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많은 연애 지침서가 존재하는 건 그토록 많은 연애 유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뻔한 문장들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건 그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는 반증이리라. 그건 마치 오래된 잠언처럼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싶은 것뿐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로맨틱 코미디 혹은 멜로처럼 특별한 케이스를 빙자하고 있지만 뻔한 결과론을 담고 있는 게 인지상정. 다양한 커플들의 각기 다른 사연을 버라이어티하게 나열하는 가운데 우연과 필연의 법칙 속에서 엮이고 풀리는 관계를 그려나간다. 주어와 보어의 뉘앙스만으로 감지되듯 남성보단 여성에 대한 편애가 좀 더 강하지만 이는 귀여운 투정처럼 넘어갈만한 문제다. 남성을 여성의 속죄양 취급하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다양한 에피소드가 일관되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건 문제다. 비중 차가 존재하는 각각의 로맨스를 분자 배열한 뒤 충돌시킨 반응의 에너지 값이 생각보다 미약하다. 이름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배우들의 면면보다 나아 보이는 구석이 없다. 사랑에 목매지도 간과하지도 말라는 것, 결론은 누구에게나 뻔한 교훈이다. 중요한 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열되는 로맨스 속엔 상황에 대한 인지가 존재할 뿐 진심을 전달하는데 인색하다. 그저 질문을 던지고 농담으로 받아 치듯 헐겁다.
전직 수영국가대표 출신인 천수(김강우)는 도박판에서 크게 벌어 남은 인생을 휴양처럼 보내려 한다. 하지만 한번의 실수에 꿈은 날아간다. 패 한번 잘못 봤다가 빚더미에 앉아 패가망신할 처지가 된다. 하지만 일말의 기회가 찾아온다. ‘마린보이’가 되는 것. 바다의 왕자가 아니라 마약밀매를 위한 생체보관함이 돼서 바다를 헤엄쳐 건너야 한다. 수장되기 좋은 운명이나 선택의 여지는 없다. <마린보이>는 일방통행이 예상되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다양한 캐릭터로 드라이브를 걸더니 방향표지판을 늘린다. 완벽한 지도를 제시하진 못해도 방향변화에 따른 좌표제시가 적절하다. 진짜 물건인지 뻥카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제공되는 정보 사이로 흐르는 이야기는 은근히 천연덕스럽다. 인물간의 관계에 끊임없이 변화를 주는 복마전이 거듭되며 흥미를 유발하고 이를 빌미로 단순한 플롯에 지구력이 발생한다. 소품을 활용하는 방식도 제법 인상적이다. 대수롭지 않을 것 같던 순간들이 복선처럼 되새김질되며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구성한다. 새로운 발견까지는 아니지만 즐길만한 수위의 기본기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시의 적절한 대사까지 겸비한다. “한국을 떠나고 싶다니, 이 나라 국민이 맞군.”대한민국을 뜨고 싶은 청년의 욕망은 결코 영화만의 사연이 아니다. 찰랑거리는 수면처럼 가볍지만 빠져들만한 매력이 있다.
2009년은 괜찮겠지? 친구가 물었다. 난 답했다. 괜찮지 않아도 살긴 살겠지. 뒷북이지만 한 해가 지났다. 원래 한 해가 지날 땐 지난 해가 찰나처럼 느껴지기 마련인데 참 길었더라. 2008년은 정말 한 해가 길었다. 군대 이후로 이렇게 긴 1년은 처음 느꼈다. 그 분 덕분이다. 덕분에 수명이 길어진 것 같아요. 퍽도 고맙군요. 퍽이나! 어쨌든 한 살을 더 먹었다. 어느덧 스물 여덟, 이십 대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와중이다. 아직은 어리다고 자부하는 와중에도 동갑내기들과의 대화 속에서 늙어감을 느낀다. 벌써부터 노후에 민감한 동갑내기들은 적금에, 펀드에, 보험에, 곳간을 메우기 위해 여기저기 눈을 돌린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고 또 포기한다. 젊었을 때 대비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현재를 밀어내고 내일로 밀려간다. 오늘도 나는 나인데 왜 오늘을 즐길 수 없나. 뿌리깊은 불안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현재에 만족할 수 없고, 미래를 안심할 수 없게 만든다. 살 수 없게 만든다. 그저 살아남을 뿐이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먹고 사는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으로 길들인다. 오늘을 즐겁게 산다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다. 뉘엿뉘엿 저무는 20대의 끝자락에서 낭만이 사치처럼 느껴진다. 역시 로또라도 찍어야 할까나.
막장 오브 막장. 정점을 찍었다. 막장드라마의 인기 속에서도 <아내의 유혹>은 단연 독보적이다. 10%대에서 시작된 시청률은 30%를 넘어 도무지 하늘 높은 줄 모른다. 불륜과 이혼은 물론 살인교사까지 서슴지 않는 드라마 앞에서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절친한 친구가 남편을 유혹하고, 그 남편은 임신한 아내를 바다에 빠뜨려 살해한다. 가까스로 살아난 아내는 복수를 다짐하는데, 그 복수라는 게 그 남편을 유혹하는 일이다. 그것이 이름하여 <아내의 유혹>. 이상한 건 눈가에 점하나 찍은 아내를 그 남편은 못 알아본다. 내 눈이 이상하나. 조만간 친어머니는 딸을 알아보더라. 역시 드라마가 이상하다. 따지고 드니 돌아오는 반응이 차갑다. 그냥 그런 거지. 저 남자가 멍청한 거야! 여기서 더 따지고 들어가면 나만 유치한 놈이 된다. 이건 그저 불구경이거나 싸움구경일 뿐이다. 적어도 내 것이 아닌 바에야 그 좋은 구경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다들 옆집 불구경을 보듯, 싸움구경을 보듯, <아내의 유혹>을 구경한다. 못하는 거 없는 우리 서희는 우리 딸도 아니니 심각할 필요 없다. 찜질방에서, 사무실에서, 호프집에서도, <아내의 유혹>을 씹고 씹는다. 씹기 위해서 보고 듣는다. 다들 유치하다는 거 안다. 하지만 이만한 드라마라도 씹어대지 않고 배길 수 없다. 세상이 지독하게 막장이라 막장드라마라도 질겅질겅 씹는 낙으로 세상 버티는 게 서민들의 낙이다. 어릴 때 불량식품을 괜히 먹었나. 그저 싸고 달아서 먹었지. 사기도 쉽고 먹기도 편한 <아내의 유혹>이 왔다. 모두 하나씩 집어 들고 씹어댄다. 가장 만만한 쾌락에 쉽게 빠져든다. 세상을 등진 채 환각 속에서 분노하고 경멸을 던진다. 시대유감이다.
흉흉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몇 주 동안 가판대에서 보이지 않고 있는 어느 주간지에 대한 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해를 넘기고 신년이 되면 출판될 거란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새해가 밝아도 그 주간지는 보이지 않았다. 주간지가 한 달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중이다. 가히 치명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8주년 기념호를 낸 직후부터였다. '필름2.0'은 그렇게 침전하고 있다. 인쇄 과정의 문제라고 둘러대던 답변도 인쇄 대금의 부족을 고백하는 실정에 이르렀다. 한 시대의 획을 그었다 할만한 영화 전문지 하나가 시장에서 점멸하듯 기울어간다. 물론 아직 스스로 선언하지 않은 끝을 논하기엔 시기상조다. 하지만 시장에서 모습을 감춘 어느 잡지의 끝을 예감하는 소문엔 범상치 않은 기시감이 덧씌워진다. 공공연하게 떠도는 소문 너머로 드리운 그림자는 꽤나 낯익은 것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드라마 전문지를 표방한 '드라마틱'은 지난 해 2월을 끝으로 무기한 휴간을 결정했다. 산소호흡기를 떼지 않았지만 뇌사 진단이 떨어졌다. 미드와 일드의 국내 저변이 넓어지고 국산 드라마의 제작이 활기를 띠는 가운데 드라마 잡지의 가능성에 담보를 잡았다. 영화나 음악과 달리 드라마에 대한 담론이 전무하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시도는 고무적이었다. 독보적인 시장 개척이 가능하다 여겨졌다. '드라마틱'은 격주간 발행으로 시작됐지만 월간 발행으로 궤도를 수정했고 끝내 운행을 멈췄다. 길은 열려있었지만 연료가 부족했다. 수익에 발목을 잡혔다. 컨텐츠에 대한 열의만으로 자본의 무심함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작년 말, 장르문학을 표방하던 '판타스틱'이 휴간됐다. 폐간되는 것 아니냐. 소문이 분분했다. 한 달 동안 자취를 감췄던 잡지가 익월에 출간됐다. 하지만 불운한 소식이 연이어졌다. 일년 열두 달마다 발간되던 잡지의 발행일이 연중 네 번으로 줄었다. 월간지가 계간지가 됐다. 기사회생을 위한 일말의 선택이었다. 소설과 만화가 연재되는 장르잡지가 세 달마다 돌아온다는 건 가혹한 일이다. 척박한 국내장르문화의 토양 속에서 '판타스틱'은 일종의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장르 팬들의 호응도 뜨거웠다. 비주류의 소수감성이 한데 뭉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제는 자본이었다. 광고가 붙지 않았다. 자본은 새로운 문화적 시도에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TV라는 매체비평을 통해 다양하고 획기적인 컨텐츠를 생산하던 '매거진T'도 새로운 움직임의 한 축이었다. 기사마다 차곡차곡 쌓이는 댓글의 양이 독자들의 애정을 확인하게 한다. 어느 포털 사이트마다 밑도 끝도 없이 악랄하게 인신 공격을 퍼붓는 악플러도 보이지 않는다. 순수하게 컨텐츠를 즐기고 의견을 교류하고 매체에 대한 애정을 남긴다. '매거진T'는 현재 버려진 땅처럼 황량해졌다. 더 이상 기사도 댓글도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매거진T'를 채우던 일원들은 새로운 스폰서를 찾았으나 갈등을 빚었고 결국 기존의 집을 버리고 새집을 장만했다. '매거진T'를 버리고 '텐 매거진'을 꾸렸다.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 사이 주인을 잃은 집은 황폐해졌다. 손님을 맞이하는 건 새로운 컨텐츠가 아니라 백신에 감지되는 트로이목마다. 버려진 집기처럼 묵어가는 컨텐츠 사이에서 바이러스가 흉측하게 자리잡고 유저를 급습한다.
'키노'의 폐간은 상징적이었다. 영화 담론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그 뒤로도 몇몇 영화지가 시장을 선도하고 온라인 영화 사이트가 성장했지만 자본의 논리에 예술적 담론이 무너지는 형국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상징적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키노'의 온라인 자매지에 가까운 '엔키노' 역시 '키노'의 폐간 이후 3년이 지나서 사이트가 폐쇄됐다. CJ는 '엔키노'를 인수했지만 컨텐츠를 수급한 뒤 과감히 경영을 포기했다. 거대한 자본을 다스리는 대기업에게 있어서 '엔키노'는 수익 창출에 기여하지 못하는 작은 부서에 불과했다. 문화적인 언어의 존명은 중요치 않았다. '엔키노'의 몰락은 여타 영화 사이트의 어려움을 대변한다. 한때 군소 영화사이트들은 업계의 주목을 받으며 파이를 키웠다. 하지만 거대한 포털사이트들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영화사이트의 파이는 눈에 띄게 줄어갔다. 결국 시장 장악력이 떨어질수록 수익은 악화됐다. 컨텐츠의 질적 하락을 부추겼고 경영 악화로 이어졌다.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은 점차 낡고 고루한 것이 됐다. 오프라인에서 문화적 언어가 남루해지는 사이, 온라인에선 수많은 말들이 찰나를 오간다. 블로그를 장만하며 인터넷에 입주한 개개인은 저마다의 익명을 내걸고 자신만의 사념을 축적한다. 여기저기 발길을 돌리며 부지런히 발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크건 작건 제각각 목소리를 내고 서로 뒤엉켜 굴러가다가도 무심히 지나친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고유의 아이디로 접속한 대중들은 저마다의 주파수를 개설해 자신들의 생각을 송신한다. 저마다 뒤엉킨 생각들이 어지럽게 나열되고 뒤섞인다. 서로 자신의 생각을 트랙백으로 걸고, 링크를 달며, 댓글로 남긴다. 자신의 생각을 알리는데 여념이 없다. 언어의 바다가 형성되는 것 같지만 개개인의 사유화된 생각이 첨탑처럼 솟아오른다. 거대한 논의의 장이 형성되기 보단 개개인의 각축전이 활발하다. 논의보단 주장이 첨예하다.
포털사이트의 메인화면에 종속된 언론은 언어의 가치를 급속하게 몰락시켰다. 정보의 우열보단 속도전이 중요해졌다. 포털사이트가 뉴스를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신문을 펴는 대신 모니터를 켰다. 실시간으로 세상의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다. 정보의 질적 가치는 중요치 않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사람을 현혹시킬 수 있는 언어의 선택이 중요하다. 언어가 가벼워졌다. 짧고 굵은 언어들이 난무한다. 대상에 대한 표피적인 판단이 압도한다. 언론에게 뉴스 공급을 사주하던 포털사이트는 이제 을이 아니라 갑이다. 신문이 시장을 잃어가는 사이 포털사이트는 시장을 독점했다. 남의 안방을 넘보다 자신의 안방을 잃어버린 언론은 머슴살이가 한창이다. 포털사이트가 메인화면에 인심 쓰듯 기사를 올려주면 마냥 고마워해야 할 따름이다.
포털 사이트의 메인화면을 장식하는 뉴스의 팔 할이 연예인에 대한 가십으로 도배됐다. 사람들은 연예인에 대한 왈가왈부에 손가락을 쉽게 허락했다. 재미를 본 언론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값싼 컨텐츠를 쏟아냈다. 질적 우열과 무관하게 동일한 장소에 진열된 정보들의 가치는 일정하게 하향 평준화됐다. 하나같이 그저 그런 정보로 도매금처럼 취급 당했다. 언어의 가치를 스스로 몰락시킨 언론의 자충수는 신뢰의 기반을 잃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단어들이 대세가 됐다. 비평은 말장난처럼 따분해졌다. 날카로운 분석이나 섬세한 비유는 인기스타 사진 한 장 앞에서 무색해졌다. 스크롤의 압박 속에서 텍스트에 대한 인내심은 사라졌다. 그 와중에 개개인의 주장들이 난무한다. 저마다 옳은 소리를 내며 분열해 나간다.
시청률 30%를 넘긴 드라마들은 하나같이 막장 드라마라 불린다. 대중 가요는 아이돌 그룹의 경연장이 됐다.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지만 맥을 짚어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전문가가 보이지 않는다.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의 영토가 상실되니 언어의 주체도 함께 소멸한다. 짧고 자극적인 텍스트에 익숙해진 대중들은 긴 호흡의 언어가 지겹다. 자연히 진지한 논의가 무색해진다. 문화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어려워지는 만큼 문화적 담론을 언어로 생산하는 대중문화저널들이 궁핍해진다. 물속에 산소가 부족하면 금붕어는 뻐끔거린다. 생존을 위한 신호를 보낸다. 대중문화저널의 위기는 대중문화 위기의 신호다.
자본의 논리로 모든 것이 선택되고 수급된다. 자본의 선택에 따라 양산된 컨텐츠는 결국 과도한 팽창으로 이어지고 소멸된다. 돈 되는 댄스 가수 일색으로 무대를 채우던 대중가요가 시장을 잃은 것도 자본에 휘둘린 까닭이다. 대중가요에 대한 언어는 무력했다. 영화도 드라마도 비슷한 양상이다. 예술적 가치가 무마되고 자본의 횡포가 도외시될 때 대중문화는 급격히 퇴보한다. 대중문화에 기생한 저널들이 여기저기서 난립한다. 연예인의 사생활을 보도하고 소문을 퍼뜨리는데 여념이 없다.
창작자가 생산한 컨텐츠에 대한 언어도 일종의 예술이다. 작품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견지되고 새로운 시선을 부여할 때 넓고 깊은 유희가 발생한다. 대중문화저널은 단순히 대중문화를 팔아먹는 장사꾼이 아니다. 대중문화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반자로서 공존할 때 명분이 선다. 오늘날 대중문화저널의 위기는 언어의 가치가 상실되는 가운데 대중문화저널의 존재가치를 망각하는 데서 온다. 대중문화를 씹어 뱉기보다 되새김질하고 곱씹을 때 대중문화저널에 힘이 실린다. 점점 힘이 부친다. 대중문화를 팔아먹는 언어가 진지한 담론을 벼랑으로 밀어내고 있다. 정작 그것이 자신들의 시장을 몰락시키는 하나의 형태가 될 것임을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전기인간(?)의 테러로 비디오 대여점 테이프의 내용물이 모두 지워진다. 빈 깡통처럼 비디오만 남고 영화만 사라졌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가게는 엉망이 되고 종업원은 걱정이 태산이다. 정작 사고의 주범인 친구는 넉살 좋게 말한다. 우리가 다시 채우면 되지. 비디오 대여점이 영화 제작소로 탈바꿈한다. 그들만의 <고스트 버스터즈>가 제작되고 대여되며 비로소 시작된다. ‘친절하게 되감아 달라’는 비디오 대여점의 작은 소망과 무관하게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자신들만의 노하우로 명작들을 되감아버린다. 간과할 수 없는 영화 속 명장면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재해석되고 단편적이지만 유쾌하게 나열된다. 때때로 두서 없는 이야기가 장황하게 덜컹거리지만 그 끝에 건질만한 감동이 우러난다. B급 마인드로 무장한 유희를 빌미로 전설적인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의 삶을 복원하기까지, 그 두서 없는 짝퉁 사연의 말미에 감동의 체온이 느껴진다. 문화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시대에서 자신만의 문화를 찾은 대중의 눈빛이 반짝인다. 대중들이 객석의 소비자로 밀려나버린 시대에서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창작의 공유를 통한 유희적 인간의 복원을 감동적으로 설득한다. 잘 만든 영화라 말할 순 없지만 분명 좋은 영화라 말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비카인드 리와인드>가 그렇다.
문자의 발전에 기여한 건 종이와 활자였다. 궁극적으로 종이와 활자의 발명은 책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책의 출판은 결국 문자의 보급을 의미한다. 언어가 기록되고 유통됐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는 대신 읽었다. 수많은 정보들이 귀가 아닌 눈을 통해 입력되고 입이 아닌 손을 통해 출력됐다. 기독교의 전세계적 확산이 가능했던 것도 문자의 보급 덕분이다.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성서가 출간되고 보급될 수 없었다면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도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언어와 달리 문자의 수명은 길다. 보존이 가능하다. 책은 언어를 축적하는 창고다. 종이로 구성된 칸마다 언어를 차곡차곡 쌓아 넣는다. 강산이 변하는 10년 동안 기록된 언어는 파기되지 않는 이상 변치 않는다. 역사와 문학, 종교, 과학, 모든 언어들이 종이를 타고 시대와 국경을 넘어 전파된다. 언어의 유람은 책을 통해 가능해졌다.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미국 경제학자의 전문서를 대한민국에 앉아서 볼 수 있다. 책은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다. 그 다리가 휘청거리고 있다. 불황의 그림자가 서점가에 드리운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 텍스트가 흔들린다.
출판
출판을 하기 위해선 저자가 필요하다. 출판사와 저자의 접촉은 쌍방향의 형태로 이뤄진다. 저자가 출판사에 접촉하기도 하고, 출판사가 작가에게 글을 의뢰하기도 한다. 작가의 이름값에 출판사가 움직이기도 있다. 기획되는 책의 방향에 따라 작가가 선정되기도 한다. 원고의 수급형태도 다르다. 일정금액을 저자에게 지급하고 원고의 판권을 출판사에서 사들이는 매절이 있고, 책값의 일정 퍼센트(%)를 판매실적만큼 챙겨가는 인세가 있다. 선택에 따른 대가가 다르다. 판매량이 어느 정도 기대되는 작가라면 후자가 유리하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면 돈방석에 앉게 된다.
편집자, 즉 에디터(editor)는 책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출판 배포하는 단계까지 모든 과정에 관여한다. 에디터는 출판사의 자산과 같다. 저자와 출판사를 연결하는 다리이자 책의 기획을 총괄하는 전략가다. 에디터의 역량이 책의 가능성에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텍스트로 채워진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하는 창조적 기획자다. 저자, 즉 라이터(writer)가 1차 생산자라면 에디터는 2차 생산자다. 디자인과 교정과 같은 후반작업을 외주 프리랜서에게 맡겨도 편집자를 내부직원으로 채용하는 건 그런 중요성 때문이다. 에디터는 책의 프로듀서다. 기획부터 인쇄, 납본의 단계까지 에디터가 함께 한다.
불황
최근 한 메이저 출판사는 에디터 전직원을 비정규 계약직으로 전환했다. “다들 황당해 했지만 상황의 어려움을 알기 때문인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시장의 여건을 알기에 목소리를 낼만한 여력이 없었다.”이에 관계된 한 에디터의 말이 시장의 분위기를 전한다. 경제난에 따른 정리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정직원이 아닌 계약직으로 에디터를 고용하는 임프린트 방식은 대형출판사를 중심으로 업계 내의 추세가 되고 있다. 능력적 성과에 따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창의적인 기획의 경쟁을 통해 우월한 컨텐츠를 아웃소싱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정착시켜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셈이다. 일종의 성과급 계약에 가깝다. 고용자라기 보단 하청업체에 가깝다. 갑과 을의 관계다. 에디터 군마다 제작비용을 책정하고, 기획 방향을 건의한다. 책이 출판되기 전에 이미 가격경쟁이 시작되고 시장 상황에 대한 예지력이 요구된다. 시장상황이 악화될수록 기획 경향도 보폭을 줄이기 마련이다. 창조적인 마인드보단 실리적인 시야확보가 요청된다. 가능성 있는 모험보단 안정적인 적응력이 우선시된다. 시장의 위축과 함께 문자의 가능성도 위축된다.
대한민국 서점 1번지라 할 수 있는 교보문고의 발표에 따르면 2003년부터 작년까지 해마다 평균 18%가량씩 증가했던 입고 도서 수가 올해에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전년대비 15.2%가 감소했다. 시중에 출판되는 도서의 수가 현격하게 줄었다. 출판사들은 경제위기와 함께 최대한 몸을 사리는 중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전세계적 경제위기가 심상찮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종이값이 50%가까이 올랐다. 인쇄와 제본에 들어가는 비용도 마찬가지다. 현정권의 고환율 정책이 금융위기를 뒤집어 쓰면서 이례적인 환율 폭등까지 맞이했다. 덕분에 외국작가들에 대한 로열티 부담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소비자 심리마저 위축됐다. 한국출판연구소에서 국내 출판사 188곳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올해 출판업계 매출액은 지난해보다 무려 73% 가까이 감소된 것으로 집계된다. 도서판매량의 감소는 신작의 출간기회를 저하시켰다. 최대한 상업적으로 검증된 컨텐츠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집중적인 마케팅을 펼친다. 극단적인 긴축정책을 펼치는 중이다. 심지어 책 한 권 내지 않는 출판사도 생겼다. 모험을 하기보단 상태유지라도 해야겠다는 심산이다. 책을 찍어내는 자금이라도 최대한 아껴서 시간을 벌고 있다. 집안의 가구를 뜯어다가 불을 때고 있다. 얼어붙은 시장엔 좀처럼 자금이 돌지 않았다. 총알이 부족하니 공격력이 저하될 수 밖에 없다. 자본의 위기가 출판의 위기를 부채질했다. 모회사가 미국에 있는 한 국내 메이저 출판사가 시장에 매물로 나왔지만 매매 의사가 전혀 없어 그냥 방치 중이라는 소문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매년마다 돌림노래처럼 반복됐던 출판의 위기란 말이 더욱 실감난다. 회복될 기미 없이 돌고 돌던 불황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2008년 도서시장은 병세가 최악이었다. 영세한 동네서점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음반 시장이 그랬듯 도서 시장도 다를 게 없다. 이젠 지방 군소 서점들의 차례다. IMF외환위기 당시, 보문당이나 종로서적과 같은 업계 최고를 다투던 거대 도매상과 서점이 도산을 맞이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양상의 차이는 있다. 외환위기 당시의 도산은 업계를 이끌던 거대 도매상의 몰락이 지방까지 확산된 것이라면 현재 경제위기 속에서 지방 도소매상이 어려움을 겪는 건 파이의 문제다. 전자가 도소매 시스템의 오류로 인한 과부하라면 후자는 파이의 상실에 따른 아사에 가깝다. 책이 팔리지 않는데 서점이 버틸 수 없는 노릇이다. 올해 부산의 대형서점 몇 곳이 문을 닫았다. 판매실적은 저하되고 이윤은 그만큼 낮아지는데 유지비는 나날이 오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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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서점은 오래 전부터 시장을 장악해왔다. 유형의 시장이 전전긍긍하는 사이, 무형의 시장이 파이를 확장해왔다. 특히 큰 폭의 할인율을 통한 공격적 방식으로 고객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매년마다 30~40%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출판계의 불황 가운데서도 승전을 거듭했다. 거대한 매장이 필요 없고, 그만큼 인건비의 부담이 덜한 인터넷 서점은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시장을 장악했다. 온라인 시장이 권력을 잡았다. 인터파크나 예스24와 같은 온라인 서점이 도서 마케팅의 새로운 고지가 됐다. 온라인 판매 순위 상위권을 쟁탈하기 위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마케팅 비용의 대부분이 온라인 서점 몇 곳에 책정됐다. 광고가 집중되고 판촉을 위한 이벤트가 동원됐다. 대형할인마트가 경쟁하듯 최저가가격을 통한 견제가 심화됐다.
단행본 판매 시장 규모는 대략 2조 5천억 원 규모로 추정된다. 온라인 서점 상위 5곳의 매출액은 1조원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손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판매성과를 무기로 출판사에 덤핑 요구를 해오기도 한다. 온라인 서점은 하나같이 최저가를 영업의 기치로 내건다. 오프라인에 대한 경쟁력을 상대적인 가격 정책에서 찾았다. 다양한 이벤트도 마련된다. 구입자들에게 추첨을 통해 고액의 경품을 제공한다. 도서의 단가가 내려가고, 이벤트가 활성화될수록 온라인 서점의 파이는 커진다. 하지만 단가의 하락은 출판사의 마진을 떨어뜨렸다. 온라인 소매상이 부유해지는 반면, 저작자와 출판자는 마이너스를 감수한다. 책값 상승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때때로 서슴지 않고 무리한 요구를 해온다. 시장 상황이 아쉽기 때문에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 있다.”한 중견 출판사의 마케터가 말했다. 덫에 걸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온라인 서점은 오프라인의 불황을 견제할만한 대안이었다. 갑을 관계가 역전됐다.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이 책의 흥망을 좌우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시장의 형세가 완연히 달라졌다. 오프라인 시장이 몰락을 거듭하는 사이 온라인 시장은 새로운 대세로 한 축을 차지했다. 비단 온라인 서점뿐만이 아니다. 대형 포털사이트도 공룡이 됐다. 온라인 시장은 단지 판매와 선전을 위한 선택적 방편이 아니라 일차적 포석이 됐다. 마케팅의 포화가 온라인에 집중된다. 대형출판사들은 대규모 자본을 소모하며 책을 판다.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빈도가 많을수록 잘 팔리는 책이 된다. 온라인 서점의 초기화면에서 소개되는 책은 그렇지 못한 책에 비해 판매부수가 뛰었다. 특히 미디어에서 소개되는 책은 삽시간에 판매량이 급증했다. 방송에 출연한 몇몇 작가들의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 상단을 차지했다. 물론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이외수나 황석영은 원래부터 유명한 작가였다. 이미 일정한 판매량이 기대되는 작가였다. 하지만 방송의 여파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외수의 ‘하악하악’은 올해 도서판매량 2위에 올랐다. 이외수는 유명작가에서 완전한 스타로 거듭났다.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역시 방송 이후 베스트셀러 순위가 19위에서 1위로 수직 상승한 뒤 2주간 정상을 지켰다. 작가가 이슈의 중심에 서니 날개 돋친 듯 책이 팔려나갔다.
검증
올해 전체적인 도서 판매량이 감소하는 추세 속에서 한국문학을 위시한 소설의 판매가 늘었다. 지난 몇 년 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점령했던 자기계발서나 재테크 관련서적이 경제불황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빈자리를 메운 건 문학도서와 경제서적이었다. 몇 년간 침체됐던 문학의 선전이 눈에 띈다. 특히 몇몇 작가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넘어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은 책으로 출간되기 전 네이버를 통해 먼저 선보였다. 포털사이트에서 소설이 연재된다. 이미 작년 박범신의 ‘촐라체’를 연재하며 주목 받았던 네이버가 다시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을 예전과 같이 블로그 형식으로 연재했다. 블로그의 방문자 수는 200만 명이 넘었다. 네이버가 블로그 형태로 작가의 개인적인 공간을 마련했다면 다음은 좀 더 적극적인 포지셔닝을 구축했다. ‘문학 속 세상’이라는 섹션을 할애하며 공지영의 ‘도가니’와 이기호의 ‘사과는 잘해요’를 연재 중이다.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들과 협업까지 도모했다. 시인 함민복의 에세이가 준비 중이며 한국대표시인 70명의 시를 연재한다. 그 밖에 교보문고나 예스24같은 온라인 서점의 블로그를 통해 정이현과 박민규, 백영옥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연재되고 있다.
과거에도 하이텔이나 천리안 같은 PC통신에 글을 연재하며 인기를 끌던 작가들의 작품이 책으로 출판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전례는 있었다. 특히 이우혁의 ‘퇴마록’은 PC통신 연재 당시 클릭수가 무려 2억 3천만 번을 넘었을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후에 책으로 출간된 뒤에도 큰 인기가 지속됐다. 하이틴 소설로 10대들의 인기를 얻은 귀여니도 경우는 다르지만 비슷한 케이스다. 이름없는 신진작가들을 배출하고 장르문학과 같은 특수한 분야의 창작력이 빛을 보던 과거와 현재는 양상이 다르다. 최근 온라인 소설에는 기성 문단의 유명 작가들이 포진했다. 본격문학이 인터넷을 통해 연재되고 있다. 마치 과거 일간지 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것과 유사하다. 지면에서 상실된 소설의 영토가 웹에서 복구되고 있다. 소설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소설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 젊은 세대에게 기성문단의 인터넷 연재는 신선한 자극이 됐다. 박범신의 ‘촐라체’나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은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연재된 후, 각각 출판을 거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온라인 연재를 통한 텍스트의 가능성이 검증됐다. 특히 온라인의 연재는 독자와 저자의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하다. 블로그에 연재되고 포털사이트 메인에 전시되면 하루에도 수 만개의 댓글이 달리곤 한다. 반응이 삽시간에 확인된다. ‘개밥바라기별’을 연재한 황석영의 블로그는 방문자수가 2백만 명을 넘겼다. 현재 ‘개밥바라기별’의 판매부수는 35만 부를 돌파했다. 온라인의 인기가 오프라인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랠리포인트가 생겼다. 다음이 발 빠르게 ‘문학 속 세상’이란 섹션을 신설해 작가를 섭외하고 소설을 연재했다. 시장이 검증된 만큼 지체할 이유가 없다. 출판의 위기도 이에 기여했다. 도서시장의 경직은 기성문단의 심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마추어를 위한 기회의 장이 됐던 과거와 달리 프로들의 새로운 영토가 개척됐다. 온라인은 그들에게 약속의 땅이다.
과거 온라인 소설이 검증되지 못한 작가들의 도전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현재 온라인 소설은 검증된 작가들을 모시기 좋은 공간이다. 소설보다도 먼저 작가가 보인다. 익명성에서 비롯된 새로운 얼굴이 발굴될 기회보단 익숙한 얼굴의 안정성이 추구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문학에 대한 관심을 유명작가들의 작품으로부터 발생시킬 수 있다는 긍정적 효과도 존재한다. 문학을 독자에게 소개시킬 수 있는 채널이 늘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대형 작가 몇 명의 성적을 토대로 거대한 성과를 자랑하기는 이르다.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가 가중된다. 일부 작가에게 기회가 편중될 가능성이 짙어진다. 불황 속에서 검증되지 못한 문장에 기회를 부여하기란 쉽지 않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불리하다. 한번이라도 얼굴이나 이름이 팔린 작가일수록 홍보도 쉽다. 문학이 자본과 밀접하게 연동된다. 자본에 의해 텍스트의 가치가 검열당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의 제작이 늘어나는 추세다. 2005년 국내 개정판을 출간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최근 다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개봉한 덕분이다. 새로운 표지가 제작됐다. 영화 포스터가 책 표지에 옮겨졌다.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비롯해 최근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까지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된 작품들도 관심을 얻었다. 원작의 인기가 높을수록 각색된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 상승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올해 개봉했던 영화 <모던보이>의 원작은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인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였다. 이 작품은 영화의 개봉과 함께 영화와 같은 ‘모던보이’란 제목을 달고 재 출간됐다. 영화를 통해 원작소설이 주목 받았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상호작용이 활발하다. 마케팅의 전술도 그에 발맞춰 나아간다. 최근엔 영화나 드라마를 위한 판권으로 팔기 위한 소설을 기획하는 형태도 많아졌다. 맞춤형 문장들이 기회를 노린다.
생존
관심을 얻지 못한 책들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반품되는 추세다. 시장의 악화와 함께 시장 맞춤형 기획이 도모된다. 팔릴만한 기획들만 살아남아 시장으로 나온다. 대형출판사로 자본이 몰리고 거액의 마케팅이 동원되어 베스트셀러가 이뤄진다. 마진이 오르는 만큼 판매부수에 간절해진다. 2008년, 온라인 서점의 성장률은 10%대에 그쳤다. 시장의 불황이 이만큼 극심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례일지도 모르지만 온라인 서점에 몰리던 과열이 누그러진 결과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입고되는 신간의 양이 줄면서 광고와 매출이 동반 감소했다. 그에 따라 베스트셀러와 함께 스테디셀러의 판매에 주력하고 있다. 새로운 활자의 공백을 묵은 활자로 대체하고 있다. 반값으로 세일을 해서라도 마진을 채우려 한다. 팔리지 못한 책들이 헐값에 넘어간다. 유효기간이 지난 물건처럼 텍스트들이 도매금으로 팔려간다.
유명 작가들은 온라인에 글을 게재한 뒤, 오프라인으로 활자를 옮긴다. 텍스트의 고유 공간이 사라진다. 종이가 아닌 모니터로 텍스트를 소비한다. 소설마저 온라인 시장으로 넘어온 마당에 더 이상 문자와 종이는 천생연분이 아니다. 문자는 새로운 동거인을 만났다. 신문과 잡지는 일찌감치 온라인에 주도를 뺏겼다. 실시간으로 정보가 넘쳐나는 온라인에서 활자는 찰나처럼 밀려오고 밀려나간다. 중요성과 상관없이 모든 정보가 천원샵의 물건처럼 동일하게 진열된다. 버라이어티 쇼의 자막들은 웃음을 활성화시킨다. 단순히 상황을 설명하는 첨언이 아니라 상황에 개입해 감정을 양성하는 시각적 효과를 거둔다. 텍스트를 브라운관에 디자인한다. 문자는 더 이상 가지런히 행과 열을 맞춘 문장처럼 차분히 머무르지 않는다. 웃음을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 덕지덕지 붙어서 나열된다.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다. 글을 쓰는 사람은 늘었지만 책의 소비는 줄었다. 문자를 만드는 사람은 많은데 문자를 읽는 사람은 드물다. 찰나를 위한 텍스트들이 쏟아지고 또 사라진다. 영원을 위한 텍스트들이 살아남지 못한다. 인터넷도 언어를 보관한다. 하지만 그 방대한 가상 공간 속엔 안정감이 없다. 언어를 음미할 시간이 부족하다.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다. 책을 읽지 않는 독자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세상이 책을 기피하게 만든다. 마음의 여유가 부족할 수록 책과 멀어진다. 초등학교부터 입시준비에 매달리는 아이들이나 과업과 철야에 시달리는 샐러리맨의 세상에서 텍스트의 간격을 음미하라 권하긴 힘든 노릇이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 책을 권하기란 쉽지 않다. 세상이 각박하다. 사람들의 마음이 차가워진다. 문장의 감성은 다른 세상의 언어 같다. 인터넷 뉴스의 신랄한 악플이 차라리 이 시대의 솔직한 언어가 됐다. 텍스트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거를 시작했지만 정작 사람들은 한 손으로 텍스트를 소비한다. 클릭만 할 뿐,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살아남은 텍스트들이 앙상하게 말라간다. 알게 모르게 위기로 흘러간다. 사람이 살기 힘든 세상에서 텍스트가 살아남기도 힘들다.
<지구가 멈추는 날>은 시대적 패러다임을 반영한다. 50년대 냉전시대의 갈등은 21세기 환경문제로 치환된다. 구작과 신작의 공통분모는 인류다. 인류의 어리석음에 경종을 울리려 한다. 지구를 우리의 것이라 여겼던 인류는 외계인의 전지전능한 능력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지구가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인간이 죽으면 지구는 산다.’의미심장한 멘트까지 등장한다. 경이적이고 파괴적인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징벌적인 이미지는 위협적 설득에 가깝다. 분명 현시대에 유용한 문제의식을 야기한다. 문제는 문장이다. <지구가 멈추는 날>은 흥미로운 주제에 비해 문장력이 떨어진다. 50년대보다 발전한 이미지를 과시할 뿐, 반 세기 이전만도 못한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려는 환경주의적 메시지가 얄팍하다 못해 오만하다. 영화 속 외계인을 설득하는 사연이 되려 객석을 심드렁하게 만든다. 외계인도 알겠다는 변화의 가능성에 수긍이 가지 않는다. 지구가 멈추기 전에 두뇌가 멈추는 기분이다. 이래서야 인간을 변화시키고 지구를 살릴 수 있겠나. 거대한 이미지의 파괴적 협박 뒤에 남는 건 그저 지루한 단상뿐이다.
그 의사는 사랑을 했다. 그 변호사도 사랑을 했다. 그 검사도 사랑을 했고, 그 형사도 사랑을 했다. 모두 다 사랑하리. 직업불문하고 그와 그녀들은 하나같이 이 죽일 놈의 사랑에 빠지곤 했다. 애정이 넘쳤다. 삼각 관계를 공통분모로 두고 희극이냐, 비극이냐, 결론이 도출됐다. 직업은 그냥 액세서리였다. 남녀의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그리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거기에 집안 내력까지 컨설팅 하면 작업 끝.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대한민국 드라마는 언제나 사랑에 목을 맸다. 드라마가 부릅니다. 어화둥둥 내 사랑아.
진짜 의사들이 등장했다. 실체 없이 직함만 건 의사가 아니었다. 수술복을 입고, 메스를 들고, 종양을 적출했다. 그들의 손에 생사가 오갔다. 그들의 흰 가운은 인증용이 아니었다. 레지던트 1년 차 봉달희도, 명인대 부교수 장준혁도, 현장에서 의술을 펼친다. 사람을 살린다. <외과의사 봉달희>, <하얀 거탑>, <뉴하트>. 작년부터 올해 사이, 의사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 세 편이 방영됐다. 저마다 반향을 일으켰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에게 꽂혔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 탐닉했다. 소위 말하는 전문직 드라마가 이런 건가.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외과수술
<외과의사 봉달희>는 한국판 <그레이 아나토미>라 불렸다. <하얀 거탑>은 의학드라마라기 보단 정치드라마란 평이 우세했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받아쓰기란 비아냥을 듣고 시작된 <뉴하트>는 ‘시즌2’가 언급될 정도로 호감을 이끌어냈다. 의학 드라마가 줄줄이 흥행에 성공했다. 장사가 되니 묵힌 아이템도 창고에서 방출됐다. <종합병원2>가 발 빠르게 기획됐다. 무려 14년 전 그 <종합병원>의 후속이란다. ‘시즌2’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있지만 시장상황에 힘입은 재출고나 다름없다. 의사는 브라운관의 새로운 양자가 됐다.
드라마 속 의사들처럼 현실의 의사들도 생명을 관장한다. 오장육부를 재생시키고 복원한다. 드라마에서 수술대에 오르는 환자들은 항상 생존 여부와 직결되는 수술을 받곤 한다. 환자의 여생이 의사의 손이 걸렸다. 수술은 최후의 수단이나 다름없다. 약물치료가 가능한 환자에게 수술을 강행할 이유는 없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의사들은 외과의(surgeon)다. 브라운관의 의사들이 외과의로 가득한 건 이 때문이다. 드라마는 수술실에 따라 들어가 수술장면을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시청자의 흥미를 끈다.
의학 드라마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수술이다. 수술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생명과 직결될만한 위급한 상황이 묘사될 때 긴박감이 커진다. 단지 수술장면이 필요하다면 굳이 흉부외과일 필요는 없다. 사실상 대부분의 종합병원에서 수술빈도가 가장 많은 건 정형외과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정형외과를 비추지 않는다. 정형외과 수술도 뼈와 살이 튄다. 액션이 크다. 그러나 대부분 생명에 지장은 없다. 드라마틱하지 않다. 흉부외과 수술이 드라마에서 팔리는 이유는 여기 있다. 심장이 멈췄어요! 이 정도 멘트는 돼야 값을 쳐준다. 흥분도, 긴장도 최고조로 오른다. 시청률도 오른다. 고로 흉부외과 전문의가 집도한다.
인기를 얻은 세 드라마의 포지셔닝은 외과였다. 그 중 둘은 구체적으로 흉부외과다. 수술실에서 집도가 이뤄지면 화면에 긴장감이 넘쳤다. 인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혈압이 떨어집니다. 맥박도 약해집니다. 수술실에 긴장감이 돈다. 생사가 경각에 달린다. 의사들도, 시청자들도, 동공이 확대된다. 수술실에도, 안방에도, 긴장감이 돈다. 이만한 클라이맥스가 없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믿을 건 의사 손밖에 없다. 산전수전 겪어본 경력자든, 분위기파악 못하는 풋내기든, 환자를 살리고 싶은 표정에 역력하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의사는 인간을 살린다. 피부를 가르고 체내의 환부를 살핀다. 인형의 건전지를 갈아 넣듯 사람을 재생시킨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다. 드라마 속 의사들은 그래서 울고 웃는다. 그들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자기 감정을 표출한다. 시청자를 울리고 웃기고 싶어한다.
수련과 전공
의사가 되려면 총6년간의 학생 신분을 거쳐야 한다. 기초과학부터 모든 과목에 대한 이론과 대략적인 실습을 거친다. 예과 2년과 본과 4년을 지나 졸업시즌이 되면 비로소 국가 의사고시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고시에 합격한 이는 의사자격증을 얻고 비로소 의사로서 개업할 수 있는 일반의 자격을 얻는다. 일반의 자격을 얻은 졸업생들은 대학병원에 지원해 채용되면 5년 간의 임상 수련 과정을 거친다. 모든 과에 대한 짧은 실전을 거치는 인턴 1년과 본격적인 전공 경험을 쌓는 레지던트 4년으로 이뤄진다. 수련의는 학생 신분이 아니다. 의사로서의 경력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수련의 과정이 끝나면 전문의 시험을 치르고 시험에 합격하면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다. 최근엔 의대가 아닌 일반 4년제 대학을 나와도 의사가 될 수 있다. 특별히 요구되는 몇몇 과목을 이수했다면 의료전문대학원에 진학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대부분 의료 선진국에서는 예전부터 시행되던 제도였다.
<슬램덩크>의 가장 큰 묘미는 강백호가 리바운드의 제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아마추어가 프로페셔널로 성장하는 과정은 흥미를 돋운다. 분야를 막론한 모든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진리다. 메디컬 드라마에서 레지던트 수련의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실수를 연발하던 레지던트 초년생이 어엿한 의사로 성장할 때 이만한 드라마가 없다. 게다가 혈기왕성한 어떤 초자들은 때로 기성 의사들에게 반발하곤 한다. 때때로 환자에게 무심해 보이는 선배들에게 순수한 의사 정신을 되묻곤 한다. 시청자의 대부분은 환자다. 환자에게 열성적인 의사의 하극상은 반갑다.
현장의 분위기는 다르다. 대부분의 의사나 간호사는 냉정하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선 오로지 판단이 중요할 따름이다. 살릴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생사와 무관한 환자에겐 당연히 심드렁해질 수밖에 없다. 일종의 자기 방어이기도 하다. 그들은 삶을 위한 존재이기도 하나 항상 죽음을 대면하는 존재다. 개개인의 사연에 감정이입을 한다는 건 스스로 위험해지는 길이다. 드라마에서 환자 개인에게 엄청난 열정을 쏟는 의사나 간호사의 모습도 그들에겐 비현실적이다. 대학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상대하는 환자의 수는 만만찮다. 환자 개개인의 생존여부에 감정을 이입할만한 겨를이 없다. 그 와중에 어느 특정한 환자에게 특별한 애정을 펼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한 환자의 특별한 사연을 한 회 에피소드에 가득 채워 담은 드라마의 습성은 그들이 사는 세상과 동떨어져 보인다. 드라마가 수술을 급박하게 묘사하는 것과 달리 현실의 수술은 위급한 상황조차도 예측범위에 포함된다. 냉랭한 수술실 공기마냥 현실의 그들은 한없이 침착하다. 어떤 긴박한 상황이라도 호들갑이란 수술실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후배는 선배에 대한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흉부외과
<외과의사 봉달희>의 봉달희는 흉부외과 레지던트 1년 차다. <뉴하트>의 남혜석도 흉부외과 레지던트 1년 차다. 흉부외과 레지던트가 벌써 드라마에서만 2명이다. 인턴에서 레지던트로 넘어갈 때 비로소 전공을 선택한다. 과마다 인기가 다르다. 지원자로 넘치는 과와 한산한 과가 나뉜다. 선택은 당연히 성적순이다. 인턴 과정을 포함해 학생 시절부터 국가고시까지의 성적이 반영된다. 최근 2009년도 전기 전공의 원서 마감이 이뤄졌다. 결과 전국 63개 대형병원에서 76명의 흉부외과 전공의를 선발하기로 했다. 지원자는 18명이었다. 경쟁이 무의미해졌다. 지원자가 있다는 게 감지덕지하다. 경쟁률이 0.23대 1 수준이다. 흉부외과는 기피 대상 1호다. 현실은 드라마틱하지 않다.
<뉴하트>에서 레지던트 1년 차 남혜석은 흉부외과에 지원한다. 병원장인 아버지는 그런 딸을 말린다. 병원장 아버지가 레지던트 수련의 생활을 앞둔 딸의 흉부외과 지원을 만류하는 건 괜한 걱정이 아니다. 실상 드라마도 흉부외과의 열악한 현실을 반영한다. 현재 전공의 모집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끄는 과는 정신과, 피부과, 성형외과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술에 들이는 노력에 비해 수익의 발생이 크다. 그 반대로 흉부외과, 산부인과, 일반외과는 기피대상이다. 일은 힘들고 수익률은 낮다. 흉부외과는 최악이다. 심장 수술엔 고난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 수술 시간도 장시간이 소요된다. 10시간은 보통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로하다.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돈벌이가 가장 어려운 전공이다. 수술 빈도가 높을수록 병원은 돈을 번다. 한 번 수술에 긴 시간을 소비하는 심장 수술을 하루에 여러 번 하기란 힘들다. 병원 입장에서는 돈 안 되는 사업이다.
의사입장에서도 돈 안 되는 장기다. 흉부외과 의사는 개업의가 되기 힘들다. 개인병원은 심근경색이나 폐암 수술을 할만한 여건을 갖추기 어렵다. 종종 개업하는 흉부외과 의사도 있다. 하지만 흉부외과 의사로서가 아니다. 일반외과에서 다루는 하지정맥류 같은 시술을 전담한다. 4년간의 레지던트 과정이 무기력해진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건 유일하게 수술실이 있는 대학병원에 남는 길이다. 특별한 뜻을 품고 있지 않은 이상 흉부외과에 지원하는 수련의는 찾기 힘들다. 어느 종합병원은 흉부외과 의사가 3명이지만 정작 수련의는 1명뿐이다. 보통 흉부외과에서 심근경색이나 심장 판막술과 같은 심장 수술에 필요한 인원은 최소 12명 가량이다. 레지던트를 포함한 의사 4~5명이 매달려야 한다. 전문의가 시술한다 해도 서포트할 전공의가 없다. 그 공백을 간호사와 응급구조사가 메우고 있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공의의 잔업마저 전문의들이 떠맡게 된다. 흉부외과는 수술 후 경과를 지켜보는 것도 중요하다. 환자의 의식이 돌아오기까지의 과정도 수술의 연장이다. 흉부외과는 생명과 직결되는 수술을 한다. 다른 병과와 달리 수술 후까지 환자의 생명이 유지되는가가 중요하다. 환자의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심장이 제 기능을 유지하는지 살펴야 한다. 수술뿐만 아니라 수술 후 경과를 살필 인원이 없다. 수술 이외에도 의사의 몫이 가중된다. 당직근무의 연속이다. 휴식은 고사하고 잠도 부족하다.
괴로운 건 의사뿐만이 아니다. 흉부외과 수술은 팀워크가 중요하다. 사소한 손놀림으로 환자의 심장이 영원히 정지할 수 있다. 손발이 맞는 인력으로 수술팀이 구성된다. 대부분의 수술실 간호사는 로테이션을 통해 모든 병과의 수술을 익힌다. 하지만 흉부외과는 대부분 전담 간호사를 둔다. 특정 인원을 스페셜리스트로 육성한다. 장기간 호흡을 맞춘다. 덕분에 퇴근 후에도 흉부외과 응급 수술이 발생하면 ‘콜’을 받고 달려와야 한다. 사생활을 가질 시간조차 없다. 오버타임 근무는 일상다반사다. 견디기 힘들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간호사들은 당연히 흉부외과에서 근무하길 기피한다. 공공의 적이 따로 없다. 다른 과의 간호사들은 업무가 비면 순환이 자유로운 것과 달리 흉부외과는 고정적인 인원끼리 수술에 매달려야 한다. 전공의의 충원이 없는 이상 잔존 인원끼리 버텨야 한다. 경력에서도 큰 도움을 얻지 못한다. 흉부외과의 고단한 업무를 벗어나려면 흉부외과 수술실을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로컬 병원에서는 흉부외과의 특별한 경험보단 보편적인 내과나 외과의 경험을 높게 산다. 사면초가다.
흉부외과는 생명과 직결되는 수술을 한다. 의학이 사람을 살리는 인술이라 정의한다면 흉부외과야말로 그에 가장 근접한 의료행위를 펼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심장을 다루는 건 비단 흉부외과뿐만이 아니다. 순환기 내과도 심장을 다룬다. 하지만 내과는 수술과 무관하다. 그들은 수술복을 입지도, 메스를 들지도 않는다. 순환기 내과에서 치유되지 못한 환자는 결국 수술하게 될 공산이 크다. 흉부외과는 최후의 보루다.
신념과 현실
<뉴하트>의 흉부외과 전문의 최강국은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신념이 강한 의사다. 권력과 재물보다도 의사로서의 신념이 뛰어나다. 그런 그의 신념을 시청자는 우러러본다. 현실에서 흉부외과 의사는 고단하다. 알아주는 이도 드물다. 심장질환 환자는 해마다 느는 추세다. 10년 사이 세배가 급증했다. 전체적인 흉부외과 수술량은 두 배나 늘었다. 그 10년 동안 한해 배출되는 흉부외과 의사의 수는 절반 이하로 줄었다. 수술은 느는데 의사는 줄고 있다. 기이한 일이다. 아이러니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흉부외과는 늪에 빠졌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흉부외과 전문의 프레스톤 버크는 자부심이 대단한 엘리트다. 미국을 비롯한 의료 선진국은 대한민국과 형편이 다르다. 흉부외과에 지원하는 수련의가 차고 넘친다. 진료수가나 보수가 상대적으로 높고 부가적인 보험 혜택도 누린다.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의 생명을 가장 가깝게 좌우하는 병과이기 때문이다. 위험한 수술을 할수록 그만한 대우가 따른다. 생명이 걸린 수술분야는 정부가 집중적으로 지원한다. 흉부외과 지원자가 줄을 선다. 미국을 비롯한 의료 선진국은 흉부외과 의사를 최고로 대우한다.
한국에서 흉부외과 지원율이 낮은 이유도 명확하다. 근무 환경에 비해 대우가 열악하다. 수술이 없는 과일수록 인기가 좋다. 외과 분야는 철저한 외면대상이다. 대가 없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은 드물다. 심장판막증 수술에 10시간 매달려봤자 IPL피부시술 1시간만 못하다. 생명에 직결된 수술보다도 미용을 위한 시술이 대우받는다. 부가가치가 창출된다. 수련의가 몰린다. 1년에 두 번씩 열리는 정기 학회에서 흉부외과의 초라함이 드러난다. 새로 참여한 레지던트가 손에 꼽을 정도다. 박수를 치고 환영하지만 속은 씁쓸하다. 미래가 어둡다. 그들마저도 중도 포기자가 되곤 한다. 미달되는 정원만큼 개인에게 과다한 업무가 부여된다. 몸도 마음도 고달프니 일찍 포기하는 게 낫다. 악순환이 따로 없다.
보건복지가족부는 정책적 대안을 발표했다. 내년부터 전공의 지원율이 바닥을 치고 있는 외과, 산부인과, 흉부외과 등에 인센티브가 지급된다. 내년 상반기부터 난이도가 큰 흉부외과나 외과 수술에 대한 진료수가를 추가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언 발에 오줌을 눴다. 여전히 춥고 배고프다. 진료수가를 1~2% 올려주는 것으론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처우 자체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상태는 더욱 악화된다. 급성 심근경색증 심장수술엔 총 10명 가량의 인원이 참여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200만원 남짓으로 진료비를 책정했다. 인건비도 건지기 힘들다. 현장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정부의 무능함이 적나라하다.
흉부외과 수술은 수술 중의 꽃이라 불린다. 자동차로 치면 엔진을 만지는 것과 같다. 심장을 만지는 만큼 정교하고 세밀한 기술이 필요하다. 최고의 요원이 필요한 분야다. 그만큼 자부심이 대단하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안중근이 그랬고, <뉴하트>의 최강국이 그렇다. 뛰어난 실력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자부심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 실제적인 보상이 필요하다. 열정으로 넘어가기엔 산세가 험하다.
한 흉부외과 교수는 말했다. “이대로라면 10년 뒤엔 흉부외과 의사를 수입해서 심장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몰라요. 의료 선진국 의사는 비싸서 힘드니 상대적으로 싼 동남아 의사들을 데려오겠죠.”그럼 10년 뒤 드라마 속 흉부외과 의사도 동남아 출신 배우가 연기할까. 드라마가 비현실인지, 현실이 비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먹고 사는 게 중요한 시대다. 사람보다도 돈이 우선이다. 무능한 정부는 대책이 없고, 의사들은 열악한 길보단 좀 더 편한 길을 찾았을 뿐이다. 덕분에 10년 뒤엔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인에게 심장을 맡기게 될지 모를 일이다.
성형시대
‘교육 관련 기관의 정보 공개에 대한 특례법’이 발의됐다. 이에 따라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 1일부터 대학정보공시 자료를 공개했다. 자료에 따르면 전국 의과대학 연간 등록금 평균은 860만원이 넘는다. 국공립 대학을 제외한 사립대는 대부분 천 만원 대를 넘거나 그에 육박한다. 의사를 한 명 키우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목돈 들여 의대를 보내는 건 대부분의 의사가 고소득직이기 때문이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 본질보다도 목적이 앞선다. 최근 카이스트(KAIST) 졸업생 중 의료전문대학원으로 진학하는 이들이 늘었다. 의사는 여전히 선호되는 직업이다. 이공계의 서러움이 강한 대한민국에서 엘리트들은 의대로 모인다. 의대의 엘리트들이 흉부외과를 지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필요한 곳에 사람이 없다. 의지만으로 버티기 힘든 세상이다.
귀가 없이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다. 귓바퀴가 뭉치거나 귓구멍 자체가 막혀버린 소이증 때문이다. 수술을 한다면 정상적인 모양을 찾을 수 있다. 아무리 이상하게 생긴 귀도 3번에 걸친 성형수술이면 정상적인 모양을 찾을 수 있다. 압구정에만 나가도 건물마다 성형외과 병원이 들어서있다. 정작 수술이 가능한 의사는 별로 없다. 성형외과 의사들 대부분은 미용성형에 관심이 많다. 돈벌이가 되는 까닭이다. 압구정이나 강남의 성형외과는 병원이 아니다. 미용실이나 다름없다. 머리를 자르듯 턱을 깎거나 코를 세우는 손님이 가득하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부도난 회사의 주식처럼 휴지가 됐다.
의사도 직업이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하지만 저마다 직업윤리가 있다. 미용사가 머리를 깎는다. 의사도 턱을 깎는다. 의사는 미용사가 아니다. 물론 예쁜 얼굴로 자신감을 찾았다는 이의 사연은 나름 쓸만하다. 하지만 정작 근원적인 고통을 치유하지 못하는 의학의 용도가 의심스럽다. 식칼로 연필을 깎았다. 정작 무도 자르지 못한다. ‘의술은 인술이다.’묵은 말이 됐다. 개념은 변했다. 의술은 산술이고, 조형미술이다. 계산하고 치장하기 위한 기술이 됐다. 선생님은 어디 가고 사장님만 보인다. 환자는 없고 손님이 즐비하다.
의사와 자본
영국 사회적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루크 필즈의 19세기 작품 ‘의사’는 병든 아이를 지켜보는 의사의 모습을 사실적인 화폭에 담았다. 그림 속 19세기 의사는 죽어가는 아이를 보며 고뇌한다. 오늘날 21세기라면 그 아이를 살릴 수 있었을까. 21세기 대한민국 의사들은 생명보단 자본을 다룬다. 돈 없이 병원 가봤어요? 안 가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드세요. 아버지가 돈이 없다면 아이는 죽을 운명이다. 의사는 고뇌라도 할까. 유전무병 무전유병. 이래저래 아픈 사람만 서럽다.
어느 설문조사에서 의사들을 대상으로 드라마 속 ‘비호감 의사 캐릭터’를 조사했다. 20대의 과반수가 ‘지나치게 희생과 봉사를 실천하는 의사’를 꼽았다. 젊은 의사들에게 희생과 봉사라는 개념은 낯설다. 조기교육의 효과다. 이미 기성세대는 많은 것을 몸소 실천했다. 의학도 산업으로 변질시켰다. 동네 슈퍼마켓이 사라지고 대형 할인마켓이 들어서듯 흉부외과가 지고 성형외과가 떴다. 헌신적인 의사들은 브라운관을 누빈다. 현실의 의사들은 비현실적이라 비웃는다. 시청자들만 감동한다. 그건 현실이 아니다. 현실적이지 않아서 감동한다.
드라마는 허구다. 흉부외과 의사의 비장한 결의도 결국 허구다.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흉부외과의 비장함은 현실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생명을 구하겠다는 의사는 코흘리개들의 의사놀이에서나 찾아야 하나. 요즘 아이들도 그런 촌스런 놀이보단 피와 살이 튀는 살벌한 게임에 익숙할까.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도 죽이는 게 익숙한 시대다. 애나 어른이나 하나처럼 삭막하다. 심장도 돈으로 사면 된다. 가난한 이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거짓말 같은 드라마라도 바라보며 대리 만족하던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여전히 말한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압구정에 즐비한 성형외과 간판이 조소하듯 불을 밝힌다.
롱숏에 담아낸 풍경들이 저마다 장관이다. 인물 너머에 펼쳐지는 풍경들도 좋은 밑그림이다. 그저 카메라에 잡기만 해도 그림이 되는 풍경들로 가득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의심할 여지없이 호주를 위한 영화다. 게다가 호주가 낳은 세계적인 배우 니콜 키드만과 휴 잭맨까지 출연한다. 바즈 루어만은 <오스트레일리아>를 사랑과 전쟁, 인간과 자연을 아로새기는 거대한 대서사로 기획했다. 특히 과거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얻었던 호주의 수난사를 위로하고자 한다. 특히 노예로 착취된 혼혈2세들, 일명 ‘빼앗긴 세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하지만 성찰보단 호강에 가깝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스토리는 초호화 브로드웨이 뮤지컬처럼 스토리는 안이하다. 넓은 평원과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활공하는 카메라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하다. 방만한 이야기에 방대한 이미지가 산만하게 흘러 넘친다. 저마다 제 빛을 내느라 응집될 겨를이 없다. 호주의 절경도, 배우들의 열연도, 방만한 서사도, 거대한 규모도, 하나같이 서로를 배려하지 못한다. 많은 것들이 보이긴 하지만 정작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게 없다. 그저 거대한 전시관을 보고 나온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