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어머니에게도 ‘소녀시대’가 있었고, 철없는 시절에 함께 하면 무서울 것이 없었던 친구들과의 추억도 있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어린 나이에 할 수 없는 무언가를 거듭 겪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어떤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절에서만 가능했던 무엇들을 더 이상 체험할 수 없다는 상실을 체감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써니>는 우리의 지난 날, 80년대를 지나쳐 보낸 어떤 어른들을 위한 송가다. <써니>는 주부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삶에 치이고 부대끼며 살아가던 여인 임나미(유호정)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고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데뷔작 <과속스캔들>로 기록적인 흥행 성공을 얻어낸 강형철 감독은 <써니>를 통해서 자신의 취향을 보다 확실하게 어필한다. 미혼모 문제를 대안가족적인 온기와 화합적인 낭만으로 끌어올린 <과속스캔들>의 드라마틱한 정서는 혈기왕성한 젊은 날의 꿈으로부터 멀어진 중년 여인들의 의기투합과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지닌 <써니>로 거듭난다. 자잘한 소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도 유효하다. 세심하게 풍경의 근접한 양태들을 유유히 포착해내는 오프닝 시퀀스의 리듬은 <과속스캔들>과 동일한 접근방식이라 할만하다. 또한 윤리적인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낭만성, 즉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털어내고 그 시대에서 발견되던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이를 재현의 도구로서 활용하는 방식 역시 그렇다. 물론 이는 시대적인 공기를 단순히 가볍게 간과한다거나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느 개인이 지니고 있던 시공간의 개념이 중요할 뿐, 그 시대의 공기를 재현하고자 하는 의욕은 <써니>의 의도와 무관하다.
시대적인 풍경을 재현해낸다는 건 그 시대를 지나온 이들과의 교감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써니>가 재현하는 80년대의 풍경들은 바로 그 시대를 지나온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묵은 말들이 살아있는 풍경으로 재생되고, 그 안에서 지나간 날들이 떠오를 때, 그 시절을 건너온 관객들은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영화 속의 인물들과 동화될 수 밖에 없다. <써니>가 자아내는 공감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다만 그 공감대를 보다 깊고 너르게 완성해낼 수 있는 자질은 영화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셈이다. 그런 의도 안에서 <써니>는 성공한 결과물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그러니까 영화의 두 시점은 이를 감상하는 이들의 시점을 대변하듯 그 시절의 풍경을 온전히 스크린에 전시하고 있다. 다소 과시적이거나 과잉적인 측면도 없는 건 아니지만 추억을 되새긴다는 건 허기보다는 포만이 더 어울리는 법이다. <써니>는 80년대에 향수를 지닌 오늘날의 중년 세대들을 위한 포만의 장이다. 영화가 쏟아내는 오래된 이미지들은 오늘을 향유하지 못하는 과거 세대들을 위한 성찬과 같다.
물론 이는 반대로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일종의 체험이다. <써니> 속에서 등장하는 갖은 풍경들은 그 시대를 공유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는, 희귀한 풍경일 것이다. 이를 하나의 볼거리로 승화시키는 건 그 과거적인 소품들 속을 누비는 어린 소녀들일 것이다. 창고에서 꺼내든 오래된 소품들을 추억으로 공유할 수 없는 세대들이 <써니>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죽은 시간을 생동감 있게 재생시키는 극 속 인물들인 셈이다. ‘7공주’라고 스스로를 명명하며 시대를 재현하는 소녀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각인시키며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연의 너비를 넓혀나간다. 때때로 감정적인 활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인상도 들지만 <써니>는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어쩌면 언젠가 오늘날의 젊은 날을 뒤돌아보게 될 어린 세대들에게 <써니>는 좋은 지침서 역할을 수행할지도 모른다. 세대 간의 단절된 기억 속에서 지난 세대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가 지닌 최고의 덕목일지도 모른다.
시대적 소품의 디테일한 활용 능력, 저마다 개성을 확보한 캐릭터들의 표현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써니>는 그러한 재현성을 단지 향수를 건드리는 자극의 촉매로 장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진짜 감정을 건드리는 간절한 낭만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이러한 감각은 강형철 감독이 지닌 윤리적 중립성과 도덕적 해탈감에서 비롯된 쿨함 그 자체에 있다. <써니>는 <과속스캔들>과 마찬가지로 쿨한 영화다. 이는 소품을 활용하고 비추는 카메라의 양식을 넘어서서 심각한 인상에서 도피하지 않고 완벽하게 탈출해서 자신만의 쾌감을 불어넣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강형철 감독의 상업적 감각은 스토리텔링의 기승전결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김용화 감독과 비견될만하며 앞으로의 행보도 주목할만하다. 또한 <써니>의 일등공신들, 과거와 현재 속에 놓인 전후의 인상을 책임지는 배우들의 존재감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무엇보다도 심은경은 <써니>가 전달하는 낭만의 팔 할을 책임지는 일등공신이다.
과거와 현재 속에서 놓인 인물들은 우리가 지나친 것들, 즉 돌아갈 수 없는 시대에 대한 추억을 아련하게 환기시키면서 쿨하게 깔깔댄다. 그게 되레 낭만적이다. 낭만이라는 게 결국 슬픈 일이 아니지 않나. 추억이 있기에 오늘을 버틸 수 있다는 것, 이 영화는 그것을 깨닫게 만든다. 오래된 친구가 반가운 것은 그 시절을 환기시키는 유쾌한 수다가 뒤따르는 덕분이지 않던가. 그리고 삶은 그 추억을 먹고 한 뼘 더 자라난다.
몇 살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이었다. 한낮에 단잠을 자고 있었을 게다. 어느 순간 어렴풋이 눈이 뜨였고, 순간 적막한 기분을 느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음을 직감한 어린 것은 내심 불안해진 탓에 퍼뜩 잠이 깨어 엄마를 불러댔다. 그리 넓지도 않았던 집 구석구석을 돌며 엄마를 불러댔지만 돌아오는 건 빈 공간만큼의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을 밀어내려는 것마냥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내며 빽하고 울어내기 시작했다.
울음은 1시간 정도가 지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가라앉았다. 여전히 기억이 난다. 입안에 물려주던 요구르트 사탕의 단맛. 사탕을 우물거리는 내 등을 두드리던 엄마의 손. 달아난 울음. 혼자 남겨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원래 그리도 컸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 어린 시절 그 날만큼은 그랬다. <나홀로 집에>(1990)의 케빈처럼 가족들의 빈자리에 쾌재를 부르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는 생각 따위는 내게 진짜 먼 나라 이야기였던 거다.
대식구였던 케빈의 가족과 달리 단 네 명에 불과했던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나란히 극장에 앉아서 봤던 영화는 바로 그 <나홀로 집에>였다. 부모님은 당시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이 작품이야말로 아이들과 함께 극장에서 봐야할 영화라고 생각하셨던 건지, 내 손을 잡고 극장으로 갔다. 속편이 나왔을 무렵, 또 한번 부모님 손을 잡고 극장을 향했던 기억으로 보아 아마도 그 당시 어린 것이 뚫어져라 스크린을 보는 모습이 당신 보시기에 좋으셨나 보다.
그 날로부터 20여 년 정도가 지난 지금 문득 궁금해졌다. 그 시절 홀로 집을 지키던 어린 케빈은 나이가 들어서도 홀로 남겨진 집 안에서 그렇게 유쾌할 수 있었을까. 영화의 말미에서 케빈은 돌아온 가족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내보인다. 생각해보니 그 미소는 내가 기억하는 요구르트 사탕의 단맛이었다. 추억이라 불리는 것들이 으레 그렇듯 사소하고 하찮기만 하던 것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점차 애틋해지고 간절해진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그 시절에서만 가능했던 것들이 있다. 내 울음을 멈추게 했던 요구르트 사탕의 단맛, 바로 그런 것 말이다. 나는 이제 혼자 남은 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날로부터 그만큼 멀어져 온 것이다. 더 이상 그 단맛을 맛볼 수 없는, 그런 나이로.
‘OB’근육질 마초들이 동창회라도 열 기세로 한 자리에 모여 액션을 펼친다. <익스펜더블>은 단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촌스러운 기획물이다. 여전히 몸으로 뛰고 발로 구르는 액션물이 멸종한 것은 아니지만 아드레날린과 안드로겐으로 점철된 근육 마초의 시대는 분명 한 물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익스펜더블>의 유효성은 그 ‘한 물 갔음’에서 비롯된다. 한 물 간 역전의 용사들이 패기 대신 관록을 입고 새로운 시대에서 오래된 시절을 되새기게 만든다.
적어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익스펜더블>의 출연진을 본 사람들 가운데 눈이 동그래진 이와 심드렁한 이의 차이가 세대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지사 이전에 뭘 해먹고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할 세대에게는 정체불명의 3류 액션물처럼 보일 이 영화가 어떤 세대에게는 초호화 캐스팅이 된다는 역설이야말로 <익스펜더블>의 존재 가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강의 용병들로 구성된 ‘익스펜더블스’의 리더 바니 로스(실베스터 스텔론)로 출연하는 동시에 이 모든 이야기를 기획하고 메가폰까지 쥔 실베스터 스텔론이 겨냥하는 건 오래 전 그 시절이다. 바로 과거의 영광이 놓여있던 그 시절의 사연 속에 자신들이 설 자리를 만드는 것. 죽여도 싼, 혹은 그렇다고 믿어질 만한 대상을 찾아 생사를 건 활약상을 전시하고 끝내 그들을 처단한 뒤 영웅이 되어 관객의 앞에 늠름하게 걸어나오던 그 시절의 위상을 되살려 보자는 것. <익스펜더블>은 명확하게 그 위치로 노장들을 되돌려 보내고자 하는 눈물 겨운 기획인 셈이다. 그리고 캐스팅만으로도 이미 이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관객의 팔 할은 그 눈물 겨운 기획에 기꺼이 지갑을 열 준비가 된 이들일 것이다.
하지만 <익스펜더블>은 그 촌스러운 장점을 고스란히 자신의 단점으로 끌어안는 영화다. 단순함 이하의 결점들이 수두룩하게 들어선 이야기는 때때로 노장들의 여운이 담긴 대사에 깃든 낭만들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영화의 얄팍한 의도를 적나라하게 들춘다. 결국은 추억의 유무에 따라 관대함의 여부도 달라질 것이다. 단지 그들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는 관객은 스토리텔링 따윈 필요 없어, 라 할지라도 그 반대의 경우에 <익스펜더블>은 시대착오적인 막무가내 액션물로 낙인 찍힐 가능성도 농후하달까. 이 영화에서 대단한 화력을 전시하는 액션은 그 기대감을 배려하는 일종의 축포나 다름없는 동시에 공갈과도 같다.
동시에 홍보 전단지에 나란히 선 액션배우들의 다양한 면모가 실상 영화에서 일부에게 편중된 형태임을 알게 됐을 때 ‘최강’의 특공대에 대한 기대가 어떤 실망감으로 치환될 것인가라는 예측 또한 변수에 가깝다. 어쨌든 한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근육질 마초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건 특별한 이벤트다. 다만 그 이벤트 수준 이상의 무언가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씁쓸한 일이다. 결국 자신들이 설 곳이 없음을 스스로 나서서 증명하는 꼴이랄까.
3년 만에 광주에 다녀왔다. 휴가라고 해봐야 어디 놀러 가는 취미도 없고, 차라리 오랜만에 친구들이 있는 광주나 다녀오자 싶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옛날보단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줄었다. 내 무심함의 탓이기도 했고, 말 그대로 세월 탓이기도 했다. 연락을 자주 못하는 만큼 멀어진 친구들도 생겼고,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된 탓에 책임질 일이 많아진 친구들은 쉽게 짬을 내지 못하고 제 생활에 얽매여 있었다. 그 와중에도 많은 친구를 만났고, 하나같이 반갑거나 놀라웠다. 결혼을 앞둔 녀석도 있고, 곧 아버지가 될 친구도 있었다. 종종 연락해와서 어느 정도 근황을 아는 녀석도 있었던 반면,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처음 만나는 친구도 있었다. 많이 컸다. 비로소 실감했다. 내가 참 많이 컸다. 우린 늙어가고 있구나. 비로소 체감했다. 어른이 된 친구들은 제 각각의 방식으로 제 삶을 책임지며 살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갈피를 못 잡은 듯 불안해 보이는 녀석도 있었지만 적당한 확신을 손에 쥐고 앞으로 전진해가는 녀석도 있었다. 3박 4일, 엄밀히 말하면 3박 3일이나 다름없는 일정 가운데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저 반갑기만 했다. 묵혀뒀던 옛 추억들이 세월을 먼지처럼 털고 언어로 재현되고 그때마다 우린 낄낄거리며 또 다른 기억을 파고 들었다.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가 즐거웠다. 오랜만에 내려간 광주는 많이 변했고, 친구들도 많이 변했지만 추억은 여전했다. 그것만으로도 즐겁더라. 다시 올라오기 싫을 만큼 행복했다. 그 기분에 취해서 담배를 다시 물게 됐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언젠가 폐암에 걸려 죽더라도 이 날만큼은 유쾌하게 기억하련다. 추억을 통해 또 다른 추억이 자란다. 친구란 그런 것 같다. 3년 만에 만나도 웃을 수 있는, 그리고 그렇게 만나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었다.
새벽 1시경, 마감을 핑계로 컴퓨터 앞에 붙어서 산만하게 노닥거리고 있을 즈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영화를 봤다고 했다. <왓치맨>을 봤다는데 재미없다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질식할 것 같아 내게 구원을 요청했다. 난 물론 흥미롭게 봤다. 재미있었다. 녀석은 좋아했다. 원래 이 친구랑은 말이 잘 통했다. 항상 영화를 같이 보고 나면 긴 대화를 나누곤 했다. 어쩌면 지금 내 삶에 끼친 영향력의 7할 정도는 이 친구 몫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음악을 들었고, 영화를 봤다. 이야기를 했고, 글쓰기에 대한 고무를 가능케 했다. 때때로 이 녀석이 날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며 비아냥거렸다. 반쯤은 농담이고 반쯤은 진담이다. 내가 지금 날 새는 것도 어쩌면 이 녀석 탓이라니까. 하지만 나쁜 의미는 없다.반쯤의 진담보단 농담 쪽으로 좀 더 저울추가 기운다. 여러모로 힘이 되는 녀석이었다. 내 지루한 이야기를 꽤나 재미있게 들어주는 상대라면 내게 있어선 정말 괜찮은 녀석인 거다.
간만에 수화기를 경계로 대화를 나눴다. 광주에 있는 녀석을 만나기란 어렵다. 하긴 내가 절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의 9할 정도는 광주에 있다. 이 녀석도 그 중 하나고. 어쨌든 영화를 보고 나서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대화를 했고, 자연스레 시간이 흘렀다. 대화를 통해 시간을 이겨야 할 사람이 있는 반면, 대화와 함께 시간을 흘려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아무래도 후자가 편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점점 후자의 입장에 있는 상대들과 멀어지고 있다. 사람을 잃는 느낌이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중 대부분과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많지 않다.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인연은 쉽게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옛 친구들과 여전히 연대할 수 있는 것도 그 추억덕분이다. 그 친구들이 보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일 테고. 그저 짧은 통화만으로도 멀어졌던 수많은 기억들이 다시 눈 앞으로 돌아온다는 거. 그거 대단히 즐거운 일이거든.
사람이 그립다. 옛 이야기가 하고 싶다. 나이 먹어간다는 건 이런 건가. 문득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오래된 친구의 전화만으로도 감상에 젖고 옛 기억들을 떠올리며 씁쓸해진다. 시간을 되돌릴 순 없다. 안다. 그저 한번쯤 다시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그 추억 위로 덮인 먼지들을 훅 불어내고 온전한 형체를 멀리서나마 한번쯤 되돌아보고 싶을 뿐이다. 다시 허물어질 언어라 할지라도 잔상은 거기서부터 다시 지속될 것이다. 그 당시보다 많은 시간을 지나왔음에도 그 시절보다 긴 추억을 만들어낸다는 게 어려운 나이이기도 하지 않나. 어른이 된다는 건 더 이상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추억을 쉽게 만들 수 없는 시절로 들어선다는 걸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모르지. 어쩌면 내가 지금 마감을 앞두고 이 문장들 사이로 도피한 것일지도. 어쨌든 다시 마감이나. 일단 지금은 외로움 타령보다도 먹고 살 궁리를 할 시간. 아, 이렇게 적고 나니 진짜 없어 보이네. 나도 그럼 허세라도, 뉴욕 헤럴드 트리뷴!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