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아톤의 화면 너머로 소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거구의 경찰 앞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있던 소년은 심문 당하는 중이다. 거칠게 날아오는 손바닥이 얼굴을 강타하는 동시에 질문이 날아온다. “이름?”곧바로 교차된 화면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돈 다발이 떨어지는 욕조의 풍경이 낯설게 삽입된 후, 선명한 조명 아래 제 자리를 잡은 컬러톤의 화면 너머로 퀴즈쇼 사회자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소년의 표정은 역시나 상기돼 있다. 그 전에 질문 하나. “자말 말리끄(데브 파텔)가 2천만 루피(20 million rupees) 상금을 얻기 위해선 (퀴즈쇼에서) 단 한 문제만 통과하면 된다. 그는 어떻게 (그 문제들을 통과)했을까?” 4지 선다형의 질문. 그리고 상황은 다시 반복적으로 교차된다. 경찰의 구타와 퀴즈쇼의 긴장이 연속적으로 자리를 바꾼다. 동일한 질문이 서로 다른 상황을 관통하다 하나의 맥락을 이룬다. 그 와중에 어떤 상념이 다시 끼어든다. 미소 짓는 여인의 얼굴이 점멸하듯 나타나고 사라진다.
하나의 정답을 맞추면 상급 단계로 넘어가는 퀴즈쇼처럼 자말은 인생을 돌고 넘으며 높게 자리잡은 염원을 향해 나아간다. 비극적 테두리에서 시작되는 자말의 거칠고 험난한 인생사는 물음표를 통해 소환되고 정답처럼 나열된다. 폭력이 지배하는 원초적 기운의 사회에서 착취와 유기에 내몰린 자말은 잇따른 상실을 건너며 상흔을 품고 성장해 나아간다. 자말을 성장시킨 수많은 정답들은 그가 염원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건 그저 순리적인 과정들에 불과하다. 모든 우연은 필연을 이루고 끝내 운명으로 명명된다. 모든 지나간 시간은 운명이 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이하, <슬럼독>)는 삶을 가로막고 선 수많은 물음표 사이로 전진해나가는 자말의 인생을 통해 풀어나가는 퀴즈쇼다. 물음이 던져지면 과거가 펼쳐지고 그 사이에 놓인 정답이 드러난다. 현재의 물음을 통해 소환되는 과거는 관객에게 일종의 퍼즐과 같다. 관객은 퀴즈쇼를 통해 자말의 서사를 조립하고 그 운명의 조각들을 수집해나간다.
<슬럼독>은 분명 운명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는 운명에 순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되레 운명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운명을 이야기한다. 배반과 상실의 경험을 덧칠해나가던 자말의 인생은 그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매번 역류를 시도한다. 수많은 물음표가 향하는 정답을 수집하는 과정은 정해진 순리를 뒤따르는 방식이 아니다. 단지 그 정답이 드러난 후에야 뒤돌아 확인하게 되는 지난 과정들이 마치 이미 준비된 운명처럼 인식될 뿐이다. 퀴즈쇼는 자말의 운명을 되짚어 나가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다. 점차 고단위의 문제들이 출제될수록 자말은 평정심을 찾아간다. 경험의 반복 속에서 정답을 찾아나가는 방식에 스스로 익숙해져 간다. 문제의 간극을 파고드는 과거의 경험들은 하나같이 필연의 방식으로 현재를 재구성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마다 익숙한 경험의 실마리를 통해 발견된 정답 역시 지나갈 운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자말은 자신의 염원으로부터 주춤하거나 때때로 물러서야 하는 지난 운명들을 배반하듯 이내 전진한다. ‘누가 백만장자가 될 것인가?(Who wants to be a millionaire?)’라는 물음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치 않다. 그저 라띠카(프리다 핀토)를 만나는 것이 그가 염원하는 유일한 운명일 뿐이다. 그리고 그 염원을 운명으로 개척하기 위해 자말은 답을 고른다.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다.
그 지난한 여정은 <슬럼독>의 피날레를 완성하기 위한 도움닫기와 같다. <슬럼독>은 인도라는 특별한 국적을 무대로 하는 판타지다. 운명을 뒤쫓아 달리는 자말의 서사는 사실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이미 절반 정도는 되감기 버튼과 플레이 버튼을 반복적으로 누르기 위해 마련된 것과 다름없다. 퀴즈쇼와 심문의 빠른 교차를 통해 출발하는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부지런히 오가며 정해진 운명의 수순에 돌입하기 위해 기지개를 편다. 이미 마지막 한 문제를 남겨둔 자말의 현재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는 사실상 이미 현재 시점에서 과거에 놓인 운명들을 관객들이 복기하게 만들면서 다가올 운명에 대한 설득력을 마련하는 셈이다. 결국 지나간 과거는 현재를 위해 복무하는 운명의 알레고리가 된다. 그에게 오늘의 정답을 알려주기 위한 경험의 예시이자 뒤따를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의 구조로서 작동한다. 그리고 결국 그 모든 순간들은 거대한 운명을 이룬다.
각색을 맡은 사이몬 뷰포이는 인도 작가 비카스 스와루프가 집필한 ‘Q&A’를 완전히 풀어헤치고 재배열하는 방식으로 <슬럼독>을 완성했다. 대니 보일은 이에 완전한 이미지를 덧씌워 스크린에 투영해냈다. <트레인스포팅>만큼이나 혈기왕성한 이미지와 사운드로 치열하게 내달리는 스토리는 거칠고 성기지만 유쾌하고 끝내 낙관적이다. <슬럼독>은 할리우드의 자본으로 완성된 발리우드 감성의 영화다. 원시성이 잔존한 인도의 부조리한 현대적 풍경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지지만 그것을 보편화하려는 시도는 최대한 배제된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필터링되지 않은 온전한 이국의 풍경은 생경함을 뛰어넘어 특별하다고 여겨질 만한 이미지로 연출됐다. <슬럼독>은 이국적 세계의 관습과 양식을 충실히 보존하는 겸손한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현지의 양식에 입각한 방식에 대한 실험을 통해 그 특성을 습득하고자 하는 열의를 느끼게 한다. 지정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할리우드의 글로벌 전략은 분명 주목할만한 태도다. 올해 아카데미가 <슬럼독>을 지원 사격한 것 역시 그런 흐름 자체가 현재 할리우드에서 큰 존중을 얻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소년은 시간을 달린다. 그리고 그 시간을 달려 결국 운명을 따라잡는다. 그 운명 속엔 자말을 무너뜨리기 좋은 비극적 기제들이 넘실거리지만 그는 결코 무너지지 않고 자신의 염원을 쫓아 달리고 또 달린다. 결국 자말의 약속은 좌절을 건너 거대한 기적을 이룬다. 그 염원은 개인을 넘어 온 국민들의 염원으로 발전하고 이내 기적처럼 완성된다. <슬럼독>은 우연이 한데 모여 필연을 이루는 과정을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구현한다. 그 끝에 이뤄지는 결말은 운명을 거슬러 오르는 방식으로 완성된 운명이다. 그 모든 건 애초에 운명이다. 그 운명을 납득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중요치 않다. 모든 뒤쳐진 순간들은 이미 운명이 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운명은 분명 어떤 선택을 통해서 결정된다. <슬럼독>은 그 운명적 선택을 설득하는 흥미로운 사연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글을 통해 <슬럼독>을 본다면 그 역시도 운명이다. 물론 그 운명 역시 어떤 선택을 통해 이뤄진 것이겠지만.
결벽적인 화이트 칼라가 지배하는 정돈된 식탁과 책상 위로 시선이 미끄러져 나간다. 그리고 그 공간만큼이나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가 시야로 들어온다. 그의 눈빛은 때때로 공허하다. 그 남자의 시선에 놓인 초점이 종종 현재가 아닌 과거로 맞춰진 탓이다. 유년시절의 한 페이지가 투명한 창 너머의 광경 기억 너머에서부터 소환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15세 시절의 열병과 함께 찾아온 기이한 러브스토리에서 출발한다.
우연한 만남은 소년에게 관음의 기억을 남겼고, 그 기억은 욕망을 소환했으며 결국 사랑을 잉태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는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용납되기 힘든 로맨스로부터 시작되는 물음이다. 자기 나이의 두 배수가 넘는 성숙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어느 소년의 사연과 그 사연을 통해 도달하게 될 어떤 깊은 물음이 불명확한 전후반 구조의 서사로서 서로를 보좌한다.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스티븐 달드리의 <더 리더>는 소설의 시야를 확보하되 초점을 달리했다. 사물에 밀착하듯 섬세한 1인칭 시점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선명하게 묘사하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전지적 시점의 관조적 이미지를 통해 기저의 심리를 의문스럽게 추적한다.
어린 마이클(데이빗 크로스)과 한나(케이트 윈슬렛)의 관계는 만남에서부터 이별까지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남길 정도로 기연에 가깝다. 성숙한 여인의 육체를 관음하다 욕망하게 된 소년과, 생동감 있게 성장하는 소년의 육체를 탐닉하는 여인의 관계란 굴절된 에로티시즘의 정욕처럼 아슬아슬하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출발한 관계를 로맨스로 정착시키는 건 소년의 책이다. 책 읽어주길 원하는 여인은 소년의 낭독을 전희처럼 즐기다 몸을 섞곤 한다. 육체적 관능에서 정신적 교감으로 발전한 소년과 여인의 관계는 위태롭게 휘말리면서도 정적인 추억을 쌓아나간다. 어느 여름처럼 격정적이면서도 풍요로운 로맨스는 소년에게 열병이 일어나듯 시작되고 이내 사라진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또래보다 이른 경험적 성숙을 마친 마이클은 덕분에 평생을 허무에 시달린다. 멜로는 <더 리더>를 관통하는 큰 맥락이다. 하지만 그 멜로에 방점을 찍은 건 아니다. 세심한 문체만큼 감성적인 접근이 돋보이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좀 더 건조한 방식의 시선을 드러내며 의문을 거듭 전진시킨다. 화자의 시선 내부에 놓인 것들을 손 끝으로 어루만지듯 세심하게 묘사하던 원작과 달리 영화의 시선은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비추되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 관계가 빚어낸 감정의 후천적 형태조차도 불분명하다. 어떤 수단에 불과하다 말할 수 없지만 실상 그 관계의 정체가 <더 리더>의 중추는 아니다. 그 멜로는 심오한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편린과도 같다.
한나의 감정적 기복에 대한 근본을 깨닫지 못한 마이클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법대에 진학한 뒤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찾은 법정에서 그 진실을 목도한다. <더 리더>의 본질적 물음이 뚜렷한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건 그 지점이다. 윤리에 대한 물음과 반문이 첨예하고 노련하게 이어진다. 마이클과 마찬가지로 (원작을 접하지 않은) 관객 역시 그 지점에서 그 비밀을 보다 선명하게 자각하게 되는데 이런 덕분에 그 상황이 발생시키는 딜레마를 마이클과 함께 공유하게 된다. 무지에서 비롯된 범죄적 행위로 처벌의 대상이 된 한나의 죄를 경감시켜줄 유일한 단서를 마이클은 알지만 그것을 뱉어낼 수 없다. 이유는 자신의 내면과 외면에 각기 존재한다. 진실을 발설하지 못하는 마이클의 심리적 기저에 놓인 진심은 한나의 그것과 같다. 수치심은 마이클을 함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로 인한 내부적 갈등을 통해 홀로 침식된다.
영화는 원작과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지만 다른 방향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다진다. 원작과 뉘앙스가 달라진 결말은 영화만의 독자적 의미를 구축하기 위한 첨언과도 같다. 비밀을 유지하는 것과 고백을 털어놓는 것 사이엔 상실의 통증과 기억의 배려가 잔존한다. 그 사이에서 온전히 살아남는 건 죄의식이다. 자신의 낭독 행위가 한나의 삶을 치유하기 위한 절대적 수단이었음을 직감한 마이클은 그 일화에 얽힌 비밀을 보존함으로써 그녀를 배려하지만 동시에 그 법정의 공모 속에 동참한다. 역사가 잉태한 죄의식이 개인에게 전이돼서 세대의 장벽을 넘어서는 일련의 상황을 목격할 때 홀로코스트적인 상처가 목격된다. 죄의식의 유전과 이로 인한 동통이 깊게 감지된다. 침묵의 시선으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마이클은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한번 낭독을 시작한다. 그리고 한나는 언어를 읽고 쓰기 시작한다. 자신을 몰락시킨 무지로부터 해방된다.
시대적 광기에 천착했다 뒤늦게 그 무게를 짊어지게 된 운명만큼이나 타인의 삶에 얹혀진 운명을 뒤늦게 깨닫고 그와 함께 침전해버린 이의 운명 역시 가엾고 모질다. 결국 한나는 깡통에 돈을 남겼고, 유대인 생존자의 딸은 깡통만을 소유한다. 돈은 문맹재단에 전달되고 마이클은 고백을 결심한다. 자신의 비밀 속에서 반평생을 허무로 견뎌온 마이클은 결국 한나의 기억을 자신의 후세대에게 물려준다. <더 리더>는 운명의 과업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들이 새로운 삶을 염원해나가는 방식을 담담하게 비춘다. 묵직한 질문들이 때때로 버겁게 다가오지만 냉정하듯 주시하는 영화의 시선엔 깊은 배려가 포착된다. 물론 역사적인 기록은 세대를 넘어 전승되고 죄의식은 보존된다. 단지 과거에 대한 단죄만큼이나 중요한 건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더 리더>는 엄중한 기록을 바탕으로 새겨진 역사 속에서 휩쓸려간 개인의 삶을 통해 그 물음을 정중하게 제시한다. 마치 온 몸을 연기적 자재로 활용하는 듯한 케이트 윈슬렛의 열연은 그 물음을 보좌하는 훌륭한 주석이다. 무엇보다도 그 질문을 외면하지 말 것. 우리에게도 역시 아픈 역사는 존재하므로.
엄숙한 장례미사가 진행 중인 성당을 메운 하객들 가운데 홀로 서있는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는 중이다. 짧은 백발과 뚜렷한 주름의 굴곡은 그의 세월을 짐작하게 만드는 나이테와 같다. 부인에 대한 애도로 굳은 표정이 일그러진다. 엄숙함이 지배하는 장례미사 가운데 그의 심기를 거슬리는 일들이 눈 앞에 가득하다. 장난을 치며 히죽거리는 손자들과 피어싱이 눈에 띄는 손녀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바쁘다. 그의 입술 한 쪽이 일그러진다. 장례미사가 끝난 뒤 집에 돌아온 그는 옆집에 이사온 동양인들을 보게 된다. 그의 입술 한 쪽이 또 한번 일그러진다. 그가 사는 동네엔 동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이민자들이 늘어만 간다.
보수주의자인 월트 코왈스키에게 작금의 현실은 개탄할만한 변화의 연속이다. 젊은이들은 날이 갈수록 무례해지고 예의는 점점 씨가 말라간다. 게다가 자신이 사는 동네엔 그 예의마저 가르치기 힘든 이방인들의 유입이 넘쳐난다. 그는 가치관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다. 젊은 세대의 무례함을 혐오하고 피부색이 다른 이민족들의 유입을 경계한다. 자신의 일생이 투영된 ‘포드’의 1972년산 ‘그랜 토리노’를 아끼는 그에게 ‘도요타’에서 근무하고 일제차를 운전하는 아들과 그 내외는 탄식할만한 현실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란 대화가 껄끄럽지만 한낱 물려받을 유산이 남아 있는 삭막한 관계에 불과하다. 어린 손녀조차도 할아버지의 재물을 탐내고 사후 처리를 묻는다. 이웃에 입주한 동양인들 역시 그에게 야만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월트가 상종할 수 없는 족속이라 믿었던 새로운 동양인 이웃은 그의 시니컬한 삶에 예기치 못한 새로운 계기들을 마련한다.
어느 날 저녁, 동양인 양아치 갱단의 난입으로 벌어진 이웃의 소란에 월트가 개입한다. 결국 총구를 들이밀고 그들을 물리친 월트는 이웃의 감사와 함께 거듭되는 사례를 얻지만 그것이 이타심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님을 스스로 잘 아는 월트에게 호의는 버겁기만 하다. 그러나 그 후로 월트가 우연한 계기로 이웃의 소녀 수(아니 허)를 한차례 더 구하게 되고 두 사람은 말문을 트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로 인해 수는 자신의 남동생 타오(비 뱅)를 월트에게 접근시키고 두 사람의 친분이 형성된다. 부인과 사별한 뒤, 자식들과 괴리된 채 홀로 살아가는 월트의 고독은 개인주의적 사회의 산물에 가깝다. 세대의 교류가 불필요한 세계 속에서 아버지 세대는 쓸쓸히 늙어간다. 반면 동양인 이웃엔 살가운 가족주의적인 풍요로 가득하다. 두 집안의 문화적 대비만으로도 대조적인 이미지가 형성된다. 그 차이는 월트의 편견을 일깨우는 상대성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월트의 허전함을 자극하는 무언의 구실로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동양인 남매는 월트의 강한 편견을 넘어설 수 있는 예외적인 호의를 가능케 한다. 젊지만 의외로 예의 바르며 이방인이지만 무례하지 않다. 편견을 넘어 인간적 호의가 발생하고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랜 토리노>는 그 지점에서 본격적인 시동을 건다.
<그랜 토리노>는 어느 완고한 보수적 노인의 존엄한 결정을 비추기 위한 영화다. 자신의 우직한 신념을 키로 삼아 인생에 시동을 걸며 외길을 주행하던 월트가 그 시동을 유지한 채 새로운 길로 들어서서 펼치는 마지막 레이스를 숭고하게 묘사한다. 그는 결코 자신의 편견을 후회하거나 그로 인한 지난 과오를 참회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신념의 확신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 것이 정당한가를 판단할 뿐이다. 월트가 유색인종과 젊은 세대를 찌푸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근거는 사실 어떤 면에서는 합당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예의가 없고, 존중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월트의 문제의식이 단순히 그들에 현재를 힐난하기 위한 수단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그런 광경을 방조하거나 야기시키는 풍경 너머의 근본을 향해 인상을 찌푸린다. 전통을 중시하지 않는 부모를 둔 자식들은 예의를 잃어가고, 이방인의 사회에 편입되어 어울리지 못한 채 겉도는 유색인종들은 비뚤어진 폭력의 연대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
월트는 그 모든 표면적 문제로부터 타오를 격리시킴으로써 그를 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키려 한다. 하지만 문제는 쉽지 않다. 그 근본을 해결하지 않고선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의 너비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점차 어떤 결심을 굳혀나간다. <그랜 토리노>의 결말은 종교적 영험함에 다다를 정도로 엄숙하고 장엄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전파한다. 그러나 <그랜 토리노>는 그 위대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만만찮은 위트가 발견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월트가 내뱉는 촌철살인의 독설은 사실 욕쟁이 할머니의 그것처럼 살갑다. 독설로 포장된 위트에 가깝다. 이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객석을 들었다 놓는 유희로 소화된다. 한편 <그랜 토리노>를 지배하는 대단한 박력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월트, 엄밀히 말하자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장악하고 제스처와 구체적 행위를 더하는 것만으로 씬의 공기를 변화시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얼굴만으로 씬을 지배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후로 4년 여 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인생 전반을 통해 벌어들인 내공의 깊이와 너비를 스크린에 고스란히 투영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한 모양새를 구축한 연출력 역시 관건이다. 기복 없이 구획이 명확한 플롯과 감정적 빈틈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유연한 내러티브의 흐름은 <그랜 토리노>의 완벽한 행열을 이룬다. 이완과 긴장을 오가는 인물 간의 관계가 희극과 비극의 팽팽한 구도를 완성한다. 우직한 스토리텔링과 함께 세심하게 진전되는 캐릭터의 구도와 심리적 양상이 너비와 깊이를 함께 구축한다. 계산적인 정공법이라기 보단 경험적인 방식의 이야기 세공력이 빛을 발한다. 단순한 제스처의 반복이 거대한 복선으로 장착되고 미약하게 감지되곤 하던 어떤 암시가 거대한 전율로 확장된다. 계산적인 동시에 감각적인 양식으로 보좌되는 플롯과 내러티브의 구축은 <그랜 토리노>의 주제를 보필하기 위해 마련된 탁월한 부속품들이다.
(스포일러라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그랜 토리노>의 결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종결하는 <그랜 토리노>는 어느 보수주의자의 깊은 혜안을 담고 있다. 월트는 문 앞에 성조기를 내걸 만큼 애국심이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개인주의적인 젊은 세대는 지독한 이기주의로 이해되며 타민족의 활발한 유입은 국가주의적 결속을 해치는 무분별한 난입으로 이해될만한 것이다. 지독한 편견은 그 자체로 혐오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개인적 악의로서가 아닌 전체적인 존속을 위한 고민으로서 그런 편견을 유지하고 지탱해나간다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랜 토리노>는 단순한 문제제기의 수준에서 시동을 꺼버리지 않고 그 해결점이 모색될만한 지점을 가리키며 새로운 주행방식을 설득시킨다. 월트의 ‘그랜 토리노’가 단순히 그의 지난 자부심을 위한 전시물이 아닌 미래의 새로운 주인을 위해 물려지는 산물로서 거듭날 때 <그랜 토리노>는 새로운 시대를 배려하는 대안적 정책으로 거듭난다. 아메리칸 드림을 지나 전세계 인종의 전시장이 된 오늘날의 미국이 더 이상 백인들의 전유물이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체감한 백발 노인의 보수적 신념은 자신의 영토를 어떤 방식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혜안과 우직한 결심으로 발전된다. 외부인의 유입을 막을 수 없는 현실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모색한다. 차별과 편견을 통한 억제가 아닌 선별과 교화를 통한 육성을 제시한다.
50년 전 한국전에 참전했던 월트는 전장에서 짊어지고 온 살육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는 명예로운 훈장의 치욕적 진실을 잊지 못한다. 그의 현실적 고독도 대부분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사별한 부인이 자신과 친분이 있던 신부 (크리스토퍼 칼리)에게 남편의 고해 성사를 부탁한 것도 그런 상흔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트는 그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자신의 죄책감에 맞선다. 그에게 지난 비극은 당면해야 할 현실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그 죄를 사해달라 요청하지 않음으로써 이를 온전히 자신의 책무로 짊어지며 살아간다. 그의 결심도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 비극을 잉태한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책임지려는 태도는 고집만큼이나 비장한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건 자신의 기득권이 쇠퇴하고 있다는 위기에 젖어 염치없는 망발을 일삼는 어느 보신주의자들의 얄팍한 보수주의 퍼포먼스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정의가 무너지고 인간의 예의가 망가지는 사회에 대한 염려가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자신의 육체를 공익적 방도로 삼아 사회에 환원한다. 스스로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될지라도 소신이 향하는 방향으로 과감히 돌진한다. 자신의 노쇠한 육체가 새롭게 거듭나는 사회의 비료가 되길 희망한다. 자신이 점지한 대안 세대에게 폭력의 책무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로서 그는 복수가 아닌 징벌을 택한다.
<그랜 토리노>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작품이다. 아들과의 괴리감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월트는 딸을 그리는 복싱 트레이너 프랭키와 비슷한 실루엣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프랭키와 달리 월트는 자신이 응원하는 후세대의 좌절을 짊어지고 퇴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후세대의 발목을 잡는 모든 제반 조건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마지막 삶을 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라스트 씬이 쓸쓸하게 퇴장하는 노장의 뒷모습이었던 것과 달리 <그랜 토리노>는 새로운 전통의 주인이 된 타오가 그랜 토리노를 운전하고 사라지는 저편을 롱테이크로 비춘다. 그 풍경은 새로운 세대의 존립을 위해 삶의 마지막을 태운 어느 노장의 깊은 철학이 이룬 성과다. 롱테이크로 비추는 그 풍경에서 변하는 건 비단 인간을 통해 움직이는 차량 뿐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변한다. 인간이 변할 때 세상도 변한다. 결국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변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도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가, 라는 고민과 함께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가, 라는 고민이 대칭을 이룬다. <그랜 토리노>는 그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에 묵직한 답변을 남긴다.
팔순을 앞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느 보수주의자의 냉철한 시각에 담긴 따뜻한 혜안을 그린다.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되 그 신념이 나아가야 할 철학적 공정함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신념이다. 기득권의 보신을 위해 보수주의의 문패를 내거는 알량한 거짓 연기와 다른 진짜 보수주의자의 덕목을 숭고한 방식으로 구현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렇게 거장의 철학을 또 한번 설득시킨다. 언젠가 노장은 죽는다. 다만 사라지지 않을 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언젠가 죽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랜 토리노>는 그에게 영원을 약속하는 이름이나 다름없는 걸작이다. 마치 누구나 탐내는 1972년산 '그랜 토리노'처럼.
사진 찍는 거 좋아하세요? 촬영하는 걸 보니 포즈가 꽤 능숙하더군요. 자꾸 하다 보니까. (웃음)
의류 모델로 처음 데뷔했다고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한번 하고 쭉 쉬었어요. 본격적인 방송 일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와서 시작했고요. 물론 처음 연예 분야의 일을 시작한 건 그 때가 맞긴 하죠.
우연히 친오빠와 동행했다가 관계자 눈에 띄어서 뽑혔다던데.
얼떨결에 찍게 됐죠. 그런데 학교에서 그런 걸 못하게 해서 대학에 들어간 뒤 다시 활동해야 했어요. 제가 예고를 나왔는데 저희 학교는 절대 연예 활동 불가였거든요. 그래서 몰래 몇 번 찍곤 했죠. 방학 때나 주말에.
예고라면 오히려 더 관대할 것 같은데 아니었나 보군요.
저희 학교는 절대 금지였어요. 학교 내에서 그런 차이를 두는 건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나 봐요.
예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는 건 이미 그 전부터 연기자로서의 삶을 동경했다는 것이겠죠.
연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막연했죠. 사실 예고 같은데 가보고 싶어하는 여자애들이 있잖아요. 저도 사실 교복이 예뻐서…….(웃음) 어쨌든 그렇게 고등학교에서 연기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꿈도 굳히게 됐어요. 공부하는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학교에서 한 학기마다 우리끼리 연극을 한 편씩 준비했는데 그런 과정 덕분에 연기를 배우는 게 재미있다고 느꼈어요. 솔직히 진짜 이렇게 될 줄은 몰랐죠. 왜냐면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서도 이렇게 진짜 활동하게 되는 친구들은 많지 않거든요. 결국 대학에 진학해서 좋은 기회를 만나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셈이네요.
결국 그 당시 막연하게 생각했던 걸 일단 현재로선 이룬 셈입니다.
선배들보면 전공자가 졸업을 해도 정작 이름이 알려지는 분은 몇 명이 안됐거든요. 한 학년에 50명이 지원해도 경쟁이 워낙 치열해서 과연 나에게 기회가 올까 싶기도 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좋은 기회가 와서 제대로 시작할 수 있게 된 거죠. 그 땐 그냥 연기라는 걸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거 같아요. 게다가 어린 마음에 뭔가 하나만 해도 크게 느껴졌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날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한두 달 사이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하고, 예전엔 오디션을 보러 가야 했지만 이젠 날 찾아주는 상황 자체가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죠.
학업과 연기를 병행한다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저 휴학 많이 했습니다. (웃음) 졸업을 되게 늦게 했거든요. 진짜 힘들게 졸업했어요. 계절학기까진 아니지만 인터넷 수업을 꽉 채워서 듣기도 했죠.
그런데 연예인은 편하게 졸업한다는 오해도 있잖아요. 심지어 그런 이유도 공격받는 경우도 있고.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웃음) 생각보다 깐깐하고요. 레포트도 잘 내야 되고, 출석 체크도 꼬박꼬박 몇 번 이상은 해야 되고.
오히려 더 엄격하게 규정을 적용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은데요?
없진 않았어요. (교수님이) 너한테 점수를 더 주고 싶어도 남들에게 형평성이 어긋나 보일 수 있다는 말씀을 종종 해주셨어요.
첫 방송 데뷔는 연기자로서가 아니었죠.
<천생연분>이라는 프로그램을 했었죠. 그러니까 방송 첫 데뷔는 오락 프로그램으로 한 셈이죠.
그리고 연기자로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탄 건 시트콤 덕분이었고요.
<논스톱4>하기 직전에 <그녀를 믿지 마세요>나 <요조숙녀>라는 드라마도 하긴 했죠. 그 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촬영장에 갔고, 여러 선배들에게 기가 눌렸던 기억도 나요. 하지만 <논스톱4>는 또래들과 노는 것처럼 연기한 거 같아요. 처음을 생각하면 정말 긴장 많이 했었던 기억이 나긴 하네요.
또래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편했을 것 같은데요.
사실 제가 극중간부터 투입된 상황이었는데 이미 그 친구들끼린 워낙 친해져 있었어요.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처음엔 낯설었죠. 그래도 또래인 덕분에 많이 친해졌어요.
<바르게 살자>는 <그녀를 믿지 마세요>이후로 4년 만의 영화 출연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1년 가까이 공백도 있었던 거 같은데요. 제가 그때 사무실 문제도 있었고, 학교를 마치는 문제가 있어서 조금 일을 쉬다가 다시 나오기 시작할 때였어요.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공백? 그런 게 있었죠.
두 번째 영화이자 3년만의 영화 현장인 셈인데 낯설진 않았나요?
오디션과 미팅을 거쳐서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 출연하게 됐지만 사실 그땐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죠. 카메라 위치도 파악하지 못해서 많이 헤맸어요. 이제 막 데뷔해서 한참 시작할 때라 촬영장 자체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요조숙녀>까지 병행하게 됐었죠. 영화 현장이나 방송국 드라마 현장이나 다 나름대로 어렵고 헷갈렸어요. 하지만 <바르게 살자>는 여유를 지니고 했던 거 같아요. 모든 배우들과 그렇게 친해질 수 있었던 적은 처음이었고 덕분에 제 모든 걸 열어서 작품에 임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현장에 대한 적응력과 연기적 영향력과의 상관 관계를 깨닫게 된 셈이군요.
제가 영화를 두 편밖에 못해본 상황이었지만 그런 거 같아요. 크랭크인 전부터 장진 감독님이나 라희찬 감독님, 그리고 모든 배우들이 대학로에 모여서 연극처럼 연습했거든요. 연습이라고 해서 맨날 대본만 읽는 게 아니라 사담도 나누고, 그래서 나중에 편하게 찍을 수 있었나 봐요. 주로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보니까 연습도 그냥 편하게 앉아서 했죠. 여기가 은행이라고 해, 그냥 여기엔 네가 앉아있어, 이런 식으로. 재미있었어요. 삼척에서 한 3개월 정도 촬영했는데 촬영이 없을 때는 다 같이 찜질방도 가고, 가족처럼 지냈죠.
<바르게 살자>에서 시골의 평범한 은행원을 연기했죠. 솔직히 외모가 평범하게 느껴지는 건 아닌데 역할에 잘 어울리는 인상이더군요.
촬영 전부터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했어요. 감독님은 정말 시골인 삼포 시내에 있는 은행 직원 같은 외모를 원하셨던 거에요. 그런데 저보고 다른 배우들보다 연예인처럼 생겼다면서 어떡하냐고, 고민을 많이 하시는 거에요. 난 별로 그런 소리 못 듣는데, 그러니까, 아니라고, 이 중에서는 영은 씨가 제일 연예인 같다고, 어떡하면 좋냐고. (웃음) 사실 감독님이 되게 수줍음이 많으셔서 말도 잘 못하시는 분이거든요.
라희찬 감독님 말이죠? 결국 해결책은 찾았던 건가요?
“영은 씨 어떡해요.” 그러셔서 제가, “머리 자를까요?” 그러니까, 잘랐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주저 없이 단발로 잘랐어요. 제작자로 참여한 장진 감독님이 어떤 영화에서라도 자신이 특출하게 돋보이는 배우보단 어떻게 하면 서로가 같이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영화로서 좋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 역시 좀 더 촌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머리를 잘랐죠. 노 메이크업이기도 했고. 그런데 사실 그 즈음에 머리를 잘라보고도 싶었어요. (웃음)
작년엔 일일드라마 <미우나 고우나>에 출연했었죠. 일일드라마는 강행군처럼 스케줄이 이어질 텐데 힘들진 않던가요? 조금 빡빡하죠. 일일드라마는 일정이 길기도 하고요. <미우나 고우나>는 8개월 정도 찍었어요. 처음에는 야외 촬영과 세트 촬영이 유동적으로 변해서 힘들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야외 며칠, 세트 며칠, 이렇게 날짜가 명확히 정해져서 오히려 미니시리즈보다도 편해지더라고요. 미니시리즈는 너무 왔다 갔다 하는 것들이 많잖아요.
차라리 스케줄이 규칙적이니까 오히려 안정적일 수 있겠군요. 미니시리즈는 변수도 많고 현장 상황도 돌발적인 경우가 많긴 하죠.
미니시리즈 같은 경우는 대본도 늦게 나오고 계속 대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니까요. 그런 면에서는 일일드라마가 편했던 거 같아요. 고정적인 스케줄이 8개월 동안 있었던 거잖아요. 회사를 다니듯이.
출퇴근 하는 기분이었군요. (웃음)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도 그런 지점에 있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사전 준비과정에 할애되는 시간도 다르고요.
영화는 긴 시간 동안 작품을 준비하니까 하나씩 깊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죠. 드라마 같은 경우는 시간에 쫓기고, 장소에 쫓기고, 이래저래 쫓기다 보니까 뭔가를 그냥 일차적으로 빨리 생각해서 바로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순발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거 같고요. 그런데 솔직히 <구세주2>는 리딩을 많이 하긴 했지만 현장에서 워낙 많이 변했기 때문에. (웃음) 영화 같지만 좀 자유분방한? (웃음)
혹시 전편 <구세주>는 보셨나요?
예. 그럼요.
전작은 최성국 씨와 신이 씨의 개인기 향연이었죠. (웃음) 그리고 속편의 이미지를 안고 가는 만큼 배우를 비교하게 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수순일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씨를 대신해 본인이 투입되는 것처럼 느껴도 이상한 일이 아닌 거죠. 그래서 한편으로 의아한 것도 사실입니다.
다들 그런 얘기를 많이 하세요. 어떻게 하다 그걸 하게 됐냐? (웃음) 사실 최성국 선배님 캐릭터만 전편과 같고 나머지는 다 다르죠. 한 캐릭터만 그대로 쫓아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거라 <구세주2>는 전편처럼 코미디만 생각하고 영화를 선택한다면 안될 거 같아요. 멜로적인 느낌이 있기 때문에. 신이 선배님이 전편에서 코믹한 개인기를 많이 하셨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분명 코믹에 주안점을 둔 것도 사실입니다. 그만큼 뭔가 부담되는 바도 있었을 것 같아요. 웃겨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느꼈을 수도 있고. 그런 부담 정말 많았어요. 코미디 영화니까 나도 여기서 뭔가 해야 되나? 그런 생각을 했었죠. 그래서 대표님이나 감독님, 최성국 선배님에게 그런 고민을 얘기하기도 했어요. 그런 부분 때문에 부담스럽다고 말씀 드리니까 그럴 필요 없다고, 그냥 편하게 하면서 군데군데 조금씩 네가 생각하는 의견을 제시하고 맞춰나가면 된다고 말해주셔서 그때부터 편하게 했죠.
사실 최성국 씨는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올 것 같은데.
저희 (매니저) 오빠도 얼굴만 봐도 웃긴데 넌 어떻게 연기를 했냐고 하던데요. (웃음) 저도 정말 맨날 그렇게 웃기기만 할 줄 알았는데 사실 되게 진지하세요. 의외의 모습이 많더라고요. 처음엔 그래서 선배님이 하는 말씀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을 못했던 적도 있어요. 너무 진지하게 다 말씀하셔서, ‘내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 그랬죠. (웃음)
그 외에도 의외라고 생각되는 지점은 없었나요?
아이디어가 정말 많아요. 재미있는 아이디어는 선배님께서 거의 다 내셨거든요. 그리고 대본에 주어진 것만 따라가는 게 아니라, “야, 이 부분 재미없지 않냐? 우리 다시 한번 대사 맞춰보자.” 이러면서 수정해 나가고. 사실 뭔가 건성으로 하실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거든요. 그런데 노력도 많이 하시고 의외였어요. 그래서 한번은 제가 그랬죠. “의외신데요?” (웃음)
최성국 씨의 애드립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당황스러운 적은 없었나요?
의외지만, 애드립 전엔 저한테 다 말씀해주셨어요. “내가 여기서 이렇게 가려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애드립 치면 넌 어떻게 반응할 거 같아?” 그러시면, 전 “이렇게 할 거 같은데요.” “그럼 그렇게 하자.” 이런 식이었죠.
최성국 씨와 호흡이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낯가림이 심하다고 했는데 누가 먼저 상대에게 접근했나요?
그런 건 없어요. 그냥 리딩했어요. (웃음) 아무래도 제가 낯가림이 있는데다가 경력 15년 차의 대선배님이니까 제가 접근하긴 어려웠죠. 그런데 감독님까지 포함해서 셋이서 리딩을 정말 많이 했어요. 사실 리딩이라기 보단 둘러앉아서 작품얘긴 조금하고 사적인 얘기 많이 하고, (웃음) 그러면서 조금씩 친해질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나중에 말씀하셨어요. “이영은, 친해지기 힘들었다.” 그랬더니 최성국 선배님도, “야, 나보다 힘들었냐? 난 죽는 줄 알았어.” (웃음) 이러시는 거에요. 그때야 알았죠. “아, 전부 다 힘들었구나.”
현장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코미디 영화라서 조금 다르게 느껴진 부분은 없나요?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서. (웃음) 솔직히 말씀 드리면 10월 중순에 촬영이 들어가서 12월 말에 끝났어요. 거의 드라마 찍듯이 되게 빨리 찍었죠. 하루에 몇 컷이 아니라 몇 씬을.
개봉일이 급하게 잡힌 감이 있습니다.
지금 많이들 급하십니다. (웃음) 촬영 끝나고 편집도 하고 좀 늦어질 줄 알았는데 배급이 바로 잡히는 바람에 급해졌죠. 사실 저희는 개봉일을 일찍 잡으려 했지만 배급이 좀 늦어질 거 같아서 천천히 준비했나 봐요. 그런데 배급이 갑자기 잡히는 바람에 홍보도 급해졌죠. 저도 이번 주에만 예능 프로그램만 몇 개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웃음)
예능은 사실 오랜만 아니었나요?
데뷔 때 이후론 오랜만이죠.
요즘 예능은 좀 무시무시하죠. 상대를 희화화시키려는 독설이 대단하니까요.
사실 연기를 하다 보면 대본에 주어진 몫을 따라가기 때문에 상대방이 대사 치면 내 대사 치고, 그렇게 서로 주거니 받는 것에 익숙해지죠. 그런데 이들은 서로 막 얘기를 하니까요. 그러니까 특히 연기자 입장에서는 언제 말을 해야 할지 헷갈리는 경우가 생기죠. 저분이 얘길하는데 내가 끼어들면 분위기가 깨지지 않을지, 그런 걱정이 있어서 조금 어려웠던 거 같아요. 애드립이 많다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첫 주연작인만큼 흥행에 대한 걱정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얼굴이 포스터에 내걸린 풍경만 봐도 만감이 교차할 것 같고. 좋기도 하지만 부담도 되고, 걱정도 되는데 정말 현장에서 재미있게 찍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잘 될 거 같아요. 사실 아무도 기대는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카피도 그렇잖아요. 안다, 아무도 기대 안 한다는 거.
그것도 최성국 씨 아이디어인가요?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런 아이디어를 자연스럽게 내시는 거 같아요.
어쩌면 배우가 단순히 연기자로서뿐만 아니라 기획자로서 영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걸 배울 수 있었던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덕분에 저도 자연스럽게 뭔가 참여해보려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사실 예전 같았다면 OST를 위해서 노래해라 그랬을 때, “저 진짜 노래 못하거든요.” 이런 식으로 발뺌했을 텐데 이번엔 그냥 연습해서 노래 부르고 있고. (웃음)
분명 본인에게 새로운 자극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상업영화로서 첫 주연작인만큼 의미가 크죠. 아까 여기로 오는 길에 영화관 앞에 포스터가 걸려있는 거에요. 막상 보니까 신기했어요. <구세주2>는 상업영화로서 첫 주연작이기도 한만큼 의미도 크죠. 한편으로 촬영장에서 많이 배웠던 거 같아요. 대표님이 편집실에 놀러 오라고 해서 처음으로 영화 편집실에 가보기도 했어요. 제가 영화를 몇 편 안 했지만 어쨌든 편집실을 왔다 갔다 해본 적은 처음이었죠. 대표님과 선배님이 거기서 제 장단점에 대해 이야길 해주더라고요. “넌 웃을 때 저렇게 웃어. 그런데 이렇게 웃는 게 좋을 것 같아. 네가 여배우로서 이런 점이 장점이지만 이런 점은 단점이기 때문에 네가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아.” 이런 식으로 많은 걸 새롭게 배워온 거 같아요. 아무래도 제게 그냥 이끌려간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일부로 상의를 많이 해주셨나 봐요. 덕분에 저도 모르게 영화에 대한 애착이 생길 수도 있었던 것 같고요.
아무래도 공동작업으로서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겠네요.
물론 제가 편집적인 부분까지 생각하면서 연기를 한 건 아니지만 편집실에 가서 편집이 이뤄지는 모습을 보면서 새롭게 뭔가를 배우는 기분이 들었죠.
처음 캐스팅 제의가 왔을 때 어땠나요? 처음엔 원래 멜로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그러다가 두 번째로 받았을 때, 코미디가 조금 첨가돼서 내용이 변했었죠. 오히려 예전 멜로 시나리오보다 재미있게 느껴져서 잘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그 때까지도 원래 <구세주2>라는 제목이 아니긴 했죠.
원래 시나리오는 멜로였다는 말이죠?
원래 시나리오는 멜로였고 코믹한 느낌이 아니었죠. 지금의 최성국 씨 같은 캐릭터가 아니라 멋진 남성이 등장하기도 했고요. 캐릭터도 많이 변했죠.
본인 캐릭터도 많이 변했나요?
처음보단 좀 더 순수하고, 맑고, 엉뚱하고, 들이대는? (웃음) 원래는 좀 청순 가련한 느낌이었어요. 오래 돼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랬던 거 같네요.
사실 본래 본인의 이미지가 다소 밝은 편으로 인식된 바가 없는 건 아니죠. 아무래도 웃는 표정이 먼저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고요. 원래 성격도 마찬가지일까요?
밝고 명랑한 편이죠. 그런데 낯을 많이 가려요. 사람과 친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의외로 조용할 땐 되게 조용하기도 하고요.
연기를 하면서 성격이 변한 건 없나요?
오히려 데뷔하기 전에 낯도 안 가리고 명랑쾌활 그 자체였던 거 같아요. 오히려 일하다 보니 낯도 많이 가리게 되고, 좀 폐쇄적으로 변했죠. 그러다가 <바르게 살자>로 다시 많이 열린 거 같아요.
왜 그렇게 변하게 됐을까요? 어떤 특별한 경험이라도 겪은 건가요?
그렇다기 보단 촬영장에서 선배님들과 얘기하는 걸 불편해했나 봐요. 옛날에는 일은 일, 친구면 친구, 그런 걸 분명히 구분했는데 요즘은 일하면서도 이렇게 어울릴 수 있구나, 라는 재미를 찾아가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사회 경험이 없던 시기라 민감했던 건 아닐까 같습니다.
누구나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경계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린 나이에 어른들과 같이 부딪히며 일하다 보니까 그런 구분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현장에서 그냥 연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연기가 아니라 일상에서는 사교적인 편인가요? 친구들과는 술도 마시고, 놀러도 다니고, 영화도 보고 자주 만나요. 얼마 전엔 친구와 함께 대학로에서 나가서 <즐거운 인생>이란 작품을 보고 왔어요.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러 다니는 거 보면 그 분야에 대한 관심도 있나 보죠.
사실 <미우나 고우나>하는 가운데 연극을 해보자는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어요. 장진 감독님이 ‘연극열전2’에 참여하는데 같이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셔서 대본도 봤거든요. 캐릭터가 저랑 잘 맞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해보고 싶었지만 일일드라마를 하다 보니까 고정적인 스케줄이 있어서 도저히 시간을 뺄 수 없었죠. 기회가 되면 연극도 해보고 싶어요. 노래를 좀 더 잘 할 수 있다면 뮤지컬도 해보고 싶고.
최근 <미우나 고우나>에서 연기한 황지영은 우울한 캐릭터였죠. 사실 기존의 본인 이미지를 배반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연기하는 당사자의 느낌이 궁금하군요.
우는 씬을 하거나 어두운 캐릭터를 연기하면 이상하게도 저까지 정말 많이 침체돼요. 밝은 연기를 할 땐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죠. 저도 제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많이 따라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미우나 고우나>에서 우울해 죽는 줄 알았어요. (웃음) 많이 다운돼 있었던 거 같아요.
연기적인 감정 몰입이 실생활에 주는 영향력이 있었다는 말이군요.
음, 제가 그렇게 큰 연기자가 아니라서 대답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웃음) 약간 캐릭터의 내면을 따라 가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밝은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기 때문에 감정적 격차를 더욱 크게 느낄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남자에게 버림받으면서도 울고 매달리는 역할이라서 그 친구가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도 많았어요. 그 친구가 돼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예전에 천방지축 캐릭터를 연기하면 아무 생각 없이 현장에서도 그렇게 행동했던 반면 <미우나 고우나>에서는 사랑과 이성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만약 내가 남자랑 진짜 이러면 어떨까. 그랬더니 기분 나쁘고 좀 그렇던데요. (웃음)
아무래도 작품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부분 이외에 배우 혼자만 짐작하고 추측해 가야 되는 측면도 있었을 텐데요.
그때 이제 처음으로 어두운 연기를 하게 되면서 책을 정말 많이 봤던 거 같아요. 멜로적인 내용이라던가 뻔한 느낌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글을 많이 읽었죠. 사랑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나마 대신 느껴보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사랑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연애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결혼을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나이가 나이인지라 주변 친구들 중엔 벌써 결혼 고민하는 친구가 많죠. 그런데 아직 저는 그런 생각까진 못해봤어요. 사실 둔하기도 해서 이성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진 못하는 편이에요. 막연하게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누군가에게 소개받고 그럴 수 있는 성격은 아니거든요.
사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게 배우에겐 중요한 경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여배우에겐 더욱 그럴지도 모르죠. 조금 단순한 대입일지 모르지만 사랑에 대한 경험이 배우에게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멜로의 깊이가 결정될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으니까요.
솔직히 아무래도 저는 그런 경험이 부족한 게 사실이죠. 대신 이제 책을 통해 감정을 많이 느껴보려고 하지만 쉽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언젠가는 멋진 남성을 만나 연애해보고 싶어요.
데뷔 초엔 밝고 명랑한 이미지로 어필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신의 이미지가 한정적으로 소모된다는 걱정이 있었나요?
데뷔 때 워낙 발랄한 말괄량이 느낌의 연기를 많이 했으니까 대중들은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솔직히 감독님들도 그런 한정적인 역할을 시키려고 하셨고, 그래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나는 언제나 한번 저런 비련의 여주인공 한번 해볼까, 언제 한번 저렇게 섹시하고 도발적인 거 해보나, 그런 고민이 많았죠. 저도 성숙한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어떤 선배한테, 나는 지금 같은 순수하고 맑은 역할보단 성숙한 연기를 해보고 싶은데 내 이미지를 너무 한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같다고 그랬더니 저를 한심한 듯이 바라보면서 말씀하셨어요. 네가 배우를 1,2년 할 게 아니라 계속할 거라면 그런 고민하지 말라고,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어리광스럽고 말괄량이 같은 연기를 3년 후에 할 수 있겠냐고, 못한다고, 나이 먹어가면서 네 걸 하나씩 만들어가면 되는 거지, 그걸 그렇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그게 맞더라고요.
지금밖에 할 수 없는 역할이 있는 거니까요.
사실 아직 어떤 역할이 제 자신한테 맞는 역할인지 저도 잘 모르죠. 그래서 이렇게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서 하나씩 알아가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리고 제가 지금 갑자기 변해버리면 그에 따른 부작용이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조금씩 변화하면서 찾아보고 싶어요. 제 옷이 뭔지.
하지만 선점했던 캐릭터 이미지가 선입견을 형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부분이 캐스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도 무시할 수 없겠죠. 자신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한정될수록 다른 걸 해보고 싶다는 욕구도 커지기 마련일 테고요.
예전에 엉뚱하고 발랄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정말 청순하고 서글픈 역할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결국 그걸 하게 되니까 하나씩 욕심이 더 생기는 거에요. 이젠 악녀역할도 해보고 싶고 또 여장부역할도 한번 해보고 싶고, 도발적인 역할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물론 어울릴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고 싶어요. 도전해보고 싶은 거죠. 하지만 아무래도 대부분의 감독님은 모험하지 않으려 하고, 한정적인 이미지를 염두에 두니까 쉽진 않을 거에요. 하지만 제가 조금씩 변화를 얻을 수 있다면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어요. 사실 이젠 과거의 발랄했던 느낌으로만 저를 생각하시는 분들이 예전만큼 그렇게 많은 것 같진 않아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아직 자신의 대표작이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아직 저한테 맞는 게 뭔지 아직 모르겠어요. 다만 정말 제 옷이라고 할만한 걸 입게 되면 그게 아마 대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은 있죠. 아직 저에게 뚜렷한 무언가가 없지만 한편으로 그게 오히려 장점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여러 가능성을 조정할 수 있잖아요. 사실 제가 연기생활을 오래 해온 것도 아니고 아직까지 다양한 역할을 많이 못해본 만큼 그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죠.
이제 올해로 스물 여덟입니다. 이제 2년이 지나면 서른인데 지금 시점에서 아쉽다고 느껴지는 것들이 있을까요? 지금 제가 하는 생각들을 좀 더 일찍 할 수 있었더라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좀 많이 고지식했었나 봐요. 좀 더 열려있었더라면, 어린 나이에 그걸 좀 더 알았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해서 크게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내 자신이 만약 그랬다면 연기생활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은 들죠. 사람들과 많이 친해질 수도 있었을 거고, 그랬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고지식했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너무나 정석적인 행동이라 할까요? 지금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예전엔 밤 10시만 되도 늦은 시간이라 집에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어려서 그런지 그런 건 나쁘다고 생각했나 봐요. 오랫동안 친했던 사람들이 아니면 마음을 잘 열지도 못했고요.
엄격한 자신의 틀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 기준에서 최대한 벗어나는 걸 용납하지 않았던 거 같고요.
그 틀에 많이 갇혀 있었던 거 같아요. 거기서 벗어나지 않으려 했죠. 그걸 20대 초반에 알았으면 사회 생활하는데 있어서도 지금과 달라진 부분이 있었겠죠. 그렇다고 지금 어려운 건 아니지만 좀 더 유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예전엔 응석받이 느낌이 강했던 거 같아요. 융통성이 없었죠. 촬영이 끝나도 다른 배우들과 같이 얘기도 나눌 수 있는데 그냥 칼같이 집에 와서 그 다음 날 분량을 준비하고, 지금은 몇 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그리 됐지만 예전엔 그게 아니었거든요. 아무래도 신인으로서 느끼는 긴장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스스로 그런 바를 깨닫기 보단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언니들과 얘기하다 보니 많이 느꼈어요. 제가 아주 어린 나이에 데뷔한 건 아니지만 20대 초반에 데뷔해서 어느 정도 나름대로 얼굴이 알려진 상태에서 생활하게 됐잖아요. 그런데 그로 인해 경험치가 많이 부족해진 것에 대한 후회가 있어요. 남들보다 경험하기 힘든 제약이 있다 보니 그런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있죠. 그래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많이 해보려고 하고 있지만요.
처음 버라이어티 연예 프로그램으로 데뷔해서 드라마, 영화에 출연했고, <행복 주식회사>까지 진행도 맡았어요. 경험의 너비는 어느 정도 마련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 깊이가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요?
그게 지금 제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도전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어떤 배우들은 예능프로를 안 하고 배우로서의 길을 걷는 분도 있고, 한편으론 병행하는 분도 있고, 이렇게 각자 자기 생각에 따르는 거니까요. 아직 저는 그런 것들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에게 맞는 것만 있다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도 재미있겠죠.
다른 장르에 비해 코믹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는 종종 그 작품의 성격에 지배당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런 측면에서 의식되는 바는 없었나요?
저는 아직 고정적이거나 한정적인 이미지가 뚜렷하게 없어서 여러 분야에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코미디라고 해서 그런 이미지에 한정될 거란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오히려 새로운 분야고 그만큼 새로운 연기를 해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죠. 예전에는 무언가에 새롭게 도전하는 게 많이 두려웠어요. 지금은 많이 변한 거 같아요.
두려움보단 욕심이 많아진 건가요?
제가 아직 뭔가를 확실히 이루지 못했지만 아직도 기회는 좀 더 많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 만큼 좀 더 욕심이 생기는 거죠. 예전에는 단지 연기자가 되고 싶다는 게 꿈이었다면 이젠 좀 더 큰 욕심이 자꾸자꾸 생기는 거 같아요.
이미 영화화된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의 작가이기도 한 앨런 무어의 걸작 그래픽 노블 ‘왓치맨(Watchmen)’은 과거의 사실을 허구의 재료로 삼아 새롭게 쌓아 올린 역사다. 바꿔 말하자면 실존의 이름으로 포장한 거짓의 세계관이다. 베트남전과 닉슨,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을 경계로 한 소련과 미국의 미사일 전쟁 위협, 핵전쟁의 우려로 상징되는 세3차 세계대전까지, 역사적 메타포로 치장된 작품 너머의 현실은 사실을 인용한 허구에 불과하다.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과 3선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까지, 현실을 가장한 텍스트와 이미지로 구성된 그 세계는 엄연한 가상이다. 그 모든 건 착란의 발상에서 비롯된다. 케네디 암살 이후 대욱 강경해진 동서진영의 대립이 발병시킨 폭력의 징후와 공포의 착시로부터 잉태된 거대한 허구가 암울한 ‘코스튬 히어로(costume hero)’의 스토리텔링을 출산시키기에 이른 셈이다.
가면을 뒤집어 쓰고 독자적으로 제작한 제복을 걸친 히어로들이 밤거리를 누빈다. 아노미 상태의 도시와 사회를 정화시키겠다는 자발적 본분 아래 세상을 감시하고 범죄를 다스리고 종래엔 조직을 정비해 힘을 결집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개인들의 이념과 성격 차이로 간격이 벌어지거나 충돌이 발생하던 중 정부의 코스튬 히어로 활동 금지를 담은 ‘킨(Keene)’ 법령이 제정되고 히어로들의 활동권은 영구히 박탈당한다. 그들은 더 이상 강대한 미국의 새로운 신화를 자처할 수 있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다.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 선전도구이거나 이를 거부한 채 추방당하거나 쫓기는 불순한 음해세력에 불과하다. 가면을 벗은 은퇴한 히어로가 되거나 정책에 대항해 아나키스트처럼 살아간다. 체제적 감시와 음모, 그리고 대중적 멸시 속에서 억압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들은 영웅으로 살아가던 과거를 그리거나 멸시하며 살아간다.
잭 스나이더는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도사린 우중충한 음모론의 시대를 그린 <왓치맨>을 묵시록의 이미지로 승화시켰다. 더 이상 환영 받지 못하는 히어로들의 번뇌와 고민이 강렬하게 투영된 원색의 사각 프레임을 음울하고도 우아한 그로테스크의 스타일리쉬로 변주한다. 거친 질감으로 구현된 원색 바탕의 이미지와 방대한 대사량과 내레이션의 여백까지 삽입된 직사각형 틀의 일정한 간격은 프레임의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대체되고 온전히 구현된다. <왓치맨>은 최대한 원작에 충실한 재현을 선택했다. 원작을 미리 접한 이라면 마치 코믹스의 움직이는 버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다만 강한 원색 톤으로 이뤄진 원작의 날카로운 색감과 달리 영화는 회화적인 색감과 대비적인 음영으로 환상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물론 세세한 구석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원작의 내러티브 가운데 일부는 스크린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제외됐다. 스토리텔링의 큰 줄기를 보존하는 범위에서 선별된 삭제 범위는 현명한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럼에도 160여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은 원작의 너비가 그만큼 방대함을 상대적으로 입증한다.
<300>의 비쥬얼을 염두에 두는 관객이라면 <왓치맨>에서도 그 기대감의 일부를 보상받을 수 있다. 물론 <왓치맨>과 <300>의 비주얼을 영화적 결과값으로 설명하는 건 원작의 차이를 간과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두 작품의 영화적 결과는 원작의 영향력 아래 놓인 것이다. 잿빛 필터를 씌워놓은 듯 톤 다운된 채도에 극대화된 명암 속에서 혈기왕성한 전투씬 사이마다 고속촬영을 통해 우아한 움직임을 새겨 넣던 <300>은 분명 스타일리쉬의 한 정점을 찍었다고 할만한 작품이다. 팽창된 근육질 사내들의 육체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300>의 직선적인 세계관과 달리 <왓치맨>은 다양한 캐릭터들간의 복잡하게 뒤엉킨 관계의 맥락들이 제각각 어지럽게 보존된 세계다. 정신분열적인 산만함이 난해함을 부르지만 심오한 상징과 은유의 체계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특성이 각기 다른 히어로 캐릭터들은 복근 하나로 팀워크를 과시하던 <300>의 스파르타 전사들과 또 다른 묘미를 선사한다. 음영을 강조한 듯한 컬러는 도시의 비열한 정서를 이미지로 각인시키고 영화의 무게감을 한층 더한다. <300>과 마찬가지로 우아하면서도 과감하게 묘사되는 이미지즘의 향연은 <왓치맨>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배트맨과 유사한 슈트를 입고 비행선을 조종하는 나이트 아울(패트릭 윌슨)을 비롯해 신적인 능력을 지닌 푸른 사내 닥터 맨하튼(빌리 크루덥), 끊임없이 변하는 데칼코마니 형상의 복면을 음침하게 뒤집어쓴 로어셰크(재키 얼 헤일리), 날씬한 몸매만큼이나 날렵한 액션을 구사하는 여성 히어로 실크 스펙터(말린 애커맨), 뛰어난 지력과 속을 알 수 없는 오지맨디아스(매튜 구드), 그리고 비극적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불한당 마초 히어로 코미디언(제프리 딘 모건)까지, 제 각각의 캐릭터들은 모든 슈퍼 히어로의 판본을 되새김질하면서도 독자적인 매력을 구축한다. <왓치맨>은 그 다양한 캐릭터의 사연이 담긴 원작의 스토리를 간과하는 바없이 스크린에 전시하고 나열해나간다. 원작에 충실한 영화적 표본의 한 전형이라 말해도 좋을 만큼 <왓치맨>은 종이 위에 그려진 평면의 세계를 스크린으로 탁월하게 이양했다. 원작의 열렬한 팬이라면 분명 이 작품에 열광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유명한 배우 하나 등장하지 않는 <왓치맨>은 덕분에 가면 너머의 캐릭터들의 익명성을 객석까지 공고히 다지는 인상이다. 그 이전에 원작에서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를 이루는 캐스팅이 실로 성공적이다.
다만 그 흔한 히어로물들을 상기하고 극장을 찾은 이들에게 <왓치맨>은 지독하게 무겁고 엄숙한 장례미사나 다름없을 가능성이 크다. <왓치맨>은 광활하고 방대한 이야기다. 단순히 히어로 무비에 대한 관성적인 기대감을 품고 <왓치맨>을 본다면 자신의 기대와 무관한 성찰과 기도의 시간을 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원작에 숨어있는 시대적 메타포를 향유할 수 없는 관객에게 <왓치맨>은 그저 끔찍하게 긴 제의에 불과할 따름이다. 물론 이건 작품의 잘못이 아니다. 적어도 영화는 자신의 의지에 걸맞은 성취를 이뤘다. <왓치맨>은 분명 난해하고 심오한 원작 그래픽 노블의 새로운 전시관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한다. 결말부의 미세한 변주 역시 영화적인 설정으로서 좋은 선택이었다 평할만하다. 영화적인 재해석을 포기했다기 보단 좀처럼 재해석이 불가능한 세계를 온전히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곁가지를 쳐내고 주요한 설정의 일부를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원작의 시대적 기류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디테일의 수선을 마쳤다. 원작을 뛰어넘는 재해석을 선보이진 못했다 해도 원작의 명성을 공고히 다질만한 스크린작은 하나의 명예에 속한다. 원작의 팬이라면 <왓치맨>을 통해 원작을 되새김질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또한 <왓치맨>을 통해 원작을 읽고 싶어질 관객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후자보단 전자의 쪽이 영화와 원작을 섭렵하는데 있어 좀 더 우월한 감상의 위치를 선점할 가능성이 생긴다. 원작보단 영화가 좀 더 친절한 편에 속하는 까닭이다.
<왓치맨>의 히어로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자가 아니다. 신이라 불려도 될만한 닥터 맨하튼조차도 실험적 실수에서 비롯된 후천적 돌연변이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능력이란 기술과 자본의 힘을 빌린 메카닉으로 무장하거나 예기치 않게 돌연변이가 된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지독한 신념을 품고 신체를 단련하거나 이상을 고취시키는 것뿐이다. 닥터 맨하튼을 제외한 나머지 히어로들은 단련된 사람들일 뿐이다. 실제로 앨런 무어의 원작 그래픽 노블에서는 히어로 코믹스의 영향력에서 코스튬 히어로가 등장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왓치맨>은 단지 초인들의 활약과 특별한 고독을 묘사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다. 현실의 정치를 은유하고 사회를 관찰하며 인간의 심리를 탐구한다. 특수한 가면과 의상으로 정체를 가린 히어로들은 제각각 모순된 사회를 바라보는 관찰자임과 동시에 억눌린 인간의 본성을 촉발시키는 주체가 된다. 결국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방식으로 선택한다. 진실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거나 필요악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거대한 선을 구축하거나, 혹은 이에 동조하거나 그저 무기력해지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방식을 모색하고 선택한다. 그들의 코스튬은 비범한 특수성을 위시하는 이미지라기보단 내외의 이중적 심리를 드러내는 상징과도 같다. 처참하지만 한편으로 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만드는 결말부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구조가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임을 자각하게 만든다.
‘누가 왓치맨을 감시할 것인가?(Who watches Watchman?)’라는 질문은 단순히 스크린 너머의 세계에 갇힌 고민만은 아니다. 거대한 힘의 움직임은 모든 작은 것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움직임을 끊임없이 주시하지 않을 때 세상은 때때로 위태로워진다. <왓치맨>은 그 심오한 질문을 내던지기 위한 새로운 그릇이다. 또한 <왓치맨>은 익숙한 대답을 떠오르게 만든다. ‘영웅으로 살다가 죽거나 오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 영웅을 악당으로 변모시키는 시대. 아이러니하게도 프랭크 밀러의 ‘다크나이트 리턴즈’와 앨런 무어의 ‘왓치맨’이 등장했던 그 시기처럼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를 넘어 잭 스나이더의 <왓치맨>이 도래했다. 슈퍼 히어로 코믹스를 한 단계 진일보 시켰던 1980년대의 변혁을 상기시키듯 21세기 다크 히어로 블록버스터의 한 시대가 열리고 있다. 영웅을 악당으로 변질시키는 건 단지 영화 속의 시대상에 불과한가? <다크 나이트>와 <왓치맨>을 보게 될 21세기 관객들은 과연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20세기의 그래픽 노블들은 왜 21세기의 스타일을 입고 다시 구현되는가. 가상의 세계를 수놓은 화려한 비주얼 너머로 도사린 의미심장한 물음엔 어쩌면 우리가 얻어야 할 어떤 조언이 자리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왓치맨>의 원작에서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모든 건 네 손에 달렸어.'
격양된 목소리 너머로 사진과 기사가 흐른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프로레슬러의 전성기가 언어로 구술되고 이미지로 비춰진다. 영광의 나날들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환호와 열광이 빗발치던 지난 세월을 넘어 눈앞에 들어서는 건 어느 적막한 대기실의 풍경. 작은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그는 고단하고 힘겨워 보인다. 영광의 세월을 지나 노쇠한 육체는 여전히 그 세월을 연장하기 위해 부딪히고 내던져진다. 사나이는 여전히 자신의 전설을 놓지 못한다. <더 레슬러>는 전설을 먹고 사는 어느 루저를 위한 송가다.
영화 속 대사처럼 프로레슬링은 ‘다 짜고 하는’게 맞다. 리얼리티를 가장한 버라이어티에 가깝다. <더 레슬러>는 그 합이 완성되는 과정을 여과없이 들춘다. 과격한 퍼포먼스가 링 위를 지배하고 승자와 패자의 구도 역시 배역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허구의 노동은 실로 헌신적인 육체적 공갈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합을 맞추고 과정을 숙지한다 해서 노동이 부정되는 건 아니며 고통이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해에 가까운 엔터테인먼트다. 살점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는 와중에도 극적인 연출을 고려하고 내러티브를 유지해야 한다. 그 와중에 정교한 합이 어울려야 한다. 그 퍼포먼스가 실제적인 고통과 고단한 노동의 성과라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값어치를 발생시킨다. 수난이 심할수록 관객의 열광도 더해진다. 링에서 영웅이 된다는 건 얼마나 자학적인 수난을 감내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그것은 실로 절박한 진심을 담고 있는 피학적인 거짓말인 셈이다.
랜디 램(미키 루크)은 화려한 퍼포먼스와 테크닉을 통해 2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링의 전설로서 군림했다. 링 위에서 영웅으로 연호되는 레슬러지만 그는 사실상 남루한 삶을 살고 있다. 경기가 끝나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집세를 내지 못해 좁은 차 안에 몸을 누이고 맥주 한 모금에 갖가지 약을 삼킨다. 작은 임대 트레일러에서 홀로 살아가며 대형마트에서 잡일을 하고 주말마다 링에 오르는 랜디의 삶은 패배자의 정서를 연상시킨다. 그가 링을 떠날 수 없는 까닭 역시 그 삶과 연관돼있다. 링을 떠나면 랜디는 진짜 패배자의 삶에 갇힌다. 그의 삶을 증명하는 건 오로지 링에 서는 것뿐이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을 역전시킬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링 위에서 관객의 환호를 얻는 것만이 그 삶을 부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동정의 여지로 가득한 랜디의 삶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객관화된다. 다큐적인 질감을 품은 카메라 기법은 <더 레슬러>를 페이소스로 가득한 감동의 도가니에서 구출시킨다. 종종 랜디의 뒤를 차분히 뒤따르곤 하는 카메라는 이를 통해 관객에게 그 남자가 걸어나가는 그 세계를 같은 눈높이로 응시할 기회를 준다. 환호와 열광 속에서 링에 오르던 랜디가 고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집주인이 잠근 열쇠를 열지 못해 비좁은 차 안에 몸을 누이는 과정은 실로 대조적이다. 또한 온몸에 스탬플러가 박혀 피투성이로 대기실에 앉아있는 랜디의 모습을 먼저 비춘 뒤, 끔찍한 유혈을 동반한 경기 과정과 경기 중에 얻은 상처를 대기실에서 치료하는 과정을 교차시켜서 적나라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시선엔 어떤 과장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기교를 동반한 배열상의 편집은 있지만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기 위한 노력은 극도로 절제된다. <더 레슬러>가 <록키>와 명확한 차이를 두고 있는 지점이다. 인물에 대한 감상주의적 접근을 최대한 배제시키고 철저하게 객관화시켜서 그 세계를 응시하고 인물에 대한 관찰을 요구한다.
물론 랜디라는 레슬러에 대한 감정일체가 생성되지 않는 건 아니다. 분명 루저의 삶을 바라보는 일말의 동정심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런 극적인 감정을 철저하게 억누르는 연출의 묘가 좀 더 객관화된 감정을 야기시키고 이를 통해 그 인물 너머로 확대된 세계관을 조명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스트립 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를 사모하는 랜디의 감정을 온전히 순정적인 양상으로 치환하지 않으며 자신의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로부터 박대 받는 랜디의 모습을 동정으로 유도하지 않는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상황은 상황 그 자체로서 판단하게 만들 뿐, 어떤 감정의 매개체가 되어 객석을 유린하지 않는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철저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카메라의 시선에 따라 상황의 응시자로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 <더 레슬러>가 정서적인 통증을 동반하는 건 그 덕분이다.
전설을 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랜디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건 숭고함보단 처절함에 가깝다. 그것은 영광을 위해서라기 보단 생존을 위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생존이란 물질적 가치의 잉여를 위한 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 비루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 유일한 존엄성의 뼈대를 보존할 수 있는 방식이 그것뿐일 따름이다.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린 과거의 영광을 끊임없이 복기하고자 하는 노력은 때때로 그 현실을 한심할 정도로 나약하게 대비시킨다. 고통을 무릅쓰고 링에 올라서는 사내의 뒷모습엔 현실의 무력함이 깊게 배어있다. 더 이상 진짜가 될 수 없는 영광의 껍데기만 두른 고독한 삶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아버지로서의 삶에 재기할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자신의 링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로맨스에 천착한 그 삶은 지독하게 비루하다. 그럼에도 그 삶을 책망할 수 없는 건 그 삶이 무가치하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흔과 혈흔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체에 담긴 영광의 세월을 폄하할 순 없기 때문이다. <더 레슬러>는 그 삶을 통해 감정을 완성하기 보단 그 삶 자체를 조명한다. 무엇보다도 미키 루크는 캐릭터로서의 연기적 영역을 넘어 배우 본연의 삶을 투영하는 양상이라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한다. 배우의 삶이 투영된 듯한 캐릭터의 진정성을 무시하기 힘들다. 실로 적나라한 루저의 일생이 배우의 삶 자체만으로 영화적인 감상을 부여하는 덕분이다.
그 삶엔 어떤 낭만도 포용되지 않는다. 스러져가는 육체를 겨우내 지탱하는 사내가 해묵은 언어로 짐작할 수 밖에 없는 전설에 몸을 던질 때, 희망보단 절망이 새어 나온다. 그럼에도 그 삶을 응시하는 건 그것이 진심이 담긴 삶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껍데기뿐인 영광이라 해도 그 자체를 위한 삶의 진정성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이 건조한 영화가 품고 있는 일말의 낭만 역시 그 지점에 있다. 비범하지 못한 삶 속에서도 남다른 생의 의지가 빛난다. 박동이 약해진 심장이라 해도 마지막까지 피를 순환시키기 위해 움츠림을 거듭하듯 낡아가는 전설을 삶의 최전선으로 연장하려는 사내의 인생을 통해 삶이란 단어 그 자체를 응시하게 만든다. 그 최후의 수단이 죽음이라 해도 그 사내는 끝까지 전설을 삶의 테두리로 보존하려 한다. <더 레슬러>는 실로 처절하지만 그 의미를 결코 간과할 수 없게 담담한 그 인생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육체의 쇠락 속에서도 정신적 자존을 부지해 보려는 사내의 삶을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만든다. 루저를 위한 삶이 아니라 진짜 루저의 삶을 그린다. 전설을 복원하는 게 아니라 그 껍데기를 유지한 채 그저 걸어간다. 영광의 뒤안길에 선 삶을 고스란히 발가벗긴다. 그로 인해 드러나는 건 비루한 삶을 연명하고자 하는 일말의 의지다. 남루하지만 꿋꿋한 삶의 의지가 아련하게 빛난다. 그 삶에 어떤 감정 이입을 가하지 않고 그저 따라 걷을 뿐이다. 훌륭한 위안이자 현명한 연대로서 진심을 전한다. <더 레슬러>의 담담한 스크린을 응시하는 가운데 먹먹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그 때문이다.
요즘 공연 때문에 바쁘지 않았나요? 얼마 전에 <즐거운 인생>이 끝났어요. 그리고 <스프링 어웨이크닝>이라는 공연에 6월 말부터 들어가서 곧 쇼케이스 연습을 조금 하게 될 거 같아요. 본격적인 연습은 5월부터라 지금은 그렇게 바쁘지 않아요.
<스프링 어웨이크닝>외에 예정된 작품은 없나요?
한일 합작으로 제작되는 4부작 드라마가 하나 있는데 조그만 역이에요. 감독님 때문에 며칠 가서 하게 될 거 같고, 아직은 별다른 건 없어요.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대작 뮤지컬이라고 들었어요. 토니상 8관왕을 차지할 정도로 대단한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본인이 연기할 ‘멜키어’는 꽤나 지적인 캐릭터라던데, <쓰릴 미>에서의 ‘그’도 지적인 남자였고, <작전>의 조민형도 증권 인텔리였죠.
이미지 때문인가 봐요.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이미지라서. 어떻게 보면 올곧게 보이는 얼굴 같기도 하다가 어떻게 보면 악해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맨숭맨숭하니까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요. 처음엔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배우는 외모가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이젠 화면의 모습을 보니까 오히려 그게 좋더라고요.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지고.
도화지 같은 얼굴이라 말할 수 있겠죠. 배우에겐 분명 장점일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무대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어요. <작전>외에도 섭외가 들어온 영화는 없었나요?
스케줄이 맞지 않아서 못한 것도 있죠. 그리고 제가 드라마를 두 편 했는데 다 사극이었잖아요. 그래서 사실 현대극이 하고 싶었어요. (웃음) 그런데 <작전>이 들어온 거죠. 주식을 잘 모르는데도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봤어요. 물론 비주얼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로 그 동안 맡아왔던 캐릭터와 비슷한 면이 있는 거 같아서 고민이 되긴 했지만 정말 시나리오 하나 믿고 선택했죠.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바로 했습니다. (웃음)
증권사 애널리스트를 연기하는 만큼 주식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위한 노력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조민형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제가 그 동안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지만 <작전>은 리얼한 상황을 그리는 이야기가 담긴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조민형이란 사람은 현실적으로 거리감이 느껴지더라고요. 제가 볼 때는 나이대도 불분명해 보이고, 한국 사람 같지도 않고, 진짜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죠. 그런데 증권 브로커 분과 인터뷰를 하면서 그런 부분을 많이 느꼈어요. 그쪽 사람들의 생리라던가 그런 측면을 많이 듣고 감독님과 조금씩 더 얘기해 나가면서 부족한 점을 풀어갔죠. 그렇게 시작했고, 결국 증권 브로커 분과 했던 인터뷰가 큰 도움이 됐어요. 그 분과의 인터뷰 이후로 현실적인 시선을 이해하고 바라보게 됐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작전>에서 조민형을 연기할 때 다양한 제스처가 눈에 띄더군요.
일단 감독님과 얘기를 많이 했어요. 손동작이나 그런 건 감독님이 주문을 많이 해주셨죠. 주먹에 쥐고 있던 완력공도 감독님이 주신 거고요. 일단 노멀하게 베이직(basic)에서 출발해야죠. 얘가 지금 왜 이럴까, 에서 시작하는 거에요.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주고 싶어서 그런 제스처에 대한 주문을 많이 주셨고, 아무래도 <쓰릴 미>때 경험이 도움이 됐죠.
<작전>의 배우들은 현장 분위기가 좋았다는 말을 많이 하더군요. 그런데 표정을 보면 진심이 묻어나는 느낌이에요. 술도 많이 마셨다고 하고. (웃음) 정말 박희순과 박용하의 힘이었어요. 다른 좋은 분들도 많았지만, 왜 그렇잖아요. 현장 분위기라는 게 감독님이나 주연 배우 중 누구 하나라도 핀트가 나가버리면 확 가라앉아버리는데 용하 형도 그렇고, 희순 형도 그렇고, 노력을 많이 해주셨죠. 원래 성격이 그런 분들이시기도 하고. 당신들은 힘든 내색 별로 안 하고, 스태프나 후배들까지 챙기고, 더 재미있게 해보려고 하고. 저는 예전에 공연하면서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그냥 내가 더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영화를 통해서 형들이랑 같이 작업하면서 저런 게 중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술 먹으면서 솔직히 얘기했던 게 있어요. 영화가 잘 안돼도 일단 재미있었다면 된 거다. 정말 우리끼리 재미있게 웃고, 술도 마시고, 생각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이면 일단 된 거라고 말이죠. 그걸 관객 분들도 다 같이 느끼신다면 더욱 좋겠지만. (웃음)
다들 초면이라 처음에 친해지는 것도 관건이었을 거 같은데.
용하 형도 그렇고, 희순 형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낯을 많이 가려요. 처음에 대본 리딩하고 의상 피팅할 때 셋이 같이 앉으면 볼만했어요. “식사 하셨어요?” “어, 넌 먹었어?” “예.” (침묵) 그러면 한 명이 그래요. “어, 어떻게 할 거야. 이 썰렁한 분위기.” 그럼. “하하하.” 그리고 또 조용해졌다가, “첫 촬영은 언제세요?” “어, 나는 언제야.” “넌?” “전 언제쯤 할 거 같은데요.” “응.” (침묵) 그러면 또 한 명이, “어떡해. 이거. 왜 이렇게 어색한 거야.” 이렇게 무한 반복이죠, 계속. (웃음) 그래서 속으로, “와, 영화 어떻게 찍지. 이 사람들하고.” 그랬었는데 확실히 대한민국 남자들은 술 한잔 먹으면 금방 친해지나 봐요. 전 이번에 6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웠거든요. 솔직히 핑계일 수 있지만 그렇게라도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담배 한대 피면서 생기는 유대감도 크게 작용하긴 하죠.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이라. (웃음)
그럼 그 이후로 다시 담배를 피게 된 건가요?
예. 지금도 피고 있어요.
저도 지금 2년 째 금연 중인데, 6년 동안의 기간은 정말 아깝네요.
그런데 담배는 끊는 게 아니라 참는 거라고 그러잖아요. 죽을 때까지 안 피면 죽을 때까지 참는 거라고. (웃음)
그래도 목 관리에 민감한 무대 배우에게 담배는 지양해야 할 기호품이 아닌가요?
이번에 <스프링 어웨이크닝>하기 전까진 담배를 다시 끊어야죠. 술도 끊어야 돼요. 3개월 동안 원캐(원캐스팅)이기도 하고. 5월 달부터 공연 연습에 들어가니까 그 전에 금단 현상까지 생각해서 미리 끊어야 되죠. 그런데 사실 배우라면 이것저것 다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핑계 같지만 그냥 나를 풀어놓을 때도 있어야 할 거 같아요. 사실 그 동안 되게 안 그러려고 노력하면서 살았거든요. 담배를 6년 동안 끊은 것도 흐트러지지 않은 나에 대한 상징이었죠. 그런데 요새는 그런 것도 필요하다 싶어요.
항상 무대에서만 연기하다 관객 없는 곳에서 연기를 하게 되면 어떤가요? 스튜디오 같은 곳은 되게 조용하잖아요. 그래서 상대방 연기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죠. 원래 제가 추구하는 연기는 리얼한 연기에요. 그래서 과장되지 않고 사실감 있는 연기가 개인적인 취향에 맞거든요. 그런 걸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좋았죠. 현장 배우들과 호흡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때도 좋았고요. 특히 희순 형 같은 경우는 워낙 그런 능력이 좋으셔서 저도 몰랐던 호흡을 쉽게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어요. 공연 이삼십 번 해야 알게 되는 호흡이 있거든요. 모르고 올라갔다가 하다 보면 알게 되는 건데 희순 형과 촬영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얻곤 했죠. 아! 이런 거.
공연을 하다 보면 페이스를 끌어올리는 지점이 있죠. 하지만 영화는 분할된 리듬으로 이어나가는 작업이라 이질적인 느낌이 없었을까 싶습니다.
일단 준비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독님이 따로 시간을 내셔서 개인 교습을 많이 해줬어요. 아무래도 감독님은 불안했던 거죠. (웃음) 김수진 대표님이 절 캐스팅하자고 제의하신 건데 감독님은 김무열이 도대체 누굴까 싶어서 공연을 보러 왔다가 <미친 키스>를 보신 거에요. 막 미친 듯이 울고, 소리 지르는 연기를 보셨으니 더 고민을 하신 거죠. (웃음) 저 사람이 과연 조민형을 할 수 있을까, 어딘가 냉철한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개인 교습을 많이 해주셨을 거에요.
설마 끝까지 감독님의 신뢰를 얻지 못하신 건 아니겠죠? (웃음)
그런 의심이 많이 풀렸던 게 두 번째 촬영에 희순 형이랑 같이 주차장에서,
담배 비비는 씬?
예. 담뱃재 씬. 원래 감독님이 예정과 다르게 수정을 했었어요. 거기가 노량진수산시장 위에 있는 옥상주차장이었는데, 멀리 한 곳을 바라보면서 대사를 갑시다, 그러시더라고요. 왜 그러는지는 말씀 안 해주시고. 그래서 희순 형이랑 얘기해봤는데, “아니다. 심리가 이렇다면 이에 행동이 붙어야 분명 더 재미를 줄 수 있다.” 이렇게 결론이 났죠. 나중에 감독님께서 얘기해주신 바론 제가, 그러니까 조민형이 처음부터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예정대로 가면 제가 무너질 거 같아서 바꾸자고 했던 거래요. 그래서 제가 그냥 제대로 해보겠다고 했고, 희순 형도 그렇게 가자고 해서 원래대로 간 거거든요. 그런데 감독님이 그걸 보시고 제가 안 밀려서 오케이를 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안 밀렸다기 보단 정말 희순 형 호흡 받아서 연기한 것뿐이에요. 안 밀리긴요, 어떻게. (웃음)
얼마 전에 박희순 씨를 만났는데 김무열 씨 칭찬이 대단하더군요.
제 홍보대사십니다. (웃음)
촬영하다가 틈나면 사라져서 찾아보면 구석에서 연습하고 있더라고 하던데요.
해야죠. (웃음) 일 이년 전까지만 해도 공연 끝나기 전, 막 공연 때까지만 해도 대본을 봤어요. 그런데 요즘은 대본을 보기 보단 생각을 하는 편이거든요. 솔직히 영화 현장에서 한 씬 찍으려고 4시간을 기다렸다가 한 컷 찍고 이럴 때 있잖아요. 그래서 오락도 하고, (웃음) 머리를 쓰는 거죠. 2시간 전부터 이제 워밍업을,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페이스를 올려야 되니까 몸도 살짝 풀면서 준비를 하는 셈이랄까요. <일지매>때, 이문식 선배님께서 연기하시기 전에 혼자서 막 뛰시고, 젊은 배우들 아무도 안 그러는데 그 연기 잘하시는 이문식 선배님이 그러는 걸 보면……
무대 출신 배우들의 특징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무대에서는 NG가 없으니까 그만큼 더욱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잖아요.
제가 드라마나 영화를 몇 번 안 해봤지만 탤런트나 영화배우 중에도 좋은 배우들이 너무나 많아요. 다만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라는 가치관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겠죠. 비단 무대 배우 분들이 아니라 탤런트 선생님들 중에도 그렇게 하시는 분들도 있거든요. 제가 지금도 많이 부족하지만 만약 무대만 했다면 이 정도도 안됐을 거 같아요.
카메라 앞에서 적응하는 것이 관건이었던 시간도 있었을 겁니다. 제가 ‘드라마시티’에서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았었는데,
<신파를 위하여>말이죠?
예. 거기서 현욱이라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때는 연기에 대해서 잘 몰랐고 특히 방송 카메라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을 때에요. 이소은이라는 여자 감독님께서 한 컷 한 컷 찍을 때마다 고개 각도까지 일일이 수정해주실 정도로 디테일한 디렉션을 주셨어요. 보통 드라마는 그렇게 안 찍잖아요. 빨리빨리 넘어가야 되는데. 덕분에 그때 정말 많이 배웠죠. 그 한편으로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그 다음에 <별순검>은 편한 마음으로 할 수 있었죠.
그 작품으로 카메라를 이해하게 된 셈이군요.
<신파를 위하여>전에 단편들도 했었지만 전혀 그런 영향이 없었어요. 사전작업 때 감독님과 단 둘이 몇 번 만나서 현욱의 캐릭터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그 안에 숨은 감정들까지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도와주셨죠.
그 때 순수한 사랑을 추구하는 선생님을 연기했는데 이번 <작전>에서는 비열한 인텔리 주식 전문가를 연기했죠. 두 캐릭터만으로도 극단적인 너비가 발견됩니다. 배우로서 소화하는 감정의 폭이 넓어야 한다는 이야기죠. 그런 감정적 너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캐릭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를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 그러니까 그 말에 중점을 두는 게 아니라 말은 말일 뿐이란 거죠. 하지만 그 안엔 뭔가 있잖아요. 일단 이 사람이 언제 태어났고, 어디서 살아왔고, 뭘 했었는지, 이런 것들이 다 분명해야죠. 저는 악역이라고 해서 비열하게 보여야 된다는 생각은 절대 없어요. 제3자가 바라볼 때 비열함이라는 표현이 생기는 거지, 저는 주관적으로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관객들은 캐릭터의 드러난 외면을 바라보는 셈이지만 배우는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추적해 입체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는 의미처럼 들리는 군요.
연기를 잘 하시는 선배들은 자기가 연기하는 걸 띄워놓고 보죠. 연기 수업에서 그걸 ‘제3의 눈’이라고 하는데, 배우가 가진 눈, 자기를 보고 있는 그 눈을 가져야 된다고 해요. 저도 그걸 갖고 싶어요. 그래서 항상 노력은 하는데, 이번에도 <작전>에서 보니까 역시 갖고 있지 않더라고요. 영화를 보니까. (웃음)
복싱으로 치면 섀도우(shadow) 복싱과 같은 셈이군요.
그렇죠. 다른 생각들을 지우고 한 감정에 100% 몰입한 채 상대방과 연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 켠으론 나 자신을 띄워놓고 내가 연기하는 걸 보고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걸 제가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이번에 <작전>을 스크린으로 보고 나니까 쥐뿔도 없더라고요. (웃음)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너무 많이 했어요.
어떤 점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던가요?
전체적으로 그랬죠. 사실 조민형이란 캐릭터에 대한 이해에서도 부족한 점이 있었던 거 같고, 한편으론 그 캐릭터에 너무 빠져있었던 거 같고. 상대적으로 희순 형이랑 붙는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존재감에 대한 부담이 많았나 봐요. (한숨을 쉬다가) 더 얘기하면 너무 자괴감에 빠질 것 같은데. (웃음)
드라마나 영화는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으로 자신을 다시 확인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질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많이 다르긴 하죠. 진짜 라이브의 느낌은 아니잖아요. 영화는 박제하듯 만들어내는 거니까. 그래서 라이브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 부족했어요! 무대를 해왔던 놈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그건 생각도 못하고 딴 짓을 하고 있더라고요.
음, 갑자기 후회와 반성의 시간이 되고 있군요. (웃음)
사실 요즘 정말 너무 그래요.
작년에 <일지매>에도 출연했었죠. 드라마와 영화의 진행과정에도 차이가 많은데 사전 준비기간이 길다는 점에서는 드라마보단 영화와 무대극의 공통점이 좀 더 강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영화가 좀 더 본인에게 수월한 작업이 아니었을까 짐작되는데요. 저 같은 경우는 드라마가 더 편했어요. 다른 배우 분들도 다 그러시거든요. 드라마가 어렵다고, 왜냐면 바로 바로 가야 되니까. 그런데 저는 모르겠어요. 오히려 편하게 갔던 거 같아요. 오히려 영화는 컷이 많다 보니까 그럴 지도 모르죠. 한 씬에서 두 사람의 드라마가 흐르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여기서 찍고, 저기서도 찍고, 그래서 그 때 디테일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거든요. 거기다 대형 스크린에서 상영을 하니까 디테일 하나라도 놓치거나 어디 한 군데라도 텐션(tension)이 들어가있으면 그게 딱 보이거든요. 드라마도 마찬가지겠지만 제 생각엔 영화가 컷이 많기 때문에 배우가 철저하지 않으면, 한 순간 방심하면 바로 드러나요. 배우는 같은 연기를 여러 번 반복해야 되는데, 똑 같은 씬이더라도 지금 가는 걸 언제 쓸지 모르는 거잖아요. 옛날에 한국영화 보면 울고 있던 배우가 앵글이 바뀌니까 안색이 멀쩡해지거나 그런 거, 선수들은 알거든요. 사람이 울 때 나오는 숨이 있는데 그렇게 숨쉬다가 잠시 화면이 바뀌니까 차분해져 있고, 이런 것들. 몸이 지금 데워져 있는지, 안 데워져 있는지, 그런 게 보이니까. 그런 걸 처음부터 끝까지 가져가야 되더라고요. 그런데, 와! 정말 힘들어요. (웃음)
스크린은 브라운관보다 크니까요. 마치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선명할 수 밖에 없죠.
그렇죠.
최근 인터뷰를 보니까 비 얘기가 정말 많이 나오더군요. 안양예고 동창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예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는 건 그 때 이미 연기에 대한 진로를 염두에 둔 셈이겠죠.
초등학교 때 오락실에서 오락하고 있는데 동네 선배 형이 머리를 기르고 나타난 거에요. 그 형한테, “머리 어떻게 길렀어?” 라고 물어보니까 안양예고 갔다고, 안양예고 가면 머리 기를 수 있다고 하는 거에요. 그리고, “너도 안양예고 가.” 그러길래, 저도 엄마한테 장난으로, “엄마, 나 안양예고 가서 머리 기를래.” 그랬거든요. 그런데 어머니가 진지하게 생각을 받아들여 버리신 거에요. (웃음) 일산에 있는 연기학원을 보내주셨죠. 그런데 연기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하게 됐고, 안양예고 시험은 정말 한치의 의심도 없이 보게 됐죠. 난 연기할 건데 뭐, 이렇게. 그때 경쟁률이 17대 1이었어요. 제 생애 몇 안 되는 높은 경쟁률 중 하나였는데 붙었죠. 그렇게 아무런 의심 없이 연기를 꿈꾸다가 2005년도부터 연기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지하철 1호선>으로 김민기 선생님 뵙고 그 때부터 디테일한 것들을 파고 들어갔어요. 흰 머리가 나기 시작했죠. (웃음)
‘학전’에서 본격적인 연기자의 마인드를 얻은 셈이네요. 그럼 본인의 연기적 스승이 김민기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연기자로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이랄까? 제가 어떻게 연기를 해야 되는지 정확한 틀을 잡아주신 분이 김민기 선생님이셨죠. 그리고 안양예고 다닐 때 김준철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께서 제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로 연기를 시작해야 되는지 가르쳐주셨어요. 그러니까 안양예고에 간 건 제가 화분을 산 거죠. 머리를 기르는 것 때문에 화분을 샀어요. (웃음) 그리고 안양예고 시절에 좋은 흙을 담아놓은 거고, 김민기 선생님 만나서 어떤 나무를 심을까 고민하다 씨를 뿌리기 시작한 거에요.
어쨌든 일단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 당시엔 그런 것들이 본인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이라는 건 뒤늦게 알았을 텐데요.
사실 저에게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된 사건들이잖아요. 그런데 머리 기르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했다가 안양예고에 가게 됐고, <지하철 1호선>은 제가 그 당시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하고 그랬었거든요. 그 전에 저는 뮤지컬은 생각도 못했었어요. 그러다가 어떻게 창작 뮤지컬 오디션을 봤다가 합격했는데 그게 저 혼자 오디션을 본 거였어요. 그래서 나중엔 괜찮은 친구 있냐고 물어봐서 친구까지 소개시켜주고, 그렇게 뮤지컬을 하나 했죠. (웃음) 그 뒤로 악극무용단도 하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 연극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연찮게 <지하철 1호선>이란 작품의 오디션이 있다고 하길래 당일 날 가니까 막 설경구 선배님, 방은진 선배님, 황정민 선배님, 조승우 선배님, 사진이 다 있는 거에요! 뭐, 이런 작품이었어? 그때 알았죠. 그런데 거기에 합격이 된 거죠. 사실 그 전에 영화나 드라마 오디션 수도 없이 봤었거든요. 다 떨어지고 그랬었는데 말이죠.
오디션에서 떨어진 경력이 상당히 많았나 봐요.
굉장히 많아요. 영화만 스무 개가 넘죠. 제가 지금도 연기를 못하지만, 그때는 진짜 못했거든요. 사실 <작전>도 우연찮게 김수진 대표님이 <쓰릴 미>를 보시고 저 사람 시켜야겠다, 그래서 책을 주신 거죠. 저는 복권 이런 거 사면 안될 거 같아요. 바라고 하면 되는 게 없어. (웃음) 솔직히 생긴 것도 특출하지 않고, 연기도 그저 그렇고, 어디서 보지도 못한 애가 붙기는 힘들었겠죠. 공부를 더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도 있었고. 뭘 하지, 싶어서 학교를 다시 다니다가 커리큘럼도 엉망으로 짜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싶어서 갈팡질팡하다가 밖에 나가서 공연을 하자 마음 먹었어요. 그래서 <지하철 1호선>오디션을 봤는데 덜컥, 진짜로 덜컥! 붙었죠. (웃음)
결국 그 역사적인 <지하철 1호선>이 본인에게도 역사적인 공연이 된 셈이군요. 그 뒤로 <어쌔신즈>라는 공연을 했는데 그 때 함께 공연을 했던 멤버가 쟁쟁합니다. 오만석, 엄기준, 상당히 주목 받는 배우들과 함께 공연을 했어요. 만석이 형은 소문만 듣다가 <어쌔신즈>로 처음 봤어요. 그때 오만석 형님이 <헤드윅> 초연을 하고 있었는데 난리가 났었죠. 없던 공연도 생기고 기획사에서 해외 여행까지 보내주고, 그런 스케줄 때문에 연습을 많이 못나왔어요. 그렇게 저희끼리 2주 동안 지지고 볶고 있는데 연습하겠다고 나타나더라고요. 그래서 러프하게 런을 갔는데, 아니, 2주 동안 지지고 볶은 우리를 뛰어넘어서 디테일까지 다 잡아온 거에요. 사무엘 뷔크라는 역할을 맡았는데 약간 광기가 있는 집착성 정신병이 있는 친구였죠. 그 역할이 노래가 없어요. 대신 대통령 암살하러 가기 전에 혼자 뭐라고 지껄이고 그렇게 혼자 독백을 두 세 장면인가 지껄이고 그러는데 혼자 난리가 난 거에요. 저 사람 진짜 뭐지, 이렇게 깜짝 놀랐어요. 저래서 오만석이구나, 저래서 유명한 거구나, 싶었죠. 잘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잘 해야겠다, 잘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엄기준 씨와는 <그리스>에 더블 캐스팅되기도 했죠.
그때 기준이 형의 진면목이 나왔죠. 까불까불한, (웃음) 얄밉지만 사랑스러운. 원래 <그리스>의 대니 역할은 무조건 멋있기만 하면 되는데 대니가 나와서 계속 웃기는 거에요. 어떻게 보면 재해석이죠. 그런데 기준이 형은, 나는 춤을 못 추는 거니까 그런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춤을 진짜로 못 춰요.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기준이 형이 <그리스>했다고 하면서 놀리기도 해요. (웃음) 멋있게 춤을 춰서 여자들의 환호를 얻어야 되는데 그냥 웃겨버리더라고요. 하지만 결국 대단한 거죠. 그런 걸 보면서 진짜 많이 배웠고 자극도 돼요. 형들로부터 그 당시에 많이 배웠죠.
노래는 원래 잘 하는 편이었나요? 아니면 노력의 산물인가요?
노래는 연습을 계속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노래방가는 걸 진짜 좋아했거든요. 고등학교 땐 학교 끝나고 일주일에 4번씩 가고 그랬어요. 오천 원에 3시간 주고 그런 곳으로 가서 맨날 노래하고 그랬죠. 사실 어렸을 땐 가수 한다고 그러기도 했거든요.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했어요. 그러다 안양예고 가면서 연기만 했죠. <지하철 1호선> 오디션 보기 전에도 노래 연습 되게 많이 했어요. 아직까지도 레슨 받고 그렇죠. 뮤지컬 쪽에 선수들 되게 많잖아요. 저는 그쪽에 끼면 그다지 잘 하는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저 극 진행에 방해가 안 될 정도?
연기적인 고민이 더 크죠. 제가 충격을 먹었던 게 <지하철 1호선>을 4개월 정도 했을 때 연습실에서 제작일지를 봤거든요. 그런데 거기 오디션 평가 점수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찾아보니까, 김무열. 노래가 10점 만점에 9점, 그런데 연기는 5점, 3점, 이런 거에요. 그 때 충격이 진짜! (웃음) 혼자서 연기 열심히 연습해야겠다 싶었죠.
또 다시 자학의 시간이 펼쳐지는군요. (웃음) <쓰릴 미>에서 류정한 씨와 호흡을 맞췄습니다. 류정한 씨를 뮤지컬 3대 천왕으로 꼽기도 하잖아요. (웃음) 그런데 대부분 <쓰릴 미>를 보고 온 관객들이 류정한을 보러 갔다가 김무열을 보고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 경험치 많은 배우와 홀로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단순히 실력 이상의 어떤 정신적 무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쩌면 그만큼 오기가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더군요.
이쪽 일, 아니, 어느 일을 하는 사람이라도 오기는 있어야죠. 다만 저 같은 경우 이쪽 일이라는 게 들쑥날쑥 하고 성공이 보장된 것도 아니고 자기 계발을 끊임없이 하면서, 그러다가도 운이 나빠서 안 되는 경우도 많잖아요. 저 같은 경우도 당시에 집안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제가 집에 돈을 벌어다 줘야 했는데 그러려면 직장을 구해야 했죠. 그런데 그러진 못하고 아르바이트만 했어요. 그러면서 계속 연습을 했죠. 나름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만큼 끈기도 있는 거 같고. <쓰릴 미>같은 경우는, 그렇죠. 상대방이 3대 천왕님이시고, 저는 한낱 신인인데. (웃음) 나는 진짜 이번에 잘 안되면 완전 사장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대표님이 흥행이 될까, 말까, 되게 의아해했거든요. 그래서 정한이 형을 시킨 거죠. 정한이 형이라면 일단 흥행은 보장되니까, 천왕님이 막 군중들 몰고 다니시니까. (웃음) 사실 <쓰릴 미>는 작품 자체가 제 취향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한 것도 있죠. 제 취향이니까. 그런데 저를 좋아해주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일종의 출세작인 셈이죠.
맞아요. <쓰릴 미>덕분에 드라마 세 편하고 영화 한 편 했으니까요.
<스릴 미>는 참 미니멀한 연극이었어요. 달랑 피아노 한대에 두 남자 뿐인데, 그만큼 배우에게 시선이 몰리기 마련이죠. 그만큼 배우의 집중력이 중요한 작품이었을 거에요.
사실 초연 때는 제가 보여지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비주얼에 대해서, 몸짓, 손짓, 걸음걸이라던가, 라이터를 켤 때, 담배 피는 모습, 누워있을 때, 이런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썼죠. 그런데 앵콜에선 기본적으로 이미 몸이 편해진 상태라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되면서 초반보다 더 많은 걸 시도할 수 있었거든요. 오래 공연하다 보니까 나중엔 몸짓이 자연스럽게 나오면서 그렇게 됐어요. 때때로 오히려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다가 확 얼어버리기도 하거든요. 초연 때 그런 경험이 있어요. 노래할 때였나, 대사칠 때였나, 내가 지금 어떻게 보여지고 있을까, 한 순간 의심이 들었는데 바로 그때부터 말리기 시작해서 그 날 공연은 어디 혼자 산으로 다녀와버렸거든요. (웃음) 사람들이 날 보게 만들어야지, 날 보게 하려고 막 봐주세요, 이러는 건 아니었던 거죠.
무대에서는 관객의 반응에 리액션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하지만 촬영현장에서는 온전히 배우 스스로가 자신의 연기에 대한 반응을 짐작하고 수위를 조절해야 합니다. 자신의 연기에 대한 검증이 온전히 배우 안에서 이뤄진다고 할 수 있겠죠. 그만큼 자신의 연기를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거에요. 이번에 희순 형한테 그런 부분을 많이 배웠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가져가는 호흡에 대해서. 희순 형이랑 연기하다 보니까 정말 자연스럽게 조금이나마 생겼죠. 희순 형이 맨 처음에 막 무게를 잡는 거에요. 그래서 이 양반이 왜 이러실까, 그랬는데. (웃음) 전체적으로 자기가 짜놓은 틀이 있더라고요. 사실 같이 연기하다 보면 상대 배우에게 말리는 경우가 있잖아요. 저도 초반에 나름대로 좀 강하게 가져가야 할 게 있었는데 희순 형을 보면서 자극 받았죠. 첫 촬영 때 의아해지다가 점점, 아! 이렇게 됐거든요. 이번에 시사회 한 걸 보니까 좀 더 알게 됐어요. 두 번째 영화를 하게 되면 더 잘 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고. (웃음)
공연에서 몸이 풀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소요되는 것 같던가요?
어떤 공연 같은 경우는 초연 때 좋았다가 점점 하향곡선을 그리는 경우가 있고, 어떤 공연은 초반에 정말 형편없다가 진짜 어디까지 올라갈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끝까지 상승 곡선을 그리는 경우가 있죠. 다만 저 같은 경우는 그냥 스물 스물 조금씩 올라가는 둥 마는 둥 하는 거 같아요. (웃음)
스케줄이 2년 사이에 엄청 바빴던 걸로 알고 있어요. <쓰릴 미>와 <김종욱 찾기>, <미친 키스>를 이어오는 사이에 <별순검>이나 <일지매>같은 드라마 스케줄까지 병행했고, 덕분에 겹치기 출연 논란도 있었더군요. 물론 본인이 완성도를 침해하지 않아서 잠잠해졌지만.
그 땐 저도 그랬고 회사도 그랬고 욕심을 많이 냈죠. 왕성하게 활동해야 할 때다 싶었거든요. 솔직히 스케줄도 많이 꼬였어요. 일단 뮤지컬은 1년 전에 이미 확정 라인업이 다 나오는데 드라마는 그렇지 않잖아요. 거기다가 회사끼리의 알력도 있고. 그땐 진짜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었어요. 너무 무리해서 하는 거 아니냐, 그런 얘기를 저도 많이 들었거든요. 그 당시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돌이켜보면 저한테 도움이 많이 되는 시간이었어요. 몸도 마음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때 정말 많이 늘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스케줄이 겹쳐서 캐릭터에 혼선이 생기는 경우는 없었나요?
오히려 되게 재미있었어요. 왜냐면 그때 <미친 키스>와 <김종욱 찾기>를 같이 하고 있었는데 <미친 키스>에서는 정말 미친 척을 하다가 <김종욱 찾기>에서는 막 애교부리고, 그러니까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처음엔 너무 힘들고 그래서 어떡하나 싶었는데 좀 적응되니까 재미있어지기 시작하고 오히려 이제 몸을 릴렉스하고, 텐션을 줬다가 다시 릴렉스로 빠지는 그런 테크닉이 엄청 늘더라고요. 완전히 각기 다른 것들을 하다 보니까, <미친 키스>에서는 몸에 텐션이 들어가 있다가 <김종욱 찾기>에서는 딱 빠져야 하니까. 그때 그런 것들을 많이 배웠죠.
<미친 키스>에서 연기한 장정은 꽤나 광기적인 캐릭터였잖아요. 반대로 <김종욱 찾기>의 김종욱은 상당히 팬시한 캐릭터죠. 그 두 작품이 어쩌면 서로에게 나름대로 감정의 출구가 되어준 건 아닐까 싶은데요.
그렇죠. 교집합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전혀 다른 점이 많으니까요. 그런 게 명확히 보일 때 제3자의 눈을 갖게 될 수 있는 거 같아요. 그런 느낌으로 항상 연기해야 되는데, 그런 건 사실 공연이 끝나고 오랜 후에나 남의 공연을 볼 때 생기거든요. 지금 갇혀서 보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분명 있어요. 제가 지금 뒤를 못 보는 것처럼. 그런데 그런 것들이 보였죠. 덕분에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게 됐죠. 어쩌면 그게 가께모찌(동시 출연)의 장점이라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감정에 몰입한 뒤로 잘 빠져 나오는 편인가요?
사실 연기할 때는 되게 힘들어요. <쓰릴 미>때도 공연이 끝나면 무대 뒤에 들어가서 많이 울었어요. 때때로 “‘그’가 ‘나’를 사랑했나요?”라고 물어보시는 분이 계시는데 저는 모르죠. 왜냐면 전 그걸 정의 내리지 않았거든요. 사랑했건 안 했건, 사랑했는지 안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가끔 가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어요. 그러면 그건 사랑을 했었다는 거겠죠? 그럴 땐 막 무대 뒤에 가서 혼자 울었어요. (웃음) 가끔씩 그럴 때가 있었어요. <즐거운 인생>에서 ‘세기’란 역할을 하면서 한번은 필이 심하게 와서 울기 직전에 가슴 뜨거운 느낌 있잖아요. 그게 며칠을 가더라고요. 밤에 잠을 자려는데 숨을 조금만 잘못 쉬면 눈물이 날 것 같고, 진짜 그런 적도 있었어요. 배우란 직업이 힘든 거 같아요. 정신질환이 생길지도 몰라요. (웃음) 숀 펜이 그러잖아요. 배우는 미친 사람들이라고, 맞는 말 같아요. 그게.
몇 년 동안 연말 결산 기사에서 공연계의 유망주로 줄곧 소개가 되고 있더군요. 매년마다 유망주에요. (웃음)
본인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겠죠.
아직까지 신인으로 봐주시는 건 좋죠. 그런데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벌써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고. (웃음) 지금도 ‘세기’같은 나이 어린 역할 고등학교 역할을 맡으면 제 자신이 부끄러운 느낌이 있으니까요. 이제 저도 스물 여덟이잖아요. 서른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고등학생이라니. (웃음) 다른 어떤 걸 바라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서른이 되면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기대도 되고, 서른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탄탄히 잘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본인 말대로 이제 서른을 목전에 두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웃음) 하지만 나이 들어간다는 게 배우에게 나쁜 일은 아닐 거에요. 다만 그 전까지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을 텐데요.
일단 지금 이렇게 20대를 보내고 나면 아쉬운 것들이 있죠. 나중에 제가 30대가 돼도 물론 20대 연기를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나이 또래의 연기를 좀 더 많이 해보고 싶은 욕심이 들어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지금 이 소중한 감정이나 마음을 가지고 다른 연기를 하고 싶지 않은 거에요. 이런 마음이 있을 때 이 마음을 통해 더 포괄적으로 볼 수 있고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빨리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니까요. 제 나이 또래에 맞는, 저와 가까운 그런 것들을 더 많이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게 너무 아쉽지만 그렇게 서른이 되면 제가 서른에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 더 많이 경험해보고 연기해보고 싶고요. 서른이 되면 또 그런 것들이 새롭게 다가올 테니까요.
지금이 지나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연기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이 너무 소중해요.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는 마침 고등학생을 연기하는 군요. 인생의 마지막 고등학생 연기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웃음)
이제 일 이년 후에는 고등학생 역할 못하겠죠. 제가 스물 여덟밖에 안됐지만 거기 있는 친구들은 저보다 어리거든요. 오디션을 보러 갔더니 다들 완전 (굽신거리면서) 이러는 거에요. 저한테! <작전>에서는 맨날, ‘형~.’ 막 이러고 있었는데 거기 가니까 애들이 막 불편해하고, 저랑 같이 연기 맞추고 그러면서 떨고, 그러는데. 너무 무안하죠. (웃음)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단점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고민을 털어놓은 거 같은데 자신의 결점을 되새김질하는 느낌입니다. 마치 그 단점들을 죄다 소화시켜버리겠다는 일념 같아요. (웃음)
전 계속 발전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당연히 그런 게 필요하죠. 공연후기도 많이 읽어요. 불만 있으면 내 공연 보지 말라 그래. 이런 사람들도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제 직업은 주관적인 인간이 객관적인 시선을 향해 몸을 던지는 일이잖아요. 물론 주관적인 믿음이 강하지 않으면 객관성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죠. 다만 그 객관성 속에서도 주관이 강해야 자성이 생겨서 객관적인 것들을 끌어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이나 시선을 다양하게 끌어 모을 수 있는 소신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려면 긍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재미있다고 느끼면서 해야죠.
원인불명의 괴질에 감염된 사람은 얼굴의 모든 구멍으로 출혈을 일으키다 발작 끝에 심장이 멈춰 사망한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일본 전역이 이 괴질로 초토화된다. 그 모든 것이 도쿄에서 시작된다. 일본 열도 전체가 정체불명의 괴질에 감염되어 국가 전복의 위기에 처한다. 문득 <일본침몰>이 기시감처럼 상기된다. 하지만 <블레임: 인류멸망 2011>(이하, <블레임>)은 그보다 좀 더 스케일을 요구하는 영화다. 단순히 일본의 패망만으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멸망이라는 거창한 단어는 괜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전설이다>나 <눈먼 자들의 도시>만큼이나 황량한 도쿄의 풍광을 스크린에 노출하는 건 <블레임>의 욕망이 그 영화들 못지 않게 거창하다는 걸 증명하는 바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흉내 내고자 하는 욕망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최대한 비슷한 규모의 풍경을 선사하고자 틈틈이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 간격을 채우는 스토리텔링은 역부족 그 자체다. 디테일의 한계가 선명한 내러티브는 완벽한 결함이다. 거대한 세트의 물량공세를 통해 이미지를 확대시키지만 그 이미지를 연결하는 스토리는 심각하게 허황되기 짝이 없다. 이미지의 내부에 자리잡은 사연들이 실로 앙상하다. 욕망과 성취의 격차가 지나치게 아득하다.
끊임없이 죽음을 묘사하고 비장한 슬픔을 강요하지만 그 감정에 경도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막을 통해 질병의 확산을 설명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지만 어떤 비범함도 감지되지 않는다. 거창한 화면과 달리 전이되는 긴장감은 빈약하다. 재난영화의 테두리로 시작되던 영화가 메디컬 드라마로 삐끗하더니 탐정물의 동선을 기웃거리고 호러적 연출에 추파를 던진 뒤 종래엔 멜로로 외도해버린다. 사족이 끊이지 않더니 옆길로 새어 나간 뒤 그 자리에 정착해버린다. 맥락 자체에 대한 구심이 없고, 연출에 대한 세심한 배려도 부재하며, 전체적인 형태를 조립하는 능력 자체가 결여됐다. 몸집을 키우고 싶어할 뿐, 내실을 다스리지 못한다. 믿을 수 없게 멋대로 흐르는 전개 속에서 가능한 건 이 영화의 끝이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라는 무의미한 호기심뿐이다. 그마저도 자폭에 가까운 결말을 확인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도가 없다. 영화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고 싶어진다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구세주2>에 대한 긴 이야기를 한다는 건 꽤나 무색한 일이다. 홍보카피만으로도 이미 기대감 따위를 낮춰버린 자충수는 꽤나 유효하다. 명품 코미디가 어쩌고 따위를 도배하고 뒤통수를 시속 250마일로 가격하는 듯한 어떤 조폭 코미디 따위에 비하면 꽤나 양심적이다. 물론 그것도 일종의 개그임을 간과해서는 안되지만 여러모로 윤리적임을 감안해야 한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은 속편을 만들었다고 스스로 떠드는 이의 허세는 실로 처량한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카피만큼이나 영화가 후지다는 것이다.
내러티브를 내팽개치고 배우들의 개인기 공세를 펼쳐 객석의 반응을 끌어냈던 <구세주>만큼의 미덕조차 없다. 클리셰 범벅의 내러티브를 분석할 요량 따윈 없다. 시작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적어 내린다 해도 그것을 스포일러라고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구세주2>의 스토리텔링은 심하게 열악하다. 그건 사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구세주2>의 상영관을 찾는 어떤 관객에게 완벽한 내러티브와 플롯의 부재를 설득하는 행위는 재래시장에서 명품백을 팔지 않는다고 진상부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심각한 문제는 영화가 내세우는 비장의 무기조차 볼품 없다는 점이다. 유명 개그맨과 연예인을 카메오로 동원하고 슬랩스틱을 비롯해 자학 개그 세트인 화장실 개그와 구타 개그를 결집시켜도 유머의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다. 적어도 <구세주>는 시종일관 웃겨주기라도 했다. <구세주2>는 그 재능조차도 발견되지 않는다. 웃기지 않는 농담처럼 무색한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웃기지 않는 농담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할 때는 더더욱 괴롭다. <구세주2>는 그만큼 괴로운 영화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스태프들의 자축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 켠이 미어지는 기분마저 느낀다.
1972년 6월 17일오전 2시반, 워싱턴 민주당사를 도청하려던 5명의 용의자가 검거됐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두 기자는 그 배후를 추적했고, 그 끝자락에 닉슨 대통령이 관련됐음이 기사를 통해 폭로됐다. 차기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던 닉슨 대통령의 불명예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닉슨은 이를 적극 부인했지만 결국 여론의 압박이 대단했다. 결국 1974년 8월, 국회의 탄핵의결을 거쳐 대통령직을 사임하며 닉슨은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이다. 여기서 워터게이트는 워싱턴 민주당사가 있던 건물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대부분의 정치 스캔들 명칭에 ‘게이트(gate)’란 어미가 붙게 된 것도 이 덕분이다. 어쨌든 닉슨 대통령은 대단한 정치적 영향력을 남긴 셈이다.
<프로스트 vs 닉슨>(이하, <프로스트>)는 기록적인 영상과 언어를 동원해 워터게이트와 닉슨 대통령의 사임까지의 서사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리하며 시작된다. 묵직한 실화를 현장감 있게 드러내는 도입부는 영화의 야심을 위한 포석과 같다. <프로스트>는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이후에 벌어진 또 다른 실화, 정계에서 은퇴한 닉슨(프랑크 란젤라)과 영국 출신의 토크쇼 MC 프로스트(마이클 쉰)의 인터뷰를 다루는 영화다. 그 실제적인 사건이 어디서 출발하는가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건 그 후에 벌어지는 사건의 현장감을 얼마나 비중 있게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과 맞닿아 있다. 기록적인 영상은 도입부 이후로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건 극화된 장면이다. 희곡을 바탕으로 둔 연극 원작엔 문학적 자질을 염두에 둔 허구적 재능이 가미됐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대의 연출과 달리 영화는 좀 더 실제에 가깝게 묘사될 때 탄력을 얻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록적인 사실을 뇌리에 각인시키는 도입부는 허구를 가리기 위한 방법론에 가깝다.
1977년의 역사적인 TV인터뷰를 스크린에 옮긴 <프로스트>는 역시나 어떤 결과를 재현하기 위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 결론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가라는 점이다. <프로스트>가 선택한 지점은 그 결론을 위해 과정이 종사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느냐에 가깝다. 프로스트의 결심이 어디서 출발하는가는 닉슨의 결심만큼이나 중요한 지점이다. 프로스트와 닉슨은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인터뷰를 선택한다. 워싱턴 정계로 재진입하기 위한 재기의 발판으로 인터뷰를 선택하는 닉슨과 마찬가지로 프로스트 역시 미국 연예계로 재입성하고자 인터뷰를 기획한다. 두 사람은 그 인터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그 인터뷰는 두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다. 인터뷰를 둘러싼 긴장감 역시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정의 구현을 바탕으로 둔 훈계엔 관심이 없다. 모든 것을 건만큼 이득을 보지 못하면 손실이 큰 싸움이다. 4번에 걸쳐 이뤄지는 인터뷰까지의 과정 중 마지막 4번째 인터뷰에 에너지가 응집되는 양상 역시 그런 까닭이다. 4쿼터 역전승을 거두듯 닉슨에게 수세에 몰리던 프로스트가 전세를 역전하는 마지막 인터뷰의 묘미는 두 사람의 클로즈업된 표정으로부터 전세가 역전되고 있음이 표현될 때 온전한 전율을 전달한다. 승자와 패자의 만감이 탁월하게 교차된다. 물론 그 표정의 주체가 되는 두 배우마이클 쉰과 프랭크 란젤라의 뛰어난 역량이 언급돼야 마땅하다. 특히 프랭크 란젤라의 얼굴은 <프로스트>로부터 느껴지는 감정 그 자체다. 그의 얼굴은 영화의 정서적 변화를 대변하는 온도계나 다름없다. 그리고 마이클 쉰은 그 온도계를 쥐고 자신의 연기적 체온으로 극적인 변화를 온전히 주도한다.
날카로운 촌철살인의 언어로 두 사람은 진검승부를 펼친다. 인터뷰 직전 상대의 의표를 찔러 심리적 우세를 점령한 뒤 허를 찔린 상대의 조급한 심리에 여유 있게 응대하는 닉슨의 표정엔 우아한 관록이 배어 나온다. 그 너머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심리적인 수세에 몰리던 프로스트는 역공의 전환을 맞이한다. 강력한 맞수 닉슨의 우연한 전화는 공황 상태의 프로스트에게 자극을 전달하고 계기를 마련해준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적의와 호의라는 이분법적 시선으로 자신을 접대하는 것과 달리 프로스트만이 자신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닉슨의 표정엔 자신의 내면을 속이고 외면의 야심을 치장하듯 추구하는 자의 고독이 서려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스스로 고백을 자초하는 닉슨의 표정엔 그 고독에 대한 자각이 담겨있다. 거짓말을 통해 모든 사람을 속일 순 있지만 결국 스스로를 속이지 못함을 이미 깨달았던 자의 뒤늦은 회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로스트>는 승패에 관한 이야기다. 승자와 패자의 표정은 확연히 구별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승자보다 패자다. 닉슨은 자신의 도덕적 결함을 파고 드는 물음 앞에서 스스로 무너진다. 서로의 빈틈을 파고 들거나 유연하게 피해서던 촌철살인의 공방 속에서 결정타가 되는 건 스스로조차 감내할 수 없었던 진실의 무게다. 결코 속일 수 없던 자신에 대한 깊은 연민이 끝내 닉슨의 입을 열게 만든다. 타인의 비방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함에서 비롯된 고독은 결국 자존심을 무너뜨린다. 자신의 지난 과오를 인정하는 닉슨의 얼굴엔 피곤이 서려있다. 패배를 감지하는 자의 참담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거짓을 가리기 위해 거짓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던 자는 결국 뒤늦게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세월의 피로를 감지하고 허망하게 주저앉는다.
결국 닉슨의 패배는 스스로를 지탱하던 거짓의 신화가 붕괴될 때 이뤄진다. 그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야심을 이룬 프로스트와 달리 닉슨은 결국 영원히 야심을 접어야 했다. 그 인터뷰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재회한 프로스트와 닉슨의 대화는 꽤나 인상적이다. 닉슨은 왜 자신도 모르게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욕망을 이루기 위해 전진을 일삼는 자가 적에게 보인 호의는 어떤 의도를 품고 있었을까. 물론 그건 어느 누구도, 심지어 당사자조차 알 수 없는 진실이다. 단지 그 삶이 얼마나 짐작하기 힘든 피로를 짊어지고 있었는가가 체감될 뿐이다. 진실을 숨기며 삶을 지탱하는 자의 삶이란 이토록 피로하다. <프로스트>는 그 거짓된 삶의 패배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설득하는 수려한 웅변이자 품격 있는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