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이다. 문득 잊고 살다가도 그 날이 오면 되새길 수 밖에 없는 그런 날이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 부모님을 따라 내려간 광주에서 초, 중, 고를 졸업했다. 덕분에 5.18에 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건 일종의 한이었고, 넋두리였다. 하지만 그 넋두리에는 해소될 수 있는 굴뚝이 없었다. 5.18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어르신들 입은 좀처럼 흩어지지 못하는 연기 냄새로 매캐했다. 그 실체를 목격한 건 중학교 시절이었다. 유치원, 여중, 남중, 여고, 남고, 전문대까지,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꽤나 커다란 학원에 속해 있었고 우리는 종종 350원짜리 육개장 컵라면과 150원짜리 자판기 음료수를 사먹기 위해서 대학교 매점을 드나들었다. 어느 날과 같이 대학교 매점을 드나 들다 벽에 붙은 작은 사진들을 본 건 5월 18일이었다. 그 뒤로 일주일 정도는 그 매점에 가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일그러진 얼굴들, 아니, 그러니까 그건 얼굴이 아니었다. 그냥 한때 얼굴이었던 것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뭉개진 핏덩이가 한때 감정을 담아내던 그것이었으리라는 추측만이 가능한, 그런 것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로 모자이크처럼 붙어서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을 나는 살 떨리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 글쎄. 사람을 탱크로 밀어버렸다니까!” 어느 할아버지가 하던 말씀이 어쩌면 허풍이 아닐 것이라는 신의가 솟아날 정도로, 놀라운 광경들이 내 눈 앞에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5.18에 관해서 인식하기 시작한 건 그 이후부터였다. 직접적으로 겪어보지 못한 내게도 그것은 일종의 울분이며 한이 됐다.
어린 시절 매년 5월 즈음이면 광주 곳곳에서는 최루탄이 터졌다. 충장로나 금남로 시내에서 터진 최루탄 냄새가 조금 멀리 떨어진 우리 아파트까지 닿기도 했다.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서 불편하지 않은 지경이 돼서 후에 그런 광경들이 생활로부터 멀어진 이후에는 되레 생소하기도 하였다. 광주를 떠나서 서울로 다시 올라왔을 무렵에 5.18에 관한 국가적 인식은 조금 변한 듯 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진실은 요원하기만 했다. 때때로 무지한 언변을 뱉어내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건 그들을 탓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이야기가 지금 여기서는 배추도사나 무도사가 들려준다던 그 전래동화들보다도 생소하다는 사실이었다. 기념일이 되지 못할 정도의 그런 역사가 있다는 것 정도, 그것이 5.18에 관한 팔 할의 인식이었다.
개념이 없다는 말에는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개념을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개념을 가르쳤음에도 개념을 세우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 후자는 절망적이나 전자는 희망적이다. 난 여전히 5.18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시간이다. 강물과 같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덩어리진 역사들은 쉼 없이 뒤로 밀려나간다. 우리는 거듭 기억될만한 역사들을 건져서 오늘로 안치시킨다. 5.18도 그 중 하나여야 한다. 5월 18일이 아픈 날이 아니라, 기념할만한 역사가 되길 원한다. 전라도의 빨갱이 폭도들이 설쳐대던 날이라는 부지깽이 같은 언어에 휘둘리지 않는 역사관이 자리잡길 원한다. 29만원 짜리 화수분 통장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살인마가 전직 예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세상을 원래 그런 것이라며 웃어넘길지, 자유를 갈망하며 총을 들고 폭력적인 군부의 진압에 맞서 죽어나간 이들의 생이 있었던 어제를 지나 그저 오늘을 사뿐히 즈려밟고 살아가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인지, 그리고 어떤 것조차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채 그저 살아간다는 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5월 18일이 또 한번 지나가고 있다.