는 이뤄진다. <엽기적인 그녀>이후로 곽재용 감독의 머릿속엔 그저 대조적인 성향의 여자와 남자의 만남으로 이뤄지는 좌충우돌 에피소드 밖에 없는 것 같다. <싸이보그 그녀>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무시무시한 괴력을 지닌 싸이보그 그녀(아야세 하루카)는 먼 미래에서 지로(코이데 케이스케)에게 날아와 한시도 그의 옆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남녀의 동거가, 엄밀히 말하면 싸이보그와 주인의 합숙이 시작된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상황이 펼쳐지는지 의문을 품지 않는 게 좋다. 그걸 안다고 해 봤자 모르는 것만큼이나 속 터지는 일이 될 테니까. <싸이보그 그녀>는 두서 없는 영화다. 인과관계에 대한 납득은 좀처럼 불가능하다. 그저 시트콤 같은 상황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된 서사엔 스토리텔링에 대한 장기적인 배려 따윈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 자아도취되는 영화의 감정선 따위에 몰입할 가능성은 반 푼어치도 발생할 리 없다. 거대한 지진을 묘사하는 영화의 끝머리에 다다르면 이 영화의 태생적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늠할 수조차 없게 된다. 한국 개봉을 앞두고 일본 개봉판을 재편집했다는데 전자도 딱히 궁금하진 않다. 영화의 말미에 묘사되는 지진만큼이나 100분의 러닝타임이 끔찍하게 막장이라 원래 형태를 되새김질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나마 아야세 하루카의 미소가 작은 위로가 된다.
난 어려서부터 야구광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광주로 내려간 뒤 10년을 넘게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난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살았다. 선동렬과 이종범은 둘도 없는 우상이었지. 심지어 아침마다 신문을 펴고 스포츠 면 야구 기사에 검정색 모나미 볼펜으로 줄을 치면서 봤다. 덕분에 부모님 역성이 대단했다. 그래도 그 망할 짓을 포기하지 않았고, 부모님은 결국 날 포기했다. 어쨌든 그랬다.
내게 있어서 야구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좋아했던 스포츠이자 그만큼 좋아해본 적 없는 스포츠였던 것 같다. 해태 타이거즈가 기아 타이거즈로 변하고 종이 호랑이로 몰락한 뒤, 잠시 국내 프로야구에 관심이 시들했던 적도 없지 않았지만 작년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척하던 기아를 열심히 지켜봤다. 메이저리그까지 챙겨볼 겨를은 없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당시 박찬호의 18승에 감격했고, 재수 시절 김병현의 월드시리즈 홈런 연타 사건에 충격을 먹기도 했다. 당시 김병현이 홈런볼을 던지기 직전마다 이러다 홈런 맞는 거 아냐, 라고 중얼거리다 주변인들에게 재수없는 주둥이로 낙인 찍혀버린 가슴 아픈 사연도 있단다. 어쨌든 야구란 내게 참 재미있는 게임이다.
내일이면 WBC결승이다. 종범신의 대단한 활약에 감격했던 전 대회에서 한국은 4강이었다. 3번이나 이겼던 일본을 상대로 단 한번 졌는데 하필 그게 4강전이었고 덕분에 짐 싸서 돌아왔다. 내일은 결승이다. 또 일본이다. 이번엔2:2무승부. 이게 무슨 한일 슈퍼리그냐. 아니면 한일전 및 월드 베이스볼 초청 시범경기냐. 게임은 미국에서 열리는데 정작 주인공은 삽질로 물러나고 그 이상한 대전 규칙에 의해 한국과 일본만 죽어라 맞붙는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서로가 지겹고 지겨워서 다시 보기 싫어 죽을 판에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다. 뭐 이딴 시나리오가 있냐고 대본을 내던지고 싶어도 글러브를 내던질 순 없지. 지는 쪽은 최악이고 이기는 쪽은 최상이다. 리얼리티 버라이어티 쇼 따위는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흥미진진한 리얼타임 쇼가 벌어지는 셈이다.
종목을 불사하고 한국을 대표해서 국제대회에 나간 선수들에게 우승해서 돌아오라는 압박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선의의 응원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내일만큼은 이겨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일단 내가 지는 꼴을 보고 속상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하거니와, 그네들이 가장 속상할 것 같아서 말이지. 차라리 미국이 올라왔다면 그냥 결승전을 만끽하고 돌아와도 좋다고 말할 순 있겠다만, 어쩌다 보니 또 일본이다. 이젠 그 악연에 종지부를 찍는 게 좋겠지. 다만 그게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다. 이긴 편은 우리 편, 이라고 외칠 수 없는 상황에서 이긴 편이 우리 편이 됐으면 좋겠다. 다져스 스타디움에 태극기를 꽂아서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알려주세요, 따위는 모르겠고 그 세레모니를 통해 본인들 스스로 환희에 차는 순간을 봤으면 좋겠다. 나라 꼴도 지랄 맞고 ‘뉴딜’이란 단어 하나 익혔다고 여기저기 적용하며 생색내는 MB의 꼴 같지 않는 작태도 흉악한 판에 야구는 그나마 지친 사람들에게 일말의 낙이 되고 있다. 김연아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내일만큼은 국민을 위해서, 대한민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네들 당신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그 다져스 스타디움에 태극기를 꽂고 기쁨에 만끽할 수 있었으면 한다. 최선을 다했으니 꼭 그 보답을 얻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