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많은 연애 지침서가 존재하는 건 그토록 많은 연애 유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뻔한 문장들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건 그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는 반증이리라. 그건 마치 오래된 잠언처럼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싶은 것뿐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로맨틱 코미디 혹은 멜로처럼 특별한 케이스를 빙자하고 있지만 뻔한 결과론을 담고 있는 게 인지상정. 다양한 커플들의 각기 다른 사연을 버라이어티하게 나열하는 가운데 우연과 필연의 법칙 속에서 엮이고 풀리는 관계를 그려나간다. 주어와 보어의 뉘앙스만으로 감지되듯 남성보단 여성에 대한 편애가 좀 더 강하지만 이는 귀여운 투정처럼 넘어갈만한 문제다. 남성을 여성의 속죄양 취급하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다양한 에피소드가 일관되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건 문제다. 비중 차가 존재하는 각각의 로맨스를 분자 배열한 뒤 충돌시킨 반응의 에너지 값이 생각보다 미약하다. 이름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배우들의 면면보다 나아 보이는 구석이 없다. 사랑에 목매지도 간과하지도 말라는 것, 결론은 누구에게나 뻔한 교훈이다. 중요한 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열되는 로맨스 속엔 상황에 대한 인지가 존재할 뿐 진심을 전달하는데 인색하다. 그저 질문을 던지고 농담으로 받아 치듯 헐겁다.

 

(프리미어 'MOVIE 4人4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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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보이> 단평

cinemania 2009. 1. 26. 20:01

전직 수영국가대표 출신인 천수(강우)는 도박판에서 크게 벌어 남은 인생을 휴양처럼 보내려 한다. 하지만 한번의 실수에 꿈은 날아간다. 패 한번 잘못 봤다가 빚더미에 앉아 패가망신할 처지가 된다. 하지만 일말의 기회가 찾아온다. 마린보이가 되는 것. 바다의 왕자가 아니라 마약밀매를 위한 생체보관함이 돼서 바다를 헤엄쳐 건너야 한다. 수장되기 좋은 운명이나 선택의 여지는 없다. <마린보이>는 일방통행이 예상되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다양한 캐릭터로 드라이브를 걸더니 방향표지판을 늘린다. 완벽한 지도를 제시하진 못해도 방향변화에 따른 좌표제시가 적절하다. 진짜 물건인지 뻥카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제공되는 정보 사이로 흐르는 이야기는 은근히 천연덕스럽다. 인물간의 관계에 끊임없이 변화를 주는 복마전이 거듭되며 흥미를 유발하고 이를 빌미로 단순한 플롯에 지구력이 발생한다. 소품을 활용하는 방식도 제법 인상적이다. 대수롭지 않을 것 같던 순간들이 복선처럼 되새김질되며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구성한다. 새로운 발견까지는 아니지만 즐길만한 수위의 기본기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시의 적절한 대사까지 겸비한다. 한국을 떠나고 싶다니, 이 나라 국민이 맞군. 대한민국을 뜨고 싶은 청년의 욕망은 결코 영화만의 사연이 아니다. 찰랑거리는 수면처럼 가볍지만 빠져들만한 매력이 있다.

 

(프리미어 'MOVIE 4人4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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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인생

도화지 2009. 1. 26. 19:50

2009년은 괜찮겠지? 친구가 물었다. 난 답했다. 괜찮지 않아도 살긴 살겠지. 뒷북이지만 한 해가 지났다. 원래 한 해가 지날 땐 지난 해가 찰나처럼 느껴지기 마련인데 참 길었더라. 2008년은 정말 한 해가 길었다. 군대 이후로 이렇게 긴 1년은 처음 느꼈다. 그 분 덕분이다. 덕분에 수명이 길어진 것 같아요. 퍽도 고맙군요. 퍽이나! 어쨌든 한 살을 더 먹었다. 어느덧 스물 여덟, 이십 대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와중이다. 아직은 어리다고 자부하는 와중에도 동갑내기들과의 대화 속에서 늙어감을 느낀다. 벌써부터 노후에 민감한 동갑내기들은 적금에, 펀드에, 보험에, 곳간을 메우기 위해 여기저기 눈을 돌린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고 또 포기한다. 젊었을 때 대비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현재를 밀어내고 내일로 밀려간다. 오늘도 나는 나인데 왜 오늘을 즐길 수 없나. 뿌리깊은 불안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현재에 만족할 수 없고, 미래를 안심할 수 없게 만든다. 살 수 없게 만든다. 그저 살아남을 뿐이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먹고 사는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으로 길들인다. 오늘을 즐겁게 산다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다. 뉘엿뉘엿 저무는 20대의 끝자락에서 낭만이 사치처럼 느껴진다. 역시 로또라도 찍어야 할까나.

 

(프리미어 'SIDE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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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유혹

도화지 2009. 1. 25. 13:25

막장 오브 막장. 정점을 찍었다. 막장드라마의 인기 속에서도 <아내의 유혹>은 단연 독보적이다. 10%대에서 시작된 시청률은 30%를 넘어 도무지 하늘 높은 줄 모른다. 불륜과 이혼은 물론 살인교사까지 서슴지 않는 드라마 앞에서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절친한 친구가 남편을 유혹하고, 그 남편은 임신한 아내를 바다에 빠뜨려 살해한다. 가까스로 살아난 아내는 복수를 다짐하는데, 그 복수라는 게 그 남편을 유혹하는 일이다. 그것이 이름하여 <아내의 유혹>. 이상한 건 눈가에 점하나 찍은 아내를 그 남편은 못 알아본다. 내 눈이 이상하나. 조만간 친어머니는 딸을 알아보더라. 역시 드라마가 이상하다. 따지고 드니 돌아오는 반응이 차갑다. 그냥 그런 거지. 저 남자가 멍청한 거야! 여기서 더 따지고 들어가면 나만 유치한 놈이 된다. 이건 그저 불구경이거나 싸움구경일 뿐이다. 적어도 내 것이 아닌 바에야 그 좋은 구경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다들 옆집 불구경을 보듯, 싸움구경을 보듯, <아내의 유혹>을 구경한다. 못하는 거 없는 우리 서희는 우리 딸도 아니니 심각할 필요 없다. 찜질방에서, 사무실에서, 호프집에서도, <아내의 유혹>을 씹고 씹는다. 씹기 위해서 보고 듣는다. 다들 유치하다는 거 안다. 하지만 이만한 드라마라도 씹어대지 않고 배길 수 없다. 세상이 지독하게 막장이라 막장드라마라도 질겅질겅 씹는 낙으로 세상 버티는 게 서민들의 낙이다. 어릴 때 불량식품을 괜히 먹었나. 그저 싸고 달아서 먹었지. 사기도 쉽고 먹기도 편한 <아내의 유혹>이 왔다. 모두 하나씩 집어 들고 씹어댄다. 가장 만만한 쾌락에 쉽게 빠져든다. 세상을 등진 채 환각 속에서 분노하고 경멸을 던진다. 시대유감이다.

 

(프리미어 FRANKLY SPE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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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인간(?)의 테러로 비디오 대여점 테이프의 내용물이 모두 지워진다. 빈 깡통처럼 비디오만 남고 영화만 사라졌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가게는 엉망이 되고 종업원은 걱정이 태산이다. 정작 사고의 주범인 친구는 넉살 좋게 말한다. 우리가 다시 채우면 되지. 비디오 대여점이 영화 제작소로 탈바꿈한다. 그들만의 <고스트 버스터즈>가 제작되고 대여되며 비로소 시작된다. 친절하게 되감아 달라는 비디오 대여점의 작은 소망과 무관하게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자신들만의 노하우로 명작들을 되감아버린다. 간과할 수 없는 영화 속 명장면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재해석되고 단편적이지만 유쾌하게 나열된다. 때때로 두서 없는 이야기가 장황하게 덜컹거리지만 그 끝에 건질만한 감동이 우러난다. B급 마인드로 무장한 유희를 빌미로 전설적인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의 삶을 복원하기까지, 그 두서 없는 짝퉁 사연의 말미에 감동의 체온이 느껴진다. 문화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시대에서 자신만의 문화를 찾은 대중의 눈빛이 반짝인다. 대중들이 객석의 소비자로 밀려나버린 시대에서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창작의 공유를 통한 유희적 인간의 복원을 감동적으로 설득한다. 잘 만든 영화라 말할 순 없지만 분명 좋은 영화라 말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비카인드 리와인드>가 그렇다.

 

(프리미어 Movie 4人4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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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위기

culturist 2008. 12. 30.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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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멈추는 날>은 시대적 패러다임을 반영한다. 50년대 냉전시대의 갈등은 21세기 환경문제로 치환된다. 구작과 신작의 공통분모는 인류다. 인류의 어리석음에 경종을 울리려 한다. 지구를 우리의 것이라 여겼던 인류는 외계인의 전지전능한 능력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지구가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인간이 죽으면 지구는 산다. 의미심장한 멘트까지 등장한다. 경이적이고 파괴적인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징벌적인 이미지는 위협적 설득에 가깝다. 분명 현시대에 유용한 문제의식을 야기한다. 문제는 문장이다. <지구가 멈추는 날>은 흥미로운 주제에 비해 문장력이 떨어진다. 50년대보다 발전한 이미지를 과시할 뿐, 반 세기 이전만도 못한 이야기를 한다.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려는 환경주의적 메시지가 얄팍하다 못해 오만하다. 영화 속 외계인을 설득하는 사연이 되려 객석을 심드렁하게 만든다. 외계인도 알겠다는 변화의 가능성에 수긍이 가지 않는다. 지구가 멈추기 전에 두뇌가 멈추는 기분이다. 이래서야 인간을 변화시키고 지구를 살릴 수 있겠나. 거대한 이미지의 파괴적 협박 뒤에 남는 건 그저 지루한 단상뿐이다.

 

(프리미어 'Movie 4人4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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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s

culturist 2008. 12. 11.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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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숏에 담아낸 풍경들이 저마다 장관이다. 인물 너머에 펼쳐지는 풍경들도 좋은 밑그림이다. 그저 카메라에 잡기만 해도 그림이 되는 풍경들로 가득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의심할 여지없이 호주를 위한 영화다. 게다가 호주가 낳은 세계적인 배우 니콜 키드만과 휴 잭맨까지 출연한다. 바즈 루어만은 <오스트레일리아>를 사랑과 전쟁, 인간과 자연을 아로새기는 거대한 대서사로 기획했다. 특히 과거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얻었던 호주의 수난사를 위로하고자 한다. 특히 노예로 착취된 혼혈2세들, 일명 빼앗긴 세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하지만 성찰보단 호강에 가깝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스토리는 초호화 브로드웨이 뮤지컬처럼 스토리는 안이하다. 넓은 평원과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활공하는 카메라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하다. 방만한 이야기에 방대한 이미지가 산만하게 흘러 넘친다. 저마다 제 빛을 내느라 응집될 겨를이 없다. 호주의 절경도, 배우들의 열연도, 방만한 서사도, 거대한 규모도, 하나같이 서로를 배려하지 못한다. 많은 것들이 보이긴 하지만 정작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게 없다. 그저 거대한 전시관을 보고 나온 기분이다.

 

(프리미어 'Movie 4人4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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