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스크린의 검은 여백 위로 제목이 등장하고, 등장인물을 명시하는 자막이 눈을 깜빡이듯 몇 차례에 걸쳐 뒤따라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러다 마치 감았다 뜬 눈 앞에 비춰지는 어떠한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쫓아가듯 영화는 시작된다.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과 숏을 채우는 인물간의 거리는 일정하되 두서가 없다. 제3자의 곁눈질이거나 무심한 응시처럼 담담하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기록적인 다큐멘터리의 시야로 위장된 극영화다.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로 응시하는 관점이 발견된다.
재활원에 있던 킴(앤 헤서웨이)은 아버지 폴(빌 어윈)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언니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에 참석하기 위해서 집에 돌아온 그녀의 마음은 짐짓 무겁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이웃의 눈동자엔 모종의 경계심이 배어있고 그녀 역시 그 경계심을 온 몸으로 체감한다. 레이첼의 결혼을 위해 오랜만에 모인 가족 사이에는 짐작할 수 없는 이상 기류가 감지된다. 킴의 등장과 함께 집안의 공기가 달라진다. 감춰진 사연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약물중독으로 재활원에 있는 킴의 과거행적에 대한 불안 정도는 쉽사리 짐작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전 속에서 가족의 들추기 힘든 사연이 암시되며 양상은 또 한번 발전된다. 단순한 맥락이 예감되던 사연에 입체적 호기심이 형성된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다큐의 눈을 빌린 드라마다. 그 심연에 잠겨있던 사연을 들쑤시고 이를 통해 발생하는 갈등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반목을 통한 화합의 여정을 묵묵히 지켜본다. 시종일관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레이첼, 결혼하다>의 정서를 관통하기 위한 하나의 실험이다. 흔들리는 카메라 너머의 인물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기적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 마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 위력도 짐작되지 않는 갈등의 도화선 속에서 위태롭게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 다스린다. 고의성이 다분한 캠버전의 거친 입자는 <레이첼, 결혼하다>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수단이 된다. 그 설득력이란 상황에 대한 사실적 인지라기 보단 정서적 동감에 해당한다. <레이첼, 결혼하다>가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그린 드라마가 아니라 때때로 가족이라는 구조적 실존을 고찰하는 실험극처럼 보이는 건 이 덕분이다. 캠 버전의 화질과 핸드헬드의 진동은 이를 위한 미장센에 가깝다. 혈연의 운명에 속박된 애증의 알고리즘이 뜨겁게 폭발하고 차분히 가라앉는 3일 간의 서사 속에서 은밀하고도 생생하게 관찰된다. 음악의 기능성 또한 탁월하다. 외부가 아닌 영화의 내부에서 직접 연주되는 음악들은 극적인 감정들을 적절히 보좌한다. 특히 갈등의 심화 지점에서 들리는 위태로운 바이올린 선율은 기능적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 모든 것은 극적이되 과장되지 않았고 진심이되 사실은 아니다.
킴과 레이첼을 비롯한 그네들의 가족은 자신들의 불행한 과거사를 시간에 떠내려 보내고 망각하려 하지만 가족의 재회는 결국 기억의 소환을 이루고 갈등을 촉발시키며 서로의 상처를 긁고 이내 파헤친다. 다만 <레이첼, 결혼하다>는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명시하기 위한 단선적인 드라마의 노선을 택하지 않는다. 서로를 증오하듯 거친 언어를 내뱉던 가족이 종래에 서로를 다시 끌어안기까지의 과정에 돌발적인 변수들이 매복하고 예상의 범위를 수없이 벗어난다. 결혼은 이 모든 과정을 이끌어내는 수단이자 갈등과 위기를 봉합하는 계기가 된다. 가족의 일원이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키는 과정 속에서 기존의 가족들과 벌이는 일종의 갈등은 유기체의 잉태와 마찬가지로 통증을 동반한다. 이는 새로운 굴레로 떠나기 직전에 벌어지는 일종의 속죄양이자 대속과 같다.
레이첼과 킴의 갈등 사이에서 아버지의 상흔마저 벌어진다. 내면의 침묵에 진심을 숨겨두며 살아온 가족은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상대의 상처 역시 확인한다. 감춰둔 사연이 드러나는 동시에 갈등이 폭발하고 위기가 도래하지만 결국 그 모든 상처를 확인함으로써 서로의 통증을 이해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전형적이란 단어로 일축되기 쉬운 사연의 본질은 입체적 양식을 통해 간과될 수 없는 특이성의 너비를 확보한다. 결국 가족은 갈등의 반목을 통해 화합에 도달한다. 그 화합의 방식은 어떤 사과나 반성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혈연에 대한 담담한 수긍을 통해 완성된다. 그 성찰의 깊이에 도달하기까지 큰 공헌을 펼치는 건 역시 배우들의 뛰어난 열연이다. 특히 앤 헤서웨이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이 확보된 눈빛을 갖추고 있다. 그녀에 대한 재평가를 가능케 한 연기만으로도 <레이첼, 결혼하다>는 단연 값진 수확이다. 물론 로즈마리 드윗과 빌 어윈, 데브라 윙거를 비롯한 대부분의 배우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열연을 동반한다. 그 열연은 <레이첼, 결혼하다>에 진정성의 너비와 깊이를 확보하는 큰 자산과도 같다.
뜨거운 눈물보다도 묵묵한 이해 속에서 가족은 비로소 서로를 진심으로 감싸 안는다. 이해할 수 없던 애증의 장벽이 무너지고 깊은 이해가 가능해진다. 혈연이라는 구속이 비로소 연민을 넘어 사랑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가족은 새롭게 거듭나 다시 헤어지고 돌아선다. 서로에 대한 냉소를 걷고 진심의 온기를 확인한 채 그리움을 머금고 돌아선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단지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담담한 시선으로 얼어붙어 있던 본의가 따스하게 녹아 내린다. 갑작스런 도입과 달리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결말의 롱테이크에 이 영화의 진심이 담겨있다.
다음 영화가 또 돈과 관련된 영화다. <십억>말이지. 내가 믿는 구석이 있다면 그 전에 <우리 집에 왜 왔니>가 개봉해서 <작전>의 이미지를 순화시켜줄 수 있을 거란 점이다.
<십억>도 신인 감독 영화더라. <작전>의 이호재 감독에 이어 계속 신인 감독과 작업하게 됐다.
내가 언제부터 신인 감독 따지는 배우였다고 그런 말씀을. (웃음) 데뷔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신인감독들이 나를 찾아줬고 그 분들의 시나리오에 믿음이 가니까 했던 거지. 내가 조금 풀렸다고 해서 신인 감독하고 안 하는 것도 웃기잖아.
예전 인터뷰를 보니까 송강호 씨가 ‘시나리오보다 감독이 더 중요하다’라고, 그 말의 의미를 알겠다고 했던데.
첫 대본을 받고 감독님을 만나 뵈면 그 분의 인품이나 철학, 생각이라던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이 작품을 썼는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100% 옳은 건 아니겠지만 일단 그 분이 생각하는 지점이 드러났을 때 판단이 서면 같이 하는 거지.
<작전>을 선택하게 된 뚜렷한 이유를 묻는다면 뭐라고 말할 건가?
일단 주식이란 소재가 국내영화에선 다루지 않았던 거라서 신선했다. 우리나라엔 정치, 경제, 사회를 다룬 시사성 있는 영화가 많이 드물잖아. 소위 감독이라고 불리는, 철학이 있는 분들이 예술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사회 풍자를 비롯해 여러 다양한 시도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게 많이 부족하다 느끼던 차였다. 상업영화, 오락영화지만 요즘처럼 경제도 어려운데 주식이란 소재를 가져왔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어 보이더라.
주식 관련 전문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일반인에겐 어려운 용어지만 관객 입장에서 그냥 한 귀로 흘리듯 들어도 상관없게 완성됐기 때문에 문제는 없을 거 같다. 내가 주식을 모르는 입장에서 대본을 이해 못할 정도라면 할 필요가 없겠지. 예술영화도 아니고, 오락영화인데 대중과 소통이 쉽게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 안 했을 거다. 내가 주식을 전혀 모름에도 캐릭터를 따라가다 보니까 이건 해도 괜찮겠다 싶더라. 화투를 몰라도 <타짜>를 재미있게 본 것처럼. 나는 진짜 화투로 숫자 세는 것도 모르는데 (영화에서) 땡이 된다고 하니까 땡인가 보다, 이러면서 봤으니까. <작전>도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주식을 사려고 하는지, 팔려고 하는지, 이것만 알면 대충 맞춰가는 거지.
최근 했던 인터뷰가 인터넷에 많던데 또 조폭 연기를 했다는 질문이 많더라. 그런데 사실 조폭이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닌데 다들 그렇게 묻는 거 보면 조폭이 획일적인 이미지란 생각이 든다. 결국 그런 질문이 본인의 이미지를 신경 쓰게 만들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조금 그렇지. 기자간담회 때도 일부로 조폭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었다. 그런 선입견이 생길까 봐. 조폭이란 어감 자체가 좀 그렇지. 미국은 마피아잖아. 좀 그럴 듯하지만 조폭은 어감도 안 좋고. 예전에 조폭 코미디가 워낙 많이 나왔기 때문에 ‘또 조폭이야’, 이런 선입견이 나부터도 있는데 관객들은 오죽하겠어. 그래서 웬만하면 얘기를 안 하려고 했는데 기자님들이 자꾸 꺼내시니까. 그게 다른 캐릭터란 걸 얘기하기 위해서 참여하는 편이지.
<작전>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악역 캐릭터를 연기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사실 악역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많을 거 같다. 캐릭터도 좀 더 입체적인 경우가 많고.
그런 면이 없진 않다. 다만 지금 하고 있는 것과 다른 걸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저 착하고 사랑 받는 역을 선호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번에 센 걸 했으니까 다음엔 유한걸 해서 나의 정신세계를 바꿔보고 연기적인 마인드도 변화시켜보자 이런 거지, 관객에게 사랑 받고 싶으니까 이런 역을 하자, 이런 건 아닌 거 같다.
악역 이미지로 국한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해본 적은 없나?
한번 이런 걸 하면 다시는 안 시킬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가족>을 했는데 그런 역이 더 많이 들어오더라. 그때 내가 잘 참은 거 같다. 돈도 많이 필요했고 힘들었지만 그때 좀 늦게 가더라도 참자고 했던 게 지금으로서는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 왜냐면 그때 참고 <러브토크>를 했으니까. <러브토크>의 지석이 너무 답답하고 평범한 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니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역이더라. 그 뒤로 여러 작품을 하면서 배우로서 다양한 층을 지닐 수 있게 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데 우연찮게 센 역할로 흥행이 돼서 저 사람은 센 연기를 하는 친구다, 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건 보는 사람 마음이니 어쩔 수 없지. (웃음) 물론 센 역할이 더 쉽게 각인되는 면도 있고.
황종구는 종종 상황을 유머스럽게 만든다. 진지한 상황을 빗나가게 하는 행위를 한다고 할까. 원래 시나리오 상에서의 캐릭터도 그랬을까?
그렇게 웃기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내가 그런 상황 자체에서 ‘척’을 많이 하는 인물로 설정했기 때문이지. 품위 없는 사람이 품위 있는 척을 하니까 그로 인해 생기는 에피소드가 많을 거라 생각했다. 감독님이 쓰신 대본을 봐도 그렇게 폼 잡고 멋있는 척하는 놈이 ‘이 신발 봐, 이게 얼만지 알아?’ 이런 대사를 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라고 생각했다. 더 좀스럽게 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진짜 멋스러운 여유가 있고 품위 있게 보여야 격은 살리면서 재미있는 코미디가 나올 것 같더라. 다만 우리끼린 웃음을 참기 힘들 정도로 NG도 내고 재미있게 찍었지만 관객에게 통할까 싶은 걱정은 계속 있었지.
이번에도 나름 센 역할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유머를 삽입한 건 그 세기를 줄여보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된 게 아닐까.
캐릭터상 이런 게 가미되면 좋겠다 싶었지. <작전>은 상업영화인만큼 웃음이 있다면 좋을 거라 판단했다. 의도했다기 보단 이게 잘 어우러져 공감대가 형성이 되니까 할 수 있었던 거지. 물론 이 캐릭터 자체가 센 느낌을 주는 장면이 여러 번 있기 때문에 독특한 유머가 가미된 인물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한 부분은 있었다.
본인이 염두를 둔 캐릭터가 감독이 생각했던 캐릭터와 충돌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촬영 들어가고 나서 싸우는 건 이미 늦은 거지. 그땐 감독을 따라가는 게 맞다. 그리고 촬영하기 전에 먼저 컨셉이 섰을 때,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고. 대충 내가 어떤 연기를 했을 때 이 작품이랑 맞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는 이런 지점을 잡고 있는데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도장 찍기 전에 그런 조율을 마치는 편이다. 이번에도 작품 수정고가 몇 편 나왔고 그걸 보면서 감독님한테 믿음이 생겼다. 사실 내 나름대로 연기 컨셉이 잡혀져 있는데 그게 내가 해왔던 그런 류의 연기가 아니라면 나에게도 모험인 셈이다. 이걸 하는 게 맞는지 안 맞는지 계속 되물어 보고 되짚어보고 하는 편이지.
이호재 감독과 조율하는 과정은 순탄했나?
감독님도 내 모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지만 감독님 스스로도 궁금해하고 두려워하는 지점이 있었을 거다. 처음에 찍기 시작할 때, 내가 품위를 지키려 하고, 톤을 다운시키고, 깔고, 이렇게 가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할 거냐고 묻더라. 나는 아직 보여주지도 않았고 나도 지금 서서히 적립해가고 있는 건데. 그래서 지금 찍은 것까지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니까, “아니, 문제는 아니고요. 이렇게 쭉 가시진 않을 거죠?” 그러시더라. 감독님도 믿음은 있었지만 걱정이 많이 됐던 거지. 그래서 좀 기다려보라고, “나도 터지는 부분이 있고, 그럴 때 뭔가 이뤄져야 하는데 지금은 아니지 않냐.” 그랬지. 그러다가 자동차에서 허리띠 풀러 주는, 그 장면을 4회 차에서 찍었는데 그때 이 톤으로 가면 되겠다, 라는 판단이 나도 섰고, 감독님도 만족하셨고, 그렇게 계속 갔지. 그리고 중반으로 가면서 유머를 조금씩 넣기 시작하니까 이젠 감독님이, “그쪽으로 너무 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셔서, “감독님이 생각하는 지점을 간 뒤 번외로 내 걸 갑시다.” 제안했다. 그래서 감독님이 오케이 하면, 내 버전을 다시 갔다. 그 때 막 애드립도 넣었지. 현장 편집에서는 애드립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그런데 스튜디오 편집에선 내 애드립이 다 들어갔더라. 어느 정도 가다 보니까 여기선 유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조금씩 가미를 한 거였다.
그 연기에 의심이 생긴 적은 없었나. 차라리 경험이 적은 배우는,
그냥 마구 밀어붙이는데.
반대로 경험이 많으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경험에 비춰서 자기 연기에 대해 종종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초반에 걱정이나 의심을 많이 하게 되지만 처음 생각했던 게 맞는 거라 생각하면서 자신을 추스른다. 내가 그려놓은 상이 있으니까 거기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 돼야지, 이걸 다른 방향으로 틀면 내가 무너지고, 이 작품 자체가 무너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작품 들어가기 전에 내가 그려본 상에 자신이 있을 때 도장을 찍는다고 얘기했듯이 그걸 다시 되짚고 되찾아가려고 노력한다. 새롭게 노선을 바꿨다가 나도 망치고 작품도 망칠 수 있으니까. 내가 생각했던 거, 내가 적립해놨던 게 맞을 거라고, 다시 자신감을 100% 채운 뒤 설정을 적립하지.
<작전>에서 그런 의심의 지점이 있었나? 초반에 조금 그랬다. 어느 시점부터 현장 편집을 조금씩 확인하는 편인데, 중반 정도 가니까 클라이맥스로 가는 도중에 좀 정적으로 흐르더라. 여기선 뭔가 보여줘서 긴장감을 살려야 될 거 같은데 내가 생각한 컨셉대로 가버리면 다운될 거 같은 거다. 그래서 노선을 바꿨지. 감독님한테, “이쪽은 좀 세게 가야 될 거 같지 않아요? 여기서 분위기를 잡아주지 않으면 너무 정적으로 가기 때문에 뒤에서 손해보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렇게 가게 됐다. 내가 생각한 뼈대는 그대로 가되 조금씩 수정을 가했지.
영화를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로 구분하는 것처럼 연극도 마찬가지다. 목화에서 나와서 대중적인 연극에 몇 편 출연하기도 했는데 그 당시 했던 연기는 분명 목화 시절과 다른 연기였던 거 같다. 좀 더 계산적인 연기랄까. 영화에선 그런 계산적인 연기가 더욱 요구되지 않나.
모든 영화에서 계산적으로 연기한다. 물론 어떤 캐릭터를 만드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인간 박희순이 더 많이 보여지는 영화가 있긴 하다. 일상적인 연기를 할 땐 내가 많이 보여지겠지만 나와 동떨어진 캐릭터를 만들 땐 내가 아닌 부분이 보여지겠지. <나의 친구 그의 아내>나 <러브토크>에서의 평상시 모습은 박희순이 많이 보이는 거 같다. 만약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 출연한다면 정말 인간 박희순이 나오지 않을까. 진짜 술을 먹이신다는데, 내 술버릇도 나오겠지. (웃음) 반대로 캐릭터를 만들고 설정을 붙여서 다른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 예전에 목화 연극을 12년 동안 하다 보니까 답답함과 염증이 생겼지만 같은 공간, 같은 연출, 같은 배우들 사이에 있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 목화에서 나와서 <록키호러쇼>나 <그리스>, <아트>나 <클로저>를 거친 건 목화와는 다른 연기 톤을 시험해보고 싶어서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마다 다른 연기 톤을 가지고 나를 더 보여주느냐, 아니면 나와 다른 걸 가미하느냐라는 연기 플랜이 생기는 거지.
캐릭터에 인공적인 느낌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관건이 아닐까 싶다.
그것 자체가 모험일 순 있지. 캐릭터에 지나치게 치중하다 보면 인공적이다, 내지는 과장됐다, 이런 말을 들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그래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만드느냐가 큰 숙제지. 황종구란 역할을 만들면서도 계속 이걸 혹시 받아들이지 못할까, 라는 걱정도 하고 의심하면서 만들어 나갔다. 편하게 보이기 위해서 많은 설정을 하지만 현장에서도 편해지려고 노력하고 끊임없이 이에 대해 공부하는 편이다.
김무열은 요즘 무대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배우다. 무대 출신 후배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다.
일단 기본기가 탄탄하지만 이 친구의 장점은 성실성이다. 준비를 많이 하고 분석 능력이 탁월하더라. 보통 스스로 배역을 준비해올 때 겉모습에 많이 치우쳐서 오히려 진짜 자신의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친구는 정말 많은 준비나 설정을 해왔더라. 촬영장 안에서 자꾸 없어진다. 찾아보면 한쪽에서 연습하고 있더라. 기본기가 탄탄함에도 불구하고 성실성을 갖고 있다는 게 후배지만 믿음직스러웠다.
함께 호흡을 맞추는 씬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의 장점도 있었을 거 같은데. 각자 설정해가는 부분이 있잖아. 나는 이렇게 가게 되면 이 친구 또한 자기대로 해석하지. 연극을 경험했던 친구니까 어떤 설정을 맞춰감에 있어서 열려있는 측면이 있었다. 이 친구와 연습을 많이 했었다. 자동차에 담배 비벼 끄는 씬도 감독님이 설정만 해준 걸 우리끼리 다른 데서 연습해서 완성했다. 그런 재미가 있었지. 내가 이렇게 할 테니까 너 이렇게 해, 이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할건데 넌 어떻게 할래, 이럴 때 남자들끼리라도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거든. 물론 현장 분위기 자체가 워낙 좋기도 했고. 내가 중간에 연극을 한번 보러 갔었다. 워낙 유명하단 소리를 많이 들어서 같이 작업한 친구니까 보러 갔지. 나는 탁구경기를 보는 줄 알았다. 모든 여자관객들이 (고개를 좌우로 왔다갔다하면서) 김무열만 쫓아다니는 거야, 김무열만. (웃음) 근데 진짜 그럴 만하더라. 이 친구는 룩(look) 자체도 괜찮고, 연기적인 설정이나 감성이 너무 좋더라. 정말 진심으로 박수를 쳐줬다. 그리고 나중에 농담 삼아 얘기했지. 네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 알았으면 내가 배려를 안 했을 텐데. (웃음)
극단 목화에서 12년간 있었으니 오태석 선생님 이야기가 빠질 수는 없다. 혹시 본인이 출연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 적은 없나?
그런 건 없는데 이번에 상 받았을 때 직접 음성이 왔더라. “너 상받았다며? 축하해! 파이팅!”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지.
목화를 나올 때만 해도 많은 기분을 느꼈을 텐데, 지금 그 당시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진짜 기적 같지. 그 12년 동안 연극 판에 있었으면서 영화 판에 가서 내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싶었으니까. 내가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고, 잘 적응할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요즘 내가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게 정말 기적 같다.
<세븐데이즈>가 출세작이 됐다. 오랫동안 연기를 해왔지만 한 작품으로 유명세가 생겼다.
그 당시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답변을 한 적 있는데, 나는 꾸준하게 많은 캐릭터를 변신해왔는데 그 때는 신경도 안 쓰더니 대중적으로 흥행이 하나 되니까 그걸로 나를 평가한다는 게 자꾸 서운하기도 했다. 그래도 고마운 건 그 작품 하나로 인해서 내 전작들을 찾아본다는 거지. 재평가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없더라.
<작전> 포스터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난 현상수배범인 줄 알았어. (웃음) 사실 그건 권력들 사이에 있는 개미를 표현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뿐이지. 내가 뭐 잘 나서 그런 건 아니고. 얼굴이 크게 나오지만, 그런 것뿐이지.
하지만 분명 그 포스터엔 이제 박희순이란 배우의 이름과 얼굴이 영화의 홍보에 득이 된다는 계산도 내포된 셈이다.
용하나 민정이는 충분히 인지도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영화를 이끌어 갈만한 자격이 있는 친구들이지만 나 같은 경우는 많이 약하기 때문에 책임감도 많이 느낀다. 그래서 인터뷰도 많이 하고, 심지어 <해피투게더>까지 나가고. (웃음) 나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 홍보를 위해서도 노력하지.
자신의 인지도가 넓어지고 있다는 걸 의식한 적은 없나? 작품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영향력을 느낀다거나.
거기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못한다는 말도 있잖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작품이나 캐릭터의 색깔과 다른 걸 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런 게 더 우선이지, 내가 원톱이냐, 투톱이냐, 전면에 서느냐, 후면에 서느냐, 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부분에 부담을 느끼고 쫓아가다 보면 다치게 되는 모습을 많이 봐왔고, 나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왔다. 내 인생은 수직상승형이 아니라 계단형이다. 그런 걸 일부로 거부하거나 역행할 필요는 없겠지만 쫓아가진 않으려 한다.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연기에 매진했다. 연기가 자신에게 있어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박희순이란 사람은 재미도 없고, 모험을 즐기지도 않고, 활동적이거나 사회적이지도 못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콤플렉스도 많은 사람이다. 그런 내가 작품에 임할 땐 자신할 수 없지만 누구보다도 더 모험을 즐기고, 새로운 걸 추구하고, 스스로 깨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연기를 안하고 가만히 집에 있을 때는, 정말 내가 왜 이렇게 재미없게 살지, 나이를 먹으면 변해야 되지 않나, 이런 자책을 하게 되는데 연기하는 동안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유머스러움까지, 많은 변화가 있다. 박희순은 30%밖에 없는 거 같고, 70%를 배우로서 사는 거 같다. 그 70%가 있기 때문에 박희순이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사는데 의미가 생기는 거 같다. 그런데 이 30%는 정말 의미가 없는 거 같다. 내 삶에서 배우가 돼서 연기를 하고 영화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있는 70%가 내 인생이고, 내 호흡이며,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이고, 직업인 거 같다.
그런 당신이 어떻게 연기를 하게 한 건가?
그냥 막연하게 시작했지, 뚜렷한 계기는 없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그래서 그럴지도 모르지. 날 보여주는데 익숙하지 않고, 교우관계도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지만 무대에 섰을 때 조명을 받으면 내가 가면을 쓴다고 생각하고 연기할 수 있는 거니까 이 안에서는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도피나 회피이거나 미지의 세계였던 거 같아.
연기라는 것이 어쩌면 삶을 지탱하는 수단이란 말처럼 들린다. 반대로 연기를 하지 않는 순간에는 그만큼 쓸쓸함을 느끼고 있다는 건데.
연애를 안 해서 그런가? (웃음) 연애를 하면 달라질지 모르지. 사실 요즘 유난히 더 그러는 거 같다. 애인도 없이 한참 바쁘게 연기만 하고 살아와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나이가 들면서 느껴지는 허전함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런 당신이 연기를 하겠다고 할 때 부모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나?
아이러니한 게 아무런 끼도 보여드린 게 없었는데 어머니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거다. 항상 연극을 하는데 있어서, 너는 잘 될 것이다, 너는 잘되길 빈다, 기도한다, 이런 얘기를 하셨지, 때려 치고 다른 걸 해라,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남들이 그런 얘길 하면, ‘너나 잘해!’ 이런 식이었으니까. (웃음) 그건 참 고마운 일이지.
장가가라는 말씀은 안 하시나.
하지. 그러니까 주위에 여자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웃음) 모든 기자들에게 내가 지금 밑밥을 깔아놓고 있다.
나도 궁한 사람이라서. (웃음) 이제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졌을 것 같은데 어떤가?
못 알아본다. (웃음) 일단 내가 알아보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인기를 얻게 돼서 좋은 건 작품이 다양하게 들어와서 내가 작품을 고를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난다는 거다. 내가 영화를 10작품 이상 했지만 사회 생활하는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 (웃음) 나로선 다행이다. 그런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작품 속의 나와 박희순은 너무 많은 차이가 나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너무 다르니까 대입을 못 시키는 거 같아. 그리고 설사 알아본다 하더라도 내가 장동건도 아닌데 뭐, 별로 신경이나 쓰겠어? (웃음)
배우로서의 이미지 외의 모습들은 잘 드러나지 않은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최근에 <해피투게더>, <놀러와>에 출연했던 것 때문에 약간 걱정된다. 아, 이젠 정말 그런 거 안 하려고. (웃음)
홍보 때문에 예능프로에 출연했나 보다. 어땠나?
죽는 줄 알았지. 진짜 목욕탕에서 찍더라. 그 좁은 데서 카메라 열대 늘어놓고 너 웃겨봐 그러는데 나가고 싶더라. (웃음)
사실 요즘 예능프로들이 좀 공격적이지 않나. 막말도 넘치고. 그래서 어려운 건 없었나.
그렇지. 다만 그냥 자기들끼리 하면 좋겠는데 자꾸 시키니까. 난 좀 내보내줬으면 좋겠는데. (웃음) 질문에 있는 얘기만 물어보면 준비를 해갈 수 있지만 그것도 아니니까. 박명수 씨한테 엄청 혼났지. (웃음)
예능도 그 나름대로의 연기가 필요하다.
‘테이프 갈고 하겠습니다’ 하면서 잠깐 쉬면 힘들어서 늘어져있다가 다시 시작하면 왁자지껄하다. 연기라고 생각하고 하는 거 같더라. 박명수 씨도 녹화 중엔 막 큰소리치더니 다 끝나니까 다가와서, ‘팬입니다. 영화 너무 잘 봤습니다.’ 이러더라.
연기로 치자면 감정에 몰입해서 연기하다가 컷이 된 후 그 감정에서 빠져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말할 수 있겠다. 혹시 연기에 몰입했다가 빠져 나오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편인가?
감정씬이 너무 많아서 힘든 경우가 있다. 사실 지금까지 개봉작 중에선 가장 힘들었던 게 <남극일기>였다. 재미있기도 했지만 일 년 내내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는데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힘든 작품은 <우리 집에 왜 왔니>다. 일단 육체적으로 10키로나 살을 뺐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아내를 잃고 계속 자살을 시도하는 친구였기 때문에 아픔을 품고 있었다. 그 안에서 또 코믹한 요소도 있다. 연극할 때 어르신들이 하시던 말씀 중에, 비극은 희극처럼 희극은 비극처럼 연기해라, 라는 말이 있다. 코미디가 전반에 흐르고 있는데 그걸 비극처럼 하니까 당사자는 괴롭지. 저예산이다 보니까 24시간 넘게 촬영을 강행하기도 하고, 그 두 달이 지옥 같다고 느낄 정도로 힘들었다.
연기하는 감정에 따라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경우가 있나 보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통닭 먹고 우는 씬 때문에 하루 종일 감정씬을 했었다. 와이프와 재회하고 헤어지는데 눈물이 계속 나더라. 그렇게 눈물을 닦고 또 통닭 먹는 씬을 찍는데 죽겠더라. 답답하고 너무 힘들었지. 그 씬 찍고 나서 커트를 했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그렇게 30분을 대성통곡했다. 내가 그렇게 소리 내서 울어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엉엉대며 울었다. 밤에 다른 씬을 찍어야 되는데 눈이 너무 부어서 얼음찜질하고 몇 시간 있다가 찍을 정도였지.
그렇게 괴로운 경험을 겪게 되면 몰입하는데 있어서 반사적으로 움츠려 들진 않던가?
그렇진 않다. 그런 건 배우로서, 연기에 있어서 그렇게 몰입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지. 그걸 거부하면 연기를 할 수 없다. 연기가 흐르는 데로 배우는 가는 거지.
시장이 좁다 보니 그만큼 선택의 폭도 줄어들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을 거다. 시도가 가능한 장르가 제한된 만큼 배우가 선택할 수 있는 캐릭터도 제한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아쉬움이 많다. 스릴러 하나 잘되니 계속 스릴러가 나오고, 내년엔 <과속스캔들>따라 간다는 얘기도 있고. 다들 천편일률적으로 이때다 싶으면 몰리고, 그런 점에 대한 답답함이 있지만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나는 거꾸로 가는 거 같다. 작년에 한참 스릴러를 많이 찍었지만 <작전>이 새로운 시도처럼 보여서 한 거고, 그전에 <우리 집에 왜 왔니>도 나에겐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겠단 판단이었다. 스릴러에 원톱은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세븐데이즈>보다 재미있거나 새로운 게 없더라. 형사역할만 들어오는데 굳이 그런 걸 또 하면서 새로운 걸 찾을 수 있는 노력을 허비할 바에야 정말 새롭고 독특한 걸 해보는 게 낫겠다 생각하던 차에 <우리집에 왜 왔니>가 들어왔고, 이건 내가 보여주지 못한 독특한 색깔이 있기 때문에 저예산이든, 원톱이든, 투톱이든 상관없이 하겠다고 했지. 그건 내 선택의 문제지, 나에 대한 강요는 없으니까. 우리 ‘열음’(소속사)이 나한테 많이 맡겨주는 편이다. (웃음)
혹시 외국영화보면서 자신이 해봤으면 좋겠다 싶은 캐릭터가 있었나? <캐리비안의 해적>의 조니 뎁이 연기한 잭 스패로우처럼, 그런 역할을 하면 재미있겠다 싶었던 적은 있었지.
할리우드로 가야겠는데. (웃음) 혹시 다시 무대에 설 계획은 없나?
올해 말에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 스케줄 때문에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영화가 계속 들어와서.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건가.
아직 구체화된 건 아니고 2년 전부터 생각이 있었는데 영화가 계속 끊이지 않고 들어오니까. 조금 더 미뤘다가 할 수도 있는 거고.
어쩌면 본인의 인지도가 연극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시점일지도 모르겠다.
거창하게 무슨 기여를 한다거나 그런 건 생각이 없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연극 무대에서 관객과 호흡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거지. 가수가 공연에서 라이브로 관객과 만나서 신나게 한판 놀 수 있는 것처럼 그런 무대가 그리운 거다.
작년에 <연극열전2>가 꽤나 화제였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이런 시도는 좋고 박수도 쳐줄 수 있다. 다만 영화배우나 탤런트를 무대로 데려와서 예전에 대박난 작품들을 우려먹기처럼 다시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 창작극을 만드는 새로운 시도 안에 그 배우들이 존재한다면 모르겠지만 배우들을 상품화시켜서 좋은 작품에 끼워 맞추는 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걸로 연극을 대중화시킨다는 건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거지, 지속적으로 연극을 발전시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에 왜 왔니>는 완전히 작업이 끝난 건가?
이미 <작전>이전에 끝났다.
개봉이 지연된 셈인데, 사실 이런 경험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그렇고, <바보>도 그렇고, <세븐 데이즈>도 우여곡절이 있었고. 예전에 스스로 곗돈 찾는 기분이라고 말했던 적도 있었던데, (웃음) 배우로서 자신이 출연한 작품을 볼 기회가 미뤄진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나?
지금 했던 작품과 다른 작품을 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영화를 선택하는 놈인데 그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지는 사태가 자꾸 발생하고 있다. 그것마저도 운명인 거 같다. 내가 이 작품을 선택하는 게 운명이듯이 이 작품의 개봉이 엉키는 것도 운명이라고 받아들인다. <세븐 데이즈>끝나고 작년에 <우리 집에 왜 왔니>와 <작전>을 찍었는데 그게 올해로 넘어왔다. 그래서 원래 작년 1년이 비는 셈이었는데 그 자리에 <바보>와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왔으니까 오히려 다양성 면에서 잘 됐다 싶은 면도 있었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셈이다. 어쨌든 벌써 다음 영화에 캐스팅됐고 꾸준히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기회가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연기 외적으로 짊어지는 부담도 늘어난 바는 없나.
한 작품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도 있고, 다음 작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도 있고, 내 스스로 새로움을 찾기 위한 모험도 있지만 어차피 난 늦었거든. (웃음) 그러니 더 서두르고 말고 할건 없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대로 천천히 가면 된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린다는 건 사치지. 작품하고 있는 것만해도 행복하니까.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고, TV도 보고, 핸드폰으로 전화만 하면 요즘 사람이 아니다. 더 이상 핸드폰은 전화기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잃어버리면 비단 전화기 하나 잃어버리는 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은밀한 개인정보가 노출될 위험이 생긴다. <핸드폰>은 그 지점을 파고 든다. 분실한 자와 습득한 자 사이의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다. 문제는 ‘왜?’라는 질문이다. 핸드폰에 뭐가 있느냐, 가 정답일 것 같지만 실상 그보다 더 복잡하고 중첩되는 상황의 복마전이 기다린다. 단순히 인물과 인물의 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적인 어떤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 <핸드폰>은 물건에 깃든 세태를 하나의 소재로 승화시킨다. 서비스업에 대한 계급적 풍토와 함께 자본적 노예로 몰락한 서민의 심리적 공황을 결부시켜 객석에 전송한다. 스토리는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된다. 진행의 구조가 허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임팩트가 집중되지 못한다. 병렬로 나열돼야 마땅한 사연들이 직렬로 이어진다. 조합을 이루지 못하고 순열처럼 늘어서있다. 끝에 다다를 때 즈음엔 전반부의 사연이 깡그리 잊혀진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서 문제라기 보단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묶어버린다. 순간적인 장악력은 존재하나 전반적인 지속력이 흔들린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번갈아 통화하듯 산만함이 느껴진다. 물론 교훈 하나는 확실하다. 핸드폰 잃어버리지 마시라. 특히나 은밀한 자신만의 사연을 간직한 것이라면 더더욱.
디즈니 채널에서 방영된 <하이스쿨 뮤지컬>의 마지막 시즌이자 첫 번째 스크린판 <하이스쿨 뮤지컬: 졸업반>(이하, <졸업반>)은 국내 관객에게 분명 낯선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영미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한 TV시리즈라지만 생소하기 짝이 없다. 이스트 고등학교 농구부 결승전이 뭐가 그리 중요한지, 그리고 코트 위의 트로이(잭 애프론)를 바라보며 노래하는 객석의 가브리엘라(바네사 허진스)는 대체 어떤 사이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졸업반>을 두둔할 수 있는 건 이 작품의 발랄함이 그 생소함을 압도하는 까닭이다. 흡사 안무처럼 펼쳐지는 농구 코트 위의 플레이부터 뮤지컬의 양식을 노골적으로 선사하는 <졸업반>은 그 무대적 기능성을 과감하면서도 세련되게 구사한다. 여백이 뚜렷한 스토리 라인과 세심하게 다루어지지 못하는 몇몇 캐릭터의 허점이 여실함에도 완성도가 뛰어난 안무와 노래의 기능적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때때로 유치하다 싶은 틴에이저의 감수성이 직설적인 가사에 담겨 전달되지만 이에 동반되는 퍼포먼스의 원숙함이 단점을 보완한다.
사실 <졸업반>이 묘사하는 학창시절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라 꽤나 동떨어진 세계처럼 보인다. 그건 흡사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마법학교에서 마법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제외시킨 결과가 이스트 고교처럼 보일 정도로 <졸업반>은 꽤나 비현실적이다. 심지어 판타지라 여겨도 상관없다. 그리고 그 지점이 <졸업반>을 비롯한 <하이스쿨 뮤지컬>을 즐기는 묘미다. <하이스쿨 뮤지컬>은 그 이질적인 상황을 만끽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재미로 활용되는 작품이다. 공부 잘하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고 운동 잘하는 엄친아와 엄친딸들이 모여 환상적인 퍼포먼스를 펼쳐내는 곳이 바로 <하이스쿨 뮤지컬>이다. 물론 때때로 자신들의 진로와 미래에 대해 침울해지기도 하지만 이내 낭만적인 로맨스를 노래하고 혈기왕성한 청춘을 누린다. 그곳에서 심각한 고민은 불필요한 걱정이다. 때때로 마치 뮤지컬 <그리스>의 건전한 버전을 연상시킨다. 10대의 패기와 에너지가 말랑말랑하면서도 단단하게 분출된다.
<졸업반>이라는 부제는 <하이스쿨 뮤지컬>의 종막을 선언한다. 발랄하고 해맑은 청춘들의 사춘기가 지난 일기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에 다다랐음을 의미한다.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가브리엘라와 트로이가 이별에 대해 걱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좋은 시절은 끝났다, 는 어른들의 넋두리처럼 만만찮은 고민에 휩싸인다. 하지만 이런 고민 따위는 그냥 학사모를 던져버리듯 유쾌하게 날리고 그저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며 즐겁게 춤춘다. 틴에이저의 감수성은 유치하기보단 명랑하고 끈적거리기 보단 담백하다. 뻔한 결말을 앞두고도 두려움 없이 경쾌하다. 뛰어난 가창력과 원숙한 무대 매너, 현란한 안무와 화려한 미장센에 눈과 귀가 즐겁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날리는 뻔뻔함을 보상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한다. 물론 지옥 같은 이 나라의 입시제도 하에서 이런 환상적인 학창시절 따윈 달나라 이야기 같아서 씁쓸하다만.
경건한 미사 중 신부의 설교가 시작된다. “확신이 없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의미심장한 물음, 약간의 침묵. 항로를 잃어버린 어느 선장의 사연이 이어진다. 항로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선장이 별자리의 방향까지 의심하게 된다는 이야기. 이에 덧붙여지는 말.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강력하게 지속됩니다.”확신과 의심은 모두 다 마음에서 비롯된다. 의심과 확신은 배반적인 언어지만 그 태생의 기반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의심과 확신은 방향이 다를 뿐, 한 지점에서 출발한 믿음이다.
국내에서도 공연된 바 있는 유명한 동명희극원작을 영화화한 <다우트>는 그 불분명한 믿음의 갈래길에 선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1964년, 뉴욕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가톨릭 학교에 새로 부임한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강권적인 교회 분위기에 온화한 변화를 주도한다. 그러나 학교장 알리시아스 수녀(메릴 스트립)는 권위적이고 원칙적인 방식을 고수하려 하고 두 사람은 은밀한 대립관계로 거듭한다. <다우트>는 성향이 다른 두 인물의 심리적 대결 구도를 치밀하게 묘사하는 작품이다. 그 대립은 점차 갈등으로 발전하고 서로를 향한 험담과 비난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 계기로 작동하는 방아쇠가 바로 의심(doubt)이다.
알리시아스 수녀는 학교의 권위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온화하고 자유주의적인 플린 신부는 요주의 인물이다. 같은 바람을 두고도 ‘바람이 변하고 있다’는 알리시아스 수녀와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플린 신부의 견해차는 은밀하되 강경한 대립구도를 암시한다.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의 증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갈등을 발화시키고 긴장을 가열시킨다.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와 학교의 유일한 흑인 입학생인 로널드 밀러 사이에 모종의 의혹이 있음을 의심하고 이에 대해 알리시아스 수녀에게 증언한다. 결국 알리시아스 수녀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모되고 이는 플린 신부와의 갈등을 가열시키는 강한 발화점이 된다.
영화는 두 사람의 심리적 대립 구도를 직설적인 방식보단 행위 등을 통한 간접적인 제스처로 묘사한다. 알리시아스 수녀의 방에 들어선 플린 신부가 알리시아스 수녀의 자리에 앉는 순간 경직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이윽고 차양을 올리는 알리시아스 수녀가 햇살에 눈을 찌푸리는 플린 신부를 모른 체 할 때, 그리고 차양을 내리기 위해 일어선 플린 신부의 자리를 다시 알리시아스 수녀가 탈환(?)하는 과정까지. 두 인물의 심리적 대립이 묵언적인 행위를 통해 일차적으로 묘사된다. 한편 심리적인 대립이 본격적인 격양으로 치닫는 순간, 그 주변부의 도구들이 감정의 온도를 높이는 촉매로 활용된다. 알리시아스 수녀가 플린 신부에게 자신의 의심을 처음으로 드러내고 이를 통해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 울려 퍼지는 전화벨은 팽팽한 감정의 대립을 더더욱 신경질적으로 보완한다. 인물을 하부에서 올려 비추거나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기울이는 카메라의 시선 역시 인물의 잠재된 불안을 적절하게 드러낸다. 저온에서 고온으로 끓어오르는 물처럼 감정적 충돌이 갈등의 파고로 출렁이기까지의 과정들이 세심하고도 견고하게 직조된다.
희곡을 기반으로 한 <다우트>는 다분히 연극적이다. 인물들을 둘러싼 환경을 무대적인 장치로 활용하는데 능숙하기도 하지만 그 중심에 선 배우들의 연기가 연극적인 연기를 가능케 하는 까닭이다. 직설적인 대사보다도 행간의 의미 사이를 읽게 만드는 제스처나 표정, 행위가 영화적 의미를 완성시킨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은 현악기의 떨림처럼 섬세하지만 날카롭게 감정의 고저를 다스리고, 그 사이에 놓인 에이미 아담스는 짓눌리지 않고 제 수준을 유지한다. 특히 짧은 분량임에도 바이올라 데이비스의 연기는 실로 인상적이다. 뛰어난 배우들은 <다우트>에 있어서 최고의 자산이자 일등 공신에 가깝다.
알리시아스 수녀는 플린 신부에 대한 의심 너머의 진실을 놓고 공방하지만 실상 그 대립각의 시작점은 서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긴 손톱과 설탕의 섭취를 혐오하는 알리시아스 수녀가 손톱을 기르고 설탕을 선호하는 플린 신부의 성향을 알게 됐을 때 이미 구도는 이뤄진다. 정치적 축출을 위해 작동한 의심이 진실에 대한 공방으로 번져나가고 그 지난한 갈등 속에서 승패가 정해졌을 때, 영화는 그 승패 너머의 진실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과연 진실은 드러났는가. 실상 그것은 중요한 물음이 아니다. 영화는 그래서 그 진실을 애써 조명하려 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긴 의심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건 진실을 위한 의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 자신의 신앙적 원칙을 깨버리면서까지 의심을 확신으로 밀고 나가는데 성공한 알리시아스 수녀는 끝내 눈물로서 자신의 통증을 내보인다. 교구를 떠난 플린 신부보다도 깊은 상처가 드러난다. 사실이 드러내는 순간, 진심이 부서진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진실을 드러낼 때 오히려 승자의 강박은 허위가 된다. 강박에서 튕겨나간 의심이 진실에 적중한다 해도 그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말은 허물을 만든다. 바람에 날린 깃털처럼 퍼져나가 주워담을 수 없게 된 말들이 양심을 자극한다. "이 모든 것이 다 내 의심에서 비롯됐어." 알리시아스의 눈물엔 자신의 의심을 통해 뿌리내린 고통에 대한 뒤늦은 자각이 담겼다. <다우트>는 그 속된 믿음이 낳는 책임과 의무를 지적하고 되짚는 현명한 물음이자 사려 깊은 대답이다. 진실을 위한 믿음은 숭고하지만 의도를 위한 믿음은 현명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고 만다. 그것이 비록 사실을 관통한다 해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배려하지 못한다. 승패를 위한 의심은 모든 것을 부순다. 그 끝에 남는 건 부끄럽게 선 황폐한 욕망뿐, 어떤 명예도 실리도 남아있지 않다. 믿음이란 이토록 강하고 지속적이라 위험한 것이다.
저 푸른 산호초 섬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남은 평생을 휴양처럼 살고 싶어라. 전직수영국가대표 출신인 천수(김강우)의 꿈은 팔라우섬으로 가는 직행 티켓을 끊는 것이다. 이에 필요한 건 돈이다. 많은 돈이 필요하다. 짧은 시일 안에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는 곳은 도박판이다. 도박판에서 인생 한방을 노리는 천수의 꿈은 야무지다. 하지만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패 한번 잘못 봤다가 패가망신의 지름길로 들어선다. 팔라우섬은 커녕 장기를 팔게 생겼다. 그런 천수 앞에 강사장(조재현)이 나타나 ‘마린보이’가 될 것을 명령한다.
<마린보이>는 바다의 왕자가 아니다. 반대로 제물이 되기 좋은 운명이다. 마약밀매조직을 운영하는 강사장은 일본으로부터 마약을 밀수하기 위해 천수를, 정확히 말하자면 천수의 몸을 이용하려 한다. 신체를 마약을 숨겨오는 생체보관함으로 삼고자 한다. 수영실력이 좋은 천수는 도박으로 발목이 잡혔다. 좋은 먹잇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벼랑이 멀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직진해야 한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방향은 명확하다. 단순해지기 쉬운 구조다. 하지만 캐릭터를 통해 변수를 두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늘려나간다. 속셈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며 정체를 확실히 밝히지 않는 캐릭터를 포진시키며 진행될 상황에 대한 흥미를 더한다.
빠르게 전환되는 영상엔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다. 그 정보엔 진짜 패와 뻥카가 뒤섞여 날린다. 그 사이로 본심을 감춘 이야기가 여유롭게 떠다닌다. 이야기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때때로 빈틈이 엿보인다. 하지만 맥락의 큰 전환 지점마다 적절한 방향 표지판을 제시한다. 철저하게 잘 그려진 지도는 아니지만 길을 찾아갈 수 있을 정도의 기능성은 갖추고 있다. 최소한의 역할을 하는 플롯의 뼈대에 두툼한 살집을 붙이는 건 캐릭터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성격의 캐릭터를 통해서 평이한 이야기에 은밀한 호기심을 장착시킨다. 속셈을 알 수 없는 캐릭터들은 사연의 뒤편으로 갈수록 관계의 복마전을 거듭하며 거듭 상황을 전복시킨다. 다만 그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 결말부의 파괴력이 부족한 감은 있다. 서스펜스 구조가 신파 모드로 돌변하는 상황은 어딘가 작위적인 인상을 준다.
하지만 <마린보이>는 적절한 기본기를 갖춘 오락영화다. 새로운 발견이라 불리긴 어렵지만 적절한 선방이 이뤄진다. 한편으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코미디가 구사되곤 하는데 이는 천수를 연기한 김강우의 대사나 행동에서 기인한다. 진지한 상황에서 돌발적인 멘트를 날리거나 행동을 하는데 이게 엇박자에 가까운 개그를 발생시키며 궁극적으로 이는 다소 따분하게 내려앉을 수 있는 상황을 윤활유처럼 무마시키는 역할을 한다. 의도한 결과물처럼 보이진 않는다. 다만 배우 본연에게서 비롯된 정제되지 않은 태도가 우연스럽게 캐릭터에 부합된 결과처럼 여겨진다.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돌발적이나 그것이 캐릭터에 잘 부합되는 인상이다. 반대로 나머지 배우들은 캐릭터 역할에 충실하다. <마린보이>에서 가장 큰 장점은 그 캐릭터들이 자기 역할에 충실한 덕분에 단순한 플롯 위로 다양한 눈속임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를 가능케 한 건 바로 그 캐릭터적 연기다. 배우 본래의 성격이 반영된 느낌도 있지만 캐릭터에 몰입하고 있다는 감상을 준다.
어딘가 허전함도 남는다. <마린보이>에서 가장 큰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마린보이가 어떻게 마약을 몸에 내장(?)하고 바다를 거쳐 육지로 올라오는가라는 문제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린보이>는 가장 큰 호기심을 간단하게 묵살한다. 결정적인 순간이 가장 쉽게 무마된다. 덕분에 다소 맥이 풀리는 경향이 있다. 가장 기대했던 패가 알고 보니 뻥카에 가깝다. 바다를 무대로 한 액션이 주가 되리라 기대했건만 대부분의 사건은 육지에서 이뤄진다. 기대를 배반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액션보단 스릴러가 주가 되고, 때때로 유머가 발생하며 멜로까지 발을 걸친다. 기대를 배반하는 면모가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재미를 거둔다. 이것이 장점이 될지, 단점이 될지는 가늠할 수 없다. 버라이어티한 재미는 있지만 분명 원하던 재미가 아닐 공산을 배제할 수 없다.
영화를 관통할만한 지점은 아니지만 <마린보이>를 통해 읽혀지는 단상들이 존재한다. 천수와 마리(박시연)는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한다. 물론 그 이유는 피상적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현상이 읽힌다. “한국을 떠나고 싶다니, 이 나라 국민이 맞군.” 김반장(이원종)이 천수에게 던지는 대사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대한민국을 뜨고 싶어하는 청년의 욕망에 묘하게도 마음이 동한다. 깊은 사유를 끌어낼만한 이야기 수준에 이르는 건 아니지만 몇몇 대사와 설정들은 현실적인 고민을 강력하게 이끌어내기도 한다. 가볍게 찰랑거리지만 빠져들만한 매력이 존재한다.
오스카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 인가. 그 예상답안지가 공개됐다. 미국 현지시각으로 지난 22일 오전 5시 30분에 LA 아카데미 사무엘 골드윈 극장에서 미국 영화예술아카데미의 주최로 제81회 아카데미 수상후보작 발표가 이뤄졌다. 골든글로브에서 무관을 기록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총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저력을 발휘한 가운데, 최근 골든글로브 4관왕의 주인공 <슬럼독 밀리어네어> 역시 10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그 밖에 <밀크>가 8개 부문에, <프로스트VS 닉슨>과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가 5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며 수상 가능성을 점쳤다. 2008년 최고 흥행작이자 화제작이었던 <다크 나이트>도 8개 부문 후보로 지명됐지만 히스 레저의 남우조연상을 제외한 주요 부문에선 외면당했다. 한편, <월-E>는 장편애니메이션 부분 외에도 각본상을 포함한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귀추가 주목된다.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오늘 2월 21일 LA 코닥극장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후보작 The 81st Academy Awards Nominees
작품상 Best motion picture of the year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프로스트 VS 닉슨 Frost/Nixon>
<밀크 Milk>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남우주연상 Performance by an actor in a leading role
<비지터 The Visitor> 리처드 젠킨스
<프로스트 VS 닉슨 Frost/Nixon> 프랭크 란젤라
<밀크 Milk> 숀 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브래드 피트
<레슬러 The Wrestler> 미키 루크
남우조연상 Performance by an actor in a supporting role
<밀크 Milk> 조쉬 브롤린
<트로픽 썬더 Tropic Thunder>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다우트 Doubt>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히스 레저
<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Road> 마이클 셰넌
여우주연상 Performance by an actress in a leading role
<레이첼 시집가다 Rachel Getting Married> 앤 헤서웨이
<체인질링 Changeling> 안젤리나 졸리
<프로즌 리버 Frozen River> 멜리사 레오
<다우트 Doubt> 메릴 스트립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케이트 윈슬렛
여우조연상 Performance by an actress in a supporting role
<다우트 Doubt> 에이미 아담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Vicky Cristina Barcelona> 페넬로페 크루즈
<다우트 Doubt> 비올라 다비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타라지 P. 헨슨
<레슬러 The Wrestler> 마리사 토메이
감독상 Achievement in directing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데이빗 핀처
<프로스트 VS 닉슨 Frost/Nixon> 론 하워드
<밀크 Milk> 구스 반 산트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스티븐 달트리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대니 보일
각색상 Adapted screenplay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에릭 로쓰, 로빈 스위코드
<다우트 Doubt> Written by 존 패트릭 쉐인리
<프로스트 VS 닉슨 Frost/Nixon> 피터 모건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데이비드 헤어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사이몬 뷰포이
각본상 Original screenplay
<프로즌 리버 Frozen River> 커트니 헌트
<해피 고 럭키 Happy-Go-Lucky> 마이크 리
<킬러들의 도시 In Bruges> 마틴 맥도나
<밀크 Milk>더스틴 랜스 블랙
<월-E WALL-E> 앤드류 스탠튼, 짐 러든, 피트 닥터
편집상 Achievement in film editing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커크 박스터, 앵거스 월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리 스미스
<프로스트 VS 닉슨 Frost/Nixon> 마이크 힐, 댄 할리
<밀크 Milk> 엘리엇 그레이엄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크리스 디킨스
촬영상 Achievement in cinematography
<체인질링 Changeling> 톰 스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클라우디아 미란다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월리 피스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크리스 멘지스, 로저 디킨스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앤쏘니 도드 맨틀
미술감독상 Achievement in art direction
<체인질링 Changeling> 제임스 무라카미, 개리 페티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도널드 그레이엄 버트, 빅터 J. 졸포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나단 크라울리, 피터 란도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 The Duchess> 마이클 칼린, 레베카 앨러웨이
<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Road> 크리스티 지아, 데브라 쉐트
의상상 Achievement in costume design
<오스트레일리아 Australia> 캐서린 마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재클린 웨스트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 The Duchess> 마이클 오코너
<밀크 Milk> 대니 글리커
<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Road> 알버트 울스키
분장상 Achievement in makeup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그렉 캐놈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존 카글리오네 주니어, 코너 오 설리반
<헬보이2: 골든 아미 Hellboy II: The Golden Army> 마이크 엘리잘드, 톰 플라우츠
음악상 Achievement in music written for motion pictures (Original score)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알렉산드레 데스플롯
<디파이언스 Defiance> 제임스 뉴튼 하워드
<밀크 Milk> 대니 엘프만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R. 라만
<월-E WALL-E> 토마스 뉴튼
주제가상 Achievement in music written for motion pictures (Original song)
“Down to Earth” from <월-E WALL-E> 피터 가브리엘, 토마스 뉴튼
“Jai Ho” from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R. 라만, 굴자
“O Saya” from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R. 라만, 마야 아룰프라가삼
음향상 Achievement in sound editing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리차드 킹
<아이언맨 Iron Man> 프랭크 에울너, 크리스토퍼 바예스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톰 사이어
<월-E WALL-E> 벤 버트, 매튜 우드
<원티드 Wanted> 와일리 스테이트맨
음향효과상 Achievement in sound mixing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데이비드 파커, 마이클 세마닉, 렌 클라이스, 마크 아인가르텐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로라 허쉬버그, 개리 리조, 에드 노빅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이안 타프, 리차드 프리케, 레슐 푸커티
<월- E WALL-E> 톰 마이어스, 마이클 세마닉, 벤 버트
<원티드 Wanted> 크리스 젠킨스, 프랭크 A. 몬타노
시각효과상 Achievement in visual effects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에릭 바바, 스티브 프리그, 버트 달튼, 크레이그 바론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닉 데이비스, 크리스 코발드, 팀 웨버, 폴 프랭클린
<아이언맨 Iron Man> 존 넬슨, 벤 쇼, 댄 슈딕, 쉐인 마한
장편애니메이션 상 Best animated feature film of the year
<볼트 Bolt>
<쿵푸 팬더 Kung Fu Panda>
<월-E WALL-E>
장편다큐멘터리 상 Best documentary feature
<네라크훈, 베트라얄 Nerakhoon, The Betrayal>
<세상 끝에서의 조우 Encounters at the End of the World>
<더 가든 The Garden>
<맨 온 와이어 Man on Wire>
<트러블 더 워터 Trouble the Water>
단편다큐멘터리 상 Best documentary short subject
<넴엔의 양심 The Conscience of Nhem En>
<파이널 인치 The Final Inch>
<스마일 핑키 Smile Pinki>
<306호 발코니에서 온 증인 The Witness from the Balcony of Room 306>
단편애니메이션 작품상 Best animated short film
<작은 육면체의 집 La Maison en Petits Cubes>
<러브스토리 Ubornaya istoriya - lyubovnaya istoriya>
<옥타포디 Oktapodi>
<프레스토 Presto>
<디스 웨이 업 This Way Up>
단편영화 작품상 Best live action short film
<줄 위에서 Auf der Strecke>
<마농 온 더 아스팔트 Manon on the Asphalt>
<뉴 보이 New Boy (Network Ireland Television)>
<더 피그 The Pig>
<토이랜드 Spielzeugland>
외국어영화상 Best foreign language film of the year
<바더 마인호프 컴플렉스 Der Baader Meinhof Komplex> 독일
<더 클래스 Entre les murs> 프랑스
<굿, 바이 Okuribito> 일본
<복수 Revanche> 오스트리아
<바시르와 왈츠를 Vals Im Bashir> 이스라엘
집안 가득 햇살이 가득 찼다. 보기만 해도 따스한 광경이다. 집안 구석구석까지 빛이 들어서있다. 그 광경만으로 반 허공에 뜨는 기분이다. 예쁘게 내려앉은 빛이 곱고 화사하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 채광 좋은 집엔 젊은 부부가 산다. 자상한 상인(김태우)과 천진난만한 모래(신민아)가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는 둘만의 공간이다. <키친>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이들이 어느 정도의 진심을 공유할 수 있는가에 관한 사연이다. 한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때로 다른 것을 보고 생각하게 된 어떤 이들의 마음을 비추려 한다.
제목처럼 <키친>은 공간의 역할이 중요하다. 과장된 명도로 내리쬐는 그 구석구석엔 인물간의 감정이 먼지처럼 켜켜이 내려앉아있다. 상인과 모래는 서로를 신뢰하며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을 도발할만한 사건이 생긴다. 약 기운에 취하듯 어느 좁은 공간에서 마주한 외딴 남자의 스킨십에 몸을 맡겨버린 모래는 난생 처음 이상한 맛(?)을 느낀다. 따스한 햇볕에 기분이 나른해지듯 그 남자와의 망중한 같은 시간이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남편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그 남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남자를 만난다. 우연히도 한집에서 살게 된다. 특별한 비밀을 공유하게 된 그 남자 두레(주지훈)는 한식당을 차리려는 남편이 믿는 사부라 한다. 기이한 삼각관계에 놓인 세 사람은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한 집을 공유하는 관계로 거듭난다.
우연과 필연의 접합으로 이뤄진 삼각관계는 그 투명한 명도만큼이나 인공적이나 설득력을 지닌다. 보다 중요한 건 우연에서 비롯된 필연적 사연의 본심이다. 순수한 캐릭터로 위장에 성공하고 있으나 관계를 흔들기 위한 불순한 의도가 내재돼 있다. 마음이 변한 건 아니라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좋아진 모래의 마음을 마냥 두근거리듯 바라볼 순 없다. 궁극적으로 마냥 순수한 경험담으로 보존될 수 없는 것이다. 갈등을 느끼는 주체는 모래가 아니라 두 남자다. 비밀의 유효기간이 파기되는 순간 화기애애하던 두 남자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고 웃음을 공유하던 공간은 침묵과 호통으로 채워진다. 애초에 소유하던 쪽과 새롭게 공유한 쪽의 감정이 점차 치열하게 맞부딪힌다. 결국 상황을 무마시키는 건 여자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듭나는 쪽은 여자다. 두 남자는 그저 무기력할 뿐이다. 소유하고 있다고, 소유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상대로부터 공유 당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남자들은 허탈하게 주저앉는다.
<키친>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도발적 물음을 품고 있는 듯 하지만 맺음과 끊음에 대한 사유에 가깝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뒤늦게 이해해버린 여자는 결국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음으로써 새롭게 거듭난다. 그렇다고 그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것은 선택의 역량에 달렸다. 결혼과 이혼을 시작과 끝의 대립적 성향으로 인식하는 풍토 안에서 <키친>은 나름 진보적인 영화다. 그 변화를 결정짓는 주체도 여자다. 소유하기 원했던 남자들은 그저 선택을 기다릴 따름이다. 장사가 되지도 않는 양산가게를 경영하며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듯 살아가던 모래는 그 특별한 경험을 거쳐 홀로서기를 꿈꾸고 시도한다. 남녀의 관계보다도 그 여자의 변화가 눈에 띈다. 항상 남자의 요리를 먹던 여자가 스스로 요리를 시도하고 남자들에게 요리를 떠먹여준다.
이야기 흐름은 명료하고 딱히 막히는 구석이 없다. 하지만 때때로 그 상황에 내재된 감정보다도 그 감정을 품은 그릇에 눈이 간다. 깔끔하고 정갈한 미장센은 안으로 삭힌 감정을 숨기기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지나치게 값비싼 그릇처럼 보인다. 보일 듯 말 듯 얕고 천천히 흐르는 감정선 사이로 시각적 묘미가 더욱 흥미롭게 파고 든다. 세심한 조리사의 손놀림 끝에 차려지는 빛깔 좋은 음식들의 향연은 트렌디한 재미를 더하고, 밝고 화사하면서도 뚜렷한 색감의 영상은 눈길을 끈다. 그 사이로 인물들의 감정변화가 확인되고 갈등의 양상이 감지되나 정작 그 감정에 몰입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개성이 뚜렷한 만화주인공처럼 비현실적이다. 그 비현실적인 상을 통해 풍겨져 나오는 감정의 내음 역시 어딘가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가 가나 마음으로 체감되지 않는다. 다만 그 주변부의 다양한 정보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 깊은 맛보단 인공적인 자극을 제공하는데 익숙하다. 고운 빛깔로 치장해 눈요기에 좋지만 정작 손이 가지 않는 음식과 같다. 착향료나 감미료처럼 인공적인 색과 맛이 인지된다. 너무 예뻐서 되려 맛보기 불편하다.
<키친>은 예쁘고 아기자기한 영화다. 투명하고 또렷한 색감처럼 인물들도 또렷하고 투명하다. 도발적인 사연을 품고 있지만 착하기만 한 인물들은 그 사연마저 순수하게 표백시킨다. 그 덕분에 <키친>은 극히 특별한 사연으로 속박된다.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려 하지만 그 특수한 실례가 답변의 영향력도 제한한다. 너무도 투명하여 이 세상 것으로 보이지 않는 햇살만큼이나 세 사람이 이루는 사연도 반 허공에 떠있는 느낌이다. <키친>은 편향적인 답변으로 이뤄진 앙케이트다. 보편적인 수치를 얻고자 했던 물음의 가능성이 국한된다. 물론 그게 잘못은 아니다. 사랑에 정의가 없듯 어떤 로맨스도 가능성을 의심받을 수 없다. 단지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의 차이다. 도발적인 질문이 품은 답안지의 가능성에 비해 편향적인 답변을 수집했다.
(최근 <원스>에서 연인으로 등장한 그와 그녀, 글렌 한사드와 마르케타 이글로바의 새로운 밴드 'Swell Season'이 내한 공연을 펼쳤고, 이에 맞춰 재개봉된 <원스>의 반응이 좋다고 합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들은 실제 연인이며 뮤지션이기도 하죠. 이 글은 2007년 10월 1일에 작성된 기사입니다. 그 당시 추석 연휴 동안 <원스>를 2번 연일 관람하고 나서 써내려간 글을 포스팅합니다. 그저 당신이 이 영화를 꼭 볼 수 있길 바랍니다. 전 정말 좋았거든요. 진심으로 말이죠. 지금도 매우 좋아합니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하고 애잔해요. 그 마음이 당신에게도 전해지길 바라는 심정으로 이 글을 포스팅합니다. 조금 길어요. 염치없게도 말이죠.)
추석 연휴 동안 <원스>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습니다. 한국영화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추석 극장가의 풍경 속에서 작게나마 제 자리를 마련하고 있던 <원스>는 이질적인 한 점의 여백 같아 보이더군요. 일단 제가 수많은 한국 영화들보다 <원스>를 택한 건 그 영화들을 이미 언론시사를 통해 봐버린 탓이기도 했고, 더욱 솔직해지자면 <원스>의 시사 일정을 놓쳐버린 것을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한가했던 추석 연휴는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원스>를 보기 일주일 전쯤에 이미 OST를 구매해서 듣고 있던 저로서는 이 영화를 보지 않고서야 버틸 재간이 없었죠. 결국 전 <원스>에 대한 갈증은 두 번에 걸친 연일 관람으로 해갈하게 됐습니다.
위에서 밝힌 바처럼 애초에 영화 관람의 의도는 이 글을 불러내고자 하는 기획적 움직임과는 무관했습니다. 단지 극장을 찾은 건 <원스>를 보고 싶다는 순수한 의욕에 불과했습니다. 이 글은 그 순수했던 욕망에 덧씌워진 어떤 불순한 의도를 위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그 불순한 의도는 글의 말미에 밝히겠습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고백하자면 <원스>의 언론시사회를 불가피하게 놓친 덕분에(!) 이 영화를 일반 상영관에서 접하게 된 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끔씩 언론 시사회를 통해서 접했던 영화들에 대해 리뷰란 형식으로 글을 쓰고 별점을 매기는 과정을 <원스>에 덧씌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매우 뿌듯했기 때문이죠. 가끔씩은 그 책무가 저에겐 과분한 짐처럼 얹혀지는 까닭이며, 동시에 누군가의 고뇌에서 나왔을 창작물에 별점을 매기는 것에 대한 어떤 중압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박한 평가가 됐던, 후한 평가가 됐던 마찬가지로 말이죠.
처음 <원스>를 보기 위해 찾은 곳은 강남 코엑스의 메가박스였습니다. 극장에 가기 위해 올라탄 지하철의 한산함은 명절날 도시의 풍경 중의 하나로 낯설면서도 멋쩍지는 않았습니다. 해마다 명절이 오면 발견할 수 있는 이 도시의 풍경이자 이 당시에만 허락된 여유이기도 하니까요. 물론 코엑스엔 어김없이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메가박스에서도 티켓을 끊기 위한 늘어선 줄도 여전했습니다. 하지만 평소보단 전반적인 인파의 간격 차가 더욱 벌어졌음이 감지될만큼 코엑스에도 명절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듯 하더군요. 저는 코엑스 메가박스 10관에서 23일 2시 35분에 영화를 봤습니다. 상영 시간 10분 전, 상영관에 들어섰을 때 확연히 구별되는 공석의 자태는 이 영화가 확실히 소외될 것이란 예측에 맞아떨어지는 품세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이 삼삼오오 상영관을 채우더니 종래엔 스크린에 가까운 앞줄 몇 곳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채워지더군요. <원스>에 대한 기대이상의 수요가 약간 놀랍기도 했고, <원스>가 어떤 특별한 수요를 위해서 존재하는 영화만은 아닐 수 있단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이는 물론 영화적 자질에 대한 우려가 아닌 그 자질을 수용하고자 하는 관객의 취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였습니다. 한편으론 그런 취향을 존중한 멀티플렉스의 어떤 결정(?)이 먹혔다는 사실에서도 다행스러웠습니다. 상업적 마인드를 우선시하는 멀티플렉스 체인에서 큰 주목을 끌지 못하는 영화를 선택한 건 일종의 모험일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원스>가 만들어 낸 상영관의 진풍경은 후에도 어떤 모험을 이끌어 낼 좋은 선례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두 번째로 <원스>를 보기 위해 찾은 곳은 명동CQN(씨네콰논)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추석 연휴 첫날이었던 24일 2시 50분 영화를 보기 위해 찾은 명동은 상당히 북적거리더군요. 다소 한산한 거리의 분위기를 기대했던 필자에겐 아쉬운 풍경이었지만 그것이 이 거리가 쉽게 보여줄 수 없는 이질적인 표정일 것이라 생각하곤 부질없는 기대감 따위는 접어둔 채 사람들을 피해가며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명동CQN 역시 멀티플렉스의 형태를 갖춘 극장이지만 전날 찾았던 코엑스 메가박스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공간임은 확실했습니다. 상영관의 객석 수와 스크린의 너비를 비교하지 않아도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메가박스의 광활한 풍경과 달리 여유롭게 자신의 영화를 기다리는 몇몇의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담한 실내의 모습은 이미 두 극장의 차이를 증명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전날과 마찬가지인 건 <원스>를 보기 위해 들어선 3관을 가득 채운 객석의 모습이었습니다. 소수의 수요를 만족시킬만한 특별한 영화들을 자주 상영하곤 하는 명동CQN의 특성상 이런 사실이 크게 특별할 이유는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원스>란 영화에 대한 수요층이 기대 이상이란 점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인 코엑스 메가박스와, 그에 비하면 중소 규모라 할 수 있는 명동CQN에서 <원스>의 상영관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심정은 묘했습니다. 이는 극장 규모에 관계없이 <원스>란 영화가 어떤 수요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 즉 만족할만한 관객 점유율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반가운 일이었죠. 이는 현재 멀티플렉스 극장들에 채워진 어떤 영화들을 통해선 경험할 수 없는 <원스>만의 순수한 외적 체험처럼 느껴졌으니까요. 특히나 작은 규모의 영화들이 외면받는 요즘같은 현실에선 고무적인 사실이며 한편으로 약간의 과장을 섞어 넣자면 다양한 영화의 수요를 원하는 일부 관객층의 열망을 극적으로 대변하는 사례처럼 보였습니다.
<원스>는 장르적으로 단순히 명명하면 뮤지컬(musical) 영화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대가, 혹은 우리가 아는 뮤지컬 영화와는 거리가 있는 작품입니다. 대부분의 뮤지컬 영화들은 음악을 위한 가상적인 공간을 마련하며 이를 장르적 특성으로 규정화하여 관객의 암묵적인 동의를 발생시킵니다. 그래서 뮤지컬 영화는 고유의 영화적 언약을 통해 관객과의 순수한 장르적 소통을 이루려는 의지의 산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역으로 관객의 동의 이전에 상황을 먼저 전시하고 그런 이색적인 상황을 관객에게 받아들이길 강요하는 셈이기도 하죠.
뮤지컬 영화에 대한 불결한 반감을 느낀다면 이런 까닭일 것입니다. 뮤지컬 영화들이 단순히 ‘뮤직’의 소재적 기능보단 ‘뮤지컬’이란 효과적 기능에 치중한 나머지 장르가 태생적으로 고스란히 떠안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한계가 발생하는 것이죠. 뮤지컬 영화의 영상은 음악을 위한 공간 마련을 축조하는 것으로 소비돼야 마땅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며, 때론 음악의 영상화를 위해 무모한 판타지를 연출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인식되기도 합니다. 만약 뮤지컬 영화를 싫어한다고 말한다면 이런 강박적인 장르적 연출로 인해 마련된 낯선 영화적 공간에 손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반발심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것이 <원스>를 단순히 뮤지컬 영화라고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원스> 속의 음악들은 영화적 공간을 단지 음악을 위해 축조한 기능성의 역할로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이는 뮤지컬 영화들의 대다수가 취하는 어떤 강박 관념, 즉 뮤지컬이란 무대 위의 장르를 스크린 위에 재현하는 것이 장르적 의무라고 생각하는 방식에서 탈피하고 있기 때문이며, 혹은 애초에 <원스>가 그럴 의무가 없는 공간에서 연출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원스>의 음악들은 어떤 특별한 공간을 마련할 의무감 따위에서 벗어나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에서 화음을 넣고 멜로디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원스>의 화음을 노래와 연주의 방식으로 직접 만들어내는 남녀가 영화 밖의 현실에서도 음악에 기반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인물들인 덕분이기도 하지만 <원스>가 만들어내는 영화적 화음이 지극히 일상적인 평범함을 모태로 한 덕분이기도 합니다.
처음 카메라를 통해 <원스>가 시작되는 지점은 더블린의 길거리이며, 영화가 본격적으로 사건을 형성하고 감수성이 본격적으로 제 색깔을 물들이는 지점, 즉 마지막까지 제 이름을 드러내지 않기에 그와 그녀라고 명명할 수 밖에 없는 남녀의 만남이 이뤄지는 공간 역시 그 길거리입니다. 결국 <원스>의 음악은 우리가 흔히 길거리에서 지나치며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단지 그녀가 어둑해진 길거리를 지날 때, 그의 노래가 들렸고 그 멜로디가 그녀를 잡아 끌었기 때문에 <원스>라는 이야기가 발생한 것일 뿐입니다. 이 허구적인 만남은 멜로디를 통해 진짜처럼 일상으로 스며들었고 그 진짜 같은 만남은 악보에 음표를 새겨 넣듯 영화에 이야기를 그려 넣어 갑니다. 그 안에서 음악은 어떤 배경으로서 존재하기도 하고 그와 그녀의 일상에서 존재하는 삶의 구성원으로서 자리잡기도 합니다. 그와 그녀의 목소리로, 그의 기타음과 그녀의 피아노음으로, 종래엔 그들의 삶에 존재하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계시로 거듭나며 <원스>의 음악 영화적 가치는 소박하게 빛을 발합니다.
<원스>가 뮤지컬 영화라는 인식을 각인시키는 건 <원스>의 음악들이 하나같이 뇌리에 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원스>의 음악들은 영상의 정서적 여백을 채우는 음향의 기능성, 즉 영화의 정서를 완성시키는 장치적 역할에도 충실하죠. 하지만 중요한 건 너무나도 평범하게 영화 속에서 빈 자리를 채우는 <원스>의 영화적 음표들이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영상 속에 오선지 같은 공간을 창작하는 방식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난다는 것, 즉 기존의 뮤지컬 영화의 중력에서 해방된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뮤지컬 영화에 내장된 음악들이 그것에 어울리게 구성된 개별적인 영상들만을 부분적으로 각인시키며 작품의 외부에서 개별적인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과 달리 <원스>의 음악들은 영화의 파노라마를 재생시키며 전체적인 작품의 테두리를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영화의 요소로서 대변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원스>의 음악들이 단순히 그 자체만으로도 음악적인 순기능의 생명력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이 영화의 장면들 위에 얹혀졌을 땐 전체적인 정서의 흐름에 얹혀지는 상황 연출의 수단으로 활용되며 이는 전체적인 영화 안에서 떼어낼 수 없는 구성원의 일부로 뿌리를 내리는 덕분입니다. <원스>의 음악들은 뮤지컬 영화에서 장르적으로 소모되고 독립적으로 소비되는 부품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영화를 재생시키는 정서적 뼈대인 셈이죠. 그래서 <원스>는 뮤지컬 영화이면서도 뮤지컬 영화의 범주에서 은밀히 벗어납니다. 어찌보면 이는 박제처럼 굳어진 장르의 변형된 문법이 본질적인 장르의 정통성을 이색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박제처럼 굳어진 뮤지컬 영화의 변형된 문법이란 음악을 통한 장면의 재구성이 정형화된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단지 기교적인 측면에 불과한데 근래의 뮤지컬 영화들은 이것을 장르의 책무처럼 떠맡고 있습니다. 음악에 걸맞는 영상에 강박증을 느끼는 것이죠. 물론 이는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만이 지닐 수 있는 특화된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적 완성도가 좌우하는 법이죠. <원스>의 장점은 그런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원스>는 음악을 위한 무대를 필요로 하는 영화가 아니라 음악이 있는 장소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음악 영화니까요. 처음 영화는 그의 노래로 시작됩니다. 이야기를 보여주기 전에 음악으로 관객을 무장해제시키고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을 좁혀나가죠. 흥겹거나 절절한 멜로디에 귀를 쫑긋 세우다보니 어느새 화면에 빠져들어가더란 식입니다. 음악을 통해 이야기가 형성되고 동시에 음악과 함께 이야기는 걸어나가죠. 그리고 영화 속 남녀는 노래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어색한 영화적 리얼리즘을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고서도 각자의 노래와 서로의 화음을 통해 교감을 나눕니다. 이는 음악이라는 예술적 장르가 인간과 교감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살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스>는 이렇게 '뮤지컬' 영화가 아닌 뮤지컬 영화의 순수한 본질에 접근한 것이죠.
강박으로부터의 해방감은 단지 창작자의 짐을 덜어내는 성과에 국한된 것만이 아닙니다. 이는 관객이 짊어져야 하는 어떤 부담감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죠. 암묵적으로 관객에게 수용되어야 할 뮤지컬 영화에 적합한 어떤 연출들에 대한 어떤 거부감, 즉 배우의 노래가 대화로서 활용되고 뮤지컬의 본색이 드러나면 조명이 밝혀지고 군무가 완성되며 스크린이 무대로 치환된다는 뮤지컬 영화적인 허상이 강요되지 않아도 되는 덕분입니다. 이는 때때로 그런 방식을 통해 재생되는 영화 내의 장르적 공간의 전시가 단순히 시각과 청각적인 일시적 효과 이상의 성과를 넘지 못한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영상으로 재현된 감성이 단순히 음악적인 묘미를 구축하기 위한 구조물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산물임을 관객이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원스>의 자연스러움은 관객에게도 뮤지컬 영화로서의 감상에 대한 어떤 부담감도 짊어지지 않게 합니다. 덕분에 음악에 걸맞은 공간을 마련하는 기존의 뮤지컬 영화와 달리 <원스>는 일반적인 영화적 감상법으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뮤지컬 영화들은 음악을 위해 플롯이나 내러티브의 일정 부분을 인위적으로 할애하지만 <원스>는 단지 상황에 걸맞은 음악이 들리거나 직접 노래를 부를 뿐입니다. 이는 결국 <원스>의 음악을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게 하며 음악과 영화가 함께 공존하는 자연스러운 뮤지컬 영화의 화음을 완성시키며 이를 음미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부분적인 뮤지컬적 연출에 현혹되어 전체적인 영화 흐름에 집중하기 힘든 뮤지컬 영화들의 산만함과도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만한 사실이죠.
어쩌면 이는 <원스>라는 영화가 태어난 지정학적인 정서 덕분일 수도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 소박한 영화적 풍경은 너무나도 여유롭습니다. 특히나 이런 배경에서 형성되는 정적인 감수성은 국내에서 이 영화를 소비할 도시의 관객들-주로 서울이겠지만-에겐 상당히 이국적인 인상을 줄 것입니다. 시내 한복판에서 애완견처럼 진공 청소기를 끌고 다니는 여성의 모습은 너무나도 귀엽고, 마치 7~80년대 대한민국의 시골을 연상시키듯 TV를 보기 위해 여성밖에 없는 이웃집을 매일같이 방문한다는 사내들의 이야기는 이 땅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 같은 인간적인 유대감을 발견하게 하니까요. 게다가 그들은 일상에서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현명한 수용자의 삶을 누리기도 합니다. 각박한 도시적 감수성에서 짓눌려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적인 신뢰가 살아있고 예술적 향유를 즐길 줄 아는 그들의 모습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물론 <원스>의 음악들이 들려주는 그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빠뜨릴 수 없겠군요. 어두워진 광장에서 그가 열창한 ‘Say it to me now’는 그녀와의 10센트 짜리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은 <원스>의 감동으로 귀결됩니다. 그녀가 종종 피아노를 치기 위해 들른다는 악기상에서 그와 그녀가 이룬 첫 교감, 'Falling slowly'는 단순히 청각적으로 감지되는 아름다운 선율 이상의 두근거림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영화의 중간 중간마다 불려지거나 삽입되는 음악들은 각각 그 순간의 정서를 명료하면서도 절실하게 대변합니다. 남자가 자신의 옛 사랑에 대한 기억을 버스 뒤 칸에서 장난스럽게 기타선율에 얹혀서 여자에게 노래하는 ‘Broken hearted Hoover fixer sucker guy’의 발랄함도 즐거웠지만, 반대로 옛 연인의 영상을 보며 상기된 안색 속에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작사에 열중하는 남자의 ‘All the way down’은 깊게 침전한 그만의 슬픔을 막연히 짊어지게 합니다. 또한 그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신의 사연이 담긴 곡을 그에게 들려주는 ‘The hill’을 통해 흘러 넘친 아픔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느낌은 눈물로 확인되는 안타까운 슬픔 너머로 미약한 심적 통증의 체감마저 선사합니다. 또한 늦은 밤, 그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이는 그녀가 CDP의 배터리를 갈아 넣기 위해 집을 나선 후 돌아오던 중, 정적이 깃든 길 위의 어둠 속에서 들려지는 ‘If you want me’의 투명한 감수성은 <원스>에 담긴 서정성의 극치를 느끼게 합니다. 또한 그의 데모CD를 녹음하기 위해 모인 밴드의 연주를 그의 방과, 스튜디오 안에서 각각 들려주던 ‘Trying to pull myself away’와 ‘When your mind’s made up’과 같은 넘버의 잔상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원스>에서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장면 중 하나는 그녀가 종종 피아노를 치기 위해 들른다는 악기상의 주인이 자신의 귀에 전달된 남녀의 화음에 빙긋이 미소 짓는 순간입니다. 그 장면은 <원스>가 지닌 따뜻한 체온이 순수한 감동으로 전해지는 아름다운 단면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원스>는 음악이, 영화가, 혹은 그 모든 것을 둘러싼 예술이 인간을 감화시키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그것이 인간과 공존하고 있는 순간을 관객에게 목격하게 만들며 그 시각적 경험이 이뤄지고 있는 찰나의 순간을 순수한 감동적 체험으로 변모시킵니다. DV카메라가 잡아낸 열악한 화면으로 채워진 <원스>가 이상하게도 자꾸만 근사하게 보이는 건 이런 사소한 기적들을 영화의 중간중간에 매복시킨 덕분일지도 모르죠. 열악한 데모 테이프를 틀어놓으며 남자의 음악을 담보로 대출을 신청하는 그녀의 맹랑한 제안 앞에서 은행의 대출 관리자는 대뜸 쇼를 믿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곤 기타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과감히 대출을 승인할 때, 영화적 허구는 진실한 감동의 낯빛을 띠게 됩니다. 또한 남자의 지인이 주최한 조촐한 파티에 초대된 하객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저마다의 노래를 부를 때, 풋내기에 불과할 것 같던 밴드의 녹음을 불성실한 태도로 바라보던 프로듀서가 그들의 음악을 통해 탄복한 표정을 짓기 시작할 때, 아들의 데모CD를 듣고 감탄하는 그의 아버지가 지어낸 만족스러운 웃음을 대면할 때, <원스>의 감동은 단순히 스크린에서 빚어지는 일회적인 기획적 허구에 머물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서 객석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 관객을 품에 안는 감동의 진귀한 체험으로 승화됩니다. 그 장면들을 통해 예술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원스>는 음악과 영화가 완벽하게 빚어낸 절묘한 화음의 결정체로서, 예술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감동의 원형에 가깝습니다. 소박한 삶의 방식 안에서 가장 순수한 목적으로 예술을 향유하는 그들의 현실은 인간의 창조력이 가장 아름답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며 그런 순간들로 이뤄진 <원스>의 시공간은 마치 영화적 연출에 의해 빚어진 산물이 아닌 자연스러운 관찰을 통해 얻어진 순수한 본질의 체득과도 같아 보입니다. 예술의 힘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예술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자본을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로 다다를 때, 예술의 순수함은 이미 퇴색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순간을 이기지 못하는 웃음과 깊게 침전할 수 없는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쓸려나가는 요즘의 극장가의 정서가 채우지 못한 넓은 여백을 <원스>의 투명한 가치는 가득 채우고 있는 것만 같아 보입니다.
프랑스 중세의 인상파 화가로 명성을 떨친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처럼 ‘세상에는 즐겁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으니 예술이라도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는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독한 허영심으로 물들고 진심이 결여된 화려함을 추구할 때 순결한 의미에서 예술적 미는 퇴색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예술이 존재하는 건 고된 현실에서 찌든 인간의 황폐한 영혼을 정화시키는 역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술적 미의 진정성은 인간을 압도하는 전율보단 인간에게 깃드는 소박함일 것입니다. <원스>는 인간에게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를 단명하면서도 차마 형용할 수 없게 보여줍니다. 그건 어떤 순간에 머무는 효과가 아니라 영원의 지속으로 유지되는 기억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글의 말미에 다다랐으니 필자의 불순한 의도를 밝히자면, 단순히 이 글의 말미에서 이 문장을 보게 될 그 누군가가 될 그대가 그저 <원스>를 보러 가겠단 결심을 세우길 바란다는 것뿐입니다. 혹은 어떤 막연한 관심이나마 거머쥐었기를 실로 갈망합니다. <원스>의 투명함은 홀로 간직하기엔 너무나도 아까워서 그 빛을 나눌 누군가를 절실히 떠올리게 하는 까닭입니다. 예술이 지닌 보편적 미덕은 범접할 수 없는 황홀한 체험의 산물이기보단 손을 맞잡고 싶은 소박한 정서적 동참이 아닐까요?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연유도 그 순수한 예술적 에너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원스>의 가장 큰 미덕은 그 따스한 추억을 나누고 싶다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이 글로 인해 당신의 마음이 정해졌다면(when your mind’s made up) 더 바랄 것이 없겠고요. 또한 <원스>를 관람한 후, OST를 통해 다시 영화를 거슬러가는 것 또한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분명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스러운 그녀(And love her so, I wouldn’t trade her for gold)만큼이나 <원스>는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순간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것들은 음악과 함께 할 때 더욱 투명하게 빛나니까요. 전 예술이 줄 수 있는 궁극적인 가치는 바로 그런 소박한 감동의 결정체를 통한 행복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원스>를 통해 얻은 그 행복을 나누고 싶다는 소박한 의지가 이 부끄러운 문장을 감히 그대에게 내보일 수 있는 용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만큼이나 <원스>의 노래들은 잊을 수 없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 여운을 지속하는 방법은 그 음악을 다시 듣는 것이며 이는 동시에 영화를 재생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OST에 수록된 14곡은 다시 <원스>로 돌아가는 출구이자 영화 속의 기억을 되살리는 통로인 셈이다. 그 14곡에 담긴 그와 그녀의 사연, 그리고 <원스>가 선사한 감동의 시공간을 재생시켜보자. 물론 OST를 소장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추천한다.
1. Falling slowly_ 그녀가 피아노를 연습하기 위해 종종 들른다는 악기상을 함께 찾은 그가 그녀의 권유에 의해 합주하게 되는 그의 자작곡. 그의 보컬과 기타, 그녀의 코러스와 피아노 선율이 더해져 아름다운 화음을 형성한다. 그의 표정을 살피며 건반을 누르는 그녀의 곁눈질에서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예감되기도 한다. 음악 영화로서 <원스>의 본질을 확실히 일깨워주는 장면이자 OST의 킬링 트랙으로 지정해도 손색없는 산뜻한 넘버.
2. If you want me_ 그가 작곡한 음에 자신의 작사를 붙이던 그녀는 CDP의 배터리를 갈아 끼우기 위해 늦은 밤 길을 나선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오던 중 재생시킨 CD에서 플레이 된 음원에 자신의 가사를 붙여 그녀가 직접 노래하는 곡. 그녀의 슬픔이 묻어나는 가사가 쓸쓸한 밤거리의 풍경과 맞물리며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더불어 자신의 감정에 대한 그녀의 내면적인 혼란이 살짝 드러난다. 재미있는 건, 롤러스케이트를 탄 아이들을 비롯해서 이 장면에서 발견되는 주변의 인물들은 아마도 영화에서 고용된 엑스트라가 아닌 일반인처럼 카메라를 의식한다. 저예산 영화의 열악함이 되려 영화의 신선함을 더해주는 효과를 거둔다. 개인적으로 <원스>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3. Broken hearted Hoover fixer sucker guy_ 그녀의 진공청소기를 수리해주기 위해 그가 자신의 귀갓길에 동행한 그녀에게 함께 동승한 버스 뒷 칸에서 들려주는 노래. 그의 옛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장난스러운 기타 리프로 발랄하게 연주된다. OST는 영화 중의 웃음소리를 거르지 않고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영화 중엔 과격(?)해진 그의 노래에 불편한 심기를 장난스럽게 전달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OST에 이 부분은 수록되지 않았다.
4. When your mind’s made up_ 그의 데모CD를 녹음하기 위해 결성된 밴드가 스튜디오에서 처음으로 녹음하는 곡. 밴드로서의 합주 형태를 가장 진지하게 보여주는 장면으로 녹음 후에 카테스트를 위한 드라이브 장면 중에서도 배경음으로 들려지며 엔딩씬의 배경음으로 활용된다. 다소 안일한 자세로 지켜보던 프로듀서가 이 한 곡으로 진지한 자세로 돌변하기도 한다. 매끄러운 피아노 선율이 쟁글거리는 기타의 리프를 타고 흐르듯 어울리며 차근차근 절정의 상태로 오르는 남자의 보컬이 절절함을 느끼게 하는 서정적인 곡. 영화 상에서 가장 자주 듣게 되는 곡이다.
5. Lies_ 노트북을 통해 옛 연인과의 추억을 담은 동영상을 보며 작사에 열중하는 그의 장면에서 깔리는 곡. 그의 애틋한 그리움과 슬픔이 담담한 표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전해진다. 참고로 영상 속의 여자는 <원스>의 메가폰을 잡은 존 카니 감독의 오랜 연인이라 한다.
6. Gold_ 그가 그녀를 데려간 지인들의 파티 중, 그가 지인들과 함께 연주하는 곡.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남녀 주인공 외의 타인이 보컬을 맡은 곡이기도 하다. 각자 돌아가며 한 소절이든, 혹은 악기를 동원한 합주든 저마다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서 생활 속에서 음악을 애호하는 아일랜드인들의 소박한 정서가 소박하게 보여진다. 또한 이 곡이 등장하기 전에 어느 중년 여성과 중년 남성의 짧막한 노래가 영화상에서 들려지는데 그 중년 여성은 '그'를 연기한 글렌 한사드(Glen Hansard)의 친어머니라고 한다. 아쉽게도 그녀의 노래는 영화상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7. The hill_ 늦은 새벽까지 데모CD를 녹음하던 중, 마지막 녹음을 앞둔 10분의 휴식 시간 중, 녹음실을 나온 그녀가 우연히 옆방에서 찾은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녀의 연주음을 듣고 찾아온 그의 권유로 그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들려주는 자작곡. 곁에 없는 남편을 향한 진실된 사랑을 담고 있는 가사가 곁에 있는 그와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예감하게 한다. 부서질 것처럼 가녀린 그녀의 음성과 피아노 선율을 통해 내면에 깊게 침전한 그녀의 슬픔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넘버. 영화에서는 절제할 수 없는 감정에 노래를 중단한 그녀로 인해 중간에 완곡을 들려주지 못하지만 OST에는 완곡이 수록됐다.
8. Fallen from the sky_ 첫 곡 녹음 후, 녹음실의 풍경을 편집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장면에서 배경음으로 들려지는 곡. 장난스러우면서도 발랄한 공간의 여유와 즐거움이 한껏 묻어난다. 유일하게 신디사이저(synthesizer)음을 인트로에 도입한 넘버이기도 하다.
9. Leave_ 그녀의 청소기를 수리하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한 그녀가 그의 자작곡 데모테이프를 듣는 장면에서 플레이 된 테이프의 음질 형식으로 들려지는 곡. 후에 그의 CD를 녹음할 스튜디오 대실비를 마련하기 위해 방문한 은행의 대출 매니저(small loans manager)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장면에서 같은 방식으로 들려진다. OST엔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원곡이 수록됐다.
10. Trying to pull myself away_ 스튜디오 녹음에 들어가기 전, 밴드 멤버들이 그의 방에 모여 연습하는 장면에서 연주되는 곡. 경쾌한 넘버가 인상적이다. 위에 언급한 ‘When your mind’s made up’과 함께 밴드의 형태로 연주되는 방식으로 영화상에 보여지는 유일한 곡이기도 하다.
11. All the way down_ 영화 초반, 그가 방안에서 홀로 옛 연인을 생각하며 부르는 곡. 노래와 함께 옛 연인과 연결되지 못하는 통화를 시도하는 장면이 교차되며 전화기 옆에 놓인 그의 옛 연인 사진이 클로즈업되기도 한다. 그의 깊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12. Once_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기다려야만 들을 수 있는 곡. 제목 그대로 영화의 타이틀롤 넘버로 남녀의 서정적인 화음이 인상적이다.
13. Say it to me now_ 어두워진 더블린의 시내에서 그가 열창하는 곡으로 그의 지르는 창법이 인상적이다. 그와 그녀의 인연의 계기가 되는 곡이자 <원스>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여는 노래다.
세계2차대전이 한창 중인 튀니지 사막에서 독일군 대령 장교는 다짐한다. 나는 조국 수호가 아닌 인류 수호를 위해 싸우겠다. 그는 히틀러가 독일의 영웅이 아닌 인류의 주적이라 판단한다. <작전명 발키리>(이하, <발키리>)는 그 독일군 대령 슈타펜버그(Stauffenberg, 톰 크루즈)의 양심적인 성찰을 조명하는 데서부터 영화를 시작한다. 일종의 정치적 선언이자 연기의 입을 빌어 던지는 일종의 고백성사다. 동시에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도입부에 이를 명백히 밝힌다. 적어도 이 허구적 산물의 어느 측면까지 실재가 반영된 것인지 가늠할 순 없겠지만-또는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이는 적어도 영화의 태도를 의심하지 않게 만드는 적절한 방어기제 노릇을 한다.
일단 <발키리>는 어느 비윤리적 집단 내부에서 피어난 양심적 선언에 대한 재현이라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발키리>는 모종의 정치적 야심을 숨기고 포복시키는 영화이기도 하다. 인물들의 두려움은 온전히 그 시대에 내포된 정신병적 파시즘에서 비롯된다. 인물들이 대항하는 건 거대한 악이 아니라 거대한 악처럼 강요되는 정신병적 불안이다. 두려움은 충돌과 갈등을 도모하고 이는 곧 영화적 서스펜스의 주체로 발전한다. 서스펜스의 날을 세우는 건 인물의 외부에서 형성되는 이미지의 결과물이 아니라 갈등과 충돌로서 이뤄지는 심리적 불안감이다. 그 불안은 인물들을 머뭇거리게 만들고 제약하며 가둔다. 그 사이에서 차분하고도 점진적인 서스펜스가 영화를 잠식해나간다.
<발키리>의 결말을 언급하는 행위가 스포일러로 규정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이 영화는 실패한 혁명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허구적 야심은 역사적 기록을 뒤집고자 할 만큼 과감하지 않다. 실패한 혁명은 적어도 그 당시엔 반역으로 기록되고 처형당한다. <발키리>는 그 당시엔 반역이라 불리던 에피소드다. 히틀러가 암살당해서 죽었다는 기록을 본적이 없는 이상, 그가 자살했다는 역사적 증언을 아는 이상,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적 몸통이 온전히 실화로부터 빌려온 것임을 선언하는 영화의 도입부를 확인하는 이상, 결과는 명백하다. 슈타펜버그의 신념은 결국 무덤으로 향할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결론이 도출된다. <발키리>는 정해진, 혹은 예고된 결말을 향해 달리는 이야기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인물들의 심리적 변화와 추이를 묘사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동시에 그 정해진 비극을 향한 인물의 의지가 대두된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온전히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한 가지 물음은 어째서 당연한 비극적 결과를 전개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슈타펜버그의 고결한 양심적 선언을 비추기 위해서? 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첨언이 필요하다. 더 잠재적인 야심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이 매그니토의 유태인 수용소 씬을 등장시키는, 울버린의 인체 실험적 장면이 나치를 연상시키는 <엑스맨>의 수장 브라이언 싱어가 만든 <발키리>엔 사유화된 욕망이 잠재돼있다. <발키리>는 영화감독 브라이언 싱어와 유태인 브라이언 싱어가 공존하는 영화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히틀러에게 대항한 범인류적 위인의 삶을 추적하는 영화이기 전에 브라이언 싱어가 복원하고픈 어떤 정의에 대한 추도다.
슈타펜버그가 히틀러 암살 기도를 꿈꾸는 군내부 세력들과 처음 접촉하는 장소에서 목격하는 건 일종의 정치다. 독일의 미래를 위해 히틀러를 죽이고자 하는 그가 히틀러를 죽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부터 생존을 위한 정치적 모략을 목격한다. 그들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적임자를 찾고 있다. 그들의 사명감은 히틀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안전에 있다. 패전이 점차 시일 안으로 다가오자 패전국의 전범으로 기록되지 않기 위해 히틀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하지만 슈타펜버그는 히틀러의 죽음이 사명이라 믿는다. 그런 그에게 정치는 온당치 않다. 정의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생을 위한 정치란 일종의 사기와 같은 것이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그런 사람이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실제적인 슈타펜버그로부터 어느 정도 가공된 인물이다. 가공의 주체는 브라이언 싱어다. 그는 슈타펜버그가 히틀러의 나치를 윤리적으로 부정하는 인물로서 바라보고 싶었을 가능성이 크다. 슈타펜버그와 목적을 같이 하는 주변의 군부 세력들이 패전국 독일의 역사에서 명예롭게 히틀러의 존재를 지우길 원하는 것과 궤가 다르다. 패배가 예감되는 전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유하려는 이들의 정치 가운데 슈타펜버그만이 유일하게 히틀러에 대한 윤리적 타락을 본다. 슈타펜버그는 유일한 양심이자 조직의 윤리적 타락을 비판하기 위한 기제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는 슈타펜버그의 육체를 빌려서 독일 나치에 대한 윤리적 물음을 던진다. 내부적인 양심을 발효시킨다. 외부에서 유입된 강제적 진압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잉태된 자율적 신념이 스스로의 모체를 부정하길 바란다.
세계2차대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두르고 있지만 <발키리>는 전장을 묘사하는 영화가 아니다. 극 초반 튀니지에서의 씬을 제외하고 전쟁터다운 장면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베를린 독일군부의 장교만이 등장한다. 연합군과 독일군과의 전투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쉽게 말하면 <발키리>는 전쟁영화라기 보단 정치영화에 가깝다. 어떤 이들은 벌써부터 이 영화에 스펙터클이 부족하다고 꼬집고 있으나 의도하지 않은 바를 스스로 원해서 실망했다 말하는 건 석연찮다. <발키리>는 전쟁의 승패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패배한 체제의 전복을 통해 자신을 보수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미 패배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전범의 역사에서 어떻게든 발을 빼려 바둥거리는 이들의 처량한 사연이다.
<발키리>에서 흥미로운 건 히틀러에 대한 테러를 주도하는 세력들간의 정치적 갈등이 발견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 테러의 주변부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을 가늠하는 제3자들의 태도다. 슈타펜버그의 비장함이 때때로 무색하게 느껴지는 건 이 덕분이다. <발키리>는 어느 한편에 선 자들의 묵묵한 표정보다도 그 중간지대에서 방목하듯 살아가는 회색분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지점을 갈등하고 고심할 때 더욱 흥미로운 표정을 드러낸다. 슈타펜버그의 결의에 찬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그만큼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의 편에 설 것인지를 망설이는 자들의 표정은 흥미롭다. 결국 <발키리>는 어떤 선의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선의와 건너편의 악의 사이에 놓인 중간자들의 흔들림이 드러날 때 더욱 매력적인 흥미를 부른다. 중심부보다 주변부의 설계가 더욱 흥미롭다.
사실 슈타펜버그가 나치의 비윤리적 태도에 항거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독일의 이익에 반하는 히틀러의 행위적 결과가 참담하다는 데서 악을 규정한다. 윤리라기 보단 실리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의 <발키리>가 균형을 잃는 것도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는데 있다. <발키리>는 독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느 애국자에 대한 항거적 실화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자의 내면에 다른 욕망이 숨겨져 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피해의식이 우회한다. 히틀러를 숭배하거나 숭배하는 척을 하며 살아갔던 독일인들의 무기력에 대한 항의와도 같다. 이런 태도는 <발키리>를 때때로 지극히 사유화시킨다. <발키리>는 정치를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드러날 때 긴박해진다. 목적을 완수하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윤리적 신념이 아니라 정치적 야심에서 비롯된 미션이라 끊임없이 스스로의 행동을 검증하고 자신의 안위를 판단한다. 유일하게 행동을 위한 행동을 펼치는 슈타펜버그만이 적극적이다. 그는 그의 말대로 정치를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슈타펜버그를 소환한 주체가 종종 의무감의 주체를 헷갈리듯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 인물의 의지를 허구의 틀 안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의무감과 캐릭터의 탈을 쓰고 자신의 유전자적 트라우마를 투영하려는 의무감이 캐릭터의 균형을 흔든다. 슈타펜버그의 강력한 정치적 매력은 그가 정치를 하지 않는 인물이란 점에서 발생한다. 그를 따르는 사람 대부분이 그의 신념을 본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때때로 슈타펜버그를 통해 어떤 정치를 하려 든다. 슈타펜버그를 윤리적 주체로 삼아 히틀러라는 상징적 비윤리를 비판하려 든다. 결말의 숭고함은 어딘가 지나치다. 페이소스가 발생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의 안타까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슈타펜버그의 안위와 그의 가족에 국한된 사안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발키리>는 비정치적인 인간을 통해 인간의 정치적 태도를 탐구한다. 전쟁의 패배자로 기록될 것을 예감한 이들은 자신들의 안위가 보존될 길을 찾는다. 그건 그 전쟁 속에서 정치적으로 공정한 사람이 되길 시도하는 것이다. 히틀러를 죽이면 전범이란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 패배를 자신들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다.
<발키리>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떤 홀로코스트 영화보다도 강한 자의식을 품고 있다.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비극적 역사에 갇힌 유태인들의 기적 같은 구원담을 말해온 건 그들의 처지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된다. 그건 휴머니즘에 기반한 일종의 대항적 희망이다. 비극에 대한 방어적 성찰이다. 하지만 <발키리>는 그 비극을 잉태한 주체의 몰락을 직접적으로 갈망하듯 재현한다. 동족의 비극을 기획했던 자들의 내부적인 몰락을 기획한다. 비극을 묘사하는 방식으로서의 간접적 고발이 아니라 비극의 발원지에서 펼쳐지는 자기 모순을 통해 정신병적인 체제를 고백하듯 그린다. 더 이상 과거를 동정하듯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극복으로 나아간다. 일종의 야심이 담겨있다. 더 이상 유태인의 비극을 그리는 추모제가 아니라 비극을 기획한 적의 심장부를 겨눈 직접적인 가해를 꿈꾼다.
전쟁에서 패배한 뒤 전범으로 기록되지 않고자 했던 이들은 정치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하려 했다. 전쟁의 무의미를 깨닫는 슈타펜버그만이 비정치적 사명을 위해 바삐 움직인다. 그리고 그의 결단과 행위를 지켜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갈대처럼 흔들린다. 그 와중에도 정치적 이득을 계산하고 망설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비정치적인 인간이 정치적인 결단을 종용한다. <발키리>의 성과는 그 아이러니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지나친 감정을 요구하는 결말이 불합리한 감상을 부여하는 건 그 때문이다.
드라마틱한 페이소스를 부화시키려는 막판의 시도가 지속적인 서스펜스의 리듬을 흐트러뜨린다. 섬세하게 간격을 유지한 채 심리적인 기저에서 찬찬히 흐르고 불거지던 긴장의 구조적 흐름이 허망하게 급류된다. 특히 너비보다도 깊이에 치중하던 <발키리>의 서스펜스 구조가 양적으로 팽창하는 감정적인 과잉 상태에서 마무리된다는 점은 여러모로 아쉽다. 그건 단지 결말이란 정보의 개방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하던 온도가 변했기 때문이다. 일정한 음역 대를 규칙적으로 연주하던 오케스트라가 마지막 악장에 다다라 갑작스럽게 고음역대로 음을 집중시키는 것처럼 불안정하다. 그건 어디까지나 <발키리>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무마시키기 위해 극 말미에 다다라 지나친 무리수를 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브라이언 싱어는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영화적 패배를 방조한 셈이다. 오로지 슈타펜버그만이 비정치적인 인물처럼 묘사되지만 슈타펜버그조차도 비정치적 태도로 정치를 완수한다. 결국 휴머니즘은 무색해진다. 시대적인 정신질환을 진단하던 영화가 뒤늦게 인간미를 설득하는 건 어딘가 무력한 일이다. 정치적 승리를 원했던 패배자에게 숭고함을 부여할 때 그것은 명예가 아니라 일종의 모욕적 미화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