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라는 명목으로 며칠째 전화기만 붙잡고 있다.
방송국에, 신문사에, 교수에, 변호사에, 경찰까지, 기자란 이름으로 전화를 걸어 응답을 요청하기를 수십번씩 반복한다. 전화교환원이라도 된 심정이지만 이래저래 사람들과 연결되고 물음과 막힘의 반복 속에서 어떤 테두리를 그려나간다. 모든 이들이 호의적인 건 아니지만 그 와중에도 상황이 한걸음씩 진전되는 걸 보면 나름 고무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니다.
선배는 그랬다. 기자는 자기 생각을 말하는 직업이 아니야. 네가 보고 들은 걸 적고 써봐. 넌 분명 그걸 할 수 있는데 하지 않고 있어. 뜨끔했다. 난 항상 내 생각을 썼지. 누군가의 말을 주워담아 기록해본 기억이 별로 없거든.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자신이 없었다. 선배는 내가 그럴 수 있다고 했지만 난 솔직히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지녀본 적이 없다. 아이템을 제시하면서도 가능성 앞에 머뭇거린 건 그런 자신감의 결핍 덕분이었다. 과연 어떻게, 내가? 이런 불안에 휩싸이면 쓸 수 있는 글도, 접근할 수 있는 주제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왜 이래, 아마추어 같이. 하지만 난 아직 아마추어다. 네 꿈이 기자냐, 평론가냐. 과거에 얻었던 이 질문이 여전히 뜨끔한 건 괜한 게 아니다.
기자란 타이틀을 달고 살아간다는 건 그 이름의 권위보다도 그 이름의 책임을 깨닫고 살아야 하는 일 같다. 그 알 권리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가 알고 싶어하는 일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가 꼭 알아야 할 정보를 채취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길 듣는 중이다. 내가 과연 좋은 글을 쓸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확신은 어렵다. 하지만 좋을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은 넘친다.
그 좋은 글이란, 분명 내가 아는 것을 넘어 나조차도 알아야 할 사실을 전달하는 글이어야 한다. 많이 듣고, 많이 보며 살아야 겠다. 선배 말처럼, 굴러봐야 안다. 그런 것 같다. 아직 난 애송이다. 어리고 어리다. 이런 내가 뭘 알겠나. 그러니 난 좀 더 열심히 살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